동명의 前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김수남(1943)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 검찰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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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1대 검찰총장 김수남 金秀南 | Kim Soo-nam | |
<colbgcolor=#1e4a71><colcolor=#fff> 출생 | 1959년 12월 29일 ([age(1959-12-29)]세) |
경상북도 대구시 (現 대구광역시) | |
현직 |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
재임기간 | 제41대 검찰총장 |
2015년 12월 2일 ~ 2017년 5월 12일 | |
배우자 | 조은숙 |
자녀 | 2녀 |
학력 | 청구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
병역 | 병역면제 (근시) |
경력 |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제16기 사법연수원 수료 대구지방법원 판사 대구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부장검사 광주지방검찰청 공안부장검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3과장 서울지방검찰청 형사4부장검사 법무부 정책홍보관리관 인천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제3차장검사 법무부 기획조정실장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장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검사장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제41대 검찰총장 (박근혜 정부) 김수남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화천대유자산관리 고문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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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제41대 검찰총장을 역임했다.2. 생애
1959년 12월 2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기택은 영남대학교의 총장을 지냈고[1] 2007년에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총장의 부친은 1988년 당시 학교 비리와 관련해 재단과 갈등을 빚다 사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사장은 박근혜. 결국 김수남 본인이 직접 검찰총장이 되고 박근혜를 감옥으로 보내버렸다. 또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원장을 역임한 김흥남 박사가 친형이다.대구 청구고등학교(12회)를 졸업했다.[2] 그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해[3]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87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16기. 김현웅 전 법무부장관과는 사법연수원 동기다.
처음엔 대구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했지만 3년 뒤에 검찰로 옮겼다. 법무부 검찰3과 검사, 광주지방검찰청 공안부장검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3과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4부장, 법무부 정책홍보관리관, 인천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등을 거쳐, 2008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검사로 임명되었다.
인천지검 2차장 시절에는 삼성그룹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서 특별수사본부 수사진에 합류해서 공보관을 맡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검사 시절이던 2009년 1월에는 미네르바 사건을 맡아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애초에 처벌규정을 찾기가 어려운 사건이었으나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인터넷을 통한 허위사실유포금지) 위반 혐의로 엮어 미네르바를 구속기소했다. 이때부터 MB정부에서 가장 신임 받는 검사로 꼽히기 시작했으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결국 전기통신기본법 해당 규정의 문제점이 드러나 그 규정은 결국 2010년 12월 28일 위헌법률규정으로 심판되었다.
그 후 2009년에 법무부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요직으로 직행하면서 검사장으로 승진했으며 연이어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4]으로 영전하였다. 그 후에도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장,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검사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었다. 이 때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를 총지휘했는데, 테러준비의 정황증거를 잡아내는 등 치밀한 수사를 해서 이석기를 구속기소하는 데 성공햇으며 이례적으로 검사장인 그가 직접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RO사건에 대한 기초수사가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이석기는 내란음모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내란선동죄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게 되었고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국회의원직도 박탈되었다. 이로써 MB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의 눈에도 들게 되었다.
그에 힘입어 2013년 12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5]으로 영전하였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시절에는 우병우 민정비서관과 협력하여 정윤회 문건 유출 수사를 지휘했다. 이때 우병우가 김기춘 비서실장의 눈에 들어 민정수석으로 승진했던 것처럼, 김수남 역시 김기춘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출신지 역시 대구여서 이때부터 이변이 없는 한 차기 검찰총장 1순위로 유력시되었다.#
결국 예상대로 2015년 2월 대검찰청 차장을 거쳐,[6] 2015년 12월에 제41대 검찰총장으로 내정되었다.
이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30일 성명을 내어 “미네르바 사건과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 등 정권의 입맛에 따른 청부수사를 한 김 후보자는 검찰 독립성 수호의 적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는 앞서 김 후보자를 포함한 4명의 검찰총장 후보 명단이 발표된 뒤, “후보 가운데 김수남 차장만큼은 검찰 권한을 오·남용한 인물로 아예 후보군에 오르지도 말았어야 한다”는 독한 논평을 내놨다.
또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시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현 정권의 입맛에 맞게 ‘깔끔하게’ 처리했다는 평을 받은 점도 도마에 올랐다.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수사에서 정윤회씨의 비선개입 의혹은 제쳐두고 문건 유출 건에만 집중했고, 노무현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사건에서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 권력 실세들을 무혐의 처리했다는 이유로 강하게 비판을 받았으나 검찰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검찰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별수사보부를 꾸리고 우병우 전 수석의 직권남용 혐의 등에 관한 수사를 할 때에는 우병우의 절친인 윤갑근을 특수팀장으로 임명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외에 2016년 8월 16일 MBC가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의 우병우 수석 감찰 기밀 누설 의혹을 보도했을 때, 밤늦게 우병우와 17분가량 통화했다는 사실이 박영수 특검에 의해 2017년 3월 확인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2016년 7월부터 10월까지 우병우 수석과 20여 차례 통화했으며, 그중 김수남 총장이 우병우 전 수석에게 전화를 건 횟수도 6차례나 된다는 사실이 파악되었다.# 실제로 2016년 8월~12월 우병우에 대한 수사를 지휘할 때에는 '보여주기식 수사'를 했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서는 처음의 미온적인 자세와는 달리 점점 기대 이상의 적극적 수사지휘를 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다가 2017년 5월 9일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2017년 5월 11일 조국 민정수석이 임명되자 사의를 표명하였다.[7]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2일 사표가 수리되었다. 이로써 검찰총장 임기제 도입 이후 임기를 채우지 못한 13번째 총장이 되었다.
5월 15일 이임식을 열고 27년 검사 생활을 마감하였다. 사임하면서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잔인하다"는 말을 남겼다.
여담으로, 2015년 말 취임식과 2017년 5월 15일의 이임식에서 똑같은 주황색 넥타이를 착용했다. 개인적으로 임기를 끝까지 못 채운 것에 대해 아쉬움이 꽤 남았던 듯.
3.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2014년 11월 말에 불거진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재직하면서 '정윤회 문건' 사건을 처리하였다. 당시 검찰은 정윤회 문건 내용의 사실여부 등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하였으나 문건 내용을 사실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검찰총장이 된 뒤 #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이것이 사실로 드러난 상황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눈치보기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의혹과 '비선실세' 최순실의 사유화 의혹이 점점 사실로 밝혀지는 와중에도 특수부가 아닌 형사 8부에 사건을 배당하고, 줄곧 참고인 조사만 하다 대국민사과가 나온 다음 날인 26일 오전 두 재단과 최순실 씨·차은택 씨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8] 사실상 수사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다. 그래서 여론은 대한민국 검찰청과 김수남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자라며 쌀쌀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상황. ##2
3.1. 박근혜 구속
법불아귀(法不阿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검찰수사 공소장에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죄를 포함시키는 초강경책을 김수남 총장이 주장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수사결과 발표 후 최재경 민정수석과 김현웅 법무부 장관이 사퇴한 것은 검찰과 청와대 사이에서 수사의 방향 및 강도를 조율하는 임무에 대하여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사실상 검찰이 청와대의 통제를 벗어났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상황을 맞이한 청와대가 그의 거취를 어떤 방향으로 정할 것인지에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수사결과 발표 후 박근혜 대통령이 민정수석과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총장을 자르라고 지시했다가 이에 두 사람이 사퇴했다는 의혹이 언론에 돌고 있다.#
2017년 3월 27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동안의 다수의 증거가 수집됐지만 피의자가 대부분의 범죄 혐의에 대해 부인하는 등 향후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상존한다"는 것이 주된 근거. 이로써 그는 대한민국 헌정역사상 최초로 자신을 임명한 사람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검찰총장이 되었다. 풍문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을 수사하던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에게 사안의 처리에 대해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9] 워낙 중한 사안이다보니 본인으로서도 검찰이라는 조직을 최대한으로 보호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으며, 3월 31일 오전 3시 5분에 최종적으로 박근혜의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4. 문재인 정부 이후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로스쿨 한국법연구소 객원교수로 1년간 재직하였으며 대한민국 검찰의 부패척결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2019년 8월에 변호사 개업신고를 하고 김수남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가 되었으며, 2020년 7월 법무법인 태평양의 고문변호사로 합류했다.[10]
이후 법무법인 태평양의 조세범죄수사대응팀에 참여했다.#
5. 사건사고 및 논란
5.1. 화천대유자산관리
2021년 그가 화천대유자산관리의 고문직을 맡았는데, 화천대유가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이 터지면서 그 또한 그 논란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거기에 국민의힘에서는 그가 50억 클럽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5.2.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
"검사장이 봐주라 했다"‥정영학 녹취록 입수
"검사장이 전화했다더라"‥김만배 검찰 간부 통해 수사무마?
정영학 녹취록 전문은 대장동-사건-검찰-증거자료-정영학-녹취록-1.pdf, 대장동-사건-검찰-증거자료-정영학-녹취록-2.pdf, 대장동-사건-검찰-증거자료-정영학-녹취록-3.pdf, 대장동-사건-검찰-증거자료-정영학-녹취록-4.pdf, 대장동-사건-검찰-증거자료-정영학-녹취록-5.pdf 참고.
이 외에도 유동규는 유재일 유튜브와 정진상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참석해 김수남과 이재명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과거 청소업체 수주 의혹과 그 업체가 통진당과 연관된 상태였기에 수사가 이뤄질 상황이었으나, 당시 김만배를 통해 이재명을 수사대상에서 제외시켰으며, 이 후에 이른바 50억 클럽에 들어갔음을 폭로했다.#
5.3. 50억 클럽
[1]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재직했던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영남대 총장을 지냈다. 기사참조[2] 그의 검찰총장 재직기에 경찰청장을 역임한 강신명은 그의 청구고 4년 후배이다. 검경의 수장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 맡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두 사람이 사석에서도 만날 정도로 아는 사이기 때문에 청와대에선 그를 검찰 수장에 올리면 안 된다는 의견도 일부 나왔다고 한다. 이외에도 권영진 대구광역시장이 그의 2년 후배다. 솔로몬의 선택으로 유명한 김병준 변호사가 3년후배이고 홍준표 캠프 상황실장인 안효대 전 국회의원이 무려 4년 선배이다. 참고로 안효대는 모교 총동문회장도 맡고 있다.[3] 이 시기 유시민 작가와 법대 친구를 한다리 걸쳐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자취방에 자주 들락날락거리면서 마이티치고 놀았다고...[4] 지방검찰청 검사장은 줄여서 지검장이라고 한다.[5] 서울중앙지검장은 전국의 지검장 가운데 유일하게 고검장(고등검찰청 검사장)급이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다시 검사장급으로 환원됐다.[6]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된 박성제 검사도 김수남과 마찬가지로 TK 출신이었기 때문에, 김진태 검찰총장이 TK 출신 2명에게 포위된 형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7] 원래부터 대선 이후 사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8] 사건이 배당된 지 무려 21일 만에 이뤄진 '늑장' 압수수색이었던 데다가 해당 압수수색은 언론홍보였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9] 참고로 임채진 전 총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여부를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는 바람에 노 전 대통령에게 매우 심한 정신적 부담감을 주었고 이는 노 전 대통령의 극단적인 선택을 초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임했다.[10] 황교안 전 총리가 퇴임 후 몸담았던 로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