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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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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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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논란이 있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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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금 모으기 운동 · 노사정위원회 출범 · 금속노조 출범 · 김훈 중위 사건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김영삼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김영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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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3990> 제6공화국
문민정부
文民政府 | Civilian Government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rowcolor=#ffffff> 출범 이전 이후
노태우 정부 국민의 정부
대통령 김영삼 ,/ 제14대,
국무총리 황인성 ,/ 제25대 (~1993.12.16.),
이회창 ,/ 제26대 (1993.12.17.~1994.4.21.),
이영덕 ,/ 제27대 (1994.4.30.~1994.12.16.),
이홍구 ,/ 제28대 (1994.12.17.~1995.12.17.),
이수성 ,/ 제29대 (1995.12.18.~1997.3.4.),
고건 ,/ 제30대 (1997.3.5.~),
여당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5.12.6.),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12.6.~1997.11.7.),
파일:김영삼 취임식 사진.png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취임 선서
1. 개요2. 슬로건/국정지표3. 임기 중의 일들
3.1.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
4. 평가
4.1. 사건·사고와 실책
5. 국정지지율
5.1. 한국갤럽
6. 주요 사건7. 인사8. 관련 문헌
8.1. 도서8.2. 연재물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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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민정부 또는 김영삼 정부는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이 이끌었던 정부이다. 제6공화국 2기 정부로 1993년 2월 25일 출범해 1998년 2월 24일까지 5년 간 존속하였다.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집권 정부 중 하나다.

1992년 12월 18일 당시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과 대권 경쟁을 벌인 끝에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93년 2월 25일 서울특별시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청렴과 민생을 중시하며 국가 안보에도 힘쓰는 정부를 표방하며 임기를 시작하였다.

문민정부에서 문민의 뜻은 '일반 국민'으로, 과거 박정희-전두환-노태우[1] 약 32년 간[2] 이어진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에 의한 정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1987년 개헌 이후 첫 직선 대통령은 노태우였지만, 민간인 출신이 이끄는 진정한 민주정부는 자신이 처음이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점에서 문민정부라는 명칭에 대해 다소 오해가 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본인의 정부를 문민정부라 부른 것은 '군사정부가 아닌 문민정부'라는 점을 강조하는 차원이지, 문민정부를 김영삼 정부의 공식 명칭으로 명명한 것은 아니다. 사실 김영삼 정부 이후의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정부도 모두 문민정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워낙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 불렀던데다가, 후임 김대중 정부가 아예 스스로 국민의 정부라 명명하면서 문민정부가 김영삼 정부의 공식 명칭인 것처럼 굳어졌다.[3]

내부적으로는 군사 정권, 외부적으로는 미 · 소 냉전의 종식 이후 출범한 문민정부는 대한민국의 1990년대를 상징하는 정부로 기억된다.[4] 이 시기는 전두환 정부 후기 3저 호황부터 이어져온 한국 경제의 황금기였고,[5] 사회 자유화 물결 속에서 X세대와 같은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세대나 대중문화가 조명받기 시작한 시기였기도 했다. 그러나 임기 내내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 대형 참사들이 끊이지 않아 사회적으로 안전불감증 문제가 불거졌으며, 특히 1997년 임기 종료를 3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IMF 외환 위기가 발생해 고도성장기의 종말을 고했고, 눈부신 경제 성장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사회 시스템의 빈약함 등 대한민국 사회의 어두운 면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2. 슬로건/국정지표

3. 임기 중의 일들

임기 첫해인 1993년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여[6] 정치자금 등 검은 돈이 거래되지 못하도록 하고 금융권에 새로운 방식을 불어넣었다. 또한 대통령을 비롯해 모든 정부 각료들의 재산내역을 전면 공개하였으며, 정치자금 및 뇌물을 일체 받지 않겠다고 표방하였다. 또한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하여 공직자들의 윤리적인 행동 강화와 부정부패 척결[7] 그리고 기강 바로잡기 등을 통해서 임기 초부터 공무개혁을 표방하였다.

또한 '역사바로세우기'를 실시하여, 이전 정부(특히 5공 ~ 6공)에 가려져 있었던 정치사 및 과거사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2.12 군사반란, 5.18에 대해 전면 재조사하고 하나회 숙청을 단행했으며, 그동안 광주광역시 주관으로 열렸던 5.18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격상시켜서 국가보훈처로 이관하는 등 과거사 청산에 힘썼다. 또한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정치 자금, 군사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법정에 세웠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대한 과거사 청산도 병행하여 1995년 2월에는 정부 차원에서 쇠말뚝을 대대적으로 뽑아냈고, 1995년 8월 15일 경복궁에 남아있던 조선총독부 본청을 철거하였고 경복궁 복원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0.26 사건이 있었던 궁정동 안가를 철거하여 시민공원으로 개조하였다. 또한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전면 개방하여 국민들이 이 일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하였다. 더불어 국민학교국민학생초등학교초등학생으로 개칭하고,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부군면 통폐합의 잔재였던 도농(시군)분리 행정구역들을 통합하여 도농통합시들을 출범시키는 등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데에도 힘썼다.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지방자치제도 본격 시행되었다.

또한 정부기구를 일부 축소 및 통합하여 기존의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고 건설부와 교통부를 건설교통부로 통합하였으며 체신부정보통신부로 개칭하여 정보통신 분야의 지위를 격상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1993년 의약 분업을 처음 입안했는데 숱한 논란을 거쳐 다음 정부인 김대중 정부에서 본격 시행된다.(2000년)

국제대회 분야에서는 1993 대전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997년에 열렸던 19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1996년에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일본과 공동유치하는 데에도 성공하였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유치에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고, 이듬해인 1996년에 OECD 가입에도 성공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ys_clinton.jpg
제 22차 한미정상회담
외교적으로는 한미동맹을 강화하여 미국과의 외교안보적 혈맹관계를 이어나갔으나, 1994년에 북한 핵 문제로 전운이 감도는 긴박한 상황에서 오히려 엇박자가 나는 등 다소 혼선이 있기도 했었다. 대한민국은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입장인데 반해 미국은 영변 폭격을 시작으로 전쟁에 돌입할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또한 임기 첫 해부터 1994년까지 우루과이라운드 체결 움직임과 쌀 시장 개방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1993년 빌 클린턴 방한 반대 시위 등이 열릴 정도로 NL 운동권 세력과 농민들 사이에서 안 좋게 보기도 했고, 1995년 충무로역 난동 사건, 춘천 택시기사 폭행 사건 등 주한미군 범죄가 이슈화되면서 SOFA 개정 문제가 국민들 사이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아예 대놓고 안 좋았다. 광복 50주년 + 수교 30주년을 맞은 1995년 와타나베 전 외상, 시마무라 요시노부 문부상 등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과거사 및 위안부 관련 망언이 줄줄 나왔고, 심지어 김영삼 본인이 한중정상회담 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한다는 강경한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내뱉었을 정도로 한일 관계가 험했다. 다만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총리에 오른 무라야마 도미이치광복절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를 내놓으면서 어찌 회복되었다.[8] 그러나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자민당 내각 수립 후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다시 안 좋아졌다.

대북 정책의 경우, 출범 직후에는 남북 대화에 비중을 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지가 이전 정권에 비해 명확했으며[9], 먼저 그는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인사 한완상통일부총리에 임명하고 비전향 장기수였던 리인모를 전격적으로 북한에 송환시키는 등의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1992년 미국의 북핵문제 제기와 한미 팀스피릿 훈련 재개로 이미 경색된 남북갈등은 몇 달 뒤, NPT 탈퇴에 이은 1994년 3월서울불바다 발언[10] 등이 연달아 터지면서 사실상 대북 강경책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다가 1년 뒤 1994년 6월 지미 카터의 방북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김일성의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하면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지만,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김정일이 사실상 권력을 승계하면서 북한전쟁론 불사 등의 강경 일변도로 나오면서 결국 경색관계만이 남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96년에는 강원도 강릉시무장공비침투하는 바람에 대북경협까지 동결되어 관계가 더 나빠졌다. 다만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 전역이 개판이었던 것을 어느 정도 돕는다는 명분으로 쌀을 지원한다거나[11]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는 등의 제한적인 대북 지원은 있었다.[12] 범민족대회나 범청학련 통일대축전과 같은 민간 교류도 활발하게 일어나려는 듯 했으나, 정부는 안보상의 문제점을 우려하여 이를 철저히 통제했다. 이러한 기조는 김대중이 집권하기 전인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문민정부는 역대 정부 중에서 사형 집행이 가장 활발했던 정부이기도 하다. 이름도 유명한 지존파온보현 등이 이 시기에 처형됐다. 굉장히 사형이 활발히 이루어져서 김수환 추기경이 사형 집행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지만 바로 다음날에 사형수가 이미 많다는 이유로 23명을 한꺼번에 사형에 처했는데 제4공화국 때인 1976년 27명을 사형 집행한 이래로 가장 많은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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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세 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13] 결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이틀 후인 1997년 12월 20일 당시 대통령 당선인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 대통합 명분에 따른 요청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수락하면서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 복권되었다.[14]

당시엔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추진하고 전두환·노태우 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 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두환·노태우 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15]

그러나 5공 시절 간첩조작으로 복역된 김성만, 양동화, 강용주, 함주명, 그리고 노태우 때 구속된 서경원 전 의원, 박노해, 백태웅 등 장기복역 시국사범(양심수)들의 석방이 불발되었다.

3.1.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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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 연설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 원칙으로 무력포기와 상호존중, 신뢰구축 그리고 상호 협력을 제시했다. 또 이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를 위해 북한에 경제 전반을 회생시킬 수 있는 민족개발 공동계획을 남북대화를 통해 추진하자고 말했다.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는 북한이 변화의 길로 나온다면 얼마든지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고 북한 당국의 호응을 촉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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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타파, 하나회 해체, 군부출신 퇴출, 금융실명제 추진, 역사바로세우기, 공직자 재산공개와 같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적폐청산과 정치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만 이와 반대로 정경유착으로 인해 발생한 한보사태와 이에 대한 차남 김현철의 연루, 그리고 1997년 외환 위기를 불러온 정부라는 점[16]문민정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 요인이다. 때문에 문민정부는 호평과 혹평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정부이기도 하다. 실제 문민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해 호평을 받은 집권 초반에는 83%[17]라는 매우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인기를 구사했지만 1994년 이후 지지도가 점점 떨어져 한보 사태, 김현철 구속, IMF 사태가 연이어 터진 집권 말기에는 지지율이 한 자릿수인 6%까지 추락했다.

1993년 세계 경제력 12위, 1995년 세계 경제력 11위를 처음 기록했으며,[18]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돌파[19][20]OECD 가입[21], IMF로부터 선진국으로 분류[22] 등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하고[23]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한 시기였다. 전두환 정권의 1980년대 만큼 이 정권 시기인 90년대도 많은 사람들이 향수를 느끼고[24]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25]로 상징되는 풍성한 문화적 성장이 있던 시기였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까지 김영삼 정부의 경제성적표는 굉장히 좋았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비해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되었고[26] 연평균 7.10%의 고성장을 이룩하면서도 물가상승률 연평균 4.98%였기때문에 그만큼 여유가 넘쳤던 것이었다.[27] 그러나 경상수지와 외채 관리에 실패한 결과로 1997년 외환 위기가 찾아왔고 그래서 이런 경제적 성과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다.

하지만 2015년 11월 22일 사망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IMF의 원인을 온전히 김영삼의 잘못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었고,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해체[28], 역사 바로 세우기 같은 긍정적 업적들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대통령이었다는 평가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뭐 그렇다고 전임 대통령 지지도 조사에서 크게 높게 나오지는 않지만[29] IMF 외환위기 하나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어서 근래들어 나름대로 재평가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1. 사건·사고와 실책

임기 중 유독 대형사고가 많은 편이다. 1993년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인천/부천 세무비리사건,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굵직한 사건사고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사고 공화국" 이라는 오명을 낳았다. 임기 중반 이후부터는 대형사고는 많이 사라졌으며, 임기 초반부에 나타난 대형 사고들은 이전부터 축적되어 온 정경유착에 따른 부실, 졸속 허가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 자율화된 언론과 민주화된 사회 분위기가 만나 그 동안 철저히 은폐되었던 대한민국 경제의 고속 성장의 부작용이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었다.

한편 위와 같은 대형사건이 벌어졌을 당시에도 상부는 즉각 은폐하기에 급급했고, 관료제는 복지부동으로 일관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이를 통제하지 못해 국가행정 전반의 난맥상 및 마비현상이 벌어졌다. 이에 결정적으로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의 비리와 한보그룹의 정경유착이 밝혀지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고, 집권 초반 국내 사회 시스템 개혁에 주목했던 반면 집권 후반기에는 외교/경제부문 개방에 집중적으로 주력했다.

인사 면에서도 논란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다. 발표 전까지 철저히 보안을 중시하며 장관을 뽑아왔으나 이 과정에서 능력/도덕성 면에서 함량 미달자들도 나오다 보니 문제만 생기면 일단 갈아치우는 식으로 인사를 꾸렸다. 1998년 동아일보 연재물 <비화 문민정부> 7회에 따르면 개각만 총 25회, 총리 6명, 경제부총리 7명, 통일부총리 6명, 장관 118명이 각각 나왔으며 장관 임기는 평균 13.3개월, 차관 14.9개월, 청장 16.8개월꼴이고 장관은 노태우 때의 12.6개월보다 좀 길었다. 문민정부 시기 5년 내내 공보처장관을 했던 오인환을 제외해도 평균 11.3개월밖에 안 되었다.# 이런 잦은 개각이 경제정책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반에는 부경권(PK) 출신 인사들의 권력 독점 논란도 생겼다.# 2005년 중앙인사위원회의 '역대정부 정무직 지역균형지수 분석결과'에 따르면 41이었다.#

1997년에는 정경유착 등 그동안 한국 사회에 축적되어온 경제시스템의 문제로[30]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되면서 결국 경제면에서 실패한 정부라는 오명과 단점을 안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 선거 당시 영남 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에 등을 업고 출범한 정부라는 점 때문에 영남 지역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은 반면 김대중을 지지하는 호남지역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다만 임기 초반에 하나회 척결이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지지율이 90%대를 넘나드던 시절에는 호남에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다. 이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호남에서도 지지율이 70~80%대에 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면서 호남에서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과 야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호남에서의 혹평이 많아졌고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과 갈등도 이 때 들어서도 이어나가게 되었으며 대통령 김영삼 자신도 김대중과 갈등을 빚으며 사이가 멀어지고 나빠지는 아이러니까지 보였다.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입니다. #
다만, 김영삼 본인이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였던지라 호남 지역의 울분이 서려있었던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 대해서만큼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취임 직후인 1993년 5월 13일 전격적으로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진상 규명을 다짐했으며 특히 담화의 첫 부분은 당시까지만 해도 대놓고 발표하기 힘든 수준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신한국당과 문민정부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전두환 사면을 추진하여 논란을 빚었다.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추진하고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두환, 노태우 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31]

5. 국정지지율

5.1. 한국갤럽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김영삼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
한국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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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득표율
제14대 대통령 선거
42.0%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3년 2월-1993년 5월
71%
7%
1993년 5월-1993년 8월
83%
4%
1993년 8월-1993년 11월
83%
6%
1993년 11월-1994년 2월
59%
18%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김영삼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주간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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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4년 2월-1994년 5월
55%
24%
1994년 5월-1994년 8월
55%
21%
1994년 8월-1994년 11월
44%
25%
1994년 11월-1995년 2월
36%
33%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김영삼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주간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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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5년 2월-1995년 5월
37%
34%
1995년 5월-1995년 8월
28%
41%
1995년 8월-1995년 11월
29%
45%
1995년 11월-1996년 2월
32%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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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6년 2월-1996년 5월
41%
33%
1996년 5월-1996년 8월
41%
37%
1996년 8월-1996년 11월
34%
40%
1996년 11월-1997년 2월
28%
47%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김영삼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주간집계 결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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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7년 2월-1997년 5월
14%
65%
1997년 5월-1997년 8월
7%
74%
1997년 8월-1997년 11월
8%
78%
1997년 11월-1998년 2월
6%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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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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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요 사건

사건/사고의 경우 굵은 글씨로 표기

6.1. 1993년

6.2. 1994년

6.3. 1995년

6.4. 1996년

6.5. 1997년

6.6. 1998년

7.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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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헌

8.1. 도서

8.2. 연재물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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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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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김영삼
집권정부 문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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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임기간이 매우 짧았던 최규하는 제외. 다만 최규하도 결국 군사 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유신체제 하에서 대통령에 올랐으므로 김영삼이 강조한 문민정부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2] 정확히는 31년 9개월 7일(11607일)이다.[3] 이는 전임 노태우 정부를 지칭하는 6공이라는 표현도 비슷하다. 엄밀히 말하면 노태우 정부 이후 현재까지 모든 정부가 제6공화국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 시기에 3공 · 4공=박정희 정부, 5공=전두환 정부, 6공=노태우 정부로 쓰이다 보니, 6공 또는 제6공화국은 지금까지도 노태우 정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굳어졌다.[4] 이는 동시기 빌 클린턴 행정부미국의 1990년대를 상징하는 정부로 평가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문민정부와 클린턴 행정부는 같은 1993년에 출범했다.[5] 이미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긴 1994년부터 대한민국 경제는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6] 하나회를 숙청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의 개혁적인 태도는 집권 초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높게 만들어 주었다.[7] 임기 초반 점심 식사를 국수로, 골프 안 치기 등의 조처를 내놓았고, 집권 첫날 청와대 집무실 내부 모퉁이에 있는 금고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견하고 어이없다 생각하여 기중기를 동원하여 금고를 떼어내라 지시했다고 한다.[8] 그러나 두 달 후 무라야마 전 총리도 한일합방은 국제적으로 유효하다며 망언했다가 11월 한일정상회담 때 결국 사과했다.[9] 김일성 전 주석에게 말합니다. 김일성 전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에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10] 박영수 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국장이 개성시에서의 회담 도중 여기서 서울특별시가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라는 발언을 했다. 사실 그 뒤에 이 회담에서 우리가 심사 숙고를 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한걸보면 저게 전쟁 위협이라기보다는 엄포 정도로 해석할 여지도 있으나, 남북 대치 상황하에서 서울특별시가 불바다가 된다는 망언을 한 것은 명백히 전쟁 선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박영수의 망언 직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북한이 도발할 경우 통일의 기회로 삼겠다는 강경한 발언을 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 뒤로 한동안 북한 대표단에서 빠졌다. 김일성조차 박영수의 망언이 도가 지나쳤다고 했을 정도였다. # 다만 박영수 본인은 1998년에 열린 남북 해외학자 통일회의에서 해당 발언에 대해 "남북간에 전쟁이 터지면 북한은 물론이요 서울도 똑같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해명을 남겼고 이는 앞서 언급한 것과 유사하다.[11] 물론 쌀이 남아돌게 된 현실과 우루과이 라운드로 농산물 수입에 나서게 되면서 수매가를 유지하는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12] 물론 이후의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 비하면 매우 적은 규모였다. 사실 의외로 탈북자에 대한 지원이 가장 적었던 정부가 김영삼 정부였다. 이유인 즉슨 김영삼 이전의 정부에서는 체제선전용으로 탈북자들을 홍보용으로 써먹는 경우가 많았고[39], 김대중 정부 이후로는 생계비 지원에 초점을 맞추면서 지원을 늘렸는데 김영삼 정부에서는 더 이상 체제선전용으로 써먹기에도 애매해졌고, 그렇다고 생계비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리기에는 북한붕괴론이라는 이슈가 있으니 어쩡쩡하게 대처한것이 있었다. 물론 의도적인것은 아니지만 대충 그랬다.[13] 위키백과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전두환·노태우 사면 공약 대결 논란[14] 전두환 노태우 사면 결정 정부[15]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16] 외환 위기를 김영삼 정부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식하고도 종금사를 24개나 인허가해주면서도 관리에는 소홀했던 것은 큰 실책으로 꼽힌다.[17] 한때 90%를 넘겼던 적도 있었다. #[18] 세계 경제력 15위는 이미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부터 기록했다.[19] 1994년. 이때 한국의 1인당 GDP는 선진국의 마지노선격인 세계 평균의 2배도 넘기고 전통적인 '선진국의 최소'인 포르투갈을 처음으로 추월했으며, 전체 GDP 규모도 과거에 초강대국이던 러시아(물론 당시 러시아는 소련 붕괴 + 보리스 옐친이라는 초유의 2연타를 겪는 중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의 총 GDP와 G7 국가인 캐나다의 80%를 추월했다.[20] 참고로 한국은 1995년에는 캐나다의 90%를, 1996년에는 캐나다의 95%를(정확히는 96.8%) 넘겼다. 덤으로 1995~1997년에는 스페인 1인당 GDP의 80%를 넘겼다.[21] 1996년[22] 1997년[23] 물론 경제, 사회의 내실까지 따지자면 한국의 선진국 진입은 2002년까지 기다려야 했다.[24] 일례로 2010년대에 김영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가 이나 나왔으며, 두 드라마 모두 당시를 살았던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해 성공했다. 그래봤자 일종의 추억 보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바꿔 말하면 그런 추억 보정을 일으킬만한 시대였다는 말이기도 하다.[25] 엄밀히 따지자면 데뷔 자체는 노태우 정부 말기에 했다.[26] 김영삼 정부 5년 동안 전국 주택매매가격 상승률은 0.3%에 불과했다.[27] 물론 상대적으로 여유가 넘쳤다는것이지 버블경제 시기이던 1980년대 중후반~1990년대 일본처럼 돈잔치가 크게 열린 수준은 아니었다. 해외여행 빈도가 크게 늘고는 했지만, 자산시장 자체는 침체였던 시절(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주식시장은 1992년~94년에 상승한 뒤로는 침체, 부동산은 1기 신도시의 영향으로 가격이 안정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임금상승률은 10%대를 유지한데 반해 부동산 경기의 침체로 1990년대 초반에 비해 소득대비 집값이 크게 낮아져서 집구하기는 쉬웠던 시절(혹은 그렇게 느꼈던 시절)은 맞다. 애초에 버블경제 시기 일본은 1인당 GDP가 스위스, 룩셈부르크 버금가는 세계 최상위권이었기에 선진국 수준 지표에 처음으로 도달한 문민정부 시기 한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28] 2021년 미얀마 쿠데타가 터지면서 더더욱 재평가받고 있다.[29] 이러한 성격의 조사에서는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정도를 제외하면 높은 지지율이 잘 집계되지 않는다. 인터넷 조사에서는 노무현이 우세하고, 실제 언론 조사에서는 박정희김대중이 높은 수치를 기록한다.[30] 한보그룹의 정경유착은 청렴을 강조했던 문민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1997년은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기아자동차 등등 많은 회사들이 부도났다.[31]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32] 1차 한약분쟁이라고 한다. 2차는 1995년.[33] 부산직할시, 광주직할시, 대구직할시, 대전직할시, 인천직할시 등이 포함되었다. 당시 울산광역시는 아직 경상남도에 속한 였으므로 포함되지 않았다.[34] 케이블 SO.[35] 1996년 3월 1일부터 적용되었다.[36] 당시엔 김영삼 정부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추진하고 전두환·노태우 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 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두환·노태우 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37]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38] 차기 정권에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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