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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0 22:54:34

홋카이도 대학 백골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hokudai_41b.jpg

유골이 발견된 후루카와 강당

1. 개요2. 사무실의 두개골3. 이들은 누구인가4. 누가 이들을 두었는가
4.1. 유골에 대한 내막
5. 뒤늦은 안식6. 유사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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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北大人骨事件 / 北海道大学文学部古河講堂「旧標本庫」人骨問題

1995년 7월 26일 일본 홋카이도대학의 연구실에서 신원 미상의 두개골 6구가 무더기로 발견된 사건.

과거 '표본'이라는 이름으로 '수집'해온 유골들이 뒤늦게 발견된 사건으로 그동안 연구라는 명목으로 암암리에 만행을 저질러온 어두운 과거를 다시 되새기게 한 사건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수습된 유골 중 하나가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숨진 농민군의 것으로 알려지면서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2. 사무실의 두개골

1995년 7월 26일, 삿포로 경찰은 홋카이도 대학 삿포로 캠퍼스에서 사람의 뼈가 나왔다는 신고를 받고 캠퍼스에 출동했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홋카이도 대학 삿포로 캠퍼스의 후루카와 강당(古河講堂)이었는데, 1909년에 건축되었으며 일본의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까지 대학 문학부 교수연구동 및 사무동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 건물의 8호실[1]은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교수였던 요시자키 마사카즈(吉崎 昌一)가 본인의 사무실 겸 표본창고[2]로 쓰고 있다가 1995년 3월에 정년 퇴직하면서 공실이 되었고, 후임 교수가 들어오게 되면서 새 사무실을 내주기 위해 이 방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때 청소 작업을 하던 아이누 출신 대학원생이 선반 맨 꼭대기에서 "취급주의. 인골(人骨)"이라는 문구가 매직펜으로 쓰여진 골판지 종이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파일:1000066638.jpg

당시 진술을 한국 교양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이 그래픽으로 옮긴 것이다.

대학원생이 상자를 뜯어보니 두개골 6구가 신문지에 싸인 채로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처음에는 유적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유골을 보관한 것이 아닌가 싶어 교수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런 일은 없다[3]는 대답을 들었다. 대학원생이 유골의 처리 방안에 대해 묻자 이를 감독하던 조교수 아다치 아키라(足立 明)는 "그냥 그 자리에 둬라. 괜히 일 키우지 마라. 청소 끝나고 생각하자"는 식으로 이를 뭉개고 넘어가려 했으나, 이를 도저히 그냥 넘길수 없었던 대학원생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유골이 세상에 드러났다.

3. 이들은 누구인가

파일:1000066636.jpg

유골을 발견한 대학원생이 간단한 위령제를 지내준 모습

박스 안에는 총 6구의 두개골이 들어 있었다. 한 구를 제외한 두개골 5구의 정면 이마 부분에는 그 발굴지와 신원을 정리한 쪽지가 하나씩 붙어있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윌타인 유골 (원문은 '오타스 부락 - 풍장 오로코 オタスの杜・風葬オロッコ') - 3구

한국인 남성 유골(쪽지 없음) - 1구

20세 일본인 남성(원문은 '일본남자 20세 日本男子 20才') 유골 - 1구

신원 및 연고지 불명(원문은 '기증 두개골 출토지 불명 寄贈頭骨出土地不明') - 1구

나머지 한국인 유골 한 구는 뒤통수 부분에 쪽지가 아닌 붓으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韓國東學黨首魁ノ首級ナリト伝フ 佐藤政次郞氏ヨリ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고 한다. 사토 마사지로 씨로부터.
이외에 한국인 유골의 큰구멍[4] 안에는 문서 한 장이 구겨져 들어 있었는데, 이를 꺼내 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촉루(髑髏).
메이지 39년(1906년) 9월 20일 진도에서
메이지 27년, 한국 동학당 궐기가 있었다.
전라남도 진도는 그들이 가장 극심하게 창궐한 곳이었다. 그들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그 수괴자 수백명을 죽여서 시체가 길을 가로막고 있을 정도였다.
수괴의 머리는 효수되었는데 이 촉루는 그 중의 하나로 해도(海島)를 시찰할 때 채집한 것이다.
사토 마사지로.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한국에까지 알려지면서 당시 문민정부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반향을 일으켰다.

4. 누가 이들을 두었는가

일본 경찰은 일단 현장엔 출동했으나 이 유골이 범죄로 인해 사망한 것이 아닌 대학교의 사무실 겸 서고에서 내려오다가 발견된 상황이고, 유골을 싼 신문지가 1978년 스포츠 신문[5]이라는 것을 미루어 1970년대 말 또는 1980년대 초에 누군가 마지막으로 손을 댄 적이 있다는 사실만을 추정했을 뿐 범죄 혐의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홋카이도 대학 측에 자체 조사를 요청하며 사건을 내사 종결했다.

대학은 이를 받아들여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후루카와 강당 '구 표본창고' 인골사건 조사위원회(北海道大学文学部古河講堂「旧標本庫」人骨問題調査委員会)」를 발족하였고, 최근까지 방을 사용했던 전임 교수 요시자키 마사카즈는 경찰 조사에서 '교수 임용 당시 사무실에는 자신의 소지품 외에도 전임자들이 놓고 간 물건이 너저분하게 남아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때 전에 이 방을 사용하던 고고학자 나토리 타케미츠(名取武光) 교수의 물건이 섞여 있던 것 같다. 자신도 인수인계 당시 물품들을 모두 확인하지 못해 임용 당시부터 두개골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요시자키는 대학 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증언을 번복해 '전학공투회의학생운동이 극심하던 1969년에 홋카이도 대학 역시 학생들의 점거농성이 벌어지면서 이때 교수들의 물건이 한데 뒤섞이게 되었고, 자신도 사태가 수습된 후 연구실에 돌아왔다가 이때 못보던 박스를 발견했다. 박스를 열어보니 해골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자신의 연구 대상은 아니었기에 다른 교수의 물건인 줄 알고 한소리 듣지 않기 위해 제자리에 그대로 두었다'고 증언했다.

4.1. 유골에 대한 내막

우선, 한국인 유골을 반출한 사토 마사지로(佐藤政次郞)는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를 수료하고 한국통감부의 하급농업관리(농업기사)가 되어 대한제국에 도래했다.

사토 마사지로는 1906년 당시 목포부 일본인 거류지 내 영사관통[6]에 살면서 목포의 권업모범장[7]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때 진도에 업무차 출장을 왔다가 유골 도굴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면화재배소장으로 근무하다가 1910년 퇴직과 함께 진주 실업학교 교장[8]을 지냈으며, 1945년 8.15 광복까지 지켜보고 한국에서 패주했다. 후술할 홋카이도 대학이 연구라는 명목으로 자행한 만행의 사례에서 볼수 있듯, 진도에서 도굴된 동학농민군의 유골에 대해서는 삿포로 농학교 출신으로 조선 땅에 온 사토 마사지로가 '모교의 인류학적 연구에 보탬이 되고자 기증'한 것이 한국 사학계의 중론이다.

유골 중 가장 많으며 분류 쪽지에는 '오로코(オロッコ)[9]'로 명기되어 있던 '윌타'는 과거 홋카이도러시아사할린, 쿠릴 열도에 걸쳐 분포했던 퉁구스소수민족으로, 러일전쟁 이후 남사할린이 일본 제국 영토가 되면서 사할린 남부에 거주하던 윌타인들은 '가라후토 토인(樺太土人)'으로 분류되어 일본에 편입되었다.

일제 정부는 이들을 야마토인은 물론 아이누인보다도 낮게 여겨 1926년부터 1927년에 걸쳐, 윌타인들을 일본인과 아이누인으로부터 격리시킨다는 방침으로 이들와 함께 인근 일대에 거주하던 니브흐족, 어웡키족, 오로치족, 사하인 등 다섯 '토인' 민족을 가라후토의 항구도시 시스카정[10]을 흐르는 호로나이강(幌内川)의 삼각주에 집중적으로 수용해 오타스(オタス)라는 이름으로 마치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보호구역'같은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

이들이 이곳에서 각자의 풍습을 영유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한때는 '이민족이 사는 이국적인 공간'으로 여겨져 당시에는 대표적인 인기 관광지로 여겨졌다. 이들의 생활상과 풍장 등의 독특한 장례문화는 인류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제국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는데, 이때 두개골 3구가 무단으로 절취되어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실 홋카이도 대학은 홋카이도제국대학 시절부터 인류학적 연구를 명목으로 홋카이도·쿠릴 열도·남사할린 일대에서 연구 명목으로 아이누족 묘지를 무단으로 도굴해 수집했다. 일본 아이누 연구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던 전 홋카이도 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코다마 사쿠자에몬(児玉 作左衛門)이 그 대표적인 예로 유족이 이를 제지하거나 항의하면 푼돈으로 뭉개거나 또는 자신의 고위공무원 신분[11]을 이용해 일본 제국 경찰을 불러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탄압하는 방법으로 무단으로 유골을 도굴하여 공식적으로 확인된 규모로만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도굴한 유골의 수가 약 500여구에 달했다. 그걸 보고 배운 제자들 역시 도굴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1939년 이후부터 패전 이후인 1956년까지 홋카이도제국대학에 의해 도굴된 유골의 수는 1,004구에 달했다.

이런 어두운 과거는 패전과 일본의 급격한 현대화로 인해 묻혀 있다가 1980년대에 들어 아이누들의 권익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반환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선조들의 유해가 마구잡이로 도굴되어 먼지구덩이 창고 속에서 동물 박제와 함께 널려있는 모습이 공개되자 아이누 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결국 1984년 홋카이도 대학 측이 아이누 지역사회에 대한 사과와 함께 봉안당을 세워 유족에게 인계되거나 소실되지 않은 유골 969구를 안치하는 것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런 사례에서 미루어 보아 다른 일본인 남성 두개골과 연고지를 알수 없는 두개골 역시 이러한 인류학적 연구에서 비교 대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적출해 낸 것으로 추정되며, 신원을 알 수 없는 두개골 역시 아이누이거나 기타 북방지역 소수민족(어웡키족, 오로치족, 니브흐족, 사하인, 잔류 러시아인 등)으로 추정된다.

즉, 저 유골들은 일본인의 주류를 이루는 야마토 민족과 다른 민족들[12]의 '차이'를 연구하기 위해 '표본'이라는 명목으로 도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 뒤늦은 안식

조사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공식 사과와 함께 두개골의 소유권에 대해서 유족이나 유관단체의 요청이 있는 경우 조건 없이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お詫びの言葉
(사죄의 말씀)

昨年 7月 26日、北海道大学文学部の管理下にある古河講堂の「旧標本庫」を整理中に、新聞紙 にくるまれて、ダンボール箱に入れられたまま放置されている頭骨6体が発見されました。その うちの1体は、「韓国東学党」と墨書のある遺骨でした。
(지난해 7월 26일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관리하에 있는 후루카와 강당의 '구 표본창고'를 정리하던 중 신문지에 담겨 종이상자에 담긴 채 방치된 두개골 6구가 발견됐습니다. 그 중 한 구는 '한국동학당'이라는 문구가 먹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人間の遺骨をこのように粗末に扱うことは、 人間の尊厳に対する冒瀆であり、 許されないこと であります。 遺骨が発見された 「旧標本庫」 を管理使用していたのは、 昨年3月末に北海道大学 文学部を停年退職した教官でありますが、 この元教官がこのように粗末な形で長年にわたり遺骨 を放置していたことについて、 北海道大学文学部としては深くその責任を感じ、 ここに謝罪申し上げます。
(인간의 유골을 이렇게 허술하게 다루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자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골이 발견된 '구 표본 창고'를 관리 사용하고 있던 자는 작년 3월말에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를 정년 퇴직한 교수로, 당사자가 이와 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허술한 형태로 유골을 방치하고 있던 것에 대해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로서는 깊이 그 책임을 느껴 이와 같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しかも、この遺骨を韓国の珍島から持ち出したのは、 調査の結果、北海道大学の前身である札幌農学校の出身者である可能性が極めて高いことについても、心からお詫び申し上げます。
(또한 이 유골을 한국의 진도에서 반출한 자에 대한 조사 결과, 저희 홋카이도대학의 전신인 삿포로농학교 출신 인물인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かって、 日本の大学では、「植民学」といった学問が盛んに行われ、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を理論的·実践的に支える役割を果たしました。さらには、人種論という誤った学問が植民地支配を正 当化する役割を果たしました。 このことが、今回発見された遺骨に深くかかわっていると考えま す。それに思いをいたすとき、 学問の場としての北海道大学文学部は、 あらためて自己の歴史認 識を問い直し、 過去を反省しつつ、 今後の日韓の文化·学問の交流発展に役立ちたいと存じます。
(과거 일본의 대학에서는 '식민학'과 같은 학문이 할발하게 행해져,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이론적·실천적으로 지탱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심지어 인종론이라는 잘못된 학문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역시 이번에 발견된 유골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학문의 장소로서의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는 다시 한 번 저희 모두의 역사 인식을 되돌아보고, 과거를 반성하면서, 향후의 한일 문화·학문의 교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今回、私どもが、奉還委員会の代表の方々と共に東学農民革命軍指者の遺骨を韓国へ奉持い たしましたのは、 以上に述べました謝罪を言葉だけではなく、 具体的な形で表したかったからで ありまして、 このことをご理解下さいますようお願い申し上げます。
(이번에 저희가 봉환위원회 대표님[13]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장군님의 유해를 한국에 봉환하는 것은 이상과 같은 사죄를 말씀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으로, 이 점을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1996年 5月 31日
(1996년 5월 31일)

北海道大学文学部長 灰谷 慶三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학장 하이야 게이조)

이에 따라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학장 하이야 게이조(灰谷 慶三) 교수와 조사위원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 교수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 공식 사과함으로써 첫 번째로 동학농민군의 두개골이 한반도를 떠난지 90여년 만인 1996년 5월 30일,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 이후 두개골의 신원과 안장 장소를 두고 진도군전주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간의 법정공방이 오갔고, 결국 2018년에는 전라북도 정읍시 황토현전적지에 안장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가 문화재청이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그렇게 후손들이 지역이기주의에 찌들어 탁상공론을 벌이는 동안 국립전주박물관 수장고에서 시간을 보내던 두개골은 반환 23년만인 2019년이 되어서야 전주시 완산동의 동학농민운동 기념공원 '녹두관'의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에 안장되었다.

윌타인의 두개골 3구는 하이야 게이조 학장의 노력[14]으로 삿포로 주재 러시아 총영사관을 통해 사할린 포로나이스크로 반환되었으며, 20세 일본 남성의 두개골과 신원을 알지 못하고 '기증 두개골 출토지 불명'이라는 쪽지가 붙어있던 두개골은 끝내 그 연고지를 찾지 못하고 2006년 삿포로의 사찰 묘지에 안치되면서 두개골 6구가 모두 안식을 되찾게 되었다.

6. 유사 사례


[1] 훗날 문화재 지정과 함께 101호실로 개명했다.[2] 사무실과 창고, 서재가 뒤섞여 있는 공간이었다.[3] 보통 발굴조사 도중 수습된 유골은 대학 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된다.[4] 숨뇌척수가 이어져 있는 구멍. 쉽게 말해 등뼈가 들어가는 구멍으로 보면 된다. 의학계에서는 '대공(foramen magnum)'으로 부른다.[5] 정확히는 요미우리 신문의 자회사인 '스포츠 호치(スポーツ報知)'라는 신문이었다. 당시 채증용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요미우리 자이언츠(당시 표현은 교진군巨人軍)의 경기 기사가 실려있었다.[6] 현재의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대의동2가)[7] 일제 통감부가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 수행을 위해 농업기술의 시험·조사 및 지도라는 명목으로 설치한 기관. 또는 그 시설. 그 특성상 일제가 추진하는 정책을 농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는 대부분 농촌진흥청이나 한국농어촌공사 지사 농장에 통합되었다.[8]경상국립대학교 가좌캠퍼스[9] 윌타인들을 부르는 아이누어이다.[10] 敷香町, 현 포로나이스크 지역.[11] 당시 제국대학 교수는 칙임관 내지 주임관급 대우를 받았다.[12] 한민족, 아이누, 윌타[13] 한승헌 변호사, 장영달새정치국민회의(지역구 전주 완산구) 의원[14] 노어노문학과 전공이었기 때문이다.[15] 2000년대 초반까지는 진짜 인골표본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링크의 기사는 실제로 저렇게 수입신고서를 허위로 작성해 수입면장을 부정하게 발급받은 혐의로 교구사 업체 대표를 검찰에 송치한 내용도 언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