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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식민지 | ||
국기 | 휘장 | |
1895년 4월 17일 ~ 1945년 10월 25일 (50년 6개월 7일) | ||
성립 이전 | 반환 이후 | |
대만 민주국 | 중화민국 | |
대만 원주민 | ||
국가(國家)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국가(國歌) | 기미가요 | |
최대 도시 | 다이호쿠시 | |
언어 | 일본어 ,(사실상 공용어), 대만어 대만 제어 | |
문자 | 가나 문자, 한자 | |
종교 | 국가신토, 도교, 유교, 불교, 천주교 | |
민족 구성 | 일본인, 본성인, 만주족, 대만 원주민 |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1895~1932) →군사독재 (1932) →입헌군주제 (1932~1940) →군사독재 · 익찬 체제 (1940~1945) | |
국가원수 | 천황 | |
통치기관 | 대만총독부 | |
통치수반 | 대만 총독 | |
주요 총독 | ||
주요 사건 | ||
연호 | 메이지 (1895-1912) 다이쇼 (1912-1926) 쇼와 (1926-1945) | |
통화 | 타이완 엔 | |
현재 국가 | [[대만|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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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5년 4월 17일부터 1945년 10월 25일까지 타이완섬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서 존재하였던 기간을 가리킨다.타이완섬의 역사 관점에서 일치시기는 19세기까지의 '청조 시대'와 현재의 '중화민국 시대' 사이의 계보에 해당한다. 물론 장제스의 대륙 중화민국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불평등 조약으로 보고 대만의 영유권을 주장했었으나, 타이베이에 중화민국 영사관을 두는 등 사실상 일본의 영유권을 인정했었다.
2. 명칭 관련
이 문서의 문서명이기도 한 대만일치시기, 혹은 '일치시기', '일치시대'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일본의 대만 식민 통치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 명칭은 한국에서 쓰이는 '일제시대'와 비슷한 뉘앙스이다.그러나 대만에서는 이 시대를 일거시기(日據時期)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이 (대만을) 점거(占據)했다는 의미이며, 일본의 대만 통치의 불법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한국에서 말하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한 뉘앙스로, 주로 중국국민당 등을 중심으로 한 범람연맹 세력에서 사용한다. 마잉주 정권에서 있었던 역사 교과서 개정에서 '일치시기'를 '일거시기'로 바꾸어 범록연맹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이런 논란 때문에 대만의 문서에서 日據와 日治를 병기하기도 한다.
한편, 중국 대륙 기준으로는 대만일치시기(台灣日治時期)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대만에서는 편의상 '일치시기(日治時期)'나 '일본(제)시대(日本(帝)時代)', '일거시기(日據時期)' 등으로 표현된다. 일치시기 당시엔 일본 제국령 대만(日本帝國領臺灣) 또는 그냥 '대만(臺灣)'으로 불렸다.[2] 현대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이를 때 당대 조선처럼 일본통치시대(日本統治時代)라는 용어를 쓰며, 영어에서도 일반적으로 당대 조선처럼 'Taiwan under Japanese Rule'이라는 용어를 쓴다.
3. 역사
일본은 사실 청일전쟁 이전에도 1874년 모란사 사건(목단사 사건), 즉 최초의 대만침공으로 대만과 어느 정도의 악연은 예고하고 있었다. 목단사 사건은 일본의 류큐 실효지배화가 주목적이긴 했지만, 청나라의 바다 길을 언젠가는 제대로 강하게 압박하겠다는 일본의 속내가 있었고, 훗날 이를 위해 반드시 대만을 정복하고 말겠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승전 대가로 타이완섬, 펑후 제도와 랴오둥 반도를 합병한 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그해 10월 중국국민당 국민혁명군이 진주한 기간 사이에 해당하며, 따라서 대만은 50년 정도를 일제 치하에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대만총독부가 구성되었다.
흥미롭게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무단 통치(특별통치주의) → 문화 통치(내지연장주의) → 황민화 테크를 비슷하게 밟았다. 독립운동가나 일제 불만 세력들이 일제에 맞서 저항했던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서 다시 좌우로 분열되어 서로 편가르고 싸운 것까지도(...).
청일전쟁 이후 들어온 일본군에 대한 대만인들의 저항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조선과 달리 대만인들의 저항은 대만의 독자적 민족의식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대만인들 입장에서는 그저 외부 지배세력이 서구(네덜란드와 스페인) → 동녕국 → 청나라 → 일본 제국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1902년 이후로는 한족들 위주로 이루어졌던 무력 저항은 거의 자취를 감춘다.[3] 조선과 달리 중국 본토는 남아있으니 일제 통치가 불만인 한족들은 본토에서 살아도 되었고[4][5] 대만 원주민들은 저항하긴 했지만 구심점도 없었고 세력도 미약했다. 게다가 일본 본토에서 거리가 멀다보니 사실 조선만큼 좋든 싫든 뭔가가 일본과 빠르고 단단하게 엮이지도 않았다. 이는 대만인들이 일본보다 거리가 가까운 중국 대륙에 불만을 가지는 것과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점진적 동화 정책이 포기되고 일본이 야욕을 드러냄과 동시에 급진적 동화 정책으로 선회되는데,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는 조선인과 대만인을 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동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동화 정책의 관점에서도 대만총독부와 조선총독부는 크게 상이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에 창씨개명을 강제했으나, 대만총독부는 대만인의 창씨개명에 허가제를 두어 무분별한 자발적 창씨개명을 통제했다. 그럼에도 통치 말기 황국신민화 정책은 철저히 실행되었고 일제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어 보급률도 굉장히 높았다.[6]
3.1. 특별통치주의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로부터 타이완섬을 할양받은 일본 제국은 타이완섬에 상륙했다. 그러나 대만인들, 특히 그 중 청나라의 관료들은 일본 제국의 통치에 강하게 저항하였으며, 청나라의 타이완섬 할양을 '매국 행위'라고 비난했다.1895년 5월 25일 당경숭(唐景崧)과 구봉갑(邱逢甲), 유영복(劉永福)을 중심으로 대만 민주국이 건국되었으나 일본 제국이 대만 총독으로 임명한 가바야마 스게노리(樺山資紀)[7]에게 진압당하고 동년 10월에 멸망하고 만다.
대만 민주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1902년까지 7년 동안 대만인들은 산발적인 저항 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일본 제국 정부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었다. 이 때 총독부 지출이 수입의 3배를 넘었으니 그 부담을 알 만 하다. 또한 아직 미개발된 곳이 많고 습하고 무더운 타이완섬에는 일본인들에게 익숙하지 않던 전염병이 돌아 많은 일본인들이 죽기도 했다.
타이완섬 관련 지출이 늘어나자 당시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타이완섬을 프랑스에 팔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허나 4대 대만 총독 고다마 겐타로가 타이완섬의 지정학적 가치의 중요성(일본 남부에 대한 방어요충지)을 역설(力說)하고[8] 타이완섬을 통해 일본도 서구 열강에 맞서 식민 통치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여 매각 계획은 철회되었다.
1902년 이후에는 저항운동이 한풀 꺾여 일제 통치가 사실상 정착되었다.[9] 대만 총독부는 식민지 경영을 위해 도시계획 전문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를 민정장관에 발탁하는 등 타이완섬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고토는 항일 세력 소탕까지 염두에 두고 강력 범죄는 물론 건물 표지 훼손 같은 잡범이나 심지어 미수범이라도 범죄자는 사형에 처하는 악법을 제정해, 통치 초기 첫 5년 동안에 사형된 대만 주민만 3천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고토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세수를 3배로 올리고, 아편[10] 및 담배의 전매 정책,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등을 통해 대만 총독부의 재정 자립을 추진했다.
고토는 대만 통치에 있어서 '특별통치주의'(特別統治主義)를 주장했는데, 일본인과 대만인은 국민성이 다르니 대만인의 국민성을 조사하고 그들에게 알맞은 통치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에 의거해 대만총독부는 대만인들의 관습 등을 조사했고 그에 맞는 통치를 펼쳤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 제국은 대만총독부에 대만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거나 일본 법의 의용 여부를 결정하는 등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다.(六三法) 이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후 일본과 조선의 국민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조선에 대일본제국헌법을 직접 적용하지 않고 제도적 차별을 한것과 같은 논리였다.# 특별통치주의에 따라 대만에는 통치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처럼 수많은 헌병경찰이 주둔해 횡포를 휘둘렀고, 같은 이유로 대만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 조치도 이루어졌다.
3.2. 내지연장주의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마침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고, 조선에서 3.1 운동이 터지면서 조선에 대한 헌병정치와 대만에 대한 특별통치주의는 일본 민간 정치인들의 큰 비판을 받았다.이로 인해 1918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대만 주둔 일본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되고, 동시에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어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11]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타이완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内台融合)
한편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진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
3.3. 황민화 정책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小林躋造), 하세가와 기요시(長谷川清),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 명이 전사하였다.[12]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공습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쇼와 천황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GHQ의 명령에 따라 타이완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13]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4. 현대 대만 사회에서의 평가
대만이 독립국으로서 제대로 된 지위를 누린 것은 전체 역사에서 극히 한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관점에 따라서는 지금도 독립국이 아니라 대륙 세력의 통치 연장기라고 볼 수도 있다.[14]국부천대 이후 일제의 지배가 중국국민당의 통치로 바뀌는 시점에서 국민당 정부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다를 바 없는 대만인 탄압과 수탈을 일삼아[15] 수만명이 학살당한 2.28 사건이 촉발되기도 했다. 당시 대만의 저항세력은 본성인을 차별·탄압하는 외성인 세력을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가를 보았고, 저항세력의 방송을 일본어로 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 이후 무려 38년간의 대만 계엄령 시기를 거치면서 독재 공포정치가 이어졌기에 대만에서는 일제시대에 대한 기억이 한국 등 다른 국가와 사뭇 다르다. 대만 역시 일제시대에 한국과 똑같이 현지어 사용 금지, 신사 참배 등의 황민화 정책을 겪었음에도 대만인들은 이 시기에 대해 반감이 강하지는 않은 편이다.
이는 일제의 침략, 점령을 겪었던 다른 중화권 지역이나 동남아시아의 화교 사회들과 비교해도 그렇다. 홍콩 및 중국 대륙 등 다른 양안삼지 중화권이나 동남아시아의 화교 학살을 겪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계 싱가포르인 사이에서는 현대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 벌어진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하지만, 대만은 비교적 일본 통치에 대해 딱히 악감정이 크지 않다.
그리고 이는 대만의 생존권이 외교 노선에 달려있다보니 지금은 미국의 최우방국이 된 패전국 일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재가 과거 역사의 평가에 연동된 결과이기도 하다.
사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지를 겪은 국가들도 그렇다. 특히 아프리카,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국가들도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편이긴 하다.[16]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5. 군사
자세한 내용은 대만군(일본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6. 관련 문서
- 대만총독부: 일제가 타이완섬을 통치하기 위해 세운 기관. 행정 조직과 행정 구역, 장관 등은 해당 문서 참고.
- 타이완섬/역사
- 시모노세키 조약
- 일제강점기
- 일본 제국
- 조명하: 특이하게도 한국인이지만 대만에서, 그것도 현지인과 힘을 합쳐 의거를 행했다.
[1] 1915년 타이난에서 일어난 한족 중심의 대규모 무장 봉기[2] 당시에는 일본도 현재 대만과 마찬가지로 정체자를 사용했다. 신자체를 도입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신자체로는 台湾이다.[3] 다만 분명한 점은 식민지 시기가 반환 후의 시기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대만 사람은 매우 드물다. 야스쿠니 신사까지 참배하는 등 극단적인 친일 성향으로 논란이 되었던 리덩후이 전 총통조차 "과거 대만인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던 점을 대만인으로서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4] 대만일치시기에 이런 식으로 '나는 염황 자손이요'하며 대륙으로 떠났다가 대만 반환 이후 귀향한 사람들을 '반산(半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렇게 중국 관내로 생활기반 다 버리고 이동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대만 역시 대륙과 같이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고, 중요 재산인 농토 다 버리고 관내로 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1895년 대만을 식민지화하자마자 2년 안에 대만에서 대륙으로 이동할 자유를 대만인들에게 주었으나 이때 실제로 대만을 떠난 사람은 6,400여 명으로 당시 대만 인구의 0.2%에 불과했다. 다만 이 수치는 대륙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감안하지 않은 수치로 일본의 대만 점령 과정에서 대륙으로 도망친 20~30만 명까지 합치면 대만에서 대륙으로 이동한 대만인의 수는 당시 대만 인구의 10% 정도는 되었다.[5] 나중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대만이 중국으로 반한된 이후 이들 반산은 대만으로 귀환했고, 대만 출신이라 대만을 잘 알면서 국민당 당국으로부터 '믿을 만한 사람들'로 인식되었기에 국민당 일당 통치 시절에 한 자리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1394[7] 세이난 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으로 당시 일본 해군 대장이였다.[8] 실제로 타이완섬은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 본토에 대한 제공권 장악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9] 통치를 흔들 수준이 아니었다는거지, 1915년 일어난 타파니 사건이나 1930년 일어난 우서 사건 등 항일 봉기와 이에 따른 일제의 대만인 학살과 탄압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우서 사건의 중심 세력으로 일제에 잔인하게 탄압받은 시디그족은 지금도 반일 감정이 크다.[10] 당시 청나라의 영향으로 대만에도 아편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대만총독부는 아편 흡입에 면허증을 발부하고 아편을 전매해 재정수입을 거두고, 아편 가격을 슬금슬금 올려 아편 중독 문제를 해결했다.[11] 사실 조선도 문화통치기 당시엔 문관 총독이 임명될 수 있게 해놨지만, 실제론 문관 총독이 단 1명도 임명되지 못했다.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를 들어 군부가 계속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대만의 지정학적 가치 및 체급은 조선에 미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대만의 총독은 조선의 총독보다는 서열이 낮았다.[12] 이들은 패전 후에도 대만으로 귀환하는 교통편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상당수가 자력으로 귀환해야 했고, 간신히 대만으로 귀환한 후에도 국민정부에 의해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조한 한간으로 몰려 투옥되거나 재산을 빼앗기는 일이 더러 있었다.[13] 안도 리키치는 그 직후 체포되어 상하이로 압송되 수감되었고, 중일전쟁기 중국 대륙에서 자행한 전범 혐의에 대한 재판을 기다리던 중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14] 중화민국=대만 섬으로 한정해서 본다면 대만은 사실상의 독립국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중화민국은 본래 대륙을 통치하는 국가로써 세워졌으며, 그래서 대만의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만인도 외성인, 본성인 할 것 없이 중국 대륙에서 이주 온 한족들이고, 중화민국은 국부천대로 대륙에서 쫓겨난 외성인 세력이 주도해서 세워진 것이니 대만은 역사상의 시기 대부분이 일본 통치를 제외하고는 대륙의 통치기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대만원주민들 위주로 살고 한족들이 안 살던 시기에 유럽의 식민지배를 받은 적도 있다. 대항해시대인 청나라 초기때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대만 섬의 일부를 실효지배하고 사탕수수 농사를 수십년간 지었었다가 청나라군이 인지하고 쳐들어가서 쫓아냈다. 실제 실효지배는 안했어도 명목상으로는 청나라땅, 더 정확히는 원래 명나라 땅이던걸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계승받은 땅이 대만섬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대만 섬 전체는 아니지만 섬 일부에 실효지배를 시작하고 사탕수수 농사를 청나라가 지었다.[15] 당시에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는 말이 있었을 정도이다. 자세한 내용은 2.28 사건 문서 참고.[16] 사실 이는 독립 후 차라리 식민지 시절이 더 낫다 싶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독재자들이 나라를 망친 경우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란 것도 있다. 물론 오세아니아에서도 선진국인 호주, 뉴질랜드나 동남아시아에서도 선진국인 싱가포르 등은 식민지를 그리워하지 않으며 현재가 더 좋다고 평가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3세계에 속하는 나라들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