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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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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해군
[ruby(大日本帝國海軍, ruby=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かいぐん)]
Imperial Japanese Navy (IJN)
<colbgcolor=#1a284f><colcolor=#ffffff>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해군기[1]
존속기간 1869년 ~ 1945년
명령 체계 대본영
군종 해군
해군가 군함행진곡(軍艦行進曲)
국가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본부 해군성 : 도쿄도 고지마치구
기념일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전)
주요참전 운요호 사건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중일전쟁
· 태평양 전쟁
지휘
대원수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해군대신 사이고 주도(초대)
요나이 미쓰마사(말대)
군령부총장 이토 토시요시(초대)
도요다 소에무(말대)

1. 개요2. 상세3. 역사4. 상징5. 군복6. 관련 인물7. 편제8. 해군구9. 지상전
9.1. 해병대9.2. 육전대
10. 항공대11. 특별경찰대12. 일본 해군이 보유했던 군함 목록13. 참전 이력14. 상선사관에 대한 이해심 부족15. 파벌1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 시기의 해군. 정식명칭은 대일본제국 해군(大日本帝國海軍)이다. 전후 해상자위대가 욱일기와 주요 간부진을 그대로 계승[2]했다.

2. 상세

최고통수권자는 육군과 마찬가지로 천황이었으며 내각에는 권한이 없었다. 그 아래로는 군정권해군대신, 군령권은 군령부총장[3], 실전부대 지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담당하는 일종의 과두제 구조였다. 1930년대 당시 셋의 위상은 복잡했다. 그 전까지는 해군대신이 조직에서 1인자로 나서고 서열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군령부총장 재임하게 된 시기부터 군정권에 해당하는 병력량 결정권을 군령부로 가져온 이래 원래 군정권을 관할해야 하는 해군성은 내각에 대신으로 참여하여 군부 군정과 정부, 국회정치를 주 업무로 하며 예산, 인사 등 보조업무만을 담당하게 되고[4], 야마모토 이소로쿠같은 스타급 인사가 전역 현장에서 직접적인 권한이 있는 연합함대를 틀어쥐고 있을 경우는 역시 상급자인 해군대신, 군령부총장도 통제를 못 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부터 대전당시 세 군데 조직중 가장 권력이 강해진 곳은 군령권에 이어 군정권까지 장악하게 된 군령부였다. 군령부 제 1과 작전과의 10명 남짓되는 참모들이 200만 제국 해군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이런 기형적 체제는 대전 말기 연합함대 전력이 거덜나면서 군령부의 발언력이 약화되고, 내각총리대신과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경험해본 마지막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제독이 군령부총장 도요다 소에무 제독을 으로 누를 수 있게 되고서야 수습되었다. 전시에는 육군과 대본영을 설치했다. 프로이센 육군을 모방한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을 모방했다.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제해권을 중시하였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잘 알려져있듯 육군과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미국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합동작전을 실시했지만 일본 육해군이 합동전투를 한 것은 과달카날,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레이테 만 해전뿐이었다.

인원은 해군이 훨씬 적어서 육군보다 복지가 좋았는데, 그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육군에서 많이 느꼈다. 거기다 해군은 말단 수병들도 근무 여건이 병사에 비해 좋고 기술도 배울 수 있어 입대경쟁이 치열했다. 육군에서는 일부 공병, 운전병, 통신병, 항공병 같은 기술 특기가 아닌 이상에야 입대부터 전역까지 소총 한 자루만 닦으며 구르기가 일상이었다. 그에 반해 대부분 해군은 어마어마한 기관부 혹은 그에 준하는 기계장치들을 다루는 것이 일이며, 해군에서 막일꾼으로 취급받는 갑판병조차 페인트 도색 등 선박 유지/보수 기술을 익힐 수 있고 이는 전역시 민간에서도 꽤 쓸모 있는 것들이었다. 남들이 육군에서 구를 때 해군으로 들어온다면 공짜로 기술을 배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사회 그리고 현재 21세기의 중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징집병일 때 배워온 운전, 정비, 항해 등의 기술로 평생을 먹고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메리트다. 거기에 더해, 입대시 거주지 관할 연대 예하 중대급까지 입대하자마자 배치하고 신병 훈련을 중대별로 알아서 시켜 교육 수준이 매우 뒤떨어지고 부대별로 중구난방이었던 육군과 달리, 해군은 신병들의 관할 진수부별로 있는 해병단에 일괄 입단시켜 전문 교관들이 모아놓고 양성했기에 보다 체계적인 양성 과정을 거쳤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전부 이러한 인식이 있는 만큼 경쟁률은 어마어마해 대거 주로 엘리트~준엘리트들이 뽑혀가는 경향이 강했고, 육군 병사들이 심상소학교도 겨우 마친 이들이 득시글거릴 때 해군 수병들은 못해도 고등소학교는 나와야 들어갈 수 있었고, 당시 기준으론 꽤 고학력인 중졸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이는 해군의 선민의식과 귀족화에 한몫을 했다.

대신 국내 정치에서 입김이 강한 것은 육군이었으니 해군도 아쉬운게 있기는 하다.[5] 전통적으로 일본 육군은 러시아 제국 및 후계자인 소비에트 연방을 제1의 가상 적국으로 판단했지만, 해군은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판단했다.

출신 학교와 학교에서의 성적을 따지는 철저한 학력 절대주의 집단이었으며, 해군의 특성상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많다보니 서양인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 해군 장교들에게는 영어 등 외국어 교육을 포함해 상당한 수준으로 교양을 가르쳤던 것이 특징이다. 그 덕분에 해군의 장교들은 사회 상류층 이상으로 교양을 쌓은 이들이 일반적이었고, 일본 제국 신민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는 해군 내부의 파벌다툼으로 인해 인사 정책이 우왕좌왕할 가능성을 막을 객관적 인사 기준이 학교 성적뿐이었기 때문이고, 육군에 비해 수가 적었기에 1인당 교육비를 더 많이 지출할 수 있었던 덕도 있었다.

이런 해군 특유의 귀족주의 현상은 일본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1인당 소득은 다소 처지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해군에 투자를 좀 한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쪽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비록 병과사관에 비해 무시되는 면이 없지 않았으나, 비병과사관들인 주계과[6], 군의과, 기술과, 법무과 등으로 임관하는 2년제 단기사관 대우가 육군 동 병과 대비 매우 좋았다. 병과가 아니면 장교 취급도 못 받았다 같은 건 사병들의 뒷담화 내지는 지휘 계통에서의 배제 등이었지, 일단 자기 계급에 맞는 의전은 확실히 받았고 전투 쪽으로는 무시 당했을지언정 그들의 특기인 전문 분야 쪽으로는 병과사관들도 비병과사관들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그 예로 조선공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자였던 히라가 유즈루[7] 중장이 있다. 아예 병과사관들과는 반쯤 별세계 사람처럼 여기며 지내는 편이라, 한, 두 계급 정도면 병과와 비병과사관들끼리 상호 존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다양한 병과를 일본 제국 육군에 비해 존중했다. 현 대한민국 국군도 직속상관이거나 장성이 아닌 이상 군법무관이나 군의관, 군종목사 등 특수병과 장교들에겐 일반적으로 상호존대를 하지만, 일본 해군에선 아예 기술행정직 장교들과도 그렇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문대 출신 고학력자나 정치 및 경제계의 유명 인사의 자제 등이 해군으로 몰리는 효과도 있었고, 이들이 전후 일본의 정계 및 제계에 대거 진출하며 해군을 좋게 평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삐딱한 엘리트 의식을 낳아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체계가 갖춰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단 군내부에서의 지위와 대우는 오로지 학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실제 능력은 그 다음 문제였다.

또한 장교들이 엘리트 의식에 빠진 탓에 사병들은 장교가 될 수 없었다. 경력이 오래되고 능력 있는 사병들을 그대로 수병, 하사관에서 썩게 만드는 것은 전력손실이라는 이유로 제도가 개편되긴 했는데, 그렇게 생긴 것이 특무사관이라는 특별 계급이다. 하사관에서 능력 있는 인물들을 특무사관으로 진급시켜 특무소위~대위로 임관하여 장교 취급을 해주긴 했는데,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었다. 특무소위 1호는 주계과에서 배출했다.

계급장부터가 한 눈에 봐도 일반 위관급 사관과는 구분되도록 디자인 했고, 아직 부임조차 하지 않은 일본해군병학교를 갓 졸업한 견습사관의 지휘권이 특무대위보다 위에 있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교들로부터도 같은 급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차라리 병조장으로 남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이러다보니 하사관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수병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했고, 장교 계급 외의 군기는 상당히 막장이었다.[8]

결국 1942년에 기존 특무사관들을 전부 일반사관으로 편입시키고 제도 자체를 폐지, 사병 출신들이 사관이 될 수 있는 길을 아예 막았다. 소좌로의 진급도 특무사관 출신들은 거의 막혀 있어서 해군 해체시까지 특무 출신 소좌는 불과 수십 명, 중좌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고 대좌와 제독은 한 명도 없었다. 특무 출신 신규 좌관급 사관이 한 명이라도 나오면 전 해군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다만, 특무사관이 소좌가 되면 일반사관으로 편입돼 특무소좌가 아닌 소좌 계급이 되어 특무 시절과 달리 엄연히 대위보다 선임자였고, 소좌들과 마찬가지로 천황으로부터 군도도 하사받았다. 또한 이렇게 바늘구멍 수준의 진입 장벽 탓에 의외로 특무 출신 좌관급들은 "특무 출신인데도 소좌를 달 정도면 인정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진급에 대해 불이익은 있을지언정 주변으로부터 다른 의미로 존경과 대우는 받았다고 한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보급의 중요성 자체는 이들도 알고는 있었고 잘 갖춰진 기지에서의 보급은 일본의 경제사정에 비해서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9][10] 하지만 그것도 영미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었고, 당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물자를 필요한 지역에 제때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은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서 나치독일의 동맹으로서 기여는 영미보다 미미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과는 달리 상당히 활약했는데 태평양 전쟁 초반까지는 미 해군과 그럭저럭 호각으로 싸울 수 있었다.

실제로 개전시 일본 해군의 전력은 영국과 미국에 이은 3위였다.[11] 전쟁 초반에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전함 상당수를 전열에서 이탈시키면서 잠시 동안 미국보다 전력이 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전략적 능력의 부재, 국력의 차이 등 이유로 미국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여담으로 해외에서 종종 일본 제국 해군 함선들을 지칭할 때 선박 접두어로 IJN(Imperial Japanese Navy)를 붙이는데(IJN Yamato, IJN Nagato 등등)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것이다. 일본 해군이 대외적으로 사용한 공식 선박 접두어는 HIJMS(His Imperal Japanese Majesty's Ship)이었으며, 이마저도 주로 메이지 유신에서 전간기 초기까지만 쓰이다가 곧 유명무실해졌다.

3. 역사

3.1. 기원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에도 막부 휘하의 수군일 것이다. 막부 수군은 1853년에 이양선이 나타나자 해군으로 정비하였다. 재래식 군선으로 모양새를 갖추긴 했지만 쿠로후네(黑船)를 당할 바는 아니었다. 쿠로후네 사건으로 1854년 강제개항을 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 근대적 해군이 필요함을 절감, 1866년 대규모 군제 개혁을 실시해 해군 봉행을 설치하고 해군 총재를 뒀다.

당시 일본엔 막부 말고도 각 번에서도 해군력을 조직했는데, 막부 해군은 영국에서 고문단을 초빙해 본격적인 해군을 양성하려고 하였고 동아시아에서 규모도 가장 컸다. 그러나 막부 해군은 제대로 세워지기 전에 대정봉환으로 신정부에 흡수되었다. 1870년엔 육군과 해군이 분리되고 도쿄 츠키지[12]에 해군성을 설치했다. 초기에는 사쓰마[13]가 주도했으며 1876년에 일본해군병학교가 세워진다. 서남전쟁으로 사쓰마가 밀려나면서 일본군 내부에서 육군 중심주의가 강해진다.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도 했다.

3.2. 청일전쟁러일전쟁

청일전쟁은 풍도 해전으로 시작되었으며 황해 해전과 웨이하이웨이 전투에서도 이홍장북양함대에게 크게 이겼다. 자세한 내용은 청일전쟁/해군 전투력 비교 참조. 대규모 승전은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를 궤멸시킨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이 대표적이다.[14]

3.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국의 요청으로 독일령 칭다오(키아우초우)에 대한 공략에 나섰다. 이를 칭다오 전투라 한다. 그리고 칭다오를 탈출하여 통상파괴전을 벌이는 독일 아시아 함대 추격전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미국과 협력하여 태평양에서 활동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지중해로 파견되어 수송선 호위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잠수함대와 독일 제국 해군 지중해 전단의 통상파괴전으로 지중해 지역의 해상 교통로가 큰 타격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오스만 제국군 해군 또한 동지중해에서 미약하게나마 활동했다.

그리하여 카바급 구축함 8척을 중심으로 특수 편성된 제2특수전단이 지중해에 파견되었으며, 전쟁 끝날 때까지 지중해의 해상로를 보호했다. 다만 이들이 격침시킨 적 함선은 없었다. 해당 전단은 계속 증원되어 총 순양함 3척, 구축함 12척, 그리고 영국 해군 소속 구축함 2척과 건보트 2척이 제2특수전단을 거쳐갔다. 이 중 카바급 구축함 사카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U보트 U-27함의 기습적인 뇌격으로 인해 대파되기도 했으나 간신히 살아남아 수리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독일 제국 해군 잠수함 7척을 전리품으로 인계받기 위해 스코틀랜드 북부에 위치한 영국 대함대의 모항인 스캐퍼 플로로 이동했다가, 런던 및 파리에서 열리는 승전 기념식에 참석하고는 귀국했다.

3.4.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에는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진주만 공습의 대성공으로 상당수의 미 태평양함대 전함들을 전열 이탈시킨 일본 제국 해군은 필리핀을 비롯한 서남태평양 등지를 휩쓸며 전쟁 초반 연합국에 우세를 점했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이 침몰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은 미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배하며 제해권을 상실했고, 끝내 1945년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해군성은 제2복원성으로 불린다. 육군과 달리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저항하느라 연안에 기뢰를 잔뜩 설치해뒀고 이를 제거할 소해부대가 필요했으며 또한 해외 거주 일본인과 일본군들을 귀국시키기 위한 수송선단을 운용할 승무원도 다수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1만 명 가량의 해군 인력이 그대로 잔류할 수 있었다. 이후 해상보안청으로 개편되었다가 1952년에는 보안대란 이름으로 해상자위대의 전신이 해상보안청에서 분리되었다. 사실상 해상자위대는 일본 해군을 계승했다. 그것도 과거의 악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물론, 구 일본 해군 시절에 비하면 많이 없어지긴 했다.[15]

해군 사병의 입대 후 의무 복무 기간은 징집병은 3년, 지원병은 5년이었다.

4. 상징

상징 이미지는 벚꽃, 상징 깃발은 해군용 욱일기를 썼다.

파일:external/wiki.gcdn.co/IJN_Ryujo.jpg
항공모함 류조.

일본 제국 해군 함선 중 주력함에 해당하는 순양함, 전함, 항공모함포함의 함수에는 일본 제국의 국장이자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 문장(菊花紋章)이 달렸는데, 나무에 진짜 으로 금박을 두껍게 씌워서 금색으로 만들었다. 크기가 상당히 컸기에 금박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그래서 국화 문양을 함수에 붙이는 작업을 한 인원들은 작업 후 금박을 빼돌렸을지도 모른단 이유로 탈의 상태에서 군의관에게 항문까지 검사받았다고 한다.

근데 포함은 구축함 수준으로 작은데도 특별히 국화 문양을 달았다. 이유는 포함은 바다의 대사관 역할을 했기에 국내외 고위급 인사가 승선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포함은 톤수만 작을 뿐이지 대좌함장으로 부임하는, 의전서열이 매우 높은 함들이었다. 하츠하루급 구축함 네노히(子日)의 함장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시무슈형 해방함 쿠나시리(国後)에게 '왜 귀함은 본함에 경례를 하지 않는가.' 하고 따졌다가 쿠나시리가 국화 문양을 달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사죄하러 쿠나시리에 직접 다녀왔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국화 문양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막강했다.

국화문장은 일종의 계급장처럼 통용되었기 때문에 해군에서 급이 낮은 함선 취급을 받았던 구축함, 잠수함 등 소형함은 감히 국화문장을 달지 못했다.

욱일기를 비롯해 구 일본 해군으로부터 많은 것을 계승한 해상자위대는 의외로 국화 문양은 달지 않는다. 천황은 국가원수이긴 해도 상징적인 존재일 뿐 아무 실권이 없음을 일본국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므로, 군함을 천황이 '하사'한다는 건 현 일본의 통치 제도 하에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화 문양은 과거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의 국장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 황실의 상징이라는 점도 변함없는 데다, 국화문양이 달린 것은 '일본 황실의 소유' 또는 '일본 황실이 하사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현존하는 함선 중 국화 문양이 달린 함선은 요코스카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더는 군함이 아닌 미카사가 유일한데, 이것도 진품이 아닌 플라스틱 모조품이다.
파일:일본제국 해군대신기.svg
파일:대일본제국해군 대장기.png
파일:대일본제국해군 중장기.png
파일:대일본제국해군 소장기.png
파일:대일본제국해군 대장기(편제).png
파일:대일본제국해군 선임기.png
파일:대일본제국해군 사령기.png
파일:대일본제국해군 당직기.png
파일:적십자 기.svg

5. 군복

파일:external/www.ibiblio.org/hb-11-6.jpg 파일:external/www.ibiblio.org/hb-11-5.jpg
해군 사관의 복장은 동계용인 제1종과 하계용인 제2종이 있었다. 제1종 군장은 보편적인 영국 해군식의 더블 버튼 자켓이 아니라 1920년대 미 해군 장교용 근무복 형태의 자켓을 사용했다. 이 복제가 시대에 뒤떨어진다 하여, 서구 해군과 동일한 더블 버튼 형태로 바꾸려는 개정안이 1920년대에 올라왔으나, 해군 원로로 추앙받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내가 이 옷을 입고 러시아 해군을 이겼는데 어찌 없앤단 말이냐?" 하며 극렬 반대해 무산되고 종전시까지 계속 쓰였다는 일화가 있다. 무더운 남태평양에서 목을 조이는 모직 로먼 칼라 제복은 꽤 더웠을 것이다. 동예복은 더블 버튼 형태의 모닝 코트검정 보우 타이를 착용하는 국제 표준(?)형 디자인이었다. 제2종은 흔히 해군 장교하면 떠오르는 흰색 싱글 버튼 자켓이었다. 모자는 정모와 약모를 착용했으며, 계절에 따라 이쪽도 제1종 약모, 제2종 약모 등으로 불렸다. 색상도 계절에 맞는 복장과 똑같다. 단화는 제1종에 신는 흑단화, 제2종에 신는 백단화가 있었다.

하사관의 복제는 사관과 유사하나, 동복인 제1종 군장의 경우 사관들이 단추 없이 후크로 여미는 형태인 것과 달리 하복인 제2종 군장처럼 금색 단추를 잠그는 가쿠란 형태였다. 하사관도 사관처럼 정모와 약모를 착용했다. 다만 하사관의 정모는 사관용과 달리 모표가 닻 하나만 딸랑 박혀있는 것이었고, 약모는 줄이 두 개인 사관용과 달리 하나였다.

수병의 복제는 타국 해군과 거의 차이가 없는 세일러복이었다. 칼라의 흰줄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3줄이 아닌 1줄이라는 점이 특징이며, 해상자위대에선 두 줄로 늘어났다. 모자의 경우는 페넌트가 달린 정모와 줄 없는 약모를 착용했다. 수병들 가운데 헌병 임무를 수행하는 인원과 조종사 교육생인 예과연습생 등은 예외적으로 각각 하사관 및 해군병학교 생도 피복과 유사한 복제를 착용했다.

여기에 하사관과 수병들은 함정에선 흰색 누더기 같은 작업복도 입었다. 미 해군의 샘당과 비슷한 것으로, 이쪽도 전투복 대용으로 쓰였다. 영화 미드웨이에 나오는 일본군 함정 승조원들이 입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업복이다.

육전대는 세일러복에 철모+혁대+각반 조합을 사용했다. 하지만 세일러복은 위장 능력이 나빴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고자 1933년부터는 해군용 육전복을 입었다. 육전대원들의 철모에는 해군임을 알리는 닻이 그려져 있었으며, 이전과는 달리 붕대형 각반을 착용했다. 해군특별육전대 소속의 공정부대 병력들은 육전복과 붕대형 각반 대신에 강하복 및 강하화를 착용했다.

1943년에는 육전복과 디자인이 비슷한 황록색 해/육상 전투복인 제3종 군장이 도입되었고, 기존 제1, 2종 군장은 정복으로만 쓰게 된다. 지팡구 16권 표지의 사관용 3종 군장 육전 소요가 늘어나 함정과 육상에서 함께 입을 수 있는 전용 피복 소요가 제기된 점, 사관용 1, 2종은 옷깃이 목을 감싸는 차이나 칼라 형태라 불편했던 점 등이 도입 사유다. 육전의와는 형태가 비슷해, 전시 물자 부족에 더해 종전시까지 서로 혼용됐다. 해군 사관용 육전의와 3종 군장은 일본군에서 넥타이를 착용하는 몇 안 되는 피복이다. 1945년부턴 원가 절감을 위해 보다 개악된 4종 군장도 나온다.

6. 관련 인물

파일:Imperial_Japan-Navy-OF-10-collar.svg.png 대원수(육, 해)
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파일:1280px-Imperial_Japan-Navy-OF-9-collar.svg.png 원수해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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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80px-Imperial_Japan-Navy-OF-9-collar.svg.png 해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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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요시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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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구모 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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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80px-Imperial_Japan-Navy-OF-8-collar.svg.png 해군중장
파일:1280px-Imperial_Japan-Navy-OF-7-collar.svg.png 해군소장

7. 편제

관청
대본영 해군성 군령부 함정본부 항공본부
지방조직 / 작전부대
진수부 경비부 요항부 해군 항공대 해군 육전대
함대
연합함대 북동방면함대 중부태평양함대 남동방면함대 남서방면함대
제10방면함대 지나방면함대 제1기동함대 제1견외함대 제2견외함대
상비함대 남청함대 남견함대 제1함대 제2함대
제3함대 제4함대 제5함대 제6함대 제7함대
제8함대 제9함대 항공함대 제1항공함대 제2항공함대
제3항공함대 제5항공함대 제10항공함대 제11항공함대 수뢰전대
해상호위총사령부 특설호위선단사령부 해상호위대 해군총대 연습함대
군사학교
해군성소관학교
해군병학교 해군경리학교★ 해군기관학교★ 해군군의학교 해군대학교
진수부소관학교
해군포술학교(제1교, 제2교) 해군수뢰학교 해군잠수학교 해군공학학교 해군통신학교
해군항해학교 해군기뢰학교 해군공작학교 해군전측학교 해군기상학교
해군위생학교(제1교, 제2교) ★: 해군3교(海軍三校)

8. 해군구

1938년 시점인 해군구의 구역, 군항, 요항목록
해군구 관할 진수부 육상구역, 해상구역은 동일 진수부의 관할 해상구역의 관할 육상구역의 관할 [17] 군항 요항부
제1 요코스카 진수부 가라후토, 홋카이도, 아오모리, 이와테, 아키타
미야기, 후쿠시마, 이바라키, 지바, 도쿄
가나가와, 시즈오카
아이치, 미에 야마가타, 니가타, 도치기, 군마
사이타마, 야마나시, 나가노
요코스카 오미나토(아오모리)
제2 구레 진수부 와카야마, 오사카, 효고, 오카야마, 히로시마
야마구치, 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 교토
돗토리, 시마네, 도쿠시마, 고치, 에히메
가가와
야마가타, 니가타, 오이타
(미야자키[18]), (후쿠오카[19])
아이치, 미에, 기후, 나라, 시가 구레 도쿠야마(야마구치)
마이즈루(교토)
제3 사세보 진수부 가고시마, 사가,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한반도, 타이완
(미야자키[20]), (후쿠오카[21]) 오이타, 미야자키, 후쿠오카 사세보 진해(한반도)
마궁(호코청)
관동주 사세보 진수부 관동주 및 해상 - - - 뤼순커우(관동주)
남양 요코스카 진수부 남양군도 위임통치구역 및 해상 - - - -

9. 지상전

9.1. 해병대

1870년 10월 26일, 일본 해군은 영국 해병대를 그대로 모방해 해병대(海兵隊)를 창설한다. 당시 해병대는 전문적인 상륙전 부대가 아닌 범선 시절의 함정간 승선 전투, 함정 및 해군 기지 경비, 군기 유지, 육전대 편성시 포함, 군악 연주 및 의장 등의 임무를 맡았으며, 보병포병, 악대, 고대로 구성됐다. 초창기엔 수병을 수부/화부, 해병대원을 해병이라 불렀고, 모든 해군의 비승선 부대 사병들을 해병대를 총괄하는 수병본부(水兵本部)에서 관리하기도 했다. 1871년에는 해병사관학교(海兵士官学校)도 설립되어, 해군병학교와 별개로 해병대 사관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해병대는 1874년 사가의 난, 모란사 사건, 운요호 사건 등에 투입됐다.

1876년, 해군은 해병대가 굳이 반독립적으로 존재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 악대를 제외하고 해체하여 통상적인 수병들이 배치되는 육전대 체계로 바꿨으며, 해병사관학교도 해체해 기존에 임관한 사관 및 생도들도 해군병학교 출신과 동일하게 통폐합한다.

해병대의 경우 해군과 다른, 영국 해병대와 유사한 복제를 착용했으며, 해병대 해체 후 남은 악대원들도 기존 해병대 피복을 착용하다가, 러일전쟁이 끝나고 나서 통상적인 해군 피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9.2. 육전대

파일:external/www.warlordgames.com/Rikusentai-_300_.jpg
해군 육전대(海軍陸戦隊) 혹은 육전대(陸戦隊)는 일본 해군에서 운용한 지상전 부대이다.

해군 육전대는 의화단 운동, 러일전쟁, 칭다오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해병대 해체 후에는 해군의 지상전을 수행하는 유일한 부대가 되었다. 육전대는 상시 편제된 것이 아니고 해군 함정 승조원을 차출해 임시로 구성하는 부대였으나, 진수부를 비롯한 해군 육상기지들에 설치된 "해군특별육전대"는 상설 부대였다. 해군특별육전대에는 공정부대가 있었고 1942년에 일본군 첫 공수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해군특별육전대 외에도 경비대, 방공대, 근거지대 등의 특이한 육전대들이 대거 있었다.

육전대는 해군 장교들 사이에선 좌천되는 곳이었고, 사병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분위기 험악하기로 유명한 일본 해군 내에서도 똥군기가 심한 축에 들었고, 사기도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육군한테 질 수 없다 마인드로 인해 훈련은 빡센 편이었으며 그에 따라 해군육전대의 임무가 돋보이는 활약을 하였다. 1943년부터 조선인을 지원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군이 이들을 집중 배치한 곳도 육전대였다. 소수의 인원이 기지 경계부대 및 지원부대나 항공부대에도 배치됐다. 해군에선 조선인들의 사보타주 등을 우려, 함선 근무는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22]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광복 이후 건군기(建軍期)에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자 일본군 출신 인사들도 해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1949년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자 해군에서 해병대 소속으로 대거 전환했는데, 위에 서술한 것처럼 일본군 출신은 함정 근무자가 전무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함정 운용을 다시 가르치는 것보다 잘하던 육전을 맡기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때문에 해병대에는 해군과 달리 일본군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육/공군 마냥 일본군의 잔재가 많이 남았고 현재까지 골치를 썩인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 해병대/악습 문서 참조. 해군도 악습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본군으로부터 계승된 것은 아니며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해군이야말로 일본식 용어를 제일 많이 쓰는 군종인데, 이건 해군의 축이었던 상선사관들이 일본식 용어에 익숙해졌던 탓이었다. 지금도 선박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본식 용어를 많이 쓴다.

10. 항공대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육·해군 항공병기
파일:일본 공군 라운델.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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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항공대
단좌 전투기 Ki-27, Ki-43 하야부사, Ki-44 쇼키, Ki-61 히엔, Ki-84 하야테, ◈Ki-87, ◈Ki-88, ◈Ki-94, ◈Ki-98, Ki-100, †ⓩKi-162, ◈ⓩKi-200 슈스이, ◈ⓩKi-201 카류, †ⓩKu-4
복좌 전투기 Ki-45 토류, ◈Ki-83, Ki-102, ◈Ki-93
폭격기
습격기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BR.20 치코냐, Ki-21, Ki-30, Ki-32,
Ki-48, Ki-49 돈류, Ki-51, Ki-67 히류, †Ki-91
자살 공격기 Ki-115 츠루기
훈련기 Ki-9, Ki-6, Ki-17, Ki-55, Ki-54, Ki-79, Ki-86
정찰기 Ki-16, Ki-36, Ki-46
해군
항공대
<colbgcolor=#2f4f2f> 함재기 <colbgcolor=#2f4f2f> A 함상
전투기
A5M, A6M 제로센, A7M 렛푸,†20시 갑전투기,†N1K3-A 시덴 카이 二
B 함상
공격기
B5M, B5N, B6N 텐잔, B7A 류세이
C 정찰기 C3N, C5M, C6N 사이운,▼D4Y1-C
D 함상
폭격기
D1A, D3A, †D3Y 묘조, D4Y 스이세이
E 수상정찰기 E2N, E7K, E9W, E10A, E13A, E14Y, E15K 시운, E16A 즈이운
F 수상관측기 F1M, F1A
G 육상공격기 G3M, G4M, G5N 신잔, G8N 렌잔, †G10N 후가쿠
H 비행정 H6K, H8K, H11K 소우쿠
J 국지전투기 J1N 겟코, J2M 라이덴, †J3K 17시 국지전투기, ◈J4M 센덴, ◈J5N 텐라이, ◈J6K 진푸, ◈J7W 신덴, †ⓩJ7W2/J7W3 신덴 카이, ◈ⓩJ8M 슈스이, ◈ⓩJ9Y 킷카, ▼N1K-J 시덴, ▼N1K2-J 시덴 카이, ▼N1K3-J 시덴 카이 一, ▼N1K4-J 시덴 카이 三, ▼†A7M3-J 렛푸 카이
K 훈련기 K5Y, K9W 코우요, K10W, K11W 시라기쿠, ▼A6M2-K, ▼M6A1-K 난잔
L 수송기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DC-2,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L2D, L3Y, L4M, ▼H6K-L, ▼H8K-L 세이쿠, ▼H11K-L 소우쿠, ▼G5N2-L 신잔 카이
M 특수공격기
MX 특수활공기
MXY-7 오카, ◈(제식명 불명)N 토카, M6A 세이란, D4Y4 스이세이
N 수상전투기 N1K 쿄후, ▼A6M2-N
P 폭격기 P1Y 긴가
Q 초계기 Q1W 토카이, Q2M 타이요, †Q3W 난카이
R 육상정찰기 R2Y(세이운, 케이운), ◈ⓩR2Y2 케이운 카이, ▼J1N1-R
S 야간전투기 ◈S1A 덴코, ▼J1N-S 겟코, ▼P1Y1-S 바야코, ▼P1Y2-S 쿗쿄, ▼D4Y2-S 스이세이
<colbgcolor=#000000> 노획 항공기 파일:소련 국기.svg LaGG-3-8, I-16, 투폴레프 SB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F2A 버팔로, P-40, B-17(D/E), P-51C, F4U 콜세어, F6F 헬캣, 커티스 BT-32, CW-21, DB-7, 마틴 139
파일:영국 국기.svg 호커 허리케인, 브리스톨 블렌헤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독일로부터 수입한 기체 하인켈 72, A7He, AxHe, 하인켈 He 119, 융커스 Ju 87 슈투카, 메서슈미트 Bf 109E-7, 포케불프 Fw 190A-5, 메서슈미트 Me 210 A2, 메서슈미트 Me 410, ⓩ메서슈미트 Me163, †ⓩ메서슈미트 Me 262, †포케불프 Ta 152, †융커스 Ju 390, †V2 미사일
글라이더, 무동력기, 미사일 Ki-147, †Ki-148, †MXY8 아키구사
◈ 시제, 프로토타입 / † 페이퍼 플랜, 수입 실패 / ⓩ 제트 혹은 로켓 엔진 장착기 / ▼ 타 목적 기체를 유용함
국지전투기: 일본군이 운용했던 본토 방어 및 폭격기 요격 전용 전투기. 요격기 문서 참조.
※ 나무위키에 문서가 없거나 이 틀에 기재되지 않은 일본군의 항공병기 전체 목록은 일본 항공병기 설계안 문서 참조.
연합군(특히 미국)이 대전기의 일본 항공기를 지칭할때 사용했던 코드에 대해서는 연합국 코드명 문서 참조.
템플릿:일본 제국의 항공병기를 참조해 주세요. 전반적인 내용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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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군의 운용장비 | 파일:jet_icon__.png 항공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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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항공모함 등의 이유로 항공부대를 운용했다. 1904년에 최초 기안이 검토됐고 풍선을 운용하는 육군과 달리 해군은 정찰이 필요하단 이유로 1912년에 해군항공기술연구회가 설치됐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2,900대의 항공기를 운용했다.[23] 또한 항공대 내에서도 역할별로 받는 혜택과 차별이 달랐다.

조종사 같은 고급 인력은 많은 월급과 복지를 받았지만 전시 중에는 그 누구보다 가혹하게 살아야 했다. 하루평균 8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비행해야 해서 비행기 내부에는 오물과 토사물이 가득했으며[24] 졸음운전으로 항공모함에 착함하기 전에 공중 사고가 일어나는 것도 빈번했다.[25] 또한 진주만 공습 같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하루종일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절대 좋은 보직은 아니었다.

정비병 같은 비전투 요원은 은근한 멸시와 차별이 있었으며 그렇다고 마냥 쉬운 업무는 아니었다. 시간이 날때마다 함재기에 수백KG짜리 폭탄이나 어뢰를 다는 연습을 하고 또 배에 불이 났을때에 진압하는 훈련을 하는 등 굉장히 고되었다. 그나마 위안점으로는 육군과는 다르게 밥과 시설이 좋았다는 것. 해군이 워낙 고된일 이기에 귀하디 귀했던 쌀밥을 주거나 설탕 생산량도 적은데 싹싹 긁어 모아 별사탕을 만들어 주는 등, 육군에 비해서는 훨씬 좋았다. 게다가 조종 뿐 아니라 기체 정비 등의 기술은 민간에선 쉽게 취득하기 힘든 고급 기술이라 전역 후 일자리를 구하기 쉬워, 신병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은 편이었다.

11. 특별경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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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본 해군이 보유했던 군함 목록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본군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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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카제급, 카미카제급, 무츠키급, 특1형 후부키급, 특2형 아야나미급, 특3형 아카츠키급, 하츠하루급, 시라츠유급, 아사시오급, 카게로급, 유구모급, 시마카제급, 아키즈키급, 마츠급, 타치바나급
사쿠라급, 모모급, 나라급, 모미급, 와카타케급, 제101호 초계정C, 제102호 초계정C
잠수함
(SS)
L급, 로 100형, 71호, 해중형(로-34), 해대 1형, 해대 2형, 해대 3형, 해대 4형 해대 5형, 해대 6형, 해대 7형, 순잠 1형, 순잠 2형, 순잠 3형, 순잠 갑형, 순잠 을형, 순잠 병형, 순잠 정형, 센토쿠급, 키라이센급, 갑표적, 삼식잠항수송정 로500, 유보트 Type XC
경순양함
(CL)
텐류급, 쿠마급, 나가라급, 센다이급, 유바리, 아가노급, 오요도, 815형, 이오시마C, 야소시마C
장갑순양함 이즈모급R, 카스가급
중순양함
(CA)
후루타카급, 아오바급, 묘코급, 타카오급, 모가미급, 토네급, 이부키급
순양전함
(CC)
공고급, 아마기급, 13호급, B-65
전함
(BB)
카와치급, 후소급, 이세급, 나가토급, 카가급, 키이급, 후지모토 전함 계획안, A-140 전함, 야마토급, 슈퍼 야마토급
경 / 개조 / 호위항공모함
(CVL/CVE)
호쇼, 쇼호급(쇼호-즈이호), 류호, 히요급(히요-준요), 치토세급(치토세-치요다), 다이요급(다이요-운요-추요-신요-카이요), 시마네마루급-야마시오마루
정규항공모함
(CV)
아카기, 카가, 류조, 소류, 히류, 쇼카쿠급, 운류급, G18, 다이호, 카이다이호, 시나노
수상기모함
(AV)
노토로, 카모이, 아키츠시마, 미즈호급, 닛신
강습상륙함 아키츠마루급, 쿠마노마루
연습함 / 포함
(CL/FF)
카토리급, 하시다테급, 아타카급, 사가급, 아타다C
어뢰정 치도리급, 오오토리급, 갑형 어뢰정, 을형 어뢰정
해방함
(DE)
시무슈형, 에토로후형, 미쿠라형, 히부리형, 우쿠루형, 제1호형, 제2호형
특공 병기 신요, 마루레, 가이텐, 카이류, 후쿠류
군수지원함
공작함 아카시, 아사히
급유/급탄/급병함 시레토코급, 온도급, 카자하야, 하야스이, 타카노급, 하리오급, 무로토급, 카시노
급양함 마미야, 이라코, 노사키
상륙함정 신슈마루, 대발동정, 제101호형 수송함
잠수모함 진게이급, 타이게이
잡역선 아스카C, 아타다C
취소선: 계획만 되거나 건조 중 취소
※ 윗첨자: 일본 제국 육군 소속 함정
※ 윗첨자C: 노획 함선
※ 윗첨자R: 재취역한 함선
※ 윗첨자A: 전후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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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참전 이력

메이지 천황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한 후 보신전쟁을 기점으로 한 일본제국 해군의 참전이력이다.

14. 상선사관에 대한 이해심 부족

밑에서 후술하겠지만 당시 일본 해군은 해군병학교 출신들이 해군을 이끌도록 되어 있는데 그건 바로 그들의 우월주의, 선민사상, 엘리트의식이라는 것에 빠져 있기 때문 당시 조선인, 부라쿠민, 대만인, 류큐인 같은 이런 소수 계층은 당연히 받아주지 않으며 같은 설령 받아준다 해도 해군병학교가 아닌 고등상선학교 출신이나 육군 출신(삼식잠항수송정 승무원)인데 당연히 이들을 무시한다. 그나마 육군은 근본 자체가 다르고 본인들 상황 때문에 예외로 치지만 상선사관은 자신들의 우월의식에 의해 배제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상선사관 으로 구성된 해군 예비생들은 지휘권을 갖지 못해 해군병 학교 출신들에 비해 전사자 비율이 매우 컸다. 다른 나라의 상선사관은 하다 못 해 장교로 받아 주는데 이런 전략 의식에 이해심이 없던 일본 해군은 이마저도 하지 않았던 것. 물론 해군병 학교 출신들의 선민사상도 한 몫 했다. 당연히 이들은 콧대가 높았으며 자존심과 오만함이 충만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일본 해군은 전후 해상보안청해상자위대로 찢어졌다.

15. 파벌

일본 육군과 마찬가지로 파벌이 많은데 황도파처럼 친미, 친영 으로 분류되는 조약파(대표적으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요나이 미츠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 노부히토 친왕), 반대로 반미에다 함대결전사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조약에 대해 앙심을 품고 전쟁을 부르짖는 함대파가 있었다. 또한, 그 함대파 내부에서도 파벌이 갈리는데, 주로 거함거포주의를 모토로 삼는 전함파, 어뢰를 많이 이용하자는 수뢰전파, 상륙작전을 중심으로 하는 육전대파, 야마모토 이소로쿠처럼 항공기를 이용한 항모를 쓰자고 주장하는 항공파, 자폭 병기로 닥치는 대로 닥돌해 자폭하자는 옥쇄파, 육군과 잘 해보자는 육군파도 있다. 그리고 학교 출신에 따라서 구분되는데 나름 자존심과 엘리트 의식이 있는 해군병학교 출신으로 이루어진 정규 해군 사관들과 고등상선학교 출신으로 구성되어 지휘권이 없어 전사자가 더 많았던 해군 예비생들이 있다. 이들 2개의 파벌은 전후 각각 해상자위대해상보안청으로 분열된다.

16. 관련 문서



[1] 같은 욱일기이지만 중심의 태양 모양이 왼쪽에 살짝 치우친 점에서 육군기와 다르다. 그리고 이 깃발의 디자인은 해상자위대에 계승되어 현재도 사용된다. 다만 위키미디어 공용에서는 해군의 욱일기가 색이 어두운데, 일장기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색조가 지정된 것은 아니다.[2] 육상자위대도 욱일기를 쓰지만 뻗어나가는 빛줄기가 8개짜리인 8조(条) 욱일기고, 해상자위대는 일본군 시절의 16조를 그대로 이어서 쓴다.[3]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한다. 일본 육군이 주도하던 참모본부에서 해군이 떨어져나온 이후 "군령부"라는 독자적인 명칭을 사용했다.[4] 해군반성회에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해군에서 양식파가 대거 실각했으며 대동아전쟁의 발단이 이 사건이라는 발언까지 있다.[5] 메이지 유신 이후 군계 수장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1898년 원수육군대장으로 계급승진)가 바로 육군출신, 여기다가 초창기 조슈번 출신들이 육군을, 사쓰마번 출신들이 해군을 구성하는 데 중심축이 되었는데, 세이난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사쓰마번 계열들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더하여서 야마가타 이외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모두 조슈번 출신이였다. 정치 주도권 다툼은 사실상 문민 관료와 육군 두 집단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해군 출신 총리 등은 두 집단의 합의하에 일종의 중재 수단으로 배출되는 편이었다.[6] 재정, 회계를 당시 일본에선 주계라고 불렀다.[7] 일본제국해군 기술병과 중장(造船官)이자 도쿄제국대학 총장 역임[8] 반면 육군에서는 학력과 성적은 일절 관계 없이 모두가 똑같이 개 같은 취급을 받았다. 장교들은 출신학교에 따라 인맥을 타느라 계급에 영향이 있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능력이 중시되었고, 하사관들도 장교 진급이 가능했다. 또 이렇게 진급한 하사관들은 장교들과 계급상 규정된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비육사라고 암암리에 무시되는 건 장교들 사이에서 마찬가지긴 했다. 게다가, 비전투병과 장교의 질과 대우는 해군이 앞서 언급한 이유로 훨씬 좋았다.[9] 사실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병참 능력은 진보하는 축이었다. 당장 해외시장에서 사오거나 영미의 지원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야 했던 러일전쟁 즈음과 달리 어지간한 장비는 훨씬 대규모로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보급의 범위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넓어졌다.[10] 사실 말 그대로 원론적 관점에서 보급을 무시하는 나라는 거의 찾기 어렵다. 오늘날 북한조차도 일반인들에 비해 군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의복이나 식량 등의 지원을 해주려는 경향을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군인들은 소속국의 일반적인 국민들에 비해 잘 먹어야 했고 실제로도 대부분 잘 먹었다. 문제는 그러한 보급을 적시적소에 수행하는 노하우를 일본은 경시했다는 것이다.[11] 런던 해군 군축조약 등을 거치고도 태평양 개전 1년 전인 1940년 6월 기준으로 항공모함 8척, 전함 10척, 순양함 47척, 구축함 134척, 잠수함 66척을 보유했다.[12] 어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노량진 같은 곳.[13] 현재의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 남동부를 지배한 곳으로 당시 현 야마구치현 인근을 중심으로 한 조슈 번(나가토국)와 함께 일본 정치, 군사 쪽에서 강세를 보인 세력으로도 유명함. 이곳을 다스리던 가문이 그 유명한 시마즈 가문이다.[14] 여기서가 해군의 위상이 아주 높아질 수 있는데, 러일전쟁에서 육군은 이미 장악된 한반도를 경부선과 경의선을 타고 지났으며, 압록강을 건너 봉천까지는 청일전쟁 당시 이미 지나갔던 지역까지 가는 데에 상당수의 전력을 소모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러시아의 극동육군은 북만주일대가 중심지였기에 반드시 이곳까지 가야 했음에도, 당시에 이곳까지는 철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에 보급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해군이 당시 세계적으로 알아주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기면서 극동육군의 지연전을 후퇴로 만들어버릴 수 있게 되었고, 일본으로의 상륙을 방지하면서 러시아로 하여금 휴전협정에 나서도록 압박할 수 있었다.[15] 사실 자위대 자체가 일본군의 구타, 가혹행위가 상당부분 남아있다.[16] 함대 사령장관 혹은 사령관이 부재할 시 최선임[17] 진한글씨는 해상이 없는 행정구역[18] 아리아케 만을 제외한 미야자키 현의 해상[19] 무나카타군 및 온가군, 이동해상[20] 제2 해군구에 포함되지 않은 해상[21] 미야자키현의 해상의 가운대 아라아케만 포함[22] 사실 이건 비단 조선인만은 아니라서, 순혈주의가 강했던 일본 해군은 함선에는 무조건 일본인 수병만을 태웠다.[23] 총합이 2,900대인 것이 아니라, 항공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을 때의 운용량이다. 저 시점에도 예비 전력을 합치면 최소한 4,000대며, 2차 대전기 일본이 생산한 해군용 항공기의 총합은 10,000기 정도였다.[24] 일본은 태평양 전쟁 후반부로 갈 수록 미국에게 많은 섬과 비행장을 빼앗기기고, 일본 상부도 비행기 항속거리 늘리는데에만 급급하지 정작 조종사들이 긴 항속거리를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안 생각했기 때문이다.[25] 이걸 해결하겠다고 각성제까지 먹여댔는데, 각성제의 정체는 바로 필로폰이었으며 현재도 마약으로 분류되는 만큼 계속 먹여서 좋을 건 별로 없었다.[26] 당시의 사명은 '일본광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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