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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표적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군 군함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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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갑표적/Example1.jpg
파일:attachment/갑표적/Example2.jpg

1. 개요2. 제원3. 개발4. 운용5. 특징
5.1. 장점5.2. 단점
6. 평가7. 여담8. 종류9. 기타

1. 개요

甲標的 (こうひょうてき). Ko-hyoteki-class submarine.

일본 제국일본군 해군이 운용했던 잠수정.
총 101척이 생산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모델에 따라 갑표적 갑(甲)형, 을(乙)형, 병(丙)형으로 나뉜다.

2. 제원

파일:attachment/갑표적/Example.jpg
종류시제초호기
(試作初号機)
시제이호기
(試作二号機)
(생산번호 No.1 - No.2)
갑(甲)형
(생산번호 No.3 - No.52)
을(乙)형
(생산번호 No.49 - No.53)
병(丙)형
(생산번호 No.54 - No.100)
배수량
(잠항시)
42t45t47t48t50t
전장23.3m23.9m23.9m24.9m24.9m
전폭1.824m1.85m1.85m1.85m1.88m
전고3.074m3.1m3.4m3.4m3.43m
흘수선
(부상시)
1.854m1.88m1.88m1.85m1.88m
동력기관특B형 축전지 224기
전기모터(600 bhp) 1기
동축반전스크류 1기
특D형 축전지 224기
전기모터(600 bhp) 1기
동축반전스크류 1기
특D형 축전지 224기
전기모터(600 bhp) 1기
동축반전스크류 1기
특D형 축전지 224기
전기모터(600 bhp) 1기
전기발전기(40 bhp) 1기
동축반전스크류 1기
특D형 축전지 208기
전기모터(600 bhp) 1기
전기발전기(40 bhp) 1기
동축반전스크류 1기
부상시
속도
자료없음자료없음자료없음6knot(11km/h)6knot(11km/h)
잠항시
속도
25knot(46km/h)25knot(46km/h)19.0knot(35.2km/h)19.0knot(35.2km/h)18.5knot(34.3km/h)
부상시
항속거리
자료없음자료없음4knot(7.4km/h)로 100mile(160.9km)6knot(11km/h)로
500nmi(930km)
6knot(11km/h)로
500nmi(930km)
잠항시
항속거리
자료없음자료없음9knot(17km/h)로
15.8nmi(29.3km)
6knot(11km/h)로
84nmi(156km)
9knot(17km/h)로
15.8nmi(29.3km)
6knot(11km/h)로
84nmi(156km)
8.5knot(15.7 km/h)로
15.4nmi(28.5km)
4knot(7.4km/h)로
120nmi(220km)
시험시
잠수한계
100m100m100m100m100m
승조원2명2명2명2명3명
무장533mm(21inch)
89식어뢰 2기
450mm(18inch)
97식어뢰 2기
450mm(18inch)
97식어뢰 2기
(나중에 2식어뢰로 교체)
450mm(18inch)
2식어뢰 2기
450mm(18inch)
2식어뢰 2기
제조소구레(呉)해군공창구레(呉)해군공창카라스코시마(烏小島)해군공창
(No.3 - No.20)
우라사키(大浦崎)해군공창[1]
(No.21 - No.52)
우라사키(大浦崎)해군공창우라사키(大浦崎)해군공창
건조수총계 1척총계 2척총계 50척
(나중에 4척은 을(乙)형으로 개조)
총계 5척
신규생산 1척(No.53)
갑(甲)형에서 4척이 개조
(No.49 - No.52)
총계 47척
실전용 37척
연습용 10척
제조기간1932년 - 1933년1938년 - 1940년1940년 - 1943년1943년1943년 - 1944년

3. 개발

1931년 11월에 일본의 함정본부(艦政本部) 제1부 제2과에서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런던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가상적인 미군보다 약한 일본군 해군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궁리했다. 아이디어의 방향은 주로 주력함끼리 함대결전이 일어나기 전에 적 해군의 전력을 깎아내릴 수단을 찾고 개발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중에서 갑표적의 원안이 된 것은 요코 다카요시(横尾敬義) 예비역 해군대좌가 제안한 어뢰육공안(魚雷肉攻案)이다. 이 방안은 어뢰에 인간이 탑승해서 조종함으로서 목표물에 어뢰를 확실하게 명중시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중에 나오는 카미카제 병기인 가이텐과 비슷한 발상이었다. 이 방안은 해당 과의 조직원들의 관심을 모았으나, 당시의 일본군 해군은 아직 정신상태가 그럭저럭 양호한지라, 자살특공병기는 사용하기 꺼림칙해하던 상황이었으므로 해당 방안을 소형 잠수정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 외에 이탈리아 해군의 항구침투방식이나 민간 잠수장비등의 영향도 갑표적의 초기안을 잡는데 영향을 발휘했다.

이렇게 해서 1931년 12월에 함정본부 제1부 제2과장에 키시모토 카네지(岸本鹿子治) 대좌가 부임하면서 갑표적의 개발이 결정되었다. 기초 설계는 아사쿠마 도시히데(朝熊利英) 조병중좌가 담당했는데, 스스로는 이런 무기가 과연 제대로 만들어질 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위에서 지시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므로 설계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1932년 6월에는 길이 12m의 모형을 완성해서 공기창(空技廠)의 수조실험실에서 항행 상태시 수류의 상황을 조사했는데, 사령탑 주위의 물줄기가 빠를수록 와류가 선체의 겉면을 따라 강하게 흐르는 바람에 추진기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으므로 실험결과에 따라서 설계를 변경했다.

1932년에 일본군 해군 상층부에서 요청한 스펙은 전장 25m, 배수량 42t, 수중최고속력 30노트를 발휘하고, 항속력은 50분 이상, 공격수단은 53cm 어뢰 2개를 장착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3개의 설계안을 수립했다.

당시의 소형 잠수정답지 않게 속도가 빠른데, 그 이유는 원양에서 적의 주력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30노트의 속도는 당시의 일본군이 예상한 미국 함대의 속도인 20노트의 1.5배로, 이 정도의 속도차가 있어야 제대로 어뢰공격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리고 항속거리 50km는 전함 주포의 포격거리를 약간 넘어가는 수준으로, 적의 반격을 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거리였다. 그러나 21세기의 기준으로도 만만치 않은 요구안인데도 불구하고 당시의 일본군 해군은 스스로를 소형 잠수정을 제조할 시 필요한 고성능 축전지, 소형 모터, 내압 선체 등의 물건에 대해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위의 조건을 충족하는 무기의 현실화는 가능하다고 믿었다.

위의 3가지 안중 제1안이 갑표적의 기본안이 되었다. 제1안은 앞서 설명된 요구사항을 충족했을 뿐 아니라, 제조가격이 1척당 15만엔으로 예상되었기에 매우 저렴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가격이 상승해서 1942년에는 1척당 30만엔이 되었다.) 해당 계획은 다카사키 다케오(高崎武雄) 대좌가 직접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伏見宮博恭王) 군령부총장에게 설명해서 결재를 받은 후,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해군대신에게 보고했다. 군령부 총장은 자살특공무기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 인정했으며, 해군대신은 상기되었듯 가격이 싸다는 점 때문에 제작을 허용했다.

안건이 통과된 다음, 구체적인 개발을 위한 회의가 만들어졌다. 설계 주책임자인 아사쿠마 조병중좌를 비롯해서 축전지 전문가인 나와 타케시(名和武)등 어뢰, 조병, 조선과 관련된 기술사관들이 참석했다. 개발을 추진한 키시모토 대좌는 어뢰쪽 권위자였다. 하지만 회의에 잠수함의 설계 권위자는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갑표적은 잠수정의 성격보다는 말 그대로 인간어뢰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이는 나중에 나타나는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최초로 만들어진 특수잠항정은 "대잠폭격표적"이라는 이름하에 설계가 시작되었으며, 3개월후에 설계가 완료된 다음, 구레해군공창 어뢰실험부에서 시제품 제작이 시작되었다. 1933년에 완성한 1차 프로토타입은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시 앞바다에서 내압 시험을 실시했으나 수심 100m에서 어뢰발사관실 내부의 부력 탱크가 압괴했다. 1933년 6월에는 축전지에서 발생하는 수소 가스를 흡입해서 처리하는 장치를 육상에서 시험했다. 이와 더불어서 갑표적 내부에서 수소, 이산화 탄소 농도를 조사했으며, 통풍, 밀폐, 오수 펌프를 시험했다. 그리고 잠수정의 안정성과 흔들림 주기를 확인했다. 이런 검사가 이루어진 후에 무인해상항주시험에서는 24.85 노트를 기록했다. 1933년 10월 3일은 2인이 탑승하는 유인항주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세토 내해나 고치 현 등지에서 외양에서의 동작시험도 실시되었다. 1934년 12월까지 실험이 진행되었으며, 해당 실험 기간 동안 시제품은 특수 잠항정 "A 표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시험 종료 후, 해당 시제품은 비밀 병기로 취급되어 엄중하게 보관되었다.

1937년에는 일본과 타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2차 시제품의 제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8년 8월에는 개량형의 제작에 착수해서 가능한 한 빨리 2척을 건조한 후, 유인실험을 할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제조된 2척의 실험용 갑표적에 대해 약간의 재작업이나 개조를 실시하면서 동시에 승조원 훈련을 비밀리에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표적을 제조 및 정비하고 승조원을 훈련할 전용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서 쿠레(吳) 군항 인근에 있는 쿠라하시 (倉橋島)의 우라사키(大浦崎)에 일명 "P"기지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지는 1942년 10월에 와서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제조는 다른 해군공창이 담당하고, 승조원 훈련 및 양성으로는 갑표적모함 치요다(千代田)를 이동기지로 선정해서 세토 내해등 각지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1939년 7월 7일에는 제2차 시제 갑표적의 건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2차 시제품 중 1호는 1940년 4월에, 2호는 1940년 6월에 건조완료했다. 그리고 이들의 1척 당 건조 비용은 26만엔이었다. 그리고 2차 시제품의 제조에서도 설계의 중핵은 함정본부의 인원들이 담당했으며, 잠수함 관련 기술자나 현장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2차 시제품들은 1940년 5월 5일부터 6월 6일까지 각종 육상 시험 및 성능 조사를 실시했고, 7월부터 8월에 걸쳐서는 치요다에서의 발진 시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매우 미흡했다.

그러나 1940년 11월 15일에 갑표적은 제식으로 채용되었다. 게다가 시험승조원 중 1명은 갑표적이 실용성이 없다고 상부에 의견을 넣었지만, 시험 종료 후에 강제로 다른 곳으로 전출시켜서 입을 막아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8일에 벌어지기 때문에 병기로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숙련된 인원을 조달하며, 훈련을 실시하면서 전략을 수립하는 등의 전력화에 사용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 밖에 없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10월 부터는 갑표적의 양산을 시작했다. 제조 훈령은 10월에는 3호에서 12호까지, 12월에는 13호에서 36호까지 갑표적을 건조하도록 지시했다.

4. 운용

태평양 전쟁 개전 이전의 갑표적 운영 구상은 다수의 갑표적을 갑표적 모함에 탑재한 후, 함대결전시 적 함대가 통과할 것으로 예측한 해역에 미리 갑표적을 투입한 다음, 주력 함대의 결전 이전에 갑표적으로 어뢰 공격을 해서 적의 전력을 점차 감소시킴으로서 주력함대의 결전시 일본군의 승리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갑표적 모함 3척을 지정해서 각각 12척의 갑표적을 탑재한 후, 적의 주력 함대 앞 수십km의 거리에서 갑표적을 발진시킨 다음, 갑표적 36척이 일제히 적 주력 함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전투가 끝난 다음 갑표적 모함은 다시 갑표적을 회수한다는 식으로 운용한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이론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적의 공군이나 함재기등의 존재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데다가, 함대결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하면 갑표적 수용이 불가능해져서 무익한 인명손실 및 장비손실을 가져온다는 점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2]

실제로 개전 직전에는 갑표적 자체의 문제점 및 항공력 문제로 인해 외양에서의 사용은 포기했으며, 그 대신 적의 항구에 잠입해서 어뢰 공격등을 수행하는 것으로 운용방식이 결정되었다. 이 방식에서는 이호잠수함(伊号潜水艦)의 후갑판등에 갑표적을 탑재하고 목표 항구 근처까지 운반한 다음, 갑표적이 스스로 발진해서 항구에 잠입해서 공격한다. 공격이 끝난 후에는 갑표적이 잠수함쪽으로 다시 귀환한 후, 갑표적 승조원만 다시 회수하고 갑표적은 미리 설치된 자폭장치를 통해 자침 처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진주만 공습, 시드니 항구 습격, 마다가스카르 공격에서 갑표적을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 진주만에서는 공습에 앞서 소수의 갑표적이 진주만에 침투했는데, 개중 한 기가 미해군에게 걸려서 격침당하기도 했다. 언급했듯이 항행시에는 사령탑을 내놓고 다녀야 하는데 지나가던 수송선에 이 모습이 딱 걸려버렸고, 근처에 있던 구축함이 출동해 4인치 함포로 사령탑을 박살내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꼬르륵. 2차 대전에서 미군이 올린 최초의 성과의 제물이 된 것이다.

전쟁이 한참 진행된 시점에서는 모함 없이 아예 근해에서 주로 사용, 어뢰를 쏜 후엔 헤엄쳐서(...) 탈출할 수 있게 운용하기도 했다.

5. 특징

5.1. 장점

5.2. 단점

따라서 독자항행에 상당한 지장이 올 뿐더러, 목표 식별 및 조준에도 악영향을 주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제대로 항해하려면 사령탑을 수면 위로 올려야 하므로 은폐따위는 이 시점에서 아웃이다. 잠망경을 사용해서 항행하려고 해도 잠망경의 시야도 좁은데다가 상기되었듯 길이가 3m에 불과하므로 수면 아래의 매우 얕은 심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적에게 들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방향타 뒤에 스크류를 설치한 구조 덕분에 선회력등이 매우 안 좋았다. 저속으로 선회하더라도 400m 수준의 선회범위가 나오는데, 이는 거의 대형함 수준의 선회력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문제점은 어뢰 발사시에 더 커진다. 어뢰를 쏘면 1발당 1톤 가까운 부력이 발생하면서 부력 균형이 깨져서 갑표적이 수면 위로 튕겨져 나오는 사태가 발생할 지경이었다. 이러면 이 시점에서 이미 조준선이 크게 흔들렸으므로 어뢰의 명중률은 저 하늘 너머로 사라진다. 여기에 더해서 앞서 언급된 느린 선회력과 미친듯한 흔들림 덕분에 갑표적을 다시 안정화시켜서 어뢰의 재조준이 가능해질 정도가 되려면 최소 30초가 필요했다. 덕분에 무유도어뢰를 가지고 이동목표에 사격하는 방식인 부채살식 어뢰투사가 불가능하므로 단발 발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최적발사거리가 800m라는 초근접거리가 된다.
그리고, 2명이라는 승조원 정원도 제대로 된 운용을 위해서는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각 승조원당 맡은 임무가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될 지경이었으므로 병(丙)형부터는 좁은 공간의 제약을 무릅쓰고 승조원을 3명으로 늘리게 된다.

6. 평가

개발 목적은 문제가 많고 성능도 미흡했지만, 운용을 어느 정도 제대로 했기에 일본군 기준에서는 평타를 친 물건이다.

초기의 개발 목적은 점감요격작전의 일부분으로서 원양에서 적 주력 함대를 습격하는 용도였지만, 작전 자체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해당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위에 언급된 단점이 매우 컸기 때문에 사용이 어려웠다는 설상가상의 상태에 놓인 것이 갑표적이었다.

하지만, 운용을 항구 습격같은 좀 더 잠수정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변경한 후에는 말 그대로 몰래 숨어들어가서 2발 쏘고 나오는 잠입형 히트 앤 런이나 정찰에 자주 쓰였으며, 제대로 된 군함을 격침시킨 적은 없지만 그래도 상선을 몇 척 격침시키거나, 시드니에 숨어들어가거나 진주만 공습, 마다가스카르 공격 등에도 참가하는 등 나름대로 잠수정의 역할을 해냈다.

일본군도 이것을 자폭병기로서 운용한 것이 아니기에, 갑표적모함에는 회수용 크레인도 장비하는 등 나름 제대로 운용하려고 애를 썼다. 다만, 한정된 잠수시간과 항속거리 내에서 무사히 쏴서 맞추고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인데다가 설계상의 결함으로 귀환율이 자폭 병기 수준에 가까울 수준으로 적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결국 다른 목적으로 특화된 물건을 적절한 운용을 통해 원래 목적과는 다르게 사용하기에는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차라리 속도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무장을 간소화하면서 선체를 확장해서 특수부대가 탑승할 공간을 확보할 경우에는 이탈리아 해군이 보여주듯이 특수부대를 적 항구 내로 잠입시키고 회수하는 좋은 장비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원래 활약한 것의 몇 배에 달하는 전과를 기록했을 것이다.

7. 여담

흔히 자폭 병기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엄밀하게 따지자면 사실이 아니다. 진짜 자폭 병기였던 가이텐과는 달리, 이쪽은 가이텐에 비하면 그래도 멀쩡한 병기다. 물론 Y표적같은 것도 있지만, 계획이 취소되었으므로 갑표적은 자폭 병기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갑표적을 포함한 특수잠수정들은 기습을 전제로 한 무기며, 비밀 유지를 매우 필요로 한다. 그래서 갑표적은 A표적(A標的), H금물(H金物), TB표적(TB標的)등의 명칭으로 불렸다. 이런 명칭이 붙은 이유는 마치 육군항공대나 해군항공대에서 공항공기의 지상공격시 표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갑표적이라는 정식 명칭이 정해진 것은 1939년 7월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위에 설명한 위장명칭은 진주만 공습때까지 사용되었다.

8. 종류

생산량중 4척은 후술하듯이 을형으로 개조되었고, 일부 갑형이 연습용으로 개조되었는데, 후방 축전지실에서 축전지를 모두 제거하고 메인탱크와 대기실을 마련했으며, 사령탑 부분에 조종실을 추가한 것이다.
총 5척이 건조되었으나, 신규생산은 1척이며 나머지 4척은 갑형에서 개조된 물건이다.
생산량중 10척이 연습용으로 만들어졌는데, 기존의 병형에서 사령탑 부위에 조종실을 증설하고, 잠수정 상면에 내파용 구조물을 설치했으며, 대기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축전지를 탑재한 것이다.

일반적인 갑표적과는 달리 카미카제자폭 병기다. 사용방법은 갑표적을 개조해서 기뢰를 탑재한 다음, 진주만 항만의 수로같이 좁은 항구의 수로까지 침투했다가, 항공모함같은 대형함이 머리 위를 지나가면 자폭해서 대형함을 격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로를 막아버려서 미군이 항구를 사용하는 것을 한동안 방해하는 것이다.

이 계획이 취소된 이유는 인명을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뜩이나 항행시 흔들거리는 갑표적에 기뢰를 장착하면 항행중이나 잠복중에 민감한 기뢰의 신관이 제멋대로 작동해서 그냥 혼자 터지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계획이 폐기된 것이다.

9. 기타


[1] P 해군공창으로도 불림[2] 다만 이는 의외로 여지가 있다. 함대결전사상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함대결전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당시 일본군 교리상 일본 패전(좆망)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감히 함대결전에서 패배했을 때의 상황을 상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3] 이런 문제는 현재의 잠수함들도 겪는 문제인데, 어뢰를 발사하면 잠수함의 질량은 가벼워지는데 잠수하기 위해 주입한 물은 어뢰 발사 전의 무거운 잠수함을 기준으로 되어있어서 잠항 심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약간 떠올라버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수함들은 어뢰를 발사하고 발사한 어뢰 만큼의 물을 추가로 더 주입해 잠항 심도를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