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17 18:52:20

카이류


海龍 (かいりゅう) / Kairyu [1]
파일:external/blogimg.goo.ne.jp/d85bad1ad6dfa9e596f6a708dee19c42.jpg 파일:external/movie.geocities.jp/kairyu_1.jpg

1. 개요2. 제원3. 상세

1. 개요

초소형 잠수정인 갑표적의 제작 이후 일본군이 1945년에 개발한 초소형 잠수함으로 총 210대가 만들어졌다.

그쪽 동네에서 만들어진 특공병기가 다 그렇듯 이쪽도 제정신이 아닌데, 어뢰 2발과 600kg급 탄두를 장착한 물건으로, 갑표적과 가이텐이란 발상으로 만들어졌으나 사실상 어뢰 달아놓은 가이텐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기체는 요코스카 항만의 방어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일부는 미우라 반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가해진 미군의 핵폭격으로 인한 천황의 종전 선언으로 가이텐과 달리 실전에 참가한건 다행히도 단 한 척도 없었다.

2. 제원

3. 상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Kairyu_general_arrangement_sections.svg.png

카이류는 일반적인 잠수함과는 다르게 작은 날개가 있고 비행기처럼 상승과 하강을 했기 때문에 구조가 단순하고 건조기간이 짧은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해중 비행기의 발안은 기술적인 흥미성은 있으나 당시 기술로는 소수의 인원이 탑승하는 잠수정이 3차원 공간의 운동성, 안정성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어려웠다. 전쟁말기의 자재, 물자부족에 의해 품질이 저하되고 실용화된 카이류도 성능이 대폭으로 저하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카이류는 계획당시 목표 가까이까지 다른 잠수함에 운반되어 출격해 적함을 어뢰로 공격 후 아군 잠수함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귀환을 위해서는 아군과의 연락이 불가결했지만 수중전화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연락을 위해 서로 수상으로 떠 올라 위치를 확인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적에게 노출되는 상황을 연출하고 이미 제해권이 장악된 상황에서 함을 부상하는 짓은 자살행위였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귀환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또 갑표적과 마찬가지로 어뢰 발사 후 부력 평형 상태가 깨지면서 일시적으로 부력 상태가 되어서 뱃머리가 떠오르는 결점이 있었다. 이는 차탄발사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며, 잠항심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므로 이탈시에도 안좋은 영향을 준다.

이 때문에 후기의 카이류는 전황악화에 의해 함수부에 폭약을 가득 채워 아예 적함으로 돌격하는 특공병기로서 건조되게 되었다.

카이류는 속도가 낮았기 때문에 본토결전시 적 수송선단을 주 공격목표로 예정했었다. 그러나 가이텐보다도 속력이 낮은 카이류는 저속의 수송선을 상대로 해도 호위함선에게 막혀 공격하기는 힘들었으리라 전술가들은 평가한다.

그래서 초기의 카이류도 사실상 가이텐에 어뢰 2발 달아놓은 형상이며, 작전방식은 적함에 어뢰 2발을 발사한 뒤, 격침되지 않았을 경우 그대로 들이받는물건이었다. 후기형의 경우에는 그냥 가이텐 확대형이다. 게다가 패전직전에 만들어진 만큼 굉장히 조악했으며, 최대속도 역시 고작 7~10 노트일 정도로 갑표적 시절의 절반밖에 안 됐다. 효용성은 사실상 0라고 봐도 될 물건이었다.

패전후인 1945년 9월에 요코스카로 진주한 미군은 카이류를 노획 후 비밀기지와 생산공장도 발견해서 사진을 찍어 남겼다.

이 사진들은 미해군 역사센터가 보관, 공개하고 있지만 어뢰가 장착된 카이류는 없다. 이는 1945년부터 갑표적보다 성능이 좋은 특수잠항정인 코류(蛟龍)도 어뢰장비가 없는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카이류도 어뢰를 떼낸 후 사실상의 자폭을 목적으로 한 인간어뢰로서 양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의 야마토 박물관이 어뢰 2발을 탑재한 계획초기의 카이류를 전시하고 있지만 어뢰관련장비는 실제 양산 및 운용된 물건들은 없거나 있더라도 모두 제거된 상태로 본다.


[1] 바다의 용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