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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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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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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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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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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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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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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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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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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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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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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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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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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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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작전 · 필리핀 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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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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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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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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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colcolor=#fff> 오키나와 전투
Battle of Okinawa / Operation Iceberg
沖縄戦[1] / 沖縄の戦い /アイスバーグ作戦 / 天一号作戦
파일:attachment/battle_of_okinawa_shuri.jpg
슈리성성조기를 꽂는 미군
1945년 5월 30일, 오키나와현 나하시[2]
날짜 1945년 4월 1일 (3월 22일) ~ 1945년 6월 22일 (7월 2일)[3]
장소 일본 제국, 오키나와현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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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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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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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매케인 시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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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미카와 군이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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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이토 세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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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야하라 히로미치[9]
결과 미군의 승리
전력 전체 병력: 최소 54만 1천명[10]
지상군 18만 3천명[11]
미국 육군 제10군(야전군)
-제3상륙군단(미 해병대)[12]
-제24군단(미 육군)[13]
-제10군 전술항공군[14]
-미국 해군 지상부대
-제7[15], 27보병사단[16]
-제77, 96보병사단
-제1[17], 2해병사단[18]
-제6해병사단[19]
-제5함대 소속 함선들(51,57,58기동부대) 총합 1,800여척[20]
보병 14만명[21]
일본 육군 제32군
-제24보병사단
-제44독립혼성여단
-제62보병사단
-제5포병단
-일본 해군 오키나와 근거지대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제2함대 및 연합함대 함선들
피해규모 12,281명 전사, 239명 실종
36,631명 부상 (+ 비전투부상 26,621명)
군함 36척 침몰 및
기타 함선 300여 척 손상
항공기 760기 손실
전차 225대 손실
+ 영국군 62명~85명 전사, 82명 부상.
총 8만~10만 7천명 전사 및 실종[22]
17,000명 부상
15,000명 포로
군함 16척 침몰
항공기 1,430기 손실[23]
전차 27대 손실
민간인 8만명 이상 사망[24]
+ 한국인(조선인) 사망자 701명(이상)[25]

1. 개요2. 전략적 배경
2.1. 1944년 말~1945년 초2.2. 대만에서 오키나와로 방향을 바꾸다
3. 양군의 전투 준비4. 전투 개요
4.1. 10・10 대공습4.2. 지상 전투
4.2.1. 게라마 열도 공략전4.2.2. 오키나와 본토 공략전
4.3. 해상 전투
4.3.1. 기쿠스이 작전
4.3.1.1. 야마토 특공: 보노미사키 해전
5. 참상6. 군사적 영향7. 기타8.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철의 폭풍(鉄の暴風)[26]
리치몬드 터너 제독(해군 중장/상륙함대 사령관):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일본군은 전쟁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구역에서는요.

체스터 니미츠 제독: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만 빼고 다 취소하도록.
미군이 전함 야마토를 격침시킨 직후 대화[27]
오타 미노루[28]: "...현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기에 (현 지사를) 대신하여 긴급히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오키나와에 적의 공격이 시작된 이래 육ㆍ해군 모두 방위를 위한 전투에 전력을 다하느라 정작 현민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현민들은 청년이나 장년 할 것 없이 모두 방위에 동원되었으며, 남은 노인과 아이들과 여자들만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포격으로 집과 재산이 불타버려 간신히 남은 맨몸 하나로 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장소에서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 왔습니다. (…) 오키나와의 실정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조차도 모조리 타버려서 먹을 식량도 겨우 한 달만 버틸 것만 있습니다. 오키나와 현민은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현민에 대해서는 후세에 특별히 배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 오타 미노루 해군소장이 6월 6일 오로쿠 반도에서 대본영에 보낸 전보[29]

1945년, 태평양 전쟁 후반기 오키나와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이오지마 전투가 벌어진 이오지마 섬과[30] 더불어 일본 영토에서 미일 군대가 충돌한 대규모 전투이며,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마지막 상륙전이기도 하다.[31]

최종적으로 미국이 승리하긴 했지만 미군 측 피해도 엄청났기에 (태평양 전쟁 중 단일 전역(Campaign)에서 미군 사상자의 최대 발생) 이후 미국이 일본 본토 상륙 이전에 원자폭탄을 쓰기로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전투이기도 하다. 한편, 여러 의미로 생지옥을 경험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도 큰 트라우마로 남은 전투이다.[32]

당초 미국은 일본이 점령한 중국내 영토를 먼저 탈환하려 했지만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을 실행해 중국군에 큰 손실을 입히고 해안가를 전부 수중에 넣자 중국에서의 작전이 어렵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본 본토를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수정,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2. 전략적 배경

2.1. 1944년 말~1945년 초

1944년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태평양 전선의 승패가 명확히 갈린 해였다. 마셜 제도 강습을 시작으로 라바울 무력화, 사이판 전투괌 탈환전, 필리핀 해 해전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의 항모 기동부대와 일본 해군 자체를 재기불능으로 빠뜨리면서[33] 미국은 이제 태평양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 시간을 정해놓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2.2. 대만에서 오키나와로 방향을 바꾸다

오키나와 침공 계획을 처음 내놓은 사람은 미국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사이판 전투 이후 체스터 니미츠어니스트 킹과의 회담 자리에서 킹 제독이 괌 이후에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은지 물었고, 스프루언스는 그 자리에서 "오키나와"라고 답했다.

미 해군의 기존 계획은 마리아나 제도 점령 이후 을 거쳐서 대만을 침공하여 일본의 식민통치 기관을 말살한 뒤 중국 본토에 상륙, 국민혁명군과 합세하여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만주조선으로 진격해 이들 지역을 모두 점령하여 전라도경상도를 발판으로 부산을 통해 일본 본토에 상륙, 최종적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으로 인해 이 대만 침공 계획은 그대로 무산되고 만다. 태평양 해역군에서는 대만침공론의 전략적 의의가 없어지자 팔라우 제도의 펠레리우 섬 침공 이후에는 차후 전략적인 목표가 없었고, 이대로면 필리핀의 루손 섬을 점령, 필리핀을 발판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명확한 마스터플랜을 가진 맥아더 장군이 본인의 소원대로 대일전의 단일 총사령관이 되어 태평양 함대가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떨어질 수도 있는 판이었다.

이 변화를 태평양 함대 내에서 감지한 것이 스프루언스 제독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니미츠가 태평양 해역군[34]의 육군 관계자들에게 이를 물었고,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킹 제독과의 9월 정기회담에서 대만 대신 오키나와를 침공할 것을 주장하고 근거[35]를 제시한다. 킹 제독이 이를 받아들여 10월 3일, 합동참모본부에 3월 1일까지 오키나와 상륙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아내게 된다.[36]

3. 양군의 전투 준비

3.1. 일본군

1944년 7월 필리핀 해전 패배 후 일본군은 첩호 작전 (捷号作戦)을 세웠다. 필리핀이 공격받을 경우 첩1호, 오키나와/대만 방면이 공격받을 경우 첩2호 작전이, 본토와 오가사와라 제도가 공격받을 경우 첩3호가, 홋카이도가 공격받을 경우 첩4호가 각각 발동되는 개념이었다. 이에 필리핀 방면으로 미군이 진공해 오고 44년 10월 첩1호 작전 (레이테 만 해전)이 발동되지만 작전은 실패, 궁지에 몰린 대본영은 1945년 초 새 방어계획으로 천(天)호 작전을 수립한다. 오키나와 방면이 천1호, 대만 방면이 천2호, 남중국해 방면이 천3호, 하이난 방면의 천4호로 계획되었고 미국이 오키나와 방면으로 진군하면서 45년 4월 1일 정식으로 천1호 작전이 발령된다. 그러나 천1호 작전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작전 계획이라는 것이 오키나와가 공격받을 경우 대만, 규슈, 필리핀에 전개한 항공세력이 일제히 총출격해 침공하는 미국 함대에 맹렬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오키나와 전투 발발 기준으로 필리핀은 일찌감치 무너졌고[37], 대만의 항공세력은 대만 항공전으로 소멸했기에 남은 건 본토의 전력뿐이었다.

이런 항공작전과는 별개로 오키나와 방위를 위해 1944년 3월 22일, 제32군이 창설되었다. 뒤이어 필리핀 해 해전사이판 전투, 제2차 괌 전투 등이 연이어 벌어지자 경악한 대본영은 필리핀과 오키나와에 예비 병력과 장비를 있는 대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중 다수는 필리핀으로 가다가 물고기 밥(...)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오키나와에는 충실한 전력 증강이 이뤄졌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육군의 핵심 전투부대는 아래 5개다.

이 외에 시설단(공병)이 만 명 넘게 있었고, 조선인들로 구성된 건설부대가 여단급으로 존재했고, 현지 민간인들을 강제로 동원한 전력이 40,000명 가량 되며 별도로 현지 청소년들, 남자 중학생 1,400명과 여고생들 600명, 도합 2,000명을 동원하여 제32군의 각급 부대에 잡역 및 보조병으로 편성했는데 이들은 각각 철혈근황대와 히메유리대로 현재 잘 알려져있다. 그리고 육군 외에도 일본 해군이 오키나와 기지 부대를 중심으로 하여 1만 명 넘게 있었고, 놀랍게도 오키나와 전투 기간 내내 해군은 육군의 지휘에 협조적이었다.[40][41]

추가로 이들을 지원해줄 항공세력으로 본토의 수많은 카미카제 기체들(...), 해상세력으로는 전함 야마토 및 약간의 호위함이 있었지만 해상세력은 오키나와 전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곳의 일본 육군 중 2개 사단만이 완전 장비를 갖췄다. 그러나 딱 하나, 오키나와 일본군에게 주어진 행운이 있었는데 일본군 치고는 비교적 넉넉한 포병 전력이었다. 본래 일본군 사단 및 여단 포병대는 미군에 비하면 양과 질 모두 열악하여[42] 보병 부대에 제대로 된 화력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군과의 교전은 2차대전 내내 고난 그 자체였다. 당시 미국/독일/소련 육군은 사단포병을 4인치 대의 야포를 주력으로 6인치 대의 대구경 야포를 지원 화력으로 구성했지만, 일본 육군 보병사단들은 대부분이 95식 75mm 야포나 동구경의 산포로 사단포병의 주력을 구성했다. 4인치 야포는 그야말로 지원화력이고, 그나마도 포병연대 전체의 야포수는 미/독/소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편이다. 보병여단의 포병대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10cm 이상의 중포는 아예 배치되지도 않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섬에 주둔한 24보병사단의 포병대에게 100mm 야포와 150mm 곡사포가 배치된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필리핀으로 가야 할 중포병 화력들이 수송로의 안전 문제 때문에 배치되지 못한 채 오키나와로 몰렸기 때문으로 일본군에게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행운이었다. 말 그대로 사단포병이 없던 62사단에게 포병 화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군단포병조차 열악하던 당시 일본 육군에게 야전군 직할로나 배치되는 중포들이 군단에게 무더기로 굴러들어 온 것. 거기다 근거리에서 미군들에게 긴장감을 안겨줬던 98식 중박격포도 있었는데, 최대사정은 1.2km로 매우 짧지만 거대한 쓰레기통에 작약을 가득 채운 듯한 포탄 때문에 한번 터지면 파편량이 엄청나서 모여 있는 보병에게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건으로도 도저히 오키나와 방위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일본군과 미군의 전력차는 컸다.

3.2. 연합군

연합군의 공격부대는 당장 해군만 해도 압도적이었다.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는 50임무부대가 오키나와 인근 해역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철저히 장악하고, 50임무부대와 별도로 직접적인 상륙지원을 하는 51임무부대에는 화력지원을 위한 다수의 전함, 순양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별개로 사이판의 21폭격기사령부도 오키나와에 공습을 해주기로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상륙부대의 경우 육군과 해병대에서 각 1개 군단씩이 편성하여 제10군이 만들어졌다.

하나같이 베테랑들로 강훈련에 무지막지한 실전을 거친 정예들이었다. 장비도 풍부해서 사단마다 전차대대[50] 배속되어 있었고 포병화력도 강했다. 심지어 이게 정상편제인데, 오키나와서부터 일본군의 방어가 강해질 것이라 예상한 미군 지휘부는 침공을 맡은 각 사단에 예비병력과 각종 지원부대를 넉넉히 배속해줘서 사단마다 병력이 2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걸로도 부족해서 만에 하나 진격이 막힐 경우 예비부대로서 뉴칼레도니아에 육군 1개 사단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의 포병 전력이 일본군보다 훨씬 우세했다. 야포 수량만 비교해도 미군이 1.6배가 우세했고 야포 구경 규격도 미군은 100% 105mm 이상에 그중 절반은 대부분 155mm 이상 중포와 8인치 곡사포이며 거기에 미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가미카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순수 지상 전투 지원을 위해 전투기간 내내 수백 대의 미군 항공기가 근접항공지원 용도로 할당되었고 해상에서도 전함/순양함/구축함등 주력 전투함선들이 각급 지상군 부대에 매일 24시간 내내 할당되어 함포사격과 야간 작전의 조명탄 사격으로 지원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 해군의 화력지원에 대한 영상이다. 유튜브

3.2.1. 미군 지상군 전투서열

=====# 제10군 #=====
=====# 제3상륙군단 #=====
======# 휘하 사단 #======
=====# 제24군단 #=====
======# 휘하 사단 #======

4. 전투 개요

4.1. 10・10 대공습

1944년 10월 미군은 레이테 섬 상륙을 앞두고 일본군의 배후지(대만, 루손, 오키나와) 에서의 증원 전개를 차단시키고, 오키나와에서의 본격적인 작전에 앞서, 오키나와에 주둔한 일본 해군력 및 방공 전력 등을 미리 손보기 위해서 폭격을 계획하였다. 목표는 일본 군함이 다수 정박해 있는 나하항 및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 여러 활주로 등이었다. 44년 10월 9일 밤 미국 항공모함이 오키나와 근해에 도달하였고, 다음 날 오전 6시경에 출격, 공습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레이더 및 초계기의 부족 등으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게다가 공습이 있었던 10일에 오키나와를 담당하던 제32군의 도상연습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 각지의 사령관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지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병사들도 "정말 훈련 실감나게 하네"라고 생각하다가 대처가 늦어지기도 했다. 주민들도 공습을 훈련으로 오해하고 있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공습으로 일어난 화재가 11일까지 지속되어 나하시가지의 9할이 파괴되는 등, 오키나와는 이 공습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의 전투력은 심각하게 깎였다.

4.2. 지상 전투

4.2.1. 게라마 열도 공략전

오키나와 본도 공략 이전에, 미군은 상륙군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우려, 그리고 전투진행 중 전선보급기지로 활용할 가능성에 주목하여 나하에서 서쪽으로 30여 km 떨어진 게라마 열도에 대한 선행공격을 시작했다.

게라마 열도는 오키나와 본도와 달리 요새화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고 수비병력도 적었으며 중화기도 없었다. 일부 섬은 아예 병력 1명 없이 문자 그대로 텅텅 빈 곳도 있었다. 일본 32군 사령부는 미군이 큰 가치가 없는 게라마 열도를 공략할 것이라 전혀 예상치 못했고 최소한의 부대를 두어 나하를 침공하는 미군 함대의 뒤로 자폭보트 공격을 가할 계획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3월 26일 시작된 미군의 게라마 열도 공략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 수비대가 없는 섬에 상륙한 해병대 병력이 바로 다음 섬으로 재차 투입되기도 하였다. 전투가 일어난 섬은 몇 곳 없었으며 그나마 제대로 된 저항도 없이 의외의 상륙에 놀란 일본군이 내륙으로 후퇴하여 저항하다 전멸당할 뿐이었다. 때문에 상륙한 미군이 본 것은, 귀축영미의 선전에 세뇌당해 집단자결한 일본 민간인들, 미군을 격하게 환영하며 집단항복한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게라마 열도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도카시키 섬은 미군도 굳이 섬 전체를 점령하려 하지 않아서 방공부대 중심의 소수 육군 수비대가 섬 뒤쪽으로 후퇴하였고, 미군도 굳이 섬 전체를 점령할 필요성이 없어서 오키나와 전투 종결시까지 이들을 방치했다. 그러자 일본군 부대장이 미군에게 협상을 제시하여 미군이 자기들을 건들지만 않으면 우리도 미군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제안, 일본군의 병력은 소규모지만 굳이 그들까지 공격할 필요성을 못느낀 미군은 이 제안을 수락하여 일본군은 미군을 공격하지 않는 대신 미군으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보급(...)받는 기묘한 동거상태가 종전시까지 지속되었다.

4.2.2. 오키나와 본토 공략전

미군은 4월 1일, 오키나와 섬 중부 서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펠레리우 전투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오지마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은 해안 수비를 포기하고 내륙 수비에 주력해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자체는 대단히 순조로웠다.[55][56]

그러나 일단 내륙 점령을 위해 진격을 개시하자 각지에서 일본군이 격렬한 저항을 감행했으며, 그 결과 미군의 피해도 급속히 늘어났다. 이 당시 섬에서 농성하는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한 미군의 전술(함포로 해안 방어선 제거→상륙 후 거점 확보→공격해 오는 일본군 격멸)은 43년과 44년의 경험으로 이미 완성된 상태였으나, 이오지마의 일본군은 애초에 미군 격퇴 같은 건 아예 포기하고 최대한 동굴 진지에 틀어박혀 시간을 끄는 것을 택했고 소탕전이 이어지면서 미군 측의 피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오키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군은 먼저 류큐 왕국의 요새였던 우라소에 성(浦添城)를 주요 방어 거점으로 삼아 틀어박혔는데, 12세기 무렵 지어진 이 성이 완전 천연의 요새였던지라 초기의 미군의 육상작전을 지휘한 존 하지 소장이 '구조물을 폭격으로 싸그리 날려 버리지 않는 한 이곳의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소리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57] 그 다음으로는 류큐 왕국의 궁성이었던 슈리성은 일본 육군 제32군의 사령부로 개조된 채 방어를 담당하였다.[58] 한편 오키나와는 석회암 지대로서 가마(ガマ)라고 불리는 석회동굴이 많이 발달해 있는데, 일본군은 이 가마들을 기지로써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가마에 피난민들이 들어차 있는 경우에는 이들을 내쫓고 점거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지구전을 벌이며 미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였다. 슈리성 사령부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자 일본군은 오키나와섬의 남단 마부니(摩文仁) 진지로 후퇴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내려오면서 이미 남쪽으로 피난을 왔던 민간인들이 전투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의 민간인 사상자의 상당수는 이로 인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작전에 있어서 오키나와는 사석(捨石, 버리는 돌)으로서 일본제국 정부가 교섭에서 유리한 위치를 지킬 수만 있다면 민간인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본군은 끈질기게 버텼지만, 미군은 여러 차례 이런 전투를 겪어 어느 정도 대처 방안을 마련한 상태였고, 이오지마에 비해 큰 섬인 오키나와는 오히려 대규모 병력이 활동하기 용이했다. 따라서 병력을 집결하고 수송하기도 편리했기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일본군을 아작내기 쉬운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은 동굴 진지를 엿 먹이기 위해 이곳으로 보병용 화염방사기M4 셔먼의 화염방사기 장착 모델[59]들을 대량 공수해 왔으며, 덕분에 미군이 이오지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섬인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데에는 겨우 3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키나와를 수비하는 일본 육군 제32군에게 실제로 오키나와 본섬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했던 것도 비교적 신속한 전투 경과에 한몫했다. 제32군에 배속된 전투부대는 보병사단 4개, 보병여단 5개라는 방대한 것이었으나, 정작 오키나와 섬에 배치된 병력은 9, 24, 62사단과 44여단뿐이었고, 그나마도 9사단이 대만으로 차출당하면서 새로 보충해 준다는 84사단도 수송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견되지 않았다. 만약 84사단이 히메지에서 오키나와로 배치되고 미야코 섬에 배치된 28사단과 나머지 4개 여단(일본군 여단은 보병연대 2개가 기본편성이다.)이 모두 오키나와 본섬에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보병대대의 숫자만으로는 미군보다 더 많아진다. 그렇게 되면 미군도 당연히 병력증원을 하겠지만 오키나와를 미군이 3개월 만에 점령을 완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키나와 전역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과 그에 따른 미군의 엄청난 사상자, 전투 피로로 인해 같은 전선에서 사단급 부대의 교대 투입으로 공세를 지속했다. 사례를 보면 먼저, 전투 초기에 남쪽으로 진격하던 제24군단의 2개 사단이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자 4월 2주차에 제10군의 예비 부대였던 제27보병사단을 증원받아 3개 사단이 4월 19일부터 다시 공세에 나섰는데 그래도 부족해서 4월 말엔 오키나와 중부에서 주둔하던 제1해병사단은 남하하여 전선 좌측의 제27보병사단을 교대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전을 시작했고 같은 시기에 본도의 북부 도서 지역인 이에섬을 평정한 제77보병사단이 본도에 상륙하여 전선 중앙에 있던 제96보병사단을 교대했다. 그후 10일간 휴식/재편을 마친 96사단은 그때 까지 교대없이 싸웠던 제7사단의 전선을 인수받았다. 7사단이 후방으로 물러날 무렵에 북부에 있던 제6해병사단도 남하하여 제1해병사단의 전선 절반을 인수받았다. 교대된 사단들은 모두 육군인데 해병대의 경우 4월 말까지 일본군과의 큰 전투와 많은 사상자 없이 본래 목표였던 오키나와 중, 북부를 쉽게 평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북부 지역은 남부보다 넓고 지형이 훨씬 험준하여 방어에 더욱 유리했지만 일본군의 판단엔 지켜야 할 군사적 가치가 전무한 곳이어서 고작 수천명 정도의 수비대만 배치하고 손절했다. 미군은 북부지역에서의 거센 저항을 예상하고 해병대를 보냈지만 정작 모토부반도 전투를 제외하면 저항은 극히 약했고 4월 3주차까지 점령을 완료했다. 남부지역은 지형이 완만했지만 일본군이 요새화를 잘해놔서 오히려 진짜 혈전이 펼쳐졌다.

일본해군의 오키나와근거지대는 나하 근처의 오로쿠 땅굴 진지에서 농성했으나, 오타 미노루를 비롯한 해군 지휘관들은 6월 11일에 자결하였다. 일본 육군 제32군은 최후의 기지인 마부니에서 농성했으나 6월 22일(또는 23일) 사령관 우지시마 미츠루와 참모장 조 이사무가 할복 자살함으로서 조직적 저항은 끝을 맺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살아서 치욕을 맛보지 말고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서 오키나와 각지에서 남은 일본군 병사들과의 산발적인 충돌이 이어졌고, 민간인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집단자결 등으로 희생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4.3. 해상 전투

4.3.1. 기쿠스이 작전

"의욕 있는 건 좋은데, 이거 정말 성공할 수는 있는건가?"
-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_Bunker_Hill_hit_by_two_Kamikazes.jpg
카미카제 공격을 받고 불타오르는 미 해군 에식스급 항공모함 벙커힐.
하지만 카미카제로 격침된 정규 항공모함은 단 한척도 없었다. 수송선을 개조한 호위항공모함은 몇 척 격침되긴 하지만, 미 해군은 호위항공모함을 한 함급에서만 50척을 만들었으니.

미군 합동참모본부에서 오키나와 전투의 승인 명령이 공식화되기까지 미 해군 내 오키나와 상륙 반대론자들은, '이오지마에서도 일본 앞마당에 가니까 육상 발진 항공기의 항공 위협에 계속 시달렸는데, 규슈에서 채 600km도[60] 떨어지지 않은 오키나와는 카미카제 등을 비롯한 일본군의 육상 발진 항공기에 의한 항공 위협은 이오지마에서 겪었던 것과 견주어도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항공 위협의 차단을 위해서 미 해군은 영국 태평양 함대까지 끌여들이기에 이른다. 킹 제독은 영국이 다 해 놓은 밥에 밥숟가락이나 얹으려는 거라며 반대했지만, 현장 지휘관인 스프루언스랑 니미츠가 찬성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별로 사이도 안 좋던 육군 항공대에 사정해서 제21폭격사령부 소속 B-29를 동원해 카미카제 특공기가 이륙할 것으로 추정되는 비행장을 쉬지 않고 폭격해서 아예 비행기를 띄우지도 못하게 하려고 했다. 이는 특공기 이륙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뼛속까지 전략폭격론자였던 커티스 르메이는 불만이 가득해서 기회만 나면 다시 산업 시설 폭격하게 해 달라면서 징징거렸다. 여기에 헨리 아놀드 육군 항공대사령관까지 가세해 해군에 불만을 제기하였으나 킹 제독은 '그럼 해군 협조 없이 육군 항공대 혼자 잘해 보시든가'라고 하며 불만을 잠재웠다.[61]

미 해군은 4월 6일부터 6월 22일까지 시행된 기쿠스이 작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격침 26척에 피격에 의한 피해는 164척이었다. 기쿠스이 작전에 동원된 일본 항공기 수가 육해군 항공대 합쳐서 약 8,000대[62]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로 관한 미 해군의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육상 전선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서 해군 지원 함대가 해안에 묶여 점점 더 카미카제에 노출된다고 생각한 태평양 함대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4월 23일 시찰 나온 자리에서 미 제5함대 56기동부대(TF-56, 5함대 상륙 해상군) 사령관 겸 미 제10군 사령관 사이먼 버크너 육군 중장에게 전선을 조금 움직이라는 압박을 주었으나, 버크너 중장은 육군 작전이니 해군이 상관 말라.이라는 취지로 '그것은 지상작전'이라고 언급하며 불만을 표시했고, 니미츠는 곧바로 "그것이 지상작전이라 할지라도 나는 하루에 1.5척을 함정을 잃고 있으니 5일 이내에 전선을 이동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전선을 움직이게 하겠다"고 그가 해임될 수 있음을 언급했다. 10군은 해병대 제3상륙군단과 육군 24군단으로 구성된 합동부대로 니미츠 제독의 지휘통제 아래 있었다

미 해군이 카미카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는지 알만한 사례. 이건 카미카제에 예민해져 있던 것도 한몫 하지만, 버크너 중장의 태도가 더 큰 문제였다. 니미츠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자신을 단순한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아니라 태평양 해역군의 통합군 사령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부하들에게도 해군뿐만 아닌 통합군으로서의 시각을 계속 요구했다. 그가 중시한 건 태평양 전역에서의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지 해군 또는 육군 등 각 군의 이익이 아니었다. 사이판에서 해군의 같은 식구라 할 수 있었던 해병대의 홀랜드 스미스 중장이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해임했을 때도 각 군의 차이를 간과한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의 잘못이 더 크다 보고 내친 판에, 저런 식으로 각 군간 선을 딱 그으려는 행위는 니미츠 제독의 눈밖에 벗어나기 충분했다.

버크너 중장은 곧 바로 현실을 인식하고, 그날 오후에 제3상륙군단장 로이 가이거 해병 소장의 사무실에서 이어진 브리핑에서 며칠 안으로 3상륙군단(해병대 제1사단, 해병대 제6사단)을 육로를 통해 남쪽의 주요 전투지역으로 이동시켜 진격을 이루겠다고 장담했다. 해병대 사령관 반데크리프트 장군은 사이판에 있는 10군의 예비대로 지정된 해병대 제2사단으로 일본군의 측면인 오키나와 동남쪽 미나토가 만에 상륙작전을 제안했지만, 이미 77사단의 미나토가 상륙을 검토해 본 결과 미나토가 해안은 너무 좁아 후속보급활동이 곤란하고, 해안 배후지형이 급경사로 상륙군의 병력손실이 클 것이라 본 버크너는 거절하고 원안을 고수했다. 니미츠 제독은 버크너 중장의 제안을 승인했다. 그러나 10군이 실제 전선을 돌파하는데는 거의 1개월이 걸렸고,[63] 상륙작전 계획을 버크너가 거부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져 8개월 전 사이판 전투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육군과 해병대로 이루어진 상륙부대를 해병대 장교가 지휘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들끓었다. 사이판 전투 당시에는 해병대 장교가 지휘하는 육군과 해병대 상륙부대의 인명손실이 커서 해병대를 육군 장교가 지휘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이런 보도와 여론은 각 군간의 불협화음을 가져올 수 있는 나쁜 선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 포레스털 해군장관과 미 제5함대 합동원정부대(TF-51) 사령관 리치몬드 터너 해군 중장, 미 제5함대 고속항모 기동함대(TF-58) 사령관 마크 미처 해군 중장은 황급히 육군의 전술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해군 대장도 이례적으로 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오키나와 작전이 훌륭하게 수행되었다고 언급함으로써 육군의 전술을 칭찬했다. 이런 조치로 큰일이 벌어질거 같았던 대립은 곧 사라졌다. 일본군에게는 저런 식으로 육해군의 선을 딱 그어놓고 작전하는게 당연한 거겠지만, 미군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기쿠스이 작전 자체는 카미카제를 이용해서 최대한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였고, 비용 대비 효과로 보자면 상당한 낭비였다. 이 작전의 일부로 행해진 야마토 특공 작전에서[64] 전함 야마토와 상당한 해군 전투함들도 상실되었다. 야마토를 이용한 기쿠스이 작전의 요지는, 해군 선박을 먹이로 내주고, 미군 항공기를 대공포로 격추, 이후 항공기로 인한 호위를 잃은 미군 항모를 카미카제로 요격, 격침한다는 것이지만 사실 이래도 당시의 미군 앞에서는 티스푼으로 바닷물 퍼내기 같은, 의미가 없는 행동이다. 왜냐하니 저 무렵의 미 해군 항공모함 규모가 호위항공모함까지 포함하면 100척이 넘었기 때문. 호위항공모함을 빼고 정규항공모함으로만 쳐도 10척은 넘었던 때다. 그나마 실제 전과는 일본군은 전함 야마토, 경순양함 야하기, 구축함 4척 침몰 외에도 구축함 4척이 크고 작은 손실을 입고 야마토에서만 전사 3,055명, 그 외 함선에서 1,187명이 전사했지만, 미군은 전투기 3대, 헬다이버 4대, 어벤저 뇌격기 3대가 격추되었고 조종사 4명과 항공 승무원 8명이 전사하였다.

여담이지만 기쿠스이 작전기간중 벙커힐이 피격되는 등 가장 치열했던 5월 11일 전투에서 15번 초계구역의 구축함 에반스에 9시 20분을 전후해 격돌한 하야부사 4대는 조선인 가미카제로 유명한 탁경현 소위의 기체거나 적어도 함께 출격한 51진무대의 편대기들로 추정된다.
4.3.1.1. 야마토 특공: 보노미사키 해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ship_Yamato_under_air_attack_April_1945.jpg
미군의 공격을 받는 야마토. 전속력으로 내면서 이동하고 있다.
坊ノ岬沖海戦
45년 4월 1일 천1호 작전 발령과 동시에 남아있던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에도 수상 특공 명령이 내려온다. 당시 껍데기만 남은 제2함대[65] 사령장관 이토 세이이치[66]는 작전에 반발했지만 1억 총특공의 선구가 되어라라는 명령에 수긍했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전함 야마토는 키쿠스이 작전의 일환으로 편도 연료와 1170발의 주포탄[67]을 싣고 오키나와로 상륙해오는 미군을 막기 위해 출항한다. 편도연료로 오키나와 해안에 도달해 그 상태로 해안 모래밭에 올라타(좌초) 고정포대 노릇을 하는 작전이었다.[68] 숨겨둔 비밀 무기로 일거에 전황을 바꾸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 그저 죽을자리를 찾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최소한의 호위로 제2수뢰전대(아가노급 경순양함 야하기 외 구축함 8척)가 동행했지만, 항공엄호는 제공되지 않았다.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세운 이유는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난 뒤, 높으신 분들에게 '우리 해군은 이렇게 열심히 싸웠음에도 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변명을 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최대전력이었던 야마토가 살아남아있어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는, 당시 기쿠스이 작전을 육군에서 입안한뒤 히로히토에게 형식상 재가를 요청했는데, 거기서 히로히토가 "항공부대가 공격을 한단 말입니까. 그럼 해군은 뭘 합니까?"라고 물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당시 히로히토가 실제 육,해군의 전력 자체를 정확히 알리가 없는 상태에서 던진 말때문에 자칫하면 불충죄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전부터 해상 특공작전을 주장했던 가미 마사노리 연합함대 참모의 작전이 받아들여졌고, 그나마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작전이 그거뿐이라 야마토를 밀어넣은 거다. 작전 자체가 미군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 아닌 야마토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었고 아무도 야마토가 미군을 막아내리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 외에 일본 해군 함정용 중유의 비축분이 바닥을 드러냈던 탓도 있다.

미 해군의 대함대의 방해를 뚫고 오키나와까지 가는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만일 오키나와 해안에 계획대로 좌초하더라도 오키나와 전투를 수행중인 일본군 수비대의 도움 없이는 그냥 고정표적 1호가 되어버린다. 재수없으면 미군에게 육박공격이나 당해서 점령당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며, 그런 일이 없더라도 좌초된 군함의 탄약이 떨어지면 그냥 거대한 고철덩어리로 전락하는데다 앞서 말했듯이 이동능력이 전무하므로 공중에서 폭격하는 비행기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타겟이 없다. 따라서 애초에 이 작전의 성공확률이 극히 낮은데다가 고정포대 노릇을 하는 것은 설령 야마토가 작전지역에 멀쩡하게 도착했더라도 불가능하다.

거기에 출격시기 자체도 문제가 있었다. 일기예보상 2~3일 뒤에 항공기 운용에 지장을 주는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었던지라 그나마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날이 흐려 시야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날을 골랐다. 결국 구름과 안개속에서 갑툭튀하는 미국 함재기들을 상대로 한 대공사격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당시 유류탱크 담당 장교가 유류 탱크 펌프가 닿지 않는 아랫쪽까지 인력으로 퍼내서 '적어도 멍청하게 꼬라박느니' 중간에 회항할 것을 어느정도 가정하고 왕복연료로 메꿔서 줬다고 한다. 물론 상부에 보고한 것은 편도분 연료만 넣은 걸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류 탱크 바닥에 남아있는 연료는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분량이기 때문이다.[69] 해군 선임자들도 알면서 눈감아 줬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상 자살임무에 가까운 작전이었으므로 만일 배가 격침될 경우 살아남은 승조원이 주변 섬에 표류할 것을 생각해서 약간의 돈과 비상용 물자를 승조원에게 배급하기도 했으며[70] 출격 전에 술판을 벌여서 최대한 사기의 저하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출항 직전에는 B-29를 개조한 장거리 정찰기에, 출항해서는 일본 근해를 벗어나기도 전에 잠수함에게 들켰으니 이미 그 상황에서 미국은 야마토의 출항을 알아냈고 오키나와에 근처에 가기도 전에 미군 함재기 부대에 포착되었다. 일본 해군 함대가 출항했다는 것을 포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마크 미처 제독 휘하의 항모들에게 처리를 맡겼다.[71]

결국 항공모함 호넷[72][73]을 비롯한 수많은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에 공격당한다.

무사시가 양현에 골고루 어뢰를 맞아서 함내 구획이 균등하게 침수되는 바람에 오히려 격침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무사시는 잠수함에게 최후를 맞았다는 낭설까지 돌았었다. 해당 전투의 전훈을 살려 미군의 조종사들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야마토를 공격할 때 좌현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래서 야마토는 이 해전에서 좌현에 9발의 어뢰를 맞은 반면 우현에는 단 1발의 어뢰만 피격당했다.
파일:attachment/야마토급 전함/Yamato_explosion_00001.jpg
폭발하는 야마토와 함께 거함거포주의가 끝나는 순간. 왼쪽의 구축함은 아키즈키급 구축함 후유츠키.

약 117대의 항공기에게 다수의 어뢰와 폭탄에 피격 당하고 배가 기울어지자 2시 2분, 작전 중지와 퇴함 명령이 내려졌다. 2시 23분 야마토의 탄약고가 유폭하면서[74]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야마토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며 순식간에 해저 밑바닥으로 침몰하고 만다. 폭발이 위력이 매우 거대하여 폭음은 100㎞나 떨어진 규슈 남부까지 들렸고, 폭발연기는 160㎞ 거리에서도 관측되었으며, 퇴함한 승조원중 대부분이 폭발에 휘말려서 사망했다. 일단 버섯구름 옆에 있는 함선의 크기와 비교해도 엄청난 폭발인게 보인다. 버섯구름은 6㎞ 고도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함께 출동한 함정 중 피해가 적었던 3척의 구축함(후유즈키, 하츠시모, 유키카제)이 살아남은 야마토의 승조원들을 구조하여 귀항하였다. 구조된 승조원은 전체 3,000여 명 중 단 269명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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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의 잔해

폭발의 여파로 함체는 완전히 두 동강이 난 채 각각 멀리 뒹굴고 있다는 것이 근래의 수중탐사로 밝혀졌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의 인명손실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F6F 헬캣 3대, SB2C 헬다이버 4대, 어벤저 3대가 격추됐고 조종사 4명, 항공승무원 8명이 사망했다.# # # 총 12명. 일본군은 야마토에서 3,055명, 야하기를 포함한 제2 수뢰전대에서 1,187명이 사망했다. 따라서 둘을 합친 일본군의 총 전사자 숫자는 4242명. 미군 한 명이 전사할 때 일본군은 353.5명이 전사하는 더없이 초라하고 굴욕적인 전과를 기록하며 연합함대의 자존심은 그렇게 태평양에 가라앉았다.[75] 거기에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소중한 목숨을 값비싼 수업료로 지불해 가며 입지를 탄탄하게 쌓아온 항공모함에게 주도권을 상실당한 전함은 마침내 초거함 야마토급의 격침과 함께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맞이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야마토의 침몰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가진 최대의 함선이자, 연합함대의 자랑이었던 함선을 미국의 본토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그냥 갖다 바쳤다. 이를 본 미국은 카미카제에 이어 자신들의 최고 전함까지 자살공격에 쏟아붓는 일본 제국을 일반 공격으로 굴복시키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원자폭탄의 실전 투입 의견이 강해졌다.

여담이지만 야마토를 공격하던 도중 격추된 헬다이버의 조종사는[76] 아주 가까이에서 야마토가 침몰하는 하이라이트를 보고나서 비행정에게 구조되었다고 한다.

5. 참상

[navertv(43937435)]
[다큐] 오키나와 전투 "출구없는" 전장 - 최후의 1개월 동안의 기록 (2020)[77][78][79]

이 전투 내내 수많은 무고한 오키나와 도민(島民)이 희생당했다.[80]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으나 사쓰마번에 정복 되고 19세기 말엽에 편입되면서 일본 땅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 땅이라고는 해도 식민지 취급을 받을 때도 종종 있었고, 대체적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전시체제에 들어가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할 때도 그랬듯이 써먹을 필요가 있으면 일본인 혹은 일본인과 동등하게 언플을 하고 필요없으면 버리곤 했다. 이 와중에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 전원을 총동원하여 웬만한 남성은 죄다 징집했고, 남학생들은 데려다 군인으로 써먹었다. 성인 여성들부터 어린 여학생들도 히메유리 학도대처럼 간호요원, 심지어 위안부로 끌려갔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영예롭게 죽기를 강요했다. ## 영예로운 죽음을 강요해 소년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때려 죽이게까지 했다는 사례가 있다. 또 한 사례를 꼽자면 미군에게 욕보일 것이 두려워 먼저 딸을 죽인 한 노인은 미군이 듣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식량과 약품을 지급하자 그것들을 이미 죽은 딸의 시신 옆에 두고 서럽게 펑펑 울었다고 한다. 괜히 아까운 딸의 목숨만 버린 데다 그 목숨을 아버지인 자신이 거두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런 사례가 다수라는 점에서 2차 대전 말기의 일본군이 얼마나 광적이었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걸 일본 극우들이 자랑스럽게 교과서에 수록하려 하자 생존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한 적이 있다. 전쟁을 앞두고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세력들이 자신의 부인이나 가족을 살해하는 것을 숭고하게 표현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적에게 더럽혀질 바에는 내가 죽인다는 것인데 가족(특히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일 뿐이지 결코 미화돼서는 안 될 살육행위일 뿐이다. 어느 국가든지 극우 세력은 마사다 요새와 같은 사례를 숭고미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주의하자. 제 2차 세계대전기의 미군은 일본군에 비해 인도적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그 사실은 철저히 은폐한 바람에 애꿏은 민간인들만 죽어나갔다. 실제로 일본군이 조금만 똘끼가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자기네가 불리해지자 본토 취급하여 애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군에 대해 주민들의 반감은 매우 컸다. 기실은 일본 군부 자체가 자기네 병사들을 평소 때는 소모품인 양 부려먹다 전술적으로 쓸모 없어지면 옥쇄에 갈아넣은 다음에 나중에 가서 야스쿠니의 영새부에 후손들의 동의도 없이 무단으로 기록하여[81] 신격화하거나 추모곡이나 만들어 주면서 영웅시하는 짓거리를 해 대고는 했으니 유독 오키나와인들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서 전투 이후 살아난 일본군들 중에는 살아남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린치를 당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오키나와 도민들은 전투 중반부터 자원하여 미군의 보급, 정보계통 보조원으로 전방에선 일본군 진지와 그들의 규모, 화력, 경로에 대한 안내 및 정찰, 미군의 일선 부대에 대한 인력 보급 활동, 미군 군정 체제에서 임명된 수용소/부락의 자치 간부진은 도민들과 군정 간의 중간 관리자로서 활약했다. 일본군 포로에 대한 통역 및 심문에도 미군을 보조했는데 기록상으로는 전투 후반부터 주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민간인 무리에 스며든 일본군 장병을 색출하는 데 기여했던 것 같다. 대표적으로 전투 끝에 장성들이 죄다 할복하고[82] 오키나와 잔존 일본군의 최선임자가 된 야하라 대좌가 미군의 심문관으로 있던 전직 오키나와 현청 간부에게 신분이 발각된 것이다. 이때까지 생존했던 다른 대령급 장교는 오키나와 북부에서 잔존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지휘하던 우도 대좌가 있었으나 그는 연대장급이었고 야하라 대좌는 군사령부 참모, 그것도 작전참모였기때문에 직급 서열상에선 선임자로 간주해도 된다. 그러나 미군의 토벌 작전과 각지에 넓게 분산된 일본군 패잔병들, 잔존 통신 시설과 장비의 열악으로 야하라는 우도 대좌를 위시한 오키나와 곳곳의 잔존 병력들과 통신도, 지휘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 자신도 6월 22일 이후, 사령부 장병들로 구성된 소집단의 지휘자로 유랑하다 고립되고 미군의 토벌대에 결국엔 민간인으로 위장 투항한다.

일본군은 이외에도 류큐어 사용자나 미군의 삐라를 주운 주민들을 스파이로 규정해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강간을 저질렀다. 또 병사들 가운데 이동이 힘들 정도로 중상을 입은 자들을 청산가리가 든 우유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기어이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강간 및 학살을 저지른 전적이 있다. 이래서 미국은 뻔뻔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랍시고 개드립을 치자 열 받은 미 의회가 대동단결하며 위안부 성명을 통과시켜버렸다.[83]

다만 미군의 공격으로 인해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많은 수가 포격에 목숨을 잃었다. 또,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는 일본군을 끄집어 내려고 연막탄[84]을 사용했는데, 사용이 금기시 돼있는 생화학무기는 아니었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독성이 너무 강한 탓에 그 속에 숨어 있던 민간인들이 다수 사망하였다. 일본군은 주민의 안전을 무시하고 민간인이 모여있는 지역으로 후퇴하거나 심지어 인간방패를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투에 휘말린 주민들도 다수 희생당하고 말았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은 보통, 동굴을 발견하면 동굴 주변에 위협 사격, 포격을 가한 후 확성기로 항복을 종용하고 항복 거부의 결과에 대해 경고한다. 이때 민간인의 비율이 아주 높고 미군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 있던 동굴은 큰 사상자가 없이 순순히 밖으로 나와서 투항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다른 동굴은 후술하듯이 미군은 먼저 연막탄과 같은 매캐한 수단으로 강제 퇴거를 유도하거나, 바쁠 땐 그것을 생략하고 밖에서 동굴 내부로 본격적인 사격과 포격, 수류탄을 잠시 퍼붓고 다시 항복권고를 하는식으로 몇 번 반복한다. 미군의 입장에선 해당 동굴 내부에 농성 중인 일본군이나 민간인의 숫자와 화력, 동굴 내부의 지형에 대한 정보가 희박한 경우가 많았고 파악을 위해서 동굴 내부로 진입하는 것은 사상자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입이 꼭 필요했던 동굴만 선별했고 그 외의 항복 거부 동굴은 결국엔 동굴 입구를 폐쇄(주로 군용 폭약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폭탄과 대형 폭약뭉치에 지연신관, 도화선을 설정해서 내부로 던지거나 입구 부근에 세팅해서 무너뜨림)해서 장래에 농성자들이 밖으로 나와서 미군을 위협할 경우를 차단시켰다. 어떤 동굴들은 딱히 미군에게 위협적이지 않아서 방치했다가 전투 종결 후 미군이 종전 이후까지 항복을 권고해서 항복한 경우도 있다.

물론 어디나 미친놈은 있기에 일부 병사들의 일탈로 강간이나 살인이 저질러졌지만, 이런 짓을 한 미군 다수가 총살당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미군은 그들이 가진 풍부한 보급품을 활용, 독일, 일본의 피점령민들과 합법적으로 교류했다. 심지어 일본인에게 물을 건네자 일본인이 독을 탄 것이라 의심하여 마시지 않자 독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마시기까지 했다. 결국 독이 없음이 밝혀지자 그들은 물을 받아마셨다. 일본이 욕 먹은 건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걸 미국 정부가 주도하거나 모른 척했다는 투로 말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영양실조 및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도 매우 많았다. 상당수 피난민들은 오키나와 북부 얀바루(山原) 밀림 등으로 몸을 피했는데, 이곳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되었고, 영양 부족 및 의약품 부족으로 인해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항복 후 미군 감시정으로 이동하는 일본군, 1945년 5월

2011년 일본은 이걸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 주민들이 미군이 두려워 집단 자결했다고 교과서에 실었다. 이게 헛소리라는 것은 미 군정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미군에게 합리적인 보수와 먹을거리, 잠자리를 보장받은 후에는 전선에 보급품을 나르는 위험천만한 임무까지 자원해서 참여했다.[85] 자세한 내용은 미 군정에서 주민들에게 보장해 준 것과 주민들의 이에 대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때 주일미군은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구조와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이 상륙하자 주민들의 집단 자살이 있었는데 오키나와 전투 이전부터 있었다. 당장 1년 전에 있었던 사이판 섬의 전투에서 민간인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부터 보면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일본군이 귀축영미 운운하며 미군이 상륙하면 남자들은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강간당한다며 주민들을 계속 세뇌시켜 놨는데 이걸 믿은 주민들은 미군이 오기 전에 딸과 부인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86]

물론 일본군의 말들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고, 미군과 접촉을 해 사실을 알게 된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에게 상당히 협조적인 태도로 응했다. 퍼시픽 논픽션판을 보면 미군의 대민 작전이 나오는데 오키나와 주민들이 협조적으로 나와서 수용 구역 내에서 나오지 않으면 자치권을 보장해 주고 미군의 작업을 돕는 대신 미군의 식료품, 담배, 통조림(C-레이션) 등[87]을 받아가는 장면도 나온다.[88] 지나가던 오키나와 농부에게 게이샤는 어디에 있냐고 묻자 농부가 유창한 영어로 여기에는 없고 시내에 가 보라고 해서 미군 병사들이 놀라기도 했다. 그 농부는 미국 농장에서 취업한 경력이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89]

전쟁 통에 끌려온 조선인 다수도 이 전투 도중에 죽었다. 현재는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일본군에 의한 학살에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다. 조선인 유골은 아직도 고향으로 못 돌아가고 있다.# 희생된 한국인의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DNA 확인 작업이 진전하지 못하는 것은 양국이 사죄를 놓고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가 종결된 이토만시의 마부니 언덕에는 오키나와 전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90]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세워진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에는 오키나와 전투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이름이 국적에 따라 각명되어 있다. 공원에 세워진 박물관인 오키나와평화기념자료관은 당시 일본군의 만행과 전쟁의 참상, 생존자들의 증언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공간으로 한국인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오키나와 전투 중 조선인 군속, 위안부와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일본군의 만행을 재일교포가 오랜 시간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제목은 '오키나와의 옥편'이다.

6. 군사적 영향

태평양 전쟁에서 최후의 대전투였기에 오키나와 전투가 가지는 군사적 영향은 잘 다뤄지지 않는데, 오키나와는 일본이 10만이 넘는 병력을 몰빵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한 타당한 이유가 있는 곳이었고, 그만큼 이곳을 빼앗긴 여파는 엄청났다. 대본영과 일본 정부가 받은 충격은 사이판 전투 때보다 훨씬 컸다고 볼 수 있다.

미군은 기존에 이오지마 전투를 통해 도쿄에서 1,060km 남쪽에 있는 이오지마 섬을 확보하면서 전선 거점을 수정했지만 이오지마 섬의 역할은 B-29의 항공중계/부속기지에 특화된 것으로 일본 본토를 침공하기 위한 집결기지로선 부적합했다. 섬의 면적이 오키나와의 1/60 수준으로 좁았으며 지형상으로도 대규모 병력의 주둔지로는 단점이 컸다. 전투 당시에도 섬의 좁은 면적과 지형상의 문제로 미 해병대는 병력을 한번에 크게 투입하질 못하는게 일상이었다. 그러면서 높은 병력 밀도로 일본군의 화력을 큰 반감없이 받아서 사상자가 컸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사상은 미군이 차후 몰락작전 수행에 있어서 매우 큰 부담을 느끼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고 원자폭탄 투하 결정에도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함락으로 미국은 일본 본토 진공 최전선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젠 오키나와 섬과 일본 본토 사이엔 미군의 진격을 저지할 어떠한 종심이 없었고 미군의 다음 공격(몰락 작전)은 바로 일본 본토로 향해질 것이 명백했다. 전투 종결 이후 오키나와는 신도시 건설 수준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몰락 작전을 위해 동원될 물자, 병력, 함정 등이 종전 때까지 계속 몰려들었다.[91] 45년 11월에 예정된 올림픽 작전에 참가하는 제1진 부대들은 아마도 사전에 오키나와에서 대기하다가 작전 날짜에 맞춰서 전개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거리적으로 보면 기존엔 미국의 태평양 전쟁 거점은 하와이였지만, 전선 거점은 1944년에 탈환한 이었는데, 이제 일본 본토에 더 가까워진 것이다. 특히 오키나와 본도에서 도쿄까지의 직선거리는 겨우 1,500km로 기존 B-29의 거점인 사이판과 비교하여 900km나 단축된다. 그런데 이건 도쿄 기준이다.

사이판 기준으로는 간토의 도쿄, 간사이의 오사카, 규슈의 후쿠오카까지의 직선 거리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오키나와 본도 기준으로 규슈 남단까지 580km, 규슈 최대도시이자 북단에 위치한 후쿠오카는 800km, 오사카는 1,100km에 불과하다.[92] 일본 본토 폭격에 있어서 오키나와가 사이판 및 괌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이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가 괌에 비해 거리적으로 불리한 지역은 도호쿠홋카이도 지역인데 이들 지역은 21세기 들어서도 대도시나 대규모 산업단지가 거의 없는 곳이라 폭격할 가치가 없다.

이렇게 줄어든 거리를 활용, 오키나와에 B-29를 배치해 연료 대신 더 많은 폭탄을 탑재하여 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사실 거리가 이렇게 줄어들었으면 굳이 B-29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그동안 수많은 양산대수를 자랑하면서도 항속거리 문제로 일본 본토 공습에 투입할 수 없었던 B-17, B-24, B-25, B-26을 모두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 오키나와 함락 이후 미군은 제일 먼저 비행장을 짓고 그 비행장에 전장 후방에 있었거나 유럽 전선에 투입된 폭격기 부대들을 배치하기 시작한다.[93] 실제로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이었던 7~8월에 B-29를 제외한 나머지 기종의 폭격기들이 오키나와에 전개하여 규슈와 혼슈섬 서부를 폭격했고 해군의 구레 군항 공습을 보조한것도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B-24 폭격기들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B-29가 아닌 이들에 의해 서일본 전역의 도시들이 모조리 지도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다른 여담으로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B-29는 연료 부족으로 오키나와의 요미탄 비행장에 들려 연료를 보충받아 티니안으로 귀환했고, 극소수로 생산된 B-32가 오키나와에 전개되어 천황의 옥음방송 며칠 후 도쿄 상공을 정찰하다 일본기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은 전쟁 최후의 공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 해군 입장에서는 일본의 내해나 다름없었던 동중국해의 출구를 손아귀에 넣으면서 일본-중국 직항로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오키나와의 나하 항을 개보수하고 버크너 만(나카구스쿠 만)에 항구를 건설하면서, 최전선의 함정들이 일본 본토에 보다 가까운 곳에 기항하여 수리 및 재보급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고 향후 몰락 작전에서 예상되는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 물동량을 어느 정도 분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본 본토와 가깝기 때문에 다른 기지들보다 훨씬 빠르게 수송이 가능해지므로 보급/행정적인 부담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또한 해상 수송로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이전에도 잠수함에 의해 사실상 차단되다시피 했지만, 일본은 잠수함에게 희생되건 말건 선박을 띄우는 근성으로 병력과 물자를 소량이나마 운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함락으로 일본 본토가 미군의 공격 범위권에 들면서 이제 미 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자유롭게 동중국해, 나아가 일본 근해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항모기동부대뿐만 아니라 전함을 위시한 수상함들도 실제로 45년 7~8월에 일본 근해에 진출하여 혼슈와 홋카이도 곳곳에 함포사격으로 주요 시설물과 산업단지에 상당한 타격을 줬다. 이들 수상함들은 항모의 호위 없이 단독 작전을 펼쳤는데 이 때쯤의 일본의 항공력은 재래식과 가미카제 모두 고갈이라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유유히 귀환했다. 여기에 더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전부터 일본 근해까지 활동하던 잠수함대는 이젠 동중국해를 넘어서 동해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의미는 미군의 필리핀 탈환 후 베트남-중국 연안-산둥반도-조선-대한해협-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실가닥 같은 마지막 항로까지 차단되고, 일본 본토가 해외 점령지와 완전히 차단됨을 의미했다.

중국 전선도 당연히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지나(중국) 파견군은 본래 미군의 계획이었던 대만 함락 후 중국 연안 침공 계획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전쟁의 전체적인 전황과는 별개로 중국군을 상대로 어떻게든 우세를 잡고 있던 지나파견군은 오키나와 함락 이후 사실상 공세를 포기하고 다수 부대를 해안으로 후퇴 및 재편성하여 미군의 상륙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내륙에서 중국군과 싸워야 할 병력은 부족해지고 그럼 중국군이 공세로 나설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위에 나온 항로 차단을 감안하면, 중국 전선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의 보급도 사실상 끊어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투에 투입한 병력 그 자체의 손실이다. 상술했듯 오키나와에 출병한 24사단이나 62사단은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는 나름 골라서 보낸, 전투력이 유지되는 사단급 단위 부대였다. 그걸로 부족해 일본에 드문 전차연대 1개, 다수의 독립부대, 전투를 앞두고 추가로 증원받은 보병부대, 일본군치곤 상당한 수량의 중화기까지 갖춘 상태였다. 일본군 기준으로는 상당한 전력들이었고 이들은 섬 전투의 특성상 모조리 소멸되고 만다. 해상교통로의 차단으로 일본 본토와 해외 점령지 간에 병력 재배치 자체가 불가능했던 일본군 입장에선, 실전 경험까지 있는 금쪽같은 정상편제사단 2개 및 전차연대 1개는 어디서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94] 가미카제 등으로 소모한 항공기 1,400여 기, 그리고 전함 야마토, 경순양함 야하기의 침몰까지 생각하면...

7. 기타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유일하게 일본군 투항자가 만 단위를 넘기고 상당수의 좌관급 장교[95]가 포로가 된 전투이다. 최종 집계된 일본군 포로의 수는 1만 5천 명으로, 일본군 수비대의 8%에 달했다.[96][97] 오키나와 전투가 이전에 벌어졌던 전투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고, 일본군 병력의 상당수가 현지 징집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수의 일본군이 포로가 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98] 놀랄 정도로 많이들 항복했는데, 심지어는 몇백 명 단위로 몰려와서 항복하는 통에 전쟁 내내 일본군의 광신적 저항자폭 행동을 수도 없이 봐온 미군들은 이것이 함정이 아닐까 의심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미군의 심리전이 상당히 통한 탓도 있으며, 상당수의 일본군이 이미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소위 옥쇄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했던 것.[99] 설령 본토 결전이 벌어졌더라도 일본 군부가 주장한 '최후의 한 명까지' 저항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인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때문에 대전 중 일본군의 투항을 담은 영상기록물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촬영된 것이다. 회유된 포로가 확성기로 항복을 종용하자 동굴에서 민간인들과 함께 나와 투항하는 병사들이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삐라를 주워와 항복하는 모습, 징집된 오키나와 소년병 등 흔히 떠올리는 일본군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될 무렵 유럽 전선에선 연합군이 라인란트 전투를 승리하고 곳곳에서 라인강을 도하해서 중부 독일을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다. 이 때 루르 지역에 갇힌 B집단군은 포위되어 4월 18일에 항복했고 그 외에 라인강베를린 사이엔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할 지형적 이점과 정예 병력은 없었으며, 미군 선두 부대는 4월 11일 엘베강 서쪽의 마그데부르크에 도달했고, 이후 미군은 방향을 돌려 남독일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격하고 종전을 맞이한다.

오키나와 전투가 한창이던 1945년 4월 12일, 미국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부통령이던 해리 S. 트루먼이 뒤를 이었다.

전함 야마토는 당대 최고로 호화로운 스펙으로 만들어졌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 타이타닉과 닮았다. 그리고 침몰된 야마토를 조사한 것도 타이타닉을 조사한 그 탐사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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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로 독일의 항복 소식을 듣는 제77보병사단 장병들

오키나와 전투 도중인 5월 7일과 8일에 지구 반대편의 유럽 전선에선 독일이 항복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곧바로 오키나와의 미군 장병들에게도 알려졌으나, 소식을 먼저 접한 사령부에서만 축제 분위기였을 뿐 일선 부대의 장병들은 대체로 무덤덤했다고 한다. 이미 광신적인 일본군과 처절한 혈전을 치르고 있었으며 이들에겐 전투의 끝, 더 나아가 전쟁의 끝이 아직 보이지도 않는 암울한 상황 속(Ex: 몰락 작전의 예정과 46년까지 전쟁 지속)에서 독일의 항복 소식은 그저 딴 나라 얘기였을 뿐이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100] 때문에 일본의 8월 항복 당시 많은 미군들이 놀라워하기도 했다.

물론 나치 독일의 항복이 태평양 전선의 미군들에게 아예 의미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 전선의 종전에 미군 수뇌부는 전쟁에서 복무한 장병 개개인의 활동[101]을 세부적으로 분류하여 개별 점수를 부여했고, 점수를 합산하여 특정 점수(초기엔 85점이었으며 점점 낮아짐)에 도달한 장병들에게 1순위로 전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이 정책은 여전히 전쟁 중인 태평양 전구에도 동시에 적용되었는데 이게 가능했던 것은 유럽 전선에 있는 점수 미달자들과 잔류자들로 구성된 다수의 각급 부대들이 태평양으로 재배치되고 있었고, 미국 본토에서도 신규 보충 장병들이 계속 전입 오고 있었으며, 점수엔 못 미치지만 전투 경험이 있는 장병들은 여전히 복무 중이여서 자격이 되는 베테랑 사병들을 전역시켜도 전력 공백엔 지장이 없었기 때문인 듯 하다.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오키나와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확인된 기록으로는 45년 5월 12일, 후방에서 재편 중인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의 부사관 30여 명[102]이 귀국을 위한 행정 절차와 정산을 받아 군표를 수령하고 사단장의 배웅을 받고 수송기편으로 섬을 떠나는 모습이 유튜브 영상으로 있었다. 이들을 비롯해서 세계 각지에서 귀국한 최초 점수자 미군들은 대체로 45년 7월 시점에서 전역 절차를 밟아 군문을 나왔다.

한편 이오지마에 이어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학을 뗀 미군은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는 일본 본토 공격을 감행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미국은 소련의 일본전선 참전을 강력히 주문하는 한편 원자탄을 이용해 일본에 압박을 가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오키나와는 이오지마와 함께 몇 안 되는 미군에 전투를 치르고 점령당한 일본 본토이기에, 1952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뒤에도 오랫동안 미국(미군정)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문서 참고. 이오지마는 1969년에야 일본으로 복귀했으며, 오키나와는 1972년에 일본 본토로 복귀, 규슈에 속한 오키나와 현이 되었는데, 현재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하며,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류큐 독립 운동 문서를 참고하자.

오키나와 섬의 교통에 있어서도 이 전쟁은 전환점이 될 만큼 굉장히 중요한데, 이 전쟁을 계기로 오키나와 섬에 있던 모든 철도 노선이 쓸 수 없을 지경으로 박살이 났고, 전쟁 이후 섬을 접수한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가 도로 교통 복원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전쟁 이후 미군 및 미군정이 섬에 자가용 문화를 전파했고, 철도는 복구하지 않음으로써 오키나와 섬은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자동차 사회로 변모하였다.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했던 미 해병 장병들은 종전 후 대다수가 전역하여 사회로 돌아오게 되는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급히 재소집되어 제1해병사단에 편제되어[103] 대한민국으로 파병, 인천 상륙작전장진호 전투 등을 치르고 1951년 상반기까지 한국 전선에 있다가 순환 배치로 본국으로 귀환하여 재소집 복무 기한만 채우고 재전역하거나, 그대로 다른 보직으로 군대에 잔류한다.[104]

7.1. 2007년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

2007년, 일본 문부과학성이 역사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이 민간인들에게 집단 자살을 강요했던 부분에 대한 서술을 축소 및 삭제하려 시도하다 큰 논란을 빚기도 했다.
문부과학성 검정위원회가 2008학년도 고교 역사 교과서의 검정 과정에서 그 중 5개 출판사, 7종의 교과서에 대해,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민간인 집단 자살에 대한 내용 중 ‘일본군에 의한 명령’, ‘강제’ 등의 서술을 “오키나와 전투의 실태를 오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삭제하거나 수정하라고 요구한 것.

당연히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선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다. 주민들은 물론이고 자민당, 민주당, 사회당 좌우를 가릴 것 없이 오키나와의 정치인들 거의 모두가 반발, 현 의회를 비롯해 41개 기초자치단체가 검정 의견의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잇달아 채택했고 그 해 9월에는 11만명이 모인 규탄 집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추한 전쟁 미화하지 말라” 오키나와 주민 11만명 시위 (동아일보). 이는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 이후 벌어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사실 이전에도, 이미 1982년 역사 교과서 검정에서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에 의한 주민 살해’ 내용을 삭제했다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이듬해 검정에서 되돌려 놓은 전례가 있었던 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2007년 12월 문부과학성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민간인 집단자살 과정에서 일본군의 책임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고 한발 물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의 입장에선 자살을 강요받았다고 말 할 여지가 있다'(...)며 '충분한 관련 맥락을 제공할 경우, 일본군이 민간인들에 자살을 강요했다는 서술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입장을 다소 누그려뜨렸지만, 물론 그 정도로는 오키나와의 반발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문부과학성의 검정 방침에 대한 비판과 재수정 요구는 계속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 졸지에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전쟁범죄의 핵심 책임자로 선동을 당하게 생긴 미국에서도 분노하여 거세게 반발했다. 뉴욕 타임스는 "일본 정부가 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바꾸려 한다"며 일본 정부가 역사교과서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

2023년 3월 28일에 2024년도 일본교과서검정이[105] 발표되었는데, 여기서도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집단자결에 군의 강요가 있었다는 내용이 빠졌다는 것이 밝혀지자 학도병생존자들을 비롯한 현 각계에서 크게 반발하였다. #

8. 창작물



[1] 일본어로는 오키나와센(おきなわせん), 오키나와어로는 우치나이쿠사(うちなーいくさ)[2] 사진의 성조기를 달기 전에 벌어진 해프닝이 있다. 슈리성을 점령한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A중대는 아군 오폭을 방지하기 위해 성조기를 달려고 했으나 마침 성조기가 없었는데, 중대장인 미국 남부 출신의 두젠버리 대위가 대체물이라고 꺼내든 깃발이 하필 남부연합기였던 것. 지휘부도 남부연합기를 보고 깜짝 놀라긴 했으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웃어넘기기로 하고, 진짜 성조기를 지급해 교체하도록 했다. 여담으로 성조기는 글로세스터 곶펠레리우에도 꽂힌 깃발이었다. 그외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고 태평양 전쟁 드라마더 퍼시픽의 주인공 유진 슬레지의 자서전에 따르면 남부군 깃발을 달았다는 소식이 들렸을때 남부 출신 병사들이 환호한 반면 그소식을 들은 북부 출신 병사들이 남부출신 병사들과 그 헤프닝에 엄청나게 분노했고 살벌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를 본 남부출신 병사들은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했다고 한다. 물론 그도 그럴것이 한마음이 되어 싸우고 있던 이 판에 남북전쟁의 유물 그것도 연방에 대한 반역자들의 깃발을 올린것은 미합중국을 인정 안 하는 것이었고 북부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더욱이 이때는 아직 남북전쟁 종전 100년도 안된 시점이라 전쟁을 유년기에라도 겪은 생존자들이 소수나마 살아 있던 시절이다. 전투 종결 무렵에 열린 미군의 국기게양식 사진과 영상으로, 앞의 2개는 소탕전이 진행되던 6월 27일경 스틸웰 장군의 주관하에 일본군 제32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마부니에서 개최되었다. 1. # 2. # 3. 3번째 영상은 오키나와 섬의 점령 선언이 발표된 6월 22일에 제10군 사령부에서 개최된 것으로 가이거 장군의 주관하에 열렸다. #[3] 미군측 시각에선 미 해군의 소해 함대가 오키나와 근해에 도착하여 후속할 상륙 함대의 교통로 확보를 위해 소해 활동을 시작한 3월 22일을 전역(Okinawa Campaign) 시작일로 본다. 그 후 24일부터 화력 지원 함대가 오키나와 제도 전역에 예비 공습, 함포사격을 시작했고, 26일엔 상륙 함대의 선발대가 도착하여 오키나와 제도 서부 도서지역인 게라마 열도에 제77사단이 상륙하여 31일까지 점령을 완료했다. 상륙함대 본대는 4월 1일에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을 개시한다. 전투 종결의 경우,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6월 22일에 끝났고 그날 미군은 점령 선언식을 펼쳤으나 잔존 일본군이 많아서 6월 30일까지 소탕 작전을 펼쳤고 7월 2일이 돼서야 스틸웰 대장이 전역 종결 선언을 한다. 일본군 대본영은 6월 25일에 오키나와의 상실을 공식 인정한다. 한편 조직적인 저항이 끝난 것이 6월 22일인지, 23일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현재 오키나와현에서는 6월 23일을 위령의 날로 지정하여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4]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군, 남북전쟁에서 남군으로 활약한 전쟁 영웅 사이먼 버크너의 아들로 계급은 육군 중장, 제10군(미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으로 오키나와 지상전을 총괄지휘했다. 그전엔 2차대전 기간의 대부분을 알래스카 주둔군 사령관으로 지냈다. 전투 막바지인 6월 18일, 전선 시찰을 나섰다가 일본군의 포격으로 전사, 사후 1954년 대장으로 추서됨.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최고위 인사였다.[5] 해병대 조종병과 장군, 과달카날 전역에선 칵터스 항공대장, 부건빌 전역와 괌 전투, 펠렐류 섬 전투에서 상륙군단장으로 지낸 인물, 오키나와 전투에선 제3상륙군단장으로 지휘했다. 사이판 전투에서의 스미스 vs 스미스 사건 이후에도 육군 측과 관계가 원만했던 해병대 고위 지휘관으로 버크너 중장의 전사 직후 육군 야전군 사령관에 취임한 유일한 해병대 장성이었으나 5일 후 후임자로 부임한 스틸웰 육군대장에게 이임했음[6] 종전 이후 38선 이남의 한반도를 통치했던 미군정 사령관인 그가 맞다.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참전하여 오키나와 전투에선 미국 육군 제24군단장으로 지휘했다. 오키나와 전투 이후 오키나와에서 몰락 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인해 한반도로 급파되어 미군정 사령관이 되었다. 원래 미군정 사령관은 조지프 스틸웰이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스틸웰과 앙숙이던 장제스의 반대로 한반도로 파견된 하지가 내정되었다.[7] 육군 준장으로 제96보병사단 부사단장이었다. 전투 막바지인 6월 19일에 전선시찰 도중 일본군의 사격으로 전사함, 기록에 따르면 이즐리 준장은 초급장교 시절부터 명사수로 알려졌고 30년대 후반, 소령 시절에 미 육군의 소총/권총 사격팀의 주장으로 2년간 지냈다. 이후 42년 9월에 준장 진급하고 96사단에 부임한 그는 사단의 사격술 훈련을 직접 감독하고 시범하면서 사단이 데드아이 디비전라는 별칭을 얻게된 영향을 줬다.[8] 우시지마 미츠루와 조 이사무는 할복자결, 오타 미노루와 이토 세이이치는 전사한 가운데 지휘관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 전쟁이 끝나고 천수를 누리고 1981년에 병사한다.[9] 육군 대좌로 제32군 고급참모이다. 대위 시절 미-일간 장교 교환교류로 미국 유학을 해서 미국을 잘 알았고 이후 1944년 3월, 일본 육군대학 교관을 3번째로 지내던중 신설된 제32군의 참모가 되었다. 일본군이 펼친 방어전술은 그가 입안한 것으로 적군인 미군이 높게 평가했다. 전투 말기에 상관인 우시지마와 조 중장이 할복할 때 야하라 대좌에겐 생존하라고 명령했고 결국엔 미군의 포로가 되어 살아남았다.[10] 류큐 전역에 동원된 미군 육, 해, 공군, 해병의 총합 병력으로 이 수치는 훗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최전성기 병력(1968년/54만 8천명)에 맞먹는다. 병력의 구성원은 지상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과반수는 주로 해상의 미, 영 해군들이다.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계속 전력이 보충, 증강되었다.[11] 전투 중 증원부대와 보충장병의 대량 투입으로 25만명까지 증원됨, 영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각군 병력의 T/O는 대체로 미 육군 10만 2천명/미 해병대 8만 8천명(양측 병력엔 각각 군단포병과 전투지원, 근무지원, 사령부 본부대도 포함한다), 1만 8천명의 미 해군 지상부대(건설부대와 의무부대)이다.[12] 남태평양에서 작전했던 제1수륙양용군단을 44년에 개편한 부대로 괌 전투, 펠렐리우/앙가우르 전투, 오키나와 전투를 치렀다. 전후 중국 북부로 파병되어 현지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국민혁명군의 활동을 보조하다 46년 6월에 해체됐다. 훗날 60년대에 제3상륙군(제3해병원정군)으로 재창설되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현재까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다.[13] 미국 육군이 2차대전에서 운용한 24개의 군단들에 23번째로 창설된 부대로 44년 4월 하와이에서 창설되었다. 부대 창설의 배경엔 중부태평양에 주둔한 육군 사단들이 늘면서 이들을 관할할 상급부대의 신설이 건의돼서 이뤄졌다. 레이테 섬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고 전후 남한에 상륙해서 군정사령부로 있다가 미군 철수로 49년 1월에 해산했는데 이것은 대전기에 신설되었다 전후에 해산된 전시 편성 군단들중엔 마지막이였다. 훗날 68년에 재창설되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72년 6월에 다시 해체되었다.[14]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 지상군의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신설된 3군 합동부대로 전투 초기에 확보한 욘탄과 가데나, 이에지마 공군기지와 미군이 개설한 비행장 곳곳에 전개하여 활동했다. 가미카제의 활동이 절정일때 대거 요격으로 동원되었으며 항속거리상 규슈일대를 타격가능했는데 가미카제 작전의 방해요소로 판단한 대본영은 오키나와에 공수부대를 보내 비행장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다.[15] 1차대전 이후 1940년에 재창설된 연방군 현역 사단으로 파병 전엔 미국 서해안지역의 해안경계부대로 지냈고, 종전 후 남한 미군정의 점령군으로 종사하다 49년 일본으로 철수했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이후 1971년 철수(2차 해체)때까지 주한미군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사단이다. 오키나와에서 7사단은 4월 1일 ~ 5월 10일까지 전투를 치뤘고 96사단과 교대하여 21일까지 휴식및 부대재편을 거쳤고 22일 새벽부터 재투입되어 종결까지 활약했다. 전역 말기에 일본군 제32군의 사령부가 있던 마부니 지역을 점령했다. 한국 주둔중이었던 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단에 아리랑 곡을 헌정했고 그후로 사단가의 노래는 아리랑을 쓰고 있다. 2012년에 사단 본부로 재창설된 현재의 사단도 노래가 같다.[16] 원래는 뉴욕주 주방위군 부대로 1942년 초 증원군으로 하와이에 보내져 주둔군으로 지내다 참전했다. 마킨과 사이판에서 랄프 스미스 사단장의 지휘스타일이 공격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해병대 상관이 육군 지휘관을 해임한 사례라서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 전투 시점에선 초기에 제10군의 예비대로 일부 분견대는 주변 도서지역을 점령한후 사단은 4월 19일 공세에 투입되어 10일간의 전투 후 오키나와 경비부대(군정)로 지명되어 미 해병대와 교체하고 종전까지 오키나와 중,북부에서 후방경비로 지낸후 9월에 일본에 수송기로 공수되어 혼슈 중북부에서 점령군으로 지내다 12월에 미국으로 철수하여 동원해제됨[17] 과달카날, 글로스터, 펠렐리우를 거쳤다.[18] 1943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해병대 역사상 최악의 혈투를 벌인 사단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전투 말기에 버크너 장군이 사단의 8연대를 시찰하다가 전사한다.[19] 괌 탈환전에 참가했던 제1임시해병여단에 29해병연대를 추가하여 신편된 사단으로, 예하의 4연대는 제1기습연대에서 개편한 최정예 엘리트 부대로 실전 경험이 많은 부대이고, 22연대는 두 차례 실전 경험이 있었고, 29연대는 1대대만 한 차례 실전 경험이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고 7월에 사단은 괌으로 철수하여 부대재편과 휴식을 보내던중 곧 일본의 항복으로 있다 점령군으로 중국에 수송되어 산동성 지역의 치안유지를 담당하다 46년 4월 해체되었고 사단의 잔류전력이 4연대를 근간으로 3해병여단으로 축소편제되었으나 이 여단도 47년 7월 해체되어 미국 본토로 귀국했다.[20] 모두가 자력으로 수천, 수만 마일의 대양 항해가 가능한 중급 이상의 함선들로(상륙주정, 바지선, 항속거리가 짧은 기타 중, 소형선박 제외), 지상군의 수송과 호위, 화력지원을 담당한 터너 제독의 제51기동부대에만 배당된게 무려 1,200척이었고 이는 이오지마 전투에 동원된 수송선단의 2배가 넘었다. 나머지 600척은 태평양 함대와 제5함대 직할의 보급/지원/보조함대와 항모기동부대인 미처 제독의 제58기동부대와 롤링스 제독의 영국 태평양 함대의 항모기동부대인 제57기동부대에 있다. 이들 함정의 규모와 배수량 총합, 수송량과 항해 거리를 감안하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뛰어넘는 스케일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영국처럼 추축국의 영역에 매우 근접하면서(중국), 섬 나라라 침공을 받을 우려가 없고(호주/뉴질랜드), 병참적으로 전쟁수행능력을 크게 협찬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의 산업시설 기반[113]이 존재하는 이 3가지 모두의 조건이 맞는 동맹국이 태평양 전구엔 없었기 때문에 현지 조달이 불가능한 보급품은 미국 본토로부터 실어와야 했다.[21] 외부에서 증원온 일본군이 최대 10만명 정도이며 4만명의 오키나와 현지 주민들이 징병되었다.[22] 전자는 일본측 추산, 후자는 미국측 추산이며, 미국측 추산은 현지 오키나와 주민 징집병 전사자 3만을 포함함.[23] 수많은 항공기들이 카미카제 공격에 쓰였다. 참고로 1,430기는 영문 위키피디아에 등재된 수치로, Giangreco, D. (2009), "Hell to Pay Operation Downfall and the Invasion of Japan, 1945–47", Naval Institute Press. p.91.를 자료 출처로 하고 있다. 전쟁 직후 까지는 미군은 일본군의 항공기 손실을 7,800기 까지 추산했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 등에도 같은 숫자로 되어있다. 한편 일본어 위키피디아에는 미국 전략폭격 조사단의 자료를 인용하여 카미카제 1,895기, 기타 항공기 1,112기, 총 3,007기 손실로 등재되어 있다.[24] 추정에 따라 1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 규모는 당시 오키나와에 남아있던 인구의 1/4~1/3에 육박한다[25] 전투기간 당시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으로 동원되었고 그 중 701명의 사망자가 확인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현재까지 오키나와 전적 국정공원 위령비 명단에 기록된 한국인 사망자는 464명이다. 징용된 인원은 특히 경상북도 지역 출신이 많았는데, 현재 경북 영양군 호국공원 근처에 징용피해자들을 기리는 <한(恨)의 비>가 세워져 있다.[26] 오키나와에서 이 전투 당시를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며, 같은 제목으로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을 주민의 입장에서 다룬 저서가 있다.#[27] 당시에 전함 야마토가 가진 위상과 상징성이 드높아서 격침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적인 열광이 미군 장성들부터 일개 병사들까지 퍼져 나갔다. 더 나아가 미국 본토에도 영향을 미쳐 국민들의 전쟁채권 구입이 한동안 증가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이 부하의 발언을 자제한 것은 이때쯤에서야 지형을 활용한 종심지연전으로 위시되는 일본군의 전략/전술 변화를 확신하여 주의를 촉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1억 총옥쇄를 각오하고 가용가능한 모든 자원을 미군에게 계속 투사하려한 점을 꿰뚫어 본 듯 하다. 실제로 야마토의 격침이 오키나와 전투에 영향을 준 것은 없었고, 류큐 전역이 장기화 되면서 현지의 모든 미군들이 이것을 실감하게 된다.[28] 오키나와 전투 당시 해군근거지대장으로서 명목상 1만 명 규모의 부대를 지휘했지만 실제로 그 중 절반은 징집된 민간인이었다. 사후 해군중장 추서.[29] 오타 미노루는 전보 발송일로부터 일주일 후인 13일 새벽 1시 다섯 명의 참모와 함께 자살했다. 자국의 일반 민간인들에게도 매우 강압적이고 우월의식을 내뿜는 일본군의 고위 장교가, 그것도 같은 내지긴 해도 일본 본토가 아닌 식민지 취급을 받는 오키나와의 막대한 전쟁피해와 민간인 희생을 언급하며 특별한 배려를 요청하는 문구를 사실상 유언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오키나와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반환 이후 오타 미노루의 요청을 사실상 무시해버린다.[30] 행정구역상 도쿄도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해 있다.[31]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는 소련군이 치른 슘슈 섬 전투 등이 있다.[32] 참고로 오키나와 일대의 섬들은 이때 미군에 점령당한 후 1972년까지 27년간 미국이 통치하게 되는데, 결국 이후에도 류큐로 독립하진 못하고 일본에 귀속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겉으로는 주민의사를 따르는 형식이었지만(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에 반환되면 평화헌법에 따라 미군기지가 철수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나중에 공개된 문서를 보면 당시 반환 대가로 일본이 이것저것 내놓은 것이 있었다.[33]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 항모 기동부대가 사실상 무력화된 것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미드웨이에서 입은 피해는 크기는 했지만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그러니까 축구로 치면 미드웨이는 동점골 정도라는 것이다 오히려 인적 자원의 피해는 미드웨이 이후에 과달카날부건빌, 라바울 등 솔로몬 전역의 소모전에서 조종사와 항공 정비병들이 손실된 것이 더 컸고, 항모 기동부대 자체는 1943년 후반부 즈음에는 다시 미군과 붙어 볼 만한 전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마리아나에서 일본 항모 기동부대가 대패한 것을 두고 "일본군의 등뼈를 부러뜨린 전투"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34]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 해역군(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태평양 함대)과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 해역군으로 나뉘어져 있었음.[35] (1). 마리아나 제도에 건설한 공군기지의 70% 수준으로 건설하여 B-29 폭격기와 전투기들, 항속거리가 짧은 2발 폭격기들이 대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일본 본토를 더욱 효율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 (2). 오키나와의 지리적 위치가 매우 우수하여 동중국해, 동해를 감제하여 일본의 남방 점령지,중국, 한반도 - 일본 간 해상 통로 역시 차단 가능하다. (3).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핵심 전진, 작전/지원 기지로서 항구와 각종 시설을 건설할 수 있고 대규모 병력을 수용할 공간이 있다.[36] 오키나와 전투(본섬 상륙)는 원래라면 45년 3월 1일에 개시될 예정이었으나, 한 달 연기되어 4월 1일에 처음으로 진행되었고, 작전 연기는 이오지마 전투와 맥아더 장군의 루손 섬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작전 수행에 필요했던 선박과 각종 물자, 병력이 준비되고 집결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37] 제해, 제공권은 레이테만 해전을 시작으로 45년 초까지 정리되었고 지상전엔 3월 경엔 수도인 마닐라를 미군이 탈환하고 루손섬부터 민다나오섬에 이르는 곳곳의 섬에 있던 지상의 일본군들은 내륙 산간으로 후퇴하여 종전까지 지구전을 벌이는 중이었다.[38] 미군 기갑사단 4개를 편성할 수 있는 물량이나 오키나와 전투에선 전차의 집단운용이 가능한 환경이 아니여서 대개 전차들은 소대, 중대단위로 보병제대에 배속되어 보병-전차 협동 작전(제병협동)을 주로 펼쳤다.[39] 참고로 일본제국 육군에는 본래 2개 전차사단이 있었는데, 그 중 1전차사단은 절반 가까운 전력을 괌과 사이판 등지에서 잃은 후 잔여 전력은 본토 36군 소속으로 전환되어 미군의 수도권 상륙에 대비했다. 그리고 추가로 1942년에 3전차사단을 창설하여 주로 중국 전선에 투입했고, 라바울과 조선 북부에 분산배치했으며 1944년 여름 패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교도부대 등을 통합하여 제4전차사단을 창설하여 1전차사단과 마찬가지로 36군에 배속되어 본토결전에 대비했다.[40] 전투 중엔 해군의 부대들이 육군의 각급 부대에 분산 배치되어 군말없이 방어전에 보탰고, 전투 말기에 오로쿠 반도에 고립된 해군 총지휘관 오타 제독의 자결 직전, 우시지마 장군은 통신으로 여러 차례의 제32군의 잔존 부대가 위치한 기얀 반도로의 철수 권유와 전령을 통해 자신의 친서(!)를 전달했으나 오타 제독의 정중한 거절(..)로 소용은 없었다. 그래도 일본군의 그 유명한 군별 대립과 전쟁 중기까지 작전 상 후퇴를 매우 경멸했던 일본군의 문화를 감안할때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의미가 크다.[41] 이는 당시 일본군의 위기의식을 대변한다. 비록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취급이었지만, 오키나와는 개전 이래 최초로 내지에서 벌어지는 지상전이였다. 사이판 전투, 제2차 괌 전투, 펠렐리우 전투, 필리핀 탈환전 등은 1차대전 이후 일본이 얻은 외지거나 남방작전 과정에서 점령한 영토들이었는데 오키나와는 제2차 류큐 처분(1879) 이래 일본의 영토였다. 압도적 전력의 미군이 이미 일본의 본토까지 밀고온 거고, 이 시점에서 육해군이 협조는 못할망정 서로 자존심 내세워가며 싸우기에는 자기들이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주둔군은 육군이나 해군이나 똑같이 대본영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세였기에 동병상련의 신세이기도 했다.[42] 일본군은 각 부대마다 편제가 오락가락이지만 상대인 미군은 사단포병으로 4개 대대가 표준 편제되고 그 이상은 군단급 이상에 유동적으로(2개~20개) 편제되는데 항상 일정한 규모를 유지해서 휘하 사단에 대한 지원엔 어려움이 없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사단 포병은 25개 대대(6개 사단+1개 연대)에, 2개 군단과 제10군의 포병이 14개 대대로 전부 39개 대대가 활동했다.[43] 당시 스틸웰은 중국 전구 사령관에서 이임된 후, 45년 연초부터 맥네어 장군이 맡았던 그 미국 육군 지상군사령관을 재직중이었고 6월 시점에선 태평양 전구의 시찰에 나서 전방 곳곳을 둘러보고 맥아더, 니미츠 및 그외 장군, 제독들과 회견을 가졌고, 그 와중에 오키나와에 들려서 버크너 중장을 만나기도 했다. 스틸웰이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괌을 경유할 때 버크너의 전사 소식을 들었고, 하와이에 도착해서는 맥아더로부터 제10군 사령관으로 급히 취임하라는 무전을 받게된다. 이는 버크너의 전사 직후, 마셜 총장이 맥아더에게 후임자 추천권한을 부여했고 논의 끝에 결정된 것이다. 인선 과정에선 니미츠 제독의 양해도 있었는데 그 때까진 제10군이 그의 작전통제 하에 있어서, 스틸웰의 부임엔 니미츠의 명령서도 수령받았다.[44] 사이판전투에서 도중 해임된 전임 사단장 랄프 스미스 장군의 후임으로 부임한 인물로 부임 직전엔 하와이 수비대였던 제98보병사단장으로 지냈다. 지휘력은 무난했는지 종전후 사단이 주방위군으로 복원하는 45년 연말까지 27사단장으로 지냈다.[45] 사이판 전투 직전 사단장이 되어 종전까지 지휘했다. 그 직전엔 제1전술여단장으로 마셜 제도의 에니웨톡 전투를 지휘했고 종전후에 해병대 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으로 전출됨.[46] 콰잘린 전투 직후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종전까지 사단을 지휘했다. 사단으로의 전입 자체는 43년 2월경, 제7사단 포병단장으로 부임했고 그 직전 보직은 제44보병사단 포병단장, 제7사단의 해외파병 시작부터 종전까지 사단에 계속 근속한 장성으로 종전후 하지 중장을 따라 남한에 진주하여 미 군정의 군정장관(2인자)으로 임명되어 군정 초기를 담당하고 46년 연초에 미.소 공동회의의 미국측 수석대표가 되어 9월까지 지내다 미 본토로 전출, 육군 지상군 사령부의 기획처장으로 지내다 48년 전역, 훗날 1960년에 4.19혁명 직전 한국을 잠시 방문하여 이승만과 접견했음[47] 유럽전선의 오마 브래들리와는 관련없는 다른 인물로 2차대전의 96사단의 창설부터 해산까지 사단을 지휘한 장성으로 직전 보직은 제4군(전쟁 내내 해외파병되지 않고 미국 본토 방어부대 역할을 맡음) 참모장을 지냈었다.[48] 전투 종결이 된 6월 말에 가이거 장군은 태평양 함대 해병 사령관(현재의 통합전투사령부의 예하 해병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는데 전임자는 바로 홀랜드 스미스 중장이었다. 스미스 중장은 미 본토 캘리포니아 주의 캠프 펜들턴에 있는 미 해병대 보충대 사령관으로 전출했고 가이거 장군은 미주리 호의 항복식에 참관한 유일한 미 해병대 고위 장성이 되었다. 가이거 장군의 뒤를 이어 취임한 후임자인 록키 장군은 이오지마 전투에서 제5해병사단장으로 지냈다. 그는 군단장이 된후 제3상륙군단이 전후 중국으로 배치되고 부대가 해산하는 46년 6월까지 지냈다. 여담으로 오키나와 전투의 준비 단계에서 스프루언스와 터너 제독(제5함대 상륙함대 사령관)은 홀랜드 스미스 해병중장의 기용을 원했던 듯 하다. 그러나 니미츠 제독은 바로 기각했다. 사이판 전투에서 스미스 중장이 처신했던 점과 그의 성격상 같이 종군할 육군 지휘관들과 발생할 마찰들, 오키나와 전투의 주력 비중과 지상군 총사령관은 엄연히 미 육군였고 합동을 맞출 미 해병대에서도 육군과 화합이 잘되는 지휘관들을 선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49] 과달카날 전역에서 제11해병연대장(포병), 괌 전투에서 제3상륙군단의 포병단장으로 지냈으며 펠렐리우 전투 직후 루퍼터스 장군의 후임으로 사단장이 되어 45년 8월까지 지내다 해병대 사령부의 감찰총감으로 전출됨[50] 2차 대전까지만 해도 미군의 경우 편제상으로는 보병사단에 고정 예속되는 전차대대가 없었고, 대개는 군단급 이상 직할로 독립전차대대들이 편제되면서 필요할 때마다 작전 중인 사단에 배속시켜주는 형태를 띄었는데 모든 사단에 1개 대대씩 할당해줄수 있을 정도로 숫자가 충분해서 일단 배속된 부대는 사실상 그 사단의 일원으로서 종전까지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종전 후 2차대전의 전훈을 바탕으로 편제가 개편되면서 한국전쟁에선 보병사단에 전차대대가 고정예속되었으며 거기에 별도로 보병연대 직할로 전차중대가 편제되었다.[51] 당시 미군의 포병단(Artillery Group)은 포병 연대(Artillery Regiment)를 개편한 것으로 지휘관도 보통 대령이 맡지만 포병단은 연대와는 다르게 휘하에 고정 편제되는 포병대대들은 없었고 규모도 천차만별과 들쑥날쑥했다. 이것은 전쟁 중 미군의 군제개편으로 보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원 병과의 연대급 부대를 쪼개서 단위부대에 불과했던 휘하의 대대들을 고유 단대호로 독립시키고 및 대대의 역할 비중(편성 부대)을 증가시켜 상급부대의 지원없이 자체적으로 부대기능의 발휘가 가능하게 하고, 임무에 따라 대대의 배속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변화시킨 결과로 개별 포병대대(사단 포병 제외)는 대개 상급부대(야전군, 군단)에서 작전에 따라 포병단에 배속되는 방식으로 포병단의 순수 자체 편제로는 포병단장인 대령과 참모진, 소규모의 단 직할대가 전부로 전투조직이라기보단 지휘조직의 성격이 컸다. 이러한 단이 몇개가 모이면 포병여단을 구성할수 있었는데 실질적인 규모로 보면 소련식 포병사단, 경우에 따라선 포병 군단에 맞먹었다. 물론 미군이 질적 우위가 절대적이었다.[52] 이오지마 전투부터 미 해병대는 전역에 참가한 각 사단에 사단 T/O외에 별도로 연대급 규모의 보충장병(2500명)을 배속시켜 부대의 전력 유지의 원활함을 도모했다. 이들 보충장병들은 전투 초기에 해안부대로 활용되다, 전문부대들이 상륙하여 체계가 잡힌후엔 일선 연대들에 보충하는 식으로 운용되었다.[53] 제7보병사단은 전쟁 중과 종전후 1946년까지 사단의 1개 보병연대가 3번 바뀌었는데 1940년의 창설 당시엔 제53연대(후일 알래스카 수비대의 일원으로 배속 변경됨)였다가 진주만 기습 직후 제159연대로 대체되었으며, 1943년 8월 키스카 섬 전투 직후 159연대도 역시 알래스카 군관구 휘하 주둔군으로 배속이 변경되면서 제184연대가 사단에 편제되어 종전까지 지냈다. 종전 후 남한에도 진주한 이 부대는 46년 연초에 전후 군축의 영향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으로 원복 예정이었으며 대타로 제31연대가 재창설되어 후일 한국전쟁을 겪고 50년대 중반 펜토믹 사단 개편까지 지낸다. 31연대는 원래 1차대전기에 미국령 필리핀에서 창설되어 현지 미군의 전투부대로 있었는데 2차대전에선 42년 필리핀 방어전의 바탄 전투에서 소멸되었고 전후 맥아더 원수의 주선 하에 재창설되어 7사단에 편제되었다.[54] 상급부대(군단, 야전군, 해군 함대)에서 사단에 지원해준 부대로 배속 기간은 최초 상륙일로부터 + 며칠, 몇 주(상륙지원 및 해안부대) 또는 내륙에 진입하면 일개 전투에서 전역(Campaign)단위까지 천차만별이다.[55] 다만 이오지마 전투에선 일본군은 미군의 최초 상륙은 무시했으나 의도적으로 상륙 중반부터 섬 곳곳에 은/엄폐,갱도화한 야포들이 상륙지역에 대규모 포격을 가하여 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안겨줬고 기타 요인들이 맞물려서 상륙 첫날에만 사상자가 2천명(당일 상륙병력은 3만명)이 넘었는데 오키나와의 경우 일본군의 반격 포격과 저항이 거의 없어 미군 스스로가 놀라워했고 심지어 반년 전 맥아더 장군이 직접 레이테 섬에 개선상륙한 것을 빗대기도 했는데 오키나와 상륙 첫날에 사상자는 불과 150명으로(당일 상륙 병력은 6만명) 그중에도 90%가 상륙중 발생한 각종 사고에 의한 것이었다.[56] 그외에도 섬의 면적과 지형적인 요소, 일본군의 방어전략의 차이에도 존재하는데 오키나와의 일본군은 이오지마보다 훨씬 병력과 화력이 많았지만 그 정도로도 섬 전체를 방어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섬에서 가장 중요했던 남부 지역의 방어에만 몰빵하고(미군은 중부에 상륙했고 남부에 돌입할때 저항을 받기 시작함) 그외의 지역은 거의 방치했는데 남부 지역도 나름 넓어서 종심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고 미군의 공세에 전선이 붕괴되려 할때 후방진지로 철퇴하여 다시 전투하는 행동이 가능했다. 이에 반해 이오지마는 섬이 매우 작았고 상대적으로 일본군이 빼곡히 차서 미군의 상륙지를 제외한 모든 배후지역이 그들의 진지및 종심이었다.[57] 결국 폭격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끝에 3주 만에 점령당했다. 이후로 우라소에 구스쿠는 아직까지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나 워낙 처참하게 파괴되었기에 복원 작업은 지지부진.[58] 이쪽도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1990년대 일부 재건되었으나 완전 복원을 앞둔 2019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59] 전차포가 아닌 화염방사포를 장착한 후기형 화염 방사 전차로 화염을 최대 200m까지 뿜어낼 수 있었다.[60] 유튜브에 있는 미군의 전시 홍보영상에서 제시된 근거로 볼 때 섬 간 기준마다 다르지만 야드파운드 법으로는 325 ~ 360마일 사이의 간격이다. 항공 위협을 보면 일본군은 훨씬 중요했던 오키나와 방어를 위해 이오지마 전투 당시엔 가미카제를 많이 보내진 않았고, 이 점을 현지에 있던 구리바야시와 이치마루에게 주지시켰다.[61] 당시 B-29의 발진기지는 태평양 한가운데 섬들인 티니안, 사이판, 괌에 있었다. 해군 수송선들이 물자를 보급해주지 않으면 육군항공대 제21 폭격사령부는 폭격은 고사하고 배고픈 상태로 항공보급이라도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이 상황을 쉽게 쓰면 베를린 봉쇄를 섬 버전으로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62] 카미카제에 동원된 자살 특공기가 1,900여 대, 나머지는 호위 또는 통상 공격 임무로 투입됨.[63] 사실 오키나와에서 버크너 중장의 전술은 거의 옳았으며, 이는 니미츠 제독을 포함한 이해관계자 전원이 인정했다. 진격이 늦은 것은 그만큼 일본군이 격렬하게 저항한 것 때문이다.[64] 야마토의 특공 작전을 흔히 천호/천1호 작전이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천호 작전이 말기의 방어계획, 천1호는 그중 오키나와 방면 작전, 그리고 그 천1호 작전의 일부로 수행된 카미카제 작전이 키쿠스이 작전이며, 야마토 특공은 그 키쿠스이 작전의 일부다.[65] 전함 나가토, 하루나, 이세, 휴우가가 가동 가능한 상태였지만 연료가 없었다.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 우가키 마토메"지금이야말로 최후의 총공격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라고 주장하는 한 장성의 말에 괜히 "기름이 없다." 라고 하는 게 아니다.[66] 개전 당시 해군성 차관으로 대미개전을 반대했었다.[67] 뒤에 나올 거대한 버섯구름의 원인.[68] 물론 이런 식으로 고정포대 노릇을 한 전함이 있긴 하지만, 마라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한스 울리히 루델에게 1.4톤짜리 폭탄을 얻어맞아 전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럭저럭 제 몫을 톡톡히 해냈으며 각종 시설과 대공포대가 있는 자국의 군항 내부에서 고정포대가 된 것이라 야마토가 맡은 작전 같지도 않은 작전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다. 거기에 마라는 함체의 3분의 1이 박살난 상태로도 오로지 조국을 수호한다는 근성으로 레닌그라드를 수호하며 레닌그라드의 수호신이라 칭송받기까지 했으니 야마토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69] 현재의 상선 역시도 펌프가 닿지 않는 바닥의 잔류 유량은 연료량으로 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는 쓸 수 없는 연료이기 때문이다. 다만 몇%, 몇톤이 못쓰는 연료인지에 대해 정확한 기준이 있는건 아니라서, 해상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응급상황에 대비해서 선장이 서류외로 임의 보유하는 예비 연료의 의미도 있다. 한창 고유가가 천장을 치던 2011~2012년도에는 이렇게 관행적으로 없는 셈 치는 연료량까지도 박박 긁어서 선박 용선/반선시 유량을 계산하는 전문 서베이 업체들이 성행한 적도 있었다.[70] 근데 워낙 승조원이 많다보니 야마토에 실어 놓은 배급할 돈과 물자 구입비가 자그마치 51만 805엔, 지금 가치로 10억 엔이었다. 관련 4컷만화[71] 이 때 미처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알레이 버크 제독(당시 대령)이 상관인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보낸 전문과 그 회신이 아주 유명하다. 알레이 버크 문서 참고.[72] 이 항공모함은 1410기의 적기와 73척의 함선을 파괴했다.전후 전과를 인정받고 박물관으로 개장된다.[73] 해당 임무에선 폭탄3발과 어뢰 4발을 명중시킨다.사실상 절반 이상을 맡은 셈.[74] 화재가 탄약고로 번져 유폭했다는 설과 배가 기울면서 탄약이 쏟아져 유폭했다는 설이 있다.[75] 아무리 배와 비행기의 싸움이라고 해도 상당히 터무니가 없는 교환비인데,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산타크루즈 해전에서 고장나버린 엔터프라이즈를 호위하면서 다른 군함과 공동격추로 26대나 떨궈버리고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 함대를 비행기에게서 보호했다. 물론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의 경우에는 어느정도 완성된 함대원형진, VT 신관, 명품 대공포가 전부 갖추어져 있었던 반면에 야마토는 그 중 어느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데다가, 그 대공포들 마저 대공포의 사거리 밖에서 쏟아진 로켓탄에 박살이 나서 본격적인 공습에는 대응을 할 수 없었다.[76] 불행히도 후방기총사수는 익사했다.[77] NHK에서 2020년 8월 20일 방영[78] 일본군의 고집으로 지속된 오키나와 전투 최후 1개월 동안 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토 결사 항전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방패삼아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죽어갔는지 알 수 있는 다큐멘터리[79] 현재 류큐(오키나와)는 일본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영향을 받는 공영방송 NHK의 어느 정도 의도된 피해자 코스프레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어느정도는 필터링해서 걸러들을 필요가 있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을 궁지로 몰아 강제 동원, 전투에 몰아넣은 일본군의 실상에 초점을 맞춰서 볼 필요가 있다.[80] 당시에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에 의한 피해 규모도 부각되지만, 오키나와가 남달랐던 것은 대전 후반의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연합군의 지상군이 추축국의 본토 영역에 진입해서 전투를 치뤘고 그로 인한 인구 대비 민간인 사상자의 비율이 일본 본토보다 훨씬 어마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날아온 폭격기의 공습을 두들겨 맞는 것과 미군이 그들이 살고 있는 영토에 직접 발을 딛은 것의 차이는 엄청났다.[81] 이는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제징집을 당해 일본군으로 참전한 조선인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도 해당 조선인의 후손들이 기록을 지워달라고 해도 절대 지워주지 않고 있다. 나무위키 내 관련 서술은 야스쿠니 신사 항목을 참고할 것.[82] 32군 우시지마 미쓰루 사령관과 참모장 조 이사무 참모장은 6월 23일 할복 자살.[83] 처음에는 네오콘들이 반대를 하려고 했으나 일본 정부의 저 성명으로 인해 네오콘들도 제대로 격노해서 위안부 성명을 찬성하거나, 일본의 로비를 무시했을 정도다. 네오콘의 아버지 세대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란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일본 정부의 화려한 패드립이며 당연히 안 분노할 리가 없다. 즉, 일본의 저 성명은 네오콘들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84] 사실 연막탄엔 어느 정도 독성 성분이 있는데 보통 작전 시 병력 기동의 은폐용으로 쓰니 넓게 퍼져서 그렇지 좁은 공간(동굴, 참호)에 투척하면 밀집된 짙은 연기로 인해 사람이 숨쉬기가 힘들다.[85]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미 본토의 전시 체제의 생산력이 피크를 찍자 각종 보급품들이 미친듯이 찍혀나와서 써도 써도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특히 전투식량(C레이션)은 태평양 함대 각 부대들의 보급창고에 말 그대로 미어터질 정도로 쌓여있었는데 이는 부대들이 미 본토의 생산력과 보급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일부러 보급 요청을 과도하게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조국의 공급 능력을 무시한 댓가로 일선 부대들의 창고들은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군정이 오키나와 주민들을 위해 식량 요청을 하자 다들 신나서 골칫거리인 잉여 식량들을 밀어넣었고 군정은 당황하여 요청을 취소했지만 그 사이에 엄청난 식량이 오키나와에 모이게 된다. 오키나와 주민들 입장에선 일본군의 인적, 자원적 수탈로 고통받다가 갑자기 파묻혀 죽을 만큼 식량이 널널해지고 강제로 끌고가던 일본군과 달리 정당한 보수로 일도 시켜준다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86] 당연하겠지만 위에서 주석으로 달아놨듯이 비참하고 후회할 결과만 낳았다.[87] 원래 미군은 오키나와에서 쓰려고 전용 군표를 발행했지만 전쟁으로 오키나와의 경제가 피폐해져서 전투 중엔 군표 대신 현물거래로 교류를 했다. 전투가 끝나고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 경제를 재건하면서 군표사용이 본격화되었다.[88] 사실 주민들에게 작업을 시키는 것은 미군 측의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다. 주민들이 스스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아가도록 하는 것이 주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89]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고, 때문에 어마어마한 수가 해외로 이민을 갔으며 그 가운데 많은 수가 하와이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이들 중 미군에 입대한 이들도 있어서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대민업무를 수월하게 만들기도 했다. 2022년 현재 하와이 주지사인 데이비드 이게 역시 2차대전 미군 참전용사를 아버지로 둔 오키나와계 인물이다.[90] 平和祈念公園, 기념이 記念이 아니라 기원하고 염원한단 뜻의 祈念임에 주의.[91] 미국은 원래 원폭투하에도 광신적인 일본이 쉽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에 실제로 미국이 원폭을 퍼붓고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던 그 순간에도 미국 본토에서 태평양 전구에 몰락 작전에 필요한 육해공군을 계속 수송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45년 8월에 대양을 횡단하던 도중 공해상에서 종전 소식을 접한 미군들의 회고가 많다. 이후 일본의 항복을 확인한 후 일본을 빠르게 장악하기 위해 블랙리스트 작전을 발동했고 미군을 일본 본토와 소련군이 아직 닿지않은 중국 북부와 남한으로 수송하는 긴급계획이 수립되어 레이스를 펼쳤다.[92] 일본뿐만 아니라 현재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고 반경 1,500km 안에 동아시아권의 왠만한 대도시들이 포함되는 지리적 위치(남쪽으로는 홍콩과 마닐라)가 워낙 절묘해서, 현재까지도 오키나와는 주일미군의 핵심 거점으로 군림하고 있다.[93] 유럽전선에서 활약한 제8공군이 독일 항복후 태평양 전구로 재배치되어 45년 7월 16일에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에 사령부를 차렸는데 비행기들은 그 달말이 돼서야 1개 전투기 비행단(Air Wing)이 배치되어 일본본토공습에 가담했고 폭격기들은 원폭을 투하한 8월이 돼서 합류해서 활약의 여지가 없었다.[94] 왜 실전 경험과 정상편제사단 부분을 강조하냐면, 결호작전의 준비로 당시 일본 본토에서 급히 창설되던 신설사단들은 당연히 신병뿐이어서 실전경험이 전무했고, 무엇보다 장비와 병력이 없어서 평시대비 축소편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사단이니 실제로는 여단/연대급 수준이었던 것.[95] 대표적으로 지구전 계획의 입안자였던 일본 제32군 작전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민간인으로 위장해서 섬 북부로 탈출 중 발각)과 오키나와 북부 지역의 방어 책임자로 모토부반도 전투의 일본군 지휘관이었고 전투 이후 게릴라전을 벌였던 우도 대좌(종전 후 45년 10월에 항복) 그 외에도 소위 이상의 계급을 가진 장교가 200명 넘게 포로가 되었다. 제32군의 장성급 인물 9명은 제32군 사령관과 참모장, 제62사단장과 휘하 여단장 2명, 제24사단장, 제5포병단장, 제44여단장, 해군 근거지대장으로 중장 5명과 소장 4명은 모두 전투 막바지에 죄다 자결했다.[96] 어디까지나 일본군 기준으로, 다른 군에서는 수십%가 되는 경우도 흔하다. 일본군만 유독 자살 돌격이나 실제 자살로 전투를 마무리하는 경우가 다수라 이게 많아보이는 것.[97] 단일 전투가 아닌 전역으로 따지면 필리핀 탈환전에서도 포로 1만 2천 명을 낸 바 있다.[98] 사실 5월 말까지만 해도 포로의 수는 극소수였으나, 5월 초에 있었던 일본군의 반격이 그들 자신의 전투 병력 손실을 극심하게 했다. 그래서 비전투병들로 손실을 보충했는데, 이 영향이 컸다. 일본군 포로의 대량 발생은 6월이 되면서 작용됐다.[99] 일본군 항목에 나온 것처럼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그로 인한 연합군 포로학대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일본군 측에서 그나마 개념인이라 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스러워 했을 정도다. 그런데 저렇게 항복자가 대량으로 나온 것은 전례가 없는 수준이다.[100]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하고 있었던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에 병사들의 심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나치 독일은 달에 있는 편이 나았다."고...[101] 복무 월수, 해외 파병 월수, 훈장 수여 개수, 청소년 자녀 유무, 전역(Campaign, 지역 단위의 대규모 군사작전) 참가 횟수.[102] 초기의 귀국자들이 주로 부사관인 배경엔, 병의 경우 대체적으로 점수를 채울 짬이 부족하고, 짬이 되는 병들(특히 전쟁 전부터 복무해 온)은 능력을 인정받아 전쟁 중에 부사관, 장교로 임관해서 계속 진급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자의로 진급과 임관을 사양한 병들도 있는데, 계급만 낮을 뿐 전역 점수의 확보엔 지장이 없었고, 장교들(태평양 전선)의 경우엔 여전히 전쟁 중인 것을 감안해서 내부 방침으로 점수 적용을 불허했고 일본이 항복한 후에야 적용했다.[103] 제1해병사단을 지휘한 올리버 스미스 장군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는 준장 계급 겸 제10군의 부참모장으로 사령관인 버크너 장군을 보좌했는데, 제10군의 참모진에 배속된 미 해병대의 최선임 참모였다.[104] 당시 미군들 중에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단 전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재소집되어 복무하면서 인생의 장래에 대한 생각의 변화로 군대에 남아 직업군인이 된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김영옥 대령이 그렇다. 나이는 차는데 군복무 기간은 자꾸 늘어나니 아니꼬와도 걍 직업군인으로 계속 일할 생각이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들 법도 하다.[105] 한국에서는 독도 영유권주장을 명기하여 논란이 되었다.[106] 같은 이름으로의 서적도 72년에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야하라 대좌가 전후에 집필한 회고록으로 그가 실행한 지구전의 효과와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일본측의 시각이 담겨 있다. 현지 일본군의 유일한 고위급 생존자(포로)이자 제32군 작전참모로서 전투 실상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고 있었기때문에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고 그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측 시각이 각종 서적과 위 영화에 반영이 되었다. 오키나와의 일본군의 전략과 작전은 사령관인 우시지마와 참모장 죠, 고급참모 야하라 3명이서 머리를 맞대고 입안해서 나온 결과였다. 그래서 야하라는 당시의 핵심인물이 맞다.[107] 주민들이 먼저 방공호에 피신해 있었는데 일본군이 주민들이 어찌 되든 말든 이들을 전부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들은 어쩝니까?" 라고 물어보고 장교는 "내 알바 아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아버지는 "잘들었지? 내 알바 아니라는 것은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뜻이다! 모두 이분에게 감사해라!"라는 언어유희와 능청함으로 간신히 주민들을 살리게 된다[108] 방공호에서 아이가 울자 억지로 떼내려고 했다. 이를 막던 오키나와 여교사에게 "이래서 오키나와 놈들은 안 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지면 다 너희 탓이다"고 발악하자 여교사가 어이가 없어서 "당신들은 우리를 지켜주러 온 게 아니었나요?"라고 반문한다. 이 장면 직후 피난민들은 미군과 접촉하고 미군이 이들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대조되었다.[109] 미군 파일럿은 자기를 알리지 말라고 말했지만 하필이면 아버지가 영어를 땡큐밖에 모르는 상황이었다.[110] 교토제국대학이라고 쓰여진 노트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나온다. 즉 강제로 징집된 대학생 출신이다.[111] 장녀인 미에를 데리고 해안에 가서 문자 그대로 바다를 가득 메운 미군의 모습을 보여주며 '저런 군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스포일러] 결국 장남 이사무는 남방 전선에서 전사, 차남 노보루는 오키나와 전투 도중 친구 대신 자살돌격을 하여 전사, 이사무의 아내인 노리코도 방공호 안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아버지조차 사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