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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2:44:30

장진호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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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長津湖戰鬪
Battle of Changjin / Chosin[1] Reservoir
长津湖战役 / 長津湖戰役
파일:attachment/장진호 전투/Chosin.jpg
중공군인해전술[2]
시기 1950년 11월 26일~1950년 12월 13일
장소 함경남도 장진군, 함주군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파일:UN기.svg 유엔군사령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지휘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에드워드 알몬드[3]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올리버 스미스[4]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데이비드 바[5]
파일:영국 국기.svg 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6]
파일:중국 국기.svg 쑹스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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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기.svg 왕젠칭[20]
병력 파일:UN기.svg 미 10군단
- 3만 명
파일:중국 국기.svg 제9병단
- 12만 명
피해 1,029명 사망
4,894명 실종
4,582명 부상
비전투 손실 7,338명[21]
총합 17,843명 손실
전투손실
19,202명 사상
비전투손실
28,954명 (동사자 약 4,000명 포함, 대다수가 동상자)
총합 약 48,156명 손실[22]
결과 중공군의 승리
영향 미 10군단, 흥남항을 통해 해상으로 철수
중공군, 함경도 일대 점령, 그러나 당초 목표였던 미 10군단 포위 섬멸에는 실패

1. 개요2. 편제
2.1.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2.2.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
2.2.1. 제9병단 (사령원 쑹스룬)
3. 장진호의 유엔군과 중공군은 몇 명인가?4. 경과
4.1. 방심, 그에 따른 예정된 재앙4.2. 선견지명4.3. 수동리 전투4.4. 더글러스 맥아더의 오판4.5. 11월 27일, 조여오는 올가미4.6. 11월 28일, 포위4.7. 11월 29일, 죽음의 계곡4.8. 11월 30일, 풍전등화4.9. 12월 1일, 변화된 양상4.10. 12월 2일, 브레이크 아웃4.11. 12월 3일, 전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 작전4.12. 12월 4일, 우리는 다른 쪽으로 진격 중이다4.13. 12월 5일, 탈출 준비4.14. 12월 6일, 하갈우리 탈출4.15. 12월 7일, 미 해병대 고토리 집결4.16. 12월 8일 이후
5. 결과6. 승패 여부7. 미군 역사상 최악의 동장군8. 뒷이야기9. 매체
9.1. 도서9.2. 영상물9.3.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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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시기 함경남도 장진군, 함주군[23] 일대에서 유엔군중국 인민지원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개마고원의 입구인 황초령 인근과 장진호(長津湖) 유역이 배경이 되었다.

세계 전쟁사에서는 현대전에서 미국중국의 군대가 제대로 맞붙어 싸운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의가 큰 사건이다.[24] 미합중국 해병대 창설 이후 유독 치열했고 성공적으로 철수한 사례로 꼽히는 전투이다. 영어로는 'Battle of Chosin/Changjin Reservoir'[25]

미국 입장에선 미합중국 해병대뿐만 아니라 미군6.25 전쟁에서 '포위섬멸작전'에 빠진 전투이다. 미군이 국지전에서 손해를 입거나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손해를 본 경우는 있지만, 잘 짜인 시나리오에 말려들어 수만 명 단위가 전투력 소멸 상황에 빠지기는 이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장진호 전투 기간에 서부전선의 미 8군 지역에 있던 미 육군 2사단은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포위섬멸 작전에 빠져 큰 피해를 입었다.[26]

당시 중공군 사단에는 1개 포병대대만 있었을 뿐 전차 같은 중화기도, 동원 가능한 공군도 없었고 오직 소총과 박격포, 약간의 포병화력만 가지고 있어, 각종 중화기와 항공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와는 엄청난 화력의 차이가 존재했다. 이를 가지고 중공군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정도의 기동력과 공군력이 있었다면 미 해병대는 전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애초에 중공군이 경무장 보병 부대였기 때문에 산악 지형을 통한 기습적인 우회, 포위 공격이 가능했음을 완전히 간과한 주장이다. 중공군이 충분한 화력과 기동력을 위해 야포와 차량을 대량 보유했더라면 장진호 같은 산악 지형에서는 미 해병대를 위기에 빠뜨린 포위 공격은 고사하고 좁은 소로를 따라 잘 준비된 방어 진지를 정면공격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파일:8TmfgKh.gif

Koto-ri가 바로 고토리이며, 현재 고토역이 있는 곳. 현 북한장진군 황초로동자구에 해당한다. Hagaru-ri는 하갈우리로 장진군의 소재지[27]. 장진역이 여기에 있다. Hudong-ri는 복동리. 현재의 사수역 일대.

철도를 이용할 수 없었지만, 전투 무대가 유담리를 제외하고는 다 철도인 장진선에서 벌어진 특이점이 있다.[28] 멀쩡해 보이지만 열차에 탑승하고 편하게 탈출하지도 못하는 철길을 매일 바라보던 미 해병대의 한이 서렸는지, 전투 기록에 철도가 자주 언급된다. 그래서 장진선은 철도가 그리 중요하지 않는 미국에서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은 듯.

함흥에서 진흥리로 이르는 주 보급로는 너무 좁고 험난했다. 이에 10군단 73공병대대와 185공병대대가 투입되어 일방통행을 양방통행으로 넓혔고 북한군이 후퇴하며 교량과 도로를 폭파한 상태라 교량 20개와 우회로를 새로 설치해야만 했다.

2. 편제

2.1.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유엔군은 한국에 주둔하는 다국적 육, 해, 공군을 통합 지휘하는 통합군으로 장진호 전투 당시 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였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부터 주한 미 제8군 사령부가 UN지상군사령부 기능을 하고 있었고, 이와 별도로 인천 상륙 작전에 대비해 일본에 주둔하던 제10군단은 육해공 통합군 사령부인 UN사령부 직할부대였다. 일본에서 한국 인천으로 상륙을 한 이후에는 10군단이 8군 예하로 편입될 예정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맥아더는 10군단의 지휘권을 놓지 않고 계속 UN사령부 직할에 두고 직접 지휘했다. 8군 사령관 입장에서 한국의 모든 지상군을 다 본인이 지휘하는데 10군단만 혼자 따로 놀게 내버려 둬야 하는 상황. 아마 해병대를 포함한 상륙전 부대인 10군단이 전쟁의 주인 공격이니까 공명심을 가지고 대중의 주목을 받기 위해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맥아더는 무려 9년째 미국에 가본 적 없이 아시아에만 살던 사람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대통령보고 오라고 해서 만날 정도로 권위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지휘관이 열악한 현장에 있기 싫어 하여 단 하루도 한국에서 자본 적이 없다. 서울을 이승만에게 돌려줄 때도 행사 끝나자마자 안락하고 쾌적한 동경으로 돌아갔으며, 중공군에 의해 전면적인 패전이 시작되었을 때도 그 바쁜 10군단장과 8군사령관에게 동경으로 와서 보고하라고 하였다. 현장을 직접 본 적도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중공군이 쳐들어 왔다는 보고가 빗발치자 직접 압록강까지 날아가서 공중 관찰을 했는데 결론은 "적 배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압록강의 물뿐이었다."였다. 이 때는 이미 중공군 30만 명이 넘어온 후였다.

아무튼 장진호 전투 당시에도 10군단은 UN사령부 직할부대였고, 군단장은 맥아더의 작전참모장이었던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29]이었다. 그리고 10군단은 한국에서 제8군과는 독립적으로 운용되었다.

도쿄에 있는 극동군 사령부 겸 UN사령부 참모진으로는 참모부장 히키 소장,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 군수참모 에벨르 소장, 작전참모 라이트 준장이 있다.

이 중에서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의 문제는 좀 심각했는데 필리핀의 맥아더 휘하에서 군수 업무를 담당하는 G-4를 맡은데 이어 1942년 초 맥아더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한 후에는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G-2 책임자가 되어 무려 9년째 해당 정보참모였다. 그런데 문제는 미군 역사상 그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정보 능력이 떨어진 다는 것. 윌로비의 부하였던 연합국번역통역국장 시드니 매시버 대령은 "정보장교로서 윌로비는 없느니만 못했다."라는 평을 하였고, 맥아더도 역시 그의 정보장교로서의 역량을 낮게 보았다. 정보 참모로서의 능력은 꽝이었지만 맥아더에게 숭배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 아첨을 잘했다. 그에게 정보는 맥아더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것뿐이었다.

1950년 10월 말 미군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이후 먼저 있었던 한국군 1군단과 함께 동부전선을 담당했고, 서부전선은 미 8군이 담당했다.[30] 즉 미 8군과 미 10군단 사이에 생긴 80km의 틈을 최약체인 한국군 3개 사단이 담당했고, 중공군은 이곳을 후들겨 팼다. 한국군 3개 사단은 궤멸되었고, 그 틈으로 중공군이 미 8군을 포위했다. 상황이 이렇게 최악인데도 미 10군단은 그냥 전진했다. 즉 미 8군을 포위한 중공군이 굳이 미 10군단 후방을 파고들어 포위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에드워드 알몬드의 미 10군단은 제 발로 중공군 품 속으로 들어갔다.

UN군 42만 명 중 육군은 30만 명 남짓이고, 이 중에서 북한까지 진격한 전방 부대는 미군 4개 사단, 한국군 6개 사단, 영국 27여단 등 약 13만 명이었다. 그 외의 한미 사단들과 영국 29여단 등은 후방에 있었다.

2.1.1. 제10군단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1950년 8월 26일에 재창설된 부대이다. 군단장은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알몬드 소장은 1946년 도쿄로 부임, 극동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을 지내다 1949년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장군과 함께 맥아더의 눈과 귀를 가린 Yes맨으로 불린다.[31] 참모회의를 싫어하는 맥아더의 성격을 간파하고 대신 모든 필요한 사항을 먼저 찾아 올리는 방식으로 맥아더에게 특별한 신임을 얻었다. 이 때문에 맥아더의 후계자로까지 불렸다.

맥아더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맹목적이라 비평가들은 그를 '아첨꾼'이라고 불렀지만, 부하들이 잘못하면 고성으로 소리를 지르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10군단장이 되어 스미스 사단장을 처음 만나자 겨우 1살 위면서 "이보게 젊은이"라고 불렀다.

미군 참전용사들의 글에는 감히 맥아더 장군을 바로 까기 힘드니 무리하게 장진호로 진격하라고 한 알몬드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허수아비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중공군이 참전했다고 보고해도 일본 도쿄의 사령부에서 그건 헛것을 본 것이니 무시하고 그냥 진격하라고 하니 더 이상 어쩌란 말인가. 결국 가장 큰 책임자는 더글러스 맥아더라고 해야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소장 시절 최초의 흑인 사단인 92보병사단장 출신인 알몬드는 흑인들을 '불량품'이라고 부르며 흑인을 전투 부대에 배치해서는 안 된다고 상부에 적극 권고했었을 정도로 인종차별주의자. 적군은 'Gooks', 중국군은 '세탁업자(Laundrymen)'라고 불렀다.

예하 부대는 미 육군 3보병사단, 7보병사단, 미 해병대 1사단, 한국군 제1군단(3사단, 수도사단), 영국 41코만도대대 등 10만 3천 명에 달했다. 이 중 장진호에는 미 해병대 1사단, 미 육군7사단 소속 1개 연대전투단, 영국 코만도 1개 대대 등 총병력 3만 명이 동원된다. 일단 병력은 중공군과 비등했고, 화력은 압도적이었으며, 항공 지원은 일방적이었다. 허나 지휘관의 경우 중공군은 펑더화이-쑹스룬이라는 환상의 콤비였고, 연합군은 무조건 진격만 외치는 맥아더와 그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알몬드라는 환장할 콤비였다.

아래의 10군단 예하 각 부대 배치 상황은 장진호 전투 첫 날인 1950년 11월 27일 기준이다.
2.1.1.1.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 소장)
하갈우리 주둔.

'토종(Old Breed)'이라는 사단명으로 유명한 미 해병대의 첫 번째 사단으로 1941년 창설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과달카날 전투, 글로세스터 곶 전투, 펠렐리우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 전투에 4번 참여한 역전의 부대이다. 1950년은 사단 창설 9년째에 접어드는 시기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사단은 기간요원 5천 명만 둔 평시 감편 체계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한국전 당시에는 전국의 해병대 현역병을 다 끌어모아도 인원이 부족했다. 할 수 없이 병력의 절반 정도는 평소 연간 30일만 복무하는 파트타임 민병인 해병대 '비상근예비역'[32]에서 보충을 받아 전시 완편 2만 3천 명을 채울 수 있었다. 중대장급 이상의 장교는 90% 가량이 실전 경험이 있었고, 분대장급 이상 부사관은 60% 가량, 사격조장급인 일병, 상병은 10% 가량이 실전 경험이 있었다. 5연대, 1연대, 7연대 순으로 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는데 5연대는 현역병으로 구성되어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고, 나중으로 갈수록 병력이 부족하여 7연대는 현역이 50% 비상근예비역이 50% 정도였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편성된 5연대는 에드워드 A. 크레이즈 준장을 여단장 삼아 제 1해병임시여단으로 편성되어 낙동강 전투를 치렀다. 여단 4725명 중 전사자 903명 발생, 전체 여단 병력 기준으로 약 20% 정도 인명손실이 있었다. 지원병력을 제외하고 1여단의 전투병력인 5연대만 따지면 손실은 더더욱 크다. 5연대 내 소총소대장 18명 중 15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교체된 소대장 중에도 2명이 부상으로 후송됐다. 18개 소대장 보직에서 1달 사이 전사상자가 18명 발생한 것이다. 또한, 5연대 내 6개 소총중대장 중 5명이 1달 사이에 부상을 입었다. 교체된 중대장 중에도 부상자 1명이 추가로 발생했다. 6개 소총중대장 보직에서 부상자 6명이 생긴 것이다.

이후 1연대가 도착하자 여단 편제를 해체하고 해병 1사단을 구성하여 인천 상륙 작전을 펼친다. 마지막으로 7연대가 도착하자 비로서 완편된 상태로 9.28 서울 수복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1달간의 인천-서울 전투에서 미 해병대 제1사단의 병력 손실은 2430명으로 이 중 전사자는 414명이었다. 사단 전체를 기준으로 약 9.6% 정도의 인명 손실이 있었다. 그러니 미 해병 1사단은 한국전에서도 충분한 전투 경험이 있었다.

사단장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장을 거치는 등 다수의 보직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막판에는 미 해병대 제1사단 부사단장과 미 육군 제10야전군 부참모장을 거쳐 미 해병학교장으로 재직 중 종전을 맞이했다. 온화하고 종교적인 성향 탓에 별명이 '교수'였다. 장진호 전투 당시 부사단장은 에드워드 A. 크레이즈 준장, 참모장은 그레곤 A. 윌리엄스 대령이다.

한국 전쟁 당시 제1해병사단의 병력은 2만 5323명이었으며, 여기에 한국 육군 통역 110명과 대한민국 경찰 화랑부대 1개 중대가 배속되었고(장진호 전투에는 1개 소대만 참가), 미 육군과 달리 미 해병대에는 편제표상 한국인 카투사는 없었다.[33] 여기에 별도로 미 해병대 제1사단을 직접 지원하는 미 해병항공단과 해병군수단이 도합 약 1만 명 가량 된다.

즉 병력 면에서는 장진호의 미 해병대 2만 5천 명+미 육군 4500명+영국 해병 코만도 300명=유엔군 총 3만 명으로, 중공군(제9병단 기준) 12만 명과 4배 정도 차이가 났다.[34]

일반적인 전시 증원 해병사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해병대 소총중대는 알파벳 기호를 붙였는데, 1대대 소총중대는 각각 A~C중대, 2대대 소총중대는 D~F중대 식이었으며, 화기 중대는 그냥 1대대 화기중대로 불렸다.[41]

5, 7연대+각종 지원부대를 합쳐 해병대 약 8200명이 유담리 일대에 주둔 중이었다. 장진호에 있는 5, 7연대를 부사단장 에드워드 크레그 준장이 통합 지휘하다가 아버지의 임종으로 27일 오후 미국 텍사스로 출국한 상태였고, 양 연대 병력이 중대 단위로 워낙 뒤섞여 있어서 장진호의 해병대는 연대전투단(RCT) 체계로 운용된다.

북한 72번 도로를 따라[42] 남쪽 5km 지점 '터키힐'에 7연대 C중대 180명,[43] 그 남쪽 7km 지점 '폭스힐'에 7연대 F중대 246명[44](해병 234명, 해군의무병 12명+한국 육군 통역장교 1명), 다시 남쪽 11km 하갈우리에 3천 명(사단사령부와 1연대 3대대 H·I중대, 포병대 등)이 주둔 중이었고, 또 다시 남쪽 18km를 내려간 고토리에도 해병 1500명(해병 1연대 2대대, 3대대 G중대, 전차대대 D중대), 황초령을 넘어 남쪽 진흥리에 해병 1600명(해병 1연대 1대대) 가량이 주둔 중이었다.

그 중에서 반절은 비전투병력들이기는 하지만, '모든 해병은 소총수(Every Marine is a rifleman)'라는 개념하에 기본적으로 보병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 비전투병력들은 장진호 전투 최후의 순간에 소총을 잡고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 현대 한국군에서도 가끔 나오는 '미군은 비전투병력도 싸웠다'는 일화가 바로 이때의 상황이다.
2.1.1.2. 미국 육군 제7보병사단 (데이비드 바 소장)
미국 육군 제7보병사단은 '총검사단(Bayonet Division)'으로 불리며 한국과 매우 인연이 깊다.[45] 1차대전 때도 참전한 유서 깊은 부대. 2차대전 때는 레이테 만 해전, 오키나와 전투를 거쳤다. 종전 후 1949년까지 남한에 주둔하다가 일본으로 이동, 홋카이도에 주둔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 1해병사단과 함께 미 10군단을 구성하여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후 한국에 71년까지 주둔하다가 미국으로 철수했다.

장진호 전투에는 미 7사단 31연대전투단(RCT, 연대장 앨런 D. 맥클린 대령, 맥클린 임무부대(Task Force MacLean)만 참여했다. 선발대로 32연대 1대대(대대장 돈 페이스 중령, 페이스 임무부대(Task Force Faith))가 해병대 5연대가 점령한 장진호 동안을 10월 26일 인수하고, 이후 본대가 후속하기로 되어 있었다.[46] 원래 해병대는 장진호 동서를 감싸면서 북진해야 했지만 작전 계획이 바뀌어 장진호에서 서진을 하게 되었고, 그 바람에 장진호 동쪽을 미 육군 7사단 31연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다만 가장 가까이에 지나가던 32연대 1대대가 있어 일단 이들부터 동원되었다. 32연대 본대는 혜산진의 17연대를 후속하기 위해 북진한 상태. 결국 32연대 3대대 K중대는 11월 28일 압록강 국경지대의 신갈파진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즉시 흥남으로 후퇴 명령을 받았다.

일본에 주둔하던 7사단은 한국에서 전투 중인 3개 사단에 장교와 사병들을 채워주는 보충대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7사단이 인천 상륙작전의 주력 부대로 지정되자 긴급히 병력 보충을 위해 타 사단보다 많은 카투사[47] 8,600명을 충원 받았다. 페이스 부대에는 원래 카투사가 500명이었으나, 장진호에 도착할 무렵 300명까지 줄었다. 각 소총소대에는 45~50명이 배정되어 중대 병력 중 1/4에 달했다. 11월 24일 기준으로 사단 내 카투사는 6,794명이고 이를 포함한 총 병력은 1만 6천 명이었다. 이 중에서 장진호 동쪽의 육군 병력은 위 두 부대를 합쳐서 카투사 7~800명 포함 3천 명 가량이었다.
미 7사단 31연대전투단(RCT, 연대장 앨런 D. 맥클린 대령, 맥클린 임무부대(Task Force MacLean))[48]
31보병연대 (앨런 맥클린 대령)[49]
  • 31연대 3대대 (월리엄 라이디 중령)[50]
  • 32연대 1대대 (대대장 돈 C. 페이스 중령[51], 페이스 임무부대(Task Force Faith))
  • 57야전포병대대 (레이 엠브리 중령) (-)1개 포대
    • 15대공포대대 D중대(57야전포병대대에 배속)
32연대 1대대 - 후동리 북쪽 11km 지점 풍유리 주둔. 11월 27일 오후 5해병연대 3대대의 진지를 인수 받아 병력 배치를 하였다. 북서쪽에 A중대, 북동쪽에 C중대, 남동쪽에 B중대가 배치되었고, 본부 및 D중대는 중앙에 있었다. 같은 대대급이지만 육군은 해병대에 비해 병력이 적어 일부 진지에 병력 배치가 안 되었고, 특히 C중대와 B중대 사이에 해당하는 동쪽 지역이 비어 있었다.

11월 24일자로 해병1사단에 배속되었다. 동월 26일자로 7사단 31연대전투단(맥클린 임무부대)에 배속. 본부/본부중대 151명, A중대 195명, B중대 189명, C중대 200명, D중대 187명, 32연대중박격포 1소대 40명, 전방항공통제 5명. 미군 715명과 카투사 300명으로 구성된다.

부대대장 크로스비 밀러 소령, 인사장교 로버트 존스 소령(부관겸임), 작전장교 위즐리 커티스 소령, 작전보좌관 헤인스 대위, 정보장교 웨이니 파월 대위, 군수장교 레이몬드 보드로 대위.

31연대 직할대 - 본부/본부중대 150명, 31전차중대 187명, 31중박격포중대 106명, 31의무중대 170명, 13공병 C중대 1소대 35명. 총 648명.

장진호 동안 후동리 주둔, 연대 본부는 후동리 학교에 설치. 당시 미군 공식 기록은 일본 지도에 따라 후동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수리에 해당한다. 지도상에 학교는 백암리강 북쪽에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백암리강 남쪽에 있다.

맥클린 대령은 일본에서 1년간 32연대장으로 재직한 적이 있어 페이스 중령과는 친한 사이였다. 이후 8군 작전참모부 선임장교를 거쳐 2개월 전 31보병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기타 주요 간부로는 부연대장 조지 데슨 중령,[52] 인사과장 휴지 로빈슨 소령, 작전과장 베리 앤더슨 중령, 정보과장 칼 위트 소령 등이 있었다.

이들의 부대 배치를 북쪽부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로를 따라 약 10마일가량 퍼져 있었고 상호간 통신이 완전 두절 상태였다.

1. 32연대 1대대(페이스 부대) - 하갈우리 북쪽 14마일 지점
2. 31연대 전방지휘소(맥클린 연대장)
3. 31연대 중박격포중대
4. 31연대 3대대, 57포병 A, B포대 - 안곡
5. 57포병대대 본부, 본부포대, 15대공포대대 D포대(-1)
6. 31연대 후방지휘소, 31전차중대 - 후동리
7. 57포병대대 근무포대 – 하갈우리 북쪽 4마일 지점

일반적인 미 육군 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소총중대만 계산하여 1대대 A~C중대, 2대대 D~F중대 등의 부호를 붙인 미 해병대와 달리, 미 육군은 화기중대까지 부호가 붙어 있다. 예를 들어 D중대는 미 해병대에서는 2대대 1중대이지만, 미 육군에서는 1대대 화기중대이다. 이 문서에 수도 없이 D중대, E중대 하며 언급되니 착오 없길 바란다.

장진호와 전투와 큰 관계는 없지만 7사단의 편제를 모두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다양한 지원부대가 존재하며 2만 명이 넘어가는 해병 1사단에 비해 전반적으로 병력 구성이 적었다. 편제는 위와 같은데 연대, 대대, 중대, 소대, 분대 등 단위 별로 해병대보다 병력이 적다. 이는 장진호 전투 당시 같은 대대급에서 해병대 진지를 육군이 인수 받을 때 문제가 되었다.
2.1.1.3. 기타 부대
(한국 전투경찰 중대는) 미 해병대에 의해 훈련되고, 군기가 있는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부대였다.

Martin Russ, <Breakout>, Penguin Books, 1999. 나남출판 한국어 번역판 170페이지.
미 해병대+해병항공단+해병군수단+미 육군+영국 해병특공대 총원 약 3만 명에 달한다(해병 2만 5천 명, 육군 4500명, 영국군 300명).

그 외 원산의 원포가설비행장에서 출격한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이 P-51 머스탱으로 지원해 주었다.

2.2.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인천 상륙 작전 및 이어진 유엔군38선 돌파 이후 패주를 거듭한 조선인민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조직, 투입된 원정군이다.

이미 6.25 전쟁 초기부터 중국 수뇌부는 김일성서울을 함락하고 승승장구하는데 도취되어가는 점을 우려해왔다. 특히 유엔군이 결성되며 극동의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자, 당장은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조선인민군이 붕괴되고 이로 인해 둥베이(만주) 지역에 커다란 안보공백이 생길 가능성을 예견했다. 이에 7월 7~10일 <둥베이 변방 보위에 관한 결정(关于保卫东北边防的决定)>을 수립하고, 7월 13일에 제13병단(제38·39·40군)과 제42군, 포병 제1, 2, 8사단, 1개 고사포 연대, 1개 공병연대 등 25만 5천 병력으로 둥베이 변방군(东北边防军)을 편성한다.

둥베이 변방군 사령원[65]에는 쑤위(粟裕)가 임명되었다. 쑤위는 1920년대 난창 폭동 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한 역전의 용사였고, 국공내전에서도 화둥야전군 사령관, 제3야전군 부사령관 등 여러 중책을 역임했다. 1950년 1월부터는 장제스가 쫓겨간 대만에 최후에 일격을 가하기 위한 공격 준비의 총책임을 맡는 등 마오쩌둥의 신임이 각별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완전한 통일보다 시급한 문제가 된 둥베이 방위의 임무도 그에게 맡길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랜 세월 격무에 시달린 쑤위는 곧이어 고혈압으로 쓰러졌으며, 메니에르병까지 얻어 치료와 요양을 위해 소련으로 보내져 상당 기간 복귀가 어렵게 되었다.

쑤위의 대안으로 고려된 지휘관은 린뱌오(林彪)였다. 린뱌오도 쑤위처럼 오랜 참전 경험을 갖고 있었고, 국공내전 후기에는 둥베이 전역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특히 북중국경에 배치된 제13병단은 그가 이끌던 제4야전군 예하 병력으로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66] 그러나 린뱌오도 과거 부상 후유증 등의 여파로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아, 국공내전 종식 후에는 공식 활동을 자제하고 칩거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쓰러진 쑤위를 대신해 린뱌오를 임명하고자 1950년 9월에 그를 불러들여 의견을 구했으나, 이 자리에서 린뱌오는 "미군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침공한다면 내가 직접 나서겠지만, 당장은 압도적인 미군에 맞서 승산이 없는 한반도 출병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그 사이 둥베이를 책임진 가오강의 지원 하에 제13병단은 한반도 출병 준비를 계속 진행했다. 아울러 본토에 주둔한 제9병단과 제19병단도 유사시 증원부대로 간선철도 부근에 대기하도록 조치한다. 9월 들어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이후 예상대로 조선인민군이 급속도로 붕괴되자, 10월 초에 중국 수뇌부는 조선출병을 결정하고, 10월 8일 부대 명칭도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개칭한다. 또한 사령원으로는 시베이(西北)군구 사령관이던 펑더화이를 임명한다. 펑더화이는 지적인 면에서는 쑤위와 린뱌오보다 한 수 아래였으나, 보다 낙관적이고 우직하게 난국을 타개하는 뚝심이 있었다. 린뱌오와 달리 한반도 출병에도 찬성했다. 압도적인 미군을 상대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매복과 은폐에 능한 중공군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미군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래도 유엔군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북진을 거듭했기에, 중국 인민지원군도 출병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10월 19일 밤부터 제38·39·40·42군 등 4개 군 병력은 안둥(단둥), 지안 등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입했다. 펑더화이도 초기에는 따로 지원군 총사령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그냥 제13병단 사령부를 지원군 사령부로 활용하였다. 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에 펑더화이, 부사령원 겸 부정치위원에 덩화, 부사령관에 홍쉐즈와 한셴추, 참모장에 셰팡, 정치부주임에 두핑이 임명되었다.[67] 형식상 이는 연합사령부였기에 조선인민군에서는 중국측 인사들과 친분도 깊고 중국어에 능통한 박일우를 파견하여 지원군 부사령관 겸 부정치원 겸 지원군 당위원회 부서기를 맡게 했다.

중국 인민지원군은 화력이 막강한 미군은 되도록 피하고 약한 고리인 한국군을 통타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제38·39·40군은 한국군 제6·7·9사단 공격을 위해 야음을 틈타 전선으로 이동했고, 제42군은 서부전선의 원산-평양간 철도를 차단하고 산하의 제124사단을 차출하여 동부전선에서 방어만 담당하게 했다. 이 제124사단이 미군 제1 해병사단과 맞붙은 전투가 아래에서 설명할 '수동 전투'이다. 이어 추가로 제50·66군이 증원되어 반격에 돌입했다. 하지만 동부전선에서도 미군 제10군단이 북진의 고삐를 바짝 죄자 제42군 병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에 중국 수뇌부는 급히 둥베이 지역으로 이동 중에 있던 제9병단에게 곧장 한반도 동부로 출병하도록 명령하며, 이 제9병단이 장진호 전투의 주역이 되었다.

2.2.1. 제9병단 (사령원 쑹스룬)

장진호 전투의 주역이 된 제9병단은 이전 화둥야전군 산둥병단 등을 모아 제20·27·30·33군의 4개 군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이후 중국 남부에서 상하이 해방전 등 치열한 전투를 마무리한 뒤에 1950년 1월에 대대적으로 재편된다. 우선 제30군은 지휘부를 해군으로 보내며 해체했고, 점령지 치안 유지 목적으로 제33군도 떼어냈다.[68] 대신 제23군이 편입되었고, 이어 제26군도 제8병단에서 제9병단으로 전속되어 제20·23·26·27군의 4개 군 체제가 된다. 이후 1950년 5월에는 제23군도 국민혁명군 잔적 소탕 임무에 동원되면서 6.25 전쟁 발발 당시에는 제20·26·27군의 3개 군만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전 국공내전 시기까지 전형적인 중국 인민해방군 사단은 예하 3개 연대와 1개 포병대대로 편제되었다.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고, 다시 3개 사단이 모여 1개 군을 이루었다. 이렇게 3개 하부단위가 모여 1개 상부 단위를 구성하는 편제를 삼각편제라고 하는데, 중국 인민해방군에서는 이를 '33제'라고 불렀다. 중국 인민해방군국공내전 막바지인 1949년 2월에 일제히 단대호를 정리하면서 이 33제에 맞춰 순서대로 배정했기 때문에, 단대호만 알면 어느 부대인지 추정이 매우 쉬웠다. 예컨대 1950년 10월 운산 전투에서 한국군 제1사단에 일격을 가한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는 제13병단 제40군 제120사단 제360연대였다. 제9병단 소속의 제20·26·27군도 1950년 초까지만 해도 이러한 삼각편제 공식에 따라 각각 제58·59·60(=20×3)사단, 제76·77·78(=26×3)사단, 제79·80·81(=27×3)사단이 기본 뼈대였다.

그러나 1950년에 연이어 진행된 부대 재편 과정에서 제9병단의 실제 전력은 이런 33제의 틀을 벗어나 한층 강화된다. 우선 1월에 제30군을 해체하고 지휘부를 해군으로 보내면서, 예하의 3개 야전사단(제88·89·90사단) 중 제88사단은 제26군에, 제89사단은 제20군 예하로 전속된다. 이어 6.25 전쟁 참전이 결정되자 1950년 10월에는 제32군을 해체하면서 남은 제94사단을 제27군으로 전속시킨다. 이를 통해 제9병단 소속 군들은 4개 사단씩을 거느리게 되었다. 여기에 각 사단의 병력도 보강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각 연대도 1개 대대씩을 추가 배속시켜 4개 대대 편성으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제9병단의 편제는 '44제'(1개 군당 4개 사단, 1개 연대당 4개 대대)라고도 한다. 특히 수 개월의 참전 준비 과정에서 국민혁명군 출신 병력을 대거 편입시켜 외형상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국공내전 시기만 해도 충원이 제대로 안 되어 1개 사단 병력이 보통 6,500~8,500명, 심하면 그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제9병단의 각 사단은 1개 연대당 3,500~4,000명, 각 사단의 전체 병력은 평균 1만2천명이나 되었다. 사실상 인력 면에서는 완편에 도달하였다.

다만 문제는 병기와 피복 등 각종 물자의 부족이었다. 당시 가용한 물자들은 먼저 투입되는 제13병단에 집중적으로 지급되었기 때문에, 제9병단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애초에 제9병단은 1950년 말에 한반도에 곧장 들어갈 부대도 아니었고, 우선 둥베이(만주) 지방으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동계 적응 및 실전 준비 태세를 갖출 예정이었다. 이 때문에 제9병단의 주력부대는 미군 제10군단이 북진하고 있던 시점에도 아직 산둥성에서 허겁지겁 이동 중이었다. 그리고 제9병단은 한반도 출병 이전에 기후가 온화한 중국 화둥 지방[69]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계 피복 등 혹한기 전투에 필요한 장비가 사실상 전무했다. 둥베이 지방으로 진입한 뒤에도 기본적인 솜 누비옷[70]조차 제때 지급이 안 되어 장갑도 없이 홑옷을 껴입은 채 귀마개가 달린 털모자나 쓴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일부는 털 부츠를 신었지만 대부분은 고무를 댄 천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일체의 부대 표식은 없었고, 장교의 경우 바지에 주름이 잡혀 있으며 상의 좌측·목둘레 주변·소매에 붉은색 선이 있었다.

소총은 만주에서 노획한 일본식 소총이고, 박격포와 경기관총은 국민당군에게 노획한 미제가 다수였다. 개인당 탄약 80~100발과 방망이 수류탄을 몇 발 휴대하고 있었다. 운송 수단은 극히 적어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야 했고, 그 외 가축을 약간 이용할 정도였다. 차량화/기계화는 당연히 꿈 꾸기 어려웠으며, 무엇보다 차량 운전 경험자가 매우 적어 이후 한국군과 초기 전투에서 대량의 미제 차량을 노획했어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길가에 버려두었다. 통신 장비도 매우 열악하여 사단급 지휘부에나 무선통신 장비가 겨우 있었고, 연대급 지휘부 이상에나 유선통신 장비가 지급되었다. 대대급 이하에는 이런 통신 장비가 없어 전령, 나팔, 뿔피리, 호루라기, 꽹과리, 신호탄, 전등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엔군 측 장진호 전투 참가자의 수기를 보면 피리와 나팔 소리에 몸서리를 친다는 기록이 많다. 반면 중공군들이 미리 피리와 나팔을 울리며 신호를 주고 돌격하기 때문에 방어하는 쪽에서는 매우 편했다.

후술하겠지만 이런 각종 피복, 병기, 장비의 부족으로 인해 중공군은 큰 인명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미군의 포위 섬멸이라는 작전 목표의 달성에도 실패하게 된다.

제9병단의 출격은 11월 5일 22시, 마오쩌둥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원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며 본격화되었다. "강계, 장진 방면은 쑹스룬의 병단(제9병단)이 전력을 다해 맡고 적을 깊이 유인하여 기회를 보아 각개섬멸하는 것으로 방침을 확정한다. 이후 이 병단은 당신들이 직접 지휘하고, 우리가 멀리서 통제하지 않는다."

이 지시에 따라 펑더화이중국 인민지원군 지휘부는 이튿날인 11월 6일자 전문을 통해 제9병단의 동부전선 작전 방향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적을 깊이 구진리, 장진선까지 유인하여 우선 미 해병 제1사단의 양 연대를 섬멸한다. 배치된 1개 군 주력(3개 사단)은 강계, 전천, 운송동, 남흥동을 경유하여 유담리 지구를 향해 집결하고, 선두 사단은 신속하게 구진리와 그 이북에 도착하여 종심방어진지를 구축한다. 다른 1개 군은 임강, 자성강구에서 도강하여 운산리에 도착, 집결한다. 이러한 배치는 미 해병 제1사단이 구진리 이북으로 깊이 북진할수록 좋다. 양 군은 각 2개 사단이 정면을 담당하고, 7개 사단이 적 측후방에서 공격한다. 아군 제42군 주력은 사창리[71](국군 3사단 26연대)를 등지고 오로리를 향해 전진하고, 황초령 남쪽으로 깊이 진입해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증원하는 적을 타격한다. 유담 지구의 아군은 제42군 주력과 협동하여 미군 제7연대, (포병) 제11연대를 섬멸한다."

이 작전 구상에 따라 제20군, 제27군 병력이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 지구로 전개하게 된다. 제26군은 다소 출발이 지연되어 11월 26일에 후창(현재 김형직군)에서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 전선에 축차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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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장군은 제9병단 사령원 겸 정치위원 쑹스룬(송시륜(宋時輪), 1907-1991)이었다.[72] 사진에서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아주 불 같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그의 불 같은 성격은 중공군이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에만 집착하게 만들어 나머지 10군단 병력이 거의 피해 없이 후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당시 40대 초반이었지만 많은 중공군 장교들과는 달리 황포군관학교에서 제대로 군사학을 전공했다. 또한 홍군 초기부터 마오쩌둥의 부대에 가담하여 대장정에도 참여했고, 그 이후 20년간 국민당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계속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전을 모두 겸비한 역전의 용사이자 전투에 잔뼈가 굵은 유능한 게릴라전 지휘자였다. 당시 중공군에는 계급이 없었지만, 6.25 전쟁 이후 1955년 계급이 도입되자 상장에 임명되었다.[73]

공격이 개시된 11월 27일 기준 제9병단 예하 사단들의 상황은 아래와 같았다:

간단하게 설명해 20군·27군의 8개 사단 중 3개 사단은 장진호 서쪽에서 공격, 1개 사단은 동쪽에서 공격, 2개 사단은 하루 늦게 도착하여 장진호 남쪽의 보급로 차단 임무에 투입되면서 6개 사단이 1차로 동원되었다. 예비 부대인 제89사단은 우선 1개 연대만 제59사단에 배속되어 투입되었다가 제20군 전력이 급감하면서 추후 전 사단이 증원된다. 제27군 소속의 제94사단은 11월 28일부터 투입되어 제26군이 증원될 때까지 역시 격렬한 전투에 내몰려 큰 피해를 입었다. 제94사단만도 장진호 전투에서 총 사상자 3,591명의 손실을 입었다.

12월에 들어서서 미군의 기세가 확실하게 꺾이자, 쑹스룬은 병단 예비대였던 제26군 병력까지 본격적으로 투입을 명령한다. 12월 1일에 투입 명령을 내릴 때는 단 2일 만에 전선으로 전개하여 12월 3일부터 전 군이 미군의 탈출을 봉쇄하라고 지시했지만, 혹한 속에서 이동 수단이 부족하고 길도 헤매는 바람에 실제로는 4개 사단 중에 제76·77사단의 2개 사단만 12월 6일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76]

이들 제20·27군의 8개 사단 및 제26군의 2개 사단까지 도합 10개 사단은 전투 투입 시기에 상관 없이 격전에 휘말려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최근 나오는 중국 측 자료에서는 장진호 전투에 실제 투입된 사단을 총 10개 사단으로 집계한다. 반면 오히려 서방측 자료에서는 최근까지도 정확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전투 서열 파악을 못하던 관계로, 이들 제26군 예하 부대를 장진호 전투가 거의 끝날 무렵 투입되었다는 이유로 참가 부대에서 누락시켜 6~7개 사단으로 축소 집계하는 경우들이 있다.

3. 장진호의 유엔군과 중공군은 몇 명인가?

미군 제10군단은 당시 예하 병력이 육군 제3·7 보병사단, 제1 해병사단, 한국군 2개 사단(제3·수도사단)과 적지만 다양한 국가의 UN 참전군으로 편제되어 10만3천명에 달했다. 이 중에서 순수하게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병력만 따지면 제1 해병사단 전체와 미 육군 1개 연대(제7 보병사단 예하 3개 보병대대와 제57야전포병대대), 영국군 코만도 부대 300명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즉 UN군 측에서는 해병대 2만5천 명에 미 육군과 영국군의 병력을 합해 총 3만 명 정도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서적이나 미디어에선 미 육군과 영국군들을 몽땅 제외시고 미 해병사단도 1만 5천 가량으로 축소 시켜서, 압도적인 다수의 중공군과 싸웠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중국 쪽 책을 보면 미 해병 1사단과 싸웠다기 보다는 미 10군단 10만 명과 싸웠다며 미군측 병력을 부풀리는 경우가 무조건이다.

미군의 경우 비교적 정확한 자료가 있어 병력 추산이 쉽다. 장진호 전투 막판에 임시 수문교를 건너 탈출한 미군만 1만 4천명이다. 중간에 항공 수송한 부상자 4천, 사망/실종된 병력 6천, 그리고 수문교 넘어 진흥리에서 주둔하던 병력[77]들을 빼고도 말이다.

한편 중국을 보자면,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제9병단 3개 군(제20·26·27군)의 총 병력은 약 15만 명이었다는 것이 2000년대 이후 중국측 자료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정설이다. 제9병단은 출병 준비를 하면서 무장과 피복 등 보급품은 여전히 부족했으나, 최소한 병력 숫자만큼은 다른 중국군 사단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보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기본적으로 3-3 편제[78]였으나, 제9병단은 4-4 편제[79]로 재편되었다. 말하자면 제9병단의 각 군에는 4개 사단×3개 연대×4개 대대=48개 보병대대가 배속되었다. 야전 지휘관들에게도 "최소한 병력 보충은 충분히 해줄 테니, 희생을 걱정하지 말고 몰아붙이라"는 명령이 하달될 정도였다.

이러한 병력 보강으로 인해 평균적으로 각 군은 약 5만 명, 각 사단은 1만 2천 명, 각 연대는 3천 5백~4천 명의 병력 수준을 맞추고 있었다. 가장 구체적인 숫자를 수록하고 있는 중국 측 자료는 《혈전장진호》(2000, 충칭출판사)로, 여기서는 장진호 전투에 돌입할 당시의 제9병단 병력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80]

이 가운데 장진호 전투에 실제 투입된 병력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간사에 해당하는,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에서 펴낸 『항미원조전쟁사』를 통해 집계할 수 있다. 이 자료에서는 제9병단 소속 사단들이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순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는 장진호 전투에 소수의 후비대를 제외한 병단 전 병력에 투입 명령이 내려진 것과, 이 가운데 제78·88사단을 제외한 10개 사단이 실제 전투에 투입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78·88사단은 혹한과 나쁜 도로 사정에 더해 현지 안내인이 부족해 길을 헤매는 등의 실책이 겹쳐져 미군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유의미하게 투입되지 못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제26군 전체를 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병력에서 제외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근거가 박약하다. 특히 12월 6일에 공격에 돌입한 제26군 소속 제76·77사단의 2개 사단은 전투 막바지에 투입되긴 했지만 다른 제20·27군 소속 사단들처럼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예컨대 제76사단의 경우 12월 6일 3개 연대 예하 54개 중대 총 1만4천 병력으로 공격을 개시했으나, 12월 10일에 집계한 결과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보병 중대가 단 9개밖에 남지 않았다. 다시 12월 12일 집계한 결과로는 격전과 혹독한 추위로 작전에 가용한 병력이 5천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제77사단도 사정이 비슷해서 전투력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이 피해를 입을 정도로 격전에 휘말렸던 이 두 사단을 장진호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중국 측에서는 장진호 전역에 제9병단 총 15만 병력이 참가하였고, 이 가운데 비전투부대와 제26군 중 제때 참전을 못한 제78·88사단을 제외하고 10개 사단 약 12만 명이 실제 전투에 투입된 것으로 계산한다.

예전에 출판된 미국 쪽의 책을 보면 실제 전투에 투입된 중공군 병력은 6~7만 명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출병 준비 단계에 이뤄진 제9병단의 병력 증원을 무시한 추산이다. 중일전쟁이나 국공내전 시기 중국군 사단이 실제 6~7천 명 수준을 맞추기에 급급했던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82] 이는 중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상자 수를 감안했을 때도 터무니없는 숫자이다. 당시 제9병단이 전투 종료 후 마오쩌둥에게 보고한 전문에 실린 통계에 근거해, 중국이 오늘날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최종 사상자 수는 전투손실 19,202명, 비전투손실(주로 동상) 28,954명으로 도합 48,156명이다.[83] 이는 투입 병력을 6~7만 명으로 잡는다면 무려 70~80%에 해당한다. 포위섬멸을 당하지 않는 이상 투입 병력의 70~80%가 사상자인 경우는 없다. 사상자가 30~50%만 나도 전투력을 사실상 완전히 상실한다. 오늘날 중국 문헌들에서는 제9병단 전체 병력을 15만 명으로 잡아 장진호 전역에서 입은 병단 전체의 사상자 비율을 32%로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 근거해 장진호 전투에서 UN군과 중국군의 투입 병력 비율은 3만 명 대 12만 명, 즉 1:4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4. 경과

4.1. 방심, 그에 따른 예정된 재앙

1/5000의 도박이라는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패주하기 시작했고, UN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쫓아 순조롭게 소탕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만 국경에 도달하면 전쟁은 곧 끝날 것으로 낙관되었다.

미국북한평양을 잃고 피신해 임시수도로 정한 강계시를 공격하기 위해 장진호 방면으로 미 해병대 1만 2천여 명을 전진 시켜 주둔시켰고, 미 육군이 그들을 지원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공군은 계속해서 미군에게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경고를 날리고 있었으나, 미군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미군은 중공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다. 이 당시 군 사령관들이 추측했던 중공군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 정도였지만, 실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수는 무려 30만 명이었다.[84]

미군이 중공군을 얕보았다는 증거는 당시 미군 제10군단의 작전 거리가 원산~수동[85]~장진호~신흥군~풍산군~혜산군~백암군~청진시에 이르는 작전 구역을 담당해서 480km나 되었다.[86] 게다가 이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전선처럼 평야가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손 꼽히는 험준한 산악 지형이다. 보다 이해하게 쉽게 말하자면, 태백산맥개마고원 일대가 바로 여기다. 상식적으로 병참 문제 때문에라도 이런 험준한 지형에서 작전 거리를 이렇게 길게 잡고 부대를 길게 배치하는 일은 없다. 지금에 와서 보면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진격 작전은 미친 짓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는 패주하는 패잔병 소탕 작전이었기 때문에 이런 부정적인 의견은 무시되었다. 이른바 성공 확률 1/5000로 일컬어질 정도로 불가능이라 여겼지만, 기어코 이를 성공 시켜서 세계적인 상륙작전을 이뤄낸 인천 상륙 작전의 신화를 만든 더글러스 맥아더의 군사적 권위에 그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낼 수 없었다.

장진호 일대 도로는 무지하게 좁아터진 산길이었고 장진선, 신흥선 등의 경우는 아예 강삭철도로 철도를 운행하는 지경이었다. 미 해병대의 언급에서 "딱 매복 당하기 좋은 곳"이란 언급이 있을 정도였지만, 패잔병 소탕에는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제10군단의 일부 부대에는 차출 명령이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중공군 포로가 실토한 '대군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일거에 포위한다.'는 정보를 무시한 것이다.[87] 1달 전 중공군의 1차 공세 후 전선이 소강 상태를 보이자 중공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예정된 재앙은 서서히 10군단을 덮치기 시작했다.

4.2. 선견지명

미군 전체에 퍼진 낙관론의 와중에도 다행히 소수의 비관론자들이 있었고, 미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장군도 이에 속했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말을 평소 신조로 삼는 사람답게,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부대를 장진호 축선상에 집중 배치하도록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계속해서 설득하고 관철 시킨 것, 충분한 탄약과 필수 보급품을 하갈우리[88]에 배치해놓은 것, 진격 명령을 명령 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 시킨 것, 야전 활주로를 건설한 것 모두가 바로 스미스 장군의 공이었다.[89] 당시 국군 창군원로들이 쓴 책을 보면 '하루에 수십 km씩 달리며 독소전쟁독일군을 능가하는 쾌속 진군으로 압록강까지 달려갔다.'고 자랑스럽게 쓰여 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한-중 국경선을 향하여 돌진하는 것만이 미덕인 상황에서, 미 해병대는 11월 10일부터 26일까지 하루 평균 1.5km로 최대한 느릿느릿 진군하였다.

같은 미 10군단 소속의 7사단 17연대가 11월 21일에 함경남도 혜산군을 점령해 이미 압록강까지 도달한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진격 속도 차이가 현격한 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류 속에 일어난 해프닝으로, 맥아더의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운운을 스미스 사단장은 헛소리라며 비웃고 "해병은 장진호 외곽에서 압록강으로 향하면서 이미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라는 비공식 전문을 워싱턴의 클리프턴 B. 케이츠 해병대 사령관에게 발신했다가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걸려서 깨갱한 적이 있었다. 결국 스미스 사단장은 어느 고위층을 통해서 맥아더에게 "우리들의 최후의 바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는 사과문과 "(우리 해병 1사단은) 단숨에 간단하게 더 멀리 진격해 버리겠다."라는 명령 복종 서신도 보낸다.

4.3. 수동리 전투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지 엿새만인 10월 25일, 유엔군은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처음으로 중공군과 교전을 벌여 최초로 중공군 포로를 생포했다. 생포된 중공군 포로들은 유엔군사령부가 있는 도쿄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고, 이들로부터 '중공군 수십개 사단이 한반도에 들어온 상태이며 그중 상당수는 옛 국민당군 출신이다'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는 이걸 무시하고 '중공군 부대가 부대 단위로 한국에 진입했다고 확실히 믿을 만한 정보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사이 서부전선의 중공군 13병단, 18개 사단은 이미 전투 준비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곧바로 1차 대공세를 개시,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하고 유엔군을 청천강까지 밀어낸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13병단이 유엔군과 격전을 벌이는 사이 동부전선의 중공군 9병단은 압록강을 도하해 전개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할 수 없이 제42군 예하 124사단만 투입하여, 장진과 함흥 사이의 수동리[90]에서 1차적으로 미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10월 30일 선두부대인 미 해병 제7연대 정찰대가 수동리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이미 한국군 제3사단 26연대가 주둔 중이었다. 이들은 미 해병 제7연대와 11월 2일에 교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한국군은 이미 10월 25일 중공군과 교전했다며 생포한 포로 16명을 넘겨주었다.

11월 2일 미 해병 7연대가 도착하자 중공군 124사단이 공격해 왔다. 미군이 불과 1개 연대만 투입하였는데도[91] 중공군 124사단은 괴멸. 이후 장진호 전투에서도 이어지는 미군의 중공군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의 데모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7연대 부연대장 프레데릭 다우셋 중령이 "중공군은 대대 규모에서는 잘 협조된 공격을 가해왔지만, 중대 이하에서는 지휘관들이 자기 생각이 없었고 지휘 능력도 부족했습니다.[92] 기찻길에서는 중대 병력의 반이 우리 기관총 사격에 쓰러졌는데도 지휘관이 호루라기를 불자 생존자들이 재집결해서 행진을 다시 시작하더군요. 우리가 다시 사격을 가하니까 마지막 생존자 10 내지 15명이 대열을 이탈해서 미친 듯이 도망쳤지요. 중공군은 병력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의 목숨도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과 싸우려면 특별한 전술교범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전투 같지 않은 전투로 124사단이 궤멸하여 이후 재편성에 들어가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지 못하였다.[93] 7연대에서 사망자 50여 명과 부상자 200명이 발생했지만, 중공군은 사망자만 1,500명에 부상자는 그 2배가 나오는 등 1:30의 피아 전사율을 달성하였다. 사실 미군의 충실한 화력과 인해전술 급의 공군력을 감안하면 1개 연대 전투단이 사단을 궤멸시킨 게 특이한 일은 아니다.[94]

이후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한 전투이지만, 당시에는 워낙 일방적인 승리라 전투 측에도 못 끼어 아몬드 장군은 그날 일기에 "10군단 지휘부가 사용하기로 한 풀맨 기관차와 승객용 객차의 준비 상태를 검사했다"라고 쓰는 등 없던 일 취급 받았다.

한편 미 해병대는 11월 14일에 하갈우리에 진입하였다. 그 날 밤 기온은 영하 8도였고, 순간 최대 풍속이 시속 30~35마일에 달해 체감 온도가 거의 영하 19도에 달할 때도 있었다. 문제는 장진호 전투 전체를 보면 이 날은 정말 따뜻한 날이었다는 것이다.

4.4. 더글러스 맥아더의 오판

10월 5일 중공의 외상인 저우언라이가 "현재 조선 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조선인들끼리의 내전이므로 남조선군만이 38도선을 넘어올 경우 중국은 개입하지 않겠으나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하였다. 그러나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은 "미군이 38도선을 넘으면 북한으로 진입하겠다고 위협하는 중공 지도자들의 선언은 아마 외교적 공갈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10월 15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가 웨이크 섬에서 회담하였다. 트루먼이 중공이나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묻자 맥아더는 "거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개전 직후 개입했다면 결정적이겠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였다.

10월 26일, 서부전선의 미8군이 정체불명의 적군과 접전하였다. 압록강까지 도달한 한국군 6사단 수색소대가 전멸하고 그날 밤에는 한국군 6사단과 7연대가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28일에는 한국 육군 1사단과 미 육군 기병 1사단이 당했다. 특히 운산 전투에서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가 후퇴할 때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대대급 부대를 버려둔 채 후퇴하였다. 버려진 3대대는 거의 전멸하였고 대량의 포로가 발생하였다.[95]

그 뒤로 4일 동안 한국군 1사단, 6사단과 미 기병사단 8연대는 사실상 전멸하였다. 이 초기 전투들은 중공군이 잘 싸웠다기 보다는 중공군의 개입을 아직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한국군과 미군이 방심한 탓이 크다.

11월 3일, 이때서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낀 합동참모본부에서 맥아더에게 확실한 판단을 요구하니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의 실체를 인정하기 곤란하다'라는 태도를 보였다. 같은 날 도쿄 사령부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은 "단지 중공군 1만 6,500명~3만 4,000명이 북한에 들어와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실제 그 시점에 이미 중공군은 30만 명이 들어와 있었다. 또한 11월 5일 UN에 제출한 특별 보고서를 통해 '소수의 의용군이 개별적으로 참전하는 수준'이라고 사건 자체를 축소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5일) 맥아더는 갑자기 돌변하여 "중공군 병력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압록강의 모든 교량을 파괴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합동참모본부에 "대규모 병력과 물자가 압록강을 건너고 있으므로 이를 빨리 저지하지 못하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희생을 치러야 한다." 하고 말했다.

더 나아가 맥아더가 11월 중순에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2주 내에 김일성을 완전하게 항복시킬 것이며…[96] 30개쯤의 원자탄을 사용하여 압록강두만강 지역에 방사선 물질 코발트벨트 지역을 만들어, 어느 나라도 통과 못하게 할 것이다. 그 후 중국 장개석의 국부군 50만 명에게 코발트 활성 지역의 경계를 맡길 것이며… (만주블라디보스토크에) B-29기를 동원, 원자탄을 투하해서 그들을 달콤하게 만들겠다.
더 이상 이 부분을 설명하면 장진호 전투 항목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맥아더도 눈과 귀가 있는데 중공군이 나타난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중공군이 개입할지 모르니 원산 이북으로 북진하지 말라."는 대통령의 훈령을 무시하고, '중공군은 절대 참전 안 한다.'며 그냥 진격해버렸다. 그리고 진격 후에야 합동참모본부에 고의로 늦게[97] 이 사실을 알렸다. 이것만으로도 문민통제 원칙에 어긋나는 잘못된 처사이다. 그런데 중공군이 쳐들어와 호언장담이 깨져 개망신 당할 상황에 처하자,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해 크리스마스까지 빨리 전투를 끝내버려서 "사실은 쬐끔 쳐들어오긴 했는데 금방 전투가 끝났지롱~" 하며 상황 종료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24일 미8군 사령관과 미10군단장에게 (중공군이 안 쳐들어오니 전선 유지고 보급이고 다 내팽개치고) '휘하의 전 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선까지 진격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신격화된 맥아더의 위신을 너무 깎아내리는 것이라 그를 최대한 변호하기 위해, 맥아더가 고령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 정말 중공군의 개입을 몰랐다고 주장하는 책도 있다.[98]

결국 예하제대에는 "그건 중공군이 아니고 니들은 헛것을 본 거니 그냥 전진하라"라는 입장에서 조금 선회하여 "그딴 쿨리[99]를 상대로 겁 먹으면 되는가?", "중국이 북한과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낸 소수의 병력", "만주에 전기 공급하는 압록강수력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이동하는 듯"이라며, 최일선 부대장 복장 터지는 소리만 하였다.

또한 위와 같은 이유로, 중공군 1차 대공세로 이미 일부 한국군 부대가 개박살 났는데 없던 일 취급 받았다. 중공군 1차 대공세는 서부전선에서는 한국군만 골라서 공격했고,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 9병단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124사단으로 지연전만 펼치게 하였다. 미국 측에서는 희한하게 한국군 부대만 중공군과 싸웠다고 하니 헛것을 본 것이라고 했는데, 미군 측에서도 사실 교전을 하긴 했다. 심지어 상당한 포로를 잡았는데 그것이 수동 전투였다. 또한 미 1기병사단 8연대가 운산군에서 3대대 버리고 후퇴하는 바람에 미군 600명이 완전하게 전멸하였지만, 높으신 분들의 사정으로 인하여 중공군 1차 대공세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다시 UN군이 진격하였지만 북한군이 보이지 않자, 안심한 맥아더는 11월 24일 일본에서 신안주 비행장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여기서 워커 미 제8군 사령관과 밀번 제1군단장에게 다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타임지와 한 인터뷰에서 "크리스마스 전에 미군 병사들이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미국 주요 신문에는 "맥아더 장군이 '전쟁을 조기 종결하고, 크리스마스는 병사들이 집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최후의 공세가 시작되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때 미 2사단은 인천항으로 설영대를 보내 부대가 철수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총공격 하루만에 대패하여 총퇴각하게 된 운명의 <크리스마스 대공세>였다. 원래 맥아더는 “추수감사절(11월 23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었지만, 이제 와서 따질 사람은 없었다.

맥아더는 모르고 있었으나, 11월 25일 중공군 2차 대공세(제2차 전역)가 시작되었다. 한편 미 10군단은 11월 27일에 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4.5. 11월 27일, 조여오는 올가미

중공군은 미 해병 1사단을 진흥리[100] - 고토리[101] - 하갈우리 - 유담리[102]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유도했다. 중공군 쑹스룬 장군은 과거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유격전으로 농락한 홍군 출신답게 밤에만 이동하는 작전을 수립, 게다가 도로가 아닌 산 능선을 타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사용해가면서 주변 부대를 산 정상에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배치된 중공군 6개 사단이 해병대를 드디어 노리기 시작하였다.

서부전선에서 UN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11월 24일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25일 토요일 저녁. 이천우가 이끄는 중공군 13병단 18만 명이 제2차 공세를 시작했다. 동부전선에서 UN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개시일은 11월 27일이었다.

26일 오후부터 미8군 산하 한국군 2군단의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26일 아침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10군단에 알려졌다. 동시에 한쪽 날개를 담당하고 있던 미 10군단에 대하여 쑹스룬의 중공군 9병단 12만 명 12개 사단 중 6개 사단을 장진호에 집결시켰다. 작전은 성공했다.

운명의 11월 27일. 도쿄의 맥아더와 미10군단은 중공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하고 예정대로 동부전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했다. 해병사단은 여전히 느리게나마 조금씩 진격 중이었다. 특히 5연대 2대대 소속 D, E, F중대는 유담리 서쪽으로 진출을 시작하여 미8군과 연결하기 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담리 일대는 중공군 3개 사단으로 포위되어 가고 있었다.[103] 또한 장진호 동쪽에는 중공군 80사단이 사수역 근방에 있던 페이스 임무부대(1개 대대)와 맥클린 임무부대(1개 대대+1개 포병대대)를 공격해서 역시 포위하였다.[104]

해병대의 경우 장진호에서 북진하는 임무를 맥클린 부대 등 육군에게 넘기고 낭림산맥을 넘어 서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단 7연대가 유담리 일대를 방어하고 5연대를 선봉으로 하여 서진하기로 하였다. 1연대는 아직 유담리까지 오지도 못하고 대대별로 찢어져서 각각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에 흩어져 있었다. 이때의 해병대는 중공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하루를 자도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 으려고 했으나 땅이 파지지가 않았다. 겨우 11월이었지만 눈과 얼음의 두께는 대략 40cm 정도라서, 미군의 휴대용 삽으로는 불가능하고 전동착암기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부대 편성은 방어대형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27일 밤 10시부터 동부전선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되어 유담리의 북쪽과 동쪽을 방어하던 3개의 중대에 큰 타격을 입었다. 먼저 사단 최북단 1403고지를 방어하던 7연대 H중대가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해 버렸다.[105] 남쪽이자 장진호와 유담리 사이의 1282고지를 방어하던 7연대 E중대는 176명 중 120명이 사상 당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5연대 1대대의 지원으로 결국 방어에는 성공했다(중공군 79사단 235연대). 동남쪽으로 1500m 떨어진 1240고지의 D중대도 고지를 빼앗긴 후 다른 중대가 재탈환했지만, D중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이후 전투 불능이었다. 결국 유담리의 해병대는 포위되었다.

또한 유담리 남쪽으로 하갈우리 사이의 보급로를 지키던 터키힐[106]의 7연대 C중대는 28일 새벽 2시 30분 중공군 58사단의 공격으로 사상자 60명이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남쪽에 위치한 폭스힐의 F중대[107]는 무려 81명이 사상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108] 반면에 하갈우리와 고토리는 그날 밤 조용하였다. 오직 하갈우리의 포병대 H포대만 유담리 지원을 위해 불을 뿜었을 뿐이다.

이렇게 장진호 근방의 미 해병대는 고립된다.

한편 11월 25일 장진호 동안에 도착한 7사단 페이스 임무부대(Task Force Faith)는 32연대 1대대를 기간으로 하고 있었다.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여 하룻밤을 보냈으며, 26일 부사단장인 헨리 호스 준장이 도착하여 "하갈우리 동안의 해병대 진지를 인수하고 현진지는 곧 도착하는 맥클린 임무부대(Task Force MacLean)에게 인수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클린 부대는 31연대 3대대, 57포병대대, 31전차중대, 31연대 수색정찰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곧이어 맥클린 부대가 도착했지만 해병대가 아직 철수하지 않아, 이 날은 그냥 현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운명의 11월 27일. 아침 동 트자마자 해병대 5연대 3대대는 서진하기 위해 모두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로 빠졌고, 그날 오후 페이스 부대가 해병대 진지를 인수하여 풍유리강 하구에 주둔했다. 이어 맥클린 부대가 페이스 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후동리에 주둔했다. 한편 27일 먼저 출발한 맥클린 부대의 연대수색대는 연락 두절되었고,[109] 곧 도착하기로 한 31연대 2대대 역시 연락두절이었다(예상과 달리 아직 머나먼 함흥에 있었다). 27일 야간에는 장진호 동안 후동리에 부사단장 헨리 호스와 31연대 본부, 31전차중대(전차 22대)가 주둔하였고, 북쪽 6km 지점 풍유리강 하구에 31연대 3대대와 57 야전포병대가 주둔, 다시 5km 올라가는 최전방에 맥클린 연대장과 32연대 1대대가 주둔하였다. 철저하게 방어 준비를 하고 취침한 해병대와 달리, 7사단에게는 그저 하루 자는 숙영지 개념이어서 방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27일 해병대로부터 전날 중공군을 신문한 결과 "중공군 3개 사단이 지금 장진호 주변에 있고, 그들의 임무는 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장진호 주변에 있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것이랍니다", "어제 저녁에 중공군 정찰대가 해병대원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라고 통보를 해주기는 했다.[110] 페이스 부대의 A중대는 북쪽을 보며 도로 서쪽을 방어하고 C중대는 도로 건너 동쪽, B중대는 도로를 따라 C중대 남쪽을 방어했다. 대대 본부는 방어진지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은 민가 쪽에 설치되었고, 화기중대인 D중대는 A중대 남쪽, 본부중대는 C중대 남쪽에 배치되었다. 같은 단위의 육군은 해병대에 비해 30% 병력이 적었고, 그 바람에 모든 진지에 병력 배치가 안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B중대와 C중대를 연결해주는 요지이자 주변에서 가장 높은 감제고지인 1475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27일 밤 11시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북쪽에 있던 페이스 부대(32연대 1대대)는 사방에서 파고드는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다. 특히 A중대와 C중대 사이 도로를 타고 북한군이 보유했던 전차 1대와 자주포 1대가 밀고 들어오기도 했다. 다행히 후방에 있던 화기중대인 D중대에서 75밀리 무반동총으로 격파하였다. 이것이 장진호 전투에서 유일한 중공군의 전차 운용 사례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A중대 후방으로 침투하였으며, C중대와 B중대 사이에 비워져 있던 1475고지를 손쉽게 점령하였고, 이곳에서 미군을 감제할 수 있었다. 또한 유선이 절단되어 있어 57포병대대에게 일체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어차피 57포병대대는 제 코가 석자여서 포격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맥클린 임무부대에서 배속 받은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의 지원을 받으며 큰 무리 없이 버텨 나갔다.

새벽 동틀 무렵에는 페이스 부대에 배속된 전방항공통제관 에드워드 스탬포드 해병 대위의 유도 아래 제312해병전투비행대대(VMF-312) 소속 F4U-4 코르세어 전투기 4대가 도착했다. 전투기들은 네이팜탄으로 폭격하고, 5인치 로켓과 20밀리 기총소사를 퍼부어 지상부대 상황을 안정시켰다. 주간에 확인해보니 A중대에서는 중대장 스쿨리온 대위를 포함해 8명이 사망했고 20명이 부상 당했다. 그 외 부대는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

페이스 부대의 선전에 비해 맥클린 부대는 파멸적이었다. 맥클린 부대의 주력인 31연대 3대대와 57 포병대대는 원형 방어가 아닌 북쪽에서 내려와 급격하게 서쪽으로 꺾어지는 도로를 따라 선방어를 하였다. 동쪽 방어는 3대대 I중대가 하고 있었고, 화기중대인 M중대가 함께 했다. 중공군은 동쪽에서 무인지경처럼 밀고 들어와 서쪽의 도로변에 있던 대대 지휘소와 57포병 A포대를 유린했다. 이처럼 지휘소가 쑥대밭이 되고 지휘부가 전멸한 관계로 아직까지 그날 3대대의 진지 배치가 어땠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또한 지휘부의 전멸로 예하 중대들은 알아서 싸워야만 했다. 연대장 맥클린 대령은 전방지휘소가 있는 페이스 부대에 위치해 있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스 부사단장은 후동리에 있는 후방 지휘소에 있었는데 통신두절로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급작스러운 기습에 57 포병대대는 보병부대에 대한 포병 지원은 고사하고, 몰려드는 중공군을 향해 직사로 사격하며 중공군과 싸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때문에 바로 앞에 있던 K중대에 A포대의 포탄이 날아왔다. 이미 지휘부가 유린당한 K중대는 이때의 포격까지 당하자 할 수 없이 진지를 포기하고 A포대 후방으로 후퇴해 버렸다. 그러자 A포대도 B포대 쪽으로 향해 도망쳤다. 결국 B포대 진지에 A포대, B포대, K중대, L중대 잔여 병력이 모두 모였다.[111] 자리를 지키고 싸우고 있는 것은 동쪽의 I중대와 화기중대인 M중대뿐이었다. M중대는 75밀리 무반동총 소대와 기관총 소대를 이미 K중대와 L중대로 보낸 상태라 81밀리 박격포 소대밖에 없었지만 누구보다 훌륭하게 싸웠다. M중대는 70%가 카투사였다. 그들은 밤새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으며, 중대장 얼 조단 중위에게 "한 사람의 군인으로 손색이 없었다."고 칭찬 받았다.

날이 밝아오자 살아남은 병력들이 3대대 지휘소를 역습하여 탈환했다. 놀랍게도 대대장 라일리 중령은 부상 당했지만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부상이 너무 심해 후송되었으며, 그를 제외한 대대 참모부는 전멸했다. 또한 대대에 배속된 제5공군 전방항공통제관도 전사해 앞으로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한편 1마일 후방에 있던 57포병대대 본부 및 본부 중대와 제임스 맥클리몬트 대위가 지휘하는 15대공포대대 D포대는 전방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협곡의 구조 때문에 이들에게는 북쪽의 전투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남쪽의 의무중대가 전멸하는 상황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28일 새벽부터 박격포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격을 하였는데 D포대의 2연장 40밀리 보포스 포 화력이 너무도 절륜하여 사격 시작한 지 단 몇 초만에 전방에서 더 이상 움직이는 물체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 받았던 박격포와 소화기 사격에 의해 57포병 대대장 엠브리 중령은 부상 당했으며, 부대대장 모리스 소령은 전사하는 피해를 입는다. 이에 지휘권은 작전장교 톨리 소령이 인수 받았다.

맥클린 부대가 첫날에 살아남은 이유는 단지 남쪽 후동리 방향으로는 공격이 가해지지 않아 완전한 포위망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동리에는 22대의 전차들이 있었는데 이 때문인지 후동리는 전혀 공격이 없었다.

문제는 연대의 31의무중대가 밤중에 후동리에서 31연대 3대대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1221고지에서 매복에 걸려 중대장 이하 전멸한 것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1221고지는 장진호 동안에서의 중요한 목진지이며, 이곳을 방어 부대 없이 놔둔 것이 당장 보면 31의무중대의 전멸이고 길게 보면 이후 장진호 동안의 육군 전멸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장진호 서안의 미 해병대는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목진지에 터키힐과 폭스힐이라는 명칭을 각각 붙이고 1개 중대씩 배치하였다. 이는 이후 유담리의 미 해병대가 하갈우리로 후퇴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에 반해 장진호 동안의 육군은 풍유리와 후동리 사이의 1221고지가 중공군에게 장악 당한 상태라 이후 풍유리의 육군이 후퇴하다가 1221고지에 걸려서 작살난다.

4.6. 11월 28일, 포위

밤사이에 유담리 동북쪽을 지키던 7연대 D·E·H중대가 사실상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고, 유담리 남쪽의 보급로를 지키던 7연대 C중대와 F중대는 고립되었다. 이로써 유담리의 5·7 두 연대는 포위된 것이다. 양 연대장은 상의하여 더 이상 서진을 중단하고 방어진지를 축소하기로 하였다.

한편 유담리와 하갈우리까지의 보급로를 보호하기 위해 유담리 남쪽 5km 덕동고개 북쪽 터키힐에 C중대, 12km 지점 덕동고개 남쪽 폭스힐에 F중대가 주둔 중이었다. 이들은 원형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밤 사이에 포위 당한 채 격전을 벌였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내린 7연대의 지시는 "A·B중대는 유담리에서 터키힐로 싸우면서 내려가고, F중대는 폭스힐에서 덕동고개를 지나 터키힐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F중대 윌리엄 바버 대위는 적의 강력한 저항과 현 진지 위치, 중대 내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7km를 북진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현 진지 잔류를 요청하였다.

할 수 없이 7연대장 호머 리첸버그 대령은 아직 유담리까지 오지 못해 하갈우리에 있던 2대대장 랜돌프 록우드 중령에게 "북쪽으로 이동하여 F중대와 합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까지 록우드 중령은 먼저 유담리에 가있던 자신의 대대 소속 D·E 중대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고 F중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 채, 본부중대와 화기중대(감편) 병력으로 '요리사와 제빵중대'라는 이름으로 편성하여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망원경으로 보니 고지마다 적군으로 가득 차있었고, 광산마다 중공군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만으로 폭스힐까지 가는 것은 무리여서 결국 연대장을 하갈우리로 돌아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래도 7연대 A·B중대는 통합연대지휘소를 방어하던 C중대 1소대까지 동원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터키힐의 C중대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F중대가 있는 폭스힐까지 내려가는 것은 사정이 여의치 않자 포기했다.

올리버 스미스 장군은 새로운 지시를 내려 "5연대는 유담리를 방어하고, 7연대는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통하는 도로를 개통시키라"고 명령했다. 장진호 남쪽에 흩어져 있던 1연대에게는 "고토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도로를 개통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하갈우리의 좁은 분지에 위치한 사령부와 물자 창고를 지키고 있는 병력은 해병 1연대 3대대와 7연대 2대대 본부뿐이지만 각종 지원 부대가 15~20개 가량 있었으며, 총 병력은 해병대 3천 명에 육군 600명이 있었다. 하갈우리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실패했고, 남쪽으로 시험 삼아 1연대 H중대를 보냈지만 800m 정도 가다가 중공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돌아온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통로가 하나밖에 없는데 거기로 안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

야간 전투를 대비하여 하갈우리 남쪽에 해병 1연대 3대대 H중대와 I중대를 배치하고, 북쪽에는 해병포병 D포대가 자체 방어를 하였다. 미 육군 70명에 카투사 100명으로 구성된 10공병대대 D중대는 이스트힐을 방어하는 등, 각종 병참 부대에게도 일정 부분씩 방어구획이 배정되었다. 해군 공병대만 방어 작전에서 제외되어 조명을 켠 채 밤새도록 활주로 공사에만 전념하였다.

그날 밤 중공군 58사단 172연대가 서쪽에서 173연대가 동쪽에서 하갈우리를 공격하였다(174연대는 예비대). 남쪽을 담당하는 해병대 H·I 중대중에서 H중대가 뚫리며 중공군이 파고들어왔지만, 전과 확대 대신 미군의 방한복을 약탈하러 돌아다니다가 대대의 증원 병력에 격퇴되는 등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이스트힐을 담당하는 미 육군 제10공병대대 D중대는 지휘관이 죽자 그냥 후퇴해버렸다. 미군 중 반이 사상 당하고, 카투사는 대부분 흩어져 마을의 빈집에 숨어버렸다. 중공군은 이스트힐을 지나 군악대가 방어하고 있는 사단 본부를 향해 돌입하였지만, 포병대의 지원으로 방어에 성공하였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중공군 시체 천여 구가 해병대 진지 앞에 널려있었다. 그에 비해 해병대의 사망자는 단 12명뿐이었다. 사실 머리수만 따지면 하갈우리의 미군이나 중공군이나 별 차이 없었다. 그러나 화력이 워낙 넘사벽이니 중공군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174연대를 예비대로 빼놓고도 미군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니, 이번 경우는 중공군이 2차대전 때의 일본군처럼 미군을 너무 얕잡아 본 결과이다. 중공군의 전투 방식은 '미군의 강력한 화력망 속으로 뛰어들어 제대로 된 백병전을 벌이면 미군 병사들이 꼼짝 못한다.'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일단 화력망을 뚫는 과정에서 전멸할 지경이고, 어찌어찌 해서 빈틈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미군은 우월한 피지컬과 백병전의 최강자인 권총을 사용하여 격퇴하였다.

육군이 빼앗긴 이스트힐 탈환을 위해 일방적인 포격 지원 1,200발, 해병 항공대의 폭격 지원 아래, 비전투 행정요원과 낙오병들의 혼성 부대를 진격시켜 밤새도록 공격해 29일 낮까지 이스트힐의 정상부 아래까지 밀고 올라간다. 방어 부대는 중공군 58사단 172연대 3중대였는데, 중대장 양건쓰는 자폭까지 하며 결사적으로 싸워 후대에 이름을 알렸다.

사실 중공군 58사단은 27일 하갈우리를 남쪽에서 공격해야 했지만, 워낙 험난한 지형 때문에 하루 늦게 도착하였다. 또한 중공군 80사단이 하갈우리 북쪽에서 공격해야 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장진호 동안으로 올라온 육군에게 막혀서 협조된 공격을 벌이지 못했다.

한편 덕동고개를 지키던 7연대 F중대는 전날의 전투에 발생한 사상자 77명 때문에 방어선을 축소한 채 다시 한 번 결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연대에서는 오전에는 "북쪽으로 올라와 유담리에 합류하라"고 하고, 오후에는 "남쪽으로 철수해 하갈우리로 가도 좋다"고 하였지만, 북쪽이든 남쪽이든 도저히 움직일 상황이 아니었다. 이 날 밤에도 다시 중공군이 쳐들어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어떻게든 격퇴하였다. 이 날 중대장 바버 대위가 얻은 결론은 이러했다.
중공군은 멍청했습니다. 매일 밤 거의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로 공격해왔고, 돌격하기 앞서 나팔 소리, 호루라기, 고함 지르기 등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으며, 우리를 기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은 시신 200여 구를 놔두고 후퇴했다.

한편 장진호 동안의 육군은, 28일 주간에는 병력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었다. 페이스 부대는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어 항공 폭격 아래 원래의 방어선 대부분을 회복했지만, 어제 빼앗겼던 1475 감제고지 탈환만은 실패했다. 미 해병대의 F4U 외에도 남아프리카 연방군의 F-51도 지원되었다.

아침에는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함흥에서 하갈우리까지 L-17기를 타고 와서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을 만나 협의하였다. 이어 헬기를 타고 장진호 동안 육군의 전방 지휘소로 와서 페이스 중령과 맥클린 대령을 만났다. 알몬드 장군은 페이스 중령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한 뒤 "귀관들이 본 중공군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낙오병에 지나지 않으니 염려하지 말라."라고 했다. 알몬드 장군이 떠난 후 페이스 중령은 은성무공훈장을 뽑아 땅에다 던져 버리며 "제기랄"이라고 중얼거렸다. 맥클린 대령은 아직도 예하 부대가 밤 사이에 어떤 파멸적 피해를 입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31연대 2대대만 도착하면 북진하겠다"고 알몬드 장군에게 말했다. 페이스 부대의 소규모 접전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저녁에는 탄약작업반이 도착하여 탄약 보급을 받았다.

그보다 남쪽에 있는 안곡의 맥클린 부대 본대도 낮이 되자 방어선을 회복해 나갔다. 밤 사이에 도망쳤던 소총병들도 슬금슬금 방어진지로 돌아왔다. 부상 당한 3대대장 라일리 중령은 아침에는 지휘를 계속하였으나 낮에는 의식을 잃었다. 조금 후방에 있던 제57포병대대 본부와 본부 포대, 대공포대는 이동하여 3대대 방어진지 안으로 들어왔다. 오후 1시경 대공포대가 방어진지로 들어오자 가공할 만한 화력을 뿜었는데, 이후 중공군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했다.

28일 오전 10시 후동리의 전차들은 지원을 위해 북쪽으로 출발하지만, 30분 만에 중공군에게 노획된 3.5 로켓포 세례를 받아 2대는 파괴되고 2대는 길에 미끄러져 도로 옆 배수로에 처박히고 결국 후퇴했다. 후동리에 있던 헨리 호스 부사단장은 전차 1대를 빌려 타고 하갈우리로 돌아갔다.

호스 부사단장이 떠난 후에는 연대장 맥클린 대령도 없는 상태라 작전주임 앤더슨 소령이 지휘권을 행사했다. 이어 1마일 후방에 있던 57포병 근무포대가 합류하여 연대 본부 병력과 합쳐 150명이 되었다. 여기에 전차중대 병력이 176명이 있었다. 중공군은 전차 때문인지 후동리로 전면 공격은 하지 않고, 지속적인 저격만 하여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후동리의 후방지휘소는 풍유리(안곡)에 있는 31연대 병력은 물론 그 전방에 있는 페이스 부대와도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28일 저녁 장진호 동안의 육군에도 중공군 80사단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전방의 페이스 부대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시간인 자정에야 공격이 개시되었다. 전면의 A, C중대와 동쪽의 B중대에 심한 압력이 가해졌다. 모든 박격포는 최대 속도로 쏘아대었고, 지휘부에 있는 모든 장교들은 막사 밖으로 나가 경계를 도와야만 했다.

맥클린 특수임무부대에도 80사단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중공군은 낮에는 요란사격(Harassing Fire)을 하였고, 밤에는 전날을 능가하는 강도로 3~4시간 동안 치열한 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안곡 방어진지에는 전날과 다르게 주간에 M19 대공전차와 M16 대공장갑차가 들어와 있었다. K중대가 일시적으로 돌파 당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대공포들이 화력을 쏟아부었다. 특히 40밀로 포보스 포는 분당 240발을 발사 속도로 단 몇 초만에 적의 공격을 좌절시켰다. 중공군 지휘관은 대공포를 파괴하는 병사에게 많은 포상을 약속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결사적으로 대공포만 노리고 육탄 공격을 감행하여, 대공포 위에서 육박전까지 벌어졌다. 어제와 달리 포병들은 자신들의 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안곡 진지 주위에는 750구의 중공군 시체가 발견되었다.

한편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맥아더에게 "11월 28일 22시부로 10군단의 공격을 중지하고 후방으로 철수한 후, 급편 방어로 전환하여 적의 차후 공격에 대비하겠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9일 새벽 3시(또는 4시 30분) 가장 북쪽에 있던 돈 페이스 중령의 32연대 1대대는 6km 후방인 풍유리강 하구로 후퇴하여 맥클린 부대와 합류하게 하였다.[112] 부대는 60대의 차량을 타고 별 저항 없이 후퇴하였다. 모든 장비와 물자는 포기하였고, 오직 병력들만 태워 이동하였다. 중공군은 뒤에 남겨둔 보급품과 장비를 노획하느라 사격을 중지하고 추격하지 않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중공군에게 미군이 버리고 간 주둔지는 신천지였다.

후퇴 자체는 약간 무질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풍유리강 하구에 안곡 진지에 있던 57포병대대를 직접 공격하던 중공군을 북쪽에서 후퇴한 페이스 부대가 후방에서 공격하는 양상이 되었고, 이에 앞뒤로 짜부된 중공군은 60명이 사살 당하며 깜짝 놀라 도망친다. 덕분에 도로가 개통되어 페이스 부대는 손쉽게 풍유리로 후퇴할 수 있었다. 아침 9시에 페이스 부대의 선두 부대가 도착하여 오후 1시까지 전부 맥클린 부대의 방어진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풍유리는 말이 방어진지이지 밤 사이의 전투로 수많은 중공군의 시신과 연기로 뒤덮여 작살나 있던 상태였다. 페이스 부대는 즉시 방어진지 북쪽선 방어에 들어갔다.

한편 함께 후퇴하던 맥클린 연대장은 안곡에 거의 다 온 11월 29일 동 틀 무렵, 접근해오는 행군 종대를 발견했다. 그는 31연대 2대대가 이제야 오는 줄 알고 기쁨에 겨워 사격 정지를 외치며 차에서 내려 홀로 400m를 뛰어갔으나, 도착해보니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맥클린 대령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고, 이를 멀리서 보던 미군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113]

맥클린이 실종되자 페이스 중령은 수색대를 보내 그를 찾았지만 결국 포기했다. 1952년에야 중공군에게 풀려난 미군 포로에 의해 맥클린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맥클린에게는 사후 수훈십자장이 수여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전투 중 목숨을 잃은 최선임 지휘관이었다.

페이스 중령과 부상당한 라일리 중령은 즉각 회합을 갖고, 2개 대대와 포병대대를 견고한 원형 방어선 안으로 통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페이스-맥클린 부대를 페이스 중령이 통합 지휘하기로 하였다. 대대 지휘소로 쓰는 초가 안팎에는 시체와 부상 당한 병사들이 전날 밤의 격전을 알려주듯이 누워 있었다. 중공군만 해도 시체 20여 구가 있었다.

재편성된 방어진지는 31연대 3대대가 동쪽, 32연대 1대대가 북/서/남쪽을 방어하며 중앙에 중박격포 소대, 57포병대대, 대공포대가 배치되었다. 이 통합 지휘에는 후동리에 있는 31연대 본부와 전차중대는 제외되었다. 부대대장인 밀러 소령이 1대대를 지휘하였으며 스톰 소령은 3대대, 작전장교 톨리 소령이 57포병대대를 지휘하였다. 여전히 해병대나 미 10군단과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전방항공통제관 스탬포드 대위를 통해 콜세어 공격기와는 통신이 가능하여, 이를 이용해 약간의 보급품을 공수 받았다. 무엇보다 40밀리 대공포 탄약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후동리의 31전차 중대에 공수되었다. 31전차 중대가 필요한 것은 전차포 탄약이었는데, 이를 보급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어서 해병의무수송헬기 2대가 차례로 도착하여 부상자 4명을 후송했는데, 첫 번째 헬기에는 3대대장 라일리 중령과 57포병대대장 엠브리 중령이 후송되었다. 이어 L-5 연락기로 모르핀이 1번 보급되었는데, 이것이 지원의 전부였다.

한편 28일 오후 8시 27분 기준으로 장진호 지역의 모든 육군은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다. 페이스 중령은 "풍유리강 하구의 육군 부대에 사상자 500명이 발생했고, 스스로 돌파구를 개척할 전투력을 상실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스미스 장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갈우리에 도착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날 맥아더는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에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
우리 전투 병력의 현 상태는, 중공이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한 전쟁을 치를 준비가 확실히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본 사령관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으나, 본관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라는 유명한 암호 전문을 보낸다.

직전까지 자신만만하던 맥아더의 태도와 180도 다른 소식을 들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언론 브리핑에서 "가공할 만한 상황이 눈 앞에 닥쳐있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어 맥아더는 대책회의 차 일선에서 박 터지게 바쁜 알몬드와 워커 장군을 동해를 넘어 1,120km 떨어진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소환하였다.[114] 도쿄의 주일미국대사관에서 열린 전쟁대책회의의 참석자는 맥아더 아래 극동군 해군 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 중장, 극동군 공군 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극동군 참모장 도일 히키 소장, 극동군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 소장, 맥아더 참모고문관 코트니 휘트니 소장, 극동군 작전참모 에드윈 라이트 준장이었다.

이 회의에서 워커 중장은 "중공군을 평양에서 저지하겠다"는 합리적인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던 알몬드 중장은 "장진호에서 해병대는 서쪽으로, 7사단은 북쪽으로 진격하겠다"고 하였다. 회의 중에 맥아더는 듣고만 있다가 회의가 끝난 후 워커와 알몬드만 불러 따로 지시하는데,[115] "8군은 평양을 방어를 위해 노력하다가 측면이 위협 받으면 후퇴하고, 10군단은 장진호에서 철수하여 함흥-흥남의 해안에 병력을 집중하라"고 하였다.[116]

4.7. 11월 29일, 죽음의 계곡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도 앞뒤로 포위되었다. 고토리에서 북쪽 하갈우리 방향으로는 도로 장애물 8개가 있었고, 남쪽 황초령으로는 3개의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유선 통신망은 양쪽 모두 절단되었다. 16km 남쪽에 있던 진흥리에서도 적이 목격되었다.

고토리에는 해병 1천 5백 명, 육군 1천 명이 있었다. 주 전력은 1연대장 루이스 풀러 대령의 지휘 아래, 앨런 슈터 중령의 2대대, 칼 L. 시터 대위의 3대대 G중대, 찰스 펙캠 대위의 미 육군 31연대 B중대,[117]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중령의 영국 해병 41특공대이며, 정오경 해병 전차대대 D중대가 도착했다.

29일 오전 9시 45분. 고토리에서 하갈우리까지의 보급로를 개통하기 위해 드라이스데일 중령의 지휘 아래 3대대 G중대, 31연대 B중대, 해병 특공대, 사단본부대 등 총 9백 명에 차량 11대로 구성된 돌파 부대가 출발하였다.[118] 이미 중공군은 능선마다 우글거려 드레스데일 부대는 출발과 동시에 중공군 제20군 60사단 179연대에게 엄청난 양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정오가 되어도 불과 3km밖에 진격하지 못하여 브루스 클라크 해병 대위의 해병전차 D중대(퍼싱전차 29대)를 추가로 배속 받아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패착이 된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방어력이 약한 트럭과 지프는 신속히 이탈해서 진격해야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전차 부대들이 대응 사격하느라고 길막하는 바람에 연합 해병대는 그때마다 돈좌된 채 포위 사격을 받아 절단 난 것이다.

오후 4시 30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하갈우리에 있던 스미스 장군에게 "이 위험한 돌파를 계속 해야 하냐"라고 무전으로 물어보았다. 아마도 스미스 장군 본인에게 제일 어려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증원 부대가 오지 않으면 사령부가 적에 손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스미스 장군은 결국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선두 부대가 드디어 하갈우리와 고토리 중간(부성역상평역 사이)에 도착했을 때, 하필이면 탄약차에 박격포탄이 명중하여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중간 부분의 길이 끊겼고, 선두 부대[119]는 미친 듯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이 탄약차 때문에 후속 부대[120]는 중공군의 총탄 세례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겨져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필사의 돌파로 증원된 병력은 약 4백여 명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의 병력을 증원시키기 위해 대략 150명이 전사, 150명이 부상, 포로 160명,[121] 141대 차량 중 75대 파괴라는 큰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간신히 하갈우리에 도착한 드라이스데일 부대[122]는 곧바로 10군단 공병대가 지키는 이스트힐로 올라가 방어 전투에 투입되었고, 훗날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자신이 지나갔던 이 계곡에 'Hellfire Valley(지옥불 계곡)'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편 남겨진 후속부대는 4토막 난 채 곳곳에서 절망적인 방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장 북쪽에는 10군단 연락장교 존 맥로린 해병 소령이 지휘하는 135명이 있었고, 250m 남쪽에 육군 B중대, 50m 아래 해병 사단공보관 마이클 카프라로 대위가 포함된 약간 명, 100m 아래 사단 차량수송관 헨리 실리 소령의 약간 명이 있었다. 모두 합해 380명 정도이며 1km에 걸쳐서 흩어져 있었고 상호간 무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밤이 깊어오고 사방에서 나팔 소리가 불어왔지만, 해병대는 방어진을 편 채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다음날까지 버틸 결심으로 결사 항전하였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중공군이 항복하라고 하자, 이 말을 전해들은 맥로린 해병 소령은
"중공군의 항복을 접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대우해 주겠다는 말도 전하라. 토바르, 물론 중공군이 그 말을 비웃을 거라는 것을 알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말을 전해. 따뜻한 음식을 먹여주겠다는 말도 잊지 말고."[123]
해병 헌병대 길레르모 토바르 병장이 이 메시지를 갖고 한국인 통역을 대동한 채 교섭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3차에 걸친 교섭을 하였는데, "무기만 내려놓으면 부상자들을 고토리까지 보내주겠다"라는 말에 속아 항복하고 만다.[124] 그나마 후방에 있던 2개 그룹은 후퇴에 성공하였다. 이 중에서 육군 31연대 B중대는 장진호 동쪽의 페이스 부대 증원이 예정된 부대였다. 그러나 전사 1백 명에 실종/부상자 19명이 발생하여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했다.

오후 3시경 뒤늦게 증원을 위해 참가한 해병 전차대대 B중대는 어느 정도 진격하다가 극심한 저항에 돈좌되어 하룻밤 원형 방어하다가 다음날 고토리로 복귀하였다.

한편 29일 아침 하갈우리에 있던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은 10군단 사령부로부터 유담리의 1개 연대를 이동시켜 장진호 동안에 고립된 육군 7사단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의 도로를 개통 시키라는 메시지를 무선으로 하달 받았다. 능력 밖의 일이라 명령은 무시되었고, 심지어 하갈우리를 방문한 육군 7사단장 데이비드 바도 해병대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하갈우리의 호즈 부사단장은 어떻게든 장진호 동안의 부하들을 구출하려고 노력했지만 병력이 없었다.

해병대는 내가 죽게 생긴 상태라 육군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단적으로 덕동고개에 포위된 F중대의 위기는 심각하였다. 이 날 아침 2인승 헬리콥터가 덕동고개에 착륙해 무전기용 전지를 전달해 드디어 무전기를 사용하여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봤자 숨 넘어가는 중환자 상태였다. 해병대 7연대의 2개 중대, 5연대 1개 중대를 동원하여 혼성 대대를 만들어 덕동고개의 F중대를 구원한 후 쭉 밀고 내려가 하갈우리까지 진출하는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 용감한 부대는 출발한 지 단 몇 분만에 도로 양쪽에서 빗발치는 기관총 사격에 그냥 후퇴해 버렸다.

애초 10군단의 작전 계획은 육군 3사단이 고토리와 함흥 사이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이에 해병대에서는 "계획대로 육군 3사단이 고토리 후방의 진흥리를 인수해주면, 진흥리에 있는 1연대 1대대를 고토리로 올리겠다." 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거부되었고, 이 날 정오 알몬드 군단장은 함흥/흥남 방어를 위해 10군단 병력을 집결하라고 하였고, 9시간 후에는 철수 계획을 제시하였다.

이제 후퇴밖에 남은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해병대 스미스 장군은 '기존 유담리 북쪽은 5연대가 방어하고 남쪽은 7연대가 방어하는 작전에서, 5연대는 유담리 전체를 방어하고 7연대는 하갈우리까지 도로를 개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장진호 동안 육군은 그냥저냥 버틸 만 했다. 이 날 오후부터 약간의 공중 보급이 시도되어 그 중 일부가 진 내로 떨어져서 식량과 각종 탄약을 보급 받았다. 또한 해병항공대가 지속적으로 네이팜탄, 로켓포, 기관총을 사용해서 주변 중공군을 공격해줬다. 주간에는 항공 폭격이 무서워 숨어있던 중공군이 밤에 공격하는 게 정상이지만, 이 날은 월광이 양호하여 밤에도 공중 폭격을 하였다. 중공군은 미군 방어선 밖에 몰려있어서 효과 만점이었다. 또한 야간에 중공군은 거세게 공격해왔지만 다시 한 번 대공포들이 불을 뿜어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날 밤에 너무 추워서, 미군 병사 하나가 자신의 개인호에서 앉은 자세로 얼어 죽었다.

한편 후동리의 전차 중대는 현재 15대의 76밀리포 전차와 105밀리포 전차 2대를 보유 중이었다.[125] 그 외에는 57포병 근무포대(100명가량), 31연대본부와 분부중대, 근무중대, 공병 1개소대, 중박격포중대 분견대, 의무중대 분견대가 있어 보병 역할을 할 병력이 거의 없었다. 이들이 북쪽의 페이스 부대와 연결하기 위해서는 전날 공격했다 실패한 1221고지를 탈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전차 12대와 행정병 30~70명, 박격포 1문을 이끌고 1221고지를 아침 8시부터 4시간 동안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항공통제관이 없어 효과적인 항공 지원을 받지 못했고, 포병 지원은 아예 없었다. 이들은 '30일까지 후동리에 있다가 하갈우리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함께 있던 연대 본부는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지만, 전차 중대는 부사단장 호스 준장이 전차 1대를 얻어 타고 하갈우리로 후퇴한 관계로, 전차 무전기를 이용해 통신이 가능하였다.

전날 맥클린 대령이 그토록 기다리던 31연대 2대대는 아직도 함흥차사였다. 2대대는 E중대가 빠져 감편된 상태로 이 날 늦은 오후에야 함흥과 하갈우리 중간의 마전동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병력은 철도로 수송되고, 10군단에서 지원된 차량으로 물자를 이동시켰다. 그런데 군단본부의 실수로 2대대의 물자를 실은 군단 지원 차량들이 차량집결지에서 해산되어 버렸다. 그 바람에 2대대는 하루 종일 손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30일 아침에 북쪽으로 이동하였지만 중공군 공격을 받아 고토리 3마일 전 지점에서 돈좌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갈우리의 알몬드 소장은 불 같이 화내며 "즉시 진격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레이디 중령의 2대대는 미적대다가 저녁에야 이동하였고, 자정 무렵에 부비트랩이 터지자 그대로 전면 도주하였다. 레이디 중령은 슬쩍 숨었다. 이 과정에서 적의 공격은 없었고, 미군의 반격 역시 없었다. 이후 병력을 수습하여 다시 이동하였고 레이디 중령도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러나 고토리 남쪽 2마일 지점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선두 부대는 차량을 버리고 그대로 고토리로 들어갔고, 대열 후미는 응사하다가 역시 차량을 버리고 아침 9시쯤 고토리로 들어갔다. 이때 버려진 차량들은 5일까지 그냥 그 자리에 방치되었다.

그런데 고토리 북쪽 도로는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어 더 이상 진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냥 거기서 장진호 전투가 끝나는 12월 12일까지 눌러 앉았다. 32연대 2대대는 미 해병대 1연대에 배속되어 고토리 방어진지에 책임 구역을 부여 받았으며, 레이디 중령은 고토리에 있는 44개 부대 소속의 미 육군 1,800명을 통제하는 일을 맡았다.

4.8. 11월 30일, 풍전등화

사실 이 정도는 낭림산맥 너머 서쪽의 미 8군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미 8군은 이미 부대 단위로 기동방어를 하며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전면 패주 중이었다. 미 2사단은 평안남도 군우리와 숙천 사이에서 중공군에게 두들겨 맞아 30일 아침에만 병력 3천 명을 잃었다. 사단장 로렌스 카이저 소장도 도로가 마비되어 걸어서 10km를 도망갈 정도로 풍비박산이었다. 물론 편제장비 대부분을 내다버린 채였다.

결국 미 8군의 전면적인 퇴각과 해병대의 포위라는 절망적인 소식 때문에, 이 날 아침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였고, 이는 미국 전역에 공포감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 맥아더와 10군단 사령부는 어떠한 계획이나 지시 사항도 해병사단에 하달하지 않았다.

30일 아침에 가서야 7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이 장진호 동안의 예하부대에 헬리콥터로 방문해서 처참한 상황에 대해 확실히 알았고, 10군단에 배속된 해병 상륙 작전 전문가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브리핑으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도 비로소 장진호 방면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알몬드는 L-19 경비행기를 타고 하갈우리로 날아가, 해병 1사단장과 육군 7사단장에게 '하갈우리에 집결 후 사단 내 모든 편제화기와 장비를 파괴하고 수송기를 이용해 함흥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스미스 장군은 이를 거부하였다.

사실 수송기로 후퇴하면 활주로를 지키는 최후의 병력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때 미국 전역의 신문들은 그들의 전멸을 예상하고 있었고, 정부 관리들도 '장진호의 해병대에게는 희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CIA 월터 베델 스미스 국장은 "오직 외교로만 맥아더의 우익(右翼)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스미스 장군은 숙소로 돌아와 작전참모 바우저에게 알몬드 장군의 지시에 대한 역겨움을 토로하며 "지금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나가야 하며, 10군단 사령부의 지시는 에누리해서 듣고, 10군단의 지원에 의지하지 않고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미 육군 지역인 장진호 동안에서 페이스 부대는 밤새 무리 없이 적을 막아냈다. 밤 사이에 성공적인 방어로 병사들 사이에는 "하룻밤만 더 지키자,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에 찬 말이 돌았고, 공중 투하로 탄약을 보급 받았다.[126] 오전에는 바 소장이 헬기로 안곡에 나타나 페이스 부대장과 면담을 하고 돌아갔다. 이때 페이스는 정식으로 맥클린 대령 대신 지휘권 승계를 인정 받았으며, 페이스는 "부상자 5백 명이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이때 바 소장에게 후퇴 명령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바 소장은 하갈우리로 돌아가 알몬드 소장에게 "해병 항공 지원 아래 페이스 부대가 후퇴할 것이며, 다만 부상자 5백 명이 문제"라고 보고하였다. 해병대 스미스 소장은 "육군을 도와줄 여력이 없지만, 대신 해병항공대의 항공 지원 우선권을 페이스 부대에 할당해 주겠다"고 하였다.

페이스 부대의 후방에 있던 후동리 부대는 후퇴 명령을 받고 순조롭게 철수하였다(31연대 본부/본부중대/근무중대 44명, 31전차중대 176명, 57포병대대 근무포대 105명). 전술학적으로 볼 때 먼저 풍유리 병력이 후동으로 후퇴하고, 여기서 후동리의 병력과 합류하여 하갈우리로 후퇴했어야 하는데, 풍유리의 후방인 후동리의 병력이 먼저 후퇴해버린 것이다.[127]

그날 밤 장진호 동안 풍유리 부대로 다른 날보다 빠른 20시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부대의 주화력인 대공포를 풀로 쏴도 부족할 판에 탄약 부족으로 4연장 50구경 기관총[128]은 기관총 4정 중 2정만, 40mm 보포스 연장기관포 2문 중 1문밖에 사격할 수 없었다. 중공군이 몇 번이나 미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대공포가 전부 쓸어버렸다. 이 날도 월광이 좋아 야간 항공 폭격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중공군 쪽에 있었다. 작전이라는 것이 없었고 서로 협조가 안 된 상태로 맹목적으로 산만하게 쳐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화력과 병력을 한 지점으로 집중시키는 전투를 할 줄 몰랐다. 또한 한 장소로만 쳐들어 왔는데, 구체적으로는 동쪽에 있는 32연대 1대대 A중대와 C중대 사이와 북동쪽에 있는 31연대 3대대 L중대 방향으로만 쳐들어 왔기 때문에 미군은 해당 지점에 병력과 화력을 집중 시키며 처리해나갔다. 침투하다가 사살된 중공군을 보면 기관총을 지고 왔지만 삼각대도 탄약도 없을 정도로 화력이 형편없었다.

하갈우리 역시 야간에 중공군 58사단과 59사단이 공격해 왔는데 해병대는 결사적으로 방어해나갔다. 밤사이에 사살된 적의 시체가 5백~7백 구였지만 해병대는 거의 피해가 없어서 1연대 I중대의 경우 전사자 2명, 부상 10명에 그칠 뿐이었다. 이스트힐 방어 전투에 참가한 영국 해병 특공대는 적 시신을 장방형으로 쌓아서 2m 정도 높이로 탑을 만들었는데, 텐트와 연결하여 바람을 막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영국 해병특공대는 얼마나 용맹한지 역습을 가해 중공군을 언덕 너머로 밀어버릴 정도였다. 시체 탑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물론. 또한 이스트힐에는 후동리에서 후퇴한 육군 7사단의 31전차 중대 16대도 배치되었는데, 이들도 이 날 중공군을 격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날 한 병사가 전차 2대 앞에 있던 중공군 사망자 2백 구를 발견할 정도였다.

이 전투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전투에서 피아살상비는 압도적이었다. 주간에는 미군의 사기적인 항공·포병 지원으로 중공군은 산 속에 숨어 있었고, 야간에야 중공군이 미군 진지로 쳐들어갔지만 기본적인 소화기 화력이 하늘과 땅 차이니 미군 1명 죽을 때 중공군은 최소한 10배에서 많으면 100배 많은 병력이 죽어나갔다. 전투마다 해병대는 절망적으로 싸웠지만, 결과는 항상 해병대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적은 바로 추위였다. 미군이든 중공군이든 얼어 죽는 사람이 전사자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4.9. 12월 1일, 변화된 양상

사상자의 증가는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하갈우리의 사단의무대에서 후송되어 좀 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부상자는 6백 명에 달했다. 유담리에서도 부상병이 적어도 5백 명은 있을 듯 하였다.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부상자를 항공 수송하는 것뿐이었다.

이에 공사가 절반도 안 끝난 야전 활주로에서 C-47 수송기 1대가 시험 착륙하였다. 관제탑은 무전기를 탑재한 지프가 대신하였다. 활주로가 짧아 엔진을 역회전 시키는 위험한 착륙이었다. 다행히 착륙에 성공하고 30분 후 부상자 24명을 태우고 이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지상에 있던 전 병력은 그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바로 이 비행장이 이후 전투에서 해병 1사단의 생명선 역할을 하여 전멸을 막았다.

그동안 하갈우리의 방어선이 공격 받는 극히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해병대 공병대만은 열외되어 적의 포화에 노출될 위협을 감수한 채 불 켜놓고 밤새도록 작업하였고, 마침내 부분적으로나마 활주로 개통에 성공한 것이다. 부상병들이 후송되는 것은 물론 함흥·흥남·원산에 있던 해병대 행정부대원과 부상에서 회복한 병력 500명이 보충병으로 기꺼이 이 지옥의 한복판으로 날아왔다.

아침 8시, 유담리의 7연대의 남은 2·3 대대가 전차 한 대를 앞세우고 하갈우리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129] 이는 하갈우리에서 도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유일한 M-26 퍼싱 전차였다. 비록 철수하지만 해병대의 사기는 살아있었는데, "흥남으로 돌아가 재편성하고 다시 돌아와 중공군에게 진짜 매운맛을 보여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있을 정도였다.

뒤이어 5연대도 출발하였는데, 가장 후방에 있던 5연대 1대대가 후퇴하면 바로 뒤따라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다. 포병을 동원하여 겨우 적의 전진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5연대에서 각 중대별로 "너무 힘들어 현 진지를 사수하겠다"고 요청하였지만, 연대장은 모두 거부하고 "무조건 하갈우리를 향하여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유담리에서 후퇴할 때 불도저로 6 feet under의[130] 기다란 구덩이를 파고 낙하산 천에 싸인 시신 85구를 합동으로 묻었다.[131] 그리고 존 크래번 군종 목사성경 구절을 낭독하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다행히 휴전 후 별도의 회담을 통해 모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장진호 동안의 육군이었다. 풍유리의 페이스 대대장이 이끄는 31연대 3대대를 중심으로 한 페이스 부대는 전날의 야간 전투를 겨우 막아내었지만, 새벽녘에는 일부 방어선이 뚫려 북동쪽에 있는 감제고지가 점령되었다. 중공군은 이 날 이례적으로 주간 공격을 하였다. 아침 9시, 페이스 중령은 유일하게 통신 가능한 항공 무전으로 조종사에게 "우리 부대와 하갈우리 사이에 아군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조종사는 "죄송합니다. 없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래도 조종사는 '기상만 허용하면 정오쯤에 콜세어 1개 편대를 안내해오겠다.'고 하였다. 또한 57포병대, 31박격포중대, D방공포대 모두 아주 적은 탄약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후퇴 순서는 32연대 1대대(C, B, D, A중대 순), 57 야전포병대대,[132] 중박격포중대, 31대대 3대대(T소총중대인 I, K, L 중대가 작살나 있어 K중대로 통합되었다) 순이며, 15대공포 대대 D포대의 반궤도 차량은 대열 중간중간에 배치했다. 57포병대대와 31중박격포중대는 철수 직전에 남은 탄약을 지원 사격에 다 소모한 다음 포신과 포강을 파괴하기로 했다. 무전과 기관총이 있는 차량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하기로 했다. 태워야 할 부상자가 너무 많아 사전에 트럭에 실어놓은 시신들을 트럭 밖으로 던져버렸고, 시신들은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졌다. 각 차량에는 부상자 15명 내지 20명을 실었는데, 3단으로 50명을 실은 트럭도 있었다. 부상자 600명을 포함하여 육군 병력 수천 명은 콜세어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풍유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총 14마일을 남하해야 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탈출로는 남쪽으로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데, 오른쪽부터 장진호-도로-철길-능선이었다. 1221고지 근방에서는 철길과 도로가 교차되어 오른쪽부터 장진호-철길-1221고지-도로 순이었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 장진호-철길-도로-능선으로 지형이 바뀐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좌측 방향만 방어하면 되었다. 보병들은 능선으로 배치되어 계속 후속 부대가 선두 부대를 인수 받는 식으로 방어진을 펼치고, 차량 행렬은 도로를 따라 이동하기로 하였다. 얼어붙은 장진호를 건너가는 방법도 논의되었지만 빙판이 7~8마일의 거리 동안 다수의 부상자를 실은 2.5톤 트럭을 버텨줄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후퇴 중에 모랄빵 난 32연대 3대대 K중대가 시도해봤다가 얼음이 깨져 다수가 익사하였다.

이윽고 1시가 되자 F4U 콜세어가 나타났고 병력은 출발하였다. 최선두와 최후미는 최강의 화력인 듀얼-40[133]이 맡았다. 여기에 M16 미트쵸퍼에 달린 M45 쿼드마운트 기관포대가 보병들뿐인 중공군에 지옥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이후 1221고지를 통과하기 전에 탄약과 연료가 모두 떨어졌다. 31대대 3대대 M중대 같이 일부 부대에는 철수 명령이 전달되지 못해 이동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섞여 들어왔다. 이때 모든 포병과 박격포는 탄약을 소모하기 위해 급속 사격을 하였다.

선두는 듀얼-40과 31연대 1대대 C중대 3소대가 맡았고, 바로 뒤에 페이스 중령과 항공지원장교 스탬포드 대위가 위치하였다. 이때 출발 지점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A중대가 합류를 위해 C중대를 향해 달려왔고, 그 틈을 타고 중공군들이 뒤를 따라 공격해왔다. 그걸 본 공중에 있던 콜세어기가 네이팜탄을 떨어트렸는데, 차량 바로 앞쪽에 떨어져 일부 병사들이 불기둥으로 변하였고, 눈밭을 구르며 제발 총으로 자신을 쏴달라고 애원하였다. 증언마다 다르지만 미군은 15명가량이 타 죽었고, 중공군은 40명 남짓이 죽었다. 공포에 휩싸인 병력들은 도로를 따라 무질서하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건재하였던 소대, 중대간의 편제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선두에 있던 페이스 중령이 권총으로 위협하거나 명령하고 타이르며 병력들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페이스 부대는 결정적으로 사기가 꺾이기는 했지만, 콜세어의 지속적인 주변 폭격은 다시 사기를 올려주었다. 또한 폭격 과정에서 몇몇 미군과 장갑차가 휘말렸지만 어쨌든 네이팜탄이 적의 돌격도 막아내었다.

그날 10군단장은 가용 가능한 항공자원 중 절반을 장진호 동안에 배정하였다. 20대의 항공기를 배정 받았고, 4대 또는 6대씩 교대로 와서 기총소사, 로켓 공격,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막강한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작 지상에 있던 육군은 싸울 의지가 부족하였다. 능선을 따라 이동해야 할 병사들이 계속 도로 쪽으로 몰렸다. 행군 대형도 무시되어 선두의 C, A중대가 뒤섞였고, 더 이상 이들을 지휘할 장교를 찾기 힘들었다. 후방 방어는 K 통합 중대와 또 1대의 듀얼-40이 맞아야 했지만, K 중대는 능선을 따라 이동하며 방어하는 대신 적의 총탄을 피해 우측으로 이동해 안전한 빙판을 따라 이동하였고(대신 다수가 얼음이 깨져 익사함), 듀얼-40은 기름을 아끼기 위해 시동을 끈 상태로 최후까지 방어 사격을 하다가 순서가 되어 출발하려고 하니 배터리가 방전되어 할 수 없이 버려졌다. 또한 차량 행렬이 집중 사격을 받아 차에 타고 있던 부상병들은 두세 번씩 추가로 총상을 입었고, 운전병들이 계속 죽어나갔다. 이 때문에 운전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라 대체할 지원자를 찾기 힘들었다. 부상자는 계속 늘어났지만 이미 트럭에 부상자로 가득 차서 더 이상 태울 수가 없어, 기존에 있던 부상자가 내리기도 했지만 새로 발생한 부상자는 그대로 버려지기도 했다.

이런 악전고투 속에 2시간 동안 2마일 남하하여 15시에는 1221고지 근처까지 이동할 수는 있었다.[134] 이때서야 4일 만에 처음으로 포병관측반 지프 탑재 무전기로 상부의 지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용이 "페이스 중령 앞. 하갈우리로의 퇴로를 스스로 확보하라. 귀관을 지원하기는 불가능하다. 스미스 해병 제1사단장 서명."으로 절망적인 메시지였다. 심지어 1221고지 옆의 다리가 폭파되어 있어서 차량 행렬이 막혀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16시에는 해가 지기 시작하여 항공 지원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끊어진 다리를 넘을 수 없으니 얼어붙은 늪지로 우회하여 듀얼-40 궤도 차량이 먼저 건넌 후, 일반 트럭을 케이블로 견인하는 방식으로 도섭하였다. 도섭 중인 트럭은 좋은 표적이었는데, 운전병이 저격 당해 대체 운전병을 찾을 때까지 일정이 지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후위를 32연대 3대대 통합 K중대가 맡았지만, 장교들마저 자신의 위치를 버리고 오히려 먼저 강을 건너 도망쳤다. 결국 여기서만 2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 주로 여자와 아이들로 구성된 한국인 피난민 100여 명이 곳곳에서 합류하였다.

일부 병력은 1221고지를 공격하다가 그냥 고지를 넘어 도로를 따라 후동리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일부 병력은 1221고지를 우회하여 장진호의 빙판을 건너 하갈우리로 가기도 하였다. 많은 카투사들이 1221고지 공격에 가담했는데, 한 카투사는 혼자서 중공군 16명이 지키고 있는 벙커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도 대열 후미에서는 아직도 끊어진 다리를 건너고 있는 등 아수라장이었다. 너무 많은 부상자들이 차량에 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도로를 개척해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후 5시경 페이스 중령은 필사적으로 병력들이 다시 싸우도록 지시를 내렸지만 모두 넋이 나가있었다. 페이스 중령은 전투를 거부하며 트럭 짐칸에 스스로 묶으려고 했던 카투사 2명에게 싸우라고 지시하였는데, 그들은 일본어로 "나는 다쳤습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였다. 이에 페이스 중령은 둘 다 사살해 버렸다. 정작 이 와중에 훨씬 많은 훈련을 받고도 도망치는 미군은 1명도 쏴죽이지 않았다.[135]

페이스 중령과 다른 장교들의 계속되는 독전으로 1221고지는 완전히 장악된 것은 아니지만 대충 정리되었다. 이어 1221고지 아래에 도로에 있는 도로 장애물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개별적으로 숨어있던 중공군 1명이 수류탄을 던져 그 파편이 페이스 중령의 가슴에 맞았다.[136]

이동을 시작하자마자 2번째 도로 장애물이 나타났다. 며칠 전 북상하다가 실패했던 31전차 중대의 파괴된 전차 중대 2대와, 전멸 당한 의무중대의 불타버린 차량들, 그리고 통나무들로 도로 장애물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선두 차량 그룹은 도로 장애물을 치웠고, 뒤따라오던 로버트 존스 소령을 중심으로 일부는 도로 대신 인접한 철길을 따라 남하하였다. 어쨌든 출발할 때 35대였던 차량은 이제 약 25대 남았다. 각 차량에 적게는 10~15명, 많게는 3단으로 쌓여서 부상자 4~50명이 타고 있었다. 경상자들은 차량 외부에 매달렸다.

2번째 도로 장애물을 개척하고 이동하니 이번에는 2번째 끊어진 다리가 나왔다.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여기서 차량 대열은 가까이 있던 철로에 있던 구각교를 이용하여 우회해서 끊어진 다리 남쪽 도로로 올라왔다. 철로에 있던 구각철교는 다행히 멀쩡하였다. 길이 미끄러워 이 우회 과정이 쉽지 않아 여기서도 많은 시간이 낭비되었다. 결국 후동리에 도착한 21시 무렵에는 남아있던 차량은 15대에서 20대 가량이었고, 부상병 150명 정도가 함께 행군 중이었다. 가슴에 세열수류탄 파편을 맞은 페이스 중령은 차량 행렬 선두 트럭에 실려 있었다. 중간중간 장교들을 만나 누운 채로 지휘하기는 했지만, 부상이 너무 심해 그 날 밤 사망하였다.

차량 대열은 마침내 후동리로 들어왔다. 원래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31연대 본부와 31전차중대만 남아 있었다면, 함께 힘을 합쳐 뚫고 내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동리 부대는 전날 철수한지라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후동리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 사격에 차량 운전병이 전사했고, 그렇게 트럭이 전복돼 부상병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차량 행렬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선두 차량은 엑셀레이터를 밟아 홀로 떠났고, 걸을 수 있는 병사들은 모두 흩어졌다.[137]

후동리에서는 중공군들은 저항이 없는 미군 차량 행렬을 돌아다니며, 부상병들을 일일이 쏴죽이고 모든 차량에 불을 질렀다. 일부 장교들은 지휘하기를 포기하고 숨거나 도주하였다. 이로써 페이스 부대는 와해되었다.

후동리까지 진입했던 육군은 크게 3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첫 번째 부류가 가장 현명했다. 인사장교 로버트 존스 소령은 도로로 이동하는 것을 포기하고, 도로와 평행하게 놓여있던 철로로 진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호반과 너무 가까워서 위험했다. 차량 행렬 중에 몇 대만이 존스 대위를 뒤따랐다. 이동 중 중공군에게 공격을 받기는 했지만 큰 문제 없이 하갈우리 해병대 방어진지에 도착했다.

2번째 부류는 어떻게든 길을 따라 하갈우리로 이동한 병사들이었다. 페이스 대대 D중대 소대장 제임스 캠밸 중위는 낙오병들과 배수로를 기어 이동하다가 국군(?)을 만나 해병대가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국군이 도로를 가리키며 '미군 지프차들이 매일 저 길을 따라 내려갔다.'고 말했지만, 켐벨은 의심스러워 그냥 호숫가를 따라 걸어갔다. 3km를 더 내려가 일행이 17명으로 늘어날 때쯤 해병대 전차부대를 만난다. 다음날인 2일 밤에는 페이스 대대 임시 중대장 스미스 중위가 이끄는 무리나 D중대장 비거 대위가 이끄는 무리가 하갈우리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3일에 도착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가장 한심했던 3번째 부류는, 그냥 다 포기하고 풍유리강 하구와 후동리 사이에서 죽치고 앉아있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얼어 죽거나 중공군의 포로가 된다. 12월 4일 콜세어기가 후동리 미군 차량 대열을 폭파하기 위해 폭격을 했는데, 아직도 움직이는 미군들이 보였다.

이와는 별개로 후동리에 진입하기 전에 개별 도주한 병사들도 꽤 있었다. 이들은 끊어진 다리나 도로 장애물 등으로 이동로가 막히자, 도로에서 대기하다가 얼어붙은 호수 쪽으로 도주하였다. 주변에는 아무 장애물도 없었고 보름달 때문에 환해서 중공군들이 사격하기에는 편했다. 어떠한 엄폐물 없이 외롭게 달려가던 병사들은 하나씩 사살되었다. 다행히 다음날인 2일에는 미 육군 격파를 완료한 중공군 80사단 병력이 남하하여, 장진호 동안에서는 비교적 손쉽게 개별 탈출이 진행되었다. 적어도 300명 이상이 개별적으로 호수를 넘어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개별 탈출은 해병대가 하갈우리에서 이동하기 전날인 12월 5일까지도 계속되었다. 당시 하갈우리 북쪽 호수 방면은 해병 수송대대가 방어하고 있었고 전면에는 지뢰 지대가 있었는데, 너무 추워서 터지지 않는 바람에 육군 병사들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12월 4일 페이스 부대(32연대 1대대)의 생존자를 파악했을 때 전체 1,053명 중 17%(181명)만 살아 돌아왔다. 장진호 동안 육군 전체로 보면 하갈우리로 돌아온 총 인원은 약 1,900명 안쪽으로 병력 1,000여 명 이상이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어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4.10. 12월 2일, 브레이크 아웃

미 해병대의 문제는 고립된 덕동고개의 F중대였다. 사전 계획대로 5연대가 유담리 방어를 전담하고 7연대가 먼저 남쪽으로 진격하여 덕동고개 F중대를 구출하고 이어서 하갈우리까지 뚫고 내려가야 했다. 먼저 7연대 1대대가 12월 1일 야간에 산길로 진격하였다. 그동안 미군은 주간에만 움직였고 그것도 차량을 이용하여 길로만 다녔기 때문에 중공군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런데 F중대 방어 진지까지 6km를 걸어가야 하는데, 평지가 아니라 1520고지를 지나가는 6km였다. 깜깜하여 방향을 잡지 못해 수시로 대열이 멈춰섰었는데, 그때마다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이었다. 1520고지 정상에 올라가자 해병대는 너무 지쳐서 도미노처럼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중공군 방어 전초 병력은 대부분 얼어 죽어버려 7연대 1대대 병력은 저항 없이 1520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잠시 휴식 후 F중대가 있는 덕동고개 폭스힐로 이동하는데, 이동 중 가벼운 전투를 반복되었다. 하지만 중공군도 미 해병대도 너무 춥고 힘들어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우연히 서로 마주치면 너무 힘들어 총을 들어올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대대장 레이몬드 데이비스 중령부터가 1520고지 정상에서 휴식 중 참호를 파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아 이마를 스쳤는데, 귀찮다고 그냥 그 자리에 드러누워 자버릴 정도로 녹초가 되었다.

이러한 천신만고 끝에 F중대의 방어선에 도달했는데 언덕은 중공군 시신 수백 구로 뒤덮여 있었고, F중대에 다가갈수록 점점 많은 시신이 쌓여있어 흙 한 번 안 밟고 시신만 카페트처럼 밟고 이동할 지경이었다.[138] 심지어 F중대에는 중공군 시신으로 바리케이트를 쳐놓았다. 이 합류 시점이 12월 2일 오전 11시 25분이었다.

F중대는 5일간 격전으로 전사 26명, 실종 3명, 부상 89명 등 총 사상자 118명이 있었다.[139] 장교는 7명 중 6명이 부상 당하였다.

한편 하갈우리 북쪽 호수 지역을 방어하던 수송대대장 올린 뵐 중령은 얼어붙은 장진호로 계속 육군 병력들이 도망쳐 오자, 해군 위생병과 운전병만 데리고 얼어붙은 호수를 지프로 이동하였다. 중간에 마주친 중공군에게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총들을 얼음판에 올려두고 부상자를 지프에 싣고 후송하였다. 가끔 총알이 날아오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얼음판과 근처 호숫가에는 부상 당한 육군 병사 수백 명이 흩어져 있었다.

구조 작전은 다음날 12월 3일에도 계속되었다. 이때는 더 많은 병사들이 구조 작전에 동참하였다. 중공군은 이들을 보고만 있기도 하고 때로는 총을 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올린 뵐 중령은 용감무쌍하여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심지어 도로까지 올라가 불타버린 차량 행렬을 뒤져 모두 전사한 것을 확인하였다. 모든 차량이 시체들로 가득 차있었는데 무려 300명쯤 되었다. 이틀간 구조한 육군 병사는 300명에 달했고 자력으로 탈출한 몸 성한 병사들은 385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모두 하갈우리를 방어하던 해병 1연대 1대대에 배속되어 임시대대로 편성되고 해병대 장비로 무장하였다.[140] <장진호 동쪽>에서는 탈출한 385명과 먼저 후동리에서 도착한 육군 병력까지 합쳐 490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후동리의 지휘관 31연대 작전과장 앤더슨 중령의 지휘 아래 임시 대대를 편성해 31/7이라는 이름으로 해병 7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하갈우리의 방어 작전에 투입되어야 할 육군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전쟁은 나와 상관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고, 어떻게든 꾀병으로 부상자 수송기를 타고 탈출하려고만 했다. 해병 사단장이 육군 장교에게 "부대 통제력 비슷한 것이라도 행사하라"고 했지만 따르지 않아, 해병대원들이 "육군 장교들을 무기와 부상자를 포기한 죄로 모두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대공세 직전 소련군이 작성하여 중공군에게 배부한 팸플릿에 의하면 '미국 해병대원들은 미 육군 병사들에 대하여 오만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미 육군을 '멸시한다.'는 단어가 빠져 있었다.

장진호 동안의 육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유담리의 해병 4.5개 대대는 중공군 3개 사단을 막아내며 성공적으로 후퇴한 데 비해, 풍유리-후동리의 육군 2개 대대는 중공군 1개 사단을 상대로 방어는 괜찮게 해내었지만 후퇴 과정에서 개발살 난 것 때문에 그렇다. 즉, 장진호 동쪽의 육군들이 서쪽의 해병대보다 피아병력비가 딱히 후달리지 않다는 것이다.

장진호 동안에서 육군 부대 전투의 의미는 '중공군 80사단의 공세를 3일 동안 막아내며 수천 명을 사살하여 하갈우리 북동쪽을 방어했다는 것'이다. 또한 중공군 80사단은 이때의 공격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은 것은 확실하다. 이에 역사가 로이 애플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장진호 동안에 주둔해 있던 보병 7사단 병력은 해병부대가 하갈우리를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제공한 셈이 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부상자 수백 명을 후송할 수 있었던 야전 활주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는 그리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육군 병력은 어쩔 수 없이 희생양 노릇을 해야만 했고, 그 희생양이 도살된 꼴이 되었다.

4.11. 12월 3일, 전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 작전

유담리에서 후퇴하던 2개 연대의 부상자 수는 어마어마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부상자 1천 명에 도보로 이동하는 부상자 8백 명이었다. 중간에 합류한 폭스힐에 주둔해있던 F중대의 부상자를 태울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리가 없어 부상자들은 지프 본넷 위에 3명씩 눕혀놓아 추위와 총알 세례에 그대로 노출되게 해놓았고, 시신들은 대충 길가에 묻거나 트럭 흙받이(Fender), 심지어 대포의 포신에 묶어놓기까지 했다. 살갗을 찢어대는 혹독한 날씨에 극심한 피로로 행군이 정지할 때마다 다들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중공군도 상황이 좋지 않아 제대로 공격해오는 부대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저격병 한두 명이 공격해왔는데, 그때마다 미군은 공습 요청으로 처리했다. 중간중간 방어호에 있던 중공군들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데, 숨 쉴 때마다 입김이 나오고 후레쉬를 비추면 눈이 불빛을 따라 돌아가서 그제야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도로 곳곳에 미군이 피워놓은 화톳불에 중공군들이 몰려와 해병들과 함께 불을 쬐다가 몸이 녹으면 다시 산비탈로 올라가는 일이 발생할 정도였다.

23km 짧은 거리를 무려 이틀 반 동안이나 행군한 끝에, 12월 3일 오후 7시가 다 되어 선두부대가 하갈우리 방어선 북쪽 끝 검문소에 도달하였다. 해병대는 며칠 동안 세면과 면도도 못해 몰골이 엉망이고 피곤에 절여져 있었지만, 그 시점부터 어느 하사관 1명의 페리스 아일랜드식 억양의 구령에 맞추어 발을 구르며 행진하였고, 머리를 높이 들고 해병의 노래까지 부르며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몬테주마의 궁정에서,
트리폴리의 해안까지.
우리는 조국의 전투에서 싸운다네.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자유와 권리를 위해 최선봉에서 싸우며,
우리의 명예를 지킨다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부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네.
바로 미합중국 해병대. -해병의 노래
참전 용사들은 "당시 트럭에 실려있던 전사한 해병들의 시신들이 하사관이 외치는 집합 구령을 듣고 다시 살아나서 트럭을 내려와 행진 대열에 합류할 것 같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로써 군사 전문가 드류 미들턴이 명명한 전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 작전 중의 하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7연대의 선두가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이고, 아직도 뒤를 지키기 위해 유담리에 해병 5연대 2대대가 남아서 방어하고 있었고, 덕동고개 쪽의 터키힐에서는 7연대 3대대가 통로 확보를 위해서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오후 늦게는 유담리에 남아있던 해병포병 11연대도 철수하여 2대대만 남았다. 서부전선의 육군 2사단은 후위를 맡았던 대대가 통째로 철수하지 못하고 버려질 정도로 철수의 후위부대는 위험한 임무였다. 2대대는 중공군이 화 낼까 봐 뻔히 보이는 적에게 총도 쏘지 못하게 하였다. 중공군은 해병 포병대가 철수하면서 박살내어 폐허가 된 유담리 주변 가옥을 약탈하고 있었다. 선두 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했다는 시점에서는 5연대 2대대와 앞서 철수한 부대가 후미와 1.5km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철수할 때까지 터키힐에서 통로 확보하고 있던 7연대 3대대는 이미 첫 날에 작살난 이후 여기저기에서 병력을 끌어들여 겨우 정수의 1/3 정도 채운, 사실상 중대급 부대였다. 어둠이 깔리자 이때까지 유담리의 구호소에 있던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 해병은 역시 해병이었다. 일부의 병력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며 후위 부대의 후위를 맡으려고 지정된 진지로 이동하였고, 그제서야 대대장 해롤드 로이스 중령은 출발 명령을 내렸다. E중대를 선봉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순식간에 터키힐을 지나쳐갔고, 그 바람에 터키힐의 7연대 3대대가 최후미를 담당하게 되었다. 공병대가 부서진 다리를 고치고, 연료가 떨어져 대포들을 포기하고 가는 악전고투 속에 하루가 지난 12월 4일 오후가 되어 이들도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먼저 후퇴한 7연대처럼 이들도 산발적인 저항 외에 부대 단위의 공세를 받지 않았다. 유담리-하갈우리 통로만 12월 1일부터 4일까지 공격을 안 받은 것이 아니라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 모두 공격이 뜸했다. 중공군은 27일부터 초기 대공세 때 이미 작살나서 더 이상 공격할 여유가 없기도 하고, 살아남은 병력도 너무 추워서 공격할 힘도 없었다. 무엇보다 해병 항공단 코르세어기가 도로 양쪽에 네이팜탄으로 화력 터널을 만들어서 솜으로 누빈 옷을 입고 있던 중공군들은 심지처럼 타올랐다. 아마 하갈우리까지 육군 페이스 부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이동했다면 해병 항공대가 지원하여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141]

한편 이 날 하갈우리에 있던 7사단 작전처 윌리엄 린치 소령은 페이스-맥클린 부대 잔여 병력을 집계해서 10군단으로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는 남아있는 통합 대대는 앤더슨 중령이 지휘관, 위트 소령이 부지휘관, 도벨 대위가 작전장교이며 장교 40명에 사병 844명으로 합계 884명으로 나온다. 이 중에서 325명은 후동리에서 탈출한 병력이며, 페이스 부대 소속이 228명, 31연대 3대대는 165명, 57포병대대는(대공포대 포함) 197명이였다. 이후 앤더슨 중령이 이끄는 임시 대대는 하갈우리에서 고토리와 황초령 정상까지 철수하는 과정에 다시 많은 인원이 죽거나 다쳤다.

4.12. 12월 4일, 우리는 다른 쪽으로 진격 중이다

5연대와 7연대는 포병부대와 대전차 중대, 행정 중대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보충해 주었음에도 병력이 반도 차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보충병 5백 명이 왔지만 이들만으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이 날 공군 전투 수송사령부의 윌리엄 H. 터너 장군도 직접 하갈우리로 날아와 '최대한 수송기를 보내 포위된 병력들을 항공편으로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해병대 스미스 사단장은 보유한 중화기와 장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거부하였다.

군단장 아몬드 장군도 왔는데, 언제나처럼 무한 낙관론만 설파하다가 돌아갔다.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B-17B-29 폭격기가 함흥까지 완벽하게 엄호를 제공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사단장과 두 연대장, 그리고 수송대대장에게 무공십자훈장을 수여했고, 돌아가는 길에 고토리를 방문하여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육군 31연대 2대대장 윌리엄 레이디 중령에게도 같은 훈장을 수여하였다.

이때 전황 브리핑에서 "후퇴하는 건가요?" 라는 질문은 받은 스미스 사단장은
"후퇴라니, 얼어죽을! 후퇴가 아니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중이라고!"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
라는 불후의 명언으로 대답했다. 이 말은 미 해병대의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말로 남게 된다. 이 일화는 1952년 조셉 H.루이스 감독, 프랭크 러브조이 주연으로 전쟁 영화화 된 <지옥의 철수작전>의 원제이기도 하며,[142] 후일 영화 월드 인베이전에도 등장.

그런데 실제로는 그 날 오후 내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다가 영국인 기자에게 "확실하게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후방이 없으면 후퇴가 아닙니다. 포위 당해 있을 때는 후퇴, 아니 철수조차 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돌파해 나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해야 하며,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너무 길어서 좀 더 간단하게 줄여서 24시간도 안 되어 미국 전역에서 신문들의 전면에 장식된 것으로 추정. 스미스 장군의 부관 마틴 섹스톤 대위는 'Hell'이라는 단어는 안 썼다고 확신했고, 연대장 알파 바우저는 'Heck(뭐라고?)'[143] 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했다. 어쨌든 위 일화는 약간 와전된 듯. 오히려 그 날 해병대원들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교만하다"고 분개했으며, 그녀 역시 기사에 "해병대원들이 바다까지 나올 의지가 있는지 궁금하다"며 부정적인 상황만 썼다.

스미스 장군의 저 명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당시 1연대장 루이스 풀러의 발언도 잘 알려졌다.
우리는 포위됐다. 이제 문제는 간단해졌다. 우리는 이제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당시 해병대원들도 "해병 1명은 중공군 20명에 필적하며, 중공군이 장진호에서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을 때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그 불쌍한 놈들 자신이다"라는 농담을 하곤 했는데, 이러한 정서가 사단장부터 병사들까지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후퇴해야 했는데, 들리는 건 "고토리 남쪽에 5km 지점에 있는 황초령 수문교가 7m 가량 파괴되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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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발전소의 황초령 수문교. 한국전쟁 발발 이전의 사진. 중공군이 폭파한 지점은 사진 3시 방향의 기계실 오른쪽 끝단의 연결 부분이다.

장진호에서 모인 물을 거대한 4개의 터널을 통해 산맥을 관통하여 흘려보내 수력발전을 하는 시설인데, 사진에서 보이는 터널 위쪽의 작은 시설물이 황초령 수문교로서 해당 지역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다리이며 우회로가 없다. 바로 저곳을 중공군이 파괴한 것이다. 병력이야 어찌어찌 건널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전차, 트럭과 같은 장비들이 문제였다.

미 해병대는 1톤짜리 M2 장간조립교 부품을 공수 투하하여 고토리로 보내면, 고토리에 주둔한 육군 58교량중대가 이를 수령하여 설치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한 번도 이를 공수 투하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날 근접 공중 지원을 위해 출격한 미 해군 최초의 흑인 해군 항공대 조종사 제시 L. 브라운이 탄 F4U-4가 피격 당해 하갈우리 인근에서 불시착했다가 사망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 그의 윙맨이었던 톰 허드너가 일부러 전투기를 불시착 시킨 후 구출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톰 허드너만 헬리콥터로 구조되었다. 이후 전투기 노획을 방지하기 위해 네이팜탄으로 폭격하여 전소시켰다. 이후 미국 최초로 흑인 이름을 딴 녹스급 호위구축함 'DE-1089[144] 제시 L. 브라운 (Jesse L. Brown)' 함으로 그를 기리게 된다.

같은 날 맥아더는 "중공이 북한에 백만 대군 집결 중"이라고 발표했다. 중공군 4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와서 1차 대공세를 가할 때는 "한국군이 헛것을 본 것이거나 소수 의용군이 참전한 것"이라고 하다가, 이후 도저히 중공군 참전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자 "백만 대군이 참전했다"고 뻥튀기하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전후 한국 반공물에서 나오는 중공군 백만 대군 운운은 이때 맥아더 발표에 의한 듯. 이후 중국은 26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미군은 30만 명으로 추산했다.

4.13. 12월 5일, 탈출 준비

12월 1일에 시험 비행을 한 뒤, 2일부터 5일까지 하갈우리 임시 활주로에서는 공군의 C-47과 해병대의 4RD를 이용하여 무려 해병과 육군 부상자 4천 명 이상을 공수했다. 다만 중간에 꾀병 환자들이 끼어들어 의무관들이 3단계에 걸쳐 후송 지시를 내려야만 후송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부상자 4,312명(육군 1,500명)과 시신 173구가 후송되었고, 보충병 500명과 보급품이 하갈우리로 도착하였다. 항공 수송 이전인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는 장진호 지역에서 아주 위급한 부상자만 헬리콥터와 소형 항공기를 이용해서 후송되었다. 주로 유담리의 해병대원으로 152명에 달했다.

비행기들은 연포 비행장에 착륙하여 해병대 사상자들은 흥남의 해병 제1사단 병원으로, 육군 사상자들은 함흥의 121후송 병원이나 흥남 부두에 정박 중인 미 병원선 콘솔레이선 호로 갔다. 아주 급한 환자들은 하갈우리에서 바로 일본으로 간다.

서부전선 미 8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다음날 한국군마저 후퇴하여 평양은 북한의 손에 넘어갔다.[145] 동부전선에서는 미 7보병사단이 압록강 혜산진에서 신흥리로 철수 완료하였다. 서울에서는 국립박물관이 중요 물품을 부산으로 소개하기 시작할 정도로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놀랍게도 아직도 장진호 동안에 일부 육군들이 살아있어 몇 명씩 도망쳐 왔다. 이 날 오전에만 30명으로 구성된 그룹이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하갈우리로 탈출하였다.

4.14. 12월 6일, 하갈우리 탈출

드디어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탈출이 시작되었다.

이때 부대 배치를 보자면 하갈우리 북쪽에는 여전히 중공군 79·59·58·80사단이 남아있었고, 이 날부터 새롭게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 18km 구간에 중공군 76·77사단이 추가 투입되었다. 고토리에서 황초령을 지나 진흥리까지는 여전히 중공군 60사단이 차단 중이었고, 진흥리 남쪽에서 수동을 지나 마전동까지는 유담리 북쪽에 있던 중공군 89사단이 남하하여 차단하였다. 즉 기존에 중공군 6개 사단과 전투하기도 버거운데 새롭게 2개 사단이 늘어난 것이다. 그래도 기존 6개 사단은 이미 지난 대공세 때 전투력이 아작이 난 상태여서 더 이상 공세를 가할 여력이 없었고, 진흥리 후방은 미 보병 3사단 구역이라 3사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진작 3사단에게 인수인계했어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도착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12월 7일에야 3사단 내 65보병연대 2대대, 독(Dog) 특수임무부대가 도착하여 방어했다.

탈출은 다시 한 번 해병 7연대가 선도하고, 5연대는 하갈우리를 지키고 있다가 후위를 방어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차량이 1천 대쯤 있었지만 동상 방지를 위해 운전병과 부상병을 제외하고 도보로 이동했다.

해병 7연대 2대대가 폭스힐의 영웅 F중대의 잔존 병력을 선두로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1대대는 도로 우측 능선을 따라 전진했다. 12월 2일부터 7연대에 배속된 육군 7사단 31연대 잔존 병력은 임시 대대를 만들어 도로 좌측 능선을 따라 전진했다. F중대는 착검 돌격까지 해대며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진격하였는데, 이번에도 문제는 육군이었다. 좌측 능선으로 이동하는 육군은 총 한 방 안 쏘고 순순히 항복하는 중공군 포로 수백 명을 잡을 정도로 이미 중공군의 전투 의지도 최악이었다. 그런데 육군의 전투 의지도 최악이라 포로 인계한 병사들이 그대로 눌러앉는 것은 물론, 남은 병력들도 중공군이 공격해오자 싸우지 않고 일제히 도로로 도망쳤다. 능선 위에서 부는 바람에 얼어버릴 것 같아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7연대 부연대장 프레데릭 다우세트 중령이 "거부하면 사격하겠다, 당장 능선 위로 올라가라"라고 했지만, 육군 최선임 지휘관인 베리 K. 핸더슨 육군 중령은 오후 늦게 도로로 내려와 임시 대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해병대는 밤새도록 취사병, 제과병, 운전병, 군악병까지 동원되어, 모든 해병은 소총을 잡고 일선에서 싸웠다. 이 상황에서도 자기 고유의 업무를 하는 건 군종과 영현등록반 정도였다. 이후 천주교계에서 거의 성인처럼 존경 받는 7연대 군종 신부 그리핀 중위도 이 날 부상 당해 후송되었다. 병사들 대부분은 행군이 너무 힘들어 대열이 멈출 때마다 쓰러져서, 발로 세게 걷어찰 때까지 일어나지 못한다. 중공군 포로들은 동상을 입은 채로 함께 걸어가고 있었고, 피난민들은 침투 우려 때문에 대열 밖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전투 첫 날인 11월 27일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던 7연대 3대대장 윌리엄 해리스 중령은 이 날 "다시는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다"고 중얼거리며 비상식량과 구급 약품을 가득 채운 배낭을 메고 골짜기 위쪽으로 사라졌다. 병사들이 수색을 하였지만 찾지 못하여, 그의 아버지 해병항공단장 피일드 해리스 소장에게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들어갔다.[146]

이 날 몰아치는 눈보라와 중공군의 공격 때문에, 주간에 단 5km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한편 후위를 담당하는 5연대는 아직도 하갈우리에서 전투 중이었다. 먼저 아침 8시 30분 이스트힐 확보를 위해 D·F중대가 공격하여 고지를 피로 물들이고, 포로 300명을 잡으며 고지를 탈환하였다. 이때 발생한 해병대 부상자 60명은 하갈우리에서 수송기로 후송된 마지막 환자였다.

이 날 오후 2시 40분 하갈우리 통신 중계 설비가 해체되었고, 이제는 스미스 장군이 머무는 고토리 무선중계소가 사단의 주 통신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 날 밤 6.25 전쟁에서 최초로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용어가 확실하게 등장했다. 5연대가 방어하는 하갈우리로 3시간에 걸쳐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대병력이었다. 해병대는 전차, 야포,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등 모든 화기로 방어하였다. B중대 오빌 맥멀린 중사는 M1 소총 8발로 중공군 8명을 사살하는 신기를 보여주었고, F중대장 우엘 피터스 대위는 백린탄을 다리에 맞아 살이 불타고 있고, 뼛속까지 태우고 있는데도 군의관에게 "군의관, 빨리 좀 할 수 없어요? 중대로 복귀해야 한다니까."라고 외칠 정도로 군인 정신이 충만하였다.

미 해병 제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해병들이 유담리 탈출을 성공한 것은, 중공군이 유리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는 대신, 굳이 포위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군은 후퇴할 때 국민당군이나 중공군처럼 산 넘어 도망가지 않고 차량을 타고 도로만 이동했기 때문에, 포위를 목적으로 산악 지역까지 병력을 배치할 필요는 없었다. 미군을 그동안 상대했던 국민당군처럼 생각한 중공군의 오판.

한편, 하갈우리 남쪽 평지에는 주민 3백호 1천여 명이 살고 있었다. 상당수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포기하고 미 해병대를 따라 피난을 선택하였다. 혹한의 추위 속에 먹을 걱정, 자는 걱정 따위는 아예 하지 않고 무작정 걸어갔다. 미 해병대는 이러한 피난민들이 부대에 섞이지 않도록 통제하며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하였고, 중공군은 수시로 그 틈바구니로 들어와 미 해병대를 공격하였으며, 미 해병대가 응사하면 중간에 죽어나가는 건 피난민들뿐이었다. 이 피난민들은 수많은 시신을 남기며 따라갔지만, 결국 미군이 지나간 후 바로 다리가 폭파되면서 흥남 철수까지 도착한 이는 알려진 바가 없다.

4.15. 12월 7일, 미 해병대 고토리 집결

아침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중공군 시체더미가 하갈우리 A중대의 진지에서부터 철도 옆의 보급품 야적장을 거쳐 이스트힐의 산기슭까지 널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1천 구 이상은 되었다. 이에 비해 방어의 주력이었던 5연대 1대대에만 한정하자면 전사자 10명, 부상자 43명이었다.

7연대가 도로를 따라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에 따라 이제 5연대도 하갈우리를 버리고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3대대가 다시 한 번 선봉에 섰다. 적의 저항은 거의 없었고 길가에는 중공군 시체들이 쌓여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부대들이 하갈우리를 빠져나가자, 유담리에 이어 이번에도 5연대 2대대가 후위에 후위를 담당하기 위해 홀로 남았다. 그 중에서도 E중대가 마지막으로 떠났는데, 이들은 후퇴하면서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해체하거나 불태웠다. 이때의 불길은 18km를 지나 고토리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이들이 따라 많은 피난민들도 따라가고 있었고, 중공군은 감히 미군을 공격하지 못하고 피난민들을 공격했는데 겁에 질린 피난민들이 미군 속으로 뛰어들자 미군들은 총검으로 위협하여 대열에서 나가 100m쯤 뒤를 따라오게 하였다.

그 날 밤 사단의 마지막 부대가 고토리에 도착하였다. 병력 1만 명과 차량 1천 대 이상이 하갈우리에서 오는 데 거의 40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일대에 퍼져있던 해병대 3개 연대가 집결한 것이다. 다만 1연대 1대대만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에 있는데, 그들은 진흥리에서 나와 황초령의 파괴된 교량을 감제하는 1081고지를 점령할 임무를 받았다.

하갈우리에는 무려 병력 1만 4천 명[147]이 몰려 있어 만약 중공군에게 포병이 있다면 한순간에 피바다가 펼쳐질 상황이었다. 물론 중공군에게 대포는 없었다. 그동안 새롭게 발생한 부상자를 후송하려고 마을 북쪽에 있는 길이가 짧은 정찰기용 활주로를 이용하였다. 여기에 이착륙할 수 있는 구식 해군 뇌격기를 통해 200명을 후송하였지만, 다음날 폭설이 내려 남은 부상자 400명은 지상에 대기하였다.

5·7연대는 탈진 상태였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단 하루 휴식도 없이 다음날 미명을 기해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강철제 M2 답교 부품 4개조 Set는 예정대로 공수투하 된다. 총 8개 중에서 4개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거나 떨어지면서 파괴되었는데, 운 좋게도 해병대가 확보한 남은 4개가 풀세트를 이루었다. 이는 그대로 찰스 워드 중위가 지휘하는 육군 58 답교중대에게 인계되면서, 처음으로 해병대가 육군에게 의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날 태평양지구 미 해병사령관 르무엘 쉐퍼드 중장이 비행기 편으로 현장 방문을 왔는데, 가는 길에 그동안 어디엔가 숨어있었던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도 함께 데려간다.

이날 밤 9시 37분 무렵, 구름이 걷히고 고토리 남서쪽 산 위에 굉장히 밝은 이 홀로 빛났다. 당시 고토리에 있던 여러 미군들에게 그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는지 여러 기록이나 증언에서 언급하고, 장진호 전투의 상징으로 삼아 '고토리의 별(Star of Koto-ri)'이라고 부른다. 2017년에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 소재 미 해병대 박물관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제막했는데, 석비 상단에도 고토리의 별을 표현한 상징물을 올려놓을 정도. 그렇다면 도대체 그 날 고토리에 뜬 별이 뭘까 궁금해질 텐데,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Texas State University)[148] 천체물리학 교수 도널드 올슨(Donald W. Olson)은 2018년 저서에서 바로 목성이었다고 밝혔다.[149][150]

4.16. 12월 8일 이후

고토리 탈출 작전은, 앞서 유담리/하갈우리 탈출 작전처럼 이번에도 7연대가 선도하는 것까지는 동일한데, 고토리 방어만은 새롭게 합류한 1연대 2·3대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동안 후위만 담당하던 5연대는 그 임무에서 해제되어 중간에서 이동할 수 있었다. 진흥리 1연대 1대대는 황초령까지 마중 나오기로 했다. 기존 1대대 담당 구역이던 진흥리 철도야적장은 미 육군 3사단 대대급 Dog 특수임무부대가 담당하기로 했다.

Dog 특수임무부대와 교대한 1대대는 새벽 2시에 이틀 치 식량을 갖고 황초령을 감제할 1081고지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중공군 60사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 날 전에 없었던 폭설이 몰아쳤는데, 덕분에 중공군 눈에 띄지 않고 10km를 행군하여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경사지를 올라가던 병사 1명이 발을 잘못 디뎌 인간 썰매처럼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면 전체 분대가 함께 쓸려 내려갔다는 점이다.

1081고지 전투에서 중공군과 교전하여 피해를 입었지만, A중대는 밤 사이에 무려 67명이 동상을 입었고, 그 중 7명이 발을 절단할 정도로 엄청난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세어 항공 지원에 힘입어 다음날 정오쯤 1081고지를 탈취했다.

고토리에서 출발한 최선봉 7연대 B중대는 이날 전투를 포함하여 거듭된 전투로 병력 180명 중 27명이 남았다. 진격이 순조롭지 않자 연대장은 7연대 3대대에게 예비대를 투입하라고 했지만, 3대대에는 완전편제 1천명 중 G중대 50명, H중대 40명, I중대 30명 등 120명이 남아있었을 뿐이었고 이미 전부 전방에 투입된 상태였다. 즉 예비대가 없었다. 7연대 2대대 D·E중대는 이미 12월 1일에 작살나 5연대에 3대대에 배속된 상태였다.

12월 9일 황초령 고개마루의 도수장을 점령하기 위해 "B중대는 1개 소대를 투입하라"고 명령 받았지만, "중대 총원 중 남은 병력은 반 개 소대밖에 안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래도 그냥 공격하라"라는 명령에 할 수 없이 전체의 절반인 14명을 C중대 일부 병력과 함께 투입하였다. 다행히 도수장에는 얼어 죽어가는 중공군 25명밖에 없었다. B중대는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뒤이어 항복하러 온 중공군 몇 명은 극도로 피곤하여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은 채로 대충 몸수색을 하고 접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도수장은 항복하러 온 비무장 중공군 다수에게 포위되었다.

어쨌든 황초령 고개마루의 끊어진 수문교 양쪽이 이로서 확보되었다. 이제 헌병대에게 경호를 받으며 육군 58 답교중대가 공수투하를 받은 트레드웨이 교량부품을 싣고 나타났다. 막 다리를 설치하려고 하는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준비한 부품은 7m였는데 끊어진 다리는 9m였던 것. 이에 중공군 포로를 시켜 철도 침목을 날라 돌출부에 목재 받침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모래주머니가 부족하여 다리 하중을 지탱할 밸러스트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사방에 깔려있는 중공군 시체를 다리 하부 구조에 집어넣어 해결하였다. 얼어붙은 시체들은 교량 무게를 충분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였다. 이로서 작업을 시작한 지 3시간 후인 오후 3시 30분 다리 사용이 가능해졌다. 이 다리로 미군 1만 4천명과 차량 1천400대가 넘어갈 수 있었고, 다수의 피난민들도 함께 했다. 워낙 중요한 다리라 미 육군 제50대공포 대대가 경비를 지원하였다.

다리가 완성되어 해병대가 막 건널 때 1연대 1대대의 1081고지 전투도 끝났다. 고지에는 중공군의 시신 500여 구가 널려있던 것이다. 덕분에 해병대는 1대대의 엄호 아래 순조롭게 철수하였다.

이번 후퇴 작전에도 어김 없이 육군은 측면 엄호를 포기하고 도로까지 내려와 행군종대에 끼어가는 추태를 보여줬다. 이에 5연대 3대대장 테플렛 중령은 "무슨 문제 있냐"는 육군 임시대 지휘자 앤더슨 중령에게 "너희들 같은 쓰레기 군인들이 우리 측면에 있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하마."라고 외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고토리 부대는 미 해병, 미 해군의무병, 미 육군, 영국 해병특공대 시신 117구를 매장하면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고토리는 폭파되었다. 1연대 수색중대원들이 전차 10대를 호위하며 최후방을 지켰다. 처음에는 피난민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일만 하다가 나중에는 중공군이 오자 승무원들은 전차를 버리고 튀었고, 수색중대원들만 결사적으로 싸우면서 마지막으로 황초령 답교를 건넜다.

그 시간이 12월 11일 오전 2시 30분이었다. 몇 시간 동안 홀로 남아있던 해병 공병대는 그제야 안심하고 답교를 폭파시켰다. 이 때 답교 폭파로 장진에서 빠져나오던 피난민들은 단 1명도 그곳을 나오지 못했다.[151]

해병대가 산악지대를 벗어나 막 진흥리에 도착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대포와 박격포 포탄 세례, 저격병의 사격이 쏟아졌다. 알고 보니 미 육군 3사단이었다. 이에 해병대의 육군 혐오는 극에 달했다. 이때의 육군 부대는 미3사단 65연대 2대대 Dog TF로 푸에르토리코인들이었다. 이들은 후위를 지키기 위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싸웠다.

그리고 산악 지대를 벗어나니 신기할 정도로 따뜻해졌다. 단점으로 얼어붙어있던 상처들이 녹아 피가 터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해병대원들은 행복해 하였다. 해병들의 머릿속은 함흥-흥남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겨울을 난 후 반격할 생각에 가득 차있었다. 후송되는 부상자들도 그때의 반격에 참가하기 위해 자기를 빠트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마침내 해병대원들은 유담리를 떠난 11월 27일부터 14일간 140km의 혈로를 뚫고 흥남까지 철수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같은 날 제10군단은 한반도 동북부에서 완전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현재 남은 병력은 총원 10만 5천 명에 전차 및 기타 차량 1만 7,500대였다. 병력은 중공군을 약간 상회하였고, 압도적인 기갑/항공 전력에 보급까지 빠방했지만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도쿄에 있는 맥아더가 싸움을 포기했다.[152]

미군은 이들을 후퇴시키고자 정규항모 4척, 경항모 1척, 호위항모 2척을 배치했다. 화력지원용으로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로켓함 3척이 배치되어 총합 2백 척이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최대 규모로 해상 철수 작전을 수행하였다.

미 1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사투를 벌릴 때, 그보다 북쪽에 있던 미 7보병사단과 한국군 1보병사단은 큰 방해를 받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미 1해병사단이 철수할 때는 미 3보병사단이 후위를 맞아 엄호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이미 사실상 괴멸한 상태라 쫓아오지 못해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다. 심지어 다음 달에 벌어지는 중공군 3차대공세에 동부전선 중공군 12개 사단 전체가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서부전선 중공군의 18개 사단만 참가한 3차 대공세에, UN군은 서울까지 빼앗기며 작살났는데[153] 만약 동부전선 중공군마저 3차 대공세에 참가했다면 UN군은 훨씬 위태로웠을 것이다.

해병대는 12월 15일 흥남 부두를 떠났고 한국군은 물론 피난민 10만 명과 동승하였다.[154] 전차의 경우 미 해병 1사단의 경우 M26 85대와 M4 12대를 가지고 장진호로 진격하였으나, 흥남 철수 때는 M26 69대와 M4 5대만 LST에 실려 철수 할 수 있었다. 이들 해병대는 12월 15일에서 17일까지 부산에 도착하였다.

12월 24일 흥남항에 남은 마지막 병력인 미 육군 제3사단 직할 제10공병전투대대와 미 해군 UDT 3팀 소속 UDT 1개 분대(8명)가 흥남 부두를 대폭발로 날려버려 황무지가 되었다. 흥남 철수 항목 참조.

그리고 미 보병 31연대와 32연대 1대대도 후방으로 이동하여 재편성 작업을 하였다. 10군단은 해체되어 버렸고, 해병1사단은 미8군 예비부대가 되었다. 이들은 다음해인 2월 18일에 가서야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9병단 중공군은 3월에서야 전선에 복귀하게 된다.

5. 결과

장진호 전투는 한중 국경을 향해 북으로 진군하던 유엔군과, 국경을 넘어 남으로 진군해온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이 승리함으로써 UN군이 38선 이남으로 완전히 철수했다.

주어진 조건과 누가 더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생각하면, 2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3배에 가까운 피해를 안겨준 연합군이 승리했다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영문 위키백과에는 전투의 결과를 '중공군의 전략적 승리, 연합군의 전술적 승리'라고 기재했다.

하지만 전쟁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적 수단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UN군의 목적은 한중 국경을 향해 진격해 나가는 것이었고, 중공군의 목적은 UN군의 진격을 저지해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온 전선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설령 전투의 교환비가 어떻든 간에 목적을 쟁취한 쪽은 연합군이 아니라 중공군 쪽이다. 막말로 K/D 비율이 높은 쪽이 승리하는 게 전쟁이라면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 되고 베트남 전쟁북베트남이 패배한 전쟁이 된다. 그러므로 애써 중공군의 승전을 깎아내리는 것보다 UN군 사령부의 전략적 실책에 주목하는 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중요하다.

미 육군 공간사인 『밀물과 썰물 Ebb and Flow』에 첨부된 미 육군 제10군단의 인원손실표에 따르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0일까지 미 해병대 제1사단은 1만 5천 명 중 총 2621명(전사 393명, 부상 2152명, 행방불명 76명)의 손실이 기록되었고,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은 총 2760명(전사 70명, 부상 185명, 행방불명 2505명), 한국 육군 수도사단은 총 778명(전사 126명, 부상 318명, 행방불명 334명) 한국 육군 제3사단은 총 148명(전사 15명, 부상 127명, 행방불명 6명)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총 93명(전사 13명, 부상 80명, 행방불명 0명)의 손실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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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에 묻힌 제1사단 전사자들. # 출처.

다만 '미 10군단을 함경도에서 밀어낸다'는 최소한의 목표가 달성됐다고 해서 중공군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다. 미 제1해병사단을 상대로 야전군급 제대인 9병단 전체를 동원하여 사방에서 포위공격을 가한 데서 알 수 있듯, 중공군은 처음부터 제1해병사단의 섬멸을 우선적 작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미 해병대는 포위망을 구축한 중공군 10개 사단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함흥으로 돌파하여 빠져나감으로써 중공군은 작전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당시 미군은 퇴각 중이었기 때문에 교전한 중공군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제1해병사단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사단이 7개 중공군 사단에 괴멸적 타격을 입혔고, 다른 3개 사단에 대해서도 부분적 타격을 입혔습니다."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미 해병대 사령관에게 보고하였다.

중공군 제9병단이 입은 피해는 당초 10월 15일-12월 15일 중에 전사 2만 5천, 부상 1만 2500명 정도로 파악하였다.[155] 중국은 외부에 공개하기를 꺼려 공식 기록을 기밀로 묶고 제한된 연구자에게만 열람을 허용하기 때문에,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이 피해를 얼마나 입었는지도 간접적 추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여러 경로로 중국 측 데이터들이 조금씩 공개되며 이전보다 상세한 숫자들이 알려졌다. 이후의 자료들에서 인용하는 제9병단의 피해 규모는 전투손실이 사상자 1만 9002명, 대부분 혹한 속 동상이 원인이었던 비전투손실이 사망자 약 4천 명 포함 2만 8954명에 달해 전체 사상자 수는 약 4만 8천 명이다. 중국의 공식 기록은 실제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실제 피해는 분명 이보다 더 컸을 것이다.[156] 이는 펑더화이가 12월 8일에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문에서 9병단에만 6만 명의 보충을 요구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제9병단 예하 제20·27·26군은 너무 피해가 큰 나머지, 출병 이전에 추가로 받았던 제89·94·88사단을 모두 해체하여 다른 사단을 재건하는데 써야 했다. 이로 인해 다시 3개 사단 체제로 환원된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이 전투에 거의 전 전투력을 쏟아부었으나, '미 해병대를 완전히 섬멸한다.'는 작전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미 해병대와의 전투에서 너무 막심한 피해를 입어 미군 제10군단의 다른 사단들이 안전하게 철수하는 것도 눈 뜨고 바라만 보아야 했다.[157] 중공군은 4만 8천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강요 당한 것에 더해, 부족한 보급 속에서 강추위에 시달린 나머지 남은 병력들도 탈진하여 도저히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제10군단 전체가 유유히 흥남 철수를 완료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관해야만 했다.

중공군의 보급 상황은 매우 비참했다. 사흘간 먹은 것이라고는 얼어붙은 날감자 2개였던 적도 있었다. 수문교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파견된 중공군이 극심한 추위에 얼어붙어서 항복하려고 총을 버리려고 해도 총이 얼어붙어서 손에서 안 떨어진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열악한 보급으로 전투는커녕 움직이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요지의 중요성과 방어진지의 견고함에 비해 의외로 미군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쑹스룬 장군은 직접 "향후 보급 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말했다고 한다.[158] 이런 이유로 인해 해병사단의 사단본부[159]가 있던 하갈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화력이 1선 병사에게 집중되고, 방어선 내부에 있던 보급품 집적소의 연료나 탄약에는 별로 사격을 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급은 적에게서 구한다'는 중공군의 기본 보급 방침도 있었고, 만일 연료나 탄약에 사격해서 불바다를 만들면 당장 이길 수는 있지만 험악한 산골짜기에서 물자가 없는 미군 포로와 중공군이 함께 사이 좋게 굶주리고 얼어죽을지 모른다는 우려의 합작품이다.

흥남 철수가 마무리되며 큰 고비를 넘기자, 중국군 수뇌부는 제9병단의 피해 상황을 보고 받은 뒤 "아예 병단 전체가 다시 동북(만주) 지방으로 돌아와 재편성 및 보급을 받으라." 하고 권고했다. 그러나 쑹스룬과 예하 지휘관들은 '강추위를 뚫고 다시 북으로 이동하는 것도 버겁다.'고 판단하여 "그냥 현 위치에서 재정비를 하겠다." 하고 회신했다. 한편으로는 중국으로 돌아갈 경우, 문책을 받고 다시 참전하지 못할 가능성도 우려했다고 한다. 이로써 제9병단은 북한 동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고 후방에 머물렀다. 이렇게 제9병단 병력이 최전선에서 이탈하자 중공군의 차기 작전에도 큰 지장이 생겼다. 전세가 한창 최고조에 달했던 1.4 후퇴 등 주요한 작전에는 아예 빠졌고, 1951년 3월에야 겨우 재편성을 마치고 전선으로 복귀했다. 만약 제9병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전력을 온존한 채 서부의 제13병단과 함께 좌우 원투 펀치를 날렸으면, 과연 UN군이 어디까지 후퇴했을지 알 수 없다.

1950년 12월 23일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후임으로 임명된 육군 참모차장 매튜 리지웨이 중장은 26일 한국으로 도착하자마자 알몬드 제10군단장을 불러 '제10군단이 제8군에 예속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160] 잘못된 지휘 체계를 이제야 바로잡은 것이다.

이후 알몬드는 군단장으로 반 년 더 유임되었고, 유엔군의 재반격 시기에 북한에서 철수를 최소의 인적 및 물적 손실만으로 성공 시킨 공로[161]로 중장 진급에 성공했으나,[162] 그는 1951년 상반기에 있었던 굵직한 전역, 전투에서 제10군단장으로 지휘했고, 전쟁이 진지전으로 변해가던 1951년 7월 전출되어 미 본토의 육군대학 학장으로 임명된 뒤 1953년 전역했다. 사망은 1979년.

장진호 전투를 훌륭하게 수행한 스미스 소장은 1951년 미 본토에 있는 캠프 펜들턴 해병기지 사령관을 지내고 1953년 7월에 중장으로 진급, 대서양 함대 해병대(FMF Atlantic) 사령관을 거쳐, 1955년 9월 1일 대장 진급 후 예편하였고 1977년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중장은 한국으로 부임한 지 3일째인 12월 19일, 제7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을 해임했다. 7사단은 맥아더 직할이라 이전 같으면 어림 없는 일이었다. 이때 2보병사단장 로버트 매클루어, 24보병사단장 존 처치, 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도 함께 해임된다. 다들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와 무질서한 퇴각의 장본인이었다.

정작 졸렬한 지휘로 대패를 당하고 무질서한 후퇴 지시를 내린 주모자 맥아더는 이 패배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력 및 한국전 개입 가능성에 대한 오판, 군우리에서의 참패, 서울을 빼앗기고 평택까지 후퇴하는 등 여러 실책으로 맥아더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맥아더는 "즉각 중국 연안을 해상 봉쇄하고 중국 산업 시설을 폭격이나 함포 사격으로 파괴하며, 장개석 군을 중국 본토로 상륙시킬 것"을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1951년 1월 28일 맥아더는 수원에서 리지웨이 장군을 만나면서도 기자들 앞에서 확전 발언을 일삼았으며,[163] 거듭된 언론 플레이 자제령을 무시하였다. 이어 3월 24일에는 워싱턴으로부터 받은 비밀 전문을 언론에 알렸으며, 4월 5일 맥아더가 쓴 '장개석중화민국군을 투입하여 확전해야 한다.'는 서한이 미 하원에서 공개되자,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더 이상 참지 않고 회의를 소집해 마셜과 브래들리, 콜린스 등 최고 책임자의 의견을 듣고 나서 4월 11일 그를 UN군 사령관 자리에서 파면하였다.

이에 대한 트루먼이 사적으로 밝힌 견해는 다음 2가지가 있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이자 극동지구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지. 자신이 미군의 총사령관인 미국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일개 장군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는 멍청한 개자식이었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그를 해고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고했다.
한편 중공군 수뇌부는 장진호에서 보급 문제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경험하고 더 이상 전쟁을 끌어봤자 미국을 이기기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아, "보급 문제도 그렇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도 많고, 미군의 북한 영토에서 몰아내면서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도 채웠으니 이쯤해서 전쟁을 끝내자"는 결론을 내리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러한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미국을 종이호랑이라 판단, 현지 사령관들이 부정적인 의견을 올림에도 불구하고 "남조선까지 해방시키겠다"면서 대대적인 남진을 명령했다. 펑더화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병력을 쥐어짰고 혼란에 빠진 서부전선 UN군의 전열 정비를 위해 신임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결정으로 1.4 후퇴를 단행해 그렇게 중공군은 38선을 넘어 서울을 재점령하고 북위 37도선 평택-제천-삼척 선까지 진격[164]했다. 하지만 펑더화이의 능력으로도 이미 한계에 직면한 보급 상황 때문에 중공군은 3차 공세를 1달 이상 늦출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가볍게 생각했던 보급 문제가 중공군의 발목을 잡았고 그 무렵 리지웨이가 유엔군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공군의 막대한 인력에 맞서 유엔군의 화력을 극대화하는 화해(火海)전술을 선보이자 다시 38선을 넘어 패주했다. 이런데도 마오쩌둥은 남조선 적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1951년 봄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 춘계공세를 감행했으나, 유엔군의 저항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양자 모두 '더 이상 상대를 섬멸하고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휴전 협상으로 이어졌다.

6. 승패 여부

객관적으로 결과만 본다면 중공군이 승리한 전투다. 다만 인명 피해가 워낙 막심해 포위 섬멸이라는 전략적 목표의 완전 달성에는 실패했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측에선 '중공군의 전략적 승리는 중공군은 미군의 포위 섬멸을 목표로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승리는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장진에서의 철수는 중부전선에 큰 돌파구가 뚫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북진하던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UN군은 전면적인 철수를 할 수밖에 없어 평양시를 도로 내주었고, 원산시도 점령되었다. 원산이 중공군에 점령 당해 퇴로가 끊겨 함경도에 고립되었던 동부전선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은 흥남 철수작전으로 성공적으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결국 UN군은 37도선까지 후퇴하여 다시 한 번 서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UN군의 전략적 목표는 영구히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165] 공산 진영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속절없이 밀리던 북한 지역을 대부분 되찾았다. 이런 전체적 결과를 보면 UN군의 패배가 자명한 것이다. 물론 수적 열세 상황에서 잘 싸웠고, 패전이 패주로 마무리되지 않게 성공적인 철수 작전을 완수한 미군 장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긴 어렵다.

미군의 전술적 승리[166]는 숫자상 병력 손실 면에서도 미군이 우세했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중공군 제9병단이 서부전선에 증원할 병력을 소진시켜서 빠르게 전선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중공군 제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의 피해가 너무 큰 결과 전선에서 이탈했다. 만약 제9병단이 별 피해 없이 장진군을 돌파했다면 제13병단과 대치 중이던 서부전선 미 8군의 퇴로를 차단했을 것이고, 미 8군은 포위섬멸되거나 흥남 철수작전처럼 바다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 해병 1사단이 분전한 덕분에 미 8군은 서부전선에서 무사히 철수했다.

일선의 병사들이 잘 싸워 이긴 전투를 맥아더의 오판이 패전으로 바꿔버렸다 볼 수도 있다. 미군은 미군대로 자기들이 졌다고 생각했지만, 미군과 싸운 중국군은 삭풍한설이 몰아치는 산 속에서 보급도 없이 밥도 못 먹고 공습 당하느라 군대가 녹아내려 이쪽 역시 스스로 졌다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기에 미 10군단의 뻘짓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미 해병대가 동부전선의 중공군 전체와 좁은 전선에서 1:4의 병력 열세를 버티며 싸울 때 대체 알몬드와 맥아더는 뭐하길래 미 10군단의 4개 사단을 후방에서 놀고만 있게 했는지는 의문. 중공군이 몽땅 장진호에 몰려있을 때, 미 육군은 대체 누굴 보고 놀라서 흥남까지 빤스런한 건지도 의문이다. 사실 미 해병대는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당연히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겨울을 보낸 후 반격을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피해가 크긴 했지만 대비를 잘 해둔 덕에 주전력의 손실도 면했고 9병단의 피해가 훨씬 커서 실질적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흥남에서 버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맥아더-알몬드의 결정은 전면적인 철수였다. 더 많은 병력, 더 많은 보급, 압도적인 화력과 공군, 해군을 보유했는데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적군의 정보 자체에 깜깜한 채 서부전선의 패퇴에 크게 놀라 판단력도 잃고 싸운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하였다.

7. 미군 역사상 최악의 동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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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얼어 죽은 미군 시신
파일:CHANGJIN-RESERVOIR.gif
한반도 12월 평균 기온[168]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철수하는 미 해병대가 촬영한 기록 영상. 극한의 추위에 시달리는 병사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한참 유담리를 향해 진격하던 11월 초에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함경남도 장진군에 위치한 장진호 주변의 위도는 로마보다도 낮은 북위 40°23', 고도는 평균 1,200m지만 이 일대는 한반도에서 삼수갑산 일대를 제외하면 가장 추운 지역 중 하나로, 12월 평균 기온은 -11.6도 정도, 2016년 기준 기상청 자료를 보면 장진군 12월 아침 최저 기온은 -17.6도, 한낮 최고 기온은 -3도의[169] 한랭지대다. 12월 평균 풍속은 1.2m/s로 이 정도의 풍속이면 체감온도는 약 3, 4도 더 내려간다. 기상청 체감온도 측정 기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스크바의 강추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심심하면 아침 최저 기온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닥치기 시작했고, 가장 추운 날에는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45도를 기록한 적도 있었고,[170] 결국 그 이후로 모든 게 얼어붙었다. 미처 방한복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미군에서는 보급의 힘으로 나중에라도 어찌어찌 옷을 껴입더라도 동상으로 실려가는 환자가 속출했다. 당연히 미군보다 보급이 열악한 중공군은 사정이 훨씬 나빴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었다. 추위를 과장하는 무용담, 자부심이 있는 인터넷 여론 때문에 간혹 중공군은 그래도 전투에서 사망한 경우가 많을 정도로 전투의 치열함이 동상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가려지는 면도 있지만, 동상 환자를 따로 집계할 정도로 추위가 문제가 있던 건 맞다. # 거의 오이먀콘과 대등한 추위였으며 지구상에서 이 당시의 여기보다 더 추운 곳이라고는 극한지로 악명높은 남극 뿐이었다.

추위로 따지자면 장진호 전투는 모스크바 전투[171] 스탈린그라드 전투보다[172] 더 추웠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영하 30도 이하는 전투 기간 내내 딱 1번 기록[173]되었다.

스탈린그라드 기온 측정 역사상 최저 기온은 영하 32.6도이며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5.8도인 반면, 장진군은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15.5도이고 전투가 일어난 12월 평균 기온도 영하 11.6도다. 현재 휴전선 이남에서 가장 추운 축에 속하는 철원군의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5.5도, 대관령이 영하 6.9도 정도다.

세계의 전쟁 역사에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기후로 고통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라서, 몽골베트남 정도의 더위에 적응하지 못했고[174], 아프리카의 더위를 서구 열강도 19세기까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의 정글은 한반도에서 겪을 수 없던 수준이라서 미군이 또 다시 고생을 하고는 했다. 우수한 무기의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아이티가 독립한 것도 흑인들이 더위는 잘 견뎌서였다.

산더미처럼 시체가 쌓여 있었어도 시체가 금세 얼어붙어 냄새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고작 100여 일 전까지만 해도 35도가 넘는 끈적거리고 극심한 폭염[175]이 기승을 부려, 낙동강 전선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 방어진지를 인수해야 하는 미군이 '시체 다 치우고 가라, 아님 인수 안 하겠다.'고 항의한 건 유명한 일화다.

진지 구축을 하면 땀 때문에 옷이 얼어붙을 지경이었고, 이럴 경우 땀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그대로 얼어붙기 때문에 옷을 벗는 것보다 더 많은 체온을 손실할 우려가 있다. 이런 일을 막고자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벗고 작업해야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한 번에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한 겹씩 옷을 벗은 후, 서서히 일의 강도를 줄이면서 다시 한 겹씩 옷을 입는 아주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게다가 땅이 단단하게 얼어붙었기 때문에 일반 야전삽으로는 땅을 긁기만 해도 쉽게 부러졌고, 중공군에게서 노획한 곡괭이가 그나마 제대로 땅을 팔 수 있는 장비였다고 한다. 만일 땅에 바위가 많거나 단단한 지형이라면 깡통에 폭약을 넣고 한 방향으로 터뜨리는 급조 폭탄만이 유일하게 땅을 팔 수 있는 도구였다.

추위로 인해 얼어붙은 땅바닥은 공중 보급에 악영향을 주었다. 통상적인 낙하산에 보급 물자를 묶어서 투하하면 적어도 40%는 땅바닥과 격돌해서 완전히 파손되었다. 덕분에 공중보급 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태인 물자가 사방에 흩뿌려져서 회수하기 힘들다는 점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실제로 제대로 부대에 전달되는 양은 25% 정도였다고 한다.

추위는 사람뿐만이 아니고 장비에도 위력을 발휘했다. 모든 총기는 약실 내 장약의 폭발압과 대기압과의 상대적 압력차로 작동하며, 자동화기는 그 압력차를 이용해 탄피 배출과 차탄 장전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날씨가 추워지면 당연히 기압이 높아지는데, 당시 장진호는 너무 추운 나머지 작동 가스압이 약한 편인 M1 카빈부터 탄피 배출 및 차탄 장전 장치가 그대로 마비되었고, 백병전 때는 쉽게 개머리판이 박살나서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또한 발사압도 많이 약해진 편이었기에, 극한의 추위 속에선 발사된 총탄의 운동 에너지마저 심각하게 감소하여 '위력과 탄도가 엉망이 된 카빈으로는 중공군 방한복도 뚫지 못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장비 신뢰성이 떨어졌고, 선임 병사들은 후임들에게 "카빈은 그저 가지고 다니는 것일 뿐, 마지막을 위한 무기이다. 굳이 쏘겠다면 무조건 머리를 겨눠라."라고 가르쳤다. 기관단총은 말할 것도 없어서, 죄다 탄창 끼운 새총으로 변해버렸다. 그나마 태생적으로 한 발 한 발의 위력이 강한 개런드는 추위에 잘 견뎌서 가능하면 다들 카빈은 버리고 개런드를 구하려고 애썼다. 그 중에도 저격수용으로 개조된 개런드는 손이 얼어 방아쇠를 당기기가 어려워지자, 손가락 걸이를 누르면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되기도 했다. 카빈을 버리고 중공군의 모신나강Kar98k노획해서 쓴 병사들도 있었는데, 개런드와 마찬가지의 대구경에 볼트액션 방식이라 작동 불량의 여지가 적어서 꽤나 쓸 만했다고 한다.[176] 총기가 대부분 화력이 약해져서 명색이 탄약인데 주먹으로 패는 수준밖에 위력을 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모든 차량, 전차는 최소한 2시간에 한 번씩 엔진을 작동시켜서 데워주지 않으면 냉각수에 배터리까지 모조리 얼어서 터져버리고, 수랭식 기관총도 냉각수를 넣으면 얼어서 터지므로 아예 냉각수를 넣지 못했는데, 냉각수 없이 연사해도 과열이 되지 않고 금방 방열이 될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고 한다. 무더운 아열대지방에서 벌어진 베트남 전쟁을 다룬 위 워 솔저스를 보면 과열된 박격포에 소변을 누어 식히는 장면이 있는데, 장진호에선 그 반대로 수랭식 기관총 냉각수가 얼자 소변을 누어 해동시키려고 했지만 잘 안 통했다.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 소변을 누어 덥혀봤자 금방 다시 소변채로 얼어붙을 것이 뻔했다.

꽁꽁 얼어붙은 지면 위에 어거지로 방열한 박격포는 쏘기만 하면 포판이 박살나기 일쑤고, 야포도 사거리가 감소한 데다 신관이 얼어붙어서 불발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 수류탄도 신관이 얼어서 불발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추운 날씨는 식사 시간마저 방해했다. 씨레이션 깡통을 따뜻하게 먹으려고 모닥불에서 가열했더니 바닥은 다 타고 위는 여전히 얼어 있었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었다. 이걸 억지로 먹은 해병들은 심각한 장염설사에 걸렸다. 대표적인 것이 추수감사절 기념으로 나온 칠면조로, 취사장에서 칠면조 고기에 눈을 쏟아 붓고 가열하였는데 이거 먹고 죄다 설사해서 상당수 인원이 죽다 살았다. 이 때문에 씨레이션에서 동결된 고기 스튜, 콩 요리, 육류 등은 가능한 한 안 먹었다. 대신 캔디, 비스킷, 크래커 등 마른 것들이 인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전투식량에 포함된 투시 롤 캔디는 장진호 전역의 병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전투 기간 내내 미군 병사들의 열량 공급을 책임졌다. 투시 롤이 기억에 얼마나 각별히 남았던지, 이후 장진호 참전 용사들의 후일담에서 투시 롤은 거의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회자된다. PX에 있던 물자를 소각하려다가 그 대부분이 캔디나 과자였기 때문에 장병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마른 음식은 단백질이 없는 탄수화물 위주였기 때문에, 이것만 먹고 버티던 미군은 체중과 근육량이 미친 듯한 속도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혹한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이 열량을 끝없이 소모하는 데다, 육식 위주 식생활로 공급되던 단백질이 고갈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땅콩버터를 찍어서 먹였다는 증언도 있다. #

물론 생리 현상도 추위는 간과하지 않았다. 야외에서 설사를 한 번이라도 하면 항문까지 동상에 걸리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제대로 데우지 못한 전투식량을 먹고 탈이 나거나 이질[177] 같은 병이 있는 사람은 지옥 중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이런 혹한 때문에 부상자를 잠시만 눈 위에 두어도 바로 동사했고, 병사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이렇게 천하의 미군도 오만 고생을 했던 만큼, 미군보다 물자가 부실한 중공군의 상태는 미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중공군이 공식 기록에서 피해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장진호 전투에서의 혹독한 추위와 부실한 보급으로 인한 참상은 다 가리지 못할 정도다. 예를 들어 중국 군사과학원에서 펴낸 『항미원조전쟁사』에 나온 바에 의하면 신흥리 전투에 참가한 제27군 제80사단 제240연대 제5중대는 야간 돌격 과정에서 미군의 격렬한 제압사격 때문에 눈밭 위에 그대로 엎드렸는데, 어째서인지 미군의 제압 사격이 끝난 후에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대원 모두가 그대로 얼어 죽어버린 것이다. 또한 12월 8일 밤에 기온이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지자, 미군의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고지 진지에 포진한 병사들 상당수가 얼어 죽었다.

전장에서 멍 때리고 있다가 총 맞거나, 그대로 포로로 잡히거나, 집단 투항하기도 하는 등 양쪽 군대의 사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혈액모르핀도 얼어붙어서 의무병이 모르핀 앰플을 계속 입 안에 넣고, 수혈팩은 겨드랑이에 끼고 체온으로 데워서 얼지 않도록 조치해야 했다. 이 강추위에 대해 <브레이크 아웃>이란 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서적에서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소개했다. 부상자들에게 감아놓은 붕대에 맺힌 피가 얼어붙어서 지혈 효과를 줬다는 것. 인터뷰 대상자가 "하여간 지혈은 정말 잘 됐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붕대를 교체하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바로 동상이며 부상자의 상처 부위를 보기 위해 옷을 자르면 역시 동상이기 때문에 붕대 교체 대신 침낭에 쑤셔 넣는 것이 구호소에서 했던 치료 방식이었다.

이 전투에서 부상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H-19 헬리콥터가 크게 활약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SCR-300 통신기와 610-야전전화기 배터리가 강추위로 인해 급속히 소진되어 부대들 간에 통신이나 포병과 연락하여 포격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육군 맥클린 연대장이 사실은 예하 보병대대가 함흥에 있었지만 연락 두절되어 그 사실을 모르고 근처까지 온 줄로 알고 달려가다가 중공군에게 잡힌 것도 이런 이유. 덕동고개의 영웅인 해병대 F중대도 배터리 소모로 통신이 두절되어 개고생했다. 추위가 배터리 전자를 생산하는 화학 반응을 방해했기 때문. 현대의 기술로도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해서 지금의 스마트폰 역시 겨울에 더 배터리가 빨리 닳는다.

요약하자면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위가 장진호 전투의 진정한 지배자이자 미군과 중공군을 막론하고 당시 병사들이 진짜로 싸워야 할 상대였다.

장진호 전투는 2024년 현재까지도 미군이 혹한기 시기에 제대로 싸워본 거의 유일한 경험이다.[178]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그나마 탈레반과의 게릴라전을 영하 40도도 종종 기록할 정도로 더 춥고, 장진호와 달리 산소마저 부족한 환경에서 치르기는 한 정도다. #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는 미군의 극한지 전투 교리에 실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장진호 전투의 동장군을 교훈으로 주한미군알래스카 주둔군이 입는 CTAPS 방한복을 보급받는다고 한다. 미 해병대도 핀란드가 2022년에 NATO 가입 신청서를 내자 원정군을 보내서 혹한기 훈련을 하는 등 # 여전히 장진호 전투의 영향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179]

8. 뒷이야기


*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편찬한 전사 기록을 보면, 이때의 경험으로 다음 해 겨울 땐 한파를 대비했는데 문제는 그 해 겨울에는 강추위와 폭설 대신 겨울 장마가 억수로 내렸던 탓에 미군들이 한반도 날씨에 학을 뗐다고.

9. 매체

9.1. 도서

발행년도 순으로 기재.

9.2. 영상물

9.3. 게임

1. 이터널시티 1 온라인에서 팀 컨텐츠로 한국 전쟁 레이드 중 장진호 전투가 있다. 고증을 잘해 두었다.


[1] 장진군의 일본식 발음. 전투 당시 일본어로 된 지도를 사용하여 미국을 비롯한 영미권 국가에선 '장진호 전투'보다 '초신 전투'로 더욱 알려져있다.[2] 사진에 보이는 대부분의 검은 점들이 전부 중공군이다.[3] 미 육군 제10군단 군단장.[4] 미 해병대 제1사단 사단장.[5] 미 육군 제7보병사단 사단장.[6] 영국 왕립 제41해병 독립특공대 대대장.[7] 중국 인민지원군 제9병단 병단장.[8] 제20군 군장.[9] 제27군 군장.[10] 제26군 군장.[11] 제58사단 사단장.[12] 제59사단 사단장.[13] 제60사단 사단장.[14] 제89사단 사단장.[15] 제79사단 사단장.[16] 제80사단 사단장.[17] 제81사단 사단장.[18] 제94사단 사단장.[19] 제76사단 사단장.[20] 제77사단 사단장.[21] 비전투 손실의 절대다수가 동상자였다.[22] 이는 최근 중국 문헌들이 채택하고 있는 공식 수치이며, 비공식 수치는 6만여 명 내외이다. 당시 국제연합군은 중국군이 전투손실 2만 9,800여 명에 비전투손실 2만여 명 이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했다.[23]북한 치하에서 설정한 행정구역상으로는 장진군과 영광군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이 함주군의 상기천면과 하기천면 등을 떼서 별개 군으로 분리시켰기 때문이다.[24] 물론 미중 양국은 의화단 전쟁을 통해 먼저 충돌한 역사가 있긴 하지만, 의화단 전쟁의 경우 다국적 연합군의 무장 단체 진압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두 나라 간의 제대로 된 전쟁이라 보기 어렵다. 또한 장진호 전투 이전에도 운산군 등 한반도 북부에서 이미 싸웠으나, 이때는 중공군이 산에 매복하여 후방을 차단한 후 일시에 공격하는 구대전법에 크게 걸려 미군은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25] 'Chosin'은 '장진(長津)'의 일본어식 발음(ちょうしん: Chōsin)이다. 당시 미군일제강점기일본이 작성한 지도를 영어로 번역해 작전을 짰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인들은 한국 지명이 일본식으로 알려진 것에 거부감을 가졌지만 당시 해방 한국이 전국을 지도화할 여력도 없었고, 참전 당사자들도 'Chosin'이라 알고 있었고 그렇게 보도가 되어 워낙 알려졌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 전투의 이름에 대해서는 'Chosin'으로 쓰였고 21세기 현재도 'Chosin' 쪽이 인지도가 더 높다. 다만 최근에는 한국어식으로 읽은 'Changjin'이나 'Jangjin'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이며,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방미 당시 장진호 전투 위령비 헌화식 중 미합중국 해병대 사령관 기념사에서 'Jangjin'이라고 읽었다.[26] 1950.11~12월 기간 동안 미 육군 2사단의 인명손실은 전사상자 4,940명을 포함해 비전투손실 3,722명까지 총 손실 8천여 명이었고, 같은 기간 미합중국 해병대 제1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상자 4,395명에 비전투 손실 7,338명까지 총 인명손실 1만 5천여 명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의 피해는 장기적인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며 재편성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군우리의 2사단이 중장비를 모두 버리고 몸만 탈출한 데 비해 장진호의 해병 1사단은 중장비를 거의 다 가지고 탈출했다는 차이가 있고, 교전비에 있어서도 군우리에서는 일방적인 피해를 입은 데 반해, 장진호에서는 아군 측 피해보다 적군 측 피해가 훨씬 더 많아서 전술적으로는 아군이 승리했다는 차이가 있다.[27] 나무위키, 위키백과에 단순히 한국 행정구역을 북한에 대입시키려다 보니 '인민위원회 소재지'라는 북한 연구자와 북한 현지에서 안 쓰는 표현이 많이 쓰였다. 인민위원회가 애시당초에 '시청', '군청'이 아닌데 명목상 행정 중심이라는 표현을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군소재지', 북한 연구자는 가끔 '군청 소재지'라고도 한다.[28]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 지형적으로 장진호에서 남쪽으로는 빠져나갈 방법이 저 길밖에 없었다. [age(1950-12-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당연히 철로도 저기 놓일 수밖에 없던 것이고. 당시 날씨에 산등성이에 올랐다가는 아마도 싸우기도 전에 얼어 죽었을 것이다.[29] 군단장이면 중장급을 임명해야 하지만, 어차피 바지사장이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자신의 심복인 알몬드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하였다. 동경사령부에서 맥아더 원수의 지휘를 받기 때문에 예하 소장 사단장들이 소장 군단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알몬드 소장의 직속 부하인 10군단 루프너 참모장도 소장이다. 방면군 사령관, 군사령관, 사단장 전원이 중장 계급으로 통일되는 일본군과 닮았다.[30] 1군단(미 24보병사단, 국군 1사단), 9군단(미 2보병사단, 미 25보병사단, 미 1기병사단, 국군 11사단), 미 187 공수연대, 국군 2군단(6사단, 7사단, 8사단), 국군 3군단(2사단, 5사단, 9사단), 영국군 제 27·29 여단, 캐나다군 여단, 터키군 여단. 이때 한국군 2군단은 미 8군에 소속되어 미 8군의 맨 우측 전선에 배정되었다.[31] 그뿐만 아니라 맥아더의 사령부엔 태평양 전쟁 시절부터 맥아더를 보좌했던 장성들(진정한 Yes맨들)이 많았다. 필리핀 함락 당시에는 '바탄 반도의 갱'들이라고 불렸다.[32] 미국의 비상근예비역은 우리나라와 달리 현역 복무를 하지 않고 민간에서 바로 비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하며, 연간 30일씩 10년을 복무하고 복무 기간 중 24개월까지 전시동원 소집이 될 수 있다. 5년 전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소집된 비상근예비역의 50%는 실전 경험이 있었고, 실전 경험이 있는 비상근예비역 위주로 파병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파병된 비상근예비역의 77%는 2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었다.[33] 다만 장진호 전투 기간에는 미 육군 병력과 함께 철수했기 때문에, 미 육군에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를 미 해병대가 직접 작전 통제한 경우는 있었다.[34] 다만 어떻게 계산한 것인지는 이해는 안 가지만,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홍쉐즈가 쓴 《항미원조전쟁을 회억하며》를 보면 '미군은 전투병 1명을 보급병 7명이 지원하지만, 중공군은 보급병 1명이 전투병 25명을 지원한다'고 되어 있다. 계산이야 어쨌든 중공군은 죄다 알보병이라는 것을 자조하는 것이다. 반면에 미군은 어마어마한 기갑, 포병, 보급, 운전병이 있었으니 일선의 소총수는 중공군보다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일선의 미군 소총수들이 중공군을 대군으로 느낀 것은 충분히 이해 가는 부분이다.[35] A중대 유담리 남쪽 방어, C중대 1소대 그 아래 위치한 연대통합지휘소 방어, B중대 그 아래 방어, 5km 남쪽으로 내려가 감편, C중대 일명 '터키힐' 방어.[36] D, E중대만 먼저 도착하여 임시로 1대대장이 지휘하게 된다. 본부 중대와 화기중대는 아직 하갈우리까지밖에 못 왔고, 이후 F중대는 주 보급로를 방어하기 위해 유담리 남쪽 12km 지점에 있는 신흥리 남쪽 덕동고개, 일명 '폭스힐'을 방어하였다.[37] 해병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소장의 아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고생했는데, 이 때문인지 27일 정신이상 행동을 하였다. 그 날 밤 사단 최북단에 있는 3대대 H중대부터 뚫렸고 너무 쉽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전투 후반 실종되었다. 이 전투 당시 만 32세였고 슬하에는 2녀가 있었다. #[38] 2개 중대만 하갈우리에 있었고 G중대는 고토리 주둔.[39] 전투 막바지에는 보병 부대의 병력 손실이 극심해서, 각 포대별로 1/3을 차출하여 1개 보병 소대로 재편 후 각 보병 연대에 보충 병력으로 보내야 했다.[40] 해병대는 육군과 달리 화기중대가 별도로 편제되어 있지 않고 대대본부에 소속되었다.[41] 현대의 미 해병대는 화기중대에도 알파벳 기호를 부여한다. 즉 1대대는 A~D중대로 구성된다.[42] 폭 12발자국의 꼬불꼬불한 험한 도로로 미군은 주보급로 MSR: Main Supply Route라고 칭한다.[43] 1개 소대는 연대본부 경비를 위해 차출되어 감편된 상태.[44] 대대 화기중대 등으로 보강된 상태.[45] 이 사단의 사단가는 무려 아리랑(!!!)이다.[46] 7사단 17연대는 흥남에서 북쪽으로 160km를 진격하여 10월 21일 압록강에 도달했고, 31연대는 후속 중이며, 32연대는 11월 4일에야 상륙하여 북진하고 있었다. 심지어 맥클린 임무부대의 기간병력인 31연대 2대대는 아직 흥남에서 출발도 못했다. 즉 해병 1사단도 부대가 분산되어 있었지만, 미 육군 7사단에 비하면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편이었다.[47] 미 육군에 증원된 한국인: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KATUSA).[48] 태스크 포스는 뭔가 특정 임무가 부여된 부대라는 뜻이다. 특수임무부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일부 자료에는 페이스 특수부대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당시에는 그냥 '31연대전투단'이라고 불렀다.[49] 연대 본부 및 본부 중대, 연대수색대(I&R), 중박격포중대, 의무대, 통신대 포함.[50] 대대 본부 및 본부 중대, I, K, L, M중대.[51] 그 시신은 2004년 미-북 합동 유해발굴단에 의해 발굴되어 8년간의 감식 끝에 2012년 페이스 중령으로 확인되었다.[52] 연대 후방조(근무지원부대)와 함께 7사단의 상륙 지점인 함경남도 이원에서 지원 임무를 수행 중이어서 전투에는 불참.[53] 또 한 가지 통신 수단은 페이스 부대의 해병전방항공 통제관 스탬포드 대위의 무전기였다. 즉 양쪽 다 간접적인 통신 수단일 뿐 지휘소끼리의 통신 수단은 아니었다.[54] <브레이크 아웃> 132페이지.[55] 정찰병 2명+부분대장. 그냥 대열의 선두에 선다는 데 의미가 있다.[56] AR사수 2명에 부사수 1명이 기본 편제이다. M1918 브라우닝 자체가 부사수가 필요 없고 단지 BAR 전용 탄창을 휴대할 뿐이다. 그런데 AR팀 3명이라는 것 때문에 BAR 3정으로 계산하는 오류가 자주 보인다. 다만 AR팀 2명에 사수, 부사수 체제로 운용되는 경우는 있는 것 같다. 교리상으로는 분대장이 팀장 역할을 한다.[57] 소대장, 부소대장, 향도병, 전령 2명.[58] 분대장 + 30구경 기관총 운용팀 2개.[59] 중대장, 부중대장(XO), 선임하사(상사), 서무계, 취사반 4명, 보급계 2명, 수송반 7명.[60] 60mm 박격포 3문, 30구경 공랭식 기관총 3정.[61] 2차대전 당시 미군 보병사단의 자체 정원은 1만 4천 명이었지만, 6.25 전쟁 시점에선 1만 8천 명으로 증가했다. 사단에 배속된 부대들을 고려하면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사단의 평균적인 인원은 2만을 가볍게 넘는다.[62] 105mm 3개 대대, 155mm 대대 1개 대대.[63] 경우장학회편, 1995 '경찰50년사' 127쪽.[64] 이들은 장진호 전투가 끝난 후에는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전남으로 이동, 204전경대대의 창설요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종연 중위는 이들 전투경찰중대는 경감이 지휘하였으며, 군인들보다 나이는 댓살 정도 많고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개심이 아주 강하고 용맹했다고 한다. 장진호 혈전장의 한국 전투 경찰대. 미 해병대 예비군 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한 앤드류 기어의 <The New Breed: The History Of The U S Marines In Korea>에 보면 낙동강 전투 당시 각 해병중대에는 한국 경찰이 배속되었고, 미 해병대가 포로로 잡아온 북괴군 장교를 대대 CP에 넘겨 심문하도록 이들 한국 경찰에게 호송을 보냈더니 호송 중에 포로를 죽여버린 것을 보고 북한군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안 뒤로는 한국 경찰에게 포로 취급을 맡기지 않았다는 에피소드가 있다.[65] 당시 인민해방군은 사회주의적 평등 이념에 따라 권위적인 사령관(官) 대신 근본적으로는 일반 병사와 동등한 일원이라는 의미로 사령원(員)으로 불렀다.[66] 이 때문에 제4야전군 예하였던 제13병단이 1진으로 한반도에 출동하자, 유엔군 측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린뱌오일 것이라고 오인했다.[67] 여기에 공산권 특유의 조직인 당위원회도 있었다. 지원군 당위원회 서기에 펑더화이, 부서기에 덩화, 상임위원에 홍쉐즈, 한셴추, 셰팡, 두핑이었다.[68] 제33군 소속 사단들은 이후 야전사단에서 일종의 무장경찰부대인 화둥공안군 소속으로 변경된다.[69] 산둥성, 안후이 성, 상하이 등.[70] 겉은 카키, 안은 하얀색인데 상황에 따라 뒤집어 입었다고 한다. 매우 두텁고 따뜻하여 미군들이 주워서 애용하였다. 워낙 두꺼워 고기압에 의하여 약해진 총알을 상대로 방탄복 역할도 하였다는데, 그보다는 추운 날씨에 모든 것이 얼어붙는 바람에 여기에 튕겨 위력이 감해진 총알에 맞은 탓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 인민지원군 코트를 입은 어느 미군은 갑자기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고통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총알 몇 방이 관통 못하고 튕겨나간 것을 알고 깜짝 놀랐을 정도. 반대로 중공군은 미군의 가죽 코트를 애용하였다. 방수가 잘 된다고.[71] 평안남도 영원군 대흥면 사창리. 현 북한 행정구역상 대흥군 소재지.[72] 생년에 대해 일부 자료에서는 1899년생이라고 적고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근래 중국 측 자료에서는 모두 1907년 9월 10일생으로 적고 있다. 어쨌든 전쟁 외에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원체 드라마틱했던 시대에 80살을 넘겼으니 꽤 장수한 편.[73] 말년에는 천안문 6.4 항쟁이 발발하자 예페이, 장아이핑 등과 함께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구를 돌려서는 안 된다"는 서한을 중국공산당에 보낸 바 있다. 서방권에서는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작전 능력 외에도 천안문 사태에서의 유혈진압 반대를 빼놓지 않으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74] 172연대는 서쪽, 173연대는 동쪽에 배치. 174연대는 예비대.[75] 펑더화이의 이복동생이다. 계모가 낳은 아들이라 1910년생으로 펑더화이보다 12살이 어렸다고 하며, 쑹스룬보다 3살 아래였다.[76] 이상의 내용은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에서 낸 『항미원조전쟁사』 2권에 수록된 것이다. 중국 군사과학원에서 발간한 것이므로 사실상의 공식 전쟁사의 권위를 갖고 있는 서적이다.[77] 미 해병 1연대 1대대, 미 육군 3사단 56연대 Dog TF 대대.[78] 즉 각 군이 3개 사단으로 구성되고, 각 연대가 3개 대대로 구성.[79] 군당 4개 사단, 연대당 4개 대대 편성.[80] 중국측 자료의 고질적인 특성상 정확한 원 사료 출처는 표기하지 않았으나, 이 정도의 상세한 숫자를 제시했다면 저자들이 인민해방군의 내부 자료를 참조했다고 봐야 한다.[81]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일반 사단들은 수송 수단이 부족하여 분해하여 인력으로 이동이 가능한 포만을 운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군의 11식 보병포(구경 37mm) 또는 94식 산포(구경 75mm)였다.[82] 중국 측에서 2000년 무렵 이후 제한적으로나마 공식 수치를 공개하기 전에 미국에서 나온 책들도 당시 중국군 사단들이 편제도 못 맞추는 수준이었다고 똑같은 과소 추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83] 전투 중에 일시적으로 전투력을 상실하거나 낙오한 병력은 모두 제외한 수치이다.[84] 서부전선에서 미 8군을 상대하는 18만 명+동부전선에서 미 10군단을 상대하는 12만 명.[85]함경남도 수동군. 고원군에서 떨어져 나왔으며, 평원선(현 평라선 평양 - 고원 구간)이 통과한다는 것이다. 당시 철도상으로는 평원선만이 현 북한 일대에서 동서로 철도를 통해 병력과 물자 수송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철도였기 때문에, 이 노선을 잃는다는 것은 좌우로 UN군이 갈라진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요한 곳이었다. 원산에서 평양까지 철도로 이동하려면 고원군을 출발하여 수동군, 양덕군, 성천군, 순천군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데, 이 거리가 대략 250km 정도 된다.[86] 이 정도 넓이의 전역은 군단급이 아니라 야전군급 작전 범위이다. 당장 독소전쟁 중반 발터 모델의 제9군이 담당하던 르제프 전역의 최대 폭이 약 450km였다.[87] 당시 중공군은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일군의 총 책임자인 사령원부터 가장 말단인 취사병까지도 작전 계획을 거의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88] 현재의 장진읍 및 장진역 인근.[89] 스미스 장군은 장진호 근방을 헬기로 시찰 후 "작전 수행이 불가능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때 만들어 놓은 야전 활주로는 이후 보급을 받고 부상자를 수송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착공은 하였지만 완성은 공병이 밤낮으로 작업을 강행한 끝에 12월 1일에 이루어진다.[90] 함주군 하기천면 동흥리, 현 함주군 수전로동자구(하기천역 부근) 일대.[91] 당시 5연대는 후방의 신흥계곡, 1연대는 아예 행정상륙한 원산에 막 출발하려고 하는 단계였다. 7연대와 1연대는 무려 270km나 떨어져 있었다.[92] 중대 이하의 부대에서는 지휘관의 계급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임을 입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중대장조차 자신을 지휘관이 아닌 병졸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소부대 지휘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 다우셋 중령은 중공군의 이 문제점을 짚은 것이다.[93] 여기서 124사단이 궤멸한 결과는 이후 장진호 전투에서 포위망 완성에 실패한 9병단이 미 해병대와 더불어 미 10군단 전체를 놓치고, 나아가 12개 사단 중 6개 사단을 잃고 병단 전체가 재편성에 들어가 이듬해 봄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못 하는 나비효과로 이어졌다. 이 점 때문에 '만약 중공군의 124사단이 수동리에서 궤멸당하지 않았으면 유엔군은 더 큰 위기에 빠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94] 왕수쩡의 『한국전쟁』에서는 수동 전투에서 각 전투 때마다 미군 200명이나 130명을 사살했으며, 다수의 전차를 파괴했다고 나온다. 이때의 전술은 '머리를 치고 꼬리를 막으며 허리를 공격한다. 종심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묘혈을 파고 심장을 끄집어낸다.'는 삼국지스러운 작전이었다.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 124사단 공세에 밀리자 미 3사단에게 지원 요청을 하여, 중공군을 포위에 빠지기 전에 할 수 없이 후퇴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미군은 1개 연대만 싸웠다.[95] 한국군 6사단 7연대는 압록강변의 초산까지 진격은 했는데, 그 직후에 중공군의 1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퇴로가 봉쇄되었다. 7연대는 길을 되돌아서 아군 주력이 있던 청천강변까지 대략 150km 거리를 돌파해야 했는데, 절반도 못 오고 포위 섬멸되면서 각개 장병들이 분산 탈출해서 총원의 25%만이 귀환했다. 운산군에서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여러 구출 시도가 있었으나 중공군의 방어에 모두 실패하고 전선 안정을 위해 미8군은 후퇴했다. 해당 대대의 운명은 책 <콜디스트 윈터>에 자세히 묘사되었으며, 계속 농성하다 11월 6일에 항복했다.[96] 이때의 주장이 추수감사절(11월 23일)까지 전쟁을 끝나겠다는 것인데, 이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으로 말을 바꾼다.[97] 연락 담당 참모가 근처에서 노닥거리다가 정오에야 출두하는 방식으로.[98] 정말 맥아더를 깎아내리기 위한 입장을 찾아보자면, <한국전쟁 5가지 미스터리>에선 "맥아더가 이미 이때부터 대통령병에 걸려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전투를 크리스마스까지 끝내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나와 있다. 당장 이 시기가 1950년 미국 중간선거 시기라, 맥아더는 웨이크섬 회담 때부터 트루먼이 자신을 선거에 이용하려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99] '미국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라는 비칭.[100] 현재의 삼거역 일대.[101] 현 장진군 남쪽 고토역 일대.[102] 장진호 서부.[103] 중공군 79사단이 북쪽, 89사단이 북서쪽, 59사단이 남서쪽을 담당하였다.[104] 원래 중공군의 계획은 중공군 58, 60사단으로 장진호 남쪽의 하갈우리를 포위하여 장진호 동쪽/서쪽과 함께 동시에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간에 산악으로 이동만 하는 중공군 특성상 이동이 지체되어 58, 60사단은 다음 날인 11월 28일에야 도착했다.[105]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3대대장 해리스 중령의 너무 빠른 듯한 후퇴 명령이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 날 밝혀졌듯이 중대 장교 7명 중 1명만 남고 중대원은 40명뿐인 절망적인 상황이었다.[106] 11월 24일까지는 7연대 B중대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추수감사절(11월 23일) 기념으로 받은 칠면조 뼈다귀를 쌓아놓은 더미가 있어서 C중대가 '칠면조 언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개 소대가 연대 본부를 지키고 있어서 감편되어 180명 정도 있었다. 미군은 전쟁 중이라도 1년에 2번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 칠면조를 먹는 풍습이 있다.[107] 대대 중화기 중대의 81밀리 박격포팀 등의 증원이 있어 218명 주둔.[108] 사상자 중 사망자는 24명인데 중공군 시체는 350구 정도 널려 있었다. 폭스 중대가 1/10이 사망한 데 비해 그 날 공격해온 중공군 대대는 반 이상이 사망했다. 나머지 반도 부상이나 미군 포로 신세라 사실상 전멸. F중대에 대해 간단히 한 줄 썼지만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책 <폭스중대의 최후의 결전>은 27일 밤의 전투까지가 책의 절반일 정도의 혈투였다.[109] 소대장 코크 중위. 27일 주간에 풍류리강 북동쪽 부전호 쪽 계곡을 정찰하러 갔다가 소대 전체가 전멸함. 며칠 후 후퇴 과정에 생존자 2명이 페이스 부대에 합류.[110] 이 날 육군의 대응에 대한 증언이 엇갈리는데, 해병대 쪽에서는 "육군이 그냥 처잤다"고 하고, 육군 쪽에서는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사계 청소도 했으며, 중·소대별 사격 구역을 나누는 등 충분한 방어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일단 방어진지 자체는 미 해병 5연대 3대대의 진지를 인수 받아 이미 진지 구축이 된 상태였다.[111] 왜 여기서 L중대가 갑툭튀했냐면, 지휘부가 괴멸되어 이 날 배치가 어디였는지, 어떻게 후퇴했는지 증언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112] 이 부분은 확실하지 않은데, 상부의 지시가 아닌 페이스 대대장의 결심에 의한 후퇴라는 책도 있다. 방어진지가 구축되지 않은 남서쪽으로 중공군이 쳐들어올까봐 포위 당하기 전에 미리 후퇴했다는 것이다. 또는 함께 있던 맥클린 연대장의 지시일 수도 있다.[113] 앨런 맥클린은 포로가 된 지 나흘째 사망하였고, 근처에 대충 묻혔다. 그토록 바라던 31연대 2대대는 아직도 함흥에 있었다. 이들은 11월 30일에야 고토리에 도착했다.[114]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알몬드 군단장은 아침에는 해병 1사단장 스미스를 만났고, 점심에는 페이스-맥클린을 만났으며, 오후에는 7사단장 바와 만나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바쁜 와중에 저녁에 맥아더를 만나러 도쿄까지 간 것이다.[115] 맥아더는 회의 자체를 싫어했다. 오직 지시만 내릴 뿐이었다.[116] 그런데 실제로 해병 사단에 철수 지시가 내려온 것은 30일이다. 알몬드 장군은 맥아더의 무조건적인 Yes맨인데, 왜 맥아더의 지시를 안 따랐을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이 당시 맥아더든 알몬드든 해병대에 대해 죽든 살든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육군은 이미 전면 후퇴하고 있던 상황에서 해병대만 30일까지 철수 지시를 못 받아 고립된다.[117] 31연대 2대대에서 E중대 대신 3번째 소총 중대가 되어 함께 맥클린 부대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11월 28일에 먼저 도착했다.[118] 영미 해병대가 연합 작전을 벌인 것은 이때가 사상 2번째였다. 첫 번째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119] 해병 G중대, 해병전차 D중대, 영국 41해병특공대.[120] 영국해병특공대 60명, 육군 B중대, 해병사단본부대.[121] 육군 100명, 미 해병 40명, 영국해병특공대 20명.[122] 해병 G중대 2/3, 영국 해병 41특공대 등 보병 3백 명과 해병전차 D중대.[123] 단, 중국 쪽 책은 뉘앙스가 다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에는 【매클로린 소령은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투항하러 왔는가?" 중공군이 말했다. "나는 중국에서 보낸 사절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소수 인원을 파견해 중상자를 고토리로 후송하는 데 동의했다. 조건은 남은 인원이 반드시 우리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매클로린은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겠다."】라고 하였다.[124] 이들 중 일부는 12월 7일 영미 포로를 돌려준다는 중공군의 제안에 폭스힐의 영웅 7연대 F중대가 직접 가서 찾아왔다. 중대라고 해봤자 20명밖에 안 남았지만 이들은 하갈우리 쪽으로 다시 역주행하여, 약속된 장소에서 미 육군 병사 수십 명과 영국 해병특공대원 2명을 인수해왔다.[125] 76밀리포 전차 4대는 전날 1221고지에서 파괴. 1대는 부사단장이 타고 감.[126] 그러나 가장 중요한 40mm 포탄 보급은 안 됐다.[127] 며칠 후 일이지만 페이스 부대는 후퇴하다가 후동리까지 와서 전멸하였다. 만약 후동리에 전차부대가 남아 있었다면 합류하여 하갈우리까지 후퇴에 성공하였을 것이다. 누가 개별적인 후퇴 명령을 내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때 장진호 동안의 작전권은 미 해병대에게 있었지만,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였다.[128] 국군에서 승공포라고 부르는 그것.[129] 7연대 2대대에 있던 D, E중대는 작살이 나 있는 상태여서 D-E중대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채 5연대 3대대로 배속되었고, 12월 27일 가장 먼저 괴멸된 7연대 3대대 H중대는 20명 남아있었다.[130] 영미권에서 시체를 운구한 관을 매장하는 깊이 6피트(183cm)의 구덩이로, 우리말로는 무덤 구덩이, 묫자리라는 뜻의 관용어로 쓰인다.[131] 적지에 가매장하고 후퇴한 것은 미 해병대 역사상 5번 이내에 드는 사례이다.[132] 57 포병대가 전날 먼저 철수했다는 자료도 있는데, 전날 철수한 건 57 포병대 대대본부이다.[133] 보포스 40mm 대공포를 2연장으로 탑재한 차량. 전차가 아니고서야 버틸 수가 없는 화력이었다.[134] 근무포대의 경우 15명이 출발하여 1마일 남하해 4일 전인 27일 밤에 주둔하던 진지를 지나가는데, 그때까지 멀쩡하게 걸어가는 병사는 단 3명 남았다. 100명으로 시작해 4일 동안 단 3명 남은 것이다.[135]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후퇴하는 아군 병력을 쏴 죽이는 것은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6.25 전쟁 첫날에 방어전이 내던져졌던 생도 1기생이 후퇴하던 입학 4일차 생도 2기생을 쏴죽이기도 하고, 살인 장군으로 악명 높은 백인엽 장군은 병사들을 쏴 죽이는 것이 일상사였다. 전부 부족한 지휘력을 공포에 의해 병력을 통제하려는 것이었고 결과는 실패였다. 6.25 전쟁의 다른 사례를 보면 부하에게 권총을 쥐어주고 "내가 후퇴하면 나부터 쏴라!"라고 하고 앞장서서 돌격하는 바로 위의 백인엽의 형 같은 장군은 승리하였다. "나는 뒤에 있을 테니 너부터 돌격하라."면서 부하들을 쏴 죽이는 지휘관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136] <아웃 브레이크>에는 "도로 장애물을 개척하기도 전에 선두차량 2대의 운전병이 죽어 대열이 정지되었고, 이어서 페이스 중령의 가슴에 총을 맞았다"고 되어 있다.[137] 선두 차량에는 페이스 중령이 실려 있었는데, 후동리를 탈출한 유일한 차량이었다. 이 차량은 후동리 남쪽 2.5마일 지점, 하갈우리 북쪽 1.5마일 지점 고갯길에서 아마도 휘발유가 떨어져, 운전병은 차량을 버리고 탈출했다. 바니 운전병은 하갈우리로 탈출 성공하여 페이스 중령의 시체가 있던 차량의 위치를 증언했는데, 그로부터 54년이 흘러 2004년 북미 합동 발굴단이 시신을 발굴했다.[138] 이때 전투 보고에는 F중대가 적어도 1천명 이상 사살했다고 하고, F중대장 바버는 자신들과 H포대의 포격과 코르세어의 폭격으로 보수적으로 잡아도 2천 명 이상 죽었다고 말했다. 피아살상 비율이 무려 1:77이다.[139] 중대원+대대 화기중대 일부+해군 위생병 합계 246명.[140] <브레이크 아웃>에서는 엉터리 지휘를 한 페이스 대대장은 사후 명예훈장을 받았고, 목숨을 걸고 300명을 구출한 올린 뵐 대대장은 무공십자훈장에 그쳤다고 비판했다. 이건 전적으로 해병대를 푸대접한 탓이라는 주장이다.[141] 그러나 장진호 동쪽의 육군은 위에서 언급했듯 장교들은 지휘하기를 포기하고 인가로 숨었고, 병사들은 저격 당한 운전병 대신 운전대 잡기를 두려워했다. 그 바람에 제대로 된 공격도 받지 않고 알아서 산발적으로 흩어져 도망가다가 전멸해 버리는 추태를 일으켰다.[142] 영화 자체는 해병대가 아닌 육군 1사단 7연대 제1대대장 레이먼드 데이비스의 참전 경험담을 소재로 했다.[143] 사실 Heck은 대부분 Hell의 순화어로 쓰기 때문에 두 단어는 사실상 동의어다.[144] 후에 FF-1089로 재지정.[145]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평양 철수 문서 참고.[146] 윌리엄 해리스 중령은 군인 중의 군인이자 천재 중의 천재였다. 태평양 전쟁 초기 코레히도르 요새에서 근무하던 중 미군이 항복하게 되자 항복을 거부하고 마닐라 만을 8시간 반 동안 헤엄쳐 가서 바탄 반도의 게릴라들과 합류할 정도로 용맹한 장교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3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위트에 넘치고 투지에 불타 올랐다. 허공에서 책을 넘기며 무엇을 보는 시늉을 자주 하였는데, 미국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읽었던 교재를 전부 암기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으로 다시 읽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그런 천재가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에게 하도 맞아 동료 포로들도 못 알아볼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함께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루이스 잠페리니를 주인공으로 한 언브로큰 문서 참조. 장진호 전투 당시 사망 정황은 분명치 않은데, 휴전 후 몇 년이 지난 뒤에 북한 당국이 가족들에게 시신을 인도하였다.[147] 부상자 4,312명(항공기)+152명(헬기)을 후송하고 전사가 수백 명이 발생했다. 진흥리에도 해병대 1,600명이 주둔한 상황에서도 아직 이 정도 병력이 남아있었다. 미군 1개 사단 병력이 2만 명에 가깝고 추가로 워낙 풍부한 후방 지원 부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148] 대내외적으로 잘 알려진 텍사스 대학교/오스틴 캠퍼스와는 별개의 다른 학교다.[149] 출처: Donald W. Olson, Further Adventures of the Celestial Sleuth: Using Astronomy to Solve More Mysteries in Art, History, and Literature.(New York: Springer, 2018), 213.[150] 사실 천문학 관련 전공자에게는 그 정체를 알기가 매우 쉬운데 홀로 밝게 빛날 정도라면 시리우스 같이 매우 밝은 항성이 아닌 이상에야 목성이나 금성 정도의 행성들만이 그런 밝기를 가질 수가 있다. 시리우스는 12월경 이른 밤이면 오리온자리를 뒤이어 떠오르고 있는 시점으므로 동쪽 하늘이어야 한다. 게다가 시리우스의 주변에는 겨울철 대육각형으로 불리는 밝은 별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홀로 빛나고 있을 수가 없다. 결국 남는 후보는 금성목성이 되는데 왜 금성이 제외되는가 하면 금성은 내행성이라 초저녁이나 새벽에만 관측할 수 있는데, 밤 9시 37분경이면 금성은 볼 수 없는 시간대에 속한다. 사실 이렇게 어려운 추측을 할 것 없이 스텔라리움 같은 프로그램으로 해당 날짜를 조회해보면 어떤 별이었는지 다 알 수 있기도 하다. 이 날 목성의 주변에 육안으로 관측할 만큼 밝은 별이라곤 더 낮은 고도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포말하우트 하나뿐이었다.[151] 통역장교 이종연은 이후 오랫동안 함경남도 장진군 출신으로 월남한 실향민을 찾아 다녔으나, 전부 장진호 전투 이전에 빠져나온 사람이었고 피난민들 중 살아나온 사람은 없었다.[152] 나중에 밝혀지지만 동부전선의 중공군은 완전히 개발살나 있어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153] 일단 도쿄사령부 더글러스 맥아더가 전의를 상실하여 싸움을 포기한 상태라 무질서하게 일방적으로 도주하는 상태였다.[154] 미군의 방어선 안에 있던 피난민 9만 1천 명은 안전하게 후퇴하였지만, 방어선 밖에도 피난민 약 10만 명이 미군을 따라 이동했다고 한다. 게릴라 침투 위험 때문에 방어선 밖의 피난민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방어선 밖의 피난민들은 결국 흥남 철수작전의 그 순간까지 제지 당해 탈출에 실패했다. 이런 엄청난 피난민이 발생한 이유 중 하나가 "미군이 핵 공격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너도나도 대피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국군 병사들이 흥남시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핵이 떨어지니 탈출하라고 하였고, 맥아더도 핵을 쏘고 싶었는데 미국 정부에서 막았다.[155] 정확한 피아 사망 비율은 미군은 육군을 추가해야 하고 진실을 축소, 은폐하는 공산 진영의 특성상 중공군은 언제나 불분명하여 정확히 따지기 힘들다.[156] 서방 측에서 경상으로 분류해 사상자로 집계하는 경우를 누락하는 경우가 많다.[157]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영문 위키백과는 아예 중공군의 'Pyrrhic victory', 즉 피로스의 승리로 기술했다. '상처뿐인 승리'라는 의미.[158] 이것은 당시 중공군 군사 전략이 인민전쟁 노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공군은 자국 내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기본 전제하에서 모든 면이 발달해서 이런 식의 전쟁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159]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사단급 CP가 있는 곳은 대체로 최전선 전투 현장에서 거리가 꽤 되고, 사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최전선에 지원 갈 전투근무지원과 일반근무지원 기능을 가진 부대들도 사단 CP 주변에 덩달아 주둔하며, 여기엔 사단급에서 관리하는 자체 보급품 집적소도 포함된다. 다만 장진호 전투에선 해병사단의 부대들이 각개 분산되었고, 중공군은 각개격파와 후방 차단을 목표로 미 해병들의 거점들을 포위하고 공격해서, 사단 본부가 있던 하갈우리도 결코 후방 섹터는 아니었다.[160] 미리 일본에서 맥아더 원수를 만나서 전권을 부여 받았다. 책 <콜디스트 윈터>에 따르면, 리지웨이는 부임 후 알몬드를 만나 장시간 독대를 해서 군기(?)를 잡았다고 한다.[161] 엄밀히는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의 일부만 손실이 컸지, 당시 제10군단 전체로 볼 땐 극심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던 듯하다. 또한 흥남 철수작전도 해군의 지원이 컸지만, 육지 파트에서 온갖 지상군 부대의 해상 철수를 조율한 최고위자는 바로 알몬드(+그의 참모들)로, 그의 결단으로 민간인 9만 명이 남한으로 피난할 수 있었고 병력뿐만 아니라 장비 물자들도 버리지 않고 가져간 공은 있다. 그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무능했다면 흥남 철수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162] 미 육군 수뇌부는 이것을 맥아더 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표시라고 했다. 51년 3월까진 맥아더의 영향력이 컸고, 그를 달래려고 여러 가지 회유책(?)을 썼다. 알몬드의 계급을 올려준 것도 그 일환이었던 것 같다. 물론 맥아더가 해임된 후 그의 후원을 받았던 측근들은 깡그리 망했다.[163]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가 있었던 중공군 2차 대공세 때는 도쿄 최고사령부에서 며칠간 두문불출하며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있다가, 새로 미8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리지웨이 장군이 지평리 전투에서 대승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처음 막아내자 바로 수원으로 날아와 자신의 지휘로 중공군을 막아냈다는 드립을 친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때 리지웨이 장군이 분노했다고 한다. 미군 장군들이 맥아더를 싫어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164] 공교롭게도 이 선은 현재 평택제천고속도로가 뚫려있다.[165] 정확히는 맥아더의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내게 해주겠다는 발언이었다. 그러면 그 말을 한 순간부터 병력들이 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해야 할 것인데 감히 맥아더에게 그런 문제까지 따지는 병사들이나 언론은 없었다.[166] 출처 The Mistaken History of the Korean War What We Got Wrong Then and Now p67. 저자 Paul M. Edwards(그레이스 대학 한국전쟁 연구학회 총재), From the point of view of ground operations principle, Chosin Link-up operation discussion of the US 1st Marine Division 출처 대전대학교 군사연구원, 사이언스 타임. # 단, UN군측 평가이니 감안할 것.[167] 이 일화는 어느 한 병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묻자, 그 병사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하는 일화로 퍼져나갔다.[168] 붉은 점이 함경남도 장진군이다. 춥다는 장진군의 명성에 비해서 그렇게 안 추운 것 아니냐고 여길 수 있지만, 12월의 기온인 데다가 사실 한반도가 겨울에는 서구에 비교하면 북미 일부 지역,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추운 편이다. '12월 평균 기온은 -11.6도'라는 서술에 부합한다. 물론 기상대가 그나마 호수를 낀 저지대인 읍내에 있으니 덜 춥게 기록된 면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장 오지가 여기가 아니라 삼수갑산이라고 하여 더 동북쪽이 오지라고 여겼다.[169]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강원도 철원군, 대관령 등지의 겨울 기온이 -5~8도 정도다.[170] 미국을 기준으로 영하 37도 이하면 극한(Extreme cold) 경보를 발령했다.[171] 세계기상기구에서 제공하는 지난 30년 간 모스크바의 1월 아침 최저 기온은 평균 -12.3도, 낮 최고 기온은 평균 -4.5도다.[172] 세계기상기구에서 제공하는 지난 30년 간 볼고그라드의 1월 아침 최저 기온은 평균 -10.7도, 낮 최고 기온은 평균 -4.5도다.[173] 이 기록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돈 강 전선에 있던 부대가 기록한 자료다.[174] 삼국지를 보면 후한에서는 현재의 베트남에 해당되는 지역을 아예 유배지로 삼았을 정도였다.[175] 알다시피 대구광역시를 비롯한 영남 내륙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더운 곳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여름은 습하고 덥기 때문에 체감 온도는 폭발적으로 올라간다. 게다가 하필이면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여름이 8월 중순 평균 기온이 역대 3위에 들 정도로 역대급 폭염이었다.[176] 왜 중공군이 독일 총인 Kar98k를 들고 있느냐고 할 수 있는데 원래 중화민국나치 독일과 동맹국이었다. 중일전쟁 때문에 관계가 파탄이 나서 그렇지... 말 그대로 중화민국 육군이 들고 있던 걸 중공군이 노획해서 여기서 쓰다가 미국이 또 노획한 것.[177] 1950년대 한반도에서는 이질과 같은 수인성 질병이 흔한 편이었다. 당장 이질만 하더라도 지금은 발병 빈도가 크게 줄었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꽤 흔한 병이었고, 장티푸스콜레라도 1950년대에는 흔했다.[178] 태평양 전쟁 당시 북극해 턱밑인 알류샨 열도에서 전투를 치르며 수많은 동상환자가 발생했었지만, 기온이 장진호만큼 내려가지는 않았다.[179] 소설 데프콘 3부에서 미군이 한국 침공을 여름으로 잡은 것도 장진호 전투의 악몽 때문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병사들에게 장진호의 얼음지옥을 또 맛보게 하지 않으려고....[180] 함급 이름의 기준인 1번함.[181] '선택 받은 소수'라는 뜻의 'chosen few'와 발음이 유사하다.[182] 태평양 전쟁 당시 알류샨 열도 전역과 본문의 장진호 전투. 알류샨 열도 전역 당시 기온 자체는 장진호에 비하면 훨씬 따뜻했지만, 베링 해협을 끼고 있는 섬에다 대충 여름이니 따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최소한의 동계물자 없이 병력들을 투입해서 네 자릿수 단위로 동상 환자가 속출했다.[183] 포병이 보통 최전선보다는 후방인 지역에서 화력 지원을 하는 게 주 임무인 것을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적에게 직사로 쏴야 할 정도로 적이 코 앞까지 밀어닥쳤다는 건 거의 패배했다는 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긴 하다.[184] 이런 식으로 은어 때문에 명령 전달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군대에서는 정훈교육 시간에 '각종 은어를 쓰는 것을 자제하라'는 교육을 많이 한다.[185] 2차대전 때 유명한 에피소드. 아르덴 대공세 당시 오마 브래들리가 전선 이동 중에 군사경찰의 검문에 걸렸는데, 헌병이 "일리노이주의 주도가 어디냐"라는 질문을 하자 "스프링필드입니다."라고 정확히 대답했는데, 헌병이 무식했던 탓에 "아니야! 이 멍청아! 정답은 시카고야!" 라면서 브래들리를 즉시 체포해버렸다. 독일군 스파이로 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금방 풀려났다는 모양. 참고로 당시 미군들의 교육 수준은 아주 낮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자신의 이름을 영어 알파벳으로 쓰지 못하는 병사들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으로 오던 미군들의 꼴이 어땠는지는, 소설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 적나라하게 나온다.[186] 최종 계급은 중령, 복무 기간: 1941-1945, 1950-1954). 전간기 시절 석사 학위를 취득, 역사학자로 활동했고 군대에서 경력을 살려 미 육군 전사(戰史, 전쟁 역사) 팀에 소속되어 근무했다.[187] 참전 장병들의 증언이나 인터뷰 내용을 모아 장진호 전투의 경과를 아주 상세히 묘사하는 훌륭한 책이다. 일반인이 장진호 전투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가장 재미있고 읽기 쉬운 책이다. 특히 번역 수준이 아주 훌륭하며, 국내에 출간된 군사 관련 서적으로서는 거의 최고의 번역 수준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 군대, 군사 관련 저서의 국내 번역 수준은 전반적으로 매우 낮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을 다룬 책인 '콜디스트 윈터'의 경우 리지웨이 장군의 경력을 설명하면서 공수부대(Air-borne)를 공군이라고 번역하는 등, 군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여성 번역가가 번역을 함에 따라 전반적인 번역 수준이 처참하다. 번역자가 ROTC 출신으로 육군 장교를 전역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인데, 군사 용어들이 아주 적절히 번역되어(감제고지 등의 용어) 마치 군대의 보고서를 읽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으며, 전투 묘사 또한 생생하다. 주로 장진호 서쪽의 해병대 전투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장진호 동쪽의 육군 전투를 부차적으로 다룬다.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당시 미 해병대 장성에서 아래로는 말단 병사들에게까지 널리 퍼진 육군 혐오의 감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미군에 급하게 배속된 초창기 카투사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어, 현대의 한국인이 읽기에는 좀 씁쓸한 점도 있다. 다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는 것과는 달리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의 전투력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었으며, 미군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절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최근 새롭게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당시 미군 병사들의 수기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브레이크 아웃>에서 소개하고 있는 카투사 등 한국군에 대한 묘사는 그냥 당시의 일반적인 미국의 시각이다.[188] 가령 중공군 13병단 지휘관을 임표로 기록한다던지, 133페이지 25일 야간에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그 날이 미 8군 후퇴일이라고 적어 놓는다던지, 134페이지에 10군단에서 공세의 좌익인 8군이 무너진 걸 26일에 알았다거나 하는 등 기본적인 사실 관계 자체가 아예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189] 일일이 언급하기는 그런 부분이 너무 많아 한 가지만 예를 들면 한국군과 관련한 62장 491페이지 존 Y. 리 부분에 나중에 한국군 통역장교가 된 한국인 이종연 씨가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을 가다가 한국군과 미군이 퇴각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들은 마치 무질서한 군중처럼 흩어져서 도망가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미 육군은 아주 형편없어서 뒤돌아 도망치기 바빠 자기 소속 부대나 전우를 돕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더군요."라고 말한 것처럼 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실제 본인의 참전 수기를 보면 이종연 씨는 "6월 28일 서울을 떠나 전라남도 광주로 이동했다가, 국군에 지원 입대하기 위해 7월 말 대구에 도착했다"고 적고 있으며, "…피란을 내려오는 동안 후퇴하는 국군이나 미군(육군)들을 보았는데, 참 형편없었어요."라고 적고 있다. 피난 시 그는 국군을 등 뒤에 두고 교전이 벌어지기 전에 전라남도로 이동했고, 다시 미 8군 사령부와 한국 육군 본부가 위치한 전선의 후방인 대구로 왔기 때문에 후방에서 재편성하는 국군이나 미군을 보았을 뿐이고, 그 모습이 사기가 떨어져 보여 형편없었다고 적은 것인데, 『브레이크 아웃』의 작가는 실제 인터뷰도 하지 않고 잡지에서 본 참전수기에 작가의 주관적인 생각을 보태 창작 소설을 쓴 것이다.[190] 당시 미 해병대의 육군 혐오는 워낙 심각한 수준이어서, 미국 본토 해병대사령부에서 이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는 특별 명령이 내려올 정도였다. 중국인이나 한국인동양인 혐오도 지금 기준으로는 심각한 수준의 차별 의식이 있었다. 당사자이자 동양인인 한국인에게도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 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중공군을 계속 동양인을 비하하는 은어인 '국(gook)'이라고 부른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니(적=동양인)+해병대니까'로도 볼 수 있고, 어차피 당시 솔직한 감정을 담은 실제 참전 수기이니 수정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다른 미군 책에는 중공군에게 "Hey Gook! 니네들이 좋아하는 조상님 곁으로 보내줄게!" 하며 총을 쏴대는 장면이 있다. "하나님이 아닌 조상들을 믿는 미친 족속들"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 역시 조상님을 신봉하는 문화라서 읽기 혼란스럽다. 또한 당시 혼란에 빠진 미 육군이 철수하면서 부대가 사실상 와해될 상황이 되자, 독전을 한답시고 미군 카투사로 있던 한국인 2명만 즉결처형하고 나머지 말 안 듣는 미군들은 그냥 놔둔다든지 하는 장면도 있다.[191] 국에 대해 더 말해보자면, 월남전 소설 <하얀전쟁>의 저자 안정효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은 베트남인을 '콩(Cong)'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주한미군한국인을 '국(Gook)'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것이, 단지 '한국'의 끝 글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적고 있다.[192] 밤에 불 피우는 건 전쟁터에서 금기 중의 금기로, 적군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켜 '제발 공격 좀 해달라'는 수준의 자살 행위이다. 하지만 무슨 음식을 해먹으려고 했는지는 여러 증언에서 다 다르게 언급되는데, 계란볶음밥을 해먹으려고 했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외에도 삶은 계란, 만터우, , 구운 사과 껍질 등 다양하다. 뭘 먹으려고 했는지는 미스터리지만 음식을 해먹으려다가 죽었다는 것 자체는 여러 증언에서 공통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국내에서는 별 관심이 없는데, 중국 내에서 이를 조롱하던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 최근 악화된 한중관계 때문에 국내에 해당 정보가 역수출된 케이스이다. 도리어 영화에서 미화된 내용이 최근 중국공산당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193] 강원도 철원군 철의 삼각지대나 화천군의 파로호, 양구군 펀치볼 쪽에서 촬영하면 한국적이면서도 그럴 만한 혹한지옥이 나올 수도 있지만 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역이기에 이것도 문제.[194] 마이클 루커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