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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07:43:38

수원 비행장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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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비행장 전투
水原飛行場戰鬪
Battle of Suwon Airfield
<colbgcolor=#c0c0ff,#4B0082> 시기 1950년 6월 27일
장소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수원비행장[1]
원인 서울에 있던 미국 국적 민간인, 외교관 대피를 위한 수송기 호위 과정에서 교전 발생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지휘관 제임스 W. 리틀 불명
전력 제8전투비행단
F-82 트윈 머스탱 5대
F-80C 슈팅스타 4대
제1항공사단
라보츠킨 La-7 5대
일류신 Il-10 8대
피해 여러 대 항공기 파손, 공군 소유의 T-6 텍산 한 대 파괴 항공기 7기 파괴
결과 미군의 승리
영향 미국인 1,527명 포함 2,001명 한반도에서 피난
북한군이 UN에 공격 중단 요청[2] → 전쟁 초기 공대공 전투 자제
제트 엔진 장착 전투기의 재래식 전투기 압도 → 제트시대의 새로운 전환점

1. 개요2. 배경3. 전개
3.1. 1차 출격3.2. 2차 출격
4. 의의

[clearfix]

1. 개요

1950년 6월 27일 김포비행장수원비행장 상공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 최초의 공중전이다. 미국과 북한의 항공기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미 공군이 조선인민군 항공의 항공기 9기 중 7기를 격추시키며 승리하였다. 대한민국이 직접 교전한 첫 항공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적이고 불법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맞서 싸웠으나 미흡한 전쟁준비와 인력 및 장비난으로 인해 북한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로인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국군을 밀어버리며 북한군은 계속하여 남진하였다.

이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의 붕괴를 막고자 군사 파견을 의결, 제7함대의 중형항공모함 USS 밸리포지가 이끄는 태스크 포스 77를 급파하였고, 영국의 극동함대는 HMS 트라이엄프를 포함한 함정을 파견하여 항공 및 해군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6월 27일 한국으로 이동하는 해군과 공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는 것을 도와준다는 목표로 북한을 공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미군이 북한의 공격을 전쟁으로 받아들였고, 이미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다 국군은 제1차 서울 전투에서 패하여 후퇴중이었기에 한국에서 민간인과 외교관을 대피시키는 것이 시급해졌다.

3. 전개

3.1. 1차 출격

6월 27일 오전, 제68전투비행대와 제339전투비행대의 F-82 트윈 머스탱 5대가 제임스 W. 리틀 소령 휘하의 제8전투비행단이 김포에서 수송기 더글러스 C-54 스카이마스터 4대를 호위하고 있었다. 이 수송기에는 무장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향하던 서울 지역의 시민들이 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시 경, 미국 수송기를 공격할 목적으로 김포비행장을 향해 비행하고 있던 5명의 조선인민공군(KRAF)의 라보츠킨 La-7이 고도 1만 피트 상공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수송기를 발견하자마자 사격을 가했고 이것이 수원비행장 전투의 시작이었다.

이어서 북한군은 수송기를 호위하는 전투기들을 향해서도 사격을 가했으며, 이에 리틀 소령은 항공기에 회신 명령을 내렸고, 북한군을 상대로 첫 직접적인 사격을 시작했다.

이어 북한 항공기는 구름 속으로 상승하는 비행기 2대와 하강하는 비행기 3대로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찰스 B. 모런 중위와(등록기호 46-357) 윌리엄 G. 허드슨(등록기호 46-383)이 F-82 2대를 각각 조종하며 상승하는 비행기 2대를 쫓아갔다. 북한 항공기가 모런의 항공기 주변을 돌면서 사격을 개시해 모런의 비행기 꼬리 부분이 손상되었다. 이에 허드슨은 앞쪽에 비행하고 있는 비행기를 공격해 더 오르게 만들었고, 허드슨이 쏜 총알이 기체와 오른쪽 날개에 명중하였다. 이후 나머지 적기들도 격추되는 등 미군이 승리하였다.

북한 항공기보다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났던 미국 항공기가 쉽게 앞섰으며, 나머지 북한 항공기 2대는 도주하였다. 아울러 이 전투로 격추된 첫 비행기는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이 처음으로 격추시킨 북한군 비행기이다.

3.2. 2차 출격

공중전에 대한 소식이 서울 전역에 퍼졌고, 서울 상공에는 대기 경보가 내려졌으며, 이에 대응해 레이먼드 E. 실레레프 대위 휘하 제35전투 비행대의 F-80C 슈팅 스타 4대를 이 지역에 출격하는 북한 항공기에 맞서기 위해 서울 상공에 배치하였다. 참고로 F-80은 당시 북한 공군에 있던 모든 항공기를 쉽게 격추할 수 있는 제트엔진 추진 전투기였다.

오후가 되자 북한군은 수송기 공격을 위해 더 많은 수의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서울과 인천 사이의 영공에서 8대의 일류신 Il-10이 나타나 비행장에 남아 있는 수송기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F-80이 이를 포착하여 교전하였고, 북한군은 김포비행장 활주로에 있던 대한민국 공군 T-6 텍산 한 대를 파괴한 뒤 북으로 퇴각하였다.

4. 의의

미 공군의 제트기가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으며, 유엔과 북한의 첫 공중전이었다. 북한군은 항공 수송기를 격추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난민들 중에서 북한군에 부상을 당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이 작전으로 1,527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2,001명의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피난하였다.

또한, 제트 엔진을 장착한 F-80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고품질에 효과적인 재래식 항공기로 평가받았던 일-10기를 쉽게 제압함으로써 제트 시대의 도래를 알린 신호로 간주되었다. 한편, 전쟁 초기에는 이와 같은 공대공 전투가 많이 없었으며, 북한군은 유엔군의 항공기가 자신이 소유한 항공기보다 우세하며 수적으로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항공기를 전투에 투입할 때 신중해졌다.

그 후 몇달간은 유엔군이 공중의 패권을 장악하여 지상 전투를 지원하였으며, 당시 반응이 좋지 않던 F-80도 이 전투의 승전을 계기로 인식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1] 現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2] 미군의 항공기가 자국이 소유한 항공기보다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