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산 전투 기록화 |
1. 개요
1951년 6월 4일부터 20일까지 미합중국 해병대 1사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현재는 해병대 제2사단 예속)가 강원도 양구군 해안리 도솔산 일대를 점령중인 조선인민군 육군 제5군단 예하 12사단, 32사단 2개 사단을 격파하고 대암산-도솔산 고지군을 차례대로 확보한 전투.兜率山의 兜를 두로 읽어 과거에는 두솔산 전투라고도 불렀었다.
2. 전투 전 상황
전투의 무대가 된 도솔산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양 옆으로 양구와 인제로 이어지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로 북상중인 국군의 진격이 지체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북한군의 진지공사와 저항도 빡셌고, 이로 인해 캔자스(KANSAS)선 일대를 장악하려던 미 해병 1사단의 5연대도 많은 손실만 입은 채 6월 3일 사단 예비였던 국군 해병 1연대에게 임무교대를 한 뒤 물러났으며, 이 모습을 본 해병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자신들보다 우월한 신체와 장비를 가진 미군들이 패퇴하는 모습에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임을 느낀다.[1]
3. 전투 경과
이미지 출처 및 참고자료1 참고자료2
참고로 위 이미지의 동그라미 및 그 안에 있는 번호들은 점령 목표 번호들이다.
3.1. 6월 4일
항공과 포격의 지원 하에 1,2대대가 도솔산 기슭으로 각각 전진한다. 1대대는 서남쪽 기슭을 맡아 692고지를, 2중대는 그 동쪽을, 3중대는 611고지를 점령한다. 하지만 북쪽 738고지로 전진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오후 9시 30분 경 692 고지로 후퇴한다.그리고 2대대는 5중대를 선두로 삼아 적의 주 저항선인 1121고지로 진격해 오후 2시 30분경 중간 능선(목표#8)을 점령하고 1121고지(정확히는 그 뒤쪽 목표#9)로 진격하려 했으나 거센 저항에 공격을 중지해야 했다.
3.2. 6월 5일
1중대와 임무교대한 1대대 3중대는 계속 북진하며 분전하나 다수의 사상자만 남긴 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한편 2대대는 5중대 옆에 6중대를, 후방 1057 고지엔 7중대를 배치해 방어를 굳힌 뒤 5중대가 1121고지를 향해 돌격하나 저항이 거세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3.3. 6월 6일
오후 3시 30분 경 1대대 3중대가 738 고지를 점령한다.뒤이어 2중대도 738 고지 서북쪽의 무명고지(목표#4)를 향해 악착같이 전진하나 수류탄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대는 통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큰 나무나 바위를 끼고 즉석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 위치를 고수하게 된다.
한편 연대 예비대였던 3대대는 919, 886 고지를 점령한 뒤 1175 고지를 향해 공세를 펼치나 일몰로 인해 공격을 중지하고 CP를 886고지로 옮긴다.
3.4. 6월 7일
오전 5시 1대대 2중대가 급습을 받자 1소대는 중대본부가 있는 738 고지로 후퇴했고, 2,3소대 일부도 철수를 시도하지만 1개 분개가 응사하자 상황이 진정된다. 이후 9시에 공격을 재개하나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3.5. 6월 8일
화력 지원 속에 3대대가 1175 고지로 돌격해 오전 10시 45분 경 점령에 성공한 뒤 9, 11중대를 전방에 10중대를 후방에 각각 세운다.3.6. 6월 9일
오전 7시 3대대 9중대가 기습을 받았으나 격퇴했다.오후 1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자 2대대 7중대가 1121 고지를 향해 돌격해 오후 6시 반 경 점령에 성공하나, 이 당시 멀쩡한 7중대원이라곤 고작 10명밖에 안 되었으며, 이조차도 고지를 사수하는 과정에서 사상당해 사실상 증발 상태가 되었다.
한편 해병 1연대 지휘부는 이런 지지부진한 성과에 미 해병 1사단으로부터 공격 독촉 갈굼을 받았다.
3.7. 6월 10일
이 날 열린 한미 해병 긴급작전 회의에서 해병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야음을 틈타 공격할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미 해병 1사단장은 야간공격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며 반대했으나, 김대식 대령의 집요한 건의에 마지못해 승낙한다.3.8. 6월 11일
새벽 2시 연대의 한방 병력들이 기도비닉을 위해 조명탄, 화력지원 없는 암흑 속을 더듬어가며 적의 주 저항선 진지들을 향해 각자 기어올랐고, 수적 우세에 힘입어 1대대 1중대가 891고지 앞마당(목표#4)을 점령하고, 2중대는 패주중인 적들을 추격해 6시경엔 1143고지까지 점령한다.[2]그리고 2대대 역시 5중대로부터 인원 보충을 한 7중대가 1121고지 일대로 진격해 5시 30분경 점령에 성공했고, 이에 2대대는 나머지 중대들을 일대로 올려보내 알박기를 시전하며 1121고지 서북쪽 능선까지 점령한다.
3.9. 6월 12일
화력지원 속에 3대대 9중대가 1218고지를 향해 돌격, 오전 11시경 점령에 성공한다. 그리고 오후 2시에 그 북쪽의 목표#14(능선)를 점령한 뒤 미 해병 5연대가 점령한 대암산(목표#15)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패주병과 조우해 이를 격퇴한다.한편 당초 목표였던 캔자스(KANSAS)선 일대를 장악한 미 해병 1사단은 뒤이어 뱃저(BADGER, 오소리) 선 일대를 점령하기 위한 후속 작전에 돌입한다.
3.10. 6월 14일
2대대는 892고지를 경유, 432고지에서 서쪽 미 해병 7연대와의 전선 연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막은동에 적 1개 중대가 있음을 발견한다.3대대는 1개 소대를 소룡포 부근으로 정찰보냈고, 이 과정에서 1개 대대급 적들과의 교전이 일어났으나 별 피해없이 복귀에 성공한다.
한편 미 해병 1사단장은 해병 1연대에게 도솔산까지 점령해 그 북쪽의 해안분지(펀치볼)를 남쪽에서 감제할 수 있게 하라며 요구했다.
3.11. 6월 16일
목표#14 지점에 자리잡은 2대대가 북쪽 고지군을 점령하기 위해 6중대 소대 하나를 정찰보낸다. 그리고 또 소대 하나를 1304 고지로 정찰보냈는데, 서쪽(목표#20)으로 이동중인 적 소대군을 발견하고, 포격 요청을 넣은 뒤 1304 고지 우측 일대로 산개한다. 그 뒤 오후 2시 55분 경 본대를 보내 오후 4시 45분 점령에 성공한 뒤 뒤따라온 5중대를 합류시킨 뒤 경계를 강화하면서 북쪽 목표#18을 무혈 점령한다.한편 미 해병 5연대는 목표#18을 경유해 그 위쪽 1018고지(목표#19) 능선 일대를 향한 공격을 준비한다.
3.12. 6월 17일
오전 8시 30분경 2대대 7중대가 1018고지를 무혈점령했고, 미 해병 5연대는 오전 11시 30분 경 1018고지 우측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한편 3대대도 목표#20 능선 진지들을 향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자마자 9,10중대가 공격을 개시했고, 이에 북한군들이 박격포탄을 마구잡이로 퍼부으며 저항하자 교통호를 파가며 전진해 오후 12시 30분경 점령에 성공한다.
3.13. 6월 18일
오전에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된 뒤 3대대 10,11중대가 목표#21 능선을 향해 돌격, 오전 11시 30분경에 점령에 성공한다.한편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도솔산(목표#22) 공격을 준비중인 3대대장에게 야간공격 지시 및 일련의 작전들을 '도솔산 작전'이라고 명명해 격려한다.
3.14. 6월 19일
자정 무렵 3대대 11중대는 북쪽 958고지로 우회해 치기 위해 움직였고, 오전 3시 30분 경 10중대도 정면 공격을 위해 움직여 오전 5시 30분경 도솔산 점령도 성공하고 장기간의 전투에 식량, 탄약, 사기 등 모든게 떨어진 적들은 도솔산 서쪽 능선을 따라 872 고지 쪽으로 패주한다.뒤이어 1대대도 오전 8시부터 도솔산 서쪽 능선(목표#23)을 공격해 9시 30분경 점령에 성공했고, 872고지도 미 해병 7연대가 점령한 뒤 3중대에게 인계함으로서 해당 전투는 마무리된다.
한편 도솔산을 내준 북한군은 도솔산 북서쪽, 해안분지(펀치볼) 서쪽에 위치한 대우산에 27사단 32연대를 배치한 뒤 포격과 야간공격으로 해병대 진지들을 괴롭혔고, 더군다나 대우산은 도솔산보다 높은 1179의 고지였기에 이를 점령해 도솔산의 안전을 도모할 필요가 생겼다.
4. 후속 전투, 대우산 전투
4.1. 7월 8일
해병 1연대 2대대 5,7중대, 그리고 예비대로 배속된 10중대로 이루어진 공격대가 대우산 앞 1001 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하지만 길목마다 매설된 지뢰와 저항, 기습공격으로 인해 각자 목적한 위치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일몰을 맞는다.4.2. 7월 9일
10중대가 공격을 시도하나 이조차도 돈좌되자 2대대 공격대는 1대대 1,2중대와 임무교대했고, 1대대 공격대는 돌격을 감행해 오후 5시 15분 경 1001 고지를 점령한다.4.3. 7월 10일
새벽 2시 30분 경 872 고지 일대가 야간기습을 받았으나 3중대가 격퇴한다. 이후 3중대는 임무교대하러 온 2대대에게 고지를 인계한 뒤 1001 고지의 대대 병력들과 합류하기 위해 움직인다.한편 1대대 공격대는 대우산으로 가는 길목에 지뢰와 부비트랩들이 지독하리만치 많자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도솔산 일대를 사수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다.
4.4. 7월 15~17일
적들의 기습 견제를 막아내던 국군 해병 1연대는 미 2사단 예하 38, 23연대, 네덜란드 대대 등과 임무교대 후 재보충을 위해 후방인 홍천으로 이동한다.4.5. 7월 26일
일대 상황을 파악한 네덜란드 대대가 대우산 방면으로 선제공격을 가한다. 하지만 이미 지뢰들과 강화된 진지들로 우주방어를 하는 통에 물러나야 했다.4.6. 7월 29일
저녁 무렵 대우산 정상부에 포탄 115톤을 퍼부은 뒤 미 38연대가 네덜란드 대대의 엄호 속에 대우산을 공격하였으나 이조차도 우주방어에 가로막혔다.4.7. 7월 30일
미 38연대와 네덜란드 대대가 포위 공격을 한 끝에 대우산 점령에 성공한다.또한 대우산을 향해 퍼부어진 무자비한 포격과 점령 과정에서 북한 27사단 주력이 괴멸되었다.
5. 기타
- 전투 도중 북한군이 무전기를 노획하여 전술이나 아군 위치가 유출되자 해병 1연대 장병 상당수를 차지하던 제주 출신들[3]에게 무전 통신 맡겨서 대처했다. 이는 사이판 전투 때의 나바호족들처럼 육지의 한국어와 제주어가 어휘에서 다른 점이 많아 감청 당해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일대에 총포탄이 날아다니고 곳곳에 지뢰, 부비트랩이 산재해 있었기에 각 진지들마다 식량, 탄약을 실어날랐던 한국인 노무자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 이 전투의 승리 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無敵海兵(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실제로는 1953년 8월 12일 해병대 제2연대 창설에 즈음하여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무적해병 문서 참고.
- 경북 포항의 해병대 1사단 대강당 명칭인 '도솔관'도 이 전투에서 유래했다.
- 이후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은 국회 감사문을, 참모장 김성은 대령,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미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또한 1대대장 공정식 소령, 2대대장 윤영준 소령, 3대대장 김윤근 소령, 통신대장 이판개 대위는 미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 또한 1121고지(목표#9) 공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익태 소위, 오정근 소위, 이근식 소위를 포함한 공훈자들에게도 미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으며, 1951년 6월 26일 부대표창도 수여됐다.
- 2013년 유해발굴 당시 도솔산 전적지 일대에서 28구가 발굴되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2013년무렵까지 전국 각지의 전적지에서 총 8417구[4]가 발굴되었으나 세부적인 신원을 확인할 방도가 없어 관계자가 친인척들의 DNA 기증을 호소할 정도였다.#
- 2020년 6월 22일 해병대는 도솔산 지구 전투 전승기념 행사를 거행했다.
[1] 또한 한국 해병 장병들도 전투의 피로가 싹 가시지 않은 상태라 또다시 전방으로 보내진다는 소식에 실망어린 표정으로 차량에 올랐다고 한다.[2] 참고로 후일 포로가 밝히길 이 당시 북한 12사단은 해병들이 야간공격을 하리라 예상하지 못하고 고지에 초병 몇명만 남긴 채 후방으로 내려가 취침하고 있었다고 하니 적절한 판단이었다.[3] 이들의 상당수는 4.3사건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제주도에 훈련소를 설치한 해병대에 입대한 것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비극을 보여주는 일면.[4] 7100여구는 국군, 13구는 유엔군, 1008구는 북한 및 중공군 유해로 판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