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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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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전투
Battle of Inch'ŏn(Inch'ŏn Landing, Operation Chromite)
파일:korean_war_incheon_kor2.png
일시
1950년 9월 15일 ~ 9월 16일[1]
장소
경기도 인천시 북성동[2]·용현동[3]
(現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1가·미추홀구 용현동)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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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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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최용건
병력
75,000여 명
함정 261척
병력 규모 불명
피해규모
222명 전사 1,350명 전사
결과
상륙 작전 성공
영향
서울 수복국군유엔군의 반격 시작
언어별 명칭
영어 Inch'ŏn landing
Battle of Inch'ŏn
Operation Chromite
러시아어 Инчхон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프랑스어 Bataille d'Incheon
독일어 Landung bei Incheon
스페인어 Batalla de Incheon
중국어 [ruby(仁川, ruby=Rénchuān)][ruby(登陆, ruby=dēnglù)], [ruby(仁川, ruby=Rénchuān)][ruby(登陆战, ruby=dēnglùzhàn)]
일본어 [ruby(仁川, ruby=インチョン)][ruby(上陸, ruby=じょうりく)][ruby(作戦, ruby=さくせん)]

1. 개요2. 전개
2.1. 배경2.2. 상륙작전의 결정
2.2.1. 작전계획2.2.2. 인천의 험준함2.2.3. 인천으로 결정된 이유
2.3. 준비
2.3.1. 첩보수집2.3.2. 참전부대 구성2.3.3. 양동작전
2.4. 북한군의 예측2.5. 상륙
2.5.1. 개요2.5.2. 팔미도 등대 점령2.5.3. 월미도(그린 비치) 상륙2.5.4. 레드 비치와 블루 비치 상륙
2.6. 서울로의 진격2.7. 낙동강 전선의 반격
3. 평가
3.1. 6.25 전쟁의 전세 역전3.2. 동쪽 진격문제와 원산 상륙작전의 문제점3.3. 북한의 역사 왜곡3.4. 한국 내 일부 비난3.5. 민간인 희생
4. 기타5. 관련 매체6.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인천 상륙 작전(Inch'ŏn Landing[13][14]) 또는 인천 전투(Battle of Inch'ŏn)는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 작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과달카날 전역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미군은 이 전쟁 초기에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하며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게 된다.

코드네임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보안 유지에 특히 신경쓰고자 작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들 중 크롬 광석에서 따와 지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상륙작전으로 일어난 전투의 일부인 '월미도 방어전투'라는 표현만 사용하고 이에 대한 기념행사를 한다.

2. 전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온 참전군인 이봉식(해병대 1기, 1931.2.19.~2024.3.22.) 이 언급한 내용.

2.1. 배경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조선인민군대한민국 국군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된다. 조선인민군은 낙동강까지 계속 승리하며 겉보기에는 유리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이 소련에게 공여받은 250여대의 T-34전차의 경우, 서울에서 탱크 쇼크에 맛을 들인 북한군 수뇌부에 의해 제대로 된 제병 합동 전술을 만들지 않고 무의미하게 기갑전력을 소모시켰고, 결국 낙동강 전선에서 별다른 전술 없이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회용으로 소모해버린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점령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자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UN군의 참전 덕분에 동수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 워커 중장우주방어(방어전략)로 간신히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산을 저지선으로 선택할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게 되어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를 할 때는 적이 보이므로 유리하지만, 역공을 하려면 도강부터 해야 하고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 및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 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2.2. 상륙작전의 결정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에 나섰다. 한강변에서 전선을 확인 후 지상군 투입을 결정한다.
한국군은 보급부대나 체계에 있어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유사시 작전계획도 세워져 있지 않으며 설사 계획이 갖춰져 있더라도 퇴각 중에 발생한 손실로 제대로 실행하지 못할 것이다.
맥아더 원수 전선시찰 보고 전문 中
준비되지 않은 국군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다음 계획(연합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에게 북한군의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 계획과 상륙지점을 연구를 지시하고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에 상륙훈련을 지시했다. 또한, 7월 4일 상륙작전을 위한 공식 회의를 소집했다. 인천을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다는 일명 블루 하츠(Operation Blue Hearts) 작전이었다. 이 작전계획 역시 인천상륙작전으로 7월 22일에 실시하려고 했다. 인천으로 들어와서 교통로의 중심인 서울지역을 장악하면 북한군의 병참선을 끊을 수 있다는 건데, 그때는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게다가 상륙전 준비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블루 하츠 작전은 7월 20일에 공식적으로 폐기된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펼쳤을 때 맥아더 장군은 부산 주변 포위선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병력에 많은 제한이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해법으로 폐기했던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hearts)을 바탕으로 다시금 상륙작전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작전명 Operation Chromite로 실행된 인천 상륙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당시 UN군 사령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이자 일본 점령 연합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많은 약 50여 회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상륙작전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맥아더가 수행한 상륙작전은 '아일랜드 호핑'이라고 불리며, 이는 일본군의 요새 하나하나를 격파하는 것이 아니고 후방으로 상륙을 해서 병참선을 끊고 섬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을 고립시켜 격퇴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휘하 육군과 해병대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맥아더는 적 후방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을 가두는 방식으로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침략군 전체가 와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까지의 육상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이는 곧 인천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최적의 위치임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 점령 사령관 당시 한반도 내 일본군을 몰아내고 무장해제를 시키는 임무를 담당했고, 이를 위해 1945년 9월, 그는 미군을 인천으로 상륙시켜 이를 달성하고 그 자료를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즉 이미 대군을 인천으로 들여보냈던 경험이 이미 있었기에 상륙작전을 실시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추가로 산지가 70%인 한반도의 지형은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같은 중장비를 몽땅 버리고 몸만 빠져나오기도 힘들어지므로, 매우 비효율적인 후퇴를 강요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를 따라서 후퇴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터널이 많아진 21세기 현재에나 어느 정도 가능한 이야기며 지금도 터널 몇개를 막으면 답도 없다. 게다가 한국의 고속도로는 산지와 인구밀집 지역을 피하기 위해 고가도로인 곳이 상당히 많다. 이런 가도에 탱크와 장갑차량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붕괴 위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적 포병이나 공군의 과녁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15]

2.2.1. 작전계획

작전계획이 '100'이라는 것은 기본 계획이라는 뜻이다. A, B, C, D는 각각의 방책인 것이고 A부터 가장 최우선책, B가 차선책, C와 D는 예비 및 우발계획이다.

2.2.2. 인천의 험준함

이에 참모들이 처음 생각한 곳은 군산시였다. 하지만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좋으나 북한군의 보급선을 하나도 끊지 못하며, 북한군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런 점 및 맥아더 장군 자신의 소신으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다.

하지만 참모들과 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본부도 인천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데,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파일:인천상륙작전5.jpg

위와같이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특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특히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Chales Turner Joy) 제독은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일부 참모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5000분의 1 성공 확률의 유래에 대해 자세히 고찰해 보면, 8월 23일 도쿄의 인천상륙작전 전략 회의 시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조이 제독이 인천은 해군 작전상 많은 지리적 핸디캡을 갖추고 있다고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런 확률 수치를 언급했고[16] 그 후 맥아더가 작전 직전 언론 브리핑을 할 때 "이번 작전은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밖에 안될 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정리하자면 미군 자체적으로 혹은 언론사 등 외부 기관에서 여러가지 변수 등을 고려하여 과학적으로 산출해낸 성공 확률이 아니고 조이 제독은 반대하는 입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평소의 말버릇처럼 "엄청나게 어려운 작전인데 제가 해내겠습니다."라고 강조하기 위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5000분의 1이라는 확률 수치에 비유하여 자신들의 의중을 임팩트있게 표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5000분의 1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성공 확률에 상식적으로 8만명에 가까운 장병들의 목숨을 거는 도박같은 작전은 애초에 실행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이 성공 확률을 그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완전 오버이고, "난제가 많은 대단히 어려운 작전이다."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무방하겠다.

관련하여 2020년 6월 12일 국방TV 프로그램 '순삭밀톡'에서 6.25 전쟁 70주년 특집을 다루며 인천상륙작전 기밀문서 등을 소개하였는데, 미군이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을 대단히 낮게 보고 있었다거나 미 수뇌부와 맥아더 장군과의 마찰이 대단히 첨예하였다 등의 이야기들은 기밀문서가 해제되기 전 인천상륙작전을 다루던 소설 등에 의해 과장, 왜곡된 부분이 크다고 지적하였다.

국방TV의 기록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한번 더 인천 상륙작전에 대한 과장과 왜곡된 부분을 지적하였다.#(31분 52초~37분 50초)

2.2.3. 인천으로 결정된 이유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지로 결정된 것은 일단 인천 이외에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맥아더는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고 결국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게 된다. 다만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에 대해서는 맥아더 이전에, 심지어 6.25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미군 내에서 충분히 유력한 작전으로 검토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Clay Blair의 『The Forgotten War』에 따르면, 1950년 6월 19일 미 국방부가 소위 SL-17 계획을 승인, 배포했는데, SL-17 계획은 북한군의 남침 시에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안정화하고 9월 30일까지 인천 인근에서 상륙작전을 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고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1950년 6월 26일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맥아더사령부)가 SL-17의 복사본 50개를 요구했다고 한다.

2.3. 준비

2.3.1. 첩보수집

한편 맥아더 원수는 인천에서 치를 예정인 전투와, 인천까지 상륙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손원일 제독에게 획득하라 지시했다.

8월 17일부터 함명수 소령(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총원 17명)가 영흥도덕적도를 근거지로 하여 X-ray 작전에 들어갔고# 북한군의 장비들과 병력들의 배치, 해로에 부설된 기뢰들의 위치 등 첩보수집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9월 14일, 해군 첩보부대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었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북한군과 교전했다. 그들이 벌어준 시간 덕분에 해군 첩보대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북한군에게 생포될 경우 고문으로 인해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했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고, 2012년에는 윤영하급 고속함 10·11번함 PKG-722·723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했다.[18]

이와는 별도로 미국 해군 정보장교 유진 F. 클라크 대위(Lieutenant Eugene F. Clarke)가 지휘하고 계인주 대령, 연정 대위 등 국군 출신 장교 및 KLO부대원이 포함된 첩보부대가 9월 1일 영흥도에 잠입하여 영흥도를 주요 거점으로 인천 앞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집,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하는 트루디 잭슨 작전(Operation Trudy Jackson)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첩보부대가 9월 15일 0시50분, 팔미도 등대의 불을 켰다.# 한편 팔미도 등대 점등의 주체와 관련하여 첩보부대 지휘관 유진 F. 클라크 대위와 KLO부대원 최규봉의 주장이 서로 달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2.3.2. 참전부대 구성

2.3.3. 양동작전

한편 아무리 무리해서 인천으로 계획을 잡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듯한 공격이 다른 곳에도 실시되었다.

즉 인민군을 교란할 양동작전을 했었는데 양동작전이 펼쳐진 곳으로 남한 지역에는 삼척시, 군산시, 북한 지역에는 함경남도 신포시 마량도, 남포시 등이 있었다.

인천에 상륙한다고 해서 D-day(9월 15일)에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한번에 공격한 것이 아니다. 인천 상륙작전 이틀 전에는 인천~군산, 삼척, 마량도(함경남도) 등 주요 해안에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졌다. 교란 및 기만작전이었다. 이를 통해 적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인천상륙에 방해가 될만한 주요 시설을 파괴했다.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다. 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월미도를 비롯해서 인천지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한다. 뿐만 아니라 적의 판단을 흐리고 혼선을 주기 위해 인천에서 군산 사이의 해안선에 지속하여 포격을 했다.

양동작전의 예시로 알려져 있는 장사 상륙 작전[24]의 경우, 동일 날짜와 동일 시간대에 진행되었다는 점과 보급선 차단이라는 상륙 목적을 감안한다면 양동작전보다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진군을 위한 지원작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2.4. 북한군의 예측


조선인민군의 공세가 낙동강에서 저지된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은 역습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유엔군이 후방에 상륙 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를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북한에 유엔군이 후방에 상륙 작전을 실시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고, 김일성 또한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유엔군이 상륙 작전을 실행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수긍했다.

중국 측에서는 서해안의 남포, 인천, 군산동해안원산 모두 후보지로 예상했다. 또한 미군이 압도적인 제공권과 제해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동시에 상륙 작전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다 보니 정확히 한 군데를 찍어 집중적인 방어를 펼치기가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설령 한 곳만 주공이고 나머지가 조공이라고 해도 모두 다 대비해야 하는데다가 어느 한 곳이 제대로 뚫리면 그 쪽으로 주공이 전환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운데도 린뱌오와 같은 전략가들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유력하다고 정확한 예상을 하기도 했다. 이에 동의한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고 전문을 보냈고, 김일성 또한 나름대로 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기는 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조선인민군 해군[25] 조선인민군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 진지를 만드는 등의 나름의 준비를 했다. 그 외에도 그동안 한국군과 미군에게서 노획한 물자들을 부평에 집중시켜서 상륙 작전 같은 상황이 닥치면 근방에 예비 병력을 집중시킨 후에 물자를 나누어주고 무장시켜서 방어 작전을 수행하려고도 했다. 덕분에 인천 상륙 작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유엔군과 한국군이 조선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적 수병항공병 등을 사살 혹은 생포했다는 내용이 여럿 나온다.

그러나 빨치산 중대장 출신으로 백명 미만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는 소련 육군 대위 출신인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집착하여 기껏 인천을 방어하기 위해 확보한 육군 병력도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가 날려먹는 삽질을 해버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일성이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한 것이다.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병력이 처음 상륙했을 때 당장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정도 뿐이었다. 그나마 가장 쓸만한, 앞서 언급한 육군 18사단도 인천 상륙 작전 직전에 낙동강으로 가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내려가 버렸다.

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기뢰 부설함들이 들켜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 다 발견돼서 조기 제거되었다.

2.5.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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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Pathè의 기록영상. 상륙 초기의 모습이 담겼다. 함대의 포격 엄호 속에 해안으로 돌진하는 유엔군 상륙정들

2.5.1. 개요

인천상륙작전은 하루만에 완료되지 않았다. 최초의 상륙은 1시간만 이루어졌다. 이유는 만조가 1시간 정도 지속됐기 때문이다.
이후 함대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다가 다음 만조까지 12시간을 대기한다.
이렇게 하루 2회씩 5일간, 총 10회에 걸쳐 병력, 물자, 장비 등의 상륙작전을 진행했다.

인천 상륙작전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파일:attachment/k27_10260171.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chon_landing_map.jpg

상륙 하루 전 9월 14일, 인천 방면에 주둔하던 북한군은 평양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이를 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이라고 한들 별 도리가 없었다. 스탈린은 미국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꺼렸고 이 때문에 한반도에 파견한 공군도 소련군 소속이란걸 들키지 않기 위해 위장했다. 스탈린이 돕기로 마음 먹는다 해도 어차피 상륙 하루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인천의 북한군을 도울 수가 없었다.

참고로 연합군 함대의 인천 집결 경로는 아래와 같다.
파일:연합군함대인천집결경로.jpg

1950년 9월 11일, 요코하마 : 미 육군 7사단
9월 11일, 고베 : 미 해병 제1사단
9월 12일, 부산 : 미 해병 제5연대, 국군 해병 제1연대
9월 12일, 사세보 : 마운트 맥킨리(인천상륙작전의 지휘함), 로체스터(제7합동기동부대의 기함)

요코하마, 고베에서 출항한 병력은 포인트 아이오와에서 사세보에서 출항한 함대와 합류한다. 이후 포인트 아칸시소에서 부산에 출항한 함대와 합류 후 9월 14일 포인트 캘리포니아를 지나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집결한다.

당시 규모는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으로 미국 225척, 대한민국 15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이다.

2.5.2. 팔미도 등대 점령

9월 15일 0시 50분, 미군과 한국군, KLO의 연합 특공대가 등대를 무혈로 점령했다. 이들은 등대를 점등시켜 상륙부대의 길잡이가 되었다.# 한편 팔미도 등대 점등의 주체와 관련하여 첩보부대장 유진 F. 클라크 대위와 KLO부대원 최규백의 주장이 서로 달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2.5.3. 월미도(그린 비치) 상륙

9월 15일 05시 00분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으로 로켓을 퍼부었으며, 0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한다.
파일:attachment/soldiers_climbing_sea_wall_in_inchon.jpg
방파제를 넘는 미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경, 인천, 신원미상의 미 해병대 사진병 촬영)[26]
USS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지휘부는 상륙시간(L-아워)을 06시 30분으로 확정한다. 미 해병대의 제1사단 제5해병연대 3대대원들은 06:00시까지 여러 척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 옮겨 탔다. 그 상태에서 신호가 떨어지자 월미도 북단의 그린 비치로 돌격한다. 상륙 제1파에 속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7척이 해안에 도달했을 때 시간은 06시 33분이었다. 미 해군 수중폭파대가 해안에 있는 침몰선의 잔해를 제거하는데 실패해 차량 및 병력 상륙자들은 우회 기동을 펼쳐야 했다.

전투기들이 불과 45미터 전방을 기총사격으로 훑는 가운데 제1파 인원들은 해안 상륙에 성공한다. 상륙 제2파는 2분 뒤인 06시 35분 추가로 2개 중대를 싣고 온다. 북한군의 저항으로는 산발적 무지향 사격만이 있을 뿐이었다. G중대는 재정비를 위해 잠시 정지했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무선전신국 언덕으로 돌진했다. 그곳에서도 북한군의 저항은 약했고,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은 항복을 했다. 06시 55분 성조기가 언덕에 게양된다.

한편 H중대는 월미도 북단의 산업지역의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과 연결된 방파제를 차단하였다. I중대는 참호 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1개 소대로부터 수류탄 기습공격을 당했다. 그러나 미 해병대 전차소대가 전차포를 참호 속에 발사했고, 약 30명의 북한군이 투항한다. 투항하지 않고 동굴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은 해병들이 대동한 M4A3 셔먼 불도저 2대에 그대로 생매장 당했다. 미 해병들이 월미도를 휩쓸고 다니며 소탕작전을 계속했고, 08시 00분 미 해병대는 무선으로 기함에 월미도 점령을 보고한다.

10시 00분, G중대의 전차와 보병 전투단은 남쪽 제방을 통해 소월미도로 진격한다. 이곳은 조선인민군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나 곧 박격포와 해병 전투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며, 오전 11시 15분쯤 소월미도의 점령이 완료된다. 이때까지 사상자는 미군은 부상자 17명이 전부인 반면, 북한군은 사망자 108명에 부상자가 137명이었다. 월미도 곳곳에 널려있던 동굴째로 생매장 당한 100 ~150여명을 더하면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2.5.4. 레드 비치와 블루 비치 상륙

9월 15일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한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선봉 상륙부대인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상륙돌격 준비를 마쳤고, 미 육군 7사단, 해병 제1연대 역시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Inchon.png
H-아워 8분 전에 미 해병대 제5연대전투단은 차량 및 병력 상륙정을 타고 공격개시선을 넘어 레드 비치로 돌진했다.

레드 비치의 상륙 제1파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는 사다리를 2개씩 보유하고 있었고, 각 소대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2척에 나누어 타면서 각각 2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주정조(boat team)[27]를 형성했다.

여기 탑승한 미 해병대 제5연대 제1대대 A중대 돌격소대들은, 레드 비치 좌익에 상륙해 공동묘지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추가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에 타고 있는 E중대 2개 돌격소대는 레드 비치 우익에서 영국 영사관 고지 점령을 맡았다. 미리 월미도에 상륙한 제3중대에서 박격포 엄호사격을 했다.

공병 1개 팀이 방파제를 따라 전진해 전차의 통로를 개척하면, 그곳을 지나간 전차들이 북한군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북한군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는 곧바로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을 개시했고, 일부 병력은 해안 경비를 맡으며 후속 상륙 병력을 도왔다. 인천 곳곳에 위치한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28] 전술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미군은 인천항의 도크를 손쉽게 확보하였고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잔존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포위해서 일사천리로 소탕해 나갔다.

그리고 블루 비치에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역시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였다.

이어서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상 성공적으로 끝났다.

18일 오후, 상륙군 후속부대로서 미 제7보병사단과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였다.

그 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하게 매듭지었다.

작전의 총 지휘는 미 육군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병력의 총지휘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다.[29]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한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이다.

2.6. 서울로의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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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낙동강 전선의 반격

파일:inchon_sangryuk_2.jpg
인천 상륙작전의 시기에 맞추어 낙동강 전선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북한군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유엔군이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은 지지부진한 성과만 보였는데, 9월 20일 무렵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게 알려지자 북한군은 붕괴되고 말았다.

한반도 내부의 육상교통의 중심 겸 집결지인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서부가 유엔군에게 장악당했으므로 보급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는 백두대간의 존재 때문에 불가능했다.

사실 북한군의 보급로는 진작에 위태로웠다. 군대는 공세종말점에 다다랐고, 유엔군의 공습 때문에 기존에 하던 철도수송은 낮에는 열차가 터널 같은데 숨었다가 밤에만 움직일 수 있었고 선로가 파괴되었거나 복구중인 구간은 보급품을 , 사람 등에 지우고 운반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거의 모든 병력을 낙동강에 몰빵했기에 보급로 확보에 증원할 인력과 자원 모두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인프라도 깔리지 않은 첩첩산중으로 보급로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급이 끊어지고 유엔군이 치고 올라오자 낙동강 전선 일대의 북한군 병력은 와해됐고, 2만이 넘는 정도의 병력만이 제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군 중 12,000여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고, 10,000여명이 좀 넘는 정도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으며,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병력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한 내에서 강제징집된 인원들은 도망쳐서 원래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이 입은 타격은 그냥 '전멸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 뒤는 쭉쭉 밀려날 수밖에.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은 파죽지세로 저 멀리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된다.

3. 평가

3.1. 6.25 전쟁의 전세 역전

인천상륙작전은 대한민국 국군UN군의 열세에 있었던 6.25 전쟁의 전황을 단숨에 뒤집었다. 더는 후퇴할 수 없던 궁지에 몰린 대한민국이 이 작전으로 역전의 카운터를 때려 전황을 북한군 우세에서 국군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반격의 신호탄을 울렸다. 이후 북한군은 정전협정때까지 예전같은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한반도에서 38선 이북과 이남을 오가는 대용량 수송 가능한 교통수단은 모두 서울을 거쳐갔다.[30] 따라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성공은 38선 이남의 조선인민군에 대한 보급이 끊기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과 인천-서울의 한국군-UN군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륙작전 성공 이후 이남의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되었고, 오히려 한국군과 UN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게 된다.

많은 군사학자들도 이 작전을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이라 평한다. 미국의 군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스펜서 C. 터커(Spencer C. Tucker)는 인천 상륙작전을 "훌륭한 성공이며 거의 결점 없이 실행되었다"(a brilliant success, almost flawlessly executed)고 극찬했다.

3.2. 동쪽 진격문제와 원산 상륙작전의 문제점

1990년대 이후 현대 군사학자들은 인천 상륙작전 자체는 흠이 없었지만 이후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인천-서울 라인. 즉 한반도의 서부를 장악한 후, 바로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면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장악해 당시 북한군의 주력을 싸그리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에서 원산 지역의 바다에 대규모의 소련제 기뢰밭이 깔린 것에 직면하여 기뢰제거에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한국군 기동병력이 원산시에 더 빨리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군의 진격이 적군의 후퇴보다 더 빠를 리가 없으니, 이는 상당수의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넘어 후퇴 후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것이 전쟁을 종결 짓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일본에서 저술된 6.25 전쟁에 따르면 유엔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을 이 원산 상륙으로 꼽는다. 여기서 언급한 바로는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비해서 경력과 학업성적 그리고 1920년도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아주 고참이었다. 맥아더가 육참총장을 할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부관이었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2차대전 중에 맥아더는 필리핀 철수를 하였고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지 못한 반면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럽전선 총사령관으로서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였고 이러한 사실에 맥아더는 약간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게 된 맥아더는 실제 10군단을 미8군에 배속시키지 않고 직할부대로서 2개의 군을 지휘하는 고집을 부렸다. 이에 따라 백두대간을 기점으로 전선을 나누어 10군단을 원산 상륙 후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하게 명령했다. 여기서 원산 상륙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때까지 미국 정부와 유엔군의 작전목적이 38선의 회복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북으로 진격도 안 되었고 차량이동이 기본인 10군단이 동쪽으로 진격해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왕 병력은 빠져나와야 하고 도로는 엉망인데 북한군은 괴멸되지 않았을 거고 평양도 사수할 거니까 원산으로 상륙한 다음 평양을 치자는 것이 맥아더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미 태평양 사령부에 속하는 모든 배를 동원해서 원산상륙을 시도했지만 서울에서 병력을 다시 인천으로 빼서 다시 장비를 하역하고 병력을 탑승시킨 후 원산으로 가는 동안 이미 한국군 1사단이 먼저 원산을 점령하게 되고 이 병력들은 행정상륙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갑자기 아주 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미 원산 앞 바다는 기뢰천지가 되어있었고 소해병력은 일본 소해정까지 다 끌고 와서도 한 달 이상을 소해 해야했고 모든 수송선은 여기서 열중쉬어 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어서 유엔군 참모부는 반대했지만 맥아더가 원산상륙을 결정하는 것을 감히 막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에 이러한 미 10군단 병력이 태백산맥은 정녕 넘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경춘가도를 따라 춘천으로 진격했으면 그만큼 인천상륙작전의 성과가 더 나왔을 거라고 판단되었고, 원산상륙의 보급상의 문제로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이 그렇게 빨리 후퇴할지를 생각하지 못한 결정적인 판단미스였다. 이때 참모진의 원산상륙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탄약보급선의 문제였는데 인천항과 김포공항, 경부철도로 보급선을 유지하게 되는 유엔군 입장에서 부분 파손된 김포공항과 철도가 중간중간에 끊겨서 긴급복구를 했지만 아주 서행 운전해야 하며, 중간중간에 잔류한 북한군의 습격으로 보급선의 안정적 유지가 힘든 입장에서 인천항은 유엔군의 생명줄이었다.

하지만 이 원산 상륙에 의해서 탄약 재고량이 2일치로 간당간당하게 되고 원산 상륙 후에도 이 탄약재고량은 겨우 예비분 2일치를 유지하는 상황이 청천강 유역에 유엔군이 도착한 시점의 일이다. 이때 충분한 탄약 재고량이 있었다면 평양도 포기 하지 않았을 것이고 청천강 패전 후에 임진강 유역까지 밀려나지 않았다. 평양 철수의 제일 큰 이유가 중공군을 파악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보급량의 부족으로 미군의 강점인 화력을 쏟아부을 수 없게 된 게 가장 큰 이유이다. 대동강 방어선, 그러니깐 평양-원산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종심이 좁은 지역으로서 충분한 화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방어가 가능했을 것이지만, 여기서 이 보급선의 문제로 대동강 방어선을 방어하지도 않고 급하게 포기하게 된 것이다. 여튼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까지는 명장 소리를 들을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지만, 그 후의 북한군 잔존세력의 전력을 과대파악 하는 바람에 한번 잘못 끼운 단추가 다른 단추까지 계속 잘못 끼우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

사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 수석졸업, 최연소 장군, 최연소 사단장, 최연소 참모총장 등 군인으로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은 한국전쟁을 빨리 마무리해서 전쟁영웅으로 명예롭게 예편한 후 미국 국민의 열렬한 인기를 등에 업고 공화당에 입당하여 1952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국민들은 루스벨트, 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장기집권에 신물이 나서 공화당후보로 누가 나오더라도 대통령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었다. 이런 야망과 쇼맨쉽, 조급함 등이 현지 지휘관이나 참모들, 심지어는 트루먼 대통령의 말도 무시하고 무능한 예스맨들[31]과 합심하여 무리하게 진격하였다가 모든 걸 망쳤고 본인도 불명예 제대에 국민적 비난으로 백악관 입성의 꿈은 날아가 버렸다.

결론적으로
일단 군사학자들의 의견 중 일부는 타당하다. 김일성이 서울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 서울로 진격했으면 서울 시가전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원산 상륙작전의 경우 효용성 자체도 문제가 있고, 꼭 하더라도 이미 상륙한 부대를 다시 인천항에 집결시켜서 다시 배에 탑승시킨 다음, 동해안까지 빙 돌아서 항해한 다음에 상륙하는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별도의 부대를 빨리 보내는 편이 바람직했다.

그런데 이 의견에는 당시의 강원도백두대간의 험준함과 교통시설 미비를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다. 지금도 강원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시설이 미흡하며, 특히 대량의 물자를 육로로 운송할 수 있는 철도 시설은 21세기의 시점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서울에서 정동쪽 방향으로 진격할 경우, 경기도 경계를 넘어서부터는 도로라고 이름 붙이기도 뭐한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 하며, 지독한 산악지대를 횡단해야 동해안에 이르게 된다. 서울 탈환 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수원 방면을 맡은 부대의 일부가 서울 남쪽에서 한강을 도하해서 남산을 점령하고 시가전을 지원한 사실이 있을 정도였는데, 소수의 기동부대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횡단한다고 하면 북한군의 저항이 없다고 해도 속도도 느리며, 포위망을 구축했다고 해도 간신히 길만 막은 상태라 능선을 따라 도주하는 북한군을 완전히 포위섬멸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이는 북진 작전에서 이미 산악지대에 아군이 맹진격하고 있었으나, 금천에 포위된 북한군이 장비를 버리고 인원만 탈출한 것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이미 증명된다. 게다가 북한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재수 없으면 기동부대가 역습받아서 괴멸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산악전의 쓰라림은 한국군이나 UN군이 엄청나게 겪은 일이다. 좋은 것을 알면서도 능력이 못 따라가서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지리학적으로 한반도에는 추가령구조곡이란 특이한 지형이 있다. 추가령구조곡은 서울-의정부-동두천-연천-철원-평강-세포-고산-안변-원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평탄하고 긴 골짜기이다. 고대부터 동해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이며 삼방협곡을 제외하고는 워낙 넓고 평탄하다 보니 분수령 혹은 분수계가 어디인지도 애매할 정도이며 백두대간이 추가령구조곡으로 인해 끊어졌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기술적으로 열악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경원선 철도를 놓을 수 있었을 정도이며 당시 많은 서울시민들이 경원선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피서를 가기도 하였다. 현재도 경원선 이외에 3번 국도가 지나가는데 이는 군사학적으로 중요한 기동로 및 보급로이며 군부대들이 겹겹이 밀집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육로를 통해서도 충분히 진출이 가능했으며 경원선 철도를 이용해 보급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상식적이지만 병력이동시 삼방협곡지역을 조심해야 하는데 경치는 아름답지만 자칫하면 죽음의 계곡이 될 수도 있으므로 주변 감제고지들을 철저히 장악해야 하며 철령고갯길도 기동은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병력을 배치하여야 한다. 위에서 춘천을 빨리 점령했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춘천을 통해서 원산으로 가는 것은 화천, 김화, 금성, 창도, 회양을 거쳐서 철령을 넘던지[32], 아니면 인제를 거쳐서 여러 고갯길을 넘어 동해로 빠진 다음 해안선을 따라서 북상하는데 대규모병력이 이동하기에는 훨씬 멀고, 험하고, 위험하다. 차라리 의정부에서 축석고개를 넘어 포천, 김화, 금성, 창도, 회양을 거쳐 철령을 넘는 게 멀리 우회하긴 하지만 춘천을 거치는 것 보단 훨씬 낫다.

그러나 추가령구조곡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삼팔선을 돌파해야 한다. 북진작전이 빠르게 개시된 관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의 UN군의 목적은 한국의 구원 및 삼팔선 이남 영토의 탈환이지 북한을 UN군이 침공하는 것이 아니다. 인천 상륙작전 실행시기까지 북한 침공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인천 상륙작전의 성과를 본 다음에 결정하려고 한 상황이었으며 원산 상륙작전도 인천 상륙작전이 대성공한 만일의 경우를 예상한 예비작전 수준에 불과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처음부터 삼팔선을 돌파해서 북한을 침공하는 추가령구조곡 이용안은 애초에 검토사항도 아니었다.

실제로 인천 상륙작전의 대성공으로 인해 예상보다 북한군이 빠르게 붕괴하면서 10월 1일에 한국군이 삼팔선을 넘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UN군은 삼팔선에서 진격을 정지해야 한다는 명령이 살아있는 상태였고 이걸 해결하려고 맥아더가 지금 이 상태로 방관하면 혼자 진격하는 한국군이 북한군에게 허리를 끊겨서 괴멸당할 것이라고 미국 정부에 소리를 지른 끝에 10월 9일에 와서야 미국 내에서 반쯤 승인이 날듯말듯한 상황에서 UN군이 현장판단으로 북진을 시작하자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 추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지연전 및 방어전에서 경험한 산악전의 쓰라린 아픔과 삼팔선 이남 지역의 중부지방에 쓸만한 동서교통로가 없는 상황에서는 원산에 상륙작전을 펼치는 것을 충분히 고려할 만 했고 실행할 필요도 존재했다. 문제는 북한군의 붕괴가 너무 빨라서 한국군의 진격이 너무 빠른 것 때문에 실행중인 상륙작전을 취소하기가 곤란해졌다는 게 큰 문제였고 북진작전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결국 첫 단추를 잘못 채운 격이 된 원산 상륙작전으로 인해 북진작전은 엉성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동안의 산악전에서의 쓰라림과 한국군의 허약함 및 맥아더의 개인적인 야망 덕분에 북한 내부의 좁은 지역에 방어선을 건설한 후 낙동강 방어선처럼 엄청난 물량을 동원해서 화력전을 하는 동시에 산악지대에서 피튀기는 전투를 하면서 전쟁을 길게 이어가고 전쟁비용도 빠르게 증가하여 미국 국가재정에 압박을 가하는 것보다는 빠른 전쟁승리 후 종결을 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평양 - 원산선이나 청천강 - 함흥선과 같은 북한 내부의 좁은 방어선을 철저하게 만들지 못하고 한반도 북쪽 국경지대까지 급속전진하다가 중공군에게 대타격을 입게 된다.

만약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대로 평양과 원산 라인 정도에서 강력한 방어라인을 구축하고 진군했다면 아무리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맞선다 하더라도 시야가 훤히 보이는 넓은 평지에서 미군의 강력한 화망 앞에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이고, 버텨 봤자 보급난과 UN군의 폭격으로 얼어죽거나 굶어죽게 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되면 마오쩌둥 입장에선 한반도에 주력이 고립된 상황에서 잘못하다가는 빈집털이(중국본토상륙작전)[33]를 당할 수도 있으므로 매우 굴욕적인 협상을 해야 하며 따라서 역사가 크게 바뀔 수 있었다. 어찌보면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욕심때문에 김일성이 인천상륙작전을 허용했다면, 반대로 맥아더는 그 욕심으로 1.4후퇴를 하게 된 셈이다.

한국군 또한 부대끼리 공에 대한 지나친 경쟁과 욕심으로 평양 진입시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고 무질서하게 아군끼리 오인사격까지 벌이는 등 추태를 보였고 그 후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빨리 압록강 물을 마시고 싶어 하신다는 말을 듣고 보급이고 부대 간 간격이고 연계고 수색이고 할 것 없이 서로 앞다투어 압록강을 향해 질주하는 바람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에게 괴멸당하고 미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크게 일조하게 된다. 무리한 진격이라고 평가된 미군도 청천강까지만 진출했는데 전투력이 훨씬 떨어지는 한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니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3.3. 북한의 역사 왜곡

북한에서는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인즉 9월 13일에 시작되었고 사흘 동안 월미도에서 해군 병력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안전한 철수를 위해 처절하게 싸워서 해안포 4문으로 1,000대의 항공기, 수백척의 함선을 동원한 5만명이나 되는 미일 연합군의 진격을 몇일간 막아내는 대승을 거두고 옥쇄했으며 맥아더가 패배를 덮고자 9월 15일로 날짜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패전을 승전이라고 날조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김일성 또한 이 월미도 용사들이 3일간 싸워 적들의 상륙기도를 저지시켰을 뿐만아니라, 구축함 3척을 포함하여 13척의 적함선을 격침격파했다.고 주장했다.

실상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는 개전 당일 미 해병대에 의해 단 두 시간 만에 반도 넘는 190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어 전멸했다. 전투 내용도 변변치 않아서 진지에 숨어 저항하다 불도저를 동원해 진지를 파묻어 버리는 바람에 생매장당한 인원도 상당수 있을 정도였으니 월미도 수비대가 거둔 전과란게 아군 사살 1명.

게다가 북한쪽 기록에는 일본 제국 해군도 참전했다고 되어 있지만 당연히 사실무근이다. 구 일본 제국 해군의 경우에는 옛날에 해군에 소속된 인원들이 소해정들이 원산 등지의 기뢰 제거에 투입되어 1척이 기뢰에 접촉해 가라앉고 승조원 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은 게 전부이다. 원산소해작전에 구 일본 해군이 투입되는 것에 말이 많았지만 원산은 기뢰밭이었고 이 당시 미 해군의 소해정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며, 그러면 미 본토나 유럽에서 소해정들이 증원을 와야 하는데 함정의 크기상 장거리 항해, 빠른 항해가 불가능했기에 강행되었다. 덤으로 구 일본 제국 해군 인원들은 인천에서는 작전하진 않았다는 것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답이 없다.

여기서 해군 전투라면서 해군 군함이 안 나오고 해안포 부대가 주역으로 나오는 것은 북한 해군의 함선 전력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원래 6.25 개전 당시 북한 해군은 어뢰정 4척 등 고속정과 상륙정 몇 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개전 초 어뢰정 두 척을 UN 해군에게 상실한 뒤로 수상전을 사실상 접고, 위장어선을 이용한 기뢰 부설 정도의 임무만 종전 시까지 수행했다. 그러니 해안포 부대가 작품의 주역이 된 것.

개전 극초반에 북한 해군이 활동이란 것을 하고 있을 때는 어뢰정이 미 해군 순양함 USS 볼티모어 함을 격침시켰다는 구라는 치고 있다. 그 순양함은 6.25 전쟁 당시 미국 본토에 있었다. 뭐, 일단 북한 어뢰정 몇 척이 주문진 앞바다에서 UN군 순양함을 공격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순양함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못주고 일방적으로 털려나갔다. 일각에선 이들이 동해상에서 작전하던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의 순양함을 오인 공격하고 나서 거짓 보고를 한 것이라 여기기도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런 이유로 북한에서는 패전을 부정하며 월미도 방어에 성공했다며 방어전 승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황건의 불타는 섬이라는 대하소설이 바로 이 월미도 승전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 월미도예시[34] 역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북한 해군 해안포병들이 ZiS-3 야포와 자돌폭뢰로 미국 신형 구축함을 격침시키는 장면이 압권인 작품. 해당 신형 구축함은 기어링급 구축함으로 추정되는데, 구축함이 포탄과 연료가 모두 바닥나 멈춰있지 않은 이상은 76 mm 구경의 소구경 야포로는 못 잡는다. 몇 발을 맞춰도 구축함은 큰 피해가 없고 오히려 야포만 함포에 걸려 박살나는 일이 보통이며 함포탄 한 발만 맞아도 야포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도 최초로 찍은 판이 수령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안 나오고 전투 장면에만 치중했다는 이유로 전부 다시 찍었다고 한다.

탈북자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북한의 선전만 믿고 '월미도의 영웅'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월미도를 방문했다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과 배신감을 느끼고 더욱 북쪽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대다수 북한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월미도에서 미제놈들에게 한방 먹이지 않았는가"하고 망상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환상 깨쇼'하고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인천 상륙작전을 북한이 언제 예측했는지에 대해서 북한의 공식기록은 김일성의 뛰어난 예지력으로 개전 3일차에 이미 인천상륙이 있을 것을 알고 대비했다고 한다.[35] 문제는 박헌영 일당이 미제 간첩인지라 고의로 작전기동을 방해해서 안타깝게 사전대비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북한에서는 정권 초기 부수상을 역임했던 이정 박헌영이 미제간첩이라 하지만, 이 또한 북한측의 거짓 선동이다. 박헌영은 단 한번도 미국에 협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박헌영은 1952년 미군의 세균전을 비난하는 연설을 할 정도니 그냥 정적에게 미제 간첩 누명까지 추가해서 김일성이 책임회피를 한 셈이다.

3.4. 한국 내 일부 비난

2005년 9월 23일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SBS 시시비비에 출연한 철거 찬성자들은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의 패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 패전이냐는 물음에 "인천에서 상륙했지만 인민군은 압록강까지 질서정연하게 다 철수했다. 따라서 실패한 작전이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이란 것이 자체가 야비한 것이다. 북한군 본대가 낙동강에 내려와 있었는데, 맥아더가 북한군 후방인 인천을 쳤다. 비겁한 작전이다."라고 주장했다.

3.5. 민간인 희생

인천상륙작전 직전 실시된 미군의 폭격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 미군의 폭격은 상륙작전을 염두에 둔 전략 폭격이었지만 월미도 주민과 신원불명의 희생자 100여 명이 폭격으로 희생되었다. 이때 죽은 사람들과 폭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국가로부터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합의해 피해 보상과 귀향 조치를 취했다.

다만 인천광역시의회에서 인천 상륙작전 피해 보상을 하겠다고 입장을 보여 논란이 있었다. 인천시는 과거에도 피해 보상은 UN 참전국들과 한국 정부가 줘야 한다는 입장도 보여줬기에, 비판하는 측은 전국민이 피해자인데 특정 지역만 보상해 준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또한 전쟁을 일으킨 건 북한인데 정작 그 북한에는 한마디 말도 없이 한국 정부와 UN군만 비난하냐는 비판도 잇따랐다.

당시 북한군은 상당수가 인천 시가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 황량한 해변에서 두들겨 맞기보다는 건물을 엄폐물로 삼아 시가전을 벌이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 게다가 시가지에서 농성하는 적들을 상대하려면 우선 포격과 폭격(특히 네이팜탄이 효과적.)으로 건물째 부숴버리고, 보병과 기갑부대를 같이 투입하는 게 가장 좋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에서 팔루자 전투나 바그다드 전투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었고[36], 스탈린그라드에서도 독일군이 소련군의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Ju87등으로 폭격을 실행했다.

게다가 인천 시내의 북한군 병력이 소규모였지만 시가전에 발목잡힐수록 상륙작전 및 포위 효과가 그만큼 반감되어 버리는데,[37] 이 때문에 진로상의 건물들은 싸그리 부수고 나아갔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도 속출했다.[38]

4. 기타

파일:1280px-USS_Inchon_(MCS-12)_underway_in_the_Gulf_of_Mexico_2001.jpg

5. 관련 매체

6. 외부 링크


[1] 9월 16일 인천을 탈환했다.[2] 그린 비치(월미도, 현 북성동1가 98-6), 레드 비치(대한제분 일대, 현 북성동1가 6-176)[3] 블루 비치(낙섬사거리 일대, 현 용현동 627-24)[4] 유엔군사령관 겸 미국 극동군사령관[5] 미 해군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6] 미 해병대 태평양사령관[7] 미 극동공군 사령관[8] 미 육군 제10군단 군단장[9] 미 해병대 제1사단 사단장[10]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11] 대한민국 3군총사령관[12]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13] 인천시의 현용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인 Incheon이 아니라 영미권에서 주도적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인 Inch'ŏn을 사용했다. 부산 교두보 전투의 영어 표기가 Battle of Pusan Perimeter인 것과 같다.[14] Encyclopedia Britannica에서 사용한 명칭(참조)[15] 이는 의외로 각종 고속도로와 교량, 터널이 기술적으로나 수치적으로나 월등히 정비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는데 교통 인프라가 구축되어있는 건 대한민국 내부 쪽이고 휴전선 부근은 GP로 출입하는 도로 정도만 정비되어있어 사실상 DMZ 자체가 중장비에겐 천연방벽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쪽은 산지 + 숲이라 평야 + 숲이 주된 지형이었던 2차대전기 유럽 전선이나 오로지 평야 뿐이었던 아프리카 전선과는 부대전개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다. 연천~철원은 지금도 남북간 기갑부대가 대규모로 통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목이다.[16] Walter Craig & Malcolm W. Cagle, Battle Report - The War in Korea, New York: Rinehart and Company, INC, 1952) pp.169[17] Robert Smith, MacArthur in Korea: The Naked Emperor,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82), pp. 71[18] 인천상륙작전 영화에서의 인물로 보면 이정재 배우가 임병래 중위역을, 박철민 배우가 홍시욱 하사 역을 맏았다.[19] 미 10군단은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육군, 해군, 해병대로 구성시킨 혼성군단이다. 그야말로 주문제작된 군단.[20] 소장이라도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미8군 사령관이 중장인 워커 장군인 관계로 소장들 중 기수가 높은 알몬드 장군을 뽑아 군단장에 임명했다. 1군단장 9군단장도 소장 계급이었다. 이것은 사단-군단-야전군-집단군 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군의 특징으로, 군단의 장은 소장 고참이나 중장 초임이 임명된다.[21] 그런데 맥아더의 참모장을 맡다가 10군단장을 겸직하게 됐다.[22] 8월경 북한 육군 12사단 제766유격연대를 궤멸시키고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인천 상륙작전 참가를 위해 본인의 요구로 연대장을 맡게 되었다.[23]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도의 해병대사령부에서 신병 3,000명을 모집하고 해병대 김성은부대 2개 중대를 보강하여 1개 연대급으로 편성, 당시 미 제1해병사단이 편의상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 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실제 해병대 제1연대 창설은 1950년 12월 20일이다.[24] 인천 상륙 작전과 동일한 날짜인 15일,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에 위치한 동해안의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 북한군 점령지에 학도병을 상륙시킨 작전이다.[25] 이쪽은 작살나기 전에도 전력이 변변찮았다는 건 넘어가자.[26] 이 사진에서 소대원들을 이끌고 가장 앞장서서 장애물을 오르고 있는 해병대원은 제1해병사단 제5연대 제1대대 A(에이블)중대 3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다. 로페즈 중위는 이 사진이 찍히고 바로 몇분 뒤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첫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후 곧바로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하려던 도중 적군 자동화기에 가슴과 오른 어깨를 피격, 수류탄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자신의 수류탄 때문에 소대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중위는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대원들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그야말로 참 지휘자의 표본.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고등학교 학군단(JROTC)에서 연대장 후보생을 지냈고, 미 해군 수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1년간 수병으로 복무 중 미 해군사관학교 수병 특별전형에 선발되어 사관학교 졸업 후 1947년 미 해병대 보병 소위로 임관, 박격포반장과 소총소대장으로 중국 상하이와 칭타오 파병을 다녀왔다. 이 사진은 인천 상륙작전의 기념비적인 사진으로, 쌍안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 원수의 사진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이 되었으며, 발도메로 중위는 그 전공을 기려 사후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에 추서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해상 수송선인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함'(출처)이 있다. 비록 수송선이긴 하나, 위관급의 이름이 붙여진 것 만으로도 그의 영예를 존중하는 미군의 자세를 알 수 있다.[27] 주정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구체화된 개념으로, 각 주정조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지휘를 받는 임무 지향적 조직이다. 중대 화기소대와 대대 돌격소대로부터 기관총과 3.5인치 바주카포, 화염방사기 등을 배속받아 화력을 보강하고, 주정조 단위로 싸우며 내륙으로 진격하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원 분대 및 소대로 복귀한다.[28] 첫 도입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먼저 썼다.[29] 홍은혜 여사의 회고집인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수록[30] 고저가 표시된 지도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서울-경기권의 평야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넘어가면 백두대간이 높게 서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지금이야 고속도로도 놓고 철도도 뚫어놨지만 건설 자체가 힘든일이었으며 일제강점기가 막 끝난 상황이었던 대한민국에서는 강원도는 거의 교통편이 없는 것이나 다를바 없었다. 그러므로 남북간의 교통로는 무조건 서울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31] 에드워드 알몬드, 찰스 윌러프비 등.[32] 신라시대 진흥왕죽령을 넘어 이 코스로 함경도까지 진출하긴 하였다.[33] 물론 당시 대만은 국부천대를 한지 10년도 안된 상태에서 터진 2.28 사건 등 국내외적으로 시끌벅적 했고 미국도 확전이 될 경우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위압감 때문에 이를 반대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중국본토상륙을 빼더라도 중국입장에선 득될 것 없는 타국의 전쟁에서 자국군 베테랑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좋아할리도 없고, 더군다나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으로 세계대전보다 8년 일찍 전쟁을 시작해 국공내전으로 4년 늦게 전쟁을 끝낸 중국입장에선 전후처리 및 재건사업 해야 할 시간에 전쟁으로 발목이 잡혀있으니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한국이 지금처럼 분단된다 하더라도 중국도 빠르게 포기하여 한국전쟁이 더 일찍 끝났을 수도 있다.[34] 북한 영화라도 체제 찬양이나 이적 행위 목적이 없는 단순 감상은 처벌 사유가 아니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35] 물론 위에서 말한대로 북한이 사전에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게 3일 전도 아니고, 북한 스스로 알아낸게 아니라 중국에서 저우언라이가 그럴거라고 알려준 것일 뿐이며, 김일성이 그마저도 씹었다.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36] 물론 네이팜탄은 쓰지 않았다는 게 차이점.[37] 일단 남쪽에 내려가 있는 주력이 인천을 방어하거나 포위를 뚫기 위해 인천으로 올라올 수 있다.[38] 사실 2차 세계대전 때에도 그래왔지만, 포격 실시 전 피폭지 일대의 민간인들만 선택적으로 전부 피난시킬 순 없다. 게다가 이를 경고하기 위한 침투조를 투입해도 모든 민간인들이 순응하는 결과는 사실상 기대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적군도 알아채서 대비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39] 머릿 수가 많아 욱여넣을 수 있는 병력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육군은 겨우 1개 연대 수준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