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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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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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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6.25 전쟁 참전국 및 지원국
2.1. 병력지원국2.2. 의료지원국2.3. 물자 지원국2.4. 물자지원 의사 표명 국가2.5. 공산측 남침국 및 북한지원국
3. 주요 작전4. 주요 사건/사고5. 휴전 이후의 주요 사건/사고/전투6. 관련 인물
6.1. 국군 및 UN
6.1.1. 대한민국6.1.2. 미국6.1.3. 튀르키예6.1.4. 에티오피아 제국6.1.5. 프랑스 제4공화국
6.2. 공산군
6.2.1. 북한6.2.2. 중국6.2.3. 소련
7. 사용 장비

1. 개요

6.25 전쟁과 관련된 기록들을 모은 문서다. (북한 X)

2. 6.25 전쟁 참전국 및 지원국

파일:external/www.korea.kr/20130626101048850_NN7S1CV5.jpg
파일:6.25전쟁참전국가.jpg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원해 준 국가들.[1]
6.25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하나의 국가를 위해 지원한 전쟁이며, 유엔이 그 한 국가를 위해 정규 군을 모아서 싸운 유일한 사례이다. 유엔 상임이사국은 2차 세계대전 5대 승전국(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으로 구성된 기구였고, 다시는 1차대전을 막겠다고 만들었으나 제국주의에 휘말리며 의미를 잃어버린 국제연맹처럼 되지 말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당시 공산주의 세력인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미국, 영국, 중국(당시 국민당), 프랑스는 일단 2차대전 때는 한편이었으나 전후 이들이 모두 화합하는 건 불가능했으며, 중국(국민당)이 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국부천대로 인해 힘을 잃고 수십년 후 유엔에서 축출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유엔은 현재까지도 보이듯이 상임이사국 중에서 제1세계권 미국/영국/프랑스 진영과 제2세계권 중국/러시아 진영이 계속 대립하여 의견의 합의가 일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 탓에 유엔군은 한국전쟁 이후 양측의 이해관계 탓에 몇 차례의 평화유지군 외에는[2] 정규 군으로서 파병해볼 일이 거의 없었다. 한국 전쟁에 대해서 유엔군을 파병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당시 현 중국(공산당)이 유엔 상임이사국이 아니어서 권한이 없었고, 소련이 반대가 아닌 기권을 해서 결국 유엔이 한국을 구하기 위해 정식 군대를 결성하여 파병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엔의 정규 군대 기록으로 남았다. 그 후로는 소련은 자국의 마음에 안 드는 사안에 대해선 기권이 아니라 꼬박꼬박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기 시작했고, 중국(공산당)은 결국 현 대만(중국 국민당)을 대신해 UN에 들어오며 현재처럼 만장일치가 나오기 힘든 구도가 구성되었다. 특히나 1948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전쟁 이후 전쟁 없는 평화의 세계를 지향하는 유엔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선거도 지원한 만큼,[3] 유엔이 기껏 힘껏 밀어줘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바로 공산 북한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국제연맹 때처럼 기껏 생성한 유엔을 다시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으므로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은 유엔군으로서 의미 있게 개입했다. 종종 한국과 북한의 정당성 이슈에서 한국이 상당히 우세한 이유로 지목되는 이슈가 여럿 있지만, 한국은 특히 UN이 직접적으로 개입해 준 국가라는 점 역시 정당성에서 상당히 우세한 점이기도 하다. [4]

저 당시 한국을 지원한 국가들 중 이후 공산국가가 되어 관계가 틀어진 국가들도 있었는데, 일단 쿠바의 경우 공산주의 혁명으로 정권이 바뀐 뒤 대한민국을 적으로 간주했고, 월남 역시 북베트남에 의해 공산통일당해 사라졌고, 공산화된 베트남과의 관계는 1990년대까지 냉랭했었다. 에티오피아 역시 공산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당하고 파병부대원들도 핍박당했지만 정권이 무너지고 관계를 회복했다.

부산광역시에 있는 UN기념공원에 2,300명의 각국 UN군 전사자가 있다.

2012년 5월에 6.25 전쟁 당시 참전국 명단이 새로이 공개되었는데 정확히는 63개국으로 밝혀졌으며, 기존 참전국과 의료지원국을 제외하고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및 표명 등을 밝혔던 국가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2.1. 병력지원국

병력 지원국
참전 국가
(한국과의 거리)
파병인원 사망자[5] 실종자 부상자 포로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11,157)
1,789,000명 36,574명[6]
36,516명[7]
약 1,000명 103,284명[8]
92,134명[9]
7,245명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8,852)
56,000명 1,177명 179명 2,674명 997명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캐나다 자치령
(10,505)
25,687명 312명 1명 1,212명 32명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7,740)
21,212명 1,005명 163명 2,068명 244명
파일:호주 국기.svg
오스트레일리아
(8,411)
17,164명 346명 3명 1,216명 26명
파일:필리핀 국기(1936-1985, 1986-1998).svg
필리핀
(2,620)
7,420명 120명 16명 229명 41명
파일:태국 국기(1917~2017).svg.png
태국
(3,720)
6,326명 136명 5명 1,139명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8,551)
5,322명 124명 - 645명 3명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콜롬비아
(14,825)
5,100명 213명 - 448명 28명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왕국
(8,510)
4,992명 186명 - 543명 3명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10,015)
3,794명 41명 1명 79명 -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에티오피아 제국
(8,510)
3,518명 122명 - 536명 -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8,700)
3,498명 106명 4명 336명 1명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8,960)
3,421명 270명[10] 7명 1,008명 12명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연방
(13,706)
826명 37명 - - 9명
파일:룩셈부르크 국기.svg
룩셈부르크
(8,696)
100명 2명 - 13명 -

출처

미국은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하였고 또한 희생하였으며, 사실상 유엔군은 미군이 대부분을 이끄는 형태였다. 유엔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미군이 한국과 경상도까지 밀리면서도 버텨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경험은 현재의 한미동맹에도 양국이 강조하는 사례이다.[11] 여담으로 한국 전쟁은 미국이 여태껏 치른 전쟁 중 미군이 5번째로 많이 사망한 전쟁이다. 1위는 남북 전쟁, 2위는 2차 세계대전, 3위는 1차 세계대전, 4위는 베트남 전쟁, 5위가 바로 한국 전쟁이다.

튀르키예공화인민당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의 결단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타흐신 야즈즈 소장의 지휘하에 미국과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튀르키예는 한국에게서 혈맹국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스 왕국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규모 내전을 두 차례 치렀으며 영국과 미국의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해 발칸 반도 전역이 공산화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공산화를 면했다. 내전의 결과 확고한 반공 국가가 된 그리스는 6.25 전쟁이 터지자 기꺼이 군대를 파병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가 머나먼 극동의 소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만 명이 넘는 군대를 보내 성심껏 싸우게 한 데에는 국제평화의 이상에 대한 수호정신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못지 않게 자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계산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냉전 문서에 나오는 나토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세력도를 보면 알겠지만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서유럽과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공산화된 발칸 반도와 캅카스에 둘러쌓여 공산화 위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트루먼 독트린의 직접 당사국으로서 미국의 참전 요청을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나토에 가입하고자 했고 이러한 의지를 한국전쟁 참전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덕분에 이들은 1952년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에 대거 소련으로부터 겨우 독립한 공산권의 동유럽 국가들 역시 러시아에 대한 위협과 미국의 편에 서겠다는 확실한 의지로 인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에 적극적으로 미국을 도와 개입했다. [12]

호주가 UN군의 일원으로 최초로 참전한 전쟁이 6.25 전쟁이다.

필리핀 제3공화국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상륙하였으며, 필리핀 前대통령 피델 라모스는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태국은 한국 전쟁에 육, 해, 공군을 모두 파견한 8개국 중 하나이다.

네덜란드는 과거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수리남(1975년 독립) 등 속령지역 용사들도 동원하여 참전했다.
콜롬비아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전투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사실 콜롬비아 말고도 전투 병력을 파견한 국가가 있는데 바로 멕시코다. 1943년 발효되어 1952년까지 유지되었던 '멕시코와 미국 간 상대국 거주 자국민 병역에 관한 협정'으로 미국에 거주하던 멕시코 국적자들이 미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 멕시코는 약 10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참전했지만 미군으로 분류되어 표기됐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미국 군인들 중 3.5%는 멕시코계 군인이었다.

뉴질랜드마오리족까지 참전했다. 이들이 퍼뜨린 노래가 바로 Pokarekare ana(한국어 번역명은 '연가')

에티오피아 제국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가 특별히 자신의 친위대를 내줘서 파병했다. 단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 제대로 된 상비군이 친위대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화 이후에는 흑역사로 치부해 참전자들을 박대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연합으로 파병되었다. 룩셈부르크는 80명 남짓한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이는 룩셈부르크군 자체가 1000명 내외의 소규모 군대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병력이다. 또한 병력 대비 사상자의 비율은 전체 유엔군 중 가장 높았다.

프랑스군 중에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은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참전했다. 하지만 미군으로부터 그대로 중장 대우를 받았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아프리카의 잊어져버린 6.25 참전국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국내 매체들도 에티오피아만을 아프리카 유일의 6.25 전쟁 참전국으로 기억한다. 남아공이 에티오피아와 달리 6.25 참전국에서 빨리 잊어진 것은 당시에 영연방 국가였고, 다른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다르게 소수의 네덜란드, 영국계 백인 이주민들이 국민 대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배제, 억압하며 20세기 말까지 백인 통치를 자행하는 등 사실상 백인 국가로 취급받던 나라였던 점이 크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남아공이 참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르트헤이트에 항의하는 뜻에서 공식 수교를 단절했을 정도였다. 또한 전쟁 때 파병 인원의 규모도 작았고 공군 병력과 12명의 육군 병력만 파견한 것도 주요 이유인 듯하다. 하지만 826명 중 36명이 전사하고 8명이 포로가 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된 이후로는 쉬쉬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백인 정권이 미국, 영국의 똘마니로써 참전했다고 보는 시각이라 한국전쟁 참전행사도 열리지 않고 있다.

사실 대만도 3만 명대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미국은 대만의 참전이 중공군의 개입[13]으로 인한 3차 세계대전이 터질 가능성, 중공군이 대만에 빈집털이를 시전하는 것 등을 두려워해 대만을 뜯어말려 물자 지원에 그쳤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하나인데, 스페인도 당시 유럽서 가장 큰 규모의 파병을 지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은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가 지배하고 있던 시기로 국제적으로 왕따당하던 시절이라 웃기지 말라면서 무시당했다. 애초에 프랑코가 파병 지원을 시도한 이유도 이 외교적 고립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스페인은 의료지원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네덜란드벨기에가 극구 반대하여 무산됐고 대신에 똑같이 최대 규모 파병을 자처한 그리스, 튀르키예에서 전투병력이 갔다.

당시 제1차 중동전쟁에서 막 승리한 이스라엘도 파병을 검토했는데 당시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파병을 주장했으나 의회의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이스라엘은 10만 달러 상당의 재정 및 물자 지원을 했다.
또 하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상기돼 있는 멕시코인, 멕시코계 미국인 외에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이 엄청나게 많이 참전하고 전사했다는 것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력 약 180만 명 중 약 18만 명이 히스패닉 계열인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중 멕시코계 병력은 약 12만 명,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 병력은 약 6만 명이었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 미국, 영국, 캐나다 등으로 이민 간 아일랜드인들도 해당 국가 소속으로 참전하여 160명 이상 전사했으며, 당시 네덜란드령이었던 수리남에서는 수리남인 병사들이 네덜란드군 소속으로,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콩고인 병사들이 벨기에군 소속으로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약 800명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나바호족 역시 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이 미군 소속으로 참전한 기록이 있다고 우크라이나 국립 군사역사박물관에 소개돼있다. #

약 4000여 명의 유대인이 미군이나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2.2. 의료지원국


* 이탈리아
병원 / 부대: 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
입국: 1951년 11월
출국: 1955년 1월
당시 UN 비회원국 자격으로 지원했다. 당시 2차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해 패배한 과거 때문에 UN에 가입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에 이탈리아의 패전 추축국 이미지를 지우고 자유 세계의 일원이 됐음을 강조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2.3. 물자 지원국

한국전 당시 병력을 파견한 16개국, 의료지원을 파견한 5개국 외에 국내 사정으로 물자나 재정지원만을 한 39개국도 있다.

물자지원은 초기에는 CRIK(한국민간구제단)을 통해 레바논, 리히텐슈타인, 멕시코 등 초기 19개국이 지원하였으며 이후 UNKRA(유엔 한국 재건단)을 통해 대만, 과테말라 등 13개국이 지원, 기타 ERP(유엔긴급 구제계획)을 통해 서독 등 3개국이 지원하였다.
지원국가 지원액(USD$) 지원기관 지원 시기 지원물품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3,616,446 CRIK ~1952.5 재정,미곡
대만 634,782 CRIK ~1952.5 석탄,미곡,연료
아르헨티나[16] 500,000 CRIK ~1952.5 식량,의약품.비누
파키스탄 자치령 378,285 CRIK 1951 재정,소맥
멕시코 348,821 CRIK 1951 식량
스위스 313,954 UNKRA ~1953.6 재정,물자
도미니카 공화국 275,200 UNKRA ~1953.6 재정
쿠바[17] 270,962 CRIK ~1951 미곡,의약품
우루과이 250,780 ERP ~1953.12 재정
칠레 250,000 UNKRA ~1954.8 재정
베네수엘라 180,842 CRIK ~1951 재정,의약품
인도네시아[18] 143,706 UNKRA ~1952.12 재정
에콰도르 99,441 CRIK 1951 미곡
이스라엘 96,600 CRIK 1951 재정
헝가리 인민공화국 58,877 CRIK 1951 물자
페루 58,723 ERP ~1954.8 군화
레바논 50,000 UNKRA ~1952.12 재정
연합군 점령하 일본[19]일본국[20] 50,000 CRIK 1951 물자,재정
버마 49,934 CRIK 1951 식량
서독 47,619 ERP ~1952.8 물자
아이슬란드 45,400 CRIK 1951 식용유(Cooking Oil)
이집트 왕국 28,716 UNKRA ~1953.12 물자
캄보디아 27,419 CRIK 1951 재정,미곡
자메이카 25,167 CRIK ~1953.12 미곡
사우디아라비아 20,000 UNKRA ~1952.12 재정
라이베리아 15,000 CRIK 1951 생고무
베트남국 11,943 UNKRA ~1952.12 재정,물자
바티칸 10,000 UNKRA ~1956.12 재정
파라과이 10,000 UNKRA 1951 재정
과테말라 7,704 UNKRA 1951 재정,목재
이란 제국 3,900 CRIK ~1952.8 미곡,직물
시리아 3,650 UNKRA ~1953.6 재정,물자
아이티 3,000 ERP ~1954.8 물자
파나마 3,000 UNKRA ~1952.12 재정
온두라스 2,500 UNKRA ~1952.12 재정
코스타리카 1,400 CRIK 1951 물자
모나코 1,144 UNKRA ~1954.8 재정,물자
엘살바도르 500 UNKRA ~1953.12 재정
리히텐슈타인 485 UNKRA ~1956.6 재정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풀버전 영상
물자 지원국이었으나 상당한 숫자의 멕시코 국민이 미군에 소속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주한 멕시코 대사인 브루노 피게로아[21]가 2019년 화요라틴광장 세미나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180만명의 미군 중에서 약 18만명이 히스패닉이었다. 이중에서 다시 약 10만명 가량이 멕시코계 미국인이거나 멕시코 국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멕시코와 미국은 병역협력협정(1943 ~ 1952년)에 따라 멕시코 국적을 유지한 채 미군에서 복무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미군은 당시 복무하던 히스패닉 계를 전부 백인으로 표기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멕시코 국민의 수효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멕시코의 참전용사의 존재가 부각되고 조명받은 것에는 주한 멕시코 대사인 브루노 피게로아의 역할이 컸다. 브루노 대사는 부친의 지인이 한국전 참전용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7년에 주한대사로 부임한 이후 멕시코 참전용사들에 대한 자료수집 및 조사와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을 비롯한 관련기관과의 협의를 본격적으로 수행했다. 주한 멕시코대사관 측은 위키피디아에 스페인어와 영어로 문서를 게재하였고, 한국대사관은 한글번역을 지원했다.
2021년 4월 24일에는 한국전 멕시코 참전용사회가 멕시코시티의 한국대사관저에서 출범했다. 출범식에는 최종건 당시 외교부 1차관과 산도발 멕시코 국방부 장관이 참석했다. 육군은 한국전 및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나라사랑 보금자리 사업으로 현지업체를 통해 참전용사들의 주거지를 새로이 단장했다. 나라사랑 보금자리 사업이 해외에서 시행된 것은 처음이었다.
* 모나코
* 미얀마(버마)
* 바티칸 교황청
* 베네수엘라
* 베트남국
* 사우디아라비아
* 스위스
* 시리아 - 당시는 하페즈 알아사드 집권 이전이였다.
* 아르헨티나
* 아이슬란드
* 아이티
* 에콰도르
* 엘살바도르
*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 당시 추축국 측에 참전한걸로 간주되어 연합군의 군정 치하에 놓여 있었다. 군정 치하의 오스트리아는 꽤 많은 물자를 지원하였다.
* 온두라스
* 우루과이
* 이란 제국
* 이집트
* 인도네시아
* 연합군 점령하 일본 - 패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한국을 도울 여력도 별로 없었기에 물자 지원국에 해당하기 어려워 보일 수 있으나, 실은 오히려 미국의 후방 군수공장역할이었기에 중요한 물자지원국이었다. 일본은 6.25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활약한 미군의 후방 군수공장 역할을 담당해서 미군이 필요한 물자를 그때그때 신속하게 조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미국과 UN군 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요시다 시게루 당시 내각 총리 대신의 결정으로 서해와 동해의 주요 항구들에서의 소해와 초계 작전을 위한 1200여명의 소해 병력과 소해정이 해상보안청에서 파견됐고, 공산군이 점령한 적지에서의 정보 수집을 위한 요원들이 일본 정부 산하 정보 기관에서 파견되어 한반도 내 공산군 점령 지역으로 투입됐으며, 인천 상륙 작전 당시의 인천을 포함해 한반도 곳곳에 위치한 항구들로 UN군을 위해 물자와 인력을 수송한 것도 일본 해운업체들의 선박과 선원들이었으며, 인천 상륙 작전 등에 투입된 한국군 특수부대 대원들 역시 미군의 위탁을 받아 일본 측에서 육성했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학계의 추정에 따르면 최소 8천여명 내외의 일본 측 인력이 6.25 전쟁 당시 UN군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해 작전 도중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한미일 삼국 모두 해당 사안에 대해 쉬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내용으로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주인공 우미(메르)의 아버지가 기뢰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전후 일본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유사시 한국과 대만, 미국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기지 역할을 맡으며 경제 개발을 위한 산업 지원과 자본 투자 그리고 미국의 정책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한국이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미국의 산업 및 관련 정책 원조를 받고 경제 개발을 위한 기초 자본을 확보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다.
[navertv(43939750)]
[다큐] 숨겨진 "전쟁협력" - 한국전쟁과 일본인 (2019)[22]
또한, 일본의 민간인 남성 60명[23][24]을 미군이 대동하고 그 중 18명이 한반도 최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것이 미 국립 공문서의 미군 작성 일급 비밀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에 관한 내용은 2020년에 국내 언론에서 일본 마이니치 신문 기사를 베이스로 국내언론들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이 영상에서는 한국전쟁 개전초기 미국은 주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국에 급파하지만 이후 부산을 중심으로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자 일본인들도 살아남기 위해 소총을 들게 된 사연이 나온다.[25]

2.4. 물자지원 의사 표명 국가

다음은 대한민국에 물자 지원을 할 것이라는 의사는 공식적으로 표명했으나 여러 이유로 인해서 실제로 물자지원이 이루어지지는 못한 경우이다.

2.5. 공산측 남침국 및 북한지원국


==# 주요 전투 #==
1950년유엔, UN 안보리가 인민군 침공 중지 결의안을 채택 : 6월 26일
유엔, UN 안보리가 한국 원조 권고 결의안을 채택 : 6월 27일 한국, 정부를 대전에서 대구로 임시 이전 : 7월 16일한국, 정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임시 이전 : 8월 18일인천~서울 시가전이 전개될 무렵 낙동강 전선 부대들의 북진이 본격화됨.유엔, UN 총회에서 38선 이북 진격과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설치를 결의 : 10월 7일한국, 정부를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 : 10월 27일유엔, UN 총회에서 한국재건단의 설치안이 가결 : 12월 1일

1951년한국, 정부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다시 임시 이전 : 1월 3일미국, 맥아더 원수 해임 및 리지웨이 장군 임명 : 4월 11일
- 소련, 말리크 소련 UN대표 휴전회담 제의 : 6월 23일
쌍방,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시작 : 7월 10일쌍방, 휴전회담에서 군사분계선이 최종 확정 : 12월 7일
쌍방, 포로명단 교환 : 12월 18일
1952년쌍방, 휴전협정이 가조인 : 6월 8일
1953년쌍방, 부상병과 포로 교환 : 4월 20일 쌍방, 포로교환협정이 체결 및 포로 교환 : 6월 8일 ~ 8월 5일한국,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를 석방 : 6월 18일

3. 주요 작전

4. 주요 사건/사고

전쟁 중 일어난 주요 사건/사고들.

5. 휴전 이후의 주요 사건/사고/전투

6. 관련 인물

6.1. 국군 및 UN

6.1.1. 대한민국

6.1.2. 미국

6.1.3. 튀르키예

6.1.4. 에티오피아 제국

6.1.5. 프랑스 제4공화국

6.2. 공산군

6.2.1. 북한

6.2.2. 중국

6.2.3. 소련

7. 사용 장비

6.25 전쟁/사용 장비 문서로.

[1] 국기 및 국가의 명칭이 당대의 것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주의. 이란 국기가 팔라비 왕조 시절의 것이 아닌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이란 국기에 있는 문장이 파괴되어 있고, 저 당시 베트남은 월남(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베트남국이 된 후였다. 또한 헝가리, 캐나다, 이집트, 미얀마, 시리아, 에티오피아, 남아공의 국기가 당시의 국기가 아니다.[2] 그마저도 내전이 일어난 독재국가들의 정부 수반들과 친밀한 중국/러시아 때문에 최근엔 그것도 힘들어진 지 오래이다.[3] 물론 북한의 선거는 소련이 이런 유엔의 결정에 반대하며 독단적으로 결국 치르게 되었다. 이런 일은 한반도 외에도 독일에서도 비스무리하게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다.[4] 현재는 경제력, 국력, 인지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정통성 면에서도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유지하고 있고, 수도가 서울이고, 직전 국가의 대한제국의 '대한'을 유지했던 것 등도 있지만, 정치외교적 면에서는 바로 현재 한국이 세워진 것에 유엔(국제연합)이 지원하고 보증을 서준 것이다.' 유엔은 1940년대 당시 한국을 세우고 그 당시의 여러 선거에도 관할한 직접적 당사자였다. 즉, 대한민국의 성립의 뒤에 유엔이 있던 것이다. 당시 유엔 상임이사국 중 공산국가는 소련 뿐이었고, 나머지 4개국은 자본주의 국가(미국,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였기 때문에 소련은 공산국가 성립에 독단적으로, 즉, 유엔에 불응하며 행동했다. 동유럽 공산국가들, 북한, 동독이 그런 식으로 소련에 의해 군사적으로 점거되었다. 40년대 말에 중화민국이 공산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대륙을 뺏겼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시 UN에서 배척당했기에 아무런 힘도 없었다.[5] 전투 중 사망자 (전사자) + 비전투 중 사망자 (순직자) 포함[6] 전투 중 사망자: 33,739 / 비전투 중 사망자: 2,835 -미국 제대군인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통계, 2021년 기준[7] 전투 중 사망자: 33,686 / 비전투 중 사망자: 2,830 -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 2014년 기준[8] 2차례 이상 중복부상자 11,150명을 각각의 부상자로 계산한 수치이며, 1명의 부상자로 계산한 수치는 92,134명, 미국 제대군인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통계, 2021년 기준[9] 2차례 이상 중복부상자 11,150명을 1명의 부상자로 계산한 수치이며, 각각의 부상자로 계산한 수치는 103,284명,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 2014년 기준[10] 해외 참전군 중 전사율이 가장 높다.[11] 미국이 말하는 '혈맹'은 같이 전선에서 싸운 정규군의 국가들을 말한다. 캐나다, 영국, 호주, 한국 등은 이에 해당한다. 여러 전쟁에서 미군과 동맹군으로서 함께하며 싸웠기 때문. 현재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자 미군이 많이 주둔하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미국이 아무리 가까워도 혈맹과 같은 동맹으로 칭하지는 않는데, 이들은 2차대전 때 미국의 적국이었고, 미국이 이들을 점령한 후 안전보장을 해주면서 미국에 복종하는 형태로 동맹이 맺어지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이나 한국은 미국과 혈맹이라지만, 구 추축국처럼 패전 후 복종하는 형태가 아니라 정규군 대 정규군으로서의 동맹인지라 여러 전쟁 당시 서로 간에 함께하면서도 물자/지원 등 소소한 부분에서 마찰이 짜잘히 있던 편이기도 했다. 결국 그걸 겪으면서 더욱 동맹은 끈끈해졌지만.[12] 사실, 이건 한국 입장에서 남 얘기는 아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치를 때 서유럽 국가들이 외면하던 와중, 한국과 호주는 적극적으로 병력을 파병해 미국을 도왔는데, 여러가지 이유, 국민 감정(남베트남에 대한 동정 & 미국에 대한 은혜 갚기)도 있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미국 쪽에 확실히 붙어야 하는 이익을 챙기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13] 사실 러시아와 중공이 짜고 전쟁에서 북괴군이 밀려 북괴의 패색이 짙어진다면 중공군을 대량 투입할 계획을 미리 만들어놓고 있었기에 의미없는 걱정이긴 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게 되었고.[14] 1953년 7월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는 부산 스웨덴 병원(Swedish Hospital in Pusan)으로 명칭을 바꾸고 민간구호에 주력하였다.[15] 아데나워 총리는 동시에 음지에서 논의가 이뤄지던 서독의 경제적, 군사적 재무장 또한 6.25를 계기로 양지로 드러내 본격적으로 추진했다.[16] 당시 후안 페론 정권이었다. 페론 정권은 아르헨티나군을 한반도에 파병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나 내부의 반대와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파병은 무산되고 물자지원으로 그쳤다고 한다. #[17] 쿠바 혁명으로 바티스타 정권이 물러나기 전이었다.[18] 수카르노 집권기 시절이다.[19] ~1952[20] 1952~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21] Bruno Figueroa Fischer [22] 이 영상의 심문 기록은 1급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미군은 일본인 당사자들에게 외부 발설을 금지하고이 사실을 봉인해 왔다.[23] 호주 국립 대학교의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와 NHK에서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70명으로 나온다.[24] 군무원 신분으로 통역/취사/수리/의무/운전 등을 담당했다.[25] 이들중에 전사자도 나오게 되는데 하필이면 대전 전투에서 미 제63 야포병연대 소속으로 취사지원을 하던 일본인이 대전전투에 참전했으며 다부동 전투에서는 미 육군 제 8기병 연대 소속으로 미군에 취사지원을 하러 같이 왔던 군무원 소속 일본인이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다.[26] 이게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전쟁 초기에 진먼다오 연안을 대거 폭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출처] 도탄타오미엔, 『베트남전쟁기 한반도와 베트남 관계 연구』, (박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1998), p.46-47[28] 다만 인천 상륙작전 이후에야 공세가 본격화되어서 사람에 따라 15일로 치기도 한다.[29] 하지만 심일 소위의 전공이 조작이라는 주장이 최근 나왔다. 참조바람.[30] 그러나 이 보고서는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의 공청회 진행이 심일이 전투에 없었다는 증언과 같은 특정 증언의 삭제 등 불공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비판을 받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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