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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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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
남일
南日 | Nam Il
파일:남일.png
<colbgcolor=#d6b534><colcolor=#FFF> 출생 1913년 6월 5일
러시아 제국 프리모리예주 우수리스크
사망 1976년 3월 7일
평양시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1913 ~ 1922)

[[소련|]][[틀:국기|]][[틀:국기|]] (1922 ~ 1957)

[[북한|]][[틀:국기|]][[틀:국기|]] (1950 ~ 1976)
학력 톰스크 국립대학교 (수학교육학 / 학사)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신장 182cm
배우자 파이나 르포프나
박애현(마르타 박)
자녀 장녀 올가
장남 남유라
군사 경력
복무 조선인민군 육군
1948년 9월 9일 ~ 1953년 9월 9일
최종 계급 대장 (조선인민군 육군)
참전 6.25 전쟁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북한으로2.3. 외무상 및 부수상 시기
3. 장의위원회 구성4. 수훈5. 의혹과 논란
5.1. 독소전쟁 참전 여부5.2. 숨겨진 가족의 존재5.3. 김정일에 의한 암살 의혹5.4. 강진군 출신 월북자 설
6.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아 휴전협정 북한측 수석대표로 나섰다. 고려인 출신이었지만, 김일성에 충성하여 총참모장, 외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철도상, 정무원 부총리, 경공업위원장 등 북한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13년 6월 5일, 러시아 제국 극동 지방 우수리스크 주 (현재 러시아 하바롭스크 주)의 카자케비체보(Казакевичево) 마을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이름은 '남 야코프 페트로비치(Нам, Яков Петрович)'였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적백내전의 혼란기에 그의 가족은 잠시 조선으로 피신했다가 이후 소련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행적은 불분명하다.

교육가였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 교사가 되어 1932년 경부터 교직에 종사했다. 고려인 강제 이주 이후에 톰스크 국립대학교[1]에 진학하여 1939년에 졸업한다. 졸업 후에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침켄트(Чимкент)에서 교원들을 양성하는 강사로 일했다. 교직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대학원 진학도 고려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1941~43년에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카르시(Карши, 카슈카다리야 주의 주도) 제1 중학교에서 부장교사로 재직하며 시 교육장에 올랐다. 이어 1943~46년에는 우즈베크 카슈카다리야 주의 부교육장 및 교육장까지 승진한다. 이 무렵 유치원 원장 파이나 르포프나와 결혼하여 1945년에 딸 올가를 낳았지만, 북한에 파견되는 과정에서 가정불화가 심했던 남일은 가족을 소련에 팽개쳐버리고 북한으로 떠나버렸다.

2.2. 북한으로

1946년이 되자 소련 정부는 분할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 일할 전문가들을 모집하는데, 남일은 통역관이자 교육 전문가로 선발된다. 이에 1946년 8월 재소 조선인 전문가 그룹 제4진으로 입북하여 소비에트 민정청에 배속되었다. 북한에서 고려인 마르타 박(한국이름 박애현)과 결혼하여 아들 유라를 낳았다. 남일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제대로 사범대학을 나와 교원양성 및 교육행정에도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기에,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교육국 부국장을 맡았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48년 7월 7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157호에 따라 한설야, 리문환, 리순근, 리동화, 허남히, 리병제, 정준택, 계응상, 장기려, 태성수와 함께 고등교육원 내에 설치된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성원으로 위촉되었다. 1948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 9일, 북한 초대 내각이 조직되자 교육성 부상(副相)에 임명된다.
파일:남일_교육국부국장.png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국 부국장 시기의 남일

남일은 전혀 군 경력이 없었으나, 소련 출신의 엘리트 관료로 김일성의 신임이 각별하였기에 6.25 전쟁 후퇴 시기인 1950년 12월, 김웅의 후임으로 조선인민군 제3대 총참모장(☆☆)에 임명되었고 1950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총참모장으로서의 능력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관의 참사관이던 이바넨코(В. Иваненко)가 평가한 보고서가 남아 있는데, 여기서도 소련 출신[2]으로 정치적으로는 신뢰할만하며 소련에 충성하는 인물이나 총참모장직 수행에 필요한 군사 지식이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소련측은 남일을 소련으로 보내 정식 군사교육을 시킬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총참모장 임명 직후 남일은 민족보위성 부상을 겸하였으며, 평양방어선, 1951년 초에 중부전선, 1951년 중순에 동해안 전선에서 근무하였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파일:남일_총참모장.png
총참모장 임명 당시의 남일

1951년 7월부터 진행된 휴전회담에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인민군 육군 총참모장(☆☆☆) 직위표[3]를 달고 '북한측 수석 대표'로 참가하였다.
파일:attachment/4-15-2012_2-12-50_AM.png 파일:6.25전쟁 휴전회담 북한 대표단.jpg
1951년 개성 휴전회담 당시의 공산군측 대표단 사진으로, 정중앙의 인물이 남일이다. 왼쪽부터 중국 대표인 세팡(解方)[4], 덩화(邓华)[5], 그 다음이 북한 대표인 남일(☆☆☆), 리상조(☆), 장평산(☆) 순이다.[6][7] 휴전협정 당시의 북한 대표단. 왼쪽 사진과 동일한 장소이며 좌측의 두 사람이 남일과 리상조이다.

당시 대한민국 참관인[8]으로 회담을 참가한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서도 남일에 대해 차분하고 지적이었다고 기술. 키가 컸고[9] 미남이었기 때문에 북한측 대표단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백선엽 장군은 동시에 6.25 회고록인 『내가 물러선다면 나를 쏴라』에서 그가 맹목적인 반미와 김일성 숭배에 함몰된 정신병자같은 인간이라고 매우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남일은 조이 제독이 자신에게 담배를 권하자 그것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추악한 수작이라고 주장하며 담배를 파이프대에 담아 피우며 "당신네 미국을 태우니 참으로 맛있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떠벌려서 순전히 호의로 접근했던 조이 제독을 비롯한 미국인들의 어이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조이와 그 졸개들이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다'고 주장하며 정신승리까지 시전했다. 단, 이런 모습들이 휴전회담부터 남북회담이 활발했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줄곧 목격되는 것을 보면, 일종의 충성 발언[10] 성격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6.25 전쟁을 기점으로 김일성이 자신의 지지세력인 만주파를 밀어주고 숙청을 강화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것은, 이런 처신(?)이 도움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1]

이후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 휴전 협정문에도 북한 측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김일성과 함께 남일의 서명이 들어갔다.

2.3. 외무상 및 부수상 시기

휴전 이틀 후인 1953년 7월 29일, 이미 숙청당한 박헌영을 대신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외무상에 임명되었다.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조직위원회가 폐지되고 상무위원제가 실시되면서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4년 4월, 제네바 정치회담에 북한 대표로 출석하여‘남북평화통일 5개 항’을 제의하였으나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1955년 남일 성명을 발표하여 재일교포 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하는 한편, 일본과의 수교를 도모하였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오늘날의 정치국에 해당하는 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1955년 말부터 고려인 간부들과 극심한 불화를 겪으며 이들을 대대적으로 비판하고 있었으나 남일은 계속해서 김일성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소련 측에 김일성의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박의완을 비롯한 간부들을 찾아가 반 김일성 운동을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결과적으로 1956년 8월 종파사건에서 김일성이 승리하는데 어느 정도 공헌하였다.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의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부수상을 겸하였다. 1958년 11월 21일, 중국과 북베트남을 방문하는 김일성의 정부대표단에 박정애, 김광협, 리일경, 리영호, 전창철과 함께 포함되었다. 긴 여정 끝에 12월 10일에 귀국하였다. 박길룡의 주장에 따르면, 중소분쟁 과정에서 북소관계가 악화되는 반면, 북중관계는 상대적으로 원만하였는데, 마오쩌둥의 압력 및 흐루쇼프의 방북 취소 등이 겹치면서 1959년 10월 23일, 박성철에게 외무상 자리를 물려주었다. 소련 외교문서에서도 대표적 친중파인 김창만이 남일을 외무상에서 몰아내었다고 적혀 있다. 다만 북한이 소련에 알린 것에 따르면, 부수상들이 일을 너무 못해서 부수상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외무상에서 해임한 것이라고 한다. 1960년 4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응상의 뒤를 이어 국가건설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응상은 국가건설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강등되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차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내각 부수상 겸 국가건설위원장에 유임되었다. 국가건설위원장 자리는 1962년 12월 즈음에 김두삼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66년 9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회일의 뒤를 이어 철도상에 임명되었다. 1966년 10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대규모 인선이 이루어졌으나 정치위원회 위원 자리는 그런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김갑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다만 부수상 및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는 재선되었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는 재선되었으나 정치위원회에서는 탈락하였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내각이 정무원으로 개편되면서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에도 선출되었다. 또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1976년 3월 7일, 64세를 일기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남일동지는 일편단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충성다하여온 충직한 혁명전사이다. 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를 높이 받들고 로동계급의 편에 서서 해방후 새 조국 건설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여 자기의 모든 정력과 재능을 다 바쳤다. (...) 실로 남일동지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그 어떤 어렵고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끝없이 충직하였으며 수령님의 가르치심따라 조국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력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아주 후하게 칭송했다.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정무원부총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또한 북한은 남일의 고향을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조작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수훈

5. 의혹과 논란

5.1. 독소전쟁 참전 여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일이 소련군 대위로 독소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은 낭설이다.

한때는 그가 독소전쟁 시기에 입대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 하리코프 공방전, 바그라티온 작전 등 굵직한 전투에서 장교로 맹활약했으며, 대위(일부 자료에서는 소령)까지 진급하여 1945년 베를린 전투 당시에는 게오르기 주코프의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소속 사단 참모장까지 지냈다는 설이 널리 펴져 있었다.[12] 이러한 설은 1951년 7월에 휴전협상이 시작될 무렵부터 대한민국 언론 기사에도 나오고 있다.
군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달 10일부터 개성에서 개최되는 정전회담에 출석할 북한괴뢰군측 대표 남일(南逸)[13]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한다.

한국 출생, 유년 시절에 입소(入蘇)한 후 소련 타쉬켄트 대학에 입학, 동 대학 졸업 후 적군(赤軍)에 참가하였다. 소독전쟁 시에는 적군 대위로 복무 후 1949년 귀국, 북한괴뢰국 교육성 부상에 취임, 그 후 수개월 후 소위 인민군 유격대 총사령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한국동란 발발 이후 북한괴뢰군 야전군 사령관으로 현지에 이르렀다. 그 연령은 알 수 없으나 약 사십세로 추측된다. 그런데 남일은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에 스티코브 소련대표의 수원(수행원)으로 소련대위 자격으로 출석한 일도 있다.[14]
동아일보 1951년 7월 10일자 2면 〈괴뢰군대표 남일의 약력
이대로라면 남일은 6.25 전쟁에 참가한 남북한 지휘관들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정규군 실전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정규군 경력이 빼어난 남북한 지휘관으로는 국민혁명군 소장으로 야전사단 지휘 경험이 있던 김홍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중일전쟁에서 일본군 중대~대대급 지휘관으로 활약했던 김석원이응준, 박격포술의 달인으로 불리며 팔로군 포병사령관을 지낸 김무정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가한 전투는 독일 국방군 정예부대에 맞서 수십만에서 백만명이 넘는 대군이 거대한 기동전을 벌인 독소전쟁의 대전투들에 비하면 왜소하다.[15] 병력과 장비가 보잘 것 없는 후방부대, 경찰 등을 대상으로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김일성 등)이나, 거꾸로 이런 항일 게릴라를 대상으로 한 토벌작전(김백일, 백선엽 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설에는 그간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왔다. 우선 독소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라 할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하리코프 공방전,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일부에서는 쿠르스크 전투까지 참전했다고 한다)에 모두 참가할 가능성부터 극히 희박했다. 이들 전투는 엄청난 격전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전투에 참가하면 전력 소모가 막심하여 부대가 해체되거나 장기간 재편성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 바실리 추이코프나 그의 제62군(이후 제8근위군), 기타 소련군 공격의 선봉을 맡아 재보급 최우선 순위에 있던 핵심 전차군단, 기계화군단[16]들도 이들 전투를 모두 참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남일의 정확한 소속 부대가 알려진 기록은 단 하나도 없었다. 특히 사단 참모장 정도의 중책을 수행할 정도의 참모장교였다면 각종 전투서열 자료에 이름이 드러나야 할텐데, 이 또한 발견되지 못했다. 고작 대위(일부에서는 소령)가 사단 참모장을 맡는 것도 어불성설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사단 참모장은 소련군 기준으로도 최소한 중령~대령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독소전쟁 중의 장교 부족 및 능력에 따른 파격 인사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이는 독소전쟁 초기의 혼란기에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결국 의혹에 시달리던 남일의 독소전쟁 참전설은 러시아에서 소련 시기 행정문서 및 기밀문서들이 대거 발굴되면서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쿠르스크 국립대 사학과 이고리 셀리바노프(И.Н. Селиванов) 교수는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기록보관소(РГАСПИ)[17]에서 찾아낸 여러 문건들을 토대로 남일의 독소전쟁 중의 실제 행적을 밝혔다. 그 결과 위에 나온 것처럼 그는 소련군에 입대하기는 커녕 우즈베크 지방에서 교육공무원 직을 수행한 경력밖에 없음이 드러났다. 이를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는 그가 대조국전쟁 용맹노동훈장(Медаль «За доблестный труд в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е 1941—1945 гг.»)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훈장은 독소전쟁 종전 후에 참전 군인이 아닌 후방에서 전쟁 수행에 공헌한 민간인을 치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18]

이 설은 아마도 1950년 9월 남일의 총참모장 취임을 전후하여, 북한 측에서 소련의 양해 하에 꾸며낸 것으로 보인다. 당장 항일 빨치산이나 팔로군 출신 경력자가 적지 않은 조선인민군에서, 군 경력이 전혀 없는 소련 변방의 교육관료 출신자를 총참모장에 임명한다고 하면 납득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부에서 영이 안 서는 것은 물론, 중국 인민지원군, 대한민국 국군, 미군 모두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소련은 자국 국적을 가지고 당성이 투철한 인물을 조선인민군 고위직에 앉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입북 후 남일은 대단히 강한 출세욕을 보여, 기꺼이 자신의 경력을 세탁하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바칠 자세가 된 사람이었다. 실제 6.25 전쟁 시기 북한의 선전매체들은 남일이 김일성의 영도를 따른 탁월한 군 지휘관이자 협상가였다고 선전하며 '전쟁영웅'으로 미화하였다. 사단 참모장을 지냈다는 주장과는 안 맞지만 독소전쟁 시기 최고 계급을 대위로 한 것도, 김일성이 제88독립저격여단 소속의 대위였기에 그보다도 높은 계급이었다고 하기는 곤란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오늘날에는 북한 측의 남일의 경력에 대한 기술도 변화하였다. 이는 북한의 공식 방송매체인 조선중앙텔레비전에 방영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일이 총참모장직에 임명되었을 당시, 그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못 미더워 했다. 남일로 말하자면 항일 전쟁에 참가한 경력도 없고, 남다른 군사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까지만 해도 남일은 교육사업에 종사해 온 수학 전문가로서, 오히려 군사분야하고는 생소한 위치에 있던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중앙텔레비전 소개편집물 〈정전담판에서의 승리는 이렇게 마련되였다 ―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였던 남일〉 (2017년 8월 26일 방영)
즉, 1950년대부터 남일 생전까지 북한에서는 남일이 '독소전쟁부터 활약한 잔뼈 굵은 군인'으로 선전되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해왔다. 반면, 오늘날의 북한에서는 남일을 위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교육관료 출신 (신출내기) 총참모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관계의 정정이 언제부터 이뤄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현재는 북한에서도 남일이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임명 이전에는 군인이 아니었고, 독소전쟁 참전도 사실이 아님을 공인하고 있는 셈이다.

5.2. 숨겨진 가족의 존재

한편 남일은 카르시에서 교직에 있을 당시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파이나 르포프나(1920년생)와 결혼하고, 1945년에는 딸 올가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1946년 북한으로 파견되면서 가족을 우즈베크 현지에 남겨두고 갔다. 이후 본처와 딸은 남일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며 남일을 소련으로 소환하거나 본인들을 북한에 보내달라고 청원했지만, 남일은 이들을 외면했다고 한다.[19] 이는 본처의 청원 내용이 러시아 기록보관소에 남아 있어 명확한 사실로 확인된다. 이후 남일이 1956년에 소련 국적을 포기하고 북한에 귀화하자, 본처와 딸과의 관계도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리고 북한에 눌러앉아 고려인 여성(마르타 박)과 재혼을 하여 아들을 얻었다.

이외에 2006년 무렵에는 중국 축구협회 회장이던 조선족 난융(南勇)이 남일의 아들이라는 설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중국 언론의 후속 보도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난융의 실제 부친은 남흥렬(南興烈)로, 일제강점기에는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항일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 옌볜(延边)현(현재 룽징(龙井)시) 부서기를 역임한 인물이라고 한다.

5.3. 김정일에 의한 암살 의혹

대외적으로 남일의 사망이 공식 발표된 것은 1976년 3월 8일 평양방송 보도를 통해서이다.
북괴 부수상 남일(62)이 7일 사망했다고 평양방송이 8일 보도했다.
이곳에서 청취한 평양방송은 남(일)이 사고로 사망했다고 전하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9일 장례가 거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일은 지난 72년 12월 9명의 부수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경향신문》 1976년 3월 8일자 기사 (1면)

다만 여기서 사망에 이르게 된 사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보도가 없었다.[20] 이후 남일의 사망 사고가 실은 김일성-김정일의 부자 권력 세습을 둘러싼 갈등으로 벌어진 우발적인 사고 혹은 암살이라는 설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북괴군 총참모장을 지냈고 부수상으로 있다가 지난 3월7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된 남일은 김일성 측근자들에 의해 살해됐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지가 1면 기사에서 보도했다.

이 신문은 남(일)이 3월7일 돌발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공식 보도됐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평양 측은 그의 사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그의 사망에 뒤따라 외부 세계로 여러 가지 해석이 유포되어왔다고 지적했다.

이들 소식통에 의하면 사망 당시 64세였던 남일은 김일성이 많은 열성당원들을 제쳐놓고 그의 아들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려는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었다는 것이다. 한 소식통은 남일이 김일성과 후계자 지명 문제로 격론을 벌이다가 김일성의 넓은 사무실로부터 창밖으로 떠밀려진 후 땅에 떨어져 사망했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한 소식통은 남일이 김일성이나 혹은 경비원들에 의해 창밖으로 떠밀려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또 다른 소식통은 남일이 지난 3월7일 아침 출근 도중 그가 타고 가던 리무진 차에서 밖으로 떠밀려나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남일은 사망 당시 북괴 노동당중앙의원, 북괴 최고인민회의의원, 중앙인민위원회의원 및 부수상 직을 갖고 있었다.

포스트 지는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진 김일성이 그의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부상시키려 하고 있을 때인 1970년대 초반에 김일성과 남일 간에 불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포스트 지는 또 김정일이 점차 공식 석상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당내 중진들 사이에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그의 사진이 김일성의 사진과 함께 나란히 걸려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76년 5월 21일자 기사 (3면)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지가 당대 중국 본토 소식에 있어서 최고 권위지라는 이유로 이 보도에 대해 신빙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북한 내부의 신뢰할만한 소식통들이 모조리 제거되면서 소련과 중국 정부조차도 북한 정권 내부의 권력 변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21] 실제로 숙청이 이루어진 1967년 갑산파 숙청 사건, 1969년 허봉학, 김창봉 사건조차도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 주석단의 급격한 변화, 김일성 저작집을 통해서 유추하는 것만이 가능할 정도이다. 1970년에도 김광협, 한상두, 리영호 등이 실종되는 추가적인 숙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대 학계에서도 제대로 규정을 못할 정도로 김일성 시기 북한 정치사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관영언론도 아니고 홍콩의 민간언론이 북한 내부사정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를 얻는 것은 매우 힘들다. 3월 9일에 열린 남일의 장의식에 김일성, 김일 등이 빠져있던 것에 대해서 외부에선 많은 의미를 부여했지만 애초에 장의위원에는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예우이다. 정말로 수령에게 미운놈이면 국장은 고사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고 기록을 말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북한이다.

시간이 흐르자 다양한 정보채널을 통해 추락사 등의 원인은 기각되고, 뭔가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이었던 것으로 수렴되었다. 보다 자세한 사고 경위에 대해서는 고위 탈북자들을 통해 몇 가지 설이 알려져 있는데, 큰 틀에서는 같으나 세부 사항에서는 엇갈린다. 일단 당시 내각 정무원 부총리 및 경공업위원회 위원장 직책으로 안주시의 남흥청년화학기업소 시찰을 다녀오던 도중에 평양국제비행장 부근에서 일어난 트럭과의 충돌사고로 사망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일설에는 사고를 낸 트럭이 '91'로 시작하는 군용 트럭이었는데, 이 번호판은 김정일의 호위를 책임지는 호위2국 소속 차량들만 달 수 있는 것이었다. 원래 이런 교통사고 조사는 사회안전부 담당인데, 사회안전부 교통조사과 부과장이 현장에 나가 자세한 정황을 조사하려고 하니 호위2국 소속 장교들이 집요하게 조사를 방해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사고를 낸 트럭은 국가정치보위부 소속 6톤 트럭이었는데, 이 사고를 낸 트럭 운전사는 중형을 받기는 커녕 6개월 뒤에 함경북도 명천군 당위원회 조직비서 직에 올랐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 때문에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인 암살이라는 설이 퍼졌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남일의 아들들(모두 두 명인데 해군과 내각에서 근무)이 한때 갑자기 사라져서[22] 그 소문이 더욱 증폭되었다.

이들 암살설은 모두 김정일을 그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일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했다고 하며, 그간 변함 없이 당과 내각의 고위직에 앉혔던 것으로 보아 특별히 신임이 떨어졌다고 볼 근거가 없다. 반면 김정일은 당시 김평일과의 후계 다툼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남일을 제거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원로들 가운데 인민무력부장 최현김정일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으나, 남일은 소극적이나마 김평일을 지지하는 쪽이었다고 한다.[23] 소련파라는 멍에 때문에 1970년대에는 권력의 핵심에서 다소 밀려나기는 했어도, 당시까지 북한 일반 대중들에게 조국해방전쟁(6.25 전쟁)의 영웅으로서 남일의 명성은 여전히 대단했다. 이런 '전쟁영웅'이 보다 적극적으로 김평일을 밀어줄 경우 김정일의 후계구도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 소련측 인사들이 남일의 아내를 면담한 기록 등을 보면, 후계자 지위를 굳혀가던 김정일의 압박 때문에 옴싹달싹 못 하던 처지를 하소연하는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황장엽과 김정일의 러시아어 과외교사였던 김현식[24] 모두 김정일의 암살이 유력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심지어 1980년대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비슷한 취지의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안기부는 이와 함께 "김정일김일성 부자 세습체제를 반대하는 인사들을 극비리에 숙청키 위해 정치보위부 안에 극비 단체인 「암살대」를 조직, 직접 지휘하고 있으며, 76년 3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된 당시 정무원 총리 남일(당시 61세)도 이 암살대에 의해 암살됐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 1984년 4월 3일자 기사 (7면)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헛점들이 많다. 1976년이면 김정일이 이미 정치위원회 위원, 조직비서, 선전비서, 조직지도부장, 선전선동부장을 모두 겸하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라고 당내에서 선포된 상황이었다. 이미 김일성이 자신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공표한 상황에서 소련에서 같이 온 자기 친구들의 뼈와 살이 분리되는 것을 본 남일이 이미 나락으로 간지 오래인 김평일을 계속 지지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역시나 항일 빨치산 출신이며 국공내전, 6.25 전쟁에 참전한 김동규의 경우에는 김정일 세습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김정일의 부상이 너무 빠르니 차근차근하자고 제의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록말살이 될 정도이며 남일보다 거물인 박헌영이나 연안계 독립운동가들도 역적으로 처단했던 것이 북한인데 남일이 정말로 김정일 세습에 개겼다면 암살로 끝날리가 없다. 박병엽의 경우에는 남일 암살설을 부정하면서 안주청년화학공장 료해 과정에서 자재더미가 무너져서 깔려죽은 것이라고 증언하였다.[25]

그리고 안기부의 대북 첩보력 역시 한계가 있던 것이 분명하다. 휴대폰이 보급되고 서방 대사관들이 평양에 들어간 21세기에도 북한에 관한 온갖 낭설과 헛소문이 판을 치는데 북한과 직접적 교류는 고사하고 소련, 중국과의 제대로 된 교류도 불가능했던 대한민국에서 북한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26] 1960~70년대 보도에선 애먼 사람을 김정일로 지목하는 일도 허다하며[27] 특히 정부문서는 북한 세습을 비판하기 위해서 김정일 악마화에 주력하는 경향이 다분했다.

또한,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남일이 안장되었고, 김정일 시대에 편찬되었던 《조선대백과사전》에 남일이 수록되었으며, 김정은 시대에 남일 소개편집물까지 만들어지고 《우리민족끼리》, 《조선의 오늘》 같은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에서 남일 사진이 배포되고 있다는 점은 김정일에 의한 남일 암살설에 의문을 품게 만들고 있다. 비단 북한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나 사망하면 덮어놓고 암살이 아니냐는 의문이 쏟아져나오던 것이 과거 냉전시대의 현상이었고 여전히 폐쇄적인 북한에 대해서는 이러한 경향이 지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죽은 인물을 독재자를 대체할 수 있던 민주주의적 열사나 양심적인 인물로 미화하는 현상 역시 발견되고 있다. 소련에서는 키로프를 스탈린을 대체할 수 있던 민주적 지도자로 뜬금없이 떠받들던 적이 있고 김일성 권력 장악기에 숙청된 고려인과 연안계, 심지어 갑산파조차도 무슨 민주 야당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전혀 사실관계에 맞지 않다. 남일 암살설 역시 이색적인 고려인 출신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까지 참여했다는 헛소문에, 6.25 전쟁 중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남한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상징성 때문에[28] 그가 사고로 죽자 김정일 세습에 반대한 양심적 간부라는 근거없는 미화가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

5.4. 강진군 출신 월북자 설

전라남도 강진군의 지역신문인 강진일보에서는 2013년에 남일에 대한 기획특집 기사를 8회에 걸쳐 연재했다. 강진인물사10 - 북한의 전쟁영웅 南日장군 이 기사에서는 남일이 사실 일제강점기에 강진군 병영면 면장을 지낸 남주익(南周翼)의 아들 남정욱(南廷旭)이라고 주장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역시 낭설임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남일은 의령 남씨이고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출신이다. 이상한 것은 1939년 타슈켄트 사범대학 입학전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 타슈켄트 사범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등의 필요학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없다. 또한 북한으로 귀환했을 때 그의 인적사항은 출생지가 함경북도 경원군이라고 알려졌는데, 남일 자신도 그렇고 북한언론 역시 남일의 혈통이나 고향에 대해서 경원군이라는 것외에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다는 점이다. 소련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귀향하여 북한에 왔을 때는 여기저기 공백이 남은 약력만 공개되었다. 교육부 차장에 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일의 가족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특이하게도 1950~60년대에 강진군에선 “휴전회담에 나온 남일이 전직 병영면장이었던 남주익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거기다 “남일이 고향인 병영을 야밤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들려왔고, 70년대에 한 강진 사람이 술자리에서 광주 사람이 "강진에 인물이 누가 있냐?"고 약올리자 "우리 강진에 인물이 왜 없어? 남일 장군님이 있다구"라고 했다가 코렁탕을 먹은 아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남주익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장자인 남정욱이 광주서중학교까지 다니고 일본 유학 이후에는 기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전쟁이 끝난지 아직 10년이 넘지못한 시기에 하필이면 북한의 군사령관이 고향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진 경로에 대해서는 강진일보조차 추적하지 못했다. 그만큼 소문은 뜬소문의 수준에 머물렀지만 그 주인공이 너무 특이하긴 했다. 또한 동아일보 최흥조 기자는 휴전회담장에 출입허가된 유일한 대한민국 기자로 실제로 남일과 마주친 적도 많았는데, 유엔군과 기싸움할 때와는 다른 면을 자신에게 보여주었다고 당시 기사에서 서술하였다.

다시 말해 이 설에 의하면 1920년대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에 연락이 끊긴 강진 출신 남정욱이, 이후 이름을 남일로 바꾸어 소련에 나타나 타슈켄트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독소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뒤에 북한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그 근거로는 남일의 1939년 이전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과, 의령 남씨 문중 사람들 기억 속의 남정욱과 6.25 전쟁 이후 모습을 드러낸 남일의 생김새가 많이 닮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강진일보의 이 주장을 입증할 다른 객관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남씨 문중에서 떠도는 '남정욱이 광주서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일본인 선생이 양자로 입적해서 일본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채록하긴 했으나, 그 일본인 선생이 누구이며 어디로 갔는지 등에 대한 기록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문중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실제로 남정욱과 남일이 닮았을 수는 있으나,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끼리도 닮아 보이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리고 문중 사람들이 기억하는 남정욱은 10대 후반이었고, 6.25 전쟁 이후 나타난 남일은 30대 후반이었다. 성장기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만으로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남정욱이 곧 남일이라는 설은 남씨 문중과 강진일보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남일이 소련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라는 것은 러시아 문서고에서 발굴된 여러 공식기록으로 입증된 것이며, 윗 단락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소련에 잔류한 처자도 있다. 북한의 경력 세탁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북한이 세탁해준 경력에서도 그는 함경도 사람으로 나온다.

폐쇄적인 북한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며, 공산권과의 교류도 없던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화제가 되고, 한동안 김일성을 제외한다면 북한사람 중에선 가장 유명한 축에 속했던 남일의 배경에 대해서 남한 입장에선 공백 그 자체로 보일 뿐이니 이런저런 추측들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었으며, 강진군 출신이라는 황당한 설왕설래도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나 적국의 수괴나 다름 없는 남일이 사실은 우리 집안 사람이었다는 서사는 문중의 은밀한 이야깃거리로 확대 재생산되어 이어지기 좋은 주제였다.

6. 참고문헌


[1] 이 학교는 시베리아 지방에 처음 세워진 유서 깊은 대학으로 유명하다.[2] 남일은 6.25 전쟁 시기 내내 소련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앞서 1950년 2월에 다른 입북 고려인 전문가 174명과 함께 '조선 공민' 자격을 취득한 상태였다.# 일국의 총참모장이중국적이었던 셈이다. 소련과 북한의 느슨한 정책 때문에 1957년 12월까지 상당수 고려인 출신 북한 인사들은 이중국적을 유지하였다고 한다.[3] 당시에는 조선인민군에 군사칭호(계급)가 정식 도입되기 전이었고, 직위에 따라 직위표(견장)가 부여되었다. 총참모장의 경우, 1948~50년 당시에는 별이 2개였으나, 1951년 즈음부터는 별 3개로 승격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1952년 12월 31일에 군사칭호가 정식 도입되면서 남일은 그대로 대장(☆☆☆) 계급을 받았다. (이때에는 장령급이 소장-중장-대장의 3단계였기 때문에 대장 계급장의 별도 3개가 되었다.)[4] 셰팡(1908~84)은 일본 육군사관학교(20기) 출신으로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참모장이었다. 1953년 귀국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군훈부 부부장, 군사과학원 부교육장, 고등군사학원 교육장 및 부원장 등을 역임했고, 1955년에 소장 계급을 받았다. 이후 문화대혁명 당시 숙청당해서 8년간 옥고를 치뤘으나 덩샤오핑 집권 이후인 1979년에 복권되어 후근학원 부원장, 제6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등을 지낸 뒤 병사했다.[5] 덩화(1910~1980)는 중국 인민지원군 제1 부사령원 겸 제1 부정치위원을 담당했다. 펑더화이가 귀국한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 대리사령원 겸 정치위원을 맡아 6.25 전쟁 말기 공산군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했다. 1954년 귀국 후에도 동북군구 제1 부사령원, 대리사령원, 중국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 겸 심양군구 사령원 등의 중책을 맡았고, 1955년 상장에 올랐다. 그러나 1959년 펑더화이 실각 당시 펑더화이파로 몰려 군에서 쫓겨났으며, 잠시 쓰촨성 부(副)성장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문화대혁명홍위병에게 박해를 당했다. 역시 덩샤오핑 집권 당시 복권되어 군사과학원 부원장,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다 병사했다.[6] 휴전협정의 북한 대표단의 후일담은 참으로 기구하다. 먼저 남일은 아래에 기술된대로 1976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후일 후계구도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한 김정일의 음모라는 설이 있다. 리상조는 정전협정 타결 후 주 소련 대사로 임명되었다가 8월 종파사건 때 소련과 중국 당국에 김일성의 독재를 알리는 편지를 썼다가 김일성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대세를 장악하자 바로 소련으로 망명한다. 이후 소련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1980년대말 한소 수교가 이뤄지자 대한민국에 강연을 와서 김일성을 매우 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맞다고 증언했다. 그러니까 당시 대한민국에서 대세이던 김일성 가짜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장평산은 종전 후 총참모부 차장 및 제4군단장을 역임했으나, 연안파의 일원으로서 8월 종파사건 이후 입지가 축소되었으며, 1958년 3월에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백선엽 대장은 휴전회담 당시 리상조와 하나의 악연이 있었다. 개성 내봉장에서 휴전회담이 열렸을 때 북은 자기쪽 의자를 더 높게 만들어놓았고, 얘기없이 1시간 동안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맞은 편 리상조가 종이에 빨간 색연필로 “제국주의자의 주구는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라고 쓴 것을 계속 보여준 것. 백선엽 대장은 당장 리상조를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참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훗날 백선엽 대장이 1980년대 소련으로 망명한 뒤 내한한 리상조를 다시 만났을 당시 리상조에게 그 얘기를 하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어물쩡 넘어갔다고. 또 재밌는 것은 백선엽은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인데 리상조는 부산 출신이었다.[8] 당시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대표단에 끼지 못했으나, 백선엽 장군이 참관인(옵저버)으로 라도 참여하겠다고 해서 갔다.[9] 182㎝로, 지금 기준으로도 꽤 큰 편에 속하는 키이다.[10]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이북 관료들을 겪으면서 썼던 표현. 뜬금없이 의전이나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 강한 목소리를 내며 기선을 제압하려 들었기 때문에, 처음엔 기싸움이라고 여겼으나, 점점 그런 것만은 아닐거라 생각되더라고.[11] 실제 우리나라 군사정권 시절에도 비슷한 처신 사례가 있었다. 당시 하나회가 득세하던 가운데서도 용케 대령 진급에 성공하고 준장 진급까지 성공한 호남 출신 장성이 금의환향해 마을 잔치가 열린 자리에서, 어느 마을 노인이 "OOO장군은 대통령감이다."고 덕담(?)을 건네자, 이 장성은 "누구 죽일 일 있느냐?"며 대경실색하며 오히려 그 촌로를 심하게 구타했던 것. 작은 사회 성격이 강하고 1다리만 건너도 다 알고 지내는 지역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라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는데, 당연히 온갖 욕을 하는 이들과, "그게 바로 권력"이라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느 귀신이 잡아간지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라 말하는 이들로 평이 나뉘었다는 후문.[12] 본 문서의 이전 판에도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남일의 독소전쟁 시기 행적이 기술되어 있었다.[13]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남일의 정체가 파악이 안 되어, 한문명으로 南逸/南一/南日 등이 마구 섞여 쓰였다.[14] 1946년 입북시 역할이 소비에트 민정청의 통역관이기도 했기 때문에 스티코브를 수행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15] 예컨대 김홍일이 활약한 샹가오회전(上高會戰)은 국민혁명군 11개 사단 총 10만여 명과 일본군 제33, 34사단 및 독립혼성 제20여단 총 6만5천여 명이 격돌한 전투였다. 반면 바그라티온 작전만 해도 독일군 100만여 명에 맞서 소련군 200만 명 이상이 투입됐고, 양군이 동원한 전차와 자주포만 최소 5천대 이상이었다.[16]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은 기갑/기계화부대의 경우 '군단'이 사단급 부대였다.[17] 이곳은 소련 공산당의 1952년 이전 문서들을 보관하는 곳이다.[18] 이 훈장은 독소전쟁 승전 후인 1945년 6월 6일에 제정되었으며, 수훈자는 무려 16,096,750명에 달한다.# 1610만 개나 뿌린 공로훈장을 하나 받았다고 해서 전쟁 영웅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19] 본처와 딸을 버린 이유는 북한에 와서 만난 후처와 빨리 정을 붙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순혈주의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북한에서 소련 현지인인 아내와 혼혈인 딸이 걸림돌이 될까봐 그랬다는 주장도 있지만, 초창기(1940~50년대) 북한에서는 소련인과의 통혼이 그다지 문제되는 일은 아니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해방 직후 무렵에 이미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20] 북한 보도가 대개 이런 식이다. 병으로 죽어도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보도하는 것도 상당히 인색하다.[21] 1977년 부주석 김동규가 숙청된 이후 주북 헝가리 대사관은 3년이 지난 1980년에야 이를 파악하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다.[22] 잠시 행적이 묘연하기는 하였으나, 남일의 손자들(해군 소속 남현일, 육군 소속 남일철)이 현재 선전방송에 나오는 것을 봤을 때 가족들이 숙청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23] 일설에는 후계 세습 자체에 부정적이었다고 하나, 이러한 생각을 가진 소련파들의 숙청에도 살아남은 이력을 봤을 때 세습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일 외에도 최용건김평일을 지지했다고 전해진다.[24] 1992년에 러시아에서 탈출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했으며, 회고록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에서 남일의 암살설을 이야기하고 있다.[25] 참고로 박병엽은 김동규 숙청을 증언한 인물이기도 하다.[26] 김정일은 러시아를 기차로 방문하던 중 러시아 외교관에게 당시 서방 언론에서 배포된 조명록, 김용순 숙청설을 언급하면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였고 길재경 미국 망명설에 대해서 조선중앙통신은 길재경 사망 사실을 확인해주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27] 그나마 정보가 많아진 2009년~2010년에도 남한의 민간인을 김정은이라고 지목했었던 일(테레비 아사히 김정은 오보 사건 참고)과 슈퍼주니어 예성을 김정은이라고 보도했던 촌극(스위스 언론에서 당시 예성의 본명 "김종운" (2022년 현재 "김강훈"으로 개명) 과 "김정은"의 영어 표기를 헷갈림)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28] 당장 고려인인 그를 두고 엉뚱한게 전라도 출신으로 지목한 본 문서의 5.4 단락을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