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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14:59:02

연형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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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
延亨默 | Yon Hyong Muk
파일:연형묵.jpg
출생 1931년 11월 3일
함경북도 경원군
사망 2005년 10월 22일 (향년 74세)
북한 평양시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본관 곡산 연씨 (谷山 延氏)
가족 아버지 연희상
배우자 신오순
자녀 연희준 외 1남 1녀입양
학력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프라하 공과대학교 (학사)
직업 관료, 정치가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중앙에서의 사업2.3. 자강도 책임비서 시절2.4. 말년과 사망
3. 여담4. 장의위원회 구성5. 참고문헌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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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1991년 남북 UN 동시가입 및 남북기본합의서
북한의 정치인. 김일성 시대에 정무원 총리를 지냈으며 2005년까지 자강도 당 책임비서였으나 10월 22일에 사망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31년 11월 3일,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포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연형묵의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고 이 때문에 유년시절을 만주에서 보냈다. 그런데 독감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던 김일성이 연형묵의 집에서 머물면서 치료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연형묵의 부모가 모두 빨치산에 가담하였으나 1940년에 일본군의 토벌에 전사했다고 한다. 이후 고아가 된 연형묵은 만주를 떠돌면서 유리걸식을 하면서 소학교만 겨우 졸업했고,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 살다가 림춘추, 김좌혁 등이 만주의 혁명가 유자녀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1946년, 북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7년 10월, 오늘날의 만경대혁명학원인 평양혁명자유자녀 학원이 개설되면서 2기로 입학했는데, 16세의 연형묵은 가장 연장자인 축에 속했다. 이때 김정일과도 어린 시절 친구로 놀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만경대혁명학원생들로 구성된 김일성 친위중대에 소대장으로 입대하여 김일성을 호위하였으며 김일성은 연형묵과 신발을 바꿔 신어보는 등 연형묵을 크게 아꼈다고 한다. 1952년에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대학으로 유학하여 1년간 어학공부를 한 후 예비과를 거쳐 1955년 기계학부에 입학하였고 11학기를 공부한 후 1959년에 귀국하였다. 명석한 두뇌로 성적이 좋았다고 하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북한 유학생들의 리더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군수공장인 65호 공장 기사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던 중 65호 공장장이 불량한 성분을 가져서 생산에 사보타주를 한다는 보고가 올라갔는데 연형묵이 불량품이 나온 건 사실이지만 의식적 태업이 아니라고 그를 옹호하는 의견을 올렸고, 이에 김일성이 연형묵은 모함하지 않고 아첨하지 않는 진정한 간부라고 칭찬하면서 기계공업성 제1부상으로 기용하였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68년 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2.2. 중앙에서의 사업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중공업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71년 12월, 비서국 비서에 임명된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11월 23일자 인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1973년 9월, 5기 7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75년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김정일이 지휘한 3대혁명소조운동을 도와 김정일 세습 과정을 기여하였다. 하지만 1977년에 뭔가 실수를 저질러서[1] 한번 공장 지배인으로 하방되어 혁명화당하기도 하였으나 1979년에 복귀하여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및 중공업 비서에 다시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5년 10월 1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 결정에 따라 정무원 제1부총리에 발탁되었으며 11월 19일의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 결정에 따라,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위원장도 겸하였다. 하지만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비서에서 해임당했고 1986년 8월 1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김윤혁이 새 제1부총리에 임명되었으며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6년 11월 2일 신임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장 자리를 계형순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1986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12중전회에서 비서국 비서에 다시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12월, 리근모 총리가 숙청당하면서 최고인민회의 8기 4차 회의에서 후임 정무원총리로 선출되고 총리로 조동됨에 따라 비서에서는 소환되었다.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정무원총리로 유임되었다. 1991년 10월,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이후 46차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연설하기도 하였다. 1991년 12월, 서울에 와서 대한민국 정원식 총리와 <남북기본합의서> 작성에 참여하여 우리 국민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서울에서 추어탕을 먹었다고 알려져 있다.

2.3. 자강도 책임비서 시절

하지만 북한의 개판인 경제사정은 계속하여 악화되었고 결국 1992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 및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에서 강성산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경질되었으며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고 자강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래도 군수공업의 중심지인 자강도로 갔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 신임은 유지되었다는 증거이며 탈북자 소스에 따르면 그나마 평가가 좋다고 한다. 1992년 12월부터 2005년 6월까지 자강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고난의 행군’시기 자강도 주민들의 먹는 문제와 전기 문제를 해결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기에 질투한 김정일이 차 사고를 가장해서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 썰을 보면 개나소나 암살 당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판을 치며 심지어 이런 음모론에는 김일성, 김정일조차도 피해자이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자강도 책임비서 재임 시절 강계정신을 강조하며 똥꼬쇼를 하였고 고난의 행군 시기 유일하게 자강도만 경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7년 전력난을 개선하기 위해 스위스의 전력공업을 공부하고자 스위스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98년 1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연히 재선되었고 국방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정일은 2000년 2월 16일, 자강도를 현지지도하면서 "고난의 행군 시기에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준 것이 강계정신이다. 나는 강계정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연형묵을 추켜세워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에 일반 노동자들과 같은 허름한 집에서 지내면서 옥수수밥만 먹고 솔선수범하는 등 모범적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1년 1월, 김정일의 중국 순방, 2001년 8월, 김정일의 러시아 순방을 수행하였으며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까지 승진하면서 김정일의 최측근임을 과시하였다. 심지어 이 시기에 김정일의 후계자로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2.4. 말년과 사망

하지만 췌장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김정일의 배려로 2004년 11월, 러시아에서 수술까지 받았으나 차도가 없어 2005년 6월, 자강도 책임비서에서 물러났으며 2005년 10월, 당창건 60주년 중앙보고대회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2005년 10월 22일, 12시 10분에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북한은 당중앙위원회, 국방위원회 연명의 부고를 통해 "연형묵동지는 《고난의 행군》시기 우리 당의 선군령도를 높이 받들고 자강도인민들이 혁명적군인정신,강계정신을 발휘하여 부닥친 난관을 앞장에서 뚫고나가도록 함으로써 우리 혁명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연형묵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주체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쳤다. 연형묵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혁명적원칙성과 겸손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의 높은 신임과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라고 그를 아주 크게 칭송해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북한 정치인에 대해 조의를 표명,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병으로 사망한 소식을 접하고 삼가 애도의 뜻을 전한다"는 내용의 조전을 전통문을 통해 보냈다. 민주노동당도 조선사회민주당을 통해 조전을 보냈다.

상당히 성례한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김정일이 김영남, 조명록 등 당정의 고위급 인사들을 이끌고 직접 가서 조문했으며 "연형묵 동무는 나의 가까운 혁명 동지이며 전우입니다."라는 글까지 남겨주었다. 김정일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5년 전에 사망한 강성산의 죽음은 보도조차 해주지 않은 것에 비하면 연형묵이 김정일에게 미움 받았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이후 북한은 연형묵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 <기록영화: 빛나는 삶의 품 24 영생의 은인>도 만들어 배포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연형묵을 언급하였다. 김정은 시대에서는 "당의 구상과 의도를 말이 아니라 철저한 행동실천으로 받든 연형묵동지"라고 높이 떠받들어지고 있다.

3. 여담

김정남이 일본 밀입국이 걸려 추방당하고 그 경쟁자인 고용희도 사망하고 장성택도 일시 숙청당했던 2004년에는 북한 후계구도에 대해 예측이 불가능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면서 엉뚱하게도 연형묵이 김정일의 권력을 승계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었다. 하지만 김정은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상황이고 연형묵이 김정일보다도 일찍 죽으면서 공염불이 됐다.

연형묵의 아내는 신오순인데, 2023년 2월 현재에도 생존하여 김정일 찬양 소개편집물에 증언자로 이따금 나온다.

4. 장의위원회 구성

5. 참고문헌

6. 같이보기


[1] 섹스 스캔들이라는(...) 얘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