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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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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5대 정무원총리
김일[1]
金一 | Kim Il
파일:김일 부수상.jpg
본명 박덕산
출생 1910년 3월 20일
사망 1984년 3월 9일 (향년 73세)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직업 관료, 정치인
종교 무종교 (무신론)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6.25 전쟁2.3. 부수상 시기2.4. 총리 및 부주석 시기
3. 장의위원회 구성4. 수훈5. 경력6. 여담7. 대중매체에서8.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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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소련의 군인, 북한의 군인, 정치인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본명은 박덕산으로, 1910년 3월 20일에 출생하였다. 함경북도 경성군[2] 출신으로 1931년 항일 유격대에 입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35년 2월, 공청 연길현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38년 11월, 김일성과 함께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으로 투쟁했으며 제1로군 제2방면군 8단 정치위원을 지냈다. 1940년 11월, 소련으로 피신하여 88국제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동북항일연군 남야영 임시당위원회 위원,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당서기, 조선공작위원회 간부 등을 역임했다. 한때 일본에서 그가 1935년 타슈켄트 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으나 김일의 비서를 지낸 탈북자 오기완은 전혀 들어본 일이 없다고 반박했으며, 김일은 러시아어도 할 줄 몰랐으니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소련으로 넘어간 후 러시아어 강습소에 들어갔으나 소위 소조활동을 위해서 1주일 만에 때려쳐서 끝내 못배웠고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부수상 임명 후에 소련 간부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러시아어를 뒤늦게 다시 배웠지만 나이 먹고 배우니 '머리가 굳어서' 결국 간단한 인삿말조차도 못 배웠다고...

광복 후 귀국해서 1945년 10월, 서북5도당책임자급당열성자대회에 참석,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5년 11월에 북조선공산당 평안북도당 조직부장을 지내다가 평안북도당 책임비서로 승진, 건당, 건국에 참여했다. 1946년 3월 1일, 조선인민군 창설을 위한 소군정과의 회담에 참석, 보안간부훈련소 제3소 문화부소장을 맡았는데, 이상하게도 미군 기록에는 유우일로 이름이 잘못 기록되었다. 1946년 8월, 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6년 8월 15일, 보안간부훈련대대부가 설치되면서 문화부사령관이 되어 조선인민군 내부에 김일성 혁명전통 이식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이것이 조선인민군으로 확대개편되면서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사령부 문화부사령관이 되었다. 북한 기록에는 1946년 9월부터 1사단 문화부사단장을 지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인민군 창설 전의 인민집단군 제1경보병사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을 때는 1사단 문화부사단장은 김봉률이었다.

2.2. 6.25 전쟁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정부가 수립되자 민족보위성 부상 겸 총정치국의 전신에 해당하는 문화훈련국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 전태룡, 최용진, 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최현,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1949년 4월 30일, 인민해방군 내부의 조선인 부대들을 받아오기 위해 중국으로 파견되어 중국 지도부와 협상하였다. 문화훈련국장 재임 시절에 김일성 우상숭배를 주도하였다. 국내 연구에 따르면 1949년 6월, 남북로당 합당 과정에서 상무위원회가 폐지되고 조직위원회로 흡수되면서 조직위원회에서 탈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북로당 합당 결과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소련 자료를 보면 조직위원으로 유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민족보위성 문화부상 겸 전선사령부 군사위원으로 참전하였으나, 1950년 10월, 문화훈련국이 총정치국으로 개편되면서 문화훈련국장에서 철직되고 박헌영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1950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미국의 압도적 공군력에 질린 김일이 비행기가 없으면 적과 싸울 수 없다고 합리적으로 발언한 것이 패배주의로 몰려 비판을 받고 문화부상에서 해임되어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했고, 조직위원에서 해임되었다.[3] 1950년 체신성 정치국 부국장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넋이 나가서 지하 벙커 사무실에서 담배만 뻑벅 피워댔고 이에 김일성이 호위국장인 김종항을 보내서 위로해줬다고 한다.

이후 내무성 정치국장(소련 문서에서는 부국장), 전선사령부 군사위원을 거쳐 1951년에 조선인민총정치국 부국장을 지냈다. 이후 1952년 12월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대거 용서받아 다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조직위원에 보선되었으며, 박영성의 뒤를 이어 평안남도 당위원장으로 복귀한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52년 10월, 소련공산당 19차 당대회 대표단으로 박정애, 박영빈, 배철, 박금철과 함께 다녀왔다.

2.3. 부수상 시기

전후 1953년 8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비서제가 폐지되면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 박창옥과 함께 정치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조직위원회가 폐지되고 상무위원회가 부활하면서 다시 상무위원에도 선출되었다. 또한 당규약개정위원회 위원에도 위촉되었다. 1953년 12월 제7차 전원회의에 출석하여 <통일전선사업을 개선·강화할 데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하였으며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 3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으며 박문규의 뒤를 이어 농업상도 겸하게 되었다.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에서 공업생산을 대폭 늘리는 수정을 했다가 1955년 대기근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은 무리하게 공업화를 지시한 자신의 책임은 쏙 빼고 1955년 4월 전원회의에서 내각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과 김일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그들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부수상 겸 농업상 직함은 계속 유지하였으며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정치위원회를 대체한 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9월,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부수상에 유임되었으나 농업상 자리는 한전종에게 물려주었다. 소련의 계속되는 수상과 당위원장 분리 요구에 김일성은 김일을 후임 수상으로 추천했으나 지극히 무능했던 소련대사 알렉산드르 푸자노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고 소련의 개입 여력이 없는 것을 확인한 김일성은 계속 수상으로 남았다. 1958년 9월 7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9년 1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제1부수상이 되어 김일성, 최용건에 이은 서열 3위에 오르면서 각종 직책들을 역임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가 정치위원회로 다시 개편되면서 정치위원에 재선,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고, 내각 제1부수상에 유임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 비서국 비서로도 선거되었으며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내각 제1부수상에 재선되었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장,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가 폐지되면서 정치위원 및 비서국 비서로 재선되었다. 북한에서 발간한 불멸의 력사 총서 시리즈에 따르면 김일은 박금철과 김창봉을 숙청하는데 아주 큰 공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2.4. 총리 및 부주석 시기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어 김일성이 주석, 최용건이 제1부주석이 되면서 김일은 정무원 총리 및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74년에 병환이 생겨서 수술을 받게 생겼는데 이때 김정일이 치료대책을 지휘했으며 수술실까지 들어가서 독려했다고 한다. 의료 전문가도 아닌 김정일이 수술실에 입회한들 큰 도움은 안되었겠지만 김정일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혁명 1세대 원로들을 잘 챙긴다는 인상을 심어주는데는 성공했다. 여러 문헌을 보면 김일 역시 김정일 승계에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을,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고 1976년 4월 30일, 최고인민회의 5기 6차 회의에서 박성철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면서 제1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부주석에 재선되었으며 1979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대남관계에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에 김일성, 김정일, 오진우, 리종옥과 함께 5인의 한 명으로 선출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다. 다만 실무에 집중하게 된 비서국에서는 소환되었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부주석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4년 3월 9일, 20시 2분에 만 73세를 일기로[4] 숙환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가장 충실한 혁명전사, 가장 친근하고 훌륭한 혁명전우, 혁명동지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충직한 아들이다. 김일동지는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혁명투쟁에 한생을 바쳐싸워온 견결한 공산주의혁명투사이며 미일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과 당과 국가 건설, 새 사회 건설에서 불멸의 공적을 쌓은 우리 당과 국가의 저명한 활동가이다. (...) 김일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로 하여, 당과 혁명 앞에 쌓아올린 고귀한 업적으로 하여, 확고한 혁명적원칙성과 불굴의 투쟁정신, 고결하고 소박한 공산주의적품성으로 하여 언제나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김일동지의 전생애는 당과 수령, 로동계급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투쟁한 견결한 공산주의혁명가의 빛나는 한생이였으며 그가 발휘한 당과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높은 혁명성, 당성, 로동계급성, 인민성은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모범으로 되여왔다. 지금 전체당원들과 인민들은 당과 국가의 탁월한 활동가를 잃은 커다란 슬픔에 잠겨있다. 김일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가슴아픈 큰 손실로 된다."라고 최고의 찬사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수훈

5.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로동당 2기 정치위원회 위원
1953년 8월 9일 1956년 4월 29일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선출
3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2기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53년 8월 9일 1954년 3월 23일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선출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소환
조선로동당 3기 상무위원회 위원
1956년 4월 29일 1961년 9월 18일 3차 당대회에서 선출
4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4,5기 정치위원회 위원
1961년 9월 18일 1980년 10월 14일 4차 당대회에서 선출
5차 당대회에서 재선
6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4기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61년 9월 18일 1966년 10월 12일 4차 당대회에서 선출
2차 당대표자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4기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1966년 10월 12일 1970년 11월 13일 2차 당대표자회
5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4,5기 비서국 비서
1966년 10월 12일 1980년 10월 14일 2차 당대표자회에서 선거
5차 당대회에서 재선
6차 당대회에서 소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1954년 3월 23일 1972년 12월 28일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내각 제1부수상으로 승진
내각 농업상
1954년 3월 23일 1957년 9월 20일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임기만료
내각 제1부수상
1959년 1월 20일 1972년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직함 폐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1972년 12월 28일 1976년 4월 29일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5기 6차 회의에서 부주석으로 조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1976년 4월 29일 1984년 3월 9일 최고인민회의 5기 6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상무위원
1980년 10월 14일 1984년 3월 9일 6차 당대회에서 선출
임기 중 사망

6. 여담

7. 대중매체에서

8. 참고문헌



[1] 광복 직후 김일성이 '오직 나밖에 모른다'는 뜻으로 하사했다고 한다.[2] 현 북한 행정구역상 함경북도 어랑군에 해당한다.[3] 이 시기에 김무정, 전우, 고려인 리청송, 김열 등도 처벌되었고 강원도당 위원장 림춘추, 13사단장 최광, 김광협 등 빨치산파들까지 극심한 비판을 받고 해임되거나 림춘추의 경우에는 출당까지 당했다.[4] 북한에서 아직 동양식 나이를 쓰던 시점이라서 부고에는 75세로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