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1:03:29

김열(1918)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고려인 출신의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1918년에 출생, 1945년 12월, 허가이, 박의완, 남일, 김승화, 기석복, 김찬 등과 함께 소련에서 파견된 고려인 3진에 소속되어 북한에 도착했다. 김국후의 책에 따르면 연해주 출신이라고 한다. 원래 소련에서 군인으로 복무하였으며 1946년 7월에 소련 공민증과 군관증을 반납하고 북조선 공민증을 취득하였다고 하는데, 1950년 2월 북한에서 김열의 국적을 소련에서 북한으로 전환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봐서는 상징적인 조치였지 실제로 국적을 포기하진 않았던 걸로 보인다.

1946년 8월, 1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함경남도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도당 위원장들이 대부분 고려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강원도 당위원장 한일무, 평안남도 당위원장 김재욱, 평안북도 당위원장 허빈, 자강도 당위원장 장철 등과 더불어 8도장군으로 불렸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도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거되었다.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법제위원에 선출되었으며, 9월 9일 내각이 조직되면서 내각 사무국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9월, 북조선로동당 2기 3차 전원회의에서 조직위원회가 신설되면서 조직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상무위원회 위원으로도 보선되는 한편, 허가이의 후임으로 조직부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6월, 남북로동당 합동 전원회의에서 조직위원회가 상무위원회에 흡수된 후 상무위원에 유임되었고, 1949년 8월, 김일성 직속 내각 무력후방위원회에 설치되면서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0년 2월에야 북한 국적을 취득했다. 이 시기에 국가검열성 부상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6월, 홍남표 장의위원,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6.25 전쟁 발발 후 군사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서 9월 29일, 내각 사무국장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민족보위성 산하 후방국장에 임명, 후방사령부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렇듯 북한 정권 초기의 유력한 정치인이었으나 차차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50년 12월 전원회의에서 패전의 책임을 묻고 후방에 물자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조선인민군 후방국장에서 해임되었으며 1951년 11월 전원회의에서 박영빈이 새로 조직부장에 임명되면서 조직부장에서 해임되고 황해도 당위원장으로 조동되었다. 황해도 당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허가이가 주장한 엄벌주의를 고수하여 나중에 김일성의 비판을 받았다. 1953년 8월 5~9일에 열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규약개정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4년 2월, 고려인들이 당정의 요직을 지나치게 차지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황해도 당위원장에서 해임되어 중공업성 제1부상으로 조동되었으며 김일성에게 탐오, 낭비주의자로 비판받았다. 후임 황해도 당위원장에는 리상조가 임명되었다.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황해도 당위원장 재직 시절 당, 정권기관, 경제, 보건, 문화기관, 교원과 중학생(!)을 망라한 30여명의 여성들의 정조를 유린하고 국가재산, 인민들의 전선 원호금, 전리금, 전리품을 착복한 죄목으로 크게 비판을 받았으며 당중앙위원회에서 제명, 출당되고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영빈도 조직부장으로 재임하면서 김열의 비리를 은폐해주었다고 크게 비판받았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6년에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이후 생사는 불명이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