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상조 李相朝 Ri Sang Jo | |
<colbgcolor=#0047a0> 출생 | 1916년 3월 7일 |
경상남도 동래군 읍내면 원리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 |
사망 | 1996년 8월 6일(향년 80세)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 |
직업 | 독립운동가, 정치인 |
학력 | 부산시 상공전문학교 |
가족 | 아버지 이장우, 동생 리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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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16년 3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 원동[1]의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선비였고 아버지 이장우는 장사꾼이었는데, 리상조가 보통학교 3학년이 됐을 때 혼자서 분가하여 만주로 가 농장과 정미소를 운영했다.리상조는 7살에 동네에서 교육을 받았고 13세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삼랑진의 숙부집에서 유숙하면서 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보통학교 3학년이 됐을때 전술한대로 이장우가 만주로 이주하면서 아버지를 따라서 만주 봉천으로 이주했으나 1929년에 정미소가 파산하면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17세에 부산시 상공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헐벗고 굶주린 조선인들을 보면서 반일의식을 키웠고 반일 학생운동을 조직하였으나 들키는 바람에 1932년에 투옥되었다. 1년간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가석방 후 일제의 감시 하에서 가까스로 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몇몇 친구들과 함께 어머니에게서 자금을 얻어 1934년 만주로 도주했으나 이미 거기도 만주사변으로 인해 일제가 장악한 후였고 상당한 고생을 하게 된다. 북경에서 반일 학생운동을 하기도 하였고 다시 광동으로 내려가 김창만과 함께 중산대학을 졸업했다. 만주 시절에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37년 조선 청년 선봉대를 조직하고 중국공산당과 연계한 반일운동을 조직했다. 중국 시절 광동 및 남경군관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0년 조선청년선봉대 제1지대 정치책임자가 되었으며 1942년 중국 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조선청년선봉대는 조선독립동맹 지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42년 12월, 조선독립동맹 중앙의 지시에 따라 만주에 파견되어 남한에서 반일 의식화 교육을 전개했다. 1944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산하 3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국과 관동군을 붕괴시키자 리상조는 국공내전에 참전, 국부군과 교전하였고 1946년 1월에 조선독립동맹이 귀국할 때 북한으로 들어왔다.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에서 초대 조직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허정숙의 뒤를 이어 간부부장에 임명되었으나 1948년 초, 박창옥 등 소련계와의 알력 끝에 간부부장에서 해임되어 진반수에게 물려주고 상업성관리국장으로 좌천당하기도 했다.[2] 1948년 9월, 북한 건국 이후 초대 상업성 부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1. 6.25 전쟁
휴전협정 당시의 리상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겸 정찰국장에 임명되어 참전하였다. 중공군 개입을 요청하기 위해 4차례나 중국에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고 중공군 참전 이후 능통한 중국어 실력을 발휘하여 통역을 맡기도 하였으며 개성시당 위원장으로도 사업했다. 1951년부터 북한 측 정전위원으로 참석했다. 이때 백선엽에게 제국주의자의 주구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도발하는 쪽지를 내밀기도 하였다. 휴전협정 성립 후 초대 북한측 수석 정전위원을 맡았으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1954년 황해도 당위원장 김열이 중공업성 제1부상으로 좌천되면서 후임 황해도 당위원장으로도 사업했다.
휴전협정 당시의 북한 대표단. 맨 왼쪽이 남일, 가운데가 리상조, 오른쪽이 장평산이다.[3]
1955년 7월 20일, 림해의 뒤를 이어 주소 북한대사로 임명되었다. 리상조는 이때 소련대사보단 중국대사로 가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으나 김일성은 보다 넓은 시야를 갖고 국제적 감각을 익힐 필요가 있으며 국가적으로 소련으로 가는게 더 도움이 된다고 그에게 소련대사직을 강권하였다. 이에 7월 28일,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떠나 8월 1일,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장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에게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소련대사로 재임하면서 소련 육군대학과 모스크바 로모노소프 국립종합대학 철학부에 출강하면서 공부도 하였고 자격검정시험도 통과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의 계속된 고려인과 연안계를 번갈아 가며 등용했다 숙청하는 이이제이 인사정책에 불만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 최용건, 리효순, 허빈과 함께 북한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은 리상조를 크게 고무시켰으며 직업총동맹위원장 서휘와 함께 김일성을 방문하여 관료주의자와 아첨쟁이들을 내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김일성에게 직언하였다. 리상조의 회고에 따르면, 리상조는 김일성에게 개인숭배만 버리면 그를 적극 지지하겠다고 설득하였으나 김일성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은 흐루쇼프와 만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였을때 현직 대사인 리상조는 부르지 않고 박정애와 남일만 대동하였으며 방문일정을 마치고 바로 귀국해버렸다.
2.2. 전쟁 이후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홍순관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야 했으나, 회의 중 대회 집행부도 거치지 않고 김일성에게 쪽지로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내용을 전달했다가 찍히는 바람에 한등급 강등되었다고 한다. 다만 브레즈네프와 녜룽전을 비롯해서 외국 대표단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서 김일성은 화도 못내고 인상만 썼다고 한다. 리상조가 김일성의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적 움직임을 보였음에도 후보위원에라도 선출된 것은 50년대까지만 가능했던 김일성의 유화조치였지만, 리상조는 김일성 숭배에 앞장서는 박정애, 박금철, 최용건 등이 약진하는 것을 보고 더욱 큰 불만을 품어 소련 외교차관 니콜라이 페도렌코에게 이를 비판하는 등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였다. 이후 리상조는 최창익, 윤공흠 등과 함께 8월그룹에 합류하여 소련의 도움을 청하는 등 적극적인 반 김일성 움직임에 동참했다. 이 때문에 3차 당대회 참석 차 귀국한 리상조를 소련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해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김두봉의 옹호로 인하여 김일성은 리상조는 과오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솔직했을 뿐이라고 결론내리고 그를 유임하였다. 하지만 소련과 중국의 미적지근한 반응 속에서 8월 종파사건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실패를 직감한 리상조는 8월 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소련 측의 개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연이어 열린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에서도 김일성이 중소의 개입에 굴복하는 척 했다가 이를 무효화하면서 김일성의 권력을 견제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리상조가 개입한 것을 알아차린 김일성은 1956년 11월 21일, 리신팔을 후임 대사로 임명하면서 리상조를 공식적으로 소련 대사에서 해임했다. 리상조는 크렘린 병원에 탈장을 이유로 입원하고 중국에 망명을 요청했으나 중국은 그의 망명을 거절하였고 대신에 소련 망명을 주선해주었다. 1957년 7월, 소련이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소련에 정착하였다. 리상조는 김일성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그와 대립각을 세웠고 김일성은 김창만을 보내 리상조를 회유하려 했으나 리상조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결국 김일성은 리상조 회유를 포기하였고 1957년 10월 전원회의에서 그를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소환하고 당에서 제명하였다. 김일성은 해명하고 싶으면 귀국하라고 했지만 당연히 리상조는 귀국하지 않았다.
소련 망명 이후 리상조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민스크 고급당학교 연구원으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2년간의 공부 끝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민스크 과학원 철학부 과학교육원으로 배치되어 중국과 한국 철학을 연구하였다. 이후 소련으로 망명한 북한 유학생 허웅배와 함께 임은이란 필명으로 <북조선 왕조 성립비사>라는 책을 출간하여 김일성을 크게 비판하였다. 1980년대 말에 김일성은 리상조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89년에는 서울과학학술회의에 참석함으로 남한에 방문하였다. 이때 백선엽과도 재회하였는데 백선엽이 자신을 왜 상갓집 개라고 불렀냐고 묻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변을 회피했다. 북한 건국사 및 6.25 전쟁에 대한 매우 중요한 증언을 제공하였으며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을 크게 비판했으나 김일성 가짜설에 대해서도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자신은 자본주의가 반드시 나쁘지 않다 라고 말한 후 자신은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면서 공산주의 체제야 말로 민중의 삶을 향상시킬수 있다고 발언했지만 공산당 일당의 독재는 인정하지 않으며 반대할 권리를 인정한 후의 공산주의 체제여야 한다고 대답했다.[4] 1992년에 북한에서 망명한 북한고위관료들과 함께 조선민주주의통일구국전선을 조직하여 부의장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1990년에 부인과 이혼하였다.
1990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 나와 증언하는 모습.
1996년 3월 7일, 타슈켄트에서 꽤 성대한 80세 생일잔치가 열렸으며 한국대사관 1등 참사관 이지하[5]가 참석하는 등 한국 정부에서도 예우를 표했다. 하지만 심장마비가 발생하여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국방부 제1중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를 보이지 않고 8월 6일 오전 10시에 사망하였다.
3. 여담
동생 리상기도 출판관리국 검열과 지도원, 정보총국 부장 등으로 재직하였으나 리상조의 망명 이후 숙청당했다고 한다.4. 참고문헌
- 김규범 (2019). 1956년 “8월전원회의 사건” 재론 :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이이제이’식 용인술. 현대북한연구, 22(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서울: 경인문화사, 2006).
-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이상조 주 소련대사의 망명, 북한.
- 한국일보 편,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유성철, 이상조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서울: 한국일보사, 1991)
- Andrei Lankov & Igor Selivanov (2018): A peculiar case of a runaway ambassador: Yi Sang-Cho’s defection and the 1956 crisis in North Korea, Cold War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