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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43:52

림해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북한정치인.

2. 생애

1908년 경상도에서 태어났다는 정보가 있다. 본명은 주춘길로, 림해는 가명이다. 1930년대 동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는데 이때 최용건, 석산, 리영호 등과 함께 싸웠다고 한다. 1935년, 코민테른 집행국이 동북항일연군 측에 항일연군 산하의 우수한 조선인 청년들을 모스크바에 파견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방호산, 주덕해, 리권무, 전우, 장복, 이림, 유경룡 등과 함께 선발되어 소련으로 파견,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하였다. 1938년에 대학을 졸업, 이후 중국으로 넘어와 1940년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학습하였다.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됨에 따라 독립동맹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44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조선민족지부가 만들어지면서 위원에 선출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조선독립동맹 간부들과 함께 입북하였으며, 함경북도 청진시의 나남 보안간부훈련소 정치소장을 맡았다. 1946년 2월에 김일성 직속 대남사업기구인 5호실 실장에 임명되면서 성시백의 상관으로 일했다고 한다. 1946년 6월, 조선신민당 창당 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는 한편, 간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8월, 남북로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탄생한 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1947년 6월, 7차 중앙확대위원회 개최 후에 서울로 파견되어 여운형, 백남운, 홍명희 등과 접촉했다고 한다. 역시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1947년 12월, 1기 11차 전원회의에서 대남연락부가 확대개편되면서 연락부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948년 2월 정치위원회 확대회의 이후 다시 서울에 파견되어 백남운, 홍명희, 김원봉, 엄항섭, 박건웅 등과 접촉하고 귀환하여 김구가 제안한 남북연석회의 수용을 지지했다.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면서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회의 진행도 담당했다고 한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조선인민군 창설 과정에서 2사단 문화부사단장을 거쳐 동부전선에 2군단이 설치되면서 김무정이 군단장에 임명, 림해는 그 밑에서 문화 부군단장, 즉 정치위원을 맡았다. 박병엽의 주장으로는 6.25 전쟁 개전 직전의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는 박헌영이 20만 남로당원이 아직 있다고 주장하자 증거를 가져오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후퇴 시기 신의주로 퇴각한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새로 37사단이 창설되면서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초 주녕하의 뒤를 이어 소련 대사로 부임하였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5년 7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소련 대사에서 소환, 리상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한설야와 함께 박창옥, 박영빈, 기석복 등 고려인들을 조리돌리는데 나섰다. 회의 끝에 신임 검열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박헌영 재판에 내무상 방학세, 최고재판소장 조성모, 국가검열상 김익선, 최용건과 함께 재판관으로 나서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주체연설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가 최창익, 한상두와 함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때 아차하면 작살나겠다 싶었는지 열렬하게 김일성을 추종하면서 최창익 비판에 나섰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해당하는 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 박일령의 후임으로 연락부장에 임명됨에 따라 대남 사업을 총괄하게 되었다. 1956년 9월, 8월 종파사건도 수습할 겸 중국공산당 8차 당대회에 최용건, 리주연, 하앙천과 함께 조선로동당 대표단으로 파견되었다.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연락부장 재임 시절 강경파인 부부장 어윤갑과 계속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58년 3월 전원회의에서 어윤갑에게 연락부장 자리를 물려주면서 대남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대내외상업성이 상업성과 무역성으로 분리됨에 따라 초대 무역상에 임명되기로 결정, 9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무역상에 임명되었다. 무역상으로 재임하던 중 1959년 12월 8일, 중국에 대두 3만톤과 잡곡 10만톤 제공을 요청하였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8월 전원회의에서 농업상으로 이임이 결정, 8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만금의 후임으로 농업상에 임명되었으며 무역상은 리주연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헝가리 대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사업상의 무능으로 인해 1961년 여름에 김일성에 심각한 비판을 당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1961년 9월 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농업상에서 해임되어 박정애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후 완전히 소식이 끊겼고 몇달 후에 열린 4차 당대회에서도 실종되었다. 일부 정보에 따르면 1962년에 소련으로 도주했다고 하지만 관련한 증거가 없다.

3. 여담

북한학계를 상당히 괴롭힌 인물이다. 북한초기 농민부 부부장을 지낸 임해가 있기 때문. 이때문에 서동만 교수, 김광운 교수 등이 이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북한에서도 헷갈렸는지 나중에 림해와 임해로 구분해서 썼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