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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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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 4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
崔庸健 | Choe Yong-gon
파일:최용건_북한.webp
<colbgcolor=#024fa2> 출생 1900년 6월 21일
평안북도 태천군 서읍내면
사망 1976년 9월 19일 (향년 76세)
학력 난카이대학교 (학사)
운남군관학교 (수료)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이력
2.1. 항일운동2.2. 광복 이후의 활동2.3. 6.25 이후2.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3. 가족관계4. 장의위원회 구성5. 경력6. 창작물에서의 최용건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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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ensagas_329613_11%5B660281%5D.jpg
1950년 9월 전사한 강건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의 장례식에 참가해서 눈시울을 붉히는 최용건. 왼쪽에 상의 속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이 김일성.
북한의 공산주의자, 소련, 북한의 군인, 정치인. 다른 이름으로 최석천(崔石泉), 최추해(崔秋海), 김지강(金志剛)이 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국가수반 역할을 수행했다. 평안북도 태천군 서성면 출생.

2. 이력

2.1. 항일운동

오산학교를 다니다 1921년 중퇴, 중국에 망명하여 쿤밍의 윈난(운남)군사학교[1]에서 공부했다. 이후 쑨원이 세운 황포군관학교교관으로 일했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국민혁명군에서 연대장을 하다가, 4.12 상하이 쿠데타, 마일사변에 이어 국공결렬1차 국공합작이 깨어지고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 학살이 벌어지자 피신한다. 1927년 광저우 폭동에 참가했으나 실패한 이후 1928년 만주로 피신, 동북항일연군에서 싸우다가 저우바오중의 소개로 부녀연대 연대장인 왕옥환과 결혼한다.[2]

일제의 토벌작전이 거세지자 김일성, 김책 등과 함께 소련으로 건너가 1942년 8월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이 때 최석천(崔石泉)이라는 이름을 썼으며, 부참모장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위직이었다.

2.2. 광복 이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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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 되자 북한에 건너와 오산중학교 스승이었던 조만식조선민주당에 가입하였으나, 조만식이 감금(연금)된 후 이듬해 당수가 되어 조선민주당을 이끌면서 조선민주당을 조선로동당구색정당으로 만들었다.[3] 그리고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파일:cyg.jpg
민족보위상 시절의 최용건
최용건은 6.25 전쟁 개전 당시 민족보위상[4]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으나, 6.25 개전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박명림[5]에 따르면 6.25 전쟁김일성의 남침 주도에 반대한 몇 안 되는 북한의 정치인이다.

다만, 반론이 있는게 개전 당시 군통수권자는 김일성이 아니라 다름아닌 최용건 본인이었다. 정 못일으킬 전쟁이었다면 총구를 김일성에게 돌렸거나 적어도 '나 이 전쟁 할 수 없소. 그러니 군대 절대 못 움직이오.' 이런 자세로 나오면 김일성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공산권에서 군통수권자의 권한은 어마어마한지라 당수, 국가원수 같은 자리의 권한보다 더 큰게 군통수권자의 자리다. 덩샤오핑도 군통수권자 자리 하나로 전 중국을 다스렸으며 멀리 갈 것 없이 북한에서도 김정일이 김일성에게서 국방위원장직 물려받는 순간부터는 김정일이 실세였다. 그런 최용건이 정말로 반대했더라면 6.25전쟁은 절대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최용건은 김일성의 혁명선배였고 북한 정계에서 명망도 높았으므로 비록 김일성보다 직책은 낮았지만 1950년대 정도까지만 해도 김일성에게 일방적으로 따르는 입장은 아니었다. 실제론 최용건은 모의 당시 신중론만 제시한 것으로 보이고 남침행위에 동의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2.3. 6.25 이후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6.25전쟁 휴전1955년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숙청 당시 최고인민회의 재판장으로 지냈다. 소련파 출신 망명가가 회고한 박헌영 재판기

동북항일연군 및 교도려 시절엔 김일성보다 선배였지만 광복 후에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추대하는데 앞장섰으며, 북한의 유일무이한 공개적인 권력투쟁 사건이었던 8월 종파사건에서는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위해 북한을 비웠을 때 반대파들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포착하고 보고하여 김일성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족보위상으로 있으면서 자신과 가까운 간부들을 승진시켰기 때문에 김일성의 의심을 사서 민족보위상에서 해임된다. 그러나 반 김일성 세력을 박살내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숙청되지는 않고 상징적인 자리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직을 맡았다.

2.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김두봉의 뒤를 이어 신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선출되어 명목상 국가수반이 된다. 민족보위상은 김광협이 물려받았다. 1958년 조선민주당을 탈당하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 이 시점에서 조선민주당은 이미 있으나마나한 어용정당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이후 조선민주당 대표직은 잠시 홍기황이 맡았다가 곧 김일성의 외가친척이자 담임선생님 출신인 강량욱에게 넘어갔다. 1958년 9월 7일, 공화국창건 10주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으며 1960년 6월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환갑기념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장,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계속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재직하다가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고 주석제가 실시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에 선출된다. 기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로 개편되었고 상설회의 의장직에는 그 유명한 황장엽이 임명된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김일성의 위세에 눌린 허수아비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현과 더불어 김일성에게 반말을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6] 하지만 북한 정권이 1960년대부터 사회주의권 기준에서도 강한 폐쇄성을 가지게 된 후로 그의 아내가 중국인[7] 왕옥환이라는 점 때문에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지 북한 정권에서 공식적으로 최용건을 숙청하거나 사후 평가절하한 적은 없다. 어쨌거나 그는 사망할 때까지 북한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동지로서 당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존경과 존중을 받았다. 김일성이 말년에 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높게 평가되었다. 일부 탈북자들은 최용건이 충실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정일 세습에 대해 반대, 혹은 소극적으로 나오다가 결국 뒷방 늙은이가 되어 현재 북한에선 대접이 좋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후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9월에 사망했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건강이 악화되어 1970년대에는 나랏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용건의 아내 왕옥환은 중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1960년대부터 북한 정권 내부에서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역시 그의 남편처럼 당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존경과 존중을 받으며 살았다. 최용건 사망 후 1980년 10월 10일~14일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참석했으며 1983년 6월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최용건이 죽으면서 왕옥환에게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유언했다는데 실제로 중국으로 돌아가 2007년에 사망하였고 김정일이 조화를 보내주었다.

3. 가족관계

아들 최운주는 조선사회민주당 국제부장을 지냈다. 다만 방북한 남한 인사들이 최용건의 아들이 맞냐고 묻자 황당한 소리라고 버럭 화를 내었으나 부친이 태천군 출신인 것으로 아는데, 최운주의 고향은 어디냐고 묻자 여기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자신이 평양 출신이라고 답했다.

동생 최종건은 4차 당대회와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주 몽골 대사를 역임했으나 1975년 10월에 몽골 대사에서 해임된 이후에 두문불출하였다.

4. 장의위원회 구성

김일성
김일 최재우
김동규 리종옥
강량욱 김환
박성철 윤기복
최현 황장엽
오진우 강현수
서철 강희원
림춘추 김중린
리근모 김만금
연형묵 김병하
양형섭 홍기문
전문섭 허정숙
오백룡 전창철
한익수 김국훈
리용무 김성애
현무광 김이훈
김영남 지재룡
정준기 리두찬
김철만 오현주
강성산 천세봉
허담 리면상
공진태

5.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민주당 중앙위원장
1946년 2월 24일 1955년 3월 조선민주당 임시당대회에서 선출
1947년 4월 2차 당대회에서 재선
탈당
내각 민족보위상
1948년 9월 9일 1957년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조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1954년 7월 4일 1957년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조동
조선로동당 3기 정치위원회 위원
1955년 4월 4일 1956년 4월 29일 1955년 4월 전원회의에서 선출
3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3기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55년 12월 3일 1966년 10월 12일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선출
3차 당대회에서 재선
4차 당대회에서 재선
2차 당대표자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4기 상무위원회 위원
1956년 4월 29일 1961년 9월 18일 3차 당대회에서 선출
4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4기 조직위원회 위원
1956년 4월 29일 1961년 9월 18일 3차 당대회에서 선출
4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2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57년 9월 20일 1972년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부주석으로 조동
조선로동당 4,5기 정치위원회 위원
1961년 9월 18일 1976년 9월 19일 4차 당대회에서 선출
5차 당대회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조선로동당 4기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1966년 10월 12일 1970년 11월 13일 2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5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4,5기 비서국 비서
1966년 10월 12일 1973년 9월 17일? 2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5차 당대회에서 재선
5기 7중전회에서 소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1972년 12월 28일 1976년 9월 19일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임기 중 사망

6. 창작물에서의 최용건

7. 여담

항상 멋진 양복을 빼어 입는 멋쟁이였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같은 군인 출신인 남한의 정일권과 비슷하다.

김책 등과 함께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수 있었던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김일성과 나이 차이가 무려 띠동갑이었던 데다가 항일 무장투쟁 면에선 김일성보다 선배 격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1] 이 학교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이 많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주더, 북베트남군 총사령관 보응우옌잡(지압 장군)등...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도 여기 출신. 독립운동가 문일민은 최용건과 같은 17기 동문이었다. 그리고 덩샤오핑 시절 국방부장을 지냈던 예젠잉 원수도 여기 출신이다. 그러고보면 6.25 때 남북한 국방장관은 동문에다가 동갑이었다...[8]그리고 이 학교는 중국은 물론 남북한, 북베트남의 국방장관을 배출한 명문사관학교다![2] 일본 군경에 쫓기던 최용건을 도와준 지주 왕통주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왕통주의 딸은 왕옥길이라는 다른 인물이다.[3] 김일성이 조선민주당 와해를 위해서 일부러 그를 잠입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4] 민족보위상은 민족보위성의 최선임자에 해당하며 국방장관 정도 되는 직책이다. 민족보위성은 이후 인민무력부가 된다.[5] 연세대 교수. 6.25 전쟁 연구의 학계의 권위자이다.[6] 여담이지만, 공식적 자리에서는 그래도 "일성 동지"나 "김 장군"이었다고 한다.[7] 한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