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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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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아시아3. 서양4. 중동5. 남아시아6. 창작물

1. 개요

섭정(, Regent)은 군주가 위중하거나 연령이 너무 어려서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에 군주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행위, 혹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현대의 대통령제로 비유하면 대통령 권한대행에 해당하지만 섭정은 '군주'의 존재가 핵심이므로 공화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

신하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도 있으며 동아시아의 경우는 군주의 어머니뻘인 왕대비(황태후)나 할머니뻘인 대왕대비(태황태후) 또한 왕족 남성 어른이 섭정왕[2]이 되어 통치하는 수렴청정과 군주의 후계자인 왕세자(황태자)가 하는 대리청정이라는 별도의 명칭으로도 존재한다. 후계 군주가 어릴 경우에는 전위 군주가 그 어린 군주의 양육을 부탁한다는 뜻인 탁고를 써서 탁고대신이라고도 부른다.

유교권은 적합한 후계자가 없다면 촌수가 멀어도 같은 가문의 일원을 어떻게든 찾아 후계자로 내세웠기에[3] 단어 '공화국'의 어원인 주나라의 공화 시기를 제외하면 사실상 없다시피 했으나, 국가가문에 귀속되지 않은 군주제를 가진 유럽의 경우 군주의 급사[4], 국가 내부의 권력투쟁[5] 등으로 적법한 군주가 없는 "공위(interregnum)"(중지 기간) 상황이 왕왕 있었고, 당연히 공위 상태에서의 섭정이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다.[6]

유교권과 달리 유럽에서는 기존 왕가와 혈연이 있는 가문의 가문원을 군주로 내세우거나, 혹은 유력 귀족 가문에서 인물을 골라 내세우는 식으로 다른 왕조가 국가를 이어갔다. 또한 헝가리의 섭정이던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 마차시 1세의 경우처럼 섭정이 왕위를 잇는 경우도 꽤 있다.

창작물 등에서는 간신들이 무능하거나 어린 군주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창작물에서는 너무 많이 쓰여서 식상할 정도이긴 한데, 실제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매우 많았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한 나라가 멸망할 때쯤 되면 꼭 한 번씩은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봐도 될 정도이다. 오히려 어린 군주가 무사히 자라나 활약하고 섭정과 권신도 선을 넘지 않고 순순히 권력 계승만 집중하는 이상적인 상황이 더 적었다.

조선에서는 원상제라 하여 선왕이 사망하거나 퇴위한 뒤 차기 왕이 국상을 치르고 즉위할 때까지 국정을 책임지는 임시 관직이 있었다. 다른 섭정과의 차이점이라면 원상은 말 그대로 국왕 자체가 없을 때만 시행하는 것으로, 차기 왕이 즉위하는 경우 수렴청정 여부와는 별개로 원상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영국에서는 왕의 직계혈족이 아닌 귀족이 섭정이 되었을때는 호국경(Lord Protector)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오늘날 입헌군주제총리 역시 군주를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운영하므로 섭정으로 볼 여지가 있으나, 입헌군주제는 애초에 전제군주제와 달리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군주는 상징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체제이므로, 군주의 직접 통치가 원칙인 전제군주제의 섭정과는 다르다.

물론 입헌군주국에서도 군주가 위중하거나 나이가 어려서 상징적인 군주 노릇조차 못할 때는 섭정을 지명하지만[7], 그런 경우에도 총리와는 다른 인물을 섭정으로 지명하여 총리직과는 철저하게 구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동아시아

왕대비(황태후)나 대왕대비에 의한 섭정 혹은 수렴청정은 대부분 임금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통치능력이 부족하므로 이루어진 것이 대다수이다. 신라고려 혹은 조선 모두 말기에 이러한 수렴청정이 몰려있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어린 나이의 임금이 즉위한 상황이 반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 말기 왕권이 불안정하고 정치가 문란해지는 테크를 타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나라) (집권자) - (당시 왕) 순
수렴청정 혹은 대리청정이 아닌 경우: ★

3. 서양

군주는 없고 섭정만 있는 경우도 있다.

4. 중동

5. 남아시아

6.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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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고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의 유고, 사퇴, 파면 등으로 인한 부재시에 주로 임명되나 섭정은 군주가 존재하긴 하더라도 어리거나 병중일때 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예를 들어 대통령이 탄핵 소추가 되었지만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아 파면되지는 않은 상태에서는 대통령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더라도 대통령 권한대행이 임명될 수 있고 섭정 또한 군주의 유고로 인해 군주가 부재한 상황에서 임시로 섭정이 임명되는 경우도 있다.[2] 조선에서 군주의 생부를 대원군으로 격상한 거라든지[3] 거기다 유교권은 서자를 왕위에 올리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었으므로 서구에 비해 선택의 여지는 넓은 편이었다.[4] 군주가 후계를 남기지 못하거나 혹은 후계를 제대로 굳히지 못하고 병사/사고사/전사 하는 경우. 재수가 없는 경우 자식은 많이 낳았는데, 그 계승권자들이 모조리 다 죽어버려서 멸문되는 경우도 있었다.[5] 여러 계승권 주장자들이 서로 치고 박아 제대로된 계승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 혹은 봉신들이 계승을 안 시켜주는 경우.[6] 특히 동아시아와는 달리 서구에서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기반한 일부일처제가 강력히 자리잡아 왕과 왕비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을 왕위계승자로 인정했기에 이렇게 공위 상태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즉, 서구에는 후궁이나 서자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식들은 죄다 사생아로 취급하고 당연히 왕위계승권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7] 국왕이 국외출장을 나갈 때도 섭정을 지명하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이 그렇고, 섭정에게 발부된 위임장에 의회해산권까지 명시적으로 기입되어 있다면 의회를 해산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실제 사례도 있다(1974년 2월).[8] 이 해에 진흥왕이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바꿨다는 기록에 의한 추정[9] 엄밀히 말하면 김종서 뿐 아니라 황보인 등 의정부 전체가 참여한 섭정 체제라고 할 수 있었다.[10] 사실 이 때는 수렴청정을 할 만한 대비들이 전혀 없었다. 세종의 왕후나 문종의 왕후들이 진작에 죽고 재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 그리고 이로 인해 수양대군이 딴 맘을 품을 가능성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대신들의 황표정사는 어린 왕을 농락한다고 봐서 왕족들이 굉장히 분개했는데 만약 대비가 있어서 수렴청정을 하고 대신들의 황표정사에 정당성을 실어줬다면 제아무리 수양대군이라도 명분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1] 성별이 여자인 왕이 아니다.[12]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탈출할 때 도와준 공을 인정받아, 장양왕이 즉위한 후 외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승상이 되었고, 장양왕 사후에는 상국이 되어 어린 진시황의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진시황의 친부라는 의혹 때문에 진시황의 정적들이 정통성을 의심하는 빌미를 주어, 실각당한 후 짐새의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자결했다.[13] 이 해에 쇼토쿠 태자가 사망했으므로 이 이전에 끝났을 것이다.[14] 후지와라씨의 당주는 딸을 황후로 만든 후 어린 외손자를 천황으로 옹립하여 섭정으로서 통치했고, 천황이 장성하면 관백을 칭하며 계속 실권자로 군림했는데 이를 '섭관정치'라 한다.[15]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병석에 누워 5년간 황태자로서 대리청정했다.[16] 천황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상황이 된 후, '인(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천황의 조정보다 우위에 서서 정치를 주도하는 기형적인 정치 체제였다. 이 당시에도 공식적인 섭정 자체는 후지와라씨가 독점했지만, 천황과 함께 상황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상태였기에 상황이 실질적인 섭정이었다.[17] 사실 무사들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조정에서 공식적인 섭정직은 후지와라씨가 독점했다. 그러나 천황은 물론이고 기존의 귀족들까지 무사들에게 권력을 뺏긴 상태라서 후지와라씨의 섭정 지위 역시 명목에 불과했기에, 무가정권의 수장들이 실질적인 섭정이었다.[18] 공식적인 중앙정부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론 지방정부에 불과한 막부가 수백년 동안 실질적인 중앙정부 역할을 했으며,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천황 대신 통치하는 섭정이나 다름 없었다.[19] 막부의 수장인 쇼군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20]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교토를 장악했으나,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21] 쇼군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간레이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행사했다.[22] 무로마치 막부 해체 이후부터 에도 막부 수립 이전까지의 시대로, 이 당시의 집권자들은 무가정권임에도 불구하고 막부를 형성하지 않고 통치했다.[23] 초기에는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신하를 자처하며 통치했으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축출함으로써 막부를 폐지하고, 조정으로부터 '우대신'이라는 관위를 받아 통치했다.[24] 노부나가와 그의 장남 노부타다를 살해한 아케치 미츠히데를 타도하고 집권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장손 산보시를 오다씨 당주로 옹립하고 실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후지와라씨의 수장인 고노에 사키히사양자가 되어 관백 및 태정대신에 취임함으로써, 기존 주군인 산보시의 가신 지위에서 벗어나 조정의 영수으로서 통치했다. 이후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츠구에게 관백 자리를 물려주고 명예직인 태합이 되었으나 실권은 계속 장악했고, 히데츠구를 숙청한 후에도 태합으로서 통치하다가 사망했다.[25] 히데요시 사후 '오대로'라 불리는 다섯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 대신 통치했는데, 그들 중 하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경쟁자들을 격파하며 정권을 장악하고,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 되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일개 다이묘가 된 히데요리를 오사카 전투를 통해 제거하며 도요토미씨를 몰살시키고, 에도 막부의 통치 기반을 닦았다.[26] 어린 황제 네로의 섭정을 맡았던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성년이 된 후에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27] 세베루스 왕조카라칼라 황제 사후 마크리누스라는 군인이 황제로 즉위하자, 율리아 마이사는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제거하고 세베루스 가의 일원인 자신의 손자 엘라가발루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런데 엘라가발루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온갖 기행을 일삼다가 섭정을 맡은 할머니에 의해 제거되었고, 율리아 마이사는 그의 사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옹립하여 계속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28] 율리아 마이사 사후에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가 섭정을 맡았는데, 선대 섭정에 훨씬 못 미치는 정치력을 보여주다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쿠데타로 인해 아들과 함께 제거되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의 치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해서 군인 황제 시대라는 49년에 걸친 혼란기가 시작되었다.[29] 발렌티니아누스 1세 사후 장남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 그의 이복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 역시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 당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4살에 불과했기에 그라티아누스는 굳이 어린 동생과 골육상쟁을 벌이기 보다는 타협을 택해서 공동 황제로 인정했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영역에서는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가 섭정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마그누스 막시무스라는 군인이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하자 유스티나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 역시 위협을 느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피해야 했다. 유스티나는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프랑크족 출신 장군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의 도움은 받아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타도하고 귀환하는데 성공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30] 유스티나 사후에는 아르보가스트가 실권을 장악하여 사실상 섭정이 되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황제로서 실권을 행사하기 위해 아르보가스트와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의문사했다. 이후 아르보가스트는 에우게니우스라는 이교도 학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계속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394년 독실한 기독교 신자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에게 패배하여 에우게니우스는 처형되고 아르보가스트는 자살했다. 이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 제국 내에서 유일한 황제가 되었으나, 1년만인 395년에 그가 사망하여 장남 아르카디우스와 차남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방 황제와 서방 황제로 즉위했고, 이후에는 동서 로마를 동시에 다스린 황제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기에,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이 나뉜 건으로 간주되고 있다.[31]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반달족 혼혈 장군 스틸리코가 서방 황제로 즉위한 호노리우스의 섭정을 맡았는데, 숙청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 부하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설득했음에도 끝까지 충신으로 남기 위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32] 호노리우스의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의 남편이자 공동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3세가 사망한 후, 갈라 플라키디아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데리고 동로마 제국으로 피신했는데, 그 상태에서 호노리우스가 후계를 정하지 않고 사망했다. 그러자 서로마 궁정의 실권을 장악한 카스티누스가 요안네스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갈라 플라키디아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동로마군을 이끌고 귀환했고, 결국 카스티누스와 요안네스는 둘다 동로마군에 패배하여 죽었다.[33] 카스티누스와 요안네스가 동로마군에 의해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명을 받들어 훈족 지원군을 이끌고 온 아에티우스라는 인물이 남아있었다. 당장 그에게 대적할 힘이 없던 갈라 플라키디아 황태후는 아에티우스에게 권력을 나눠 갖자고 제안하여 사실상 공동 섭정이 되었다. 이후 아에티우스는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군대를 격파하는 위업을 세우기도 했지만,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 의해 숙청되었다.[34] 게르만족 출신 리키메르는 4번이나 황제를 갈아치우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섭정으로 군림했다.[35] 리키메르의 조카로서 집권한 군도바트는 올리브리우스를 폐위하고 글리케리우스를 옹립했으나, 율리우스 네포스를 황제로 추대한 동로마군에 의해 축출당했다. 그러나 본인의 출신 민족인 부르군트족의 지도자로서는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갈리아부르군트 왕국이라는 독립 정권을 세웠다.[36] 오레스테스는 율리우스 네포스를 축출한 후 본인의 아들인 로물루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섭정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는 그가 한때 아틸라에게 부역한 경력이 있어서 이미지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권한지 1년만인 476년에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했고, 이로써 서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37] 오도아케르는 로마 고위 귀족의 칭호인 '파트리키우스(Patricius)'를 자칭하고 동로마 황제 제노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바침으로써, 섭정 자격으로 구 서로마 제국령을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제노는 확답을 피하며 그의 정권을 승인하지 않고 동고트족 지도자 테오도리크를 사주하여 오도아케르를 제거했는데, 이후 이탈리아에는 동고트족의 독립 왕국인 동고트 왕국이 들어섰다.[38] 테오도시우스 2세 사후 게르만족+알란족 혼혈 출신 장군 아스파르가 실권을 장악하고 황제 2명을 옹립했지만, 둘다 아스파르 본인과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이라서 완전히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이후 레오 1세를 축출하고 본인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 했지만, 역으로 본인이 숙청당했고 가족까지 모조리 몰살당했다.[39] 이리니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의 섭정을 맡았다가 종교 문제로 아들과 갈등을 겪은 끝에, 친아들의 눈을 뽑고 수도원에 유폐시킨 후 로마 제국 최초의 여제가 되었다.[40] 콘스탄티노스 7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조이가 섭정을 맡았으나, 쿠데타를 일으킨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섭정을 맡았다가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으로서 공동 황제 로마노스 1세로 즉위했고, 본인의 아들들까지 공동 황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바로 그 아들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폐위되어 수도원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고, 그 쿠데타를 콘스탄티노스 7세가 진압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했다.[41] 에브도키아가 미하일 7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았는데, 섭정이 아닌 공동 황제였다는 설도 있지만, 아직까진 섭정이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42] 알렉시오스 2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섭정을 맡았으나, 둘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쿠데타로 인해 살해당했다.[43] 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세워진 니케아 제국에서 요안니스 4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요르요스 무잘론이라는 귀족이 섭정을 맡았지만,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소산드라 쿠데타'를 일으켜 무잘론과 그의 동생을 제거하고 새로운 섭정이 되었다. 이후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공동 황제 미하일 8세로 즉위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여 로마 제국을 재건한 후, 자신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책봉하고, 요안니스 4세를 폐위한 후 눈을 뽑아 수도원에 유폐시킴으로써 라스카리스 왕조를 끝장내고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열었다.[44]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본래 요안니스 5세의 섭정이었으나 대외 원정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수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자신의 섭정 지위가 박탈되자, 내전을 일으켜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요안니스 5세가 성년이 된 후 재개된 내전에서는 패배하여 물러난 후 수도자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45] 요안니스 7세는 조부 요안니스 5세와 숙부 마누일 2세에 맞서 황제를 칭하며 내전을 일으킨 적도 있지만 화해했고, 이후 마누일 2세가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서유럽을 순방할 때 잠깐 섭정을 맡았다.[46] 통일 이탈리아 왕국과는 별개의 나라다.[47] 부왕으로서 국왕 대신 왕국을 통치했다.[48] 프랑스인의 황제를 겸임했다.[49] 앙리는 형 보두앵 1세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에게 포로로 잡히자 섭정을 맡았다가, 형이 옥사한 후 황제로 즉위했다.[50] 피에르 황제동로마 제국잔존국이피로스 전제군주국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포로로 잡히자, 황후인 욜랑드가 아들 로베르의 즉위 이전까지 섭정을 맡았다. 다만 욜랑드는 섭정이 아닌 정식 여제였다는 설도 있다.[51] 보두앵 2세의 나이가 어려서 예루살렘 왕국의 전 국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이 섭정으로 통치했다. 다만 장 드 브리엔은 섭정이면서 선임 공동 황제였다.[52] 1920년 알렉산드로스 사후부터 콘스탄티노스 1세 복위 이전까지 왕위가 공석일 때 섭정이 국왕을 대리했다.[53] 1935년 왕정복고 결정 직후부터 요르요스 2세 복위 직전까지 섭정을 맡았다.[54] 1944년 12월 31일 2차대전으로 망명중이던 요르요스 2세의 위임을 받아 섭정을 맡았다. 국민투표로 왕정 복고가 결정된 지 4일 만인 1946년 9월 28일 사임했으며 대주교로 돌아갔다.[55] 1967년 파파도풀로스의 쿠데타군사정권이 수립된 이후 콘스탄티노스 2세가 역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하여 해외로 망명하자, 파파도풀로스는 콘스탄티노스 2세의 명목상 왕위는 박탈하지 않고 조이타키스를 섭정으로 추대했다가 1972년에 본인이 섭정에 취임했다. 그러나 1973년 왕당파 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공식적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여 대통령이 되었다.[56] 올리버 크롬웰, 리처드 크롬웰[57] 아버지 조지 3세가 포르피린증으로 인한 조울증이 심해 정신착란을 일으키자 아버지가 사망하기까지 10년간 왕세자로써 섭정을 맡았다. 영국 역사에서 섭정시대라 하면 이 사람의 섭정 기간(1811-1820)을 가리킨다.[58] 지금은 더이상 영국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이지만, 영국 국왕을 자국 군주로 모시는 나라들이다.[59] 영국 국왕 칭호는 영국에서만 사용하고, 다른 영연방 왕국에서는 캐나다 국왕, 호주 국왕 등 그 나라 국호가 들어간 칭호를 사용한다.[60]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이자 루이 14세의 조카. 프랑스 역사에서 섭정시대라 하면 이 사람의 치세기간(1715-1723)을 가리킨다.[61] 1947년 스페인을 왕정체제로 전환하고 스스로 섭정을 통해 종신권력을 획득하여 1975년 죽을때까지 철권통치를 펼친다.[62] 어린 왕 라슬로 5세의 섭정을 맡은 후녀디 야노시는 수 차례에 걸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1456년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듬해인 1457년 그의 아들 후녀디 라슬로가 라슬로 5세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분노한 후녀디 가문 지지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축출했다. 라슬로 5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진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망명지인 프라하에서 사망했고, 후녀디 라슬로의 차남 후녀디 마차시가 국왕 마차시 1세로 즉위하여 헝가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63] 없는 왕국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나라해군 제독이라는 해괴한 직위를 갖고 통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타국도 왕없이 섭정을 한 경우가 있지만 복위하기를 기다리거나 왕위계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경우였는데 이 쪽은 아예 왕을 체포해 추방시키고 법률로 왕조의 복위를 금지시켰다.[64] 해외로 떠돌던 형 레오폴드 3세를 대신해 1944년부터 조카 보두앵 1세가 즉위하는 1950년까지 섭정했다.[65] 키릴은 조카인 시메온 2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을 맡았는데, 하필이면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으로 참전하는 바람에 전후에 전범이 되어 처형되었다. 한편 시메온 2세는 불가리아를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어린아이라서 실권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모후와 함께 추방당해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는데,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1989년 동유럽 혁명에 의해 무너진 후 귀국하여, 불가리아 공화국의 총리가 됨으로써, 폐위된 군주가 공화국총리로서 권좌에 복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66] 섭정'으로는 조금 애매하지만 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교황인 비오 12세는 건강 문제로 인해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지자, 비서 수녀인 파스칼리나에게 권한을 넘겨서 정치적인 실무들을 대행하게 했다. 게다가 파스칼리나는 한술 더 떠서 집무실에 앉아서 서류 결재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며 권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파스칼리나는 여교황(La Papessa)이라는 살벌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67]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출신으로 스페인군 장교가 되어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동포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인물이었으나, 스페인군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자 어제의 적이었던 독립군에 가담하여 멕시코의 독립을 쟁취하는데 기여했다. 다만 독립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에는 아직 스페인 국왕의 지배를 옹호하는 왕당파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를 '멕시코 황제'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이 되었는데, 페르난도 7세는 멕시코가 스페인과 대등한 관계로서 동군연합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멕시코가 스페인의 식민지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에 무산되었다. 이후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멕시코 황제 '아구스틴 1세'로 즉위했으나, 공화주의자들의 쿠데타로 인해 폐위되어 망명했고, 귀국하여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처형되었다.[68] 초기에는 섭정으로서 통치했으나, 이후 공동 파라오로 즉위하여 통치했다.[69] 크세르크세스 1세를 살해한 아르타바누스가 아르타크세르세스 1세를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나, 황제는 그를 숙청함으로써 실권을 장악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흥을 이끌었다.[70] 환관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살해하고 아르세스를 옹립했다가 그가 실권을 장악하려 하자 살해하고 다리우스 3세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는데, 다리우스는 선황과 달리 바고아스를 제거하고 실권 장악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으로 인해 금방 막을 내렸고, 페르시아는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71] 아들 바발라투스를 왕중왕으로 옹립하고 섭정으로서 통치하다가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72] 부와이 왕조 아미르들과 셀주크 제국 술탄들은 아바스 왕도의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칼리파의 섭정으로서 통치했다. 1258년 바그다드가 몽골군에 의해 초토화된 이후에는 카이로의 맘루크 술탄들이 아바스 칼리파를 옹립하여 칼리파의 섭정이라는 명분을 갖고 통치했으나, 1517년 오스만 제국 황제 셀림 1세가 맘루크 술탄국을 정복한 후 칼리파 자리까지 가져갔다.[73] 제7차 십자군 전쟁 도중 남편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급사하자, 섭정이 되어 남편의 죽음을 숨기고 전쟁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후 남편의 전 부인의 아들 알 무아잠 투란샤가 즉위하자 물러났다. 그러나 2개월만에 알 무아잠 투란샤를 축출하고 집권한 후 역사상 유례 없는 여술탄으로 즉위했다. 이후에는 맘루크 출신 아이바크와 재혼함으로써 맘루크 왕조를 개창하고 그게 양위했으나, 그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암살했다. 그러나 워낙 급하게 저지른 암살이라 그녀의 재집권 시도는 아이바크의 측근 쿠투즈에 의해 저지되어 비참하게 처형당했다.[74] 쾨셈 술탄은 두 아들 무라트와 이브라힘의 재위 기간에 섭정을 맡았는데, 이브라힘과는 관계가 악화되어 본인의 손으로 아들을 제거하고 손자 메흐메트를 옹립했다. 그러나 며느리 투르한 하티제 술탄이 아들도 죽였는데 손자라고 못 죽일까라고 생각하며 불안감에 떨다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시어머니인 그녀를 살해하고 새로운 섭정이 되었다.[75] 투르한 하티제 술탄은 본인의 정치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대재상(사드라잠)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에게 정권을 이양했고, 그때부터 쾨프륄뤼 가문 출신 재상들이 섭정을 맡았다. 그 중에서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합스부르크의 수도 빈을 포위했다가 참패하여 패전 책임을 지고 처형당하는 바람에 메흐메트 4세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는데, 쾨프륄뤼 가문 자체는 이후에도 재상 3명을 배출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다.[76] 후마윤 황제가 계단에서 떨어져 실족사하는 어이 없는 죽음을 맞은 후 바이람 칸 장군이 어린 황제 악바르의 섭정이 되었다. 악바르는 성년이 된 후 기습적으로 바이람 칸을 체포하여 파직하고 메카 순례를 보내는 형식을 빌려 멀리 치워버렸는데, 바이람 칸은 순례를 떠나는 도중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당했고, 다시 순례를 떠나다가 암살당했다.[77] 마라타 페슈와는 본래 황제를 보좌하는 재상이었으나, 바트 가문이 해당 관직을 독점하면서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이 되었고, 이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78] 1850년대부터 라나 가문이 왕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150여년 동안 재상직을 독점하며 사실상 섭정으로서 통치했는데, 1950년 트리부반 왕이 왕족들을 이끌고 인도망명하자 국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인도 정부까지 네팔 정부를 압박하여 1951년 라나 가문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네팔 왕실이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후 네팔 왕실은 네팔 회의민주화 세력과 대립하고, 마오이스트 반군과의 내전에 시달리다가, 왕세자가 왕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참사가 터졌고, 마지막 왕 갸넨드라의 폭정으로 인해 2008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79] 더 이전에도 엘사-안나 자매의 부모 승하 후 엘사의 대관식까지 3년 정도의 공백기간 동안 섭정이 있었겠으나 작중 언급은 없다.[80] 애초부터 마지막 황제가 된 이가 황위 계승에 밀린 지 오래인 최하급 황족으로 대신이 자신의 야욕에 써먹고자 일부러 그를 이용하고자 섭정한 것.[81] 길리먼이 그레이트 스코어링 도중 치명상을 입고 정지장에 안치 된 이후 부활할 때까지 섭정직은 궐석이었지만, 세나토룸 임페리알리스가 사실상 과두섭정정부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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