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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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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Αθήνα | Ath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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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화 수도
(첫 회) 1985년
아테네
1986년
피렌체
1. 개요2. 명칭3. 아테네 도시권과 아테네4. 지리5. 역사
5.1. 고대 아테네5.2. 로마 시대5.3. 아테네 공국5.4. 오스만 제국
5.4.1. 아크로폴리스 공방전 (1687년)5.4.2. 18세기의 부흥5.4.3. 하세키 성벽 (1778년)5.4.4. 그리스 독립 전쟁
5.5. 현대 그리스
6. 명소7. 교통
7.1. 도로7.2. 도시철도7.3. 철도7.4. 항만7.5. 공항
8. 창작물9. 여담10. 언어별 명칭

[clearfix]

1. 개요

제비꽃 화관을 쓴 빛의 도시
— 핀다로스(Πίνδαρος, BC 518~438), 단편 76

그리스 수도이자 아티카 주 주도. 아테네가 그리스의 수도가 된 것은 그리스 독립 2년 후인 1834년부터다.

그리스로마유럽을 주도하던 시절, 유럽의 시작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중심지로서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에도 이에 영향을 주었던 살아 숨쉬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시작점이며, 로마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곳이다. 제1회 하계 올림픽 대회제28회 하계 올림픽 대회의 개최지이다. 고대에 건축된 수많은 유적이 있으며 세계적인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는 관광과 더불어 해운, 조선, 금융 산업도 발달되어 있다.

2. 명칭

아테네라는 이름에 대해서 19세기 독일의 고전학자 크리스티안 로베크(Christian August Lobeck)는 그 어원이 'anthos(꽃)', 즉 '꽃의 도시'라고 보았으며,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자 루트비히 되데를라인(Ludwig Döderlein)은 그 어원을 'the-(비옥한)'로 보고 '비옥한 곳'이라 해석하였다.[7]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고 여기고 있다. 역사가 미케네 문명 이전의 선사시대까지 올라가는지라 테베와 미케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 도래 이전부터 쓰이던 이름으로 추정된다.[8]

현대 그리스어 이전의 아테네의 그리스어 명칭은 Ἀθῆναι였다. 이를 고전 그리스어 기준으로 '아테나이'([atʰɛ̂:nai̯])라고 읽지만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아테네'로 읽는다. 한국어 표기는 가장 잘 알려진 코이네식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 동로마 제국 시기 중세 그리스어부터는 모음 추이와 θ의 발음 변화를 거쳐 Ἀθῆναι는 '아시네'([a'θine])로 발음되었다.

이 발음은 근대 그리스의 독립 이후에 제정된 카사레부사 그리스어(Καθαρεύουσα, 순수어)에서도 유지되어 왔으나, 카사레부사는 문어체에 불과했고 민중의 구어체(디모티키)로는 아시나(Αθήνα)라 했다. 그리고 1976년에 그리스 정부가 표준 그리스어를 디모티키에 가깝게 개혁하면서 아시나(Αθήνα)가 공식 명칭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영어는 'Athens'로 표기하며 애신즈(/ˈæθɪnz/)로 발음한다. 한국의 옛날 책에서는 이를 '아덴스'로도 표기했다.

현재 애플 지도에서는 '아테나스'라는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3. 아테네 도시권과 아테네

아테네라는 이름이 붙은 행정구역은 광역 행정구역인 아테네 도시권(Πολεοδομικό Συγκρότημα Αθηνών/Athens Urban Area)과 시급 행정구역인 아테네시(Δήμος Αθηναίων/Municipality [City] of Athens)가 있다. 아테네 시의 인구는 66만 명이고 아테네 도시권의 인구는 309만 명이다. 다만 행정구역의 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게 아테네 시(39km²)는 서울종로구중구 합쳐놓은 수준에 불과하고, 피레우스 등의 위성도시를 포함한 아테네 도시권(412km²)가 서울특별시의 3분의 2 규모이다. 보통 아테네 하면 도시권을 뜻하는 거라 보면 된다. 그리스는 대한민국처럼 아테네에 생활권과 경제권이 모여 있다.

한편 그 배후 지역인 아테네 광역권(Μητροπολιτική Περιοχή της Αθήνας / Athens Metropolitan Area)의 면적은 2928km²에 인구는 2014년 기준으로 4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아테네 광역권이 아티키주의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아티키주에는 8개 지역 단위(2010년 이전의 현(縣))가 있다. 이 중 북아테네, 서아테네, 중아테네(아테네시가 속함), 남아테네, 피레우스 5개 지역 단위가 아테네 도시권에 들어가고, 여기에 동아티키, 서아티키를 더한 7개 지역 단위가 아테네 광역권이다. 아티키 주에서 아테네 광역권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지역 단위인 아티키 군도는 아테네에서 멀리 떨어진 섬 지역들이다.

4. 지리

파일:Athens,_Greece_ESA24382014.jpg
오른쪽이 아테네 광역권, 왼쪽 아래의 섬은 살라미스이다.

도시 전체가 아티카 분지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서 도시 사방을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형태를 갖고 있다. 서쪽에는 에갈레오 산이 있고, 북쪽에는 파르니사 산(높이 1413m), 북동쪽에는 판델리 산이 있으며, 동쪽에는 이메토스 산이 자리잡아 있다. 그리고 남쪽은 사로니코스 만이 위치해 바다로 열려 있다. 도시 안에는 딱히 산이라고 부를 만한 물건이 없으며, 한국 기준으로는 '언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보인다. 그중 대표적인 언덕은 역시 아크로폴리스가 위치한 언덕과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리카비토스 언덕. 높이는 277m이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일 년 내내 따뜻한 기후를 자랑한다. 겨울날 새벽에도 5°C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 1월에 벚꽃이 필 정도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유럽에서 가장 더운 도시이다. 실제로 기록된 역대 최고 기온은 무려 48.0℃로 이 기온이 1977년부터 2021년까지 유럽 역대 최고 기온[9]이었다. 평균 기온을 봐도 7월에는 낮에 평균 34°C까지 올라간다. 다만 사하라 사막에서 올라오는 고압대의 영향으로 열대야가 없고 응달진 곳에서는 시원하다. 강수량은 414.1mm로 절반 이상이 겨울철에 집중된다.

분지 지형 특성상 대기 오염이 심각한 도시다. 이미 산성비와 이산화황 반응으로 인해 아크로폴리스의 유적들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에 있다. 게다가 여름철의 건조한 기후로 인해 산불이 자주 일어나는데 특히 2007년과 2009년에 있었던 대규모 산불로 인해 파르니싸 산의 수목들이 불타면서 아테네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새벽에 언덕 위로 올라가보면 도시 전체가 스모그에 싸여 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다행히도 아테네 당국에서 자동차 없는 거리를 잔뜩 설정해놓고, 적극적으로 대기 오염을 잡으려는 정책을 시행 중이라 호전되는 추세이다.

5. 역사

파일:Monastiraki_Square_and_Acropolis_in_Athens_(44149181684).jpg
모나스티라키 광장 일대

최소 기원전 3천년 경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기원전 1400년경 미케네 문명기에 성벽이 둘러지는 등 도시로 발전했다. 다만 기원전 1100년경 도리아인의 남하로 무역이 방해되며 쇠퇴하다가 기원전 900년 경부터 안정을 되찾았다.

5.1. 고대 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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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체(政體)는 이웃나라들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 남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동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 정치라고 부릅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페리클레스의 추도사 중}}}



고대 그리스에서 라이벌 스파르타와 함께 가장 유명한 도시국가.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철학의 도시, 고대 그리스 문명의 꽃이자 모든 유럽 국가들의 문명 요람이 된 본거지가 아테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테네에서 절정을 이룬 그리스 문명은 이후 로마와 중세 유럽, 근대 유럽, 현대 세계로 이어진다.

아테네는 본래 왕정으로 시작했으나 9인의 아르콘이 통치하는 귀족정이 정착했고, 기원전 600년을 전후로 드라콘솔론의 개혁이 이루어져 부유한 평민의 정치 참여가 보장되는 금권정이 실행되었다. 다만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독재자에 오르는 참주정이 되었다가,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민주정이 본격 도입되었다. 기원전 5세기 들어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로 창설된 아테네 해군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살라미스 해전을 대승으로 이끄는 등 활약했다. 3차에 걸친 아케메네스 제국의 침공에서 비록 한번 도시가 점령되어 불타긴 했지만 결국 승리한 아테네는 그리스 내에서의 입지가 급상승했고,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어 동지중해의 패권을 쥐었다.

그따까지 중장보병에 복무한 귀족과 부유층 중심의 엘리트 민주정이던 아테네는 에피알테스페리클레스의 주도 하에 해군을 복무한 다수의 평민 남성도 참여하는 보편 민주정으로 거듭났다. 당시 25만 가량이던 인구 중 5만여명에 참정권이 있었다. 민주정을 확립한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최대 번영기를 맞았다. 평화가 이어지며 아테네는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이 되었고 소크라테스, 소포클레스, 헤로도토스, 히포크라테스, 투키디데스, 아낙사고라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국내외 학자 및 작가들이 한데 모여 활약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맞았다. 아테네의 랜드마크이자 그리스 신전의 정수인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진 것도 바로 이때.

파일:Atenas,_Ágora_03.jpg
아고라 인근의 헤파이스토스 신전
파일:Athènes_Acropole_Caryatides.jpg
카리아티드 (인상주)로 유명한 에레크테이온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며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404 ~ 403년에는 사실상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으며 참주정이 부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트라시불로스가 민주정을 부활시키고 테베와 동맹해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며 기원전 4세기 전반에 아테네는 안정과 번영을 되찾았다. 플라톤아카데미아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을 설립하고 크세노폰이 활약한 것도 이때였다. 아테네는 더 나아가 2차 델로스 동맹 격인 아테네 동맹을 결성해 에게해의 패권을 되찾고, 만티네아 전투에서 테베마저 약화시켰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로도스, 키오스 등의 섬들이 동맹 전쟁을 일으키며 동맹은 해체된다. 이후로 그리스는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그 누구도 패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된다.

기원전 338년, 아테네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패했지만 이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파괴된 테베와 달리 그의 페르시아 원정을 도우며 자치를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후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들과 독립을 선포하며 라미아 전쟁을 치렀으나 기원전 322년에 안티파트로스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후 지도자 데모스테네스가 자살하고, 포키온의 과두정이 들어섰다. 또한 아테네 주민 중 3/5에 달하는 하층 평민들이 트라키아로 축출되었다. 이로써 아테네 민주정은 붕괴했다가 3년 후 카산드로스에 의해 재건되었으나 피레우스 항에 마케도니아 군이 주둔하는 등 보호령이 되었다. 그후 안티고노스 왕조 지배를 받던 아테네는 크레모니데스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편을 들어 봉기했다가 기원전 261년에 진압되어 자치권을 상실했다.

5.2. 로마 시대

당신들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로마에서 아테네 역사를 배우러 온 사람이 아니라 당신들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고 온 장수요.
아테네의 역사적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아테네 사절에게 루키우스 술라가
당신들은 매번 죽을 죄를 짓지만 선조들의 눈부신 영광 덕에 살아 남는 거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찾아온 아테네 항복 사절에게

약 반세기 가량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의 영향력 하에서 중립을 지키던 아테네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당시 페르가몬 왕국의 설득으로 로마와 연합했고, 기원전 197년에 자유를 얻었다. 1세기 간의 평화 후,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중인 기원전 88년에 폰투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가 델로스의 반란을 진압해주자 아테네의 지도자 아리스티온은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그와 동명했다. 하지만 기원전 86년에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아테네를 포위, 수개월 간의 봉쇄 끝에 항복시켰고 아리스티온은 처형되었다. 술라는 아테네와 피레우스의 성벽을 허물었고, 막대한 벌금을 물렸으며 민주정을 폐하였다. 이후 카이사르의 내전 시에도 아테네는 지는 편인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가, 파르살루스 전투 후 항복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테네 사절단을 비꼬았지만 도시에 응징을 가하진 않았다.[10]

연이은 잘못된 선택에도 아테네는 로마인들의 동경 덕에 자유도시로 남았다. 로마 제국 들어 아테네는 아카이아 속주령 지방 도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아카데미아와 리케이온을 보유한 학술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서기 1세기에는 기독교의 12사도 중 바울이 전도여행 중 아테네를 방문했다. 즉위 전인 112년에 이미 아테네에 체류하며 시민권까지 받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치세 내내 이어진 제국 순행 도중 124년, 128-29년, 130-31년의 세 차례나 방문하며 애정을 보였다. 그는 시내에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김나지움 (체육관), 수도교[11], 로마식 신전 및 아고라, 다리 등을 세웠고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중심으로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하드리아노폴리스라 명명된 신도시 내에는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스토아, 판헬레니온 등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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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옛 도시'라 적힌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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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하지만 로마 제국의 쇠락과 함께 아테네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3세기의 위기 들어 아테네에는 성벽이 둘러졌다. 그럼에도 고트족 계열인 헤룰리 족이 267년에 흑해를 건너와 아테네를 함락했고, 대대적인 약탈과 파괴를 벌였다. 덱시포스가 이끄는 만병대가 그들을 몰아내긴 했으나 이미 올림푸스의 제우스 신전 등이 크게 훼손되었고,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의 장서들은 겨우 소실을 피했다.[12] 이후 주민들은 로마 아고라 쪽에 모여 살았고, 새 성벽이 둘러졌다. 기존 아고라는 성에 포함되지 못해 버려졌고,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점차 신전들은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4세기 들어서는 제국의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건설 시에 아테네의 많은 조각상들이 장식을 위해 징발되었다.

또한 기독교의 국교화와 함께 다신교와 (기독교 입장에서) 이단적인 철학의 중심지이던 아테네의 부와 명성은 점차 줄었다. 비록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스, 율리아누스 황제 등이 신플라톤주의 학습을 위해 유학하는 등 아테네는 학문의 도시로 유지되었다. 396년에 알라리크서고트 족이 침공해 근교를 약탈하자 아테네 주민들은 사절을 보내 막대한 재물을 바치는 대가로 도시의 파괴를 피했다. 다만 5세기 들어 경제적으로 크게 쇠락한 아테네는 성벽 내에만 주민이 거주하는 소도시로 전락했고, 학교들도 교세가 기울어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카데미아를 폐쇄할 시점에는 이미 아카데미아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5.2.1. 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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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엘레우시아로 가는 길에 있던 옛 아폴론 성소 자리에 6세기 무렵 세워진 다프니 수도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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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말에 님파이온 자리에 세워진 성 사도 성당

동로마 제국 시기 아테네는 그나마 항구 도시로써 근근이 이어졌고, 582년에는 슬라브족의 약탈을 당했다. 7세기 들어 아테네는 헬라스 테마에 편성되었고, 662년경 황제 콘스탄스 2세가 방문했다. 8-9세기 성상파괴운동 당시에 아테네는 성상옹호주의 편인 여제 이리니테오파노의 고향이었기에 성상옹호파에 속했다. 896년에는 사라센 해적이 약탈 후 한동안 점령했고, 이후로도 무슬림들이 왕래하며 모스크도 세워졌다. 11세기의 혼란 속에서도 아테네는 안전한 후방이었기에 평화를 누렸고, 12세기 들어서도 인구가 늘며 버려졌던 아고라가 다시 개발되었다. 또한 아테네는 비누와 염료를 특산물로 생산했고, 베네치아 상인들이 왕래했다.

하지만 아테네는 13세기 초의 혼란은 피해가지 못했다. 1201년, 나플리오 & 아르고스 총독이던 레온 스구로스가 반란을 일으켜 테베를 함락하고 아테네를 포위했다. 아테네 주민들은 대주교 미하일 호니아티스의 지휘 하에 결사 항전했고, 동로마 함대가 구원하자 레온은 철수했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 속에서 1204년에 레온은 재차 아테네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미하일 호니아티스가 이끄는 민병대에게 격퇴되었다. 뒤이어 레온은 테르모필레에서 라틴 군과 맞섰는데, 미하일 호니아티스가 라틴 측에 가담하며 패한 후 아크로코린트에서 농성하다 죽었다. 그리고 1204년 11월, 테살로니카 왕국의 봉신 외드 드 라 로쉐가 미하일 호니아티스의 귀순 덕에 아테네를 무혈 점령했다. 이후 아테네에는 에피로스, 모레아, 테살로니키 등과는 달리 6세기 이상 그리스 정권이 들어서지 못했다.

5.3. 아테네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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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서문에 있던 '프랑크인 성탑' (1875년 철거)

4차 십자군 이후 아테네는 라틴 제국테살로니카 왕국의 봉신국인 아테네 공국의 수도가 되었고, 부르고뉴 출신의 드 라로슈 공가가 통치했다. 그러던 1312년, 아라곤 왕국 출신의 카탈루냐 용병대가 아티카 지방을 정복하고[13] 시칠리아 왕국에 복속한 채로 실질적으로 아테네 공국을 통치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아테네 대신 테베를 수도로 삼았으나, 1379년 나바라 용병대에게 테베를 뺏기자 아테네로 천도했다. 그러다 1385년, 피렌체 출신 아차이올리 가문의 네리오 1세가 아테네 시가지를 장악했고 1388년 5월에 아크로폴리스도 함럭했다. 이로써 아테네 공작에 오른 그는 1390년에 아티카를 통일했고, 1394년 오스만 제국의 남하에 직면하자 연공을 바치며 복속을 표한 후 사망했다.

네리오 1세는 아테네를 성 마리아 성당 (파르테논)에 남긴다는 애매한 유언을 했는데, 1395년 초에 소수의 오스만 군[14]이 아태네 아크로폴리스를 공격하자 겁에 질린 성주 마테오가 네그로폰테의 베네치아 영주에게 아테네를 넘겨버렸다. 이로써 도시는 베네치아 공화국령이 되었다가, 1402년 봄에 테베 영주이던 네리오 1세의 서자 안토니오가 기습적으로 아테네 시가지를 장악했다. 안토니오는 계속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했고, 베네치아 원군을 격파한 후 협상도 거절했다. 결국 1403년 초엽, 안토니오는 아테네를 완전히 점령하며 공작위에 올랐다. 그는 1435년까지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아테네는 피렌체 상인들이 왕래하는 등 무역을 이어가며 평화를 누렸다. 이후 내전을 통해 집권한 네리오 2세는 1444년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아테네를 포위하자 그 봉신이 되고 테베를 넘겨주며 위기를 모면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모레아를 압박해 테베를 돌려주자 네리오 2세는 그에 복속했고, 1451년 사망했다. 이후 어린 아들 프란체스코 1세를 대신해 모후 키아라가 섭정했는데, 그녀는 베네치아인 바르톨로메오와 재혼했다. 그러자 베네치아 영향력에 반대한 주민들이 술탄에 개입을 청했고,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1453년에 프란체스코 1세를 소환해 폐위한 후 사촌 프란체스코 2세를 공작에 봉했다. 하지만 1456년 투르하노을루 외메르 베이의 오스만 군대가 아테네 시가지를 장악하자 프란체스코 2세는 주민들과 아크로폴리스에서 무려 2년간 항전했으나, 결국 1458년 6월에 항복했다. 그해 8월에는 모레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메흐메드 2세가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라이아에 머물기도 했다. 프란체스코 2세는 테베 영주로 남았으나, 1460년에 아테네 탈환 시도가 발각되어 연회 후 처형되었다.[15]

5.4.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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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년 정복 직후 성당에서 모스크로 개조된 페티예 자미

1458년 아테네가 점령되며 그리스 본토에서의 프란코크라티아 (프랑크-라틴 지배)가 종식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고즈넉한 아테네에 매료되어 약탈, 파괴, 살인을 금지했고 모스크와 조그만 별궁을 지었다. 동시에 파르테논은 성 마리아 성당에서 아테네 중심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오스만 지배 하에서 아테네 (터키어로 아티나)는 평화를 누렸지만 인근의 코린토스와 북부의 테살로니키에 밀려 소도시로 유지되었다. 17세기 초엽 아흐메트 1세는 총독들의 실정에 대한 불만이 들려오자 아테네 출신 애첩 바실리카에게 도시를 봉토로 내려주었다. 그녀의 죽음 후에는 술탄의 흑인 환관장 (키즐라르 아가)이 아테네를 봉토로 얻기도 했다.

5.4.1. 아크로폴리스 공방전 (16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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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7년 베네치아 군의 아크로폴리스 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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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파르테논 내에 세워진 모스크

한편 아크로폴리스의 오스만 주둔군은 파르테논과 프로필라이아를 화약고로 썼는데, 1640년 후자에 벼락이 쳐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다. 1687년 9월에는 대튀르크 전쟁의 일환으로 모레아를 장악한 프란체스코 모르시니가 이끄는 1만 750의 베네치아 군대와 함께 아테네 공격을 위해 엘레우시스에 상륙했다. 오스만 수비대는 주민들을 대피시킨 후 아크로폴리스에 들어가 농성하며 원군을 기다렸다. 베네치아 군은 인근 언덕들에 포대를 설치해 포격에 나섰고, 수비대는 아테나 니케 신전을 허물어 포대를 세웠다. 베네치아측 포탄은 9월 25일 프로필라이아 화약고를, 다음날 저녁 파르테논 화약고를 강타해 폭파시켰다. 후자의 폭발로 파르테논 지붕과 벽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3백여 수비대가 사망했다.[16][17]

그럼에도 계속 버티던 수비대는 9월 28일 테베의 원군이 격퇴된 후에야 다음날 스미르나로 안전히 철수하는 조건 하에 항복했다. 점령 후 프란체스코는 2개의 모스크를 각각 가톨릭, 개신교 교회로 개조하고는 아테네-피레우스 도로에 요새들을 세웠다. 다만 12월부터 아테네에 역병이 돌았고, 아티카 주민 중 불과 5백여 만이 베네치아측 모병에 응했다. 결국 프란체스코는 아테네를 포기하고 네그로폰테 공격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베네치아 군의 철수 시에 오스만측 보복을 두려워한 아테네 주민 622가구 (4천여명)가 함께 떠나 모레아 등지로 이주했다. 한편 파르테논 잔해의 조각상들을 약탈하던 프란체스코는 포세이돈 석상과 니케 마차상이 분리 도중 부서지자 약탈을 중단한 후 1688년 4월에 모레아로 돌아갔다.[18] 이로써 아테네는 오스만 령으로 회복되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적은 인구가 상당수 떠나버린 탓에 시가지가 아크로폴리스 기슭으로 축소되는 등 마을 수준에 불과했다.

5.4.2. 18세기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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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에 세워진 치스타라키스 모스크 (지즈데리예 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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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 화가 에드워드 도드가 그린 아테네의 바자르

역사상 가장 적은 인구를 지녔던 아테네는 18세기 들어 다시 도시 규모를 회복했다. 1720년에 방문한 미셸 푸르몽의 기록처럼 아테네에는 여러 건설이 이루어졌고, 다시 그리스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인 주민들은 고대처럼 부유층 및 종교계 유력자들의 위원회를 구성해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렸고, 총독인 파샤도 위원회의 반발을 사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로 해임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이는 1737년 ~ 1770년간 예루살렘 총대주교 2인이 모두 아테네 출신인 영향도 있었다.[19] 주민들은 조정에 토지세인 하라츠와 염세, 올리브 농장 및 정원을 위한 수도세 정도의 세금만 납부했다. 그러던 1753년, 아테네를 봉토로 지니던 환관장의 처형 후 부임한 사리 무셀리미는 폭정을 행해 그리스 뿐만 아니라 튀르크 주민들의 반발까지 샀다.

현지 유력자들이 반발하자 그는 일부를 처형했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이 총독 관저를 불태우자 아크로폴리스로 도망갔다. 아테네 주민들이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한 상태에서 네그로폰테 총독에 개입, 대주교를 감금하고 그리스 주민들에 많은 벌금을 물리며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1759년에 수비대장 무스타파 아가가 술탄의 소유인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기둥 하나를 떼어 아테네의 5번째 이슬람 사원인 치스타라키스 모스크 건설에 활용했다. 이듬해 아테네는 환관장의 권한에서 술탄의 직속령이 되었고, 세금 청부인 말리카네가 실시되었다.[20] 첫 징세관 (말리카네 사힙) 이스마일 아가[21]는 인간적인 면으로 호평을 받았다.

1760년대 아테네의 인구는 약 1만이었고, 그중 80%가 그리스 정교도였다. 무슬림-기독교도 주민간 관계는 다른 것들보다 좋았고, 서로 포도주를 나누는 경우도 많았다 한다. 주요 산업은 유목 및 농업 등으로 비누, 곡물, 가죽, 기름, 꿀, 밀랍, 수지, 비단, 치즈, 발로니아 염료를 생산해 코스탄티니예 및 프랑스 등지로 수출하는 것이었다. 또한 아테네에는 영국과 프랑스 영사관이 있었다. 1770년 모레아를 휩쓴 오를로프 반란 당시 살라미스까지 반군이 장악했음에도 아테네 주민 중에는 일부 청년 외에는 호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스마일 아가의 노력 후에야 아테네의 그리스 공동체는 배상금을 내는 것으로 보복을 피했다.

5.4.3. 하세키 성벽 (17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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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기준 아테네 시가지와 성벽

이스마일 아가의 후임자인 하지 알리 하세키는 오스만 시기 아테네 지방관 중 제일 오래 재임했다. 한편 오스만 조정이 오를로프 반란 진압을 위해 동원한 알바니아 민병대는 1778년부터 아티카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보급품과 함께 수비대 채용장을 내놓지 않는다면 도시를 불태울 것이라 협박했다. 사실상 음식과 일자리 요구.. 당시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 외의 방어 시설이 없었기에 하세키는 종교를 불문하고 주민들을 모아 할란드리 평원에서 알바니아 민병대를 격파했다. 이후 하세키는 알바니아 민병대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유적 등을 활용해 시가지 주변에 '하세키 성벽'이라 불리는 새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공 전에 모레아로 향하던 마스쿠트 휘하 6천의 알바니아 민병대가 다가왔고, 하세키는 수비대와 튀르크 주민들을 아크로폴리스에 수용한 후 그리스 주민들의 살라미스 피신을 허가했다. 알바니아 민병대는 13일간 대치하다 많은 양의 재물을 받은 후 물러갔다.

그후 하세키는 모든 주민들을 동원함은 물론, 직접 공사에 참여해 축성에 박차를 가했고 10km에 달하는 높이 3m 및 두께 1m의 성벽이 불과 108일 (혹은 70일)만에 완공되었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 마찬가지로 많은 유물들이 자재로 쓰이기 위해 파괴되었다. 완공 후 하세키는 외부 설계자 초빙 비용이라며 주민들에게 42,500 쿠로쉬를 청구했고, 7개의 성문에 병력을 배치해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했다. 하세키는 이브라힘 아가와 달리 잔인했고, 20여년단 아테네에서 폭정을 행했다. 그는 도시 유력자들과 결탁해 평민들에게서 많은 재산을 수탈했고, 주민 청원으로 수차례 해임되었지만 술탄의 누이가 연인 관계인 덕에 쉽게 복직되었다가 1795년에야 처형되었다. 1801년 ~ 1805년에는 영국 대사 앨긴 경이 파르테논에서 50여 조각상들을 가져갔고, 에레크테이온의 여섯 카리아티드 중 하나를 빼낸 후에는 석고 모조품을 두었다.[22]

5.4.4. 그리스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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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iège_de_l'Acropoles.jpg

1821년 봄, 전국적인 봉기와 함께 아테네에서도 독립군이 조직되어 기독교도 주민들을 살라미스로 피신시킨 후 오스만 수비대가 배치된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했다. 다만 그해 여름, 오메르 브리오니가 남하하여 7월 20일 아테네에 입성하며 아크로폴리스를 구원했다. 당시 포위를 풀고 도주했던 6백의 독립군은 오메르가 떠난 후 1822년 봄에 프랑스 자원병들과 함께 재차 포위에 나섰다. 포격이 이어지자 6월 9일, 오스만 수비대는 병력과 주민들의 아나톨리아로의 안전한 철수와 남고자 하는 튀르크인에 대한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했다. 하지만 항복 후 히오스 섬 학살 소식에 분노해 있던 그리스 민병대가 공격을 가해 성내 인원 중 절반 가량을 학살했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폭력과 살해가 발생했다. 7월에는 드라말리 파샤가 아테네 대신 나플리오로 향하며 도시는 향후 4년 넘게 안정적으로 독립군 측에 남았다.

1825년부터 이집트 군이 개입하며 전황은 뒤집혔고, 1826년 4월에 메솔롱기가 함락된 이후 그리스 중부에는 아테네 만이 독립군 수중에 있었다. 이에 레쉬트 메흐메드 파샤가 1만 병력으로만 아테네를 포위했다. 8월 18일에 요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가 포위망을 뚫고 도시를 구원하려 했으나, 3백의 전사자를 내며 격퇴되었다. 이후 아테네 수비대는 아크로폴리스로 철수했고, 8월 25일부터 본격적인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군은 성채를 봉쇄한 채로 포격을 가했고, 수비대 역시 메솔롱기에서 살아남은 장교들의 지휘 하에 습격과 땅굴 및 폭파로 반격했다. 한편 중부 그리스의 잔존 병력과 철수한 요르요스와 유럽 자원병들은 아테네 남쪽의 피레로스, 엘레오시스, 팔레론에 거점을 두고 가끔씩 포위망을 뚫어 아크로폴리스에 보급품을 전했다.

요르요스는 포위군의 후방과 보급로를 여러 차례 습격했고, 11월에는 아라호바 전투에서 승리했다. 12월에는 프랑스인 필헬레네 샤를 니콜라 파비에가 수비대 측이 꼭 필요로 하던 탄약과 함께 5백의 병력을 아크로폴리스에 잠입시켰다.[23] 이후 그리스 군은 2월의 카마테로 전투와 4월의 팔레론 전투에서 오스만 군과 정면으로 맞섰으나 모두 패했고, 피레우스의 그리스 병력은 살라미스 등지로 철수했다. 따라서 완전히 봉쇄되어 구원 가능성이 없어진 아크로폴리스의 수비대는 6월 5일에 항복해 프랑스 군의 감독 하에 철수했다. 1826-27년 포위 당시 하세키 성벽은 시가지와 함께 대부분 파괴되었고, 남은 부분도 1834년에 도시 개발과 함께 허물어졌다. 아테네는 1829년 종전 이후에도 아크로폴리스에 오스만 수비대가 남아있다가, 1833년 3월 31일에야 퇴거했다.

5.5. 현대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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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43년에 세워진 옛 왕궁이자 현 의회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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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아테네 시가지

그리스 왕국이 독립한 이후 원래 그리스의 수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나플리오였으나 그리스 국왕으로 즉위한 오톤은 1834년 9월 18일, 고대 그리스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는 차원에서 아테네를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는 스타마티오스 클레안티스의 설계 하에 완전한 근대식 도시로 개조되었으며[24] 그리하여 1834년 독립 직후까지만 해도 인구 4-5천의 중소 도시에 불과했던 아테네는 1870년에 인구 4만 4천으로 36년만에 10배가 증가하는 등 다시 그리스의 중심 도시로 도약했다. 본래 시가지는 아크로폴리스 북쪽에 있었으나, 새 시가지는 아크로폴리스 남쪽과 동쪽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그곳에는 1837년 아테네 대학교, 1840년 국립 정원, 1842년 국립도서관, 1843년 구왕궁, 1858년 구의사당, 1874년 시청사, 1878년 자페이온, 1885년 아카데미아, 1897년 신왕궁 등이 세워졌다.

1896년에는 초대 근대 올림픽인 1896 아테네 올림픽이 개최되었으며 1922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터키에서 건너온 수십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아테네 일대에 정착하면서 도시 규모가 크게 불어났다. 이때 네아스미르니, 네아이오니아 등의 구역이 생겼고 인구도 47만에서 순식간에 현재 수준인 72만으로 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그리스 침공으로 아티카는 다시 전장이 되었고, 1941년 4월 27일에 나치 독일-이탈리아 군이 아테네를 점령했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그리스를 기반으로 루마니아의 유전을 폭격할까봐 전쟁 막판까지도 점령을 유지했는데, 1944년 8월에 소련이 루마니아를 해방시키자 10월 12일 아테네의 독일군은 그대로 철수했다. 따라서 아테네는 전쟁의 화마를 비켜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 저항군 내에서 좌익 계열인 EAM과 우익 계열인 EDES가 아테네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데켐브리아나를 벌였고, EAM이 한때 시가지를 장악했으나 1945년 1월에 영국의 개입으로 밀려났다. 이후 양측은 바르키사 협정을 맺어 휴전했으나, 이듬해 재차 충돌하며 그리스 내전으로 이어졌다. 1949년 내전 종식 후 한동안 우파 정부가 이어지다 1964년 좌파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1967년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리스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던 1973년 11월, 아테네 국립기술대학에서 수천의 대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반독재 시위를 벌였다. 이에 군부는 탱크까지 동원하며 교정에 진입, 강경진압을 가하며 발포하여 50여명을 학살했다. 여론의 반감을 사게 된 군부는 1974년 키프로스 전쟁에 개입했다가 패배한 후 정권을 잃었고, 그리스는 민주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81년 그리스는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한편 경제 성장과 도시화로 아테네는 극심한 교통 체증과 함께 심각한 수준의 대기 오염을 겪었고, 이는 문화유산의 부식 및 1996년 올림픽 개최 실패로 이어졌다. 100주년 기념 올림픽 개최의 실패는 여론의 분노를 야기했고, 그리스 정부는 대대적인 인프라 확충 및 대기 정화에 나섰다. 그 결과 아테네는 21세기 첫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그리스의 경제가 난관을 겪던 그해 12월, 아테네에서 경찰에 의해 16세 청년이 사살당한 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그리스 폭동을 촉발했다. 2025년 초에는 심각한 가뭄에 시달리는 아테네 교외 지방의 농업 용수 공급을 위해 1900여년 전에 세워진 로마 시대 수도교인 하드리아누스 수로가 활용되어 관심을 샀다.#

6.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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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전, 주그리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지정한 우범지대 여부를 꼭 확인할 것!

아크로폴리스와 같은 유적지들과 몇몇 중요한 박물관들이 있지만 다른 유럽의 수도들에 비해서 관광지로서 명성이 다소 밀린다. 고대에 중요한 도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는 그리스의 수도가 되기 전까지는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25] 중세나 근대의 유적지가 많지 않다. 얼마 안 되는 유적지들도 제2차 세계 대전난개발로 거의 다 파괴되었다. 새롭게 건설된 시가지도 현대적인 건축물이 아닌 온통 콘크리트로 된 단조로운 건물 투성이에 도로도 좁다. 아테네의 녹지대는 3퍼센트 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녹지대가 적은 곳이다.[26] 이 때문에 도시의 역사와 별개로 로마, 프라하, 리스본 등 다른 국가의 수도들 같이 역사적인 중심지라는 느낌을 받기 힘들다.

아테네에는 한국인 가이드가 많지 않다. 대부분 아크로폴리스로, 나머지 명소인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등은 한국어 투어와 오디오 가이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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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통합권을 이용하여 입장하며, 가격은 30유로이다. 아크로폴리스만 입장할 경우는 20유로이다. 별도의 학생 할인은 없으며 유럽 연합 내 25세 미만 시민은 무료, 유럽 연합 외 국가에서 온 25세 미만은 50% 할인이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통합권으로는 바로 옆의 디오니소스 극장과 제우스 신전 및 모나스티라키의 세 유적까지 커버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돌덩이 투성이라 의외로 파르테논 신전 외에는 볼 것이 없는 편. 더구나 파르테논 신전과 디오니소스 극장을 제외한 다른 곳은 모두 오후 3시[27]에 가차 없이 문 닫아버린다. 바닥이 온통 잘 닦인 대리석이라 미끄러운데, 아테네 지형 특성상 바람도 굉장히 세차므로 소지품과 안전 관리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파르테논 신전 자체도 관광객에게 친절하게 꾸며놓은 편이 아니라서 그냥 소문만 믿고 올라갔다가는 뭐가 뭔지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돌덩이만 실컷 구경하는 수가 있다. 가기 전에 미리 공부해두자.

파일:Odeon_of_Herodes_Atticus-01@Michalis_Kloukinas.jpg*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온서기 161년에 아크로폴리스의 서남쪽 기슭에 세워진 음악당으로, 지금도 종종 공연이 열린다.

파일:1__sn9EeWxaM4SdEsxM-ey6w.jpg* 아고라 (Αρχαία Αγορά της Αθήνας)파르테논 신전 입장권과 함께 끊어서 가는 곳으로 멀쩡한 건물이라곤 복원된 아탈로스의 회랑 건물밖에 없다. 다만 인근에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고, 이곳에서 자라는 월계수 덕분에 상당히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파일:Hephaistos_Temple.jpg* 헤파이스토스 신전 (헤파이스테이온, Ἡφαιστείο)기독교화 후에도 7세기 ~ 1834년까지 성 요르요스 성당으로 쓰였기에 아테네를 넘어 그리스 전역의 고대 신전 중 제일 잘 남아있다. 테세우스의 유해가 묻힌 곳이라는 전승 덕에 테세이온 (Θησείο)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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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ower_of_the_Winds_-_panoramio_-_Robert_Freeman_(1).jpg* 로마 아고라 (Ρωμαϊκή Αγορά)카이사르가 약속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건립한 아고라로, 기존 그리스 아고라의 동쪽에 있다.

파일:temple-of-olympian-zeus.jpg*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Ναὸς τοῦ Ὀλυμπίου Διός)아크로폴리스나 리카비토스 언덕에서 바라볼 때 유난히 눈에 띄는 광장 같은 곳이 있다면 십중팔구가 이곳이다. 넓직한 터에 반쯤만 남은 신전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돌덩이로 둘러싸인 곳. 기원전 6세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착공한 후 30여년 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기원전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조 군주 안티오코스 4세의 후원으로 재개했으나 10여년 후 다시 중단되었다. 기원전 86년에는 술라가 미완성 기둥들을 로마로 가져가 유피테르 신전 건설에 활용했다. 그러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25-132년에 걸쳐 완공시켰다. 당시 기둥만 104개에 이르는,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었다. 다만 267년 고트족의 약탈 후 크게 파괴되었고, 5세기 들어 자재가 인근 성당 건설에 쓰였다. 18세기에도 자재가 모스크 건설에 쓰였고, 1852년에는 강풍으로 남은 기둥 중 하나가 무너졌다. 아테네에서 파르테논 신전과 헤파이스토스 신전 다음으로 괜찮은 유적지이며,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거닐면 만족하게 볼만한 곳이다. 아크로폴리스 통합권을 이용하여 입장할 수 있다.

파일:Acropolis_viewing_from_Temple_Of_Zeus.jpg*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Πύλη του Αδριανού)아크로폴리스 동쪽 기슭에 있는 로마 유적으로, 서기 13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테네 방문을 기념해 세워졌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과 가깝다.

파일:1280px-The_west_facade_in_Pentelic_marble_with_columns_of_Karystos_marble_of_the_Library_of_Hadrian,_Athens_(14023204344).jpg*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Βιβλιοθήκη του Αδριανού)로마 포럼과 모나스티라키 사이에 위치하며, 132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대규모 도서관. 그리스 최대의 도서관이었고, 267년에 파괴된 후 407-412년간 총독 헤르쿨리오스가 보수했다. 이후 3개의 성당이 들어섰고, 벽은 성벽의 일부가 되었다.

파일:c5008c4d-aa3f-4e49-9ff7-d2058c460517.jpg* 케라메이코스 (Κεραμεικός)고대 아테네인들의 공동묘지 유적. 근처에 있는 정교회인 삼위일체 성당이 인상적이라 이곳에서 삼위일체 성당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근차의 아고라와 함께 둘러보기 좋다.

파일:1280px-Attica_06-13_Athens_22_View_from_Acropolis_Hill_-_Museum_of_Ancient_Agora.jpg* 아탈로스의 스토아 (Στοά του Αττάλου)로마 아고라 동쪽에 위치하며, 성 사도 성당 옆에 있다. 어린시절 아테네에서 수학한 페르가몬 왕국의 군주 아탈로스 2세가 기원전 159년 ~ 138년에 걸쳐 조성한 거대한 회랑으로, 267년 고트족의 침공 당시 불타 파괴된 후에는 성벽의 일부가 되었다가 1952-56년 미국 고전학 학교가 복원했다. 내부에는 아고라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00m가 넘는 거대한 규모 때문에 아테네 관광 중 한번쯤은 눈길이 가는 곳이다.

파일:Monastiraki_Square_on_June_6,_2020.jpg* 모나스티라키 (Μοναστηράκι) 주변부위 본문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카페와 타베르나(식당), 기념품/골동품 상점들이 모여 있는 나름대로 활기찬 거리이다. 파르테논 신전과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아테네에서도 분위기가 그나마 괜찮은 편. 특정 날에는 헤파이스토스 신전 부근에 길거리 시장이 들어서기도 한다.

파일:Tzisdarakis_Mosque_and_Akropolis_in_Monastiraki.jpg* 치스타라키스 모스크 (Τζαμί Τζισταράκη)1759년 아테네 수비대장 무스타파 아가 치스타라키스 (디즈디르 무스타파 아가)가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기둥들을 활용해 세운 모스크. 건설 후 조정은 악령이 풀려나게 한 행위라며 그를 해임했다.[28] 1830년에 폐쇄된 후 1834년 오톤 국왕의 환영식이 열렸고, 이후 감옥 / 병영 / 창고 등으로 쓰이다 1915년에 정비되었다. 1966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사우드의 방문 시에 잠깐 모스크로 다시 쓰였고, 현재는 아테네 민속박물관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파일:More-Greece-Panorama-of-cozy-outdoor-cafe-in-Plaka-the-best-place-to-walk-and-relax-with-a-cup-of-Greek-coffee.jpg* 플라카 지구아크로폴리스 북쪽 근방에 있는 고급 거리. 아테네에서도 부촌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옛 구도심을 개발한 구역이다. 관광객들을 위한 고급 식당과 카페들이 즐비해 있다. 대부분 생음악을 연주하는데, 저녁에 식당 바깥에서 들리는 부주키 연주에 끌려서 들어갔다가 수프 한 그릇 사먹고 10유로씩 내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파일:Archäologisches_Nationalmuseum_Athen.jpg* 국립 고고학 박물관오모니아 광장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자리한 박물관으로, 돌밖에 볼 것이 없는 그리스에서도 가장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흔치 않은 박물관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통치 시기도 역사에 넣어 이집트 유구도 전시하고 있다. 더구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과는 달리,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유물은 아가멤논의 마스크와 안티키테라 기계. 입장료도 매우 저렴해서 국제학생증을 갖고 있다면 3유로에도 끊을 수 있다. 문제는 이 오모니아 지역이 아테네에서 손에 꼽히게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 꼭 대낮에 방문하고,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파일:Kapnikarea.jpg* 파나기아 카프니카레아 성당 (Εκκλησία της Παναγίας Καπνικαρέας)현존하는 아테네 최고 (最古)의 성당으로, 11세기 경에 아테나 혹은 데메테르 신전 자리에 세워졌다. 그리스 독립 후 오톤 국왕이 신시가지 조성에 나섰을 때에 철거하려 했으나 부친인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가 저지시켰다.




파일:Πλατεία_Ομονοίας_(Omonia_Square).jpg* 오모니아 광장 주변부 (대사관 지정 우범지대)모나스티라키와 신티그마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광장으로, 오모니아는 하모니, 즉 조화를 뜻한다. 따라서 파리의 콩코드 광장과 같은 뜻이다. 오모니아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온갖 할렘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가지마라. 2012년에는 주그리스 대사관에서 대놓고 ‘절대 가지말아야 할 곳’이라고 명시한 적도 있다. 현지인들도 치안이 나쁘기 때문에 저녁 이후의 출입은 극구 말리는 판이다. 특히 그리스 국립 극장 근처는 최악인데, 마약 중독자와 노숙자들이 서성이거나 널부러져 있으며 (그리스는 매춘이 합법이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는 직업 여성들도 늘어난다. 게다가 일대에는 수상하게 저렴한 숙소들이 있는데, 괜히 이유 없이 저렴한 게 아니니 추천하지 않는다.


파일:1280px-Attica_06-13_Athens_27_Zappeion.jpg* 자페이온 (Ζάππειον)파나티나이코 경기장과 함께 1896년 올림픽 준비를 위해 세워진 행사장 겸 궁전으로, 펜싱 경기장으로 쓰였다.

파일:_LKS7649-52b.jpg* 다프니 수도원 (Μονή Δαφνίου)아테네 서쪽 외곽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6세기 동로마 수도원으로 세워져 13-15세기 아테네 공국 시기 시토회가 쓰기도 했다. 내부에 11세기 성화가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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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74dafe2360623c369ba24bdb7e6c002-scenic views of the Saronic Gulf - Temple of Poseidon.jpg* 수니오 (Το Σούνιο)의 포세이돈 신전아테네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으로, 오모니아 인근의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정도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신전이 덩그러니 올라 있는 그림 같은 광경에다가 해질 무렵에 가면 정말로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다. 이곳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출항할 때 "자신이 살아서 돌아오거든 흰 돛을, 죽으면 검은 돛을 하고 오겠다." 라고 말하고 출발했는데,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귀환할 때 깜빡 잊고 돛을 바뀐다는 것을 잊어버렸다가 검은 돛을 본 그의 아버지, 혹은 부인이 이곳에서 투신해 죽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인근에 고대 아테네의 돈줄이었던 라브리오(Το Λαύριο) 은광이 있는데, 아직도 이곳에서 자원을 캐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생선요리가 유명하기 때문에 아테네인들이 자주 찾는다.

7. 교통

이 동네에서 구글 지도는 정말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 특히 시내버스 시간표는 업데이트가 전혀 되지 않아 온다고 한 버스가 맞춰서 오면 기적인 수준이다. 버스 정거장이나 지하철역에 설치된 전광판만 믿어야 한다.

7.1.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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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테네는 비교적 신도시이지만 그럼에도 19세기에 지어진 형태라 운전하기 굉장히 어려운 도시로 손꼽힌다. 이스탄불만큼은 아니지만 도로가 굉장히 비좁고, 일방통행로가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현지 주민들조차도 헷갈려한다. 게다가 그리스인 특유의 느긋함으로 인해 차가 막혀도 다들 무사태평하다.[31] 아테네는 전 세계에서 교통 체증 심하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사람들의 운전 매너는 로마서울에 비하면 정말 좋은 편이라고 한다. 도시의 중심 도로는 항구도시 피레아스(Πειραίας)에서 신티그마 광장(Το Σύνταγμα)까지 이어지는 도로로, 이곳에서 국방부(Η εθνικήαμυνα)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수니오, 코린토스 등의 이웃 도시로 연결되는 도로가 시작된다. 아마 공항으로든 열차로든 아테네에 도착하게 된다면 이 신티그마 광장이 여행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7.2. 도시철도

아테네 지하철이 있다. 아테네에는 지하철 노선이 3개 깔려 있으며, 4호선이 공사중이다. 이곳도 땅 파면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지하철 놓는 데 상당히 애로사항이 꽃핀다고 하며, 모나스티라키 역에 가보면 지하철 공사를 하다 발굴된 고대 시대의 하수관과 도로 유적을 유리판으로 둘러싸 보존해 놓았다.[32] 공사 중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만 모아놓은 작은 박물관도 있을 정도. 현재 지하철 1호선은 피레아스 역에서 아테네 도심부를 가로질러 키피시아 역까지 연결되며 지하철 3호선이 아테네 중심부와 베니젤로스 공항까지 이어져 있다.

피레아스나 바다와 접해 있는 지역으로 트램이 다닌다. 신티그마에서 출발하여 해안까지 가는 T6선, 피레아스에서 바다를 따라 글리파다까지 가는 T7선이 운행중이다.

7.3. 철도

그리스의 철도는 부실한 편이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수도인 아테네의 중앙역에 철로가 2개밖에 없다. 일반 열차를 이용하면 제2 도시인 테살로니키까지 4시간 반이 넘게 걸린다. 그리스의 기차는 가다가 지선이 나오면 일부 칸을 뚝 잘라서 역에 버려놓고 가는 식으로 운행되는데[33], 이로 인해 자리를 잘못 앉으면 엉뚱한 곳에서 내리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참고로 그리스 철도의 중심지는 아테네가 아니라 테살로니키이다.

7.4. 항만

서부의 피레아스 항은 굉장히 크고 분주하다. 섬이 많은 그리스의 특성 상 많은 그리스인들은 항공편보다는 페리를 많이 이용한다. 관광지로 유명한 크레타, 산토리니, 미코노스, 델로스, 로도스 등 에게 해의 여러 섬으로, 국제선으로는 이탈리아로 갈 수 있다.

항만이 매우 크기 때문에 페리를 이용할 때 출발하는 부두를 알고 오는 것이 좋다. 시계방향으로 E1 게이트부터 E10 게이트까지 있는데, 지하철역은 E6 게이트와 가장 가깝다. E1~E4 게이트는 매우 머니 출발하는 부두가 그쪽이라면 E6 게이트 근처에서 출발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하자. 주변을 잘 살피면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7.5. 공항

아테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국제공항이 있다. 대한민국 직항편이 없기 때문에, 폴란드 바르샤바, 독일 프랑크푸르트, 체코 프라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튀르키예 이스탄불, 카타르 도하, 중국 베이징을 경유 해야 아테네로 갈 수 있다. 취항하는 항공사는 에미레이트 항공, 에티하드 항공, 루프트한자, 터키항공, 카타르 항공, ITA 항공, 올림픽항공, 페가수스항공, 이집트 항공, 스위스 국제항공, 영국항공, 오스트리아 항공, 에어 프랑스, 부엘링, 이베리아 항공, 라이언에어, 이지젯, KLM, 스쿠트 항공, 중국국제항공 등이다.

8. 창작물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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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종종 관람 제한 및 통제가 이루어진다. 이럴 때에는 실망하지 말고 아크로폴리스 서북쪽 기슭의 아고라에 있는 헤파이스테이온, 즉 헤파이스토스 신전을 방문하면 좋다. 파르테논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더 잘 보존되어 있고 게다가 무료 관람이다. 밤에 가도 조명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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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그리스 최대 신전이던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역시 고대 그리스 로마 건축에 관심이 많다면 필수 코스다.

10.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현대 그리스어 Αθήνα [37]
라틴어 Athenae
영어 Athens
프랑스어 Athènes
독일어 Athen
터키어 Atina
오스만어 آتينا‎
아랍어 أثينا
슬로바키아어 Atény
러시아어 Афины [38]
에스페란토 Ateno

[A] 아테네 단독[B] 아테네, 피레우스, 키피시아, 글리파다 등 아티키주 내 58개 지방자치단체와 7개 지역 단위[A] [B] [A] [B] [7] 출처: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EU의 수도 브뤼셀까지》[8] 건국 신화에서는 아테나 여신의 이름을 따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신의 이름이 도시에서 온 것이다는 의견이 많다. 사실 인명에서 유래한 지명 상당수가 사실은 지명에서 인명이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로마의 의인화로 여겨지는 로물루스.[9] 2021년 8월 이탈리아 남부의 소도시 플로리디아가 48.8℃까지 올라가면서 현재는 기록이 깨졌다.[10] 사실 이 시대에는 아테네뿐 아니라 그리스 전체가 쇠락한 상태였다. 그리스 전체가 로마의 손에 들어가면서 겪게 된 사회 변화로 인해 인재들이 유출되었기에 고대 그리스는 이전과 같은 역량을 낼 수 없었다.[11] 지금도 일부 이용 중이다[12] 이때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고트족이 아테네를 점령하고 나서 아테네의 도서관을 약탈했는데, 도서관에 보관된 들이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판단한 고트족들이 들을 모조리 광장 한복판에 모아 놓고 불태워 없애버리려 했으나, 어느 고트족 족장이 "그리스인들이 을 읽고 있으면 군사 훈련을 할 시간이 안 날 테니 그들을 계속 나약하게 만들려면 을 없애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라고 동족들을 설득하여 아테네에 보관된 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13] 기존 아테네 공가는 나플리오 일대로 밀려났다[14] 야쿱 파샤와 티무르타쉬가 이끔[15] 모레아 총독 자가노스 파샤가 초청 후 통보하고 죽임[16] 프란체스코는 이를 '기적적인 샷'이라 평했다[17] 베네치아의 군대는 파르테논 신전에 화약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정군 대장 모로시니가 붙잡은 오스만군의 탈영병로부터 수비대가 파르테논 신전을 화약고로 쓰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스만군 포로는 베네치아의 군대가 서양인들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파르테논 신전을 공격 목표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곳을 화약고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고, 모로시니가 이 정보를 듣고 포병들에게 파르테논 신전을 겨냥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18] 출항 직전에 피레우스의 사자상들을 약탈해 베네치아 병기창 정문에 두었다[19] 파르테니오스 / 1766년 / 에프람 2세[20] 고정된 세금을 조정에 내고 나머지는 징세관이 가짐. 종신직.[21] 리바데이아 출신의 튀르크인[22] 50개 중 3개는 프랑스가 구매함[23] 하지만 그 후 신이 난 수비대가 오스만 군에 난사해대며 그는 한동안 아크로폴리스에 고립되었다[24]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전쟁으로 폐허가 된지라 철거하고 새로 지어야 할 건물들도 얼마 없었기 때문에 도시 계획을 짜는 게 쉬웠다고.[25] 주변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드리아노폴리스, 테살로니키 등 크고 중요한 도시가 산적해 있었기에 그당시에는 변방 느낌이 강했다.[26] 출처: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EU의 수도 브뤼셀까지》[27]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경우도 마찬가지.[28] 이후 실제로 역병이 돌았다[그러나] 소매치기도 종종 등장하고, 최악의 우범지대인 오모니아 쪽과 직결되어 있다.[30] 그래서 1호선이 항상 미어터진다.[31] 하루는 사람들이 출퇴근하는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통 체증이 엄청 심하게 일어나자 다들 뭣 때문에 차가 막히는지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저 앞에서 트럭 운전사가 일방통행로 한복판에다 차를 세워놓고 친구들과 주사위 놀이(그리스어로 '타블리'라고 하는)에 몰두해 교통 정체가 일어난 것이다.[32] 한국에도 수안역이 비슷한 이유로 같은 처리를 해놓았다.[33] 특히, 메테오라 수도원으로 유명한 칼람바카로 가는 기차의 경우.[34] 브라질 前 축구선수 히바우두올림피아코스 FC에서 뛰고 이적해 활약했던 팀이다.[35] 파나티나이코스와 라이벌 관계이다.[36] 이스탄불의 일부[37] Athína[38] Afí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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