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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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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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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권 인구 2,480,394명 (광역권)
인구 밀도 5,214명/km²
면적 188km² }}}}}}}}}
4K로 본 암스테르담

1. 개요2. 상세3. 행정4. 역사
4.1. 근세의 번영4.2. 쇠퇴와 근대화4.3. 근현대4.4. 현재
5. 인구6. 관광7. 교통8. 치안9. 스포츠10. 건물11. 경제12. 기타13. 대중매체에서14. 시장/시의회1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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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 수도이자 최대도시다.

2023년 기준으로 인구는 921,468명[2]이고 면적은 219km²다. 노르트홀란트 주에 속해 있다.[3] 왕궁과 정부 기관의 대부분은 헤이그(덴 하흐)에 위치해 있지만 네덜란드 헌법에서 규정된 네덜란드의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다.

2. 상세

1275년경 암스털강(Rivier de Amstel)에 둑을 쌓아 건설된 '암스텔레담(Aemstelredam)'에서 현재의 암스테르담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네덜란드어의 담(Dam)은 흔히 영어식인 으로 쓰이는 표현과 어원이 같다. 따라서 암스테르담은 '암스털강의 댐'이라는 뜻을 지닌다. 네덜란드어 발음으로는 '[ˌɑmstərˈdɑm](엄스트르덤)'에 가깝다. 암스텔 강은 고대 네덜란드어로 '물의 흐름'을 뜻하는 'Ams'에서 유래한다.

반원형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큰 운하로 둘러싸인 구시가지에는 대부분의 관광 명소가 밀집되어 있는데 이 구역을 Grachtengordel(운하 지구)이라고 하고 201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도보로 최대 20분이면 운하 지구의 끝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그냥 넘어가는 도시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곳곳에 관광 명소가 많이 있다.

17세기에 늪지를 운하 도시로 발전시키는 내용의 장기 계획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도시 확장은 당시로서는 규모가 가장 큰 도시 계획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40여 개의 운하를 연결하는 500여 개의 다리가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기에 ‘북부 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네덜란드 기념품 중에 종종 폭이 좁고 길쭉한 집 모양의 장식품들이 많은데, 암스테르담에 가보면 진짜 그런 집들이 많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너도 나도 부자가 되자 암스테르담 시 역시 세금을 열심히 거둬들였는데, 특이하게도 그 기준이 집 폭의 길이,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의 수, 창문 레이스 커튼 길이 등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예쁜 집들이 세금을 줄이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대마초매춘이 합법화된 국가의 수도답게 여러 곳에 그와 관련된 업소와 거리가 있다.

한편 암스테르담의 시 문장인 XXX를 저러한 도시 특징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중세부터 유래해 온 유서 깊은 문장이다. X자 십자가스코틀랜드의 깃발에도 쓰이는 성 안드레아 십자가이며, 붉은색과 검은색 세 개의 십자가 조합은 암스테르담 시의 문장에서 왔다. 이 문장은 페르세인 가의 십자가에서 왔는데 십자가가 9개이다. # '암스테르담'의 수어도 양손 검지로 3번씩 X자를 만드는 것이다.

3. 행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msterdamse_stadsdelen_2010.png

암스테르담은 위 그림과 같이 8개의 큰 행정구역(Deelgemeente, 데엘헤메엔테)으로 나눠져 있는데 그중 7개는 특별히 자치구역(Stadsdeel, 슈타츠데엘)이다. 각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명칭은 방위별로 정해서 매우 단순하다.

암스테르담 시 경계 동쪽에 위치한 베이스프(Weesp) 시가 지방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주민 투표를 통해 56.5%의 지지율로 암스테르담과의 통합을 결정했다. # 두 지역 간 행정구역 통합은 2022년 3월 24일 시행되었다.

4. 역사

파일:1280px-Amsterdam_(6578772447).jpg
1213년경 ~ 1306년에 걸쳐 세워진 아우더 케르크 (Oude Kerk / Old Chruh). 현존하는 암스테르담 최고 (最古)의 건물.

본래 일대는 암스텔 강 하구 습지에 위치한 작은 어촌이었다가 서기 1000년을 전후로 간척 사업이 개시되며 서서히 도시가 형성되었다.[4] 중세 초엽 암스텔 강 유역, 즉 암스텔란트 지역은 홀란트 백국에 속했다.[5] 12세기 무럽, 암스텔 강 하구에 제방 (댐)이 세워지며 암스테르담이란 지명이 생겼다. 간척이 진척된 된 암스테르담 (Aemstelredamme)은 1275년 처음 기록되었고, 홀란트 백작으로부터 관세 면제를 받은 덕에 상인들이 몰리는 무역 도시가 되었다. 1306년, 위트레흐트 주교로부터 도시 지위를 받은 암스테르담은 빠르게 홀란트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4세기 들어서는 한자동맹 도시들과의 교역이 활발했고, 홀란트 최대 무역 도시이자 곡창지대가 되었다.

1345년에 벌어진 "암스테르담 기적"으로 유입된 순례객들도 도시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15세기부터는 한자동맹을 거치지 않고 발트 해 연안과 직접 교류했다. 또한 암스테르담은 북해 청어 조업의 중심 항구 중 하나로 번영했다. 특히 1415년 선상 염장 기술이 개발되어 원양 항해가 보편화되었고, 이로써 항해 기술이 발달하였다. 조업 후 가공 및 수출 과정에서도 많은 인적, 물적 교류와 함께 다양한 직업의 노동자 간 협동이 필요했다. 따라서 암스테르담은 점차 초기 자본주의적 상업도시로 발전했고, '암스테르담은 청어 뼈로 세워졌다'는 말이 생겼다. 다만 1421년과 1452년 2차례에 걸쳐 대화재를 겪으며 도시는 위기를 맞았다. 후자의 경우 시가지의 3/4가 불탔고, 그후 카를 5세는 모든 집들을 석조로 짓도록 명하여 현재와 같은 시내 모습을 갖게 되었다.

4.1. 근세의 번영

파일:Map_of_Amsterdam_-_Amstelodami_Celeberrimi_Hollandiae_Emporii_Delineatio_Nova_(J.Blaeu,_1649).jpg
17세기 전반, 제1 순환 운하 완성 전의 시가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암스테르담에선 재세례파가 인기를 끌었고, 1534년 뮌스터 봉기 후 대대적인 탄압이 개시되었다. 암스테르담에서도 71명이 처형되고 다수가 추방되었다. 그후 1550년대까지 박해가 이어졌고, 이러한 종교 갈등 및 증세로 촉발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80년 전쟁)이 한창이던 1578년 암스테르담은 빌렘 1세 오라녜에게 복속했다. 다만 암스테르담에서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추방된 것과 개신교도에게만 공직이 허용된 것 외에는 종교적 관용이 유지되어 국교인 칼뱅파 외에도 가톨릭, 루터파, 재세례파 등이 공존하는 다종교 도시로 남았다. 종교 갈등기 네달란드에는 유럽 각지에서 망명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모여들었고, 특히 부유한 유대인들과 위그노들은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6]

이주민 중에서 유대인, 특히 부유했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환영을 받아 1603년에 신앙 활동 허가를 받았다. 따라서 시내에는 여러 시나고그가 세워졌고, 유대인들 사이에서 '서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와 함께 유라시아 각지에 거점이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 비단 거래를 독점하며 향신료와 보석 등 고가품을 취급했고, 지금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건물이 꽤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와 본래 같은 문화권인 플랑드르에서 유입된 인쇄업자들은 개방적 분위기 하에서 자유롭게 출판했고, 이로써 암스테르담은 유럽 자유 언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출신의 이주민들은 현지 사회에서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무역에 적극 종사하며 각자의 자본을 투자했다.

파일:1280px-Job_Adriaensz._Berckheyde_001.jpg
최초의 주식 거래소인 암스테르담 주식 거래소

그렇게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네덜란드는 원양 항해와 식민지 건설에 나섰는데, 암스테르담은 그 최대 항구로써 서유럽과 세계 각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북아메리카, 브라질, 서아프리카 등)를 연결하는 국제항이 되었다. 네덜란드 해군의 봉쇄를 당한 스페인령 플랑드르의 경쟁 도시 안트베르펜의 쇠퇴도 암스테르담의 부상에 중요한 요인이었다. 1602년,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암스테르담에서 설립되었고 주식도 거래됨으로써 무역 뿐만 아니라 금융에서도 유럽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 서인도 회사들의 최대 지분을 소유했고, 곧 엄청난 부를 거머줬다. 1609년에는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되었다. 당시의 왕정 국가들과 달리 네덜란드는 저금리를 유지했고, 이로써 투자가 활성화되었다.

완전한 독립 후인 1660년대의 인구는 약 20만에 이르러 암스테르담은 인구 역시 유럽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서반구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던 암스테르담에서 걷히는 세금은 당시 네덜란드 국가 재정의 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한편 이러한 부의 일부는 대서양 노예 무역에 의한 것이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매입하여 17세기 후반에 얻은 수리남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했고, 그렇게 얻은 설탕을 유럽 각지에 팔아 큰 수익을 올렸다. 1814년 영국의 요구로 중단될 때까지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노예선들의 종착지이자 삼각무역의 거점이었고, 암스테르담 내에서도 노예가 팔리기도 했다. 그리고 2021년, 암스테르담 시장이 2세기에 걸친 노예무역 가담에 대해 사과하였다.

파일:Berckheyde,_Gerrit_-_Dam_square_Amsterdam_-_Gemäldegalerie_Alte_Meister_(Dresden).jpg
17세기의 담 광장

17세기의 황금기 시절 암스테르담은 섭정들 (Regents)이라 불린 폐쇄적인 상인 과두정이 통치했는데, 그들은 도시 일상에 대한 통제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정 수준의 재산과 거주 기간을 채운 남성만이 해당 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었고, 이들은 상호 집안 간의 결혼을 통해 특권 혹은 재벌 가문들을 형성했다.[7] 동시에 그들은 여론을 얻기 위해 운하와 풍차 등의 인프라 구축과 자선 활동, 병원 및 교회 건설 등에 힘썼다. 산업에 있어서도 암스테르담은 풍차와 수력 등을 이용해 관개 및 제조업을 발전시키는 등 세계적으로 선도적인 도시였다. 인구에 있어서도 암스테르담은 수도도 아니면서 1700년 기준 서유럽에서 런던, 파리, 나폴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8]

무역 도시로써 인적 왕래가 잦았던 암스테르담은 흑사병 등의 역병 창궐이 잦았다. 그중 1663년 알제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전파된 역병은 1665년 런던에까지 퍼지는 등 1665년까지 도시에 큰 피해를 주었다. 1664년에만 도시 인구의 10% 이상인 2만 4천여명이 사망해 매장되었고, 희생자 중에는 램브란트의 동료 헨드릭 스토펠스 등이 있었다. 그해 5월, 암스테르담의 영국 대사는 지난 주에만 338명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민간에서는 새로 건립한 운하가 병의 원인이라 여겼고, 담배 연기가 역병 확산 억제에 효과가 있다 여겨져 수요가 폭증하기도 했다. 부유층은 도시를 빠져나가 피신했고, 시장들은 샐러드나 시금치 및 자두를 먹는 것이 건강에 나쁠 수도 있다는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나마 바다에 나간 선원들만이 병의 화마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4.2. 쇠퇴와 근대화

파일:1280px-Amsterdam_-_Dam_1900.jpg
1900년경의 담 광장 사진

17세기 말엽부터 네덜란드 해양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견제 하에 점차 쇠퇴했다. 이는 18세기 후반 들어 가속화되었고, 암스테르담의 경제 역시 후퇴했다. 1720년 25만에 달하던 인구도 1815년 20만 미만으로 줄었다. 그러던 1795년, 프랑스의 점령 후 세워진 바타비아 공화국 시기 설치된 8개의 주 (데파르테망) 중에서 암스테르담은 홀란트 주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타바아 공화국은 1806년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하는 홀란트 왕국이 되었는데, 2세기 가량 최대도시이기만 했던 암스테르담은 이때 최초로 기존의 수도이던 헤이그 대신 네덜란드의 정치적 중심이 되었다. 다만 1810년, 홀란트 왕국은 프랑스 제1제국에 병합되었고, 1815년에 세워진 네덜란드 연합 왕국은 다시 헤이그를 수도로 삼았다. 한편 19세기 중엽, 사무엘 사르파티 등이 프랑스 파리를 모델로 한 근대적 도시 구획을 설계했다.

19세기 후반, 암스테르담은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을 겪었다. 이때 라인 강북해로 직결되는 새 운하가 파여 나머지 유럽 지역들과 도시를 연결했고, 이로써 암스테르담은 경제적 부흥기를 맞았다. 1830년 20만이던 인구는 1870년 28만, 1900년 52만에 이르렀다. 한편 산업화와 함께 도시에는 많은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이로써 빈부격차가 급증하며 사회주의 사상이 유행했다. 시 당국은 폭력적으로 대응했고,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경찰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무력 다툼이 거의 매주 벌어졌다. 특히 1886년 장어 폭동[9] 시에는 경찰이 진압에 실패한 후 투입된 군대가 발포하여 26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1887년에는 오렌지주의자 (왕당파)들이 사회주의 주점을 습격, 파괴했다. 이때 경찰은 저항하던 사회주의자들만 체포하며 공분을 샀다.

사회주의자들은 감옥을 집처럼 드나들었고, 한 활동가는 경찰서장 살해 미수로 징역형을 치른 후 석방될 때에 월계수 화환을 두른 채 노동자들의 환대를 받으며 가두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암스테르담은 제2의 황금기가 불릴 만큼 새로운 박물관, 기차역, 공연장 등이 세워졌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또한 1871년, 프랑스를 누르며 새 열강으로 부상한 독일 제2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1880년 ~ 1920년에 걸쳐 암스테르담 주변 10-15km 지점에는 스텔링 판 암스테르담이라 불린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135km의 방어선에는 42개의 요새가 세워졌고, 유사시에 일대는 제방의 파괴로 배가 드나들지 못할 정도인 30cm 깊이로 수몰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일대의 건물들은 전시의 청야전술에 있어 불살라지기 쉽도록 목재로만 지어졌고, 스텔링 판 암스테르담은 비록 탱크와 비행기의 발명으로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4.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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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연합군을 맞이하는 주민들

1차 대전기 네덜란드는 중립을 지켰기에 암스테르담은 비록 파괴를 겪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은 식량 부족으로 고초를 겪었다. 굶주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군보급선과 창고를 약탈하자, 군대가 개입하여 발포했다. (감자 반란) 이로써 6명이 죽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1921년에는 대전기인 1916년 홍수 당시의 수해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북쪽의 소도시들이 자체 요구로 암스테르담 시에 병합되었다. 전간기에 암스테르담은 빠르게 회복하여 서쪽으로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1932년에는 아프슬라위트데이크 제방이 완공되어 암스테르담은 사상 처음으로 바다와 완전 분리되었다. 1940년, 나치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후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의 치소가 되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 게토는 없었지만 비공식 유대인 구역이 있었는데,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안네 프랑크 등 대거 수용소로 끌려가 죽었다. 네덜란드 전역에서 10만의 유대인이 희생되었고, 그중 6만이 암스테르담 출신이었다. 이때 네덜란드 공산당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며 2월 대파업을 벌였고, 30만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또한 여러 네덜란드 인들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집에 숨겨 주기도 했음에도, 네덜란드는 전체 유대인 인구의 3/4가 학살당하여 점령된 서유럽 국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전쟁 이전 현지 유대인 사업가 및 장인들의 주도로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거래처이던 암스테르담은 전후 소수의 유대인들만 귀환하며 그 명성을 잃었다. 1900년 52만에서 1940년 80만으로 급증했던 인구는 2차 대전을 거치며 감소했다.

2차 대전 말엽인 1944-45년의 '기근 겨울' 시기 나치 정권의 생필품 공급 차단으로 암스테르담 주민들은 식량과 연료 부족에 시달렸고, 1945년 5월에야 안정을 회복했다. 식량 위기가 심각해지자 한때 서방권에서 가장 부유했던 암스테르담 주민들은 개나 고양이까지 잡아서 순무 혹은 튤립 뿌리와 함께 끓여 먹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며 목숨을 연명했다. 동시에 겨울에 난방을 할 연료 부족해 가로수나 정원 든 시내의 나무들은 땔감으로 쓰이기 위해 모조리 뽑혔고, 그래도 부족하자 강제 이주 후 비어버린 유대인 구역 건물들의 목재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거의 버려진 유대인 구역은 1980년에야 재개발되어 활기를 되찾았다.[10] 이러한 비참한 상황 속에서 많은 시민들이 식량을 찾아 농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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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베아트릭스 여왕 대관식 폭동

1945년 5월 5일, 나치 패망 불과 3일 전에야 캐나다 군에 의해 암스테르담은 해방되었다. 전후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의 입법 수도로써[11] 재차 번영했다. 50년대 들어 많은 녹지와 넓은 주택들을 지닌 교외 구역들이 개발되었고, 70년대 들어서는 대대적인 도심 재개발 및 현대화가 추진되었다. 그 일환으로 유대 구역을 허물고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구도심 훼손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네우마케트 폭동) 1975년 3-4월, 역사적 건물 파괴 반대하는 시위대가 1천의 군경과 대치하며 충돌한 끝에 도심으로의 고가도로 및 지하철 일부만 완성될 수 있었다.

1977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한 이래로 40년 넘게 2호선이 개통하지 않았고, 도심의 거리도 일부만 확장되어 대부분 옛 골목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이는 관광업에는 매우 좋았고, 구도심 담 광장 일대는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60-70년대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도시 중 하나로써 대마초에도 관대했고, 많은 히피들이 자유를 찾아 방문했다. 다만 그들 중 아나키즘 단체들은 경찰과 종종 충돌했다.[12] 1980년에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당시 베아트릭스 여왕의 즉위식을 방해하려 시도하며 여론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해방 후 90만을 바라보던 인구는 70, 80년대에 도심공동화 현상으로 60만 미만으로 줄었다가 이민자들이 유입되며 2010년대에 다시 80만대를 회복했다.

70년대 들어 암스테르담에는 모로코, 수리남, 튀르키예, 인도네시아, 앤틸리스 제도 등지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들로 인해 인근 위성도시들이 발달했다. 또한 이 무렵 암스테르담은 기존의 산업 도시에서 서비스업 및 관광업 기반 도시로 탈바꿈했다. 1996년 기준 41% (비유럽계 28%)이던 이주민 출신 비율은 2000년 기준 45%로 늘었고, 2020년에는 56% (비유럽계 36%)[13]가 되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이렇듯 암스테르담의 국제성이 점차 강화되는 와중에 네덜란드는 2000년에 성매매 합법화, 2001년에 동성 결혼 합법화를 이루며 자유를 극대화하였다. 그 헌법상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현재까지도 관용적이고 다양성을 품은 도시로 유명하며,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4.4.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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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부인 센트룸 일대의 항공 사진

2010년, 암스테르담의 3대 중심 운하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한편 암스테르담의 관광객은 꾸준히 늘다가 2012년 천만을 넘긴 데에 이어 2015년 1700만을 돌파했다. 이로써 부동산이 폭증, 베네치아처럼 오버 투어리즘 문제가 대두했다.

2003년에 공사를 시작한 새 지하철은 2018년에야 완공되어 암스테르담 도심의 교통을 원활히 하였다.

2024년 3월, 옛 유대인 구역에 네덜란드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개관했다. 다만 이때 현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자행된 전쟁 범죄로 인해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를 받는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헤르초그가 개관식 연설을 하여 시민단체의 반대 시위가 있었으나, 경찰이 해산시키는 일이 있었다.

5. 인구

6.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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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에 등재된 17세기 암스테르담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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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변의 옛 주택들

국내에는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암스테르담은 로마 / 베네치아 / 파리 / 런던 / 빈 / 바르셀로나 등과 함께 유럽의 주요 관광 도시 중 하나이다. 2012년에 연관광객 천만을 돌파했고, 2015년에는 불과 3년만에 70%나 올라 1700만에 이르렀다. 다만 한계에 봉착했는지 2020년대에도 2천만을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이로써 베네치아처럼 원주민이 도심을 빠져나가는 오버투어리즘 현상을 겪고 있다. 또한 1977년 지하철이 처음 생길 때부터 주민들의 반발이 심하다 보니 2018년에야 지하철 신규 노선인 남북선이 개통하는 등, 구도심에 교통 인프라가 부족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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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주식 거래장. 17세기에 사용되던 첫 거래장 건물은 아니고, 1914년부터 쓰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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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광장의 레알 암스테르담 궁전. 본래 독립 후인 1648-65년에 세워진 시청사를 1808년 루이 보나파르트가 왕궁으로 개조한 후 1936년부터 네덜란드 왕실 소유의 3대 궁전 중 하나가 되었다. 21세기 초에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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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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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프랑크의 집. 온라인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하다.

암스테르담에는 민가나 생가를 개조하거나 개인이 차린 박물관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입장료가 대개 부담스러운 수준이라 안네의 집 말고는 인기가 없어 자발적으로 광고를 돌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하이네켄 공장을 개조한 체험 박물관은 온라인으로 예매하면 2024년 3월 기준으로 23유로. 또 다른 인기 박물관 중 하나인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은 22유로다. 네덜란드 전국 400여 개 박물관에 1년간 무제한으로 입장 가능한 뮤지엄카드(Museumkaart)라는 것도 있는데 이 카드로도 반 고흐 박물관 입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이네켄 체험 박물관에는 방문할 수 없다. 프랑스루브르 박물관이탈리아우피치 미술관 입장료가 예전에는 암스테르담의 미술관보다 싼 편이었으나, 코로나 이후 루브르 박물관 22유로, 우피치 미술관 25유로로 비슷한 가격이 되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도 유명한 관광지이고 이곳에 렘브란트의 걸작 야경을 비롯해서 베르메르의 명작들이 소장되어있다. 국립미술관에서 진행하는 기획전이 상당히 수준이 높은데, 2023년 진행했던 베르메르 기획전은 엄청난 인파를 몰고와 야간 개장과 추가 티켓 오픈 등 엄청난 흥행으로 관심을 모았고, 그 이후로도 수준 높은 기획전이 계속 진행중이다.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칭송받는 반 고흐.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그림을 보고 나면 끊임없이 고뇌하면서 고독과 싸운 그의 삶에 감동하게 되고, 그의 그림을 사랑하게 된다. 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의 아들은 1960년에 반 고흐 재단을 설립해, 소장하고 있던 작품 800여 점을 반 고흐 미술관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네덜란드 정부에 영구적으로 대여했다. 1973년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연간 150만 명이 찾는 곳으로 항상 붐비며, 예약없이 당일에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예약 취소표가 풀리는 경우가 많으니 확인할 것. 반 고흐 미술관 또한 국립박물관 처럼 지속적으로 전세계의 반 고흐 작품을 빌려와서 주제 전시를 하는 주목도 높은 기획전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므로 반드시 확인할 것. 그리고 국립박물관, 반 고흐 미술관과 함께 삼각편대를 이루는 시립미술관에도 국립박물관고 반 고흐 미술관만큼의 주목도는 아니지만 반 고흐, 몬드리안을 비롯한 명작들이 꽤 소장되어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요리를 파는 곳들은 어떤 음식을 찾느냐에 따라 접근성이 달라진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네덜란드 스타일 감자튀김 가게, 청어 스톨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고 비터발렌, 크로켓으로 대표되는 튀김요리들은 Eethuis라고 써진 곳에서 취급하는 경우가 많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인 Stampot을 취급하는 가게들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21세기에 접어들며 각 나라의 요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역의 요리기법, 재료를 사용한 컨템퍼러리 또는 이노베이트 퀴진이라 불리는 음식을 선보이는 곳들이 전세계적으로 늘어가고 있는데, 암스테르담도 그 예외는 아니라서 많은 레스토랑들이 네덜란드 재료와 음식을 재해석한 파인 다이닝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암스테르담의 파인 다이닝씬은 이런 경향을 반영한 레스토랑이 주도하고 있으며, 암스테르담 시내 20곳, 근교 포함 32곳의 레스토랑들이 미쉘린 가이드로부터 2024년에 별을 받았고, 특정한 나라의 음식보다는 주로 모던, 컨템퍼러리, 이노베이트 퀴진을 적극적으로 선보이는 곳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쉐린 가이드에 등재된 스타 레스토랑 중 그린스타를 받은 레스토랑들은 지역 또는 자체적으로 생산된 재료를 사용하여 네덜란드 요리를 해석한 음식을 선보이는 곳들이 많으며, 그린 스타를 받지 않았더라도 네덜란드 적인 요소와 재료를 최대한 반영하려고 한 경향성이 돋보이는 곳들이 많다. 미쉘린 가이드로부터 별을 받은 레스토랑들도 암스테르담 기준으로는 타 유럽 도시에 비해 가격대가 나쁘지 않은 편으로, 주류 제외 50유로에서 100유로 대에 점심 또는 저녁 코스 메뉴를 먹을 수 있는 곳들이 많으니 네덜란드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면 참조할 것.

한편으로 암스테르담의 음식을 상징하는 것들은 이민자들의 음식인데, 원래도 외국인들이 많은 도시였지만 브렉시트 이후 EU 역내에서 폭증하는 외국인과 이민자들로 많은 음식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과거에는 인도네시아, 중국, 수리남 음식점 같은, 네덜란드의 식민 역사와 관련된 이민자들의 레스토랑이 많았다면, 현재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곳들은 유럽의 음식대국 이탈리아 음식점들로, 시칠리아, 풀리아, 리구리아 등 각 이탈리아 지방의 다른 정체성을 내걸고 영업을 하고 있다. 독일 못지 않은 수준의 터키와 중동 음식점 들도 찾아볼 수 있다. 담 광장 인근에는 유난히 아르헨티나식 스테이크 가게가 많이 있는 편인데 돈세탁 루머가 도는 등 (...) 로컬들에게 크게 인기는 없으며, Nieuwmarkt 인근의 차이나타운에 각종 중국 요리를 비롯한 태국 요리점들이 성업 중이며, 중식의 경우 과거 남방계가 많았으나, 훠궈, 동북지방 음식, 란저우 라미엔 등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다만 암스테르담에 외국 음식점이 일견 많아 보이나, 런던, 파리, 마드리드, 밀라노 등 수백만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는 다른 유럽 대도시와 뉴욕, 로스앤젤레스, 싱가포르, 홍콩, 서울, 도쿄 등의 거대 도시에 비하면 다양성과 질적 향상을 감당해낼 절대적 인구 자체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나라의 음식은 해당 음식을 취급하는 곳이 시내 전체에 1~2곳이 있는 정도 수준으로 떨어지며, 그러한 곳들이 맛있다는 보장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다. 단적인 예로, 암스테르담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은 다른 도시에서는 많이 보이는 멕시코 요리, 베트남 요리점이 손에 꼽을 정도이며, 케이크, 도넛, 아시아계 디저트 가게 등 타 대도시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들이 생각보다 적다. 그리고 많은 음식점들이 또한 급등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서 적당한 수준의 음식을 내는 곳들이 상당하며, 이런 곳들의 개업과 폐업도 빈번하다. 음식의 유행의 경우에도, 위의 대도시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음식들이 몇 박자 뒤에 들어오는 경우도 많다. 한국 요리의 경우 한인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Zuid에 위치하고 있고, 시내 중심가의 한식 레스토랑 - Miss Korea, Seoul Sista, Kim's So등 많은 곳들이 중국인들이 운영하며 메뉴의 맞춤법부터 문제가 있고, 많은 한국 음식들을 '한국 냉면'과 같이 한국 음식에 한국을 붙이는 어색한 표현과 그보다 더 어색한 맛으로 내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세계 최대의 EDM 축제 중 하나인 암스테르담 뮤직 페스티벌(AMF)이 열리는 곳이며, 암스테르담 댄스 이벤트 Amsterdam Dance Event 또한 주목도가 높다. EDM 본진국답게 축제 규모가 상당하다. 암스테르담의 다른 대표적인 축제로는 해마다 네덜란드 국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킹스데이를 비롯해, 성소수자들의 행진이 가장 큰 규모로 도시가 시끌벅적해지는 때이다. 크리스마스의 경우 크리스마스 마켓이 발달해 있는 이웃국가 독일이나 프랑스 북부와는 달리 크리스마스 마켓 자체가 옆 도시 하를럼에서 딱 1주 주말 개최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암스테르담 자체에서는 진행되지 않으며, 가까운 런던과 비교해 봤을 때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이런 것들이 매우 소박하고 검소한 수준이라, 화려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6.1.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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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라이 컨벤션센터. 고양시에 있는 킨텍스보다 약간 크다. 그리고 킨텍스처럼 네덜란드의 각종 전시회박람회 등을 대부분 이곳에서 개최한다.

7. 교통

항공편에 대해서는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문서를 참고하자. 시내에서는 운하를 통한 교통이 전통적으로 발달했다.

7.1.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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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의 대중교통은 물가가 비싼 서유럽에서도 꽤 무시무시한 수준의 요금을 자랑한다. 트램, 전철(NS 계열 제외), 버스 환승이 가능한 GVB 1회용 티켓(태그하는 시간 기준 1시간 유효)이 무려 3.40유로[14]나 한다. 다만 1회용 티켓이 아닌 거주자용 교통카드를 이용할 시에는 거리에 비례한 다른 요금이 적용되며, 다양한 할인 패키지가 있다. 암스테르담의 관광지들은 대부분 좁은 곳에 몰려있고 크게 멀지 않기 때문에 1일권을 사는 것보다 갈 곳을 미리 정한 후 어떻게 돌아다닐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 낫다. 애초에 역 간격이 짧은데다가 대기시간을 감안하면 걸어서 가는 경우와 시간이 동일한 경우가 많은 편이다.

표 검사는 지하철의 경우 한국처럼 탑승구에서 찍는 방식이며, 트램과 버스의 자발적으로 찍는 방식이지만 감시가 매우 철저한 편이니 잠입 따위는 생각도 못 하는데다, 트램은 기관사와 함께 중간 차량에 검표원이 추가로 탑승하기 때문에[15] 더 철저하다. 그리고 NS 계열은 훨씬 더 비싸다. 숙박 또한 비싼 편이기는 한데, 최근 워낙 다른 유럽 대도시의 물가가 치솟아 있는 상태라 비슷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암스테르담 자체에 호텔, 호스텔, 에어비앤비 등 다양한 옵션이 있고, 위치에 따라 가격이 다른 경우가 많아, 중심가의 비용이 감당이 안 될경우 남쪽의 숙소를 찾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암스테르담 이외에 헤이그, 로테르담 등의 도시를, 또는 넓게는 안트베르펜이나 브뤼셀까지도 숙소 위치를 넓혀볼 수 있기는 한데, 미술관과 다른 주요 관광지를 볼 예정이라면 교통비와 숙박비를 합친 경우 비슷한 경우가 많으니 잘 찾아보는 것이 좋다.

7.1.1. 국유철도

네덜란드 국유철도의 총본산인 암스테르담 중앙역이 있다. 로테르담, 헤이그 외에도 벨기에 브뤼셀,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쾰른, 덴마크 코펜하겐, 폴란드 그단스크, 바르샤바, 체코 프라하, 심지어는 스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 밀라노 방면으로 가는 기차표를 팔고 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바로 표를 뽑아주기는 하지만, 덴마크와 그단스크 방면은 독일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 코레일KTX 환승을 생각하면 된다.

과거 네덜란드 국철의 주간선 라인을 통해,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의 전진 기지로 네덜란드 침공(1940년 5월 10일)을 했던 흑역사가 있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철도 라인은 직결운행 정도가 아니라 그냥 한 노선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정말 한순간에 나치 독일한테 침공당해서 네덜란드가 멸망했다. 기차 라인 그대로 쳐들어오는데 어떻게 막을 것인가. 암스테르담이 독일한테 함락된 날짜는 1940년 5월 13일.

7.1.2. 도시철도노면전차

도시철도로는 암스테르담 메트로 노선과 노면전차 노선이 있다.

메트로 노선은 5개 계통이 운행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개통한 것은 암스테르담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52계통으로, 암스테르담 도심을 지나는 노선이다. 나머지 노선들은 미묘하게 도심에서 약간 바깥쪽을 지나도록 구성되어 있다. 노면 전차 노선은 메트로 노선이 닿지 못하는 암스테르담 도심 내의 곳곳을 이어주는 수단이다. 암스테르담 트램은 1875년 개통되어 트램 노선들 중에서도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으며 그에 걸맞게 규모도 상당하다.

2014년 발표된 대중교통 투자 계획(Investeringsagenda OV vastgesteld)에서는 Parnassusweg, Haarlemmermeerstraat의 트램 신설 계획이 발표되었다. 반면 메트로는 도심을 처음으로 제대로 관통하는 메트로 노선이 공사비가 모자라 동결-시공을 반복한 통에 개통만 더 늦어졌을 정도이며, 연장 계획이 있을 뿐 구상 단계를 벗어난 추가 노선 계획은 없다.

암스테르담의 지하철 건설이 지지부진한 것은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의 지반이 이탄과 점토로 이루어진 네덜란드의 지형적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구시가지의 경우 목재 파일을 박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구조라 지하수에 손을 잘못 대면 지하수 수위가 낮아져서 파일이 썩어 건물이 무너지고 이탄이 산화하면서 지반이 가라앉고 이와 동시에 온실가스를 배출하기 때문에 지하철과 같은 깊은 심도의 구조물을 건설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다.

7.2.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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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5년

쇼클란트와 그 주변 지역
Schokland en omgeving
1996년

네덜란드 운하 방어선*
De Hollandse Waterlinies
1997년

킨더데이크 엘샤우트 풍차망
Molens van Kinderdijk-Elshout
1997년

퀴라소의 빌렘스타트 역사 지구, 도심과 항구
De historische binnenstad van Willemstad op Curaçao
1998년

D.F. 보우다 증기기관 양수장
Ir. D.F. Woudagemaal
1999년

베임스터르 간척지
Droogmakerij De Beemster
2000년

리트펠트 슈뢰더 하위스
Rietveld Schröderhuis
2010년

싱겔 운하 내 암스테르담의
17세기 원형 운하 지역

Grachtengordel van Amsterdam
2014년

판넬레 공장
Van Nellefabriek
2021년

자선 정착촌
Koloniën van Weldadigheid
2021년

로마 제국 국경
: 저지 독일 경계
Grenzen van het Romeinse Rijk
- Neder-Germaanse Limes
자연유산
2009년

바덴 해
Waddenzee
* : 본래 정식 명칭은 『암스테르담 방어선(Defence Line of Amsterdam)』이었으나, 2021년에 유산의 경계가 상당히 확장되면서 유산 명칭이 『Dutch Water Defence Lines』로 변경되었다. 한국어 공식명칭에는 반영되지 않은 상태이나 영어 ・ 네덜란드어 공식 명칭을 따라 현재 명칭을 번역하여 적용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싱겔 운하 내 암스테르담의 17세기 원형 운하 지역
네덜란드어 Zeventiende-eeuwse grachtengordel van Amsterdam binnen de Singelgracht
영어 Seventeenth-Century Canal Ring Area of Amsterdam inside the Singelgracht
프랑스어 Zone des canaux concentriques du 17e siècle à l'intérieur du Singelgracht à Amsterdam
국가·위치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암스테르담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349
등재연도 2010년
등재기준 (ⅰ)[16], (ⅱ)[17], (ⅳ)[18] }}}


▲ 암스테르담의 비공식 시가, 'Aan de Amsterdamse grachten'(암스테르담 운하에서)

'운하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암스테르담의 운하는 그 자체만으로 암스테르담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운하 중심 구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유네스코 등재 구역 지도 pdf

암스테르담은 크게 운하 내부와 외부로 나눌 수 있는데 흔히 생각하는 암스테르담의 이미지는 내부에 밀집되어 있다. 중앙역과 중앙 도로를 중심으로 서편은 사무 지구라 깨끗해도 트램으로 이동하기 불편하고 동편은 대체로 낡은 편이라 굳이 벗어난다면 남쪽이 무난하다. 북쪽의 경우는 배를 타야 하나 페리가 자주 있고 무료로 탈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암스테르담 역 앞에 내려서 다리를 건너면 다수의 운하 관광선 업체들이 영업을 하고 있다. 시간과 가격이 다른 프로그램이 다양해서 짧은 것은 약 1시간 만에 시내를 일주하기도 한다. 시간이 없을 경우 역 앞에서 운하선을 타고 시내를 관광한 뒤 다시 역으로 돌아와 떠나는 것도 가능하다.

운하의 모습은 아름다워도 운하 물은 더럽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흡연에 꽤나 관대한 편이라 흡연을 하고 담배 꽁초를 운하 안에다 던져 넣는 일이 흔하다. 운하 가에 앉아서 운하에다 담뱃재 털어대는 것도 자주 볼 수 있으며, 음식물쓰레기는 물론, 구토나 운하에 볼일을 보는 경우도 많다. 얼마나 더럽냐면 이 곳에서 수영을 하거나 잠깐 빠지기만 했는데, 세균으로 인해 즉시 구토증세를 보이며 장염으로 며칠을 고생했다는 사례가 많을 정도이다. 이렇듯 시내 중심부는 좀 지저분하지만 외부나 암스텔 강으로 이어진 수로는 수질이 그나마 좋아 여름에 수영하는 사람도 많다.

7.3. 도로

강력한 교통수요관리 정책을 적용하여 도심지의 자가용 운행을 억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암스테르담은 다수의 교통 부문 지속 가능성 지표에서 코펜하겐과 함께 항상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며, 런던, 서울 등 다수의 도시에서 암스테르담의 지속 가능 개발과 교통수요관리 기법을 벤치마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자가용에 과도하게 배분된 도로 공간을 보행자와 자전거, 대중교통에 배분하고, 대부분의 시내 도로에서 제한 속도를 30km/h 수준으로 낮추고, 신호 체계를 자전거와 보행자 중심으로 정비하고, 의도적으로 시내 도로를 멀리 우회하는 일방통행로로 구성한 뒤 자전거에만 양방향 통행을 보장하여[19] A에서 B까지 자전거와 보행자는 직선으로, 자가용은 복잡한 일방통행로를 거쳐가도록 하는 등의 방식으로 단순히 자전거 이용을 권장하는 소극적 접근을 넘어 적극적으로 대중교통과 자전거의 시간적 비교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렌터카로 여행하는 경우, 암스테르담은 도심지의 주차장을 대폭 축소하여 외곽의 대중교통 역 주변에 위치한 Park&Ride 시설로 유도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으므로 외곽의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한 뒤 자전거를 빌리거나 대중교통 일일권을 구매해 시내로 접근하는 것이 권장된다. 암스테르담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유럽 대도시에서는 무척 강력한 도심 자가용 진입 억제 정책을 펼치고 있으므로 시내에 자가용을 끌고 들어오려면 상당한 시간과 금전적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7.4. 자전거 천국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로도 유명하다. 자전거 이용을 위한 인프라가 잘 마련되어 있고 주민들의 자전거 이용률 또한 매우 높다. 거리 신호등 역시 자전거 전용 신호등이 있을 정도다. 다만 일부 운하 구간은 자전거 도로와 인도의 구분이 애매하다. 돌로 만든 도로인데 길 자체가 좁고 구분이 잘 되어 있지 않아 가끔 잘 모르는 관광객들이 인도인 줄 알고 걸었는데 자전거 경적 소리 듣고 멋쩍게 비키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의 이런 훌륭한 자전거 인프라를 세계 곳곳에서 벤치마킹해가고 있는데 유명한 성공 사례로는 일본센다이시가 있다.

서울에서도 2020년부터 비슷한 자전거 인프라를 구축한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의 자전거 인프라를 벤치마킹했는지 불명이지만, 내용으로 미뤄보아 네덜란드의 인프라와 매우 흡사하다.

관광객 전용 자전거 렌탈샵이 있다. 3-4유로의 저렴한 가격으로 자전거를 대여하면 웬만한 암스테르담 도시의 명소(중앙역, 하이네켄 박물관, 고흐 박물관, 안네 프랑크 생가 등)는 넉넉잡아 30분 내 거리로 둘러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이곳의 자전거들은 대부분 앞에 우유 상자와 같은 네모난 박스를 자전거 바구니 용도로 달고 다닌다. 가끔 운하 청소를 위해 바지선이 운하 바닥을 파고는 하는데 가장 많이 나오는 쓰레기는 역시 자전거다. 자전거를 타기 좋은 도시라는 말은 반대로 걸어다니는 여행자들에게는 차보다도 자전거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암스테르담의 모든 교통 수단(심지어 트램까지도)은 보행자를 우선으로 지켜주지만 자전거만은 예외다. 자전거 길에 걷는 사람이 있고 좀 불안하면 여지없이 벨을 울린다. 자전거가 피해가거나 멈추는 법은 거의 없기 때문에 알아서 잘 피해야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네덜란드인과 자전거를 타고 있지 않은 네덜란드인으로 나뉠 정도로, 자전거를 타국가에 비해 거칠게 타는 편이고, 교통신호, 법규 위반이 빈번하며, 보행자에 대한 배려는 크게 하지 않는 편이라 이 부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방해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거칠게 욕설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고, 자전거 충돌 및 추락 사고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편이라 조심할 것. 자전거를 평소에 안 타다가 암스테르담에서 자전거를 탈 경우, 다른 자전거의 속력과, 수신호 체계, 출퇴근 시간의 정체 등과 걸려 매우 고생할 수 있으니 잘 관찰한 후 타는 것을 권장한다. 현지인들에게 암스테르담의 치안에 관해서 물어본다면 대부분 "자전거에 치이는 것 빼고는 안전한 편이다"라는 답을 들을 정도다.

8. 치안

일단 도시 자체의 전반적은 치안 수준은 유럽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마약, 매춘의 이미지가 있는 나라지만 공권력 체계가 잘 돌아가고 좁고 복닥거리는 도시 구조에서도 타인과의 간격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어 사람들과의 충돌이 벌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다만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가 있는 Bijlmer Arena 부근은 암스테르담에서 손꼽히게 치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지역이므로 조심할 것.

마약매춘으로 이름난 네덜란드의 수도답게 중앙역 근처에는 수많은 홍등가들이 밀집해 있다.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CCTV를 잘 설치하지 않는 네덜란드지만 이곳만큼은 런던 못지않게 CCTV가 많고 경찰도 수시로 순찰을 돌고 있다. 또한 커피숍(Coffeeshop)이 곳곳에 있는데 대마초를 위시한 소프트 드러그를 합법적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암스테르담 역에 처음으로 내리면 맡을 수 있는 뭔가 알싸하면서도 불쾌한 냄새의 정체가 바로 커피숍의 대마초다. 물론 커피숍에서도 간단한 음료와 커피를 팔기는 하지만 카페(Cafe)나 커피 하우스(Koffiehuis)는 아니다. 2011년부터 거주증을 소지하지 않고 커피숍에 등록되지 않은 외국인이 마약을 하다 적발되면 해당국의 현행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한 적도 있었으나 외국인에게 판매를 금지한 것에 대한 저항이 거세서 폐지되었다. 심지어 대마가 함유된 사탕, 초콜릿, 에너지 드링크, 치즈 등 여러 가지 베리에이션을 내놓고 있다. 이 중 가장 압도적인 것은 대마 함유 바디소프.

참고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여행자가 네덜란드에서 마약을 하고 귀국하거나 대마초 관련 상품을 사서 귀국시 속인주의에 의해 처벌받으니 유의할 것. 적발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져서 네덜란드 한국 대사관에서도 적극 당부하는 내용이다. 최근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한국으로 짐을 수속할 때 대마 관련 물품이 없는지 물어본다. 공항에서 마약 사범으로 적발된 사례 중 절반 가까이 네덜란드 같은 대마 합법국에서 이러한 물품을 들여오다 걸린 것이다. 짐 속에 꼭꼭 숨기거나 현지에서 하고 귀국했어도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는 것이 경찰견이 마약의 냄새를 잘 맡기 때문이다. 일단 대한항공이나 KLM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입국시 수하물 수취대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찰견을 여러마리를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만약 적발 시 단순히 압수나 훈방에서만 그치는게 아니라 무조건 그 자리에서 현행범 체포이다. 입국 시 육류같은 반입 금지 물품은 압수만 하고 봐주는 경우가 많은데 마약은 그딴거 없이 엄격하게 다룬다. 다만 대놓고 대마를 가져온게 아니라 대마맛 사탕이나 스낵같은 경우는 운이 좋으면 벌금형에서 끝나는 경우가 있으나 결국엔 마약사법으로 전과가 영구히 남는다.

지금은 대마초에 대한 규제도 점점 거세지고 홍등가 자리도 2009년부터 점차 패션의 거리로 바꾸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관광객이 많아지자 네덜란드 정부는 홍등가 가이드 투어를 2020년 1월 1일부터 금지한다고 밝혔다.

홍등가의 경우 재개발을 하고 성산업을 위한 섹스 빌딩을 지어 그 곳으로 이전시킨다는 계획을 잡아놓고 있으나 님비로 인해 부지 선정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러한 성 산업이나 도박 산업, 마약 산업은 네덜란드 조폭인 페노제들이 꽉 쥐고 있다.

9. 스포츠

프로 축구 리그 에레디비시의 최강팀 AFC 아약스의 연고지이다. 아약스의 홈 구장인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구 암스테르담 아레나)는 도시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유럽 축구 연맹이 선정한 세계 5성급 축구장에도 포함된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구장이다.

프로 야구 리그 홍크발 호프드클라서의 소속팀인 암스테르담 파이어리츠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10.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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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에 있는 17세기경에 지어진 옛 건물들은 모두 창문이 3개고 5층밖에 되지 않는다. 당시 상업이 발달한 네덜란드에서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경관이 좋은 운하 주변에 집을 짓자 규제하기 위해 폭 8m 이상, 5층 초과, 창이 3개보다 많은 건물에 대해서는 미칠 듯한 세금을 때려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17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기 때문에 물론 엘리베이터는 없다. 따라서 위층에 짐을 올리기 위해서는 도르래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전통 건물들은 최상층에 도르래 고리가 돌출되어 있다. 꼭대기 층의 다락방 창문을 통해 줄을 걸어서 높은 층에 짐을 옮길 때 쓰는 것이다. 그렇게 끌어올린 짐은 창문으로 들여 놓는다. 또한 이 때문에 꼭대기로 갈수록 집이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설도 있다. 간혹 오래된 건물이라도 개조해서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놓은 경우가 있다. 암스테르담 운하 지구와 그 주변에 있는 호스텔에 '암스테르담에 쥐가 많으니 소지품 관리에 각별히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이 있다.

공공 임대 주택이 60%가 넘어서 저렴한 가격에 누구나 들어가 살 수 있다. 그래서 집 없이 사는 노숙자가 드문 편이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집에서 독립하려는 자녀들에게는 독립 자금이 지원된다. 다만 한 번 들어가면 이사를 잘 안 해서 순번 대기줄이 좀 긴 편이다. 다만 브렉시트 이후로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암스테르담으로 이민인구가 밀려들며 정부가 월세 인상 가이드라인을 매년 발표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월세가 오르고 있다.

특이한 볼거리 중 하나로는 수상 가옥이 많다는 거다. 운하 위에 배를 띄워 놓고 집처럼 사는데, 꽤 볼 만하다. 초기에는 부동산 가격이 비싸서 집을 마련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20] 최근에는 부자들의 취미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기도 하다. 기원이 기원이다 보니 네덜란드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단속하지는 않지만 현재 숫자인 1만 2천 개 정도에서 더 늘어나지 않도록 규제하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정책을 완전히 전환해서 수상 주택의 규제를 전면 폐지하고 수상 가옥용 부지를 판매하기까지 하고 있다. 따라서 수상 가옥이 늘어나는 추세고 이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11. 경제

파일:attachment/암스테르담/Example.jpg

▲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조사한 암스테르담-로테르담 대도시권의 경제 규모. GDP(국내총생산)는 3,223억 달러로 총 23위를 차지했다. 이 도시권을 흔히 란트스타트 지역이라고 부른다.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덴 하흐(헤이그), 위트레흐트 지역 등이 포함된다.

12. 기타

암스테르담의 역사를 3D로 표현한 영상
1922년의 암스테르담의 모습

13. 대중매체에서

13.1. 만화 및 애니메이션

13.1.1. 둘리의 배낭여행

작중에서는 영국 런던 대신 헤이그와 섞여 근위병 교대식이 개최되고, 둘리 일행이 랑콩 공주와 자전거를 타는 등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그려졌다.

13.2. 영화

13.3. 나쁜 녀석들 2

오프닝에서 엑스터시 마약 제조 공장에서 엑스터시 제조 씬으로 나온다.

13.4. 게임

13.4.1. 도미네이션즈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암스테르담(도미네이션즈)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3.5. 소설

13.5.1.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에서 주인공들이 여행하러 가는 지역이기도 하다.

14. 시장/시의회

시장은 녹색좌파당 소속의 펨커 할세마이다.

시의회
연립 여당
노동당 9석
녹색좌파당 8석
민주66 7석

야당
자유민주인민당 5석
동물을 위한 당 3석
볼트 네덜란드 2석
사회당 2석
JA21 2석
덴크 2석
기독교연합당 1석
민주주의포럼 1석
무소속 3석

15. 관련 문서


[1] 리본에 쓰인 문구는 왼쪽부터 용감함, 목적성, 자비심[2] 대한민국성남시 보다 약간 많다.[3] 노르트홀란트 주의 주도는 암스테르담이 아니고 하를럼이다.[4] 중세 전까지는 습지라서 임시 거주지만 형성되었다[5] 다만 위트레흐트 주교 산하 판 암스텔 가문이 홀란트 백작에 맞서기도 했다[6] 다만 이는 상당히 낭만적 서술이고, 부유한 외국 이민자는 받으면서 가난한 자국민의 유입은 환영하지 않았다. 부유한 세파르딤과 달리 아슈케나지 유대인처럼 가난한 외국 이민자들은 다른 곳으로 갈 것을 요구받기도 했다.[7] 따라서 현지 네덜란드인 외에도 플랑드르, 독일, 프랑스, 스코틀랜드, 스웨덴 등 출신이 다양했다[8] 세 도시들은 각각 잉글랜드, 프랑스, 나폴리 왕국의 수도였다.[9] 시위대가 금지된 장어 당기기 게임을 구경했다는 것에서 명명되었다[10] 이때 오페라 하우스, 시청, 스토페라 단지가 세워졌다[11] 왕실은 여전히 왕당파가 많은 헤이그에 거주[12] 좌파 측에 의하면 당시 네덜란드 경찰은 과거 나치 부역자 출신들이 주도했다고.[13] 비유럽계 중 모로코 9 수리남 7 터키 5 인도네시아 3 카리브 1.5% 순이다[14] 2024년 2월 기준으로 다른 지역은 브뤼셀 2.10유로(90분), 룩셈부르크는 완전 무료, 파리 1회권(90분)은 2.50유로, 밀라노 1회권(90분) 2.20유로, 로마(100분)는 2.20유로, 리옹(2시간)이 1.90유로이다. 1일권은 9유로니 자주 왕복하는 코스로 다닐 경우 1일권이 훨씬 경제적이다.[15] 아예 발권기와 방송장비를 탑재한 검표원 전용 탑승칸이 작은 매표소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문제가 있을 때는 여기 탄 분에게 문의하자.[16]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17]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18]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19] 네덜란드와 전역의 일방통행로 진입 금지 표지판 아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전거 마크 + Uitgezonderd 표시가 이것이다. 자전거에 일방통행로상의 역주행을 보장하는 것.[20] 네덜란드 역시 대표적인 인구 조밀 국가다. 암스테르담은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곳인데 집을 못 구한 사람들이 임시 방편으로 낸 생각이 퇴역하는 배를 사들여서 내부를 집으로 고치고 전기, 수도, 가스를 끌어들여 집으로 쓰는 것이다. 하지만 집은 부동산이지만 배는 동산이기 때문에 불법인데 하도 주택 문제가 심각해서 눈 감아준 것이다. 옛날에는 네덜란드 법의 허점을 악용해 집을 훔치는 크라커라는 부류들도 있었다.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한 집에 24시간 이상 머무른 사람을 주인은 내쫓을 수 없다.'라는 것인데 이 법을 악용해 빈 집(네덜란드에도 집을 2~3채씩 가지고 있으면서 비싼 월세를 두둑이 받아내려는 부자들이 많다)에 들어가 24시간 동안 개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돈이야 냈든 안 냈든 일단 그 집의 세입자가 되는 것인데 쫓아내려면 소송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민사 소송이라는 것이 빨리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고 1년 정도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3심까지 재판이 가능하니 3~4년 동안은 그 집에 눌러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결국 법이 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