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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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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4년 네덜란드의 가톨릭 라디오 방송(KRO)이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핌 포르타윈 빌럼 1세 판 오라녀 빌럼 드레이스 안토니 판레이우엔훅 에라스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요한 크루이프 미힐 더라위터르 안네 프랑크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레인 빈센트 반 고흐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알레타 야콥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아니 M. G. 슈미트 율리아나 여왕 요한 뤼돌프 토르베커
16위17위18위19위20위
알리다 보스하르트 안톤 필립스 프레디 하이네컨 하니 스하프트 빌헬미나 여왕
21위22위23위24위25위
바뤼흐 스피노자 톤 헤르만스 클라우스 폰암스베르크 요한 판올덴바르네벌트 마르코 반 바스텐
26위27위28위29위30위
핏 피터르손 헤인 요프 던아윌 얀 레이흐바터르 파니 블랑커르스쿤 판코턴 언 더비
31위32위33위34위35위
후고 그로티우스 요한 더빗 안토니 포커 에뒤아르트 데커르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
36위37위38위39위40위
빔 콕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마르코 보르사토 에릭 하젤로프 룰프제마 티에스토
41위42위43위44위45위
베아트릭스 여왕 티튀스 브란츠마 코르넬리스 렐리 한스 테이우언 요서프 륀스
46위47위48위49위50위
레온틴 판모르설 빌럼 콜프 홋프리트 보만스 헨드릭 안톤 로런츠 아벌 타스만
51위52위53위54위55위
요프 판던엔더 안드레 판다윈 요스트 판던폰덜 리누스 미헬스 미스 바우만
56위57위58위59위60위
빌럼 바런츠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언하위스 뤼트 뤼버르스 얀 틴베르헌 빔 소네벌트
61위62위63위64위65위
요커 스밋 프리츠 볼케스테인 히에로니무스 보스 조니 크라이캄프 마르하 클롬페
66위67위68위69위70위
요하너스 페르메이르 딕 브뤼나 알베르트 플레스만 요프 주테멀크 헬라 하서
71위72위73위74위75위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엄 3세 케나우 시몬스도흐터르 하셀라어르 요하너스 디데릭 판데르발스 부보 오컬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아나 마리아 판스후르만 헤르만 부르하버 루드 굴리트 모니크 판더번 프레이크 더용어
81위82위83위84위85위
안톤 픽 바우데베인 더그로트 빌럼 프레데릭 헤르만스 피터르 옐러스 트룰스트라 알버르트 헤인
86위87위88위89위90위
파울 더레이우 약 P. 테이서 얀 볼커르스 핏 몬드리안 시몬 스테빈
91위92위93위94위95위
하윌라우머 흐룬 판프린스테러르 륏허르 하우어르 하리 뮐리스 아브라함 카위퍼 마르턴 트롬프
96위97위98위99위100위
빔 칸 폴 버호벤 이자벨 드 샤리에르 람서스 샤피 아버 렌스트라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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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파일:VanGogh_1887.jpg
본명 Vincent Willem van Gogh (빈센트 빌럼 반고흐)[1]
출생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 주 쥔더르트
사망 1890년 7월 29일 (향년 37세)
프랑스 센에우아즈 주 오베르쉬르와즈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발두아즈 주)
묘소 프랑스 오베르쉬르와즈 묘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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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0cm[2]
직업 화가, 종교인[3]
부모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4]
형제자매 아나 코르넬리아, 테오, 리스, 빌, 코르
종교 개신교 (네덜란드 개혁교회)[5]
서명
파일:빈센트 반 고흐 서명.svg

1. 개요2. 명칭3. 생애4. 평가5. 화풍6. 주요 작품 일람
6.1. 전기(1885년 이전)6.2. 파리 시절(1886-1888)6.3. 아를 시절(1888년 2월-1889년 5월)6.4. 생레미 시절(1889년 5월-1890년 5월)6.5. 오베르쉬르우아즈 시절 (1890년 5월-7월)
7. 기타
7.1. 고흐는 정말 예멘 모카 마타리 커피를 좋아했나?7.2. 한국인 진품 소유 사건
8. 대중매체에서
8.1. 뮤지컬
9. 외부 링크

1. 개요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편지 638, 1888년 7월 9일 또는 10일[6]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편지 712, 1888년 10월 25일[7]
네덜란드화가.

2. 명칭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르면 '핀선트 빌럼 판호흐'지만, 관용을 인정해 예외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로 적는다. 관련 글.[8] 여기서 성씨인 반 고흐는 '고흐·호흐(Gogh) 출신'이라는 의미인데, 고흐·호흐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뒤셀도르프 현 클레베군의 고흐(Goch)[9]라는 도시를 가리킨다.

1980년대만 해도 국내 중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자에서 '고호\'라는 이름으로 나온 바 있다.[10] 혀뿌리와 뒤쪽 입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게 만든 후 성대를 떨지 않으며 공기를 내쉬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흡사 가래 끓는 소리) [x]를 지금은 '흐'로 통일해서 쓰지만, 과거에는 앞의 모음이 'a, o, u'일 때 각각 '하, 호, 후'로 달리 썼기 때문. 일본식 표기법의 흔적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지금도 이 방식에 촉음 표기까지 적용하여 'Bach(바흐)'는 'バッハ(밧하)', 'Gogh(호흐~고흐)'는 'ゴッホ(곳호)', 'Huch(후흐)'는 'フッフ(훗후)'로 쓴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후반에 나온 표절 해적판 만화 <초인 킨타맨>에서 괴도가 훔쳐가려는 그림을 그린 화가 이름이 '방고호'라고 한국화하여 나온 적도 있다.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도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라는 가사가 나온다. 참고로 영국식 영어로는 '/ˌvæn ˈɡɒx, ˈɡɒf/(밴 고흐 또는 고프)'[11], 미국식 영어로는 '/ˌvæn ˈɡoʊ/(밴 고우)'로 읽는다.

한국에서는 주로 고흐라고 부르지만 이는 엄연히 틀린 명칭이다. 고흐는 이름이 아니라 성씨이므로 정확히는 빈센트 라고 부르는것이 맞다. 성으로 부르려면 하다못해 "반 고흐"라고 불러야 한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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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일반적으로 렘브란트 다음으로 가장 위대하고 후기 인상파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색채, 힘찬 붓놀림, 그리고 왜곡된 형태는 현대 미술에서의 표현주의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 고흐의 예술은 그의 죽음 이후 놀라울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었고,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그의 작품이 전 세계 경매에서 기록적인 금액으로 팔렸으며 블록버스터급 순회 전시회에 출품되었습니다. 부분적으로 그의 광범위한 출판된 편지들 때문에, 반 고흐는 또한 전형적인 고통을 겪은 예술가로서 대중적인 상상력으로 신화화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후기 인상파 화가이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영어 위키백과#

5. 화풍

고흐가 화가가 된 방법은 순전히 자신이 존경하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그것을 묘사하면서 기교를 익혀나가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이런 방식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그 발전속도가 느려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덕분에 고흐는 독특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 수 있었다. 만약 고흐가 처음부터 파리로 가서 인상파 조류를 접했다면 자신의 개성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흐가 일관적으로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는 것'을 하나의 화두로 아카데미즘을 계속해서 부정해왔고, 인상파를 접할 때도 훌륭하다고는 생각하나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얘기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됐든 그는 개성있는 화풍을 획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사실 그는 안트베르펜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많은 것을 배우고자 주/야간 강의를 모두 수강하기도 하는 등의 시도를 한 적이 있으나, 그의 성격과 개성(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은 이번에도 역시 강사들의 분노를 사 얼마 안 가 퇴출당했다고 한다. 어지간히 대인배인 화가가 제자로 삼아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는 결국 독학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12]

초기 고흐에게 영감을 준 화가들은 렘브란트나 프란스 할스 같은 네덜란드의 옛 거장들로 이들에게서 기본적인 고흐의 스타일인 거친 붓 스타일[13]이라든지 음영이 뚜렷한 기법 같은 것을 배웠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68afd543e1df87e9ab518add6f895bd.jpg
고흐의 밀레 습작
다른 한편으로 영향을 크게 미친 화가는 바로 밀레였다. 고흐의 밀레에 대한 존경은 대단해서 "밀레 사부"라고 부를 정도였고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물론 밀레의 스타일을 고흐가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밀레는 고흐에게 고흐 그림의 중요한 소재인 자연, 그리고 자연 속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고흐는 파리에 와서야 인상주의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비록 인상주의 스타일에 유보적이긴 했으나 그 영향을 받아들였다. 파리 이후로 고흐는 인상주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색채의 활용에 능해졌고 쇠라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다. 쇠라에게는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붓터치가 점 모양을 띄는 양상으로 나아갔고 들라크루아에게서는 대담한 색채의 활용이라는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우키요에에게서도 영향을 받아 그림자의 생략, 가는 선으로 둘러싸여진 얕은 채색, 풍경과 대비되는 거의 보이지 않는 크기의 인물 등의 일본적 스타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파일:external/admin.eurobike.kr/20140523051048.jpg
아를병원[14], 1889
아를 시기에 이르러 고흐의 화풍은 완성단계에 이르게 된다.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선 터치 등을 사용했는데 특히 아를 이후의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이 다양한 형태의 선이다. 생레미 시절에 특히 두드러지는 이런 선들은 나선, 원, 물결 등의 모양으로 형상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 이런 독특한 선으로 구성된 대표적 작품이다.

6. 주요 작품 일람

6.1. 전기(1885년 이전)

6.2. 파리 시절(1886-1888)

6.3. 아를 시절(1888년 2월-1889년 5월)

6.4. 생레미 시절(1889년 5월-1890년 5월)

6.5. 오베르쉬르우아즈 시절 (1890년 5월-7월)

7. 기타

파일:Vincent_van_Gogh_January_1873_(restored).jpg
20대 초반인 1873년에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파일:vangogh.jpg
1886년, 친구이자 화가였던 에밀 베르나르와 함께 찍힌 사진
파일:external/thereadingwire.files.wordpress.com/vincent-van-vogh-adult.jpg
실제 반 고흐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파일:Portrait of Pere Tanguy.jpg
탕기 영감의 초상, 1887년

7.1. 고흐는 정말 예멘 모카 마타리 커피를 좋아했나?

예멘 모카 마타리 커피에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고흐가 좋아하고 즐겨 마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멘 모카 마타리를 마셔야 고흐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커피 애호가나 고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밥 한 끼 먹기 힘들 정도로 그림 1점 못 팔았던 고흐가 과연 그런 사치를 부렸기는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오히려 커피를 먹었다면 싸구려 커피일 것이다. 이런 부분은 한국의 3대 커피 반열에 올리기 위한 사업적 마케팅이라는 설이 강하다. [22]

많이들 언급되는 커피 떡밥으로 고흐의 편지를 언급하는데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서 약간의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꼭 필요하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야식으로 찻집에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약간의 빵을 먹거나 가방에 넣어둔 호밀 흑빵을 먹어도 좋겠지. (1권, pp.140-141)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5년 12월 28일
여기까지 보면 고흐가 호밀빵과 함께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지만, 편지의 전체 내용을 보면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들어오는 즉시 모델을 구하러 나가서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작업한다.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에서 약간의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꼭 필요하다. 형편이 허락한다면, 야식으로 찻집에서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약간의 빵을 먹거나 가방에 넣어둔 호밀 흑빵을 먹어도 좋겠지. 그러나 모델이 떠나버리고 혼자 남게 되면 갑자기 나약한 감정이 나를 덮치곤 한다.
즉 고흐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며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그런 언급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용했던 호밀 흑빵을 먹는 것이 고흐를 가장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또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커피를 좋아해서 자신이 자주 애용하는 카페를 그렸다는 밤의 카페[23] 일화는 실제 편지 내용을 보면 고흐 입장에서는 카페라는 곳에 이미지가 부정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밤의 카페>를 통해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부드러운 분홍색을 핏빛 또는 와인빛 도는 붉은색과 대비해서, 또 부드러운 녹색과 베로네즈 녹색을 노란빛 도는 녹색과 거친 청록색과 대비해서, 평범한 선술집이 갖는 창백한 유황빛의 음울한 힘과 용광로 지옥 같은 분위기를 부각하려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일본 회화 특유의 경쾌함을 담고 있다.
편지 677, 1888년 9월 9일[24]

참고

7.2. 한국인 진품 소유 사건

고흐의 작품 중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의 진품을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해 화제가 된 사건. 자세한 내용은 빈센트 반 고흐 진품 한국인 소유 사건 문서 참고.

8.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3.bp.blogspot.com/tumblr_l3k6gv2FFO1qal87so1_500.png
"살면서 많은 걸 봤지만 이렇게 당신이랑 보는 세상만큼 멋진 세상은 없어요."
-11대 닥터

8.1. 뮤지컬

9. 외부 링크



[1] 본래 표기법은 판호흐이지만 관용 표기로 반고흐가 인정되었다.[2] 19세기 중후반 당시의 네덜란드 남성 평균 키가 164cm였음을 감안하면 그 시대에 170cm는 큰 키이다.[3] 과거 보조 목사 일을 했다.[4] 혼전 성은 '카르벤튀스(Carbentus)'[5] 고흐는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목사가 될 목표로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 공부를 했으며 벨기에 몬스 탄광으로 개신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전도 사역을 하기도 하였다.[6]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나를 꿈꾸게 하는 밤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Mais toujours la vue des étoiles(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But the sight of the stars always'로 시작한다.[7]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너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Le jour viendra cependant(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The day will come, though'로 시작한다.[8] 실제 네덜란드어 발음은 자음동화로 인해 [vɑŋ ˈɣɔx\]에 가까우나 네덜란드어 표기법에서는 이를 반영하지 않고 표기한다.[9] 지리상으로는 독일에 위치하고 있지만 네덜란드와 붙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저지대 지역 도시들 중 하나이다.[10] 사실 '고호'라고 하는 것은 양반이고, 심지어는 그를 '반 고그\'라고 부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고흐는 평생 자신을 '빈센트'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반 고흐'라고 하면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화가들은 완성한 그림에 성으로 서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고흐는 거의 '빈센트'로 서명했는데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11] 후자의 경우 'tough(/tʌf/)' 등에서 'gh'가 [f\]로 발음되는 경우를 적용한 듯.[12] 안톤 모베에게 배우던 시절이 있었지만 창녀인 시엔을 도우는 걸 두고 모베가 "자네는 타락했어."라고 한 뒤 교류가 끊겼다.[13] 실제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렘브란트가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린 것이 놀랍다고 말하기도 했다.[14] 현재는 Espace Van Gogh라는 이름의 문화센터로 변하였으며, 그림에 나와 있는 테라스와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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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 그림의 다른 버전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16] 참고로 사이토의 기업이었던 다이쇼와제지(大昭和製紙)는 그가 죽은 후 재정난에 빠져 다른 미술품들을 연이어 팔아야 했을 정도로 몰락했고, 결국 닛폰제지에 흡수합병되었다.[17] 이는 사이토가 죽자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엄청난 항의와 질문 끝에 유족들이 맹세한 것이다. 알다시피 일본은 고흐를 아끼고 연구를 많이 하며 소장도 많이 하고 있기에 그의 발언은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비난받았다. 심지어 사이토와 친한 다른 일본 재벌들에까지 개인적 자리에서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안 되죠. 인류문화유산을 겨우 장작으로 쓰신다고 하는 건 파렴치한 이기주의 아닙니까"라는 쓴소리까지 듣었다고 한다.[18] 일본은 최고 상속세율이 50%에 달해 선진국 중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19] 400 프랑에 팔렸는데, 당시로는 꽤 큰 금액이었다. 물론 현재 고흐의 그림가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단 고흐의 그림이 한 점만 팔렸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고흐가 알게 모르게 싼 값에 팔아 넘기기도 하고 밥 한끼 값으로 대신 지불한 그림도 많았기 때문에, 고흐의 전기작가들 가운데에는 "단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허무맹랑한 전설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전술했듯 연필로 그린 드로잉은 10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뭐 돈 안되는 건 마찬가지지만.[20] 고흐는 예전부터 종종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의 맛을 보곤 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먹은 게 아니라 마약 성분이 있는 압생트를 금지 당하자 금단 현상 때문에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문 자체가 당대 프랑스의 와인 제조업자들이 당시 파리에서 희석식 소주 정도의 포지션이었던 압생트와의 가격경쟁에서 밀리자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무엇보다 마약성분이라고 주장하는 쓴쑥에 들어있는 투존 성분은 흔히 알려져 있듯 환각과 정신착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물론 분명히 과도하게 음용했을 때 어지럼증, 발작, 혼수상태, 심하면 사망까지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압생트만으로 이 정도로 다량의 투존을 섭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투존 성분이 들어간 쓴쑥 자체도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베르무트나 빅스 베이포럽(코막힘 치료제) 등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또한 저 투존 성분의 부작용이라는 게 사실 보면 습관성 과음의 증상과 다를 것도 없다. 즉 압생트야말로 음모론의 희생자라는 이야기. 실제 압생트의 맛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향신료인 아니스이다.[21] 파일:attachment/빈센트 반 고흐/목포반씨.jpg
현재는 수정되었다.
[22] 예멘 내전으로 인하여 국가에서도 커피 원두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를 안 하고 있어 저품질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마타리라는 명칭은 커피 애호가 사이에서는 고품질 원두가 아닌 단지 베니마타르 지역에서 나온 원두라는 인식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애초에 이런 이유로 예멘 모카 마타리 원두의 질은 좋지 않은 편인데 원두 크기도 다르고 색상도 다르며 인력 부족으로 전통 가공법으로 아직도 맷돌로 갈아서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마타리에 특유의 복잡한 맛도 이런 크기, 색상, 저급등이 섞인 고르지 않은 원두로 인한 맛으로 이런 질 안 좋은 원두가 유통도 좋지 않아 가격도 올랐는데 이런 고흐 떡밥까지 포장해서 프리미엄이 되었다.[23] "밤의 카페 테라스"와는 다른 그림이다.[24] 위즈덤하우스에서 펴낸 한국어 번역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는 "파괴와 광기의 공간, 밤의 카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제목은 역자가 붙인 것이다. 링크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은 Dans mon tableau du café de nuit (고흐는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영어 번역은 In my painting of the night café로 시작한다.[25] 책을 읽은 그날 밤, 너무나 가슴이 설레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하룻밤 만에 이 노래를 완성했다고 한다.[26] 최초개봉일은 2018년 11월 16일 미국[27] 작품 《영원의 문, Sorrowing Old Man (At Eternity's Gate) (1890)》에서 제목을 붙였다.[28] 공감각에 가까운 톡특한 색채 감각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는 설정.[29] 참고로 이를 해설하는 큐레이터는 빌 나이가 배역을 맡았다.[30] 실제로 고흐가 살아있을 때 팔렸던 그림은 단 한 점밖에 없었고, 모두 고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그 가치를 알아본 그림이다. 그것까지 생각하면 더 감동적인 장면인 셈.[31] 이러한 스토리(평범한 시간여행, 과거의 실존인물 등등) 덕분에 60년간의 설정으로 쌓여 입덕하기 힘든 닥터후를 일반인들에게 추천할 때, 입덕 에피소드로 자주 뽑힌다.[32] 아마도 시간의 틈과 같이 판도리카가 열리고 타디스가 폭발하는 것과 관계된 듯.[33] 어쩌면 꿈에서 전송된 정보들 중에서 에이미로마병사에게 살해당하는 순간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배로 입어서 정신이 망가진 것일지도...[34] 추측이지만, 고흐가 원래 자살하는 원인이 에이미랑 닥터에 의해 타임 패러독스 때문에 인과적인 원인이 변경되었지만, 가변 역사와 불가변 역사의 법칙 때문에 판도리카가 꿈을 통해서 전송받은 미래의 정보를 보게 된 충격으로 정신붕괴로 인해 자살하는 것으로, 자살하게 되는 인과적인 원인이 우회적으로 교체되었다고 여길 수 있다.[35] 굳이 판도리카라는 먼 주제가 아니라도 평소에 자신을 멸시하는 주변의 반응에 비해 사후 자신이 유명해진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36] 시기상 저 그림 자체를 에이미를 위해서 그린 건 아니고 이미 그려둔 해바라기 그림을 에이미에게 선물한 것이다.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린 때가 '오베르의 교회'를 그린 때보다 2년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