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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9:48:03

윌리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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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스타트허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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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 가톨릭 방송 KRO가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핌 포르타윈 빌럼 1세 판 오라녀 빌럼 드레이스 안토니 판레이우엔훅 에라스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요한 크루이프 미힐 더라위터르 안네 프랑크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레인 빈센트 반 고흐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알레타 야콥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아니 M. G. 슈미트 율리아나 여왕 요한 뤼돌프 토르베커
16위17위18위19위20위
알리다 보스하르트 안톤 필립스 프레디 하이네컨 하니 스하프트 빌헬미나 여왕
21위22위23위24위25위
바뤼흐 스피노자 톤 헤르만스 클라우스 폰암스베르크 요한 판올덴바르네벌트 마르코 반 바스텐
26위27위28위29위30위
핏 피터르손 헤인 요프 던아윌 얀 레이흐바터르 파니 블랑커르스쿤 판코턴 언 더비
31위32위33위34위35위
후고 그로티우스 요한 더빗 안토니 포커 에뒤아르트 데커르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
36위37위38위39위40위
빔 콕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마르코 보르사토 에릭 하젤로프 룰프제마 티에스토
41위42위43위44위45위
베아트릭스 여왕 티튀스 브란츠마 코르넬리스 렐리 한스 테이우언 요서프 륀스
46위47위48위49위50위
레온틴 판모르설 빌럼 콜프 홋프리트 보만스 헨드릭 안톤 로런츠 아벌 타스만
51위52위53위54위55위
요프 판던엔더 안드레 판다윈 요스트 판던폰덜 리누스 미헬스 미스 바우만
56위57위58위59위60위
빌럼 바런츠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언하위스 뤼트 뤼버르스 얀 틴베르헌 빔 소네벌트
61위62위63위64위65위
요커 스밋 프리츠 볼케스테인 히에로니무스 보스 조니 크라이캄프 마르하 클롬페
66위67위68위69위70위
요하너스 페르메이르 딕 브뤼나 알베르트 플레스만 요프 주테멀크 헬라 하서
71위72위73위74위75위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엄 3세 케나우 시몬스도흐터르 하셀라어르 요하너스 디데릭 판데르발스 부보 오컬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아나 마리아 판스후르만 헤르만 부르하버 루드 굴리트 모니크 판더번 프레이크 더용어
81위82위83위84위85위
안톤 픽 바우데베인 더그로트 빌럼 프레데릭 헤르만스 피터르 옐러스 트룰스트라 알버르트 헤인
86위87위88위89위90위
파울 더레이우 약 P. 테이서 얀 볼커르스 핏 몬드리안 시몬 스테빈
91위92위93위94위95위
하윌라우머 흐룬 판프린스테러르 륏허르 하우어르 하리 뮐리스 아브라함 카위퍼 마르턴 트롬프
96위97위98위99위100위
빔 칸 폴 버호벤 이자벨 드 샤리에르 람서스 샤피 아버 렌스트라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14대 국왕
잉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5대 국왕
윌리엄 3세
William III
파일:King_William_III_of_England,_(1650-1702).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잉글랜드 윌리엄 3세
(William III)
스코틀랜드 윌리엄 2세
(William II)
네덜란드 빌럼 3세
(Willem III)
출생 1650년 11월 4일
네덜란드 공화국 헤이그 비넨호프
사망 1702년 3월 8일 (향년 51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켄싱턴 궁전
재위기간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1672년 7월 4일 ~ 1702년 3월 8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
1689년[1] ~ 1702년 3월 8일
서명 파일:윌리엄 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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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영어 윌리엄 헨리
(William Henry)
네덜란드어 빌럼 헨드릭
(Willem Hendrik)
배우자 메리 2세 (1677년 결혼 / 1694년 사망)
아버지 빌럼 2세 판 오라녀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메리
장례식 1702년 4월 12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종교 개신교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네덜란드 스타트허우더2.3. 잉글랜드 국왕 즉위2.4. 잉글랜드 통치
3. 기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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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illem III van Oranje / William III

네덜란드의 오라녀 공 겸 나사우 백작. 네덜란드 공화국 내 실질 통치자(7개 주 스타트허우더) 겸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 빌럼 2세 판 오라녀프린세스 로열 메리의 외아들이자 찰스 1세의 첫 손주이고 앤 여왕의 형부 겸 사촌 오빠이다.

영어 이름은 윌리엄(William)이지만 이름을 네덜란드어로 적을 때는 빌럼(Willem)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잉글랜드 · 아일랜드 · 네덜란드에서는 윌리엄(빌럼) 3세이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윌리엄 2세이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우연히 그 전에 윌리엄/빌럼인 군주가 두 명 있었기 때문에[2] 사실상 영토나 마찬가지인 아일랜드에서는 잉글랜드에서의 표기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세 나라는 3세로 일치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과거에 윌리엄이라는 이름의 국왕이 단 한 명 뿐이었기 때문에 윌리엄 2세가 되었다.[3]

2. 생애

2.1. 유년기

빌럼 3세(윌리엄 3세)는 1650년 11월 4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오라녀 공 빌럼 2세[4]와 잉글랜드의 왕 찰스 1세의 장녀 메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빌럼 2세는 태어나기 직전에 천연두로 사망했고 그의 어머니 또한 그가 10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다. 한편 제1차 영란전쟁이 1654년 웨스트민스터 강화조약으로 마무리될 때 영국 호국경 크롬웰은 강화조건으로 찰스 1세의 외손인 빌럼 3세의 스타트허우더 취임을 금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국가의 실권을 쥔 '홀란드 주 법률고문'(네덜란드 공화국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관직) 요한 더빗을 필두로 한 공화파 또한 사실상 군주인 스타트허우더 직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크롬웰의 강화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빌럼 3세는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스타트허우더 직을 그대로 이어받지 못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2.2. 네덜란드 스타트허우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은 그의 외가[5]인 잉글랜드에 의해 바뀌게 된다. 크롬웰이 죽고 영국에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그의 외삼촌인 찰스 2세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도버밀약을 맺으면서 네덜란드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결국 찰스 2세와 루이 14세는 1672년 네덜란드를 침공했다.(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네덜란드군이 초전에 프랑스군에게 대패하자 빌럼 3세는 이를 총리 요한 더빗의 탓으로 몰아붙이는 정치공작을 했고, 결국 1672년 8월 21일 요한 더빗은 빌럼 3세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형 코르넬리스와 함께 빌럼파 시민들에게 린치당해 처참하게 죽었다. 폭도로 변한 빌럼파 시민들은 더빗 형제의 시신을 매달아 얼굴 가죽을 벗긴 다음 거세하고 내장을 파헤쳐 간을 구워먹기까지 했다.# 이때 도려내진 요한 더빗의 혀와 손가락은 현재도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 보존되고 있으며, 이 사건을 묘사한 그림들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에 네덜란드의 많은 주가 빌럼을 곧바로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22세의 나이에 스타트허우더에 취임하게 된다. 1674년 찰스 2세가 본국에서 비밀협정 내용이 드러나고 재정적인 압박을 받게 되면서 곧바로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었고, 루이 14세도 역시 전쟁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지는 못했다. 1678년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휴전을 맺었으나 지속적으로 나쁜 관계에 있었다.

한편 1677년 불과 몇년 전 전쟁을 펼쳤던 외삼촌 찰스 2세의 정치적인 고려를 통해 그의 작은 외삼촌[6]인 요크공 제임스의 딸 메리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다. 그러니까 메리 2세와 그는 부부지만 동시에 사촌이기도 하다. 이 부부는 당대부터 금슬좋은 부부로 유명했지만, 사실 이 결혼은 그렇게까지 행복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 메리는 15살로 매우 어린 상황이었고, 빌럼은 20대이긴 했지만 벌써부터 총사령관으로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메리에 대한 관심이 덜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혼시절에 메리가 유산을 한 이후로 불임이 되자 그녀의 상실감과 죄책감이 커진 탓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이 후계자를 낳기위한 재혼을 거부하며[7] 그녀와의 결혼을 고집했고, 메리 역시 영국에서의 그녀의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고 철저하게 윌리엄을 내조하는 등,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모범적인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윌리엄에게도 정부는 있었으나, 찰스 2세나 제임스 2세처럼 난잡하거나 왕궁에까지 여자를 끌어들이는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8]

네덜란드 해군의 명장인 미힐 더라위터르 제독이 바로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의 빌럼 3세로서 통치하던 이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더라위터르는 정치적으로 요한 더빗 파에 속했기 때문에 결국 빌럼의 눈 밖에 나 무리한 작전을 강요당하고 전사하였다.

2.3. 잉글랜드 국왕 즉위

1685년 빌럼의 장인이자 작은 외삼촌인 요크공 제임스가 찰스 2세에 뒤를 이어 제임스 2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임스 2세는 친가톨릭 정책을 펼치면서 국교도와 청교도가 많이 있었던 잉글랜드 의회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던 중 제임스 2세가 뒤늦게 아들을 낳게 되면서 그 아들이 가톨릭 왕자로 키워질 게 뻔한 상황에서 다시금 피의 메리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우려한 잉글랜드 의회는 토리파 휘그파 할 것 없이 프로테스탄트였던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빌럼을 주목하게 되었고, 결국 빌럼에게 군대를 요청하게 된다.

빌럼은 1688년 11월 5일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 명예혁명으로 장인인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아내인 메리 2세공동국왕 윌리엄 3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원래 제임스 2세와 후처에게 얻은 아들 제임스를 쫓아내고 왕위 계승 1순위는 아내 메리 2세, 그 다음이 처제 앤, 그리고 윌리엄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온데다가, 메리는 남편과 달리 군사나 정치에 대해 전혀 문외한 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점을 고려하여 아내와 공동왕으로 추대 되었다.[9] 이 때문에 그의 치세 땐 네덜란드도 잉글랜드와 동군연합을 이뤘다. 부인인 메리 2세가 1694년에 사망하게 되면서, 윌리엄은 1702년 까지 단독재위를 하게 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권리장전을 승인한다. 이 권리장전에 의해 잉글랜드 의회가 조세, 군대 조직 등을 관리하는 입헌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1689년 5월 비국교도를 포함한 개신교 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법이 통과되었다. 사실 이것은 가톨릭 교도 국왕의 즉위를 극히 꺼린 잉글랜드 의회와 개신교도였던 윌리엄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히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해서는 공직에 일체 진출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대학 진학도 하지 못하게 하는 차별법을 통과시켰다.

2.4. 잉글랜드 통치

20대의 나이에 총사령관이 되어서 잉글랜드, 프랑스 연합군과 대적했을 정도로 타고난 무인이었던 그는 잉글랜드 내에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모두 군사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우선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자코바이트 반란들을 진압했으며,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제임스 2세의 군대들이 버티고 있던 아일랜드에 역시 군대를 보내 제임스 2세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역시 아일랜드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도 역시 군사원정을 펼쳤는데 무엇보다도 당시 최강국이었던 루이 14세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된다. 루이 14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아우크스부르크동맹에 잉글랜드-네덜란드가 동시에 참가하게 되었고, 곧바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물론 이 때 루이 14세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전쟁을 펼치긴 했으나 루이 14세 역시 재정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맺게 되고 여기서 루이 14세가 처음으로 윌리엄을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게 된다.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로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가 후계자가 되자 프랑스-스페인 사이의 통합에 대한 유럽 열강들의 반발이 심각해졌고, 1701년 제임스 2세 사후 루이 14세가 레이스베이크 평화조약을 깨고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임명하게 되자 윌리엄은 곧바로 대동맹을 맺고 이른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던 도중인 1702년 3월 우연한 낙마사고로 인해 폐렴에 걸렸고[10] 합병증으로 결국 사망하게 된다.

3. 기타

4. 둘러보기

명목상 오라녀 공작 겸 브레다 남작(1650-1702)
오라녀나사우 왕조
빌럼 2세
(Willem II)
빌럼 3세
(Willem III)
요한 빌럼 프리소
(Johan Willem Friso)

홀란트·제일란트·위트레흐트·헬러·오버레이설·프리슬란트·흐로닝언 스타트허우더[17]
오라녀나사우 왕조
(없음)
(이전: 빌럼 2세(Willem II))
빌럼 3세
(Willem III)
(없음)
(이후: 빌럼 4세
(Willem IV))

[1] 1689년 2월 13일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고, 1689년 4월 11일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2] 잉글랜드의 경우에는 정확히 말하면 더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왕의 이름 뒤에 ~세라는 숫자를 붙이는 관행은 노르만 왕조 때 성립됐다. 따라서 노르만 왕조 성립 시기부터 따지면 이전까지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쓴 국왕은 딱 두 명 뿐이었다.[3]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아일랜드 공동 국왕이었던 부인 메리의 경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각각 메리라는 이름의 여왕이 한 명씩 있었으므로(메리 튜더, 메리 스튜어트) 우연히 숫자가 2세로 일치하게 되었다.[4]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끈 오라녀 공 침묵공 빌럼의 막내아들인 프레데릭 헨드릭의 아들로 침묵공의 손자가 된다.[5] 나중에는 처가가 되기도 한다. 둘째 외삼촌인 제임스 2세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6] 윌리엄의 모친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는 찰스 1세의 장녀로, 찰스 2세의 여동생이자 제임스 2세의 누나이다.[7] 본문에도 언급되었다시피, 윌리엄은 사실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된 메리와 앤 바로 다음 계승권 소유자였기 때문에, 메리와 헤어지고 재혼하여 자식을 낳는다면, 그 자식은 영국의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거의 확정적이었다.[8] 윌리엄 3세의 정부는 엘리자베스 빌리어스라는 인물로, 미남으로 유명했던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조카손녀이자 찰스 2세의 정부 바바라 팔머의 사촌으로, 찰스 2세의 부인 앤 하이드의 시녀였다. 메리는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묵인해주었는데, 메리가 사망할 때 유언으로 윌리엄에게 엘리자베스와 헤어질 것을 부탁했고, 윌리엄은 정말 그녀와 헤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대우는 섭섭치않게 해주어서 그녀는 오크니 백작과 결혼해 백작부인이 되어 유복한 삶을 살았다.[9] 다만, 아내 메리 2세가 자녀없이 먼저 사망하고 윌리엄 3세가 재혼할 경우, 재혼에서 얻은 자녀는 앤의 자녀보다 왕위계승에서 후순위로 한다는 의회의 결의가 있었다[10] 타고 있던 말이 두더지 굴에 발이 빠지면서 윌리엄 3세는 낙마하였고, 늑골이 부러지면서 폐를 다쳤는데, 이것이 폐렴으로 이어졌다고 한다.[11] 처제이자 사촌동생인 앤 여왕 바로 다음 순위였다.[12] 현재 남아있는 침묵공 빌럼 1세의 직계(정확히는 여계) 후손은 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 왕가 후손들이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어머니가 네덜란드 총독 가문 출신이며 침묵공 빌럼 1세의 직계 후손인 루이제 헨리에테 판 나사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엔 네덜란드의 살리카법이 폐지되기 전이었으며 네덜란드에서 살리카법이 폐지된 건 훗날 네덜란드 왕국 때의 일이었기 때문에 살리카법에 따라 침묵공 빌럼 1세의 방계 후손이 네덜란드를 통치하게 된 것이다.[13] 말 그대로 특정 종파를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국가 교회는 이러한 신앙을 가진다라고 공표하고, 테두리 안에서 공동의 신앙을 가졌다고 인정하는 의미이다. 현대 성공회 조직은 19세기에 성립했다.[14] 최초 1553년 공표한 42개 신조였으나 1571년 39개조로 수정[15] 명예혁명이라고 했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윌리어마이트 전쟁(또는 자코바이트 전쟁)이 치러졌다. 윌리엄 지지파(윌리어마이트)인 개신교도들과 제임스 지지파(자코바이트) 사이의 전쟁이기 때문에 이름이 이렇게 붙여졌다.[16] 녹색은 게일족 전통을 계승한 집단, 주황색은 윌리엄의 추종자들을 각각 상징하며, 가운데에 위치한 흰색은 이들 사이의 평화를 의미한다. 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의 일부가 항영독립투쟁진영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대표적인 인물이 울프 톤과 찰스 스튜어트 파넬), 이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민족 진영이 자신들의 깃발에 주황색을 넣은 것이다.[17] 홀란트·제일란트는 1672~1702, 위트레흐트는 1674~1702, 헬러·오버레이설은 1675~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