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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6대 국왕 에드워드 2세 Edward 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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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삽화 | |||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에드워드 2세 (Edward II) | ||
출생 | 1284년 4월 25일 | ||
웨일스 귀네드 카나번 성 | |||
사망 | 1327년 9월 21일 (향년 43세) | ||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버클리 성 | |||
재위기간 | 잉글랜드의 왕 | ||
1307년 7월 8일 ~ 1327년 1월 2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 카나번의 에드워드 (Edward of Caernarfon) | |
배우자 | 프랑스의 이자벨 (1308년 결혼) | ||
자녀 | 에드워드 3세, 존, 엘레노어, 조앤, 아담 피츠로이(사생아) | ||
아버지 | 에드워드 1세 | ||
어머니 |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 ||
형제 | 엘레노어, 조앤, 알폰소, 마거릿, 메리, 엘리자베스 | ||
장례식 | 1327년 12월 20일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글로스터 성당 | ||
종교 | 가톨릭 | ||
문장 | }}}}}}}}}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청년기
3. 사후4. 가족관계2.2.1. 피어스 개버스턴과의 관계
2.3. 잉글랜드 국왕2.3.1. 결혼식과 대관식2.3.2. 개버스턴 분쟁2.3.3. 스코틀랜드 원정 시도와 좌절2.3.4. 1311년 조례2.3.5. 피어스 개버스턴의 죽음과 반군 귀족들과의 갈등 및 화해2.3.6. 배넉번 전투2.3.7. 1314~1316년 스코틀랜드군의 잉글랜드 북부 습격2.3.8.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2.3.9. 심화되는 위기2.3.10. 디스펜서 전쟁2.3.11. 스코틀랜드와의 전황 악화와 휴전 협상2.3.12. 디스펜서 부자의 전횡2.3.13. 생사르도 전쟁
2.4. 몰락의 길4.1. 자녀
5. 평가6. 그 외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명군이었던 에드워드 1세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부왕인 에드워드 1세의 빛나는 업적에 반비례하여 실정만을 거듭하였으며 결국은 아내와 아들에게 폐위당한 후 의문사했다.실정을 많이 저질러 중세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에서도 그 악명높은 증조할아버지인 존 왕과 탑을 다툴 정도로 암군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 동안에 잉글랜드는 내부적으로는 국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피어스 개버스턴[1]과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등과 같은 간신배들이 날뛰어 분열과 정쟁이 격화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등을 비롯한 외부 세력과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특히 로버트 1세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잃어버린 것은 뼈아픈 타격으로 손꼽힌다.
2. 생애
2.1. 초년기
1284년 4월 25일 웨일스 북부 귀네드의 카나번 성에서 출생했다. 그는 때때로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카나번의 에드워드로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이고, 어머니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3세의 딸인 카스티야의 레오노르였다. 에드워드 1세와 레오노르 부부는 에드워드를 낳기 전에 엘레노어[2], 조앤[3], 메리[4], 마거릿[5], 엘리자베스[6] 등 다섯 딸을 낳았다.[7]당시 웨일스는 1282~1283년 에드워드 1세의 침공으로 막 정복되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에드워드 왕자가 카나번 성에서 출생한 것은 웨일스가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음을 확정하기 위한 에드워드 1세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추정한다. 카나번은 로만 브리튼 시대로 거슬려 올라가는 요새로, 웨일스인들에게 상징적으로 중요한 정착지였으며, 귀네드 왕국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다. 일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한 예언자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며, 이 아기가 잉글랜드를 영광으로 이끌 새로운 아서왕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태어난 직후 마리오타 또는 메리 몬셀이라는 이름의 유모의 보살핌을 받았고, 몇 달 후 그녀가 병에 걸리자 엘리스 드 레이그레이브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직후 아버지와 함께 가스코뉴에 갔고, 1290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기 떄문에, 에드워드는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1290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의회와 버검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6세였던 에드워드 왕자와 스코틀랜드의 명목상 여왕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약혼시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를 자신의 영향권에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마르그레트가 같은 해 9월에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중 심한 뱃멀미로 인해 사망하면서, 약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는 마르그레트 사후 프랑스의 공주와 아들을 결혼시키려 했지만, 1294년 가스코뉴를 놓고 프랑스와 전쟁이 발발하면서 혼담이 깨졌다. 이에 플란데런 백작 기 드 담피에르에게 자기 아들과 그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했지만,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자기 봉신인 플란데런 백작에게 강한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한편, 에드워드 왕자는 레오노르가 생전에 궁정에 초대한 도미니코회 수도자들로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다. 그의 멘토는 기 드 페러였는데, 그는 규율, 승마 훈련, 군사 기술을 담당했다.
에드워드 왕자의 교육 수준이 어땠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다. 다만 레오노르가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자 열의를 보였고, 기 드 페러는 당대에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에드워드 왕자는 일상생활에서 주로 앵글로-노르만어를 사용했으며, 영어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그가 대관식에서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선서했고, 육체 노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이유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오늘날에는 근거가 부족한 주장으로 간주된다. 그는 당시에는 독서를 상당히 많이 했고, 시를 좋아해서 자작시를 몇 수 지었고, 편지를 종종 집필했다.
많은 전기 작가들은 에드워드 왕자의 어린 시절은 가족의 사랑 부족으로 인해 망가졌으며, 이것이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쳐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왕자는 어머니를 거의 보지 못했고, 항상 바빴던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독선적이고 과격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또한 에드워드 왕자는 어느정도 성장한 뒤 왕의 측근들과 함께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해서 심리적 안정을 취할 집이 딱히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의 어린 시절은 그 당시에 특이한 것이 아니었으며, 왕실 구성원으로서 전형적인 양육을 받았고 특별히 외롭지 않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에드워드 왕자는 키가 6피트(180cm)에 달했고, 근육질 몸매를 갖췄고, 힘이 셌으며, '매우 잘생긴 남자'라고 평가받았다. 균형적인 체형을 갖췄고 옷차림이 항상 우아했으며, 궁정 하인들에게 관대했다. 또한 노를 젓고, 도랑을 파고, 울타리를 심고, 평민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즐겼는데, 이는 당시 귀족 계층에서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어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비판받았다. 그는 유머 감각이 있었고, 저속한 농담과 장난을 즐겼다. 어느 날, 그는 자기 눈앞에서 말에서 우스꽝스럽게 떨어진 사람에게 보상을 줬다. 예술가 잭 세인트 올번스는 에드워드가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고 "그를 쓰러질 때까지 웃게 만든" 대가로 50실링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항상 궁정에 에 여러 명의 광대를 두고 있었는데, 그들과 재밌는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오를리안카(Orlyanka)[8]와 주사위 놀이를 즐겼다. 또한 사치스러운 옷, 와인, 맛있는 음식에 많은 돈을 썼으며, 말이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말을 쏟아내곤 했으며, 짜증을 종종 냈고 보복심이 강하며 완고한 면이 있었다. 그는 수년간 모욕을 참아내다가도 이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따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는 법은 몰랐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공개적으로 관심을 표시하는 법을 알았다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말 사육에 관심이 있었고, 뛰어난 기수였다. 또한 개, 특히 그레이하운드를 좋아했고, 직접 훈련시켰다. 그는 얼마 동안 사자를 키웠으며, 그것을 수레에 태워 어디든 가지고 가기도 했다고 하지만, 사냥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다만 중세 유럽에서 사냥에 관한 최초의 저서인 사냥의 기술(The Art of Hunting)을 쓰도록 수석 사냥지기 윌리엄 트위티(William Tweety)에게 위임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에드워드는 음악을 좋아했는데, 특히 웨일스 민요를 좋아했다. 그는 생애 동안 마상창시합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기사들 간의 토너먼트 대회를 관람하는 걸 즐겼다.
2.2. 청년기
1297~1298년, 에드워드 1세가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대적하는 동안, 에드워드 왕자는 섭정으로서 잉글랜드에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귀환 후 1303년 파리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필리프 4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고 에드워드 왕자와 필리프 4세의 2살된 딸 프랑스의 이자벨을 약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 결혼을 통해, 양국의 분쟁 지역이었던 아키텐은 에드워드 1세와 필리프 4세의 공통 후손에게 상속되면서, 갈등이 종식되는 듯했다. 에드워드는 계모 마르그리트와 이복 동생인 브라더턴의 토머스,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중에 왕위에 오른 뒤 두 이복형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작위를 부여했다.1300년, 에드워드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했다. 이때 그는 아들을 데려가서 케어라버록 성 공방전을 치를 때 후위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301년 봄, 에드워드 1세는 에드워드 왕자를 웨일스 대공으로 선포하고, 그에게 체스터 백작령과 웨일스 북부의 땅을 수여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웨일스 가신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은 뒤 1301년 스코틀랜드 원정을 단행한 아버지와 합류했다. 그는 웨일스 병사 300명을ㅇ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해 턴베리 성을 함락했다. 1303년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브레친 공방전에 참여했다. 1304년 봄 스코틀랜드 반란 귀족들과의 협상에 참여했고, 스털링 성 공방전을 치르는 아버지와 합세했다.
1305년,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왕자간의 사이에 돈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왕자는 왕실로부터 받는 재정 지원의 범위를 놓고 왕실 재무관 월터 랭턴 주교와 분쟁을 벌였다. 에드워드 1세는 재무 장관의 편을 들어 에드워드 왕자와 그의 동료들이 궁정에서 30마일 이내로 접근하는 걸 금지했으며, 그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마르그리트 왕비가 중재해서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1306년 3월, 로버트 1세가 바데녹 영주이자 정적인 존 코민 3세를 살해하고 스코틀랜드 국왕을 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새로운 군대를 일으켰지만, 당시엔 고령의 나이었기에 아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에드워드 왕자는 아키텐 공작으로 선임되었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호화로운 의식에서 귀족 청년 300명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 의식에 참석한 이들은 로버트 1세를 기필코 무찌르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스코틀랜드 원정 중에 지나가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여성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겨울을 잉글랜드에서 보냈다. 에드워드 1세는 1306년 9월 29일에 라네르코스트에 있는 겨울 거주지로 옮겼다. 에드워드 왕자가 스코틀랜드를 떠나자, 피어스 개버스턴, 로저 모티머를 포함해 에드워드 왕자를 모시던 젊은 귀족 22명은 자기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여기고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 진영을 무단 이탈해 프랑스에서 열리는 기사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이에 분노한 왕은 10월 18일에 그들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가, 1307년 1월 23일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설득을 받아들여 대부분을 사면했다.
2.2.1. 피어스 개버스턴과의 관계
에드워드 왕자는 베아른 자작령에서 잉글랜드로 건너온 뒤 기사 토너먼트에서 탁월한 무예를 선보여 에드워드 1세의 신임을 얻어 자기 수행원이 된 피어스 개버스턴을 각별히 총애했다. 그는 재치 있고, 활기차고, 날카로우면서도 무례한 면이 있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최고의 친구로 여기고, 그에게 엄청난 명예와 선물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형제처럼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며, 아버지를 설득해 위그모어 남작령을 계승한 로저 모티머의 후견인이 되도록 했다. 모티머 가문은 웨일스 공국과 아일랜드 영지에서 광대한 토지를 누리는 영향력 큰 집안이었기에, 이 가문의 계승자를 후견할 이는 명문 귀족이 맡는 게 원칙이었지만, 에드워드 왕자의 비호로 가스코뉴의 하급 귀족이었던 피어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피어스는 이때부터 잉글랜드 귀족들의 경계를 받았다.1305년 여름, 에드워드 1세는 왕실 재무관 월터 랭턴으로부터 에드워드 왕자가 두 친구 피어스와 길버트 드 클레어에게 지나치게 많은 선물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 웨일스 궁정의 수입을 줄이며, 두 사람을 궁정에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분개한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와 몇 달간 다툼을 벌였고, 1305년 8월 4일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서신을 보내 젊은 계모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아버지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하라고 부탁했다. 나중에는 본인이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서신을 보내 친구를 잃은 슬픔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런 아들과 몇 달간 다퉜다가, 결국 분노를 가라앉히고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1306년 5월 26일 에드워드 왕자와 귀족 자제 266명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지 4일 후, 피어스도 기사 작위를 받고 웨일스 공의 가신으로 복귀했다.
1306년 여름 스코틀랜드와의 원정이 진행되고 있을 때, 피어스는 에드워드 왕자가 스코틀랜드를 떠나자 자기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여기고 로저 모티머를 비롯한 기사 22명과 함께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 진영을 무단 이탈해 프랑스에서 열리는 기사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이에 격노한 에드워드 1세는 이탈자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개버스턴과 동료들은 에드워드 왕자에게 자기들을 대신하여 왕에게 용서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지지를 받고 왕에게 그들의 입장을 변호했고, 에드워드 1세는 1307년 1월 그들을 용서하고 영지를 돌려주기로 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피어스와 항상 함께 싸우고, 서로를 보호하고, 모든 소유물을 공유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이 맹세를 지키기로 마음먹고, 피어스에게 퐁티외 백작령을 넘기고 백작에 선임하기로 했다. 퐁티외 백작령은 에드워드 왕자가 프랑스 왕의 가신으로서 유럽 대륙 내에서 소유한 영지였다. 14세기 연대기 작가 기스버러의 월터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재무관 월터 랭턴을 아버지에게 보내 피어스를 퐁티외 백작으로 진급시키려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가 왕자를 소환한 뒤 랭턴을 자기에게 보낸 이유를 직접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피어스에게 퐁티외 백작령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왕의 허가를 요청하려고 그를 보냈습니다."
아들의 답을 들은 에드워드 1세가 격노해 소리질렀다.
"이 불쌍한 놈아! 이제 땅을 분배하려 하는구나. 아직 아무 땅도 정복한 적이 없는 너희들이여! 내가 맹세하건대, 왕국을 망칠까 봐 두려워하느니 네놈이 상속할 땅을 누리게 하지 않겠다!"
왕은 그 직후에 아들의 머리카락을 꽉 쥐고 잡아당겨 땅에 내동댕이친 뒤, 지칠 때까지 아들을 폭행했다고 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월터가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려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에드워드 1세가 아들의 요청에 분노한 건 분명하다고 본다. 에드워드 1세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래의 군주가 어떤 종류의 음모로부터 적절하게 보호받을 수 없는 종자와 맹세로 묶이는 것은 터무니 없으며, 더구나 그 맹세가 왕국의 소유물과 통치를 공유한다는 것으로, 이게 실현되면 왕실의 위엄이 훼손될 테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1307년 2월 26일, 에드워드 1세는 칼라일에 영주들을 소집했다. 그 후 4월 30일에 왕국에서 개버스턴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에드워드 왕자에게 자기 허락 없이는 다시는 피어스와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피어스에게는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이 없었던 듯하다. 피어스는 비록 왕국에서 추방당했지만, 에드워드 1세로부터 연간 100마크의 넉넉한 연금을 받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피어스와 함께 도버로 간 뒤, 피어스가 떠나기 전에 260파운드에 달하는 거액과 말 다섯 마리, 태피스트리 16개, 양털 튜닉 2개를 선물로 줬다. 에드워드 왕자는 나중에 피어스에게 녹색 벨뱃 창시합복 2개를 추가로 보냈는데, 그 중 하나는 진주와 금으로 장식되었고, 다른 하나는 은으로 장식되었다.
마커스 스톤 작,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 개버스턴>, 1872년.
이렇듯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 간의 사이가 무척 각별했기에, 후대의 연대기들은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가 동성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다. <폴리누스의 연대기>는 에드워드 2세가 피어스를 "모든 면에서" 사랑했다고 주장했고, <라네르코스트 연대기>는 두 남자 사이의 친밀감이 "과도했다"고 기술했다. 멜사 연대기는 에드워드 2세가 "동성애적 악행을 즐겼다"고 언급했지만, 피어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의 생애>의 저자는 피어스가 왕을 홀렸다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그렇게나 사랑하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요나단은 다윗을 소중히 여겼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쳤다는 기록은 없다. 우리의 왕은 온건한 호의를 베풀 줄 몰랐고, 피어스에게는 자신의 본분을 잊었다. 그래서 피어스는 마법사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의 관계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토머스 프레드릭 투트(Thomas Frederick Tout, 1855 ~ 1929)는 두 사람이 동성 연인이었다는 주장은 정적들의 모함이라고 일축했다. 반면에 1988년 피어스의 전기를 쓴 JS 해밀턴은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피에르 샤플레는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고, 사생아인 아담 피츠로이를 낳았으며, 14세기 연대기 작가들은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인지에 대해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에드워드 2세가 정말로 피어스와 동성애 관계였다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자기 딸을 에드워드 2세에게 시집 보내는 걸 허락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주장했다. 존 이스트번 보스웰은 저서 <기독교, 사회적 관용, 동성애>에서 피어스가 에드워드 2세의 연인이었으며, 유럽의 세속 세력들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른 성적 도덕성에 대한 우려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로이 마틴 헤인스는 2003년 에드워드 2세의 전기에서 피어스가 살해된 것은 왕의 총애를 독차지했기 때문이지 왕의 침실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2.3. 잉글랜드 국왕
2.3.1. 결혼식과 대관식
1307년 7월 7일,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원정에 착수하려던 중 칼라일에서 사망했다. 에드워드 1세는 죽기 전에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아들을 충실히 따라줄 것이며, 피어스 개버스턴의 귀환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런던이나 도싯 인근에 있었던 에드워드 왕자는 7월 11일에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자마자 피어스를 잉글랜드로 소환하기로 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 귀족 대다수의 충성 서약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원정을 이어가지 않고 군대를 해산한 뒤 런던으로 귀환했다.에드워드 2세는 돌아온 피어스 개버스턴에게 콘월 백작 작위를 수여했고, 4,000 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수입을 안겨줬다. 또한 잉글랜드에서 가장 고귀하고 부유한 신부 중 한 사람인 조카딸 마거릿 드 클레어와 결혼시켰으며, 왕자 시절 자신과 여러 차례 갈등을 벌였던 재무관 랭턴 주교를 체포한 뒤 재무관직을 박탈했다. 1308년 1월, 에드워드 2세는 자기 신부 이자벨을 데려가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면서, 피어스 개버스턴을 섭정으로 삼았다. 이에 잉글랜드 대귀족들은 왕이 왕자나 경험 많은 대귀족 중 한 사람을 섭정으로 삼지 않고 피어스를 그 자리에 올린 것에 불만을 품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에드워드 왕자는 아키텐 공국의 공작으로서 필리프 4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1303년 파리 조약의 조건을 이행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동의했다. 1308년 1월 25일, 불로뉴에서 24살 신랑 에드워드 2세와 12살 신부 프랑스의 이자벨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에드워드 2세가 이자벨에게 준 결혼 선물은 시편이었고, 이자벨은 아버지 필리프 4세로부터 21,000 리브르 이상의 가치가 이쓴 선물과 십자가 조각을 받았다. 하지만 결혼식이 끝난 직후, 링컨 백작, 헤리퍼드 백작, 서리 백작, 펨브로크 백작은 불로뉴에 서한을 보내 피어스를 비롯한 궁정 인사들의 권력 남용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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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개버스턴 분쟁
피어스 개버스턴이 대관식에서 보인 일련의 행적에 분노한 귀족들은 1308년 2월에 열린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에게 피어스를 왕궁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가 이를 거부하자, 무장한 귀족들은 “왕에게 불복종하더라도 왕관의 존엄성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다가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가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을 진정시켰고, 회의는 그대로 끝났다. 그 해 4월에 열린 의회에서도, 귀족들은 다시 피어스 개버스턴의 추방을 요구했다. 여기에 이자벨 왕비의 아버지인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도 딸에게 행한 처우에 불쾌감을 드러내자, 에드워드 2세는 압박감을 느끼고 1308년 6월 25일에 결정을 내렸다. 피어스는 콘월 백작령을 몰수당했지만 연금 3,000 마크를 받을 수 있는 가스코뉴의 토지를 받았고, 잉글랜드 궁정을 떠나되 아일랜드 영지를 지키는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는 피어스가 다시 잉글랜드에 발을 디디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곧 교황 클레멘스 5세 및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협상해, 피어스 개버스턴이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설득하려 노력했다. 그는 그 대가로 잉글랜드 내에 있는 성전 기사단을 체포하고, 랭턴 주교를 석방하겠다고 제안했다. 1309년 1월, 에드워드 2세는 교회 대표자와 주요 귀족들 사이에 새로운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피어스 개버스턴이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왕이 개혁을 수행하는 걸 동의하는 조건으로 에드워드 2세가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 클레멘스 5세가 개버스턴을 파문하겠다는 대주교의 위협을 취소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하자, 에드워드 2세는 1309년 6월 피어스 개버스턴을 불러들였다. 그 해 7월, 스탬퍼드 조례가 통과되었다. 이는 에드워드 1세가 1300년에 합의한 조례인 <Articuli super Cartas>(헌장에 관한 기사)를 기반으로 하며, 마그나 카르타의 준수 보장과 왕권의 범위 설정을 명시했다. 의회는 그 대가로 왕이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이는 데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2.3.3. 스코틀랜드 원정 시도와 좌절
1307년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2세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런던으로 내려간 이래, 로버트 1세는 1307년에서 1309년까지 지지자들을 규합해 잉글랜드에 복속되었던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탈환하고, 잉글랜드에 손잡고 자신을 적대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모조리 축출했다. 당시 에드워드 2세는 총신인 피어스 개버스턴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로 인한 정치 혼란에 직면하느라 스코틀랜드에서의 전쟁을 소홀히 했고, 스코틀랜드 가신들의 구원 요청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사실 에드워드 1세가 대규모 원정을 잇달아 벌이느라 부채가 대단히 많이 쌓였기 때문에, 원정을 벌이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어떻게든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능한 관리들을 해고하고 궁정 비용을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특별세를 꾸준히 부과해서 세금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나 정계 혼란과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악화, 기근의 도래 등 여러 악재로 인해 세입은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고, 그의 아버지가 남긴 빚 중 6만 파운드는 1320년대에도 갚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1308년 8월 22일, 에드워드 2세는 칼라일로 군대를 소집하여 스코틀랜드로의 새로운 원정을 이끌려 했다. 그러나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고, 공식적인 취소도 없었다. 1308년 11월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휴전 협상을 벌인 후, 프랑스의 중재하에 1309년 2월 2일부터 11월 1일까지 유효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1309년 7월 30일 스탬퍼드에서 의회를 소집한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새로운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9월 29일 뉴캐슬로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총애하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다시 불러들인 이래로, 유력 귀족들은 그의 정책에 강력히 저항했다. 이에 따라 군자금이 제대로 모이지 않으면서, 원정은 취소되었다. 1309년 10월, 왕은 로버트 드 클리퍼드와 헨리 드 보몽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하여 새로운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추가 협상을 진행했다. 서유럽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나가도록 설득하고자 했던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중재를 통해 양자 간의 평화 협상이 이뤄졌지만,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결렬되었다.
1310년 6월 16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알렉산더 애버네시, 알렉산더 맥두걸, 그리고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직접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떠나지 않으면 나머지 가신들의 충성심을 잃을 것이라며, 조속히 원정에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에드워드 2세는 1310년 9월 8일에 군대를 베릭으로 소집했다. 그러나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피어스 개버스턴만 그를 따랐고, 다른 귀족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베릭에 집결한 병력은 기병 1,700명, 보병 3,000명이었다.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가 늦어도 1310년 6월까지 아일랜드에서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가일에 상륙해 왕을 도울 계획이었지만, 악천후와 역풍 때문에 함대가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대신 일부 군대는 맨 섬의 수비대를 지원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2세는 1310년 9월 중순에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9월 16일, 에드워드 2세는 록스버러에 도착했고, 9월 23일경에는 셀커크에 도착했으며, 9월 26일경에는 비가에 도착했다. 10월 중순, 잉글랜드군은 로버트 1세와 그의 군대가 스털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병력이 너무 적어서 정면 대결을 벌일 수 없었다. 10월 중순에 렌프루와 글래스고로 이동했고, 더 나아가 린리스고까지 진군했다. 이후 에든버러에 잠시 머무르면서 포스 강 남쪽에 있는 수비대를 지원한 뒤, 남쪽으로 후퇴하여 11월 11일경 다시 베릭에 도착했다. 이렇듯 잉글랜드군이 이동하는 동안, 로버트 1세는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적 식량 수집대를 끈질기게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1310년 10월 28일, 에드워드 2세는 궁정과 국고를 요크로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베릭에 1311년 7월까지 머물렀다. 이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들 역시 1310년~1311년 겨울 동안 스코틀랜드 국경에 머물렀다. 그러나 군사 작전을 재차 감행하지 못했고, 로버트 1세가 로디언을 침공했을 때 소규모 병력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와 협상하기로 하고, 로버트 드 클리퍼드와 로버트 피츠페인을 파견했다. 두 사람은 1310년 12월 17일 셀커크에서 로버트 1세와 접견해 협상했다. 그러나 피어스 개버스턴과 글로스터 백작이 멜로즈 수도원에서 만나자고 한 제의는 로버트 1세가 배신을 우려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국내의 정치적 압력이 심해지자, 에드워드 2세는 원정을 중단하고 1311년 7월 웨스트민스터로 돌아갔다.
2.3.4. 1311년 조례
피어스 개버스턴은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이래 오만한 언행을 일삼아 귀족들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다. 여러 연대기에 따르면, 피어스는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를 "유대인 요셉"이라고 불렀으며,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을 "아르덴의 검은 개"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촌뜨기"로,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를 "벨리-브리크 씨"(Mr. Belly-Break)로, 그리고 제8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를 "뻐꾸기" 또는 "창녀의 아들"[9]로 부르며 조롱을 퍼부었다고 한다.1309년 여름, 피어스 개버스턴은 왕을 설득해 왕실에 서 일하던 랭커스터 백작의 가신을 해임하도록 했다. 이에 분노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1309년 10월 요크 의회에 참석하길 거부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의회 개최를 1310년 2월까지 연기하면서 참석을 종용했다. 그는 일단 참석하기로 했지만, 왕명을 어기고 무장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요크에 나타나 왕에게 개버스턴에 대한 지나친 총애를 중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3월 16일,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 및 귀족들의 강력한 압력에 못 이겨 귀족 21명으로 구성된 '개혁 위원회' 설립에 동의했다. 토머스는 개혁 위원회의 일원이자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위원회에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처럼 왕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랭커스터 백작을 강력히 지지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뤘다.
1311년 8월 16일 런던에서 열린 의회에서, 개혁 위원회는 개혁 계획을 담을 조례를 제시하면서 피어스의 추방을 재개해달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가 잉글랜드에 계속 머무르는 대신에 개혁안을 수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귀족들은 거부했다. 결국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자기 권한을 제한하는 41개 법령을 승인했다. 이 법령에는 의회의 승인 없이 왕이 전쟁을 일으키거나, 토지를 하사하거나, 나라를 떠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의회는 왕실 행정을 장악했고, 징발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에드워드 1세 치세 때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각지의 영주민들을 직접 수탈할 권리를 얻었던 프레스코발디 은행가들은 추방되었고, 법령 준수에 대한 통제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때 제20 조항에서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국왕과 그의 국민의 공공연한 적"으로 규정하면서, 왕국 바깥으로 추방한다고 선언했다. 피어스는 11월 3일 잉글랜드를 떠나 플란데런 백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2.3.5. 피어스 개버스턴의 죽음과 반군 귀족들과의 갈등 및 화해
1311년 12월,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를 잉글랜드에 비밀리에 소환했다. 피어스는 1312년 1월 13일 나레스버러 성에서 왕과 합류했고, 왕은 이 시기에 태어난 피어스의 딸 잔의 세례 행사를 거행했다. 1월 18일,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에 대한 판결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그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반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다른 대귀족들은 왕과 피어스가 의회의 결의를 독단적으로 어겼다고 규탄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는 피어스를 파문했다. 그 후 개혁 위원회는 왕국을 여러 개의 방어 구역으로 나누고, 펨브로크 백작과 서리 백작에게 피어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1312년 5월 4일, 랭커스터 백작은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와 함께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가 있는 뉴캐슬로 쳐들어갔다. 두 사람은 스카버러 요새로 피신하면서 돈과 보물을 전부 내팽개쳤고, 랭커스터 백작이 이를 압수했다. 에드워드 2세는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요크로 향했고, 피어스는 스카버러에 홀로 남겨졌다. 이후 대귀족들이 스카버러 성을 포위하자, 피어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5월 19일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8월 1일에 열릴 의회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재판에 출두할 테니, 그 전까지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피어스를 옥스퍼드셔로 이송해 데딩턴 교구에 남겨뒀다.
15세기 연대기 삽화,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에게 짓밟힌 피어스 개버스턴.
그러나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제10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그리고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은 재판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워릭 백작이 총대를 매기로 하고, 6월 10일 피어스를 납치해 워릭으로 끌고 갔고, 랭커스터 백작 등이 그곳에 모여서 약식 재판을 거행했다. 토머스는 피어스가 추방령을 3번이나 어겼으니 죽어 마땅하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가 피어스를 8월 1일에 열리는 재판 때까지 신변을 보장하기로 한 자신의 약속을 상기하며 당장 풀어달라고 요구했지만, 토머스 등은 듣지 않고 6월 19일 밤 참수형을 집행하게 했다. 개버스턴은 자비를 간청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하고, 기 드 뷰챔프에게 피어스를 그의 영지로 끌고 가서 처형을 감독하게 했다. 피어스는 블랙로우 힐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두 웨일스인에게 참수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 개버스턴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연대기 <에드워드 2세의 생애>(Vita Edwardi Secundi)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슬픔을 느꼈고, 이내 친구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잉글랜드 정계에서도 피어스를 정식 재판을 받거나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죽여버린 것이 정당한지를 놓고 논란에 휩싸였다. 많은 성직자들은 부당하고 잔혹한 처사였다고 비난했고, 초대 윈체스터 백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 등 여러 영주 역시 토머스가 왕권을 실추했다고 규탄했다. 하지만 토머스의 추종자들은 나라를 망친 간신을 정당하게 처형했을 뿐이라며 토머스를 옹호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는 자기가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하게 한 토머스에게 반감을 품고, 이때부터 에드워드 2세 지지로 돌아섰다.
1312년 8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는 토머스와 에드워드 2세 간의 갈등을 조정하여 평화를 구축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토머스는 워릭 백작, 헤리퍼드 백작과 함께 9월 3일에 군대를 일으켜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에 왕실군이 웨이크 마을에서 이들을 저지했다. 이제 이제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듯 했지만,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를 저지하고 협상을 중재했다. 이자벨 왕비의 삼촌인 에브뢰 백작 루이 데브뢰와 교황 특사들도 자제할 것을 호소하자, 양자는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루기로 했다.
협정은 1313년 2월 13일에 체결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살해한 자들을 사면하기로 했고, 토머스 등은 왕권을 더이상 침해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원정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범죄자로 규탄하라는 토머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리하여 양자간의 응어리가 잘 해소되지 않았고, 토머스 등 일부 귀족은 개버스턴의 처형을 합법화하지 않은 것에 항의하며 의회 출석을 거부했다.
한편,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는 에드워드 2세를 대신해 프랑스와 협상을 벌여서 가스코뉴를 돌러싼 오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에드워드 2세와 이자벨 왕비는 1313년 6월 파리를 방문해 필리프 4세와 협상했다. 에드워드 2세와 필리프 4세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웅장한 의식을 치르고 필립의 아들들과 다른 200명을 기사로 임명하고 센 강둑에서 잔치를 벌였으며, 이자벨 왕비와 함께 새로운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필리프 4세는 관대한 조건으로 가스코뉴 분쟁을 마무리하기로 동의했다.
프랑스에서 귀환한 뒤, 에드워드 2세는 필리프 4세의 지지를 토대로 아직도 자기에게 반항하는 귀족들을 압박했다. 이후 귀족들과 협상한 끝에, 1313년 10월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중재에 따라 랭커스터, 워릭, 헤리퍼드 백작과 그들의 지지자 500명을 정식으로 사면했다. 그 대신, 의회는 세금을 인상하고, 왕이 스코틀랜드 원정을 단행하는 걸 전적으로 돕기로 했다. 또한 에드워드 2세는 교황으로부터 16만 플로린(2만 5천 파운드)를 빌렸으며, 이탈리아 은행가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았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2세는 처음으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스코틀랜드를 칠 수 있게 되었다.
2.3.6. 배넉번 전투
로버트 1세는 1314년까지 에든버러를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요새 대부분을 탈환하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입해 칼라일까지 약탈했다. 이제 군자금을 대거 확보하고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 반군을 상대로 결정타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314년 5월 19일 베릭에 대규모 군대를 집결했는데,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15,000명에서 20,000명에 달했다고 하고, 또다른 연대기는 보병 22,000명, 기사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왕의 생애>의 저자는 이렇게 기술했다.이처럼 많은 무리가 잉글랜드에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레 여러 대를 펼쳐 놓으면 20리그나 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에드워드 2세 본인이 군대를 직접 이끌었고,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 보몽 남작 헨리 드 보몽,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 디스펜서 남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 그리고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왕과 함께 원정에 참여했다. 다만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은 전쟁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이유로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 사이,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남부의 잉글랜드군 주요 거점인 스털링 성을 포위했다. 수비대 사령관 필립 드 모브레이는 포위군과 휴전 협정을 협상했는데, 1314년 6월 24일까지 성이 해방되지 않으면 항복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로버트 1세는 기존 전략대로 산악지대로 퇴각해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유격전으로 일관하려 했지만, 더 이상 영지들이 파괴되는 걸 원하지 않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회전을 피하면 이탈하겠다고 압력을 가하자, 전면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장을 물색한 끝에, 배넉번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당시 스코틀랜드군은 5~6,000명 또는 10,000명의 보병대와 기병 500명을 보유했다.
양군은 1314년 6월 23일 배넉번 습지에서 마주쳤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습지로 둘러싸인 숲이 우거진 언덕을 점령했다. 첫번째 교전에서, 잉글랜드군의 공세가 격퇴되었고 선봉대 사령관 헨리 드 보훈이 전사했다. 그날 밤,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진영에서 넘어온 스코틀랜드 기사로부터 적이 일전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며, 왕과 귀족들간의 갈등이 심해서 단합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적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고, 6월 24일 아침 전병력을 이끌고 숲에서 출진해 잉글랜드 진영으로 향했다.
에드워드 2세는 적군이 숲에서 나와서 정면 대결하려 나올 줄은 예상 못하고 있다가 적군이 가까이 오자 황급해 전군을 출진시켰지만, 전투 대열로 재편성하는 데 애를 먹었고, 적의 대형을 교란해야 할 궁수들은 선두가 아닌 후방에 배치되었다. 여기에 잉글랜드 기병대는 구릉 지형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로버트 1세의 창병대는 쉴트론[10]을 결성했다. 그 후 벌어진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선봉대는 궤멸되었고, 지휘관인 글로스터 백작은 전사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잉글랜드군이 속절없이 밀렸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적을 습지로 몰아붙여서 살육을 자행했다.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전사자는 10,000명이 넘었고, 포로는 500명이었으며, 여러 대영주와 기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생포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전장에 끝까지 남아서 항전하려 했지만, 결국 펨브로크 백작의 거듭된 간청에 따라 전장을 떠나기로 했다. 그는 개인 인장과 방패, 말을 잃고 도주했다. 우선 스털링 성으로 이동했지만, 일부 사료에 따르면 입성을 거부당했다고 하고, 다른 사료에 따르면 안에 들어가되 나중에 스코틀랜드군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자 입성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의 추격을 가까스로 뿌리치고 던바로 도주했고, 스털링 성은 배넉번 전투 다음날 로버트 1세에게 항복했다. 이제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모든 귀족과 백성에게서 왕으로 인정받았다.
2.3.7. 1314~1316년 스코틀랜드군의 잉글랜드 북부 습격
로버트 1세는 배넉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협상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잉글랜드 북부 습격을 이어갔다. 1314년 8월 초,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와 로버트 1세의 심복 제임스 더글러스는 잉글랜드 북동부로 진군해 리치먼드셔까지 진군하면서 가축을 약탈하고 곡물 밭을 파괴한 후, 스웨일데일과 스테인무어를 거쳐 막대한 전리품을 챙긴 뒤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브러, 애플비, 커크 오스월드를 방화했다. 또한 로버트 1세는 13세기에 조부가 소유했던 타인데일을 방문해 그곳 주민들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314년 8월, 에드워드 2세는 에이머 드 발랑스를 베릭 성과 트렌트 강 사이의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 선임했지만, 잉글랜드군은 베릭 수비대를 강화하는 것 외에는 스코틀랜드군의 공세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1314년 9월 20일 스코틀랜드 사절과 존 보테투르가 이끄는 잉글랜드 대표단이 더럼에서 평화 협상을 벌였다. 양자는 1314년 10월 6일부터 휴전하기로 합의했으며, 배넉번 전투에서 생포되었던 잉글랜드 영주 및 기사들 대부분이 풀려났다. 그 대가로,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의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러와 그의 딸, 자매, 그리고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을 풀어줬다. 그해 11월, 요크의 윌리엄 그린필드 주교, 더럼의 리처드 켈로 주교, 요크의 세인트 메리 수도원장이 추가 협상을 위한 사절로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1314년 11월 6일, 켐버스케네스 수도원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왕국을 아직도 지지하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평화 협상이 실패한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약탈을 재개했다. 1315년 1월 3일, 요크 대주교와 더럼 주교는 북부 잉글랜드의 여러 귀족을 요크에 초대하여 회의를 연 뒤, 스코틀랜드의 침입에게서 북부 잉글랜드를 방어할 방안을 논의했다. 1315년 2월, 에이머 드 발랑스는 노섬벌랜드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미트포드 성을 건설했다. 그러나 배넉번 전투에서 막대한 전력을 잃은 여파가 여전히 심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잉글랜드 북부를 여러 차례 습격했다. 로버트 1세가 직접 습격을 지휘한 적은 거의 없고, 대신 에드워드 브루스와 제임스 더글러스가 습격을 지휘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약탈전을 점점 더 대담하게 벌였다. 그들은 '호빈(Hobin)'이라고 불리는 작고 튼튼한 말을 탔고, 기수들은 이 말의 이름을 따서 '호벨라(Hobelar)'라고 불렸다. 병사들은 보통 가벼운 갑옷만 입었고, 공격할 때는 쉴트론을 형성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배넉번 전투에서 매우 효과적임이 입증되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아마도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많은 짐마차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공격할 때는 신속하게 이동했지만, 철수할 때는 가축 떼를 북쪽으로 몰아야 해서 느릿느릿하게 이동했다.
1315년 초, 스코틀랜드인들은 타인데일까지 진격하여 홀트휘슬, 헥섬, 코브리지를 점령했다. 그해 6월에는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더럼 주로 쳐들어가서 하틀풀을 파괴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는 그해 8월 초 베릭에 도착한 뒤 6월 22일부터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칼라일을 구원하기 위해 일부 군대를 파견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칼라일을 맹공격했지만, 초대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의 거센 저항으로 공략에 실패하고 8월 1일에 철수했다. 1315년 8월 30일, 에드워드 2세는 겨울 동안 잉글랜드 북부에 머물러서 스코틀랜드를 막겠다고 선언했고, 11월 1일 에이머 드 발랑스를 대신해서 헨리 드 보몽을 스코틀랜드 변경의 동부 지역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1316년 1월 7일, 베릭 수비대는 로버트 1세와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끈 스코틀랜드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2.3.8.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
1315년 5월, 에드워드 브루스는 형 로버트 1세의 지시에 따라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는 아일랜드 영지를 파괴함으로써, 아일랜드에서 병력과 물자가 차출되어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걸 돕지 못하게 하려 했다. 또한 잉글랜드 함대들이 아일랜드 동부 항구인 더블린, 던독, 드로이다에 자리 잡고 스코틀랜드 서해안을 위협했기에, 이를 원천 봉쇄하려면 아일랜드 공략이 필요했다. 한편, 에드워드 브루스는 형과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게일인들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의 아르드리가 되어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려는 야망을 품었다. 로버트 1세는 1315년 칼라일 공략 실패 후 1316년 여름까지 거의 1년간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지 않고, 아일랜드로 간 동생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서 종횡무진했다. 그는 얼스터의 잉글랜드-아일랜드 군주들의 군대를 잇달아 격파했고, 캐릭퍼거스 성 수비대를 굴복시킨 뒤 던독까지 진군했다. 이후 앤트럼의 코너를 본부로 삼고 남쪽으로 약탈을 감행해 아일랜드 보안관 에드먼드 버틀러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을 여러 전투에서 잇달아 격파했다. 상황이 이토록 악화되자, 1315년 9월 링컨에서 열린 잉글랜드 의회는 에드워드 2세의 대집사 존 호담을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아일랜드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한 바 있었던 존 호담은 이제 스코틀랜드군에 대한 저항군을 조직할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토머스 던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해적들이 앵글시의 홀레히드 항구를 약탈한 뒤 존 호담이 타고 있던 왕립 선박인 카나번의 제임스 호를 습격했고, 제임스 호는 이들을 가까스로 뿌리친 뒤 체스터에 한동안 정박했다. 11월 5일이 되어서야 더블린에 도착한 존 호담은 도시 방어군을 조직했다. 한편, 웨일스 카디건셔의 왕실 집사 그루피드 르위드는 에드워드 브루스가 보낸 밀사와 접촉한 사실이 발각되었고, 1316년 12월부터 1318년까지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브루스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더블린은 존 호담 등의 지휘하에 끝까지 버텼고, 게일인들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얼스터를 제외하면 열렬히 호응하지 않았다. 1316년 8월 캐릭퍼거스 성을 공략한 에드워드 브루스는 그해 가을 지원군을 모집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1317년 1월, 로버트 1세는 친히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동생과 함께 아일랜드로 진군했다. 그러나 두 형제의 겨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물자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로버트 1세는 군대를 얼스터로 이동시킨 뒤 스코틀랜드로 귀국했고, 잉글랜드 북부에 공격을 집중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서 남아 전쟁을 이어갔지만, 1318년 10월 던독 인근의 포하트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전사했다. 에드워드 브루스의 수급은 참수되었고, 사지가 4개로 잘려나가 아일랜드의 네 지역으로 보내졌고, 머리는 요크에 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보냈다. 에드워드 2세는 아일랜드를 수 년간 휩쓸었던 스코틀랜드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포하트 전투의 승리를 이끈 존 드 버밍엄을 라우스 백작에 선임했다. 1318년 12월, 잉글랜드군이 캐릭퍼거스 성을 함락시키면서, 아일랜드에서의 스코틀랜드 세력은 일소되었다.
2.3.9. 심화되는 위기
베넉번 전투에서 참패한 뒤, 에드워드 2세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1314년 9월 요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원정 실패 책임을 에드워드 2세에게 돌리면서, 왕에게 군자금을 제공하길 거부했으며, 왕실 유지 비용을 절감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는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토머스는 개혁 위원회의 수장으로서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대다수 요직을 차지했고, 행정은 그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의 동의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1315년 8월, 토머스는 잉글랜드 북부의 왕실 총독에 선임되었고, 1316년 겨울에 열린 의회에서 국왕의 수석 고문으로 선임되었다.그러나 랭커스터 백작은 곧 곤경에 처했다. 잉글랜드 전역에 기근이 창궐했고, 북부 국경 지역은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황폐해졌다. 또한 웨일스에서는 잉글랜드의 지배에 항거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토머스는 이 일련의 사태 해결에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고, 거의 모든 시간을 자기 영지에서 보냈다. 이에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토머스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1316년 여름에 열린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 북부를 파괴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려 했지만, 토머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8월 15일에 둘째 아들 앨섬의 존을 낳은 이자벨 왕비는 토머스와 왕의 화해를 유도하고자 토머스를 존의 대부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 의식에 참석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거절당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후에도 잉글랜드 북부를 지속적으로 습격했지만, 랭커스터 가문의 영지에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않아 많은 이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1317년 2월 9일 클라렌던에서 열린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가 로버트 1세와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배신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고, 토머스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317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의 원정을 재차 계획했다. 이 작전은 원래 7월 8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국왕을 대신하여 외교 사절로 대륙에 파견되었던 펨브로크 백작과 배들스미어 남작이 아직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아 연기되었다. 이후 8월 11일 뉴캐슬에서 재차 원정을 떠나기로 했지만, 이보다 전인 7월 8일에 스코틀랜드 군대가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동 원정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토머스는 이에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끝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고, 원정은 9월 15일로 연기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주교 7명과 펨브로크 백작, 헤리퍼드 백작으로 구성된 고위 사절단을 랭커스터 백작령의 중심지인 폰트프렉트 성으로 보내 토머스에게 합류를 요청하게 했지만, 토머스는 목숨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며 끝내 가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일단 단독으로 진군하기로 하고, 1317년 9월 4일 요크로 출진했다. 그러던 중 폰트프렉트 성 근처를 지나갔는데, 토머스는 왕이 지나가자마자 다리를 막아서 지원군이 왕에게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는 뉴캐슬에서 기병 1,500명, 경기병, 궁수, 석궁병 및 보병으로 구성된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더럼에서 새로 선출된 주교인 루이스 드 보몽과 그의 추기경인 고슬랭 드 장, 루카 피에스키가 길버트 미들턴에게 공격받아 재산을 약탈당했다.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가 이 습격을 주도했다고 의심하고, 9월 8일 직후 원정을 중단했다. 그 후 1317년 11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휴전 협약을 맺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토머스의 아내 앨리스가 리처드 드 생 마르탱에게 도싯의 캔포드에 있는 자기 영지에서 납치되어 워렌의 리게이트 성으로 이송되었다. 사실 이 납치는 자작극이었다. 앨리스는 오래 전부터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시종인 유불루스 르 스트레인지와 불륜 관계를 이어갔고, 서리 백작은 아내 바르의 조안과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는 걸 토머스가 협조해주지 않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선고받게 한 것에 불만을 품고 앨리스의 동의 하에 납치한 것이었다. 토머스는 이에 분노해 앨리스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서리 백작의 두 성을 몰수했다.
그 후 랭커스터 백작령과 서리 백작령 사이에 무력 충돌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에드워드 2세는 두 사람에게 당장 사적인 전쟁을 중단하고 법정에서 해결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토머스는 자신의 안전을 두려워해 왕실 법정에 참석하는 걸 거부했다. 이 일로 위상이 실추된 토머스는 1317년 9월 궁정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이들에게 경원시되었다. 그의 옛 동지였던 헤리퍼드 백작 , 아룬델 백작과 모티머 가문, 그리고 레이놀즈 대주교는 토머스를 떠나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소위 '온건파' 집단에 가담했다. 이들은 왕과 토머스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원칙에 따라 나라를 안정시키는 걸 목표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궁지에 몰린 토머스는 에드워드 2세에게 새로운 총신인 제2대 몬터규 남작 윌리엄 드 몬터규, 초대 오들리 남작 휴 드 오들리 등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318년 여름 의회에서 토머스의 추종자들과 왕을 옹호하는 이들 간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이후 펨브로크 백작 등의 중재 노력 끝에, 양자는 1318년 8월 9일 리크 조약을 맺고 화해하기로 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마그나 카르타를 따르고 총신들을 해임하기로 했고, 토머스는 왕의 수석 고문 직에서 물러나고 개혁 위원회에서 사퇴하기로 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펨브로크 백작이 이끄는 귀족 17명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의 통제를 받았다. 이 위원회에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가 있었는데, 그는 곧 왕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는 대신이 되었다.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는 리크 조약에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 위원회에 포함되었고, 아들의 새로운 지위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했다.
1318년 4월 초, 스코틀랜드군이 야간에 기습 공격해 베릭 성을 함락했다.(베릭 공방전) 이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던 유일한 요충지인 베릭 성이 스코틀랜드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기로 마음먹고, 5월에 요크셔로 쳐들어가 하보트, 워크 및 미트포드 성을 점령한 뒤 노샐러튼, 리폰, 폰트프랙트까지 진군했다. 리폰 주민들은 대성당으로 피신한 뒤 도시가 파괴되지 않는 조건으로 1,000 마크를 지불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나레스버러를 불태운 후 스키튼을 거쳐 철수했다.
베릭이 함락된 사건은 잉글랜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에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화해한 뒤 1319년 늦여름에 함께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9월 7일부터 베릭을 포위했다. 그러나 월터 스튜어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제임스 더글러스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적이 포위를 저절로 풀도록 유도하고자 베릭을 우회하여 요크셔를 위협했다. 요크의 대주교 윌리엄 멜튼과 보안관 존 호담이 그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모았지만, 9월 12일 마이톤 전투에서 제임스 더글러스와 토머스 랜돌프에게 패배했다. 토머스는 마이톤 전투 소식을 접하자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2세는 9월 17일에 베릭을 공략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철수했다.
2.3.10. 디스펜서 전쟁
제2대 디스펜서 남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의 아들인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1318년 에드워드 2세의 수석 시종이 된 이래 영지 확보에 골몰했다. 그는 1316년 글래모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뒤 런던 탑에 수감되었던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왕에게 인도받은 뒤 재판도 없이 처형한 후 허웰린의 영지를 몰수했다. 그 후 사우스 웨일스에서 자신의 영지를 확대하는 데 골몰하면서 다른 영주들의 영지에 눈독들였다. 초대 오들리 남작 휴 오들리가 그윈루그를 공식적으로 차지하기 전에, 그는 그곳의 귀족들을 매수해 자기를 지지하도록 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그윈루그를 휴에게 넘겨줬고, 오들리는 좀더 규모가 작은 영지로 만족해야 했다. 여기에 제2대 기퍼드 남작 존 기퍼드가 받을 예정이었던 드라이슬윈 성에서도 비슷한 공작을 벌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에 웨일스 변경 지대의 영주들은 휴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휴는 수석 시종으로서 왕과 언제든지 직접 접촉할 수 있었고, 다른 영주들, 심지어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 조차도 왕에게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한 연대기 작가는 에드워드 2세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몸과 영혼을 다해 사랑했다고 기록했다. 휴가 왕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지만,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분명하다. 이렇듯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그에 대한 대귀족들의 반감은 갈수록 심해졌고,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 역시 그가 왕을 좌지우지하고 왕과 자신의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여겨 반감을 품었다.
1320년, 고워의 영주 윌리엄 7세 드 브라우즈는 자기 작위를 사위인 존 모브레이에게 팔기로 했다. 이때,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왕에게 존 모브레이 대신 자신에게 고워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고워를 몰수한 뒤 휴에게 수여했다. 이 조치는 대다수 웨일스 변경지대 영주의 분노를 촉발했고, 휴를 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휴 오들리가 동맹을 맺었고,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그들을 후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321년 5월,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 드 보훈 등이 이끄는 웨일스 반군이 떨쳐 일어나 디스펜서 가문의 땅으로 쳐들어가서 뉴포트, 카디프, 케어필리를 점령하고, 글로스터셔와 글래모건 영지를 황폐화했다. 그 후 모티머 등은 폰트프랙트 성에서 토머스와 만났고, 토머스는 동지들의 땅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6월 28일 셔브룬인엘멧에서 열린 회의에서, 반란 귀족들은 디스펜서 가문의 영지를 몰수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로저 모티머는 분견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이동하면서, 장병들에게 왕의 권위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왕실 문장이 있는 녹색 유니폼을 입도록 했다. 7월 말, 모티머는 런던 탑을 포위했고, 8월 1일에는 토머스와 다른 영주들이 합류했다. 반군은 왕에게 디스펜서 부자 등 총신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에드워드 2세를 더는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2세는 디스펜서 부자를 해임하길 거부하면서,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저들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 펨브로크 백작은 이자벨 왕비를 중재자로 모셨고, 왕비는 반란 귀족들의 의견을 접수한 뒤 왕에게 나아가 무릎 꿇고 나라의 안정과 국민의 이익을 위해 총신들을 추방해달라고 간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마음이 흔들렸고, 일단 반군 귀족들과 휴전을 맺고 협상을 좀더 이어가기로 했다. 결국 아버지 휴는 1321년 8월 14일에 추방되어 보르도로 피신했고, 그의 아들 휴는 도버 해협에서 해적 행위를 저질렀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복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펨브로크 백작의 도움을 받아 이복형제들, 여러 백작, 주교를 포함하는 연합을 결성하고 새로운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던 1321년 10월, 이자벨 왕비가 캔터베리로 가던 중 개혁 위원회의 일원이자 왕실 집사인 바스톨로뮤 배들스미어가 소유한 리즈 성에 들리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그 후 성 수비대와 왕비의 수행원들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졌고, 왕비의 하인 6명이 살해되었다. 이에 1321년 10월 말, 펨브로크 백작이 지휘하는 왕실군이 왕실군이 리스 성벽 외곽에 주둔하여 압박을 가했다.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리즈 성을 구원하러 달려갔지만, 토머스가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왕실군에 감히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10월 31일, 리즈 성이 항복했고, 성주와 그의 병사들은 처형되었으며, 베들스미어의 가족들은 런던으로 보내졌다.[11]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에드워드 2세의 복수를 두려워해 북쪽으로 철수했다.
1321년 12월 1일,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백작과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디스펜서 부자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 그 해 12월 중순, 에드워드 2세는 반역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왕실군이 추격하자,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서둘러 도주했다. 이중 로저 모티머는 폰트프랙트 성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결국 모티머는 1322년 1월 22일 슈루즈버리에서 에드워드 2세에게 항복하고 런던 탑으로 압송되었다. 그 해 2월,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영지로 진군해 테트버리 성을 함락했다. 이렇듯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토머스는 로버트 1세와 협상해 스코틀랜드군의 지원을 받아내려 애썼고, 런던에 서신을 보내 왕이 배신했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국가 이익의 옹호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그를 지지해주지 않았고, 로버트 1세 역시 그를 위해 피를 흘려주고 싶지 않아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다.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처형.
그 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테트버리 성을 함락한 왕실군과 버튼 다리에서 교전했으나 패배한 뒤 북쪽으로 이동해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합세했다. 1322년 3월 16일, 초대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가 지휘하는 왕실군이 버러브리지 인근 나무 다리에서 반란군과 대면했다. 이어진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험프리는 다리를 빼앗으려 했다가 전사했고, 토머스는 달아났다가 다음 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에드워드 2세에게 항복했다. 그 후 폰트프랙트로 이송된 뒤 약식 재판을 받았다. 영주로 구성된 재판관들은 그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교수형 후 사지 절단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그가 왕실의 혈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참수형으로 감형하기로 했다. 토머스는 1322년 3월 22일에 처형되었고, 추종자 23명이 그와 함께 참수되었으며, 다음 날에는 6명이 더 처형되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전국에 특별 법원 제도를 신설해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처벌했다. 판사들에게는 피고인에게 어떤 형을 선고해야 할지 미리 알려주었고, 피고인은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처형되었고, 어떤 이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벌금을 물었다. 토지는 몰수되었고, 살아남은 친척들은 구금되었다. 처형당한 사람들의 유해는 네 조각으로 잘려 2년간 대중에 전시되었다.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와 삼촌인 치크 남작 로저 모티머는 남은 생애 동안 런던 탑에 감금되어야 했다. 에드워드 2세는 반란에 가담한 자들로부터 영지를 모조리 몰수한 뒤, 디스펜서 가문을 비롯한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에게 보상으로 나눠줬다.
2.3.11. 스코틀랜드와의 전황 악화와 휴전 협상
1322년 3월, 에드워드 2세는 디스펜서 전쟁을 종식한 뒤 요크에서 의회를 소집해 제2대 랭커스 백작 토머스를 비롯한 반군 귀족들이 강요했던 법령을 폐지하고 스코틀랜드 전쟁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핸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뉴캐슬에 집결해 스코틀랜드를 향한 새로운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 전에 로버트 1세가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1322년 6월 17일, 로버트 1세는 최측근인 제임스 더글러스,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스코틀랜드 대집사 월터 스튜어트와 함께 칼라일을 향해 진격했다스코틀랜드군은 홀름컬트럼 수도원을 먼저 접수하고 심하게 파괴한 뒤, 코플랜드 영지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후 한여름에 에그레몬트를 지나가면서 방앗관 2개를 불태웠다. 퍼니스 수도원장은 로버트 1세에게 자기 영지를 보전해달라며 돈을 줬지만, 로버트 1세는 이를 무시하고 퍼니스 영지 역시 약탈하고 방화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랭커스터 시를 향해 진군하면서 네더 켈릿과 토리솔름을 파괴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남쪽으로 이주했다. 라네르코스트 연대기에 따르면 그 지역에 있던 교회 2곳 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7월 2일 랭커스터에 도착한 스코틀랜드군은 나흘간 그곳에 머물다가 프레스턴을 거쳐 스커튼으로 이동하면서, 그곳에 있던 밀 작물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프레스턴은 이때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수십 년간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다. 일부 스코틀랜드 분견대는 샘스베리로 진군해 그곳을 약탈했다. 이후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로 철수하다가 칼라일에 도착해 5일간 머물면서 부하들에게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도록 한 뒤, 7월 24일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군은 이번 원정에서 막대한 가축과 전리품을 확보해, 잉글랜드군의 예상되는 반격에 대비할 보급품과 식량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1322년 8월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 그리고 라우스 백작 존 드 버밍엄과 함께 2만 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북상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수중에 넘어간 베릭 성을 우회한 뒤 에든버러로 진군했다. 로버트 1세는 이들과 대적하는 걸 회피하고자 군대를 포스 강 건너편으로 철수하면서, 잉글랜드군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을 가져갔다. 에드워드 2세는 로디언에서 적군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단지 절름발이 소 한 마리만 발견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서리 백작은 그 소를 보고 이렇게 농담했다고 한다.
"저 소는 내가 지금까지 본 소 중에서 가장 비싼 소일 것이다. 아마 천 파운드 이상 될 것이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8월 19일 머슬버러에서 야영한 뒤, 함대의 보급을 받고자 항구 도시인 리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송 함대는 폭풍우로 인해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리스에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8월 말에 국경으로 후퇴했다. 이때 에드워드 2세의 사생아인 아담 피츠로이가 사망했다. 9월 2일 잉글랜드에 도착한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남을 의사를 밝혔고, 9월 26일 밤버러, 워크워스, 던스턴버러, 올닉 성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직면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한편,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군이 돌아가자 공세를 재차 벌이기로 했다. 9월 30일, 솔웨이 만에서 배를 타고 원더미어의 보우네스 인근으로 이동한 그는 10월 5일 칼라일 주변 지역을 파괴해,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가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도록 했다. 그 후 페나인 산맥을 통과하면서 스콧비, 칼라튼, 컴류 교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이렇게 빨리 쳐들어올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한 뒤 리보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신을 추격하고 있으며, 이미 몇 킬로미터 떨어진 노스앨러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여러 귀족과 군대에 복귀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10월 14일 스코틀랜드군이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리치먼드 백작이 이끄는 왕의 호위대를 격파했다. 에드워드 2세는 가까스로 체포를 모면하고 요크 지방으로 도주했고, 측근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새로운 군대를 모집했다.
한편, 타인머스 수도원에 머물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는 스코틀랜드군이 접근하자 남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군대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적대했던 이자벨은 단호히 거부하고 다른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그러지 못했고, 타인머스는 곧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게다가 해상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플란데런 백국 함대가 순찰했다.
이자벨은 적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호위대 일부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배를 징발하도록 했다. 그 후 이자벨과 수행원들이 배에 타는 동안, 스코틀랜드군이 도시로 진입하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이자벨의 수행원 2명이 사살되었다. 이자벨은 배에 오른 뒤 플란데런 선박들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상륙한 뒤 요크로 가서 남편과 합류했다. 이자벨은 에드워드 2세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속아서 자신을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맞서 이자벨과 동맹을 맺은 더럼 주교 루이스 드 보몽이 이자벨이 제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결혼 생활은 파탄났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의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별동대를 이끌고 랭커셔와 요크셔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는 많은 종교 건물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보존해줬다. 그 후 해안가를 따라 이스트 라이딩으로 진군하면서, 인근 교구에 있던 수도원들로부터 몸값을 뜯어냈다. 로버트 1세는 10월 20일 베벌리 타운으로부터 400파운드를 받아낸 뒤 스키튼으로 진군하면서 여러 마을과 도시로부터 역시 몸값을 받아내는 대가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지 않았다. 이윽고 스키튼에 도착한 스코틀랜드군은 행군을 멈췄고, 토머스 랜돌프는 10월 22일 왕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혹독한 겨울 날씨와 폭우가 닥치자 스코틀랜드로의 귀환길에 올랐고, 11월 2일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는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칼라일 주변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가 초토화되는 걸 목도하고, 더 이상 로버트 1세에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에드워드 2세의 허락 없이 스코틀랜드와 협상하기로 했다. 1323년 1월 3일, 하클레이는 로크마벤에서 로버트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인정받고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에 4만 마크를 지불하고 에드워드 2세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하기로 했다. 또한 에드워드 2세가 이 조약을 존중하도록 하기 위해 무력 사용이 필요한 경우, 로버트 1세와 하클레이는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하클레이가 자기 허락 없이 그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했다. 그는 즉시 체포령을 내렸고, 하클레이는 2월 25일 체포된 뒤 3월 3일 모든 직위와 영지를 박탈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렇지만 에드워드 2세 역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로버트 1세와 재협상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1323년 3월 14일에 5월 22일까지 유효한 임시 휴전을 맺었다. 4월 29일 휴전 기간이 6월 2일로 연장되었고, 세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가 대표하는 스코틀랜드 대표단이 뉴캐슬로 향했다. 5월 1일, 에드워드 2세는 펨브로크 백작, 엑서터의 월터 스테이플던 주교, 휴 르 디스펜서, 로버트 불독에게 장기 휴전 협정을 체결할 권한을 위임했다.
처음에는 협상이 느릿하게 진행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5월 11일 자 편지에서 펨브로크 백작에게 최근 몇 년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이 저지른 수많은 습격과 범죄에 대해 불평했다. 그러다가 1323년 5월 말, 대표단은 평화 조약에 합의하지 않고, 1336년 6월 12일까지 최소 13년간 유효한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로버트 1세는 이번에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두 대표단은 요크의 비숍소프에 도착했고, 요크 대주교의 궁정에서 국왕과 특별히 소집된 내무부는 5월 30일에 장기 휴전을 인정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추가 협상을 시도했다. 1324년 11월 18일, 그의 사절인 세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요크에서 잉글랜드 대표단을 만났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국왕이 스코틀랜드 왕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스코틀랜드가 요크까지 이르는 잉글랜드 북부의 대부분을 넘겨받을 것을 요구했으며,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동부 에식스에 있는 그의 가문의 옛 영지를 돌려받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대관식에 사용되는 운명의 돌을 반환해야 했다. 그 대가로, 로버트 1세는 자기 딸 한 명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왕자 사이의 결혼 동맹을 프랑스 국왕과 교황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측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치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2.3.12. 디스펜서 부자의 전횡
디스펜서 전쟁에서 승리한 뒤,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의 권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아버지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는 윈체스터 백작으로 선임되었고, 아들과 함께 왕실을 장악했다.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궁정에 참여하는 충성파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정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또한 디스펜서 부자는 막강한 권력을 활용해 영주들로부터 영지를 꾸준히 갈취했다.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미망인인 앨리스 드 라시는 왕에게 자기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받았고,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의 미망인 마리 드 샤티용생폴은 디스펜서 가문으로부터 헐값에 영지를 팔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반란에 가담했다가 처형된 로저 다모리의 미망인 엘리자베스 드 클레어는 우스크에 있던 재산을 고워의 재산과 교환하도록 강요당했다. 이후 윌리엄 드 브라우즈가 엘리자베스 드 클레어를 설득해 고워를 돌려받았지만,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가 개입해 고워를 빼앗고 아들에게 넘겼다. 이후에도 디스펜서 부자는 체프스토, 에버게이브니, 실게란, 펨브로크셔 전체를 인수했다. 이제 그들의 영지는 와이 강에서 테이피 강까지 걸친 사우스 웨일스 일대를 거의 석권했으며, 아들 디스펜서는 7,000 파운드에 달하는 연금을 받았다.
이렇듯 디스펜서 부자의 전횡이 심해지자, 두 부자와 그들을 비호하는 에드워드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는 에드워드 2세에게 처형된 인사들이 신격화되는 현상을 야기했다. 토머스가 처형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매장지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퍼졌고, 폰트프랙트에 있는 그의 무덤과 백작의 초상화가 있는 기념비가 성립된 조례를 기념하여 세인트 폴 대성당 기둥에 고정되면서 순례의 대상이 되었다. 14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그의 연대기에서 토머스가 "신중하고 독실한 사람이었으며, 폰트프랙트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적었다. 그가 생전에 저질렀던 실책과 단점은 잊혀졌고, 그의 이미지는 성 조지의 이미지와 연관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분개해 세인트 폴 대성당 석판을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토머스의 무덤에 경비병들을 배치해 순례자들을 막도록 했지만, 숭배 열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1323년 토머스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경비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 경비원 2명이 살해되기도 했다.
여기에 디스펜서 부자의 정적들은 에드워드 2세가 월링포드 성에서 붙잡아 둔 포로들을 구출하려 시도했지만 불발했고, 런던 탑에 감금되었던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는 1324년 8월 탈옥에 성공한 뒤 도체스터로 피신했다가 화이트 섬으로 이동한 후, 배를 타고 프랑스로 피신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그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그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다. 그의 삼촌인 처크 남작 로저 모티머는 탈옥에 실패하고 런던 탑에 그대로 수감되었다가 옥사했다. 로저는 파리에 도착한 뒤 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부자에 맞서기 위해 지지자들을 모집했다.
2.3.13. 생사르도 전쟁
1322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4세는 1323년 에드워드 2세에게 파리에 와서 아키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아키텐에 있는 에드워드의 부하들이 프랑스 관리들을 받아들이고, 파리에서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걸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 요구에 불응했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그러던 중, 에드워드 가신 한 명이 가스코뉴 국경에 있는 분쟁 지역인 아쟁의 생사르도스 마을에 요새를 건설했다. 샤를 4세의 가신이 이 요새를 점령했지만, 가스코뉴 사람들이 이곳을 탈환하고 사로잡은 프랑스 왕의 관리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에드워드 2세는 자기가 이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오만한 가신들을 비난했지만, 샤를 4세는 자기 관리들을 처형한 것에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1324년, 에드워드 2세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를 보냈지만, 에이머는 도중에 병에 걸려 죽었다. 그 후 샤를 4세는 아키텐 공국을 몰수한다고 선언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아키텐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에드워드 2세의 아키텐 주둔군은 4,400명이었고, 샤를 드 발루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7,000명이었다. 샤를 드 발루아는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아쟁, 라자스, 콩돔, 고르 백작령을 잇달아 공략했다. 아키텐 총독이자 에드워드 2세의 이복동생인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아주네 지역에서 백성들을 강제 징병하려 했다가 그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8월에 프랑스군에게 패해 아주네를 상실했다. 에드먼드는 라레올로 퇴각한 뒤 그곳에서 프랑스군에 포위되었다가 9월 22일 6개월간 휴전을 맺는 대가로 프랑스군이 점령한 영토가 프랑스 왕실의 영토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제 에드워드 2세는 보르도와 바욘을 포함한 좁은 해안 지역만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 2세는 자신의 영토에 있는 모든 프랑스인을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참소에 따라 이자벨 왕비가 프랑스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땅을 몰수했다. 1324년 11월, 그는 백작들과 교회 대표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럽 대륙으로 갈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에 남기로 하고, 그 대신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을 보냈다.
그 후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샤를 4세는 여러 가지 제안을 했는데, 그중 잉글랜드 측에게 가장 매력적인 제안은 이자벨과 에드워드 왕자가 파리로 가서 왕자가 가스코뉴에 대한 프랑스 왕의 충성 서약을 받는다면 전쟁을 끝내고 아주네를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2세와 추종자들은 에드워드 왕자를 프랑스로 보내는 걸 꺼렸고, 1325년 3월 이자벨을 혼자 보내기로 했다.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2세의 사절단은 3월 말에 샤를 4세와 협상했다. 협상은 지리하게 이어지다가, 이자벨이 오빠 샤를 4세와 개인적으로 논의한 후에야 합의에 이르렀다. 에드워드 2세는 아키텐에 대한 보상으로 샤를 4세에게 직접 경의를 표해야 했고, 이후 프랑스 왕실은 에드워드 2세가 가진 프랑스 내 영지에 관리들을 임명할 수 있었다. 반면, 아키텐 공작은 오직 성, 교회 등과 그에 인접한 영토를 지키는 관리자인 샤틀렌만 임명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2세는 조약에 동의했지만, 직접 경의를 표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대륙 영토를 장남에게 넘기기로 결정하고 에드워드 왕자를 파리로 보냈다. 에드워드 왕자는 잉글랜드 해협을 건넌 뒤 1324년 9월 샤를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샤를 4세는 새로운 공작에게 아키텐 영지를 모두 양도하지 않고 아주네를 자기 것으로 계속 유지했다. 이에 분개한 에드워드 2세는 아들의 충성 맹세를 부인했고, 샤를 4세는 다시 아키텐 공국을 몰수했다. 이 상황은 에드워드 2세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2.4. 몰락의 길
2.4.1. 이자벨 왕비의 이탈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는 에드워드 2세에게 여러 이유로 불만을 품었다. 그녀는 높은 지위의 여성들을 자주 모욕한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혐오했고, 그런 자를 총애하는 왕에게 실망했다. 또한 그녀는 결혼 생활 중에 스코틀랜드군을 피해 3번이나 피난해야 했던 것에 수치심을 느꼈고, 1322년 마지막으로 도망할 때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여기에 1324년 자기가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한 것에 격분했으며, 에드워드 2세가 자기 아이들을 휴 디스펜서 더 영거의 아내에게 맡긴 처사에도 불만을 품었다.이렇듯 남편에게 불만이 가득했던 이자벨 왕비는 평화 협상이 완료된 뒤에도 파리에 그대로 남기로 마음먹었고, 장남 에드워드 왕자를 계속 붙들었다. 잉글랜드 왕실은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잉글랜드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자벨은 남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휴 디스펜서 더 영거를 타도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 이자벨은 프랑스에서 반 휴 디스펜서 진영을 이끌었던 로저 모티머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에드워드 2세는 1325년 12월 2일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촉구하고 어머니가 있든없든 돌아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별다른 소용이 없자, 결국 그는 1326년 1월 아들의 모든 재산을 왕실에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2월에 잉글랜드에 도착하는 대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즉시 체포할 것이며, 그들을 따르는 해외 망명자들을 왕실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3월엔 자신을 아키텐과 퐁티외의 행정관이자 총독으로 선포하여 이자벨이 아들을 내세워 반기를 일으킬 권력을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샤를 4세가 프랑스군을 동원해 아키텐을 다시 침공하는 빌미만 제공했다. 1326년 6월,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 국왕, 남작, 주교들에게 이자벨 왕비의 귀환을 촉구해달라는 절박한 호소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그해 7월, 에드워드 2세는 아키텐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잉글랜드 왕국에 있는 모든 프랑스인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샤를 4세는 이에 대응해 프랑스에 있는 모든 잉글랜드인을 구금하고 그들의 물품을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2.4.2.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의 정변
1326년,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는 잉글랜드를 침공할 때 필요한 동맹국을 확보하기 위해 에노 백작 기욤 1세와 협상했다. 사실 에드워드 2세도 1319년 에드워드 왕자와 기욤 1세의 장녀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려고 접촉했지만,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들은 1326년 초 발렌시네스에서 기욤 1세의 아내이자 샤를 4세의 삼촌인 샤를 드 발루아의 딸인 발루아의 잔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기욤 1세와 발루아의 잔 부부는 이자벨의 정변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둘째 딸인 에노의 필리파를 잉글랜드 왕비로 삼고, 향후 에노가 외세의 위협을 받을 때 잉글랜드군이 보호해주기를 희망했다.이자벨은 이에 동의했고, 에드워드 왕자와 필리파의 약혼을 주선했다. 에드워드 왕세자와 필리파는 친척이었기 때문에 결혼이 성립되려면 교황 요한 22세의 허락이 필요했다. 이자벨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절을 교황청에 보냈는데 필리파를 "에노 백작의 딸"이라고만 언급하고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요한 22세는 1327년 9월 두 사람의 결혼을 승인했고, 필리파는 그해 10월 코벤트리 주교의 주례하에 대리로 에드워드와 결혼했다.
1326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이자벨이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방비에 나섰다. 그는 교회 주교들더러 관할 주교구에 있는 신민들에게 충성을 촉구하게 했으며, 왕국의 거물들에게 각 카운티를 잘 지키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웨일스로 가서 모병했으며, 이자벨의 군대가 브리스톨에 상륙할 것이라고 에상하고, 딘의 포레스트에 정찰병을 배치했다. 9월 23일, 이자벨, 모티머, 에드워드 왕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도르드레흐트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에드워드 2세의 예상과는 달리 브리스톨이 아니라 이스트 앵글리아의 오웰호 어귀에 상륙했다. 이자벨은 상륙한 직후 잉글랜드 왕국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에게 서신을 잇따라 보내 왕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함께할 것을 촉구했으며, 런던 당국과 서신을 교환했다.
노퍽 백작 브라더턴의 토머스와 여러 주교들은 재빨리 이자벨 편에 섰고, 이자벨의 군대가 던스터블에 도착했을 때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가 합류했다. 켄터베리 대주교 레이놀즈는 9월 30일 런던에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런던 시민들이 격분해 봉기를 일으켰고, 에드워드 2세, 휴 디스펜서, 레이놀즈는 10월 2일에 런던에서 도주했다. 그 후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에드먼드 피츠앨런은 브리스톨에서 병력을 소집해 반란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내 포위된 뒤 수비대가 저항하기를 거부하자 10월 26일에 항복했고, 약식 재판 후 처형되었다.
한편, 에드워드 2세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런던을 떠나 서쪽으로 달아나서 웨일스에서 영주들의 지원을 받고 반격하려 했다. 그러다가 카디프에서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에드먼드 피츠앨런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그곳을 떠나 케어필리에 며칠간 머물었다. 이후 영주들이 전혀 호응해주지 않자,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아들 휴가 케어필리 성을 맡기로 한 뒤 프랑스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1326년 1월 16일, 레스터 백작 헨리에 의해 란트리산트에서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헤리퍼드로 끌려간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감옥에서 굶어 죽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1월 24일 약식 재판을 받고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고문을 당한 뒤, 처형장까지 장애물을 통해 끌려갔다. 그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가 질식사하기 전에 끌어내려진 뒤,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되었고, 최종적으로 목이 잘리기 전에 내장이 뽑혔다. 그의 머리는 얼마 후 런던에 전시되었고, 그의 시신은 4조각으로 잘려 브리스톨, 도버, 요크, 뉴캐슬어폰타인으로 보내졌다. 그의 가신인 레딩의 사이먼도 이자벨 왕비를 모욕한 혐의로 그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잉글랜드 총리 로버트 발독도 체포된 뒤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에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옥사했다.
2.4.3. 폐위
정권을 장악한 뒤, 이자벨과 모티머 측은 에드워드 2세가 왕국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했다며, 에드워드 왕자를 '왕의 이름과 권리'로 왕국의 관리인으로 선포했다. 에드워드 2세는 포로 신분인 채 몬머스 성에 감금되었다가 12월 5일 레스터 백작 소유의 케닐워스 성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아들에게 국왕의 인장을 넘기라는 압박에 시달린 끝에 1326년 11월 20일에 1309년 프랑스로 떠날 때 만들었던 인장을 넘겼다.1327년 1월, 의회가 웨스트민스터에서 소집되었고, 에드워드 2세는 퇴위를 위해 의회에 초대되었다. 그러나 왕은 자기 앞에 나타난 사절단에게 거부 의사를 단호히 밝혔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자신의 적들 앞에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1월 13일, 잉글랜드 귀족들은 런던의 길드홀에서 휴 디스펜서 부자의 잔당들에 맞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지키고, 현 의회에서 통과된 조례를 지키며, 런던 시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했다.
같은 날 런던 의회에서, 로저 모티머는 영주들이 에드워드 2세를 폐위하고 에드워드 왕자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 되기로 결의했다고 선언했다. 이 무렵 에드워드 왕자 편으로 돌아선 레이놀즈 대주교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의 모임에서 에드워드 2세의 나약함과 무능함, 사악한 조언을 분별없이 들어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에서 영토를 잃은 것을 비난하며, 그의 장남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하십시오!"라는 세 번의 외침으로 레이놀즈 대주교의 발언을 환영했다.
1327년 1월 20~21일, 대표단이 에드워드 2세가 갇혀있던 케닐워스 성에 도착해 에드워드 2세에게 의회가 그의 폐위를 결의했다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만일 그가 왕위를 포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와 그의 아들들을 모두 거부하고 왕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임명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에드워드 2세는 이자벨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가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해 협박에 굴복하고 에드워드 왕자가 그의 후계자가 되면 자발적으로 왕위를 사임하겠다고 동의했다. 1월 24일 에드워드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소식이 런던에 전해졌고, 다음날인 1월 25일부터 에드워드 왕자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로서 공식 문서에 등장했다. 그 후 1327년 2월 1일 에드워드 3세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에드워드 2세의 폐위와 에드워드 3세의 즉위가 확정되었다.
2.4.4. 의문의 죽음
폐위된 에드워드 2세는 1326년에서 1327년 겨울 내내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의 보호를 받으며 케닐워스 성에서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나름대로 존중을 받았다. 이자벨 왕비는 그에게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그리고 다른 선물들을 정기적으로 보냈다. 에드워드 2세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1327년 3월, 에드워드 2세를 복위하려는 자들이 케닐워스 성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정부는 에드워드 2세를 글로스터셔의 버클리 성으로 이송하기로 했다.에드워드 2세는 이제 자기 때문에 4년간 감옥에서 지내야 했던 토머스 드 버클리와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전 동맹자였던 존 말트래버스 경, 로저 모티머와 함께 런던 탑에 갇혔다가 탈옥했던 토머스 거니 경의 감시를 받았다. 세 사람 모두 에드워드 2세를 싫어할 이유가 있었기에, 일부 사료에서는 에드워드 2세가 학대당했다고 기술했다. 한 연대기 작가는 에드워드 2세가 버클리로 끌려가면서 잠을 사흘 동안 자지 못했고, 버클리 성에서 온갖 조롱을 받고 미쳤다는 야유를 받았으며, 짚으로 만든 면류관을 머리에 써야 했다고 기술했다. 여기에 그들은 에드워드 2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수염을 깎고 그를 언덕에 앉힌 뒤 도랑에서 가져온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는 14세기 말에 쓰인 허구로 간주한다. 버클리 성의 경비 장부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쇠고기, 거세한 수탉, 계란, 치즈, 와인 등 좋은 음식을 많이 공급받았다고 한다.
에드워드 2세의 추종자들은 그를 석방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1327년 6월, 그들은 버클리 성에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폭풍을 일으켜 요새를 점령하고 전임 왕을 납치했지만, 에드워드 2세는 나중에 붙잡혀 7월 27일에 버클리 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른 설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침입자를 따돌리려는 간수들에 의해 끌려가 코프와 다른 요새들로 옮겨졌다가 버클리 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9월 초, 웨일스 기사 리스 압 그루퍼드가 주도한 에드워드 2세 구출을 위한 또 다른 음모가 발각되었다. 이렇듯 에드워드 2세 구출 시도가 연이어 벌어지자, 로저 모티머와 이자벨 왕비는 에드워드 2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1327년 9월 23일, 에드워드 3세는 9월 21일 밤에 그의 아버지가 버클리 성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신뢰할 만한 출처는 없다. 가장 초기의 기록에는 사망 원인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고, 교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성 바울 연대기에서는 "에드워드 왕이 버클리 성에서 죽었고, 그곳에 갇혀 있었다"고 기록했다. 연대기 작가 아담 무리무트는 모티머가 '예방 차원에서' 죄수의 죽음을 명령했고, 말트래버스와 거니가 전 국왕을 목졸라 죽였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고 한다. 연대기 '브루투스'에서는 사망 원인이 질병이라고 언급한다. 1340년대 런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말트래버스와 버클리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1340년 이전에 에드워드 2세의 전기를 쓴 브리들링턴의 한 캐논은 "이 죽음에 대해 다양한 설명이 있다"라며, 자신은 어느 쪽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고 밝혔다.
1330년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몰락한 후, 에드워드 2세가 살해된 특이한 방식에 대한 기록이 등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긴 뿔을 항문 깊숙이 찔렀고, 그런 다음 붉게 달군 구리 막대를 뿔을 통해 그의 몸 속으로 꽂은 다음, 내장 속에서 여러 번 돌렸다. 이리하여 살인자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고, 에드워드 2세의 동성애적 성향을 처벌했다"고 한다. 1350년에서 1358년 사이에 연대기를 쓴 제프리 베이커는 에드워드 2세의 죽음에 대해 가장 자세히 다루었다. 이에 따르면, 교도관들은 이자벨 왕비로부터 아래의 문구가 담긴 편지를 받았다.
Eduardum occidere nolite timere bonum est
여기서 'nolite' 뒤에 쉼표가 붙는다면, "에드워드를 죽이지 마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로 번역되고, 'timere' 뒤에 쉼표가 붙은 문구는 "에드워드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죽이라"로 번역된다. 말트래버스와 거니 경은 후자가 이자벨 왕비가 원하는 바라고 판단하고, 에드워드 2세를 죽이기로 했다. 그들은 처음엔 자연적인 원인으로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에드워드 2세를 굶기고, 오랜 시간 잠을 자지 못하게 했으며, 썩어가는 동물 시체가 있는 구덩이 근처에 그를 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진적이 없자, 살인을 계획했다. 저녁이 되자, 말트래버스와 거니는 에드워드 2세에게 술을 주고 잠들게 한 뒤, 군인 4명과 함께 그의 방으로 들어가 그의 배 위에 큰 테이블을 놓고 그의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뿔을 통해 왕의 내장에 "납땜하는 데 쓰는 빨갛게 달군 막대기"를 삽입하여 "중요 장기를 태워 버렸다." 이때 에드워드는 이웃 마을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비명을 질렀고, “사람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붉고 뜨거운 막대를 항문에 꽂아서 죽였다는 이야기는 에드워드 2세의 후기 전기 대부분에 등장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런 엽기적인 방식으로 저질러진 살인은 비밀로 남을 수 없다고 보고 사실이 아닐 거라고 본다. 그리고 제프리 베이커가 밝힌 편지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떠도는 소문에 근거한 근거없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본다. 학계에서는 에드워드 2세가 살해되었다면 교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에드워드 2세가 1327년에 버클리 성에서 죽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1330년 초, 에드워드 2세의 이복형제인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2세가 아직 살아 있으며 코프 성에 있다는 소문을 믿고, 시종인 보도 드 바요와 존 데버리에게 에드워드 2세에게 전할 편지를 맡겼다. 그는 이 서신에서 에드워드 2세를 탈옥시킨 뒤 복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에드워드 2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가 무슨 연유로 이 소문을 믿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서신을 맡긴 두 시종의 정체는 로저 모티머의 스파이였고, 자연히 로저 모티머에게 서신이 전해졌다. 1330년 3월, 에드먼드는 윈체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다가 에드워드 3세를 전복하려 한 혐의로 체포된 뒤 3월 19일 윈체스터 성 외곽에서 처형되었다.
1330년대 중반에서 1340년대 초에 마누엘로 데 피에스키라는 이탈리아 사제가 에드워드 3세에게 보낸 일명 <피에스키 편지>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하인의 도움으로 버클리 성에서 탈출한 뒤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에서 은둔자로 지냈다고 한다. 이 편지의 진위는 현재까지 불확실하다. 1338년 앤트베르펀에서 웨일스의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에드워드 3세와 만나서 자기가 에드워드 2세라고 주장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불분명하다. 일각에서는 에드워드 2세가 모티머와 이자벨에 의해 비밀리에 풀려나 신성 로마 제국으로 보내졌고, 이자벨이 그의 죽음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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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스터 대성당의 조각 |
1330년 친위 쿠데타로 로저 모티머를 처단하고 이자벨 왕비를 수도원에 가둔 에드워드 3세는 1331년 로저 모티머가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비난하고 아버지를 복권한 뒤, 아버지 살해에 연루된 토머스 드 버클리, 윌리엄 오컬리, 토머스 거니 등을 재판에 회부했다. 배심원단은 토머스 버클리가 에드워드 2세의 살해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판결하고 풀어줬지만, 윌리엄 오클리와 토머스 거니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오클리의 소식은 다시는 알려지지 않았고, 거니는 유럽 대륙으로 도망쳤다가 나폴리에서 체포된 뒤 잉글랜드 왕국으로 압송되던 중에 죽었다. 존 말트래버스는 정식으로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유럽 대륙으로 망명한 뒤 오랫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1364년이 되어서야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걸 허락받았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 1312년 11월 13일 | 1377년 6월 21일 | 에노의 필리파 슬하 5남 4녀[12] |
2남 | 콘월 공작 엘담의 존 (John of Eltham, Duke of Cornwall) | 1316년 8월 15일 | 1336년 9월 13일 | |
1녀 | 헬러 공작부인 엘리노어 (Eleanor, Duchess of Guelders) | 1318년 6월 18일 | 1355년 4월 22일 | 헬러 공작 레이누드 2세 슬하 2남[13] |
2녀 | 스코틀랜드의 왕비 조앤 (Joan, Queen of Scots) | 1321년 7월 5일 | 1362년 9월 7일 | 데이비드 2세 |
5. 평가
에드워드 2세의 치세는 그야말로 귀족들과 의회와의 피비린내나는 정쟁, 그리고 외부 세력과의 갈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강압적으로든 혹은 회유적으로든 잉글랜드 내부의 귀족들과 불만 세력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등을 군사적으로도 압도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의 골이 에드워드 2세 때에 곪아 터져버리고 말았는데, 불행히도 에드워드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결국 에드워드 2세 때의 잉글랜드는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극심한 우환에 시달렸고, 때문에 오늘날에는 여러모로 부왕의 빛나는 업적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배넉번 전투에서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점은 그의 실책 중에서도 뼈아픈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는 아들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켜주려 노력하다 원정 길에 병사했지만 정작 에드워드 2세 본인이 스코틀랜드 공격에 실패하면서 아버지의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2세는 비록 필요할 때에는 완고함과 결단력을 발휘하여 정적들을 무찌르고 정권을 장악하는 등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정치가로서는 분명 무능했다. 특히 성격이 안일하고 성실하지 못해서 향락에만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총신들에게 자문을 독점케하거나 정치를 위임하는 등의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실제로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개버스턴과 휴 데스펜서를 비롯한 탐욕스러운 간신배들이 왕의 총신이 되어 정치를 좌우하며 국정을 혼란케 하였고, 이는 에드워드 2세가 귀족들과 왕비의 반발을 사서 폐위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비록 말년에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지나칠 정도로 높은 세금을 부과해서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직접 자신의 손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초석을 닦는 위업을 달성했던 아버지 에드워드 1세와 비교되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의 치세 동안에 빚어진 혼란이 모두 에드워드 2세만의 탓이라고 보기에도 문제는 있다. 비단 에드워드 2세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나 로저 모티머 등도 에드워드 1세처럼 잉글랜드를 잘 이끌어갈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토머스만 하더라도 생전에는 국왕의 자문관까지 지내면서 국정을 주도할 만한 실력자가 되었지만, 때마침 닥쳐온 기근과 외국과의 갈등, 귀족들 간의 권력다툼을 원만하게 처리할 만한 역량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으며 결국 에드워드 2세와 무력충돌까지 일으켰다가 패하고 죽었다. 왕비인 프랑스의 이자벨과 함께 에드워드 2세를 몰아낸 로저 모티머 또한 마찬가지로 훌륭한 정치가라고 할만한 자질은 갖추지 못했고, 개버스턴과 휴 데스펜서와 다를 게 없을 정도로 전횡을 일삼았고 결국 에드워드 3세의 치세 때 개버스턴과 데스펜서처럼 처형당했다.
6. 그 외
에드워드 2세는 왕족 치고는 취미가 독특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훌륭한 체격과 승마 실력을 물려받았으며 그만큼 말타기를 좋아했다. 또한 그는 시와 연극을 즐기고 하류층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등 어느 정도의 교양과 친화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랑 파기, 지붕 잇기 등 왕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취미도 있었다.에드워드 2세 본인이 개버스턴 등을 총애한 나머지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돌았기 때문에, 에드워드 2세의 아내인 이사벨라가 낳은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실은 에드워드 2세의 핏줄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14] 다만 이는 신빙성이 매우 낮은 속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에드워드 2세가 이사벨라와 전혀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사벨라가 낳은 에드워드 3세를 아들로 인정했을 리가 만무하다.[15]
다만 그와는 별개로 에드워드 2세가 남색가라는 의혹은 당대에도 분명 존재했던 것 같다. 그의 총신으로서 전횡을 일삼았던 피어스 개버스턴이나 휴 데스펜서 등을 그의 동성연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확신하기는 어렵다. 에드워드 2세의 남색가 의혹은 여러 이야기에서 발견되는데, 예컨대 에드워드 1세는 개버스턴과 에드워드 2세의 관계를 부적절한 것으로 의심하여 개버스턴을 해외로 추방하기도 하였고, 에드워드 2세의 아내인 이사벨라 왕비는 프랑스로 건너가서는 "제삼자가 저와 남편 사이의 유대를 끊어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고도 한다. 휴 데스펜서가 처형당하기 직전에 거세를 당했다거나 혹은 에드워드 2세가 달군 쇠꼬챙이에 항문과 창자가 꿰뚫려 죽었다는 전승도 그가 남색을 즐겼다는 의혹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태자(세자)들의 전통적인 칭호인 웨일스 공의 시초도 에드워드 2세이다. 부왕인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침공하여 승리한 기념으로 에드워드 2세를 웨일즈의 영주로 임명하고 이런 칭호를 내려주었다.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도 이러한 전례를 따라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똑같은 칭호를 주면서 이 일이 후대에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에드워드 2세로 알려진 1590년대 상상화. 헨리 3세의 외모와 유사하다는 주장도 있으며 나무위키에서는 오랫동안 에드워드 1세 문서에 등재되어 있기도 했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가 에드워드 2세의 삶을 주제로 한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 제목도 <에드워드 2세>. 당시로서는 최초의 실질적인 역사극 중 하나로, 후대의 영국 연극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다. 훗날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이 연극은 1991년에 데릭 저먼이 감독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멜 깁슨이 주연과 감독을 겸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피터 헨리가 열연했다. 여기서 엄청난 찌질이로 묘사된다. 하는 일이라고는 늘 병풍처럼 서있다가 말 몇마디 잘못하거나 실수를 저질러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이 전부다. 극중에서도 동성애적인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아버지 에드워드 1세가 에드워드 2세의 동성연인을 성의 창문 밖으로 던져 살해하는 장면도 나온다.[16] 사실 에드워드 2세가 아버지 못지않은 장신의 거구인데다가 개인적으로는 꽤 뛰어난 싸움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 무시한 좋지 못한 고증이다.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 타임라인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그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암살당했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항문에 도롱을 꽂은 후 그것을 통해 달군 쇠를 쑤셔서 장기를 태워죽였다고 한다. 이는 영국 극작가 말로가 쓴 '에드워드 2세'에서 묘사된 그대로이다.
그 외에 드라마 끝없는 세상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래도 해당 작품은 브레이브 하트보다는 고증에 신경을 썼기에 지나칠 정도로 찌질하게 폄하되었던 모습에 비하면 나름 포스있게 묘사된다.
브레이브 하트 이후의 시기를 다룬 영화 <아웃로 킹>에서도 등장한다. 영국 출신의 배우 빌리 하울이 맡아서 열연했다. 마찬가지로 찌질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는 찌질함으로 묘사되고 고증에 맞게 강건한 전사로 나온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의 DLC '서쪽의 군주들'에 추가된 에드워드 1세의 캠페인의 화자로 등장. 아버지의 업적에 짓눌려 부담스러워하는 인물로 나왔다. 이후 캠페인 본편에서 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가 자기 아들은 별 볼일 없는 녀석이라고 까는 것으로 언급된다.
[1] 데이비드 캐머런이 대학교 시절 가입 신고식으로 돼지 머리와 구강성교를 했다는 루머로 악명 높은 옥스퍼드 대학교 피어스 개버스턴 클럽이 이 사람의 이름을 땄다.[2] 1269~1297, 바르 백작 앙리 3세의 부인[3] 1272~1307,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초혼, 랄프 드 몬테르머와 재혼[4] 1278~1332, 에임즈베리의 수녀[5] 1279~1318, 브라반트 공작 장 2세의 부인[6] 1282~1316, 홀란트 백작 얀 1세와 초혼,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재혼[7] 그 외에도 일곱 자녀가 있었고, 그 중엔 존, 헨리, 알폰소가 있었지만, 모두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8] 동전을 던져서 문장이 있는 면과 그 반대면이 나오는지 맞히는 사람이 승리해서 돈을 따내는 고대 도박 게임[9] 길버트의 어머니 아크레의 조앤이 아버지 길버트 드 클레어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에드워드 1세의 시종인 랄프 드 몬테르머와 비밀 결혼한 걸 빗댄 표현이다.[10]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11] 당시 바스톨로뮤 배들스미어는 옥스퍼드에 있었다.[12] 흑태자 에드워드,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어널,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등[13] 레이누드 3세 판 헬러, 에두아르트 판 헬러[14] 심지어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아예 윌리엄 월레스의 핏줄인 것 마냥 묘사된다. 물론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윌리엄 월레스는 이사벨라가 영국에 오기 4년 전에 처형당했다.[15] 애당초 에드워드 2세는 아내인 이사벨라 외에도 정부를 두어 사생아를 낳았던 일도 있었다. 그의 남색 스캔들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여색을 밝혔던 점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다시 말해서 양성애자였을 거라는 이야기이다).[16] 스코틀랜드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더니, 군사적인 능력이라곤 전혀 없는 애인을 데리고 가서 군사 고문이라고 둘러댔다가 에드워드 1세의 화를 돋우었다. 실제로 에드워드 1세는 에드워드 2세와 동성연인이라는 의혹을 받았던 개버스턴을 해외로 추방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