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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7:32:46

윌리엄 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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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6px-Braveheart_edinburghcastle.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William_wallace.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William_Wallace_Statue_%2C_Aberdeen.jpg
당시 기록에 맞게 제작된 동상[1] 18세기에 그려진 초상화 [2]

노르만어: William le Waleys
스코틀랜드 게일어: Uilleam Uallas[3]
영어: William Wallace
1270년 ~ 1305년 08월 23일[4]

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4.2. 만화4.3. 게임
5. 같이보기

1. 개요

스코틀랜드의 성웅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이자 수호자였던 기사. 스코틀랜드의 수호자(Guardian of Scotland)라는 명칭은 실제 스코틀랜드 국가원수의 칭호였다.

2. 생애

윌리엄 월레스는 에어주의 지주인 맬컴 월레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나이를 먹은 후에는 페이즐리 수도원에 들어가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페이즐리 수도원은 현재에도 존재하는데, 지하에 설치된 정교한 하수도에서 중세 스코틀랜드의 각종 유물이 발굴된 바 있다.

이후 윌리엄 월레스는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3가지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교양인으로 성장했다. 이후에는 글래스고 대성당에 가서 로버트 위샤르트 주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윌리엄 월레스는 글래스고 대성당에 머무르면서 조국 스코틀랜드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당시의 경험이 월레스가 훗날 스코틀랜드의 투사로 거듭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정당한 왕위 계승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 무력으로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차지하려들자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이 반발하였다. 결국 1296년에 이르러 에드워드 1세가 대대적인 스코틀랜드 침공을 개시하였다. 민담에 의하면 이때 에드워드 1세의 침략으로 월레스는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이 몰살당했다.

잉글랜드 병사와 시비가 붙어 그들을 죽이는 바람에 래너크의 치안 대장인 윌리엄 헤셀릭이 체포령을 내리고 아내인 메리언을 살해하자 1297년에 그를 죽여 복수했다. 윌리엄 월레스의 행적은 기록의 부재로 인해 대부분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의 행적 중 역사적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첫 번째 행적이 바로 래너크에서 봉기를 일으켜 헤셀릭을 살해한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을 점점 모으면서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다. 아이샤이어에서는 윌리엄 옴스비를 패주시켰고, 앤드류 더 모레이와 합류해 스털링 다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해 휴 크래싱햄을 죽이고 가죽을 벗겼다.[5] 스털링의 승리로 월레스는 기사 작위를 받고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잉글랜드의 요크 성을 점령하면서 요크 성의 성주인 에드워드 1세의 조카를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에드워드 1세에게 보냈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자 1298년 4월 1일에 폴커크에서 맞서 싸웠지만 회전에서의 전술적 능력이 떨어지는 점이 지적받던 월레스는 잉글랜드군의 장궁병 앞에 별다른 전술 없이 쉴트롬 진형으로 짠 창병부대를 포진했다가 패하고 말았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빠져나가 프랑스, 로마 교황청 등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이후 월레스는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인 근위병으로 근무하여 잉글랜드군과의 두 번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303년에 종자 거스리(Guthrie)가 프랑스에 파견되어 월레스의 귀환을 권유, 월레스는 그 해 스코틀랜드로 귀환한다. 그러나 그들은 엘코 숲 근처의 윌리엄 크로포드 농장을 되찾기 위해 갔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함정에 빠져 잉글랜드군에게 쫓기게 되었다. 월레스는 배신한 부하를 죽이고 1305년까지 숨어다녔지만 결국 글래스고 근방의 로브로이스턴에서 에드워드 밑에 있던 스코틀랜드인 기사 존 드 멘티스(John de Menteith)에게 붙잡혔고, 잉글랜드군에 넘겨졌다. 존 드 멘티스는 나중에 에드워드 1세와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로버트 1세의 신하가 된다.

런던으로 압송된 월레스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은 후 살인 및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런던에서 교수형을 받고 옷이 벗겨진 채 말에 끌려다니며 조리돌림당하다 스미스필드 마켓에서 사지가 찢겨졌다. 사후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런던 다리에 효수되었고 장기는 불태워졌으며 찢겨진 사지는 4개의 지역에 나뉘어서 전시되었다.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 조금 보태자면, 윌리엄 월레스가 받은 형벌은 교수척장분지형이라는 형벌로, 교수형을 시키기는 하나 그것으로 편안하게 숨을 끊어주지 않는다. 이 형벌 자체가 죄인을 최대한 오래 살려두고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이라 괴로워하며 발버둥치는 것을 적당히 놔두다 줄을 끊어 다시 숨을 쉬게 해주지만 그 대신 배를 갈라 장기를 꺼내고 생식기와 살점을 도려내 죄인의 눈으로 자신의 신체가 잘려나가는 것을 보게 한다. 그리고 팔 다리를 잘라낸 뒤 마지막으로 목을 자르는데, 이때까지 숨이 붙어있을 수 있기에 상당히 끔찍하고 악독한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때 월레스의 동생 존과 그의 동료 사이먼 프레이저도 체포되어 참수당한 다음 머리가 월레스와 같이 효수되었다.

3. 평가

"그때부터 잉글랜드의 폭압적인 통치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몰려들었고, 그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놀랍도록 용감하고 대담하며, 훌륭한 풍채와 끝없는 도량을 갖췄다. 백작들과 호족들 사이에서 그는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었지만, 그의 선조들은 기사였다. ... 월레스는 도처에서 잉글랜드인들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매일같이 힘을 기르면서 때로는 그 자신의 탁월한 능력으로, 때로는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강제로 짧은 시간 안에 스코틀랜드의 모든 귀족들을 지배하에 두었다."
스코틀랜드의 연대기 Gesta Annalia II (c.1363)

14세기에 편집된 스코틀랜드의 연대기 Gesta Annalia II에서는 백작이나 호족들만큼 신분이 높지는 않지만 a,상당한 교양을 갖춘 기사 가문 출신이며, 독립전쟁 초기부터 b.도처에서 잉글랜드인들에게 승리하고 c.스코틀랜드의 고위 귀족들을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velint nolint) 강제로 지배함으로써 사실상 혼자서 항전을 주도하다가 폴커크에서 그를 질투한 코민 백작에게 d.배신을 당해서 패배하고 수호자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묘사된다.
"화살로 생계를 유지한 천민이자 가난하고 무식한 궁수 ... 가장 낮은 신분에서 가장 높은 신분까지 모든 스코틀랜드인들이 그를 지지했다. 때문에 그 나라의 어떤 지위 높은 백작이 이 윌리엄에게 기사의 허리띠를 수여하고, 마치 까마귀를 백조로 만들듯이 도적을 기사로 만들었다."
동시대의 잉글랜드인 수도사 William Rishanger의 연대기 (c.1307)

반면에 동시대 잉글랜드의 연대기들에는 천한 신분의 a.가난하고 무식한 무법자이며 전쟁 초기에는 보잘것없었으나 b.마치 까마귀가 백조가 된 것처럼 거짓된 명성을 통해 c.공공의(communis) 선출로 스코틀랜드인들의 챔피언이 되었다가 폴커크에서 동포들을 d.배신하고 도망친 것으로 묘사된다. 로버트 브루스가 잉글랜드 편에서 싸웠다든가 코민 백작이 폴커크 전투에서 월레스를 배신했다는 이야기는 없으며, 온갖 죄목을 갖다 붙인 월레스의 재판 기록에도 그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협박해서 강제로 끌고 다녔다는 내용은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월레스가 죽은 뒤 라이벌인 존 코민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로버트 1세는 의문의 여지 없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귀족들을 무력으로 협박해서 강제로 끌고 다녔다는 점이다. 즉 브루스 왕조의 후원을 받은 연대기 작가가 로버트 브루스의 행동을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정당화하기 위해 월레스에게 그의 이미지를 덧씌운 것일 수 있다.

이렇듯 상반되는 기록이 많은데, 월레스와 원한 관계에 있었던 잉글랜드인들의 기록은 당연히 완전히 믿을 수 없고, 반대의 이유로 스코틀랜드의 기록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더글러스, 위샤트, 모레이, 스튜어트 등 다른 반란군 지도자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잉글랜드측 기록이 더 상세한 편.

현대 연구자들은 월레스가 생전부터 민중의 인기와 지지를 한몸에 받은 천재적인 게릴라 지휘관임에는 동의하나 군사령관으로서의 전술적, 전략적 능력과 제대로 된 군사학에 대한 훈련이 부족했음을 들어 그의 업적은 중세 영웅 서사시와 근현대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과대평가돼있다고 보는 편이다.[6] 월레스를 영웅화한 정치인들도 이제는 학계와 함께 독립전쟁에서 용맹히 싸웠을뿐더러 체계화된 군사학을 배워 월레스 옆에서 바로 그 단점을 메꿔주었던 모레이 백작에 대한 재평가에 적극 나서고 있어서, 모레이 백작의 업적을 알리는 기사들이 나거나 월레스가 모레이 백작과 함께 서 있는 동상이 추가되기도 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4.2. 만화

4.3. 게임

5. 같이보기


[1] 사슬 갑옷을 두른 전형적인 중세 기사의 모습이다. 에든버러 성 정문 도개교에 있는 동상으로 반대편에는 로버트 1세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2] 1888년에 세워진 그의 동상. 브레이브 하트가 국내 개봉할 당시, 영화 전단지에서는 이 동상의 제막식이 1860년에 열렸다고 오류가 난 채로 표기됐다. 죽은 지 무려 583년이 지나서야 스코틀랜드에 동상이 세워졌음에도 제막식에 무려 15만명이 넘는 사람이 와서 환호했을 정도로 스코틀랜드에선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키가 무려 201cm였다고 한다.[3] [ˈɯʎam ˈuəl̪ˠəs̪\](을럄 우얼러스)에 가깝다.[4] 또는 1272년 ~ 1304년이라는 기록도 있다.[5] 다만 이 때 월레스의 동료이자 참모였던 모레이가 이 당시 입은 상처로 인해 죽게 된다. 스털링 전투가 승리로 알려져 있지만 전술가, 전략가로서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던 모레이의 죽음은 월레스에게 무엇보다도 치명적 타격이었다.[6]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몇 안되게 실제 역사와 흡사한 부분이 이 지점인데, 월레스는 실제 대중에게 지지를 받아 게릴라전을 수행했고 행적이 부풀려진 편이었다.(영화에서도 이런저런 괴소문이 떠도는 묘사가 있다.) 대신 폴커크 전투의 치명적 실패는 오롯이 군사적 교육을 받지 못해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했던 월레스의 책임이었다.[7] 에드워드 2세의 왕비[8] 윌리엄 월레스가 폴커크 전투에에서 참패하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 운동이 꺾였다는 내용이다.[9] 역사상 런던에서 교수형을 받고 사지가 찢겨져 머리는 효수당하지만 게임상 그냥 자연사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