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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20:02:23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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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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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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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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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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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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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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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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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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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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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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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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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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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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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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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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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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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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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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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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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파일:40살 무렵의 나이팅게일.jpg
별칭 등불을 든 여인
The Lady with the Lamp
출생 1820년 5월 12일[1]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현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
사망 1910년 8월 13일 (향년 90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런던 메이페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간호사, 사회개혁가, 통계학자
소속 킹스 칼리지 런던 (간호학부 설립자 / 교수)[2]
종교 개신교(성공회)[3]
서명 파일: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간호사가 되기 전2.2. 크림 전쟁2.3. 종전 이후2.4. 말년
3. 백의의 천사와 등불 든 여인4. 업적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설과 반박5. 나이팅게일 선서6. 고양이 사랑7. 매체8.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20살 무렵의 나이팅게일.png
파일:노년의 나이팅게일.png
20살 무렵의 모습 노년의 모습

영국간호사이자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 크림 전쟁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간호사로 활동하였으며, 현대 간호의 기틀을 잡고 발전시켰기에 현대간호의 대모(the godmother of modern nursing)로 불린다.

또한 통계학자, 사회 개혁가로도 활동하며 통계 자료의 시각화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통계 관련 서적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크림 전쟁 시기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도표가 유명하다. 이런 활동을 강력히 할 수 있는 이유가, 영국 육군 의료총감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업적들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 되기도 하였고, 미국통계학회의 명예 회원이 되기도 했다.

2. 생애

2.1. 간호사가 되기 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영국 상류층의 집안의 딸로,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 별장에서 태어났다. '플로렌스'라는 이름은 그녀가 태어난 장소인 피렌체의 영어식 이름인데, 언니 파세노프(Parthenope) 역시 나폴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폴리의 그리스어식 이름 중 하나인 파세노프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매의 출생지가 영국이 아닌 데다가 각각 다른 것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부모가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무려 3년간에 걸친, 세계일주급의 신혼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3년이나 본가를 비우고 여행을 떠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이팅게일의 아버지 윌리엄(1794~1874)은 지역 시의원이자 대부호였으며, 비록 낙선했지만 주지사 선거까지 출마했을 정도의 유지였다. 외할아버지인 윌리엄 스미스(1756~1835)가 국회의원이자 노예폐지운동에 기여했기에 아버지 역시 노예 폐지운동에 적극 참여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정치적 성향 덕분에 나이팅게일은 여성의 학업에 꽤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교양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학업 배경이 있었기에 나이팅게일은 수학과 통계적 분석에 대한 두각을 나타낼수 있었다.

그녀는 커가면서 간호사가 되어 병들고 다친 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신앙적 사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절의 간호사는 상당히 하대받는 직업이었으며, 요양원에서 잡일을 하는 청소부·잔심부름꾼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기에 당연히 명문가의 딸들은 간호사가 되지 않았다.[4] 당시만 해도 일부 병원을 제외하고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일례로 의사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려고 17살에 의과대학에 입학했던 음악가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18살에 프랑스 파리 대병원을 방문했다가 쥐가 넘치고 지저분한 병원을 보고 구역질을 하며 의사를 포기하고 작곡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찰스 다윈이 시신해부 실습 당시 잔인함에 질려 의사의 꿈을 접고 생물학자가 된 것처럼 당시 유럽을 포함한 웬만한 나라들의 의료계가 이랬다. 부잣집은 병원에 가느니 아예 실력 좋은 의사를 찾아 직접 주치의로 고용하여 병원이라는 곳을 기피했을 정도였고, 사실 실력이 좋다면 이런 식으로 개인에게 고용되는게 의사에게도 병원에 들어가는 것보다 여러모로 이득이였다.[5] 또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낮은 임금을 주기 위해 학력이 낮은 여성들을 주로 고용했고 간호사들의 직업의식이나 능력도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전문 직업으로 인정도 받지 못했다.

귀한 막내딸인 플로렌스가 가족들에게 '간호사가 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라며 사회에서 멸시받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니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플로렌스의 간호사 일을 막기 위해 아버지는 강제적으로 혼사를 여러 번 준비했으나 플로렌스는 모두 거절했다. 구혼자 중 유명인으로는 귀족 출신의 시인 겸 정치인 리처드 밀른스 휴턴 남작(Richard Monckton Milnes, 1st Baron Houghton,1809~1885)이 있는데, 그는 장장 9년 동안이나 나이팅게일에게 구애했으나 그녀는 끝내 청혼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남작은 나이팅게일을 포기하고 1851년에 아나벨라 헝거포드 크루 남작영애(1822~1874)와 결혼해 1남 2녀를 얻었으며 아들인 로버트 오플리 애쉬버튼 휴턴 크루 후작(1858~1945. 1911년 후작위를 받음)이 남작위를 이어받았다.

이렇게 휴턴 남작과 맺어지지 못했지만 남작은 나이팅게일을 전쟁 당시에 열심히 후원했다. 당시 귀족층에서 나이팅게일을 지지하고 후원하던 사람은 휴턴 남작이나 시드니 허버트 레아 남작(Sidney Herbert, 1st Baron Herbert of Lea , 1810~1861)같이 극소수 뿐이었다. 물론 전쟁이 영국 측이 이기자 상황이 달라지지만 말이다. 여담으로 휴턴 남작은 이후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지지하고 여성 작가인 엘리자베스 개스켈(1810~1865)과 친하게 지내며 여성문인협회에도 후원했다.

2.2. 크림 전쟁

어쨌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하여 간호사가 된 이후 크림전쟁에 군 간호사로 참여하게 된다. 위인전에 나오는 나이팅게일의 모습은 주로 이 시절의 모습이다. 당시 전쟁에서는 총 맞아 죽는 병사보다 죽지 않을 정도의 부상을 치유하지 못해서 사망하거나, 병사(兵舍) 내 전염병이 돌아 사망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심각한 위생상태와 맞물려 작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감염이 되거나, 파상풍에 걸리는 등 전사자보다 부상으로 인해 전투 후 사망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이팅게일은 군위생(軍衛生)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열악한 보건위생 때문에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각종 통계자료를 만들어 제시하며 영국 정부에게 끊임없이 보냈으며,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아낸다. 즉, 위생을 처음 도입했다. 이미 1600년대부터 위생의 개념이 있었으며 1800년대 초중기에 위생법 등이 발효되었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은 그녀라고 봐도 무방하다. 덕분에 영국군 부상자의 사망률은 40%대에서 2.2%로 감소하는 기적을 보게 된다.

이후 나이팅게일이 영국군의 사망률을 눈에 띄게 감소시킨 점, 그리고 밤마다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닌 점 등의 이미지가 합쳐져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언론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며 나이팅게일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2.3. 종전 이후

전쟁 중 나이팅게일은 지역 풍토병에 걸려, 이후 죽을 때까지 침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크림 전쟁에서 얻은 유명세를 이용하여 기부를 받아[6] 1860년 7월 9일 자신의 간호 철학을[7] 고스란히 담아낸 최초의 근대식 간호 학교를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설립했다.[8]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는 두 가지 의미에서 간호교육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 첫 번째는 간호교육을 비종교적인 배경에서 학문적 차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간호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는 세계 최초로 독립적으로 운영된 기금으로 세운 간호학교라는 점이다. 당시 전염병에 대해서는 2가지 학설이 존재했다. 하나는 히포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장기설[9]이었고, 또 하나는 루이 파스퇴르 등을 비롯해 당시 막 발견되기 시작했던 미생물설[10]이었다.[11]

현대에는 미생물설이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에는 장기설이 조금 더 우세했고, 나이팅게일도 장기설의 강력한 지지자였기 때문에 이 병원에서는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창문의 위치, 크기, 간격, 환풍기의 위치, 개수 등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팅게일이 지지했던 학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지금 보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조건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결국 장기설에서 주장하는 나쁜 공기 자체가 병원성 미생물을 포함하고 있는 비위생적인 공기였기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주장한 위생적인 환경은 치료에 분명히 의미가 있었고, 병이 전파되지 않기 위한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거리,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도록 온도, 습도 등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할 것, 환자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개인별 조명을 설치할 것 등 현대 병원설계에서도 다수 포함하고 있기에, 병원 건축에서 참고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12]

그러나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거리나[13] 간호사 1명당 담당하는 최대 환자의 수[14] 등은 병원의 수익문제로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지만, 원칙상 지켜야한다. 나이팅게일이 세웠던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환자의 만족도나 회복속도가 월등히 좋았다고 한다.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서는 매년 세계의 우수한 간호사들에게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여하고 있으며 후학들이 간호사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나이팅게일 선서는 간호사의 사명감을 상징한다.

그녀가 남긴 업적과 행적을 모두 보면 현장에서만 뛰며 근무를 하기 보단 간호관리자로서의 역할이 크다. 그녀의 성격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귀족 여인이라기보다는 여러모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배짱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녀가 단호히 개혁의 칼날을 휘둘렀기에, 그전까지의 전근대적 병원 행정과 간호사의 지위가 진일보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실제로 그녀는 크림 전쟁 종결 이후 한때 봉사한 적이 있었던 구빈원의 의료 복지 체계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크림 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대우를 받아서 인맥도 넓었고 꾸준히 주장한 덕에 동조자들 및 조력자들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력자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 근거를 더욱 확충하고 논리를 보강할 수 있었고. 중간에 그녀의 제안에 호의적인 자유당이 선거에서 패하는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원안대로 추진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자신의 제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영국에서 1911년에 실시될 국민보험법과 1946년 시행된 전국민 의료복지의 선구적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통계 자료의 시각화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통계 관련 서적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크림 전쟁 시기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도표가 유명하다. 해당 도표는 사망자의 수를 면적으로 표시하고 사망 원인을 색깔로 표시하여 파란색으로 표시된 질병 사망자의 수가 다른 모든 사인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장미 도표(Rose diagram)[15]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그래프의 모양이 활짝 핀 장미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나이팅게일의 장미 도표는 통계 자료를 분석하고 관계자에게 설명할 때 정보를 직관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 도표로 대표되는 통계학에서의 업적이 인정되어 영국 왕립 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스승이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셜록 홈즈의 모티브로 유명한 조지프 벨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도 간호사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껴 나이팅게일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때 나이팅게일이 그에게 에든버러에서 간호사를 위한 훈련을 조직하도록 격려했다. 이후 조지프 벨은 간호사에게 의료 및 수술 절차를 시연했고, 간호 메뉴얼을 1896년 은퇴한 후에도 제작했다. 나이팅게일과 친해져서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2.4. 말년

위인전 같은 데에서는 크림 전쟁때만 나오기 때문에 장수하지 못했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의외로 크림 전쟁 이후에도 오래 살았다.[16] 사망했을 때 나이가 90살. 사실 이렇게나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말년에는 영국인들조차도 나이팅게일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

이는 집안 내역도 있는데 그녀 어머니 프랜시스(1788~1880)는 92살, 할머니 메리 니 에반스(1760~1853)는 93살까지 살았다! 언니는 71살까지 살았지만 19세기로 치자면 장수한 셈이며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70~80대까지 살며 장수했다.

말년에 제자인 에셀 고든 펜위크(Ethel Gordon Fenwick)[17]와 간호사 면허 제도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싸웠다. 나이팅게일이 간호학이라는 학문의 시초인 이유는 간호사 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기보다 현대적인 간호 철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펜위크는 현대 간호사의 제도적인 부분에 많은 발전을 가지고 와서, 영국간호사협회의 창립자이자 ICN(International Conference of Nursing, 국제간호사협회)의 초대 회장까지 지낼 정도 였다. 나이팅게일은 간호란 사명정신,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면허제도에 거부감을 가졌으나, 펜위크는 간호사의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면허제도를 주장하였다.

결국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죽은 후로, 이쪽 세력은 힘을 잃었다. 1919년 영국에서 간호사 면허시험이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간호사가 되려면 면허 시험을 봐야 했다. 결과적으로 간호사들이 전문직으로 대우받는 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현대 간호학자들의 입장은 나이팅게일과 펜위크 둘 다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중적 인지도나 간호철학에서의 영향력은 펜위크가 나이팅게일에게 상대가 되지 않고, 간간히 간호학개론에서 이름을 보이는 수준. 또한 제자들이 미국에도 많이 건너가서, 오히려 미국 쪽에 더 빨리 간호학이 학문으로서 발전하게 됐다.
파일:external/www.countryjoe.com/pallbearers.jpg 파일:external/wastewarriors.files.wordpress.com/100_0025.jpg
관을 운구하는 모습 묘비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에 향년 90세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공적을 기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햄프셔 주 웰로에 있는 세인트 마거릿 성당 내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는 나이팅게일을 기념하는 부조가 벽면에 걸려 있다.

3. 백의의 천사와 등불 든 여인

한국에서는 나이팅게일의 별명이 유독 백의의 천사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녀를 칭하는데 자주 올라오는 명칭은 위에도 설명되었다시피 등불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다. 이는 크림 전쟁에 대해 써진 타임지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She is a "ministering angel"[18] without any exaggeration in these hospitals, and as her slender form glides quietly along each corridor, every poor fellow's face softens with gratitude at the sight of her. When all the medical officers have retired for the night and silence and darkness have settled down upon those miles of prostrate sick, she may be observed alone, with a little lamp in her hand, making her solitary rounds.
그 병원들에서 한치의 과장도 없이 그녀는 "섬기는 천사"이며, 복도 하나 하나를 그녀의 가녀린 모습이 지날 때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이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누그러졌다. 모든 의료진과 군의관들이 밤을 맞아 처소로 돌아가고 적막함과 어둠이 길게 누워있는 병자들 위에 내려 앉을 때면, 작은 등불을 그 손에 들고 홀로 순회를 돌고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문구는 또한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의 시 《산타 필로메나》[19]에 다시 등장하면서 더더욱 유명해진다.
Lo! in that house of misery

A lady with a lamp I see
Pass through the glimmering gloom,

And flit from room to room.
오! 저 고통의 집 안에

등불을 든 한 여인이 보이는구나
희미한 어둠 속을 지나가며

방에서 방으로 스치는구나
이러하듯,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녀의 별명은 보통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등불 든 여인'이다. '백의의 천사'에 비해 '등불 든 여인'이라는 별칭은 한국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램프를 든 천사라는 절충안을 별칭으로 쓰고 있는데, 이는 일본식 번안 명칭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와 굳어진 것이다.[20] 참고로 이 백의의 천사라는 명칭은 그녀를 다룬 전기영화 중 하나인 《백색 천사(White Angel)》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위의 별명을 통해 떠오르는 단아하고 조신한 이미지랑 다르게 오히려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전사(...)라는 말장난이 있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크림 전쟁 당시 군에서 물자를 보급하지 않자 그녀가 직접 망치로 군 창고 문을 따고 의료 물자를 강탈해 갔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한번은 장교가 물자를 안주려고 하자 망치로 때려서 병상에 눕혀버리기 전에 내놓으라고 협박을 시전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니 알만 하다.[21] 이러한 그녀의 저돌적이고 개혁가적인 모습까지 포함해 망치를 든 여인(Lady with the hammer)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게 순화되어 등불이 된 것이 아닌가하는 이야기도 있다.

4. 업적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설과 반박

업적이 지나치게 고평가되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크림 전쟁 당시 간호사로 현지에서 활동한 시기도 길지 않고, 그나마도 후방 병원에서 있었으며 크림전쟁 이후의 활약도 거의 없다. 높이 평가 받은 이유는 고위 신분의 백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반대편에 있는 메리 시콜 (1805년 ~ 1881년)[22]의 재조명과 더불어서 역으로 더 비판받기도 한다. 메리 시콜을 검은 나이팅게일이라고 평가하자, 거꾸로 나이팅게일이야말로 하얀 시콜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역으로 까인다든지...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나이팅게일의 진짜 업적은 위생의 도입이다. 위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병상과 병원의 위생을 확립하는 데에 공헌이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망자 비율과 위생의 연관 관계를 통계를 통해 한 눈에 보여 준 것으로 유명하고[23], 이로 인해 과학동아 통계 디자인 관련 기사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다만 위인전 등에서 나이팅게일의 활동을 실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묘사하고, 이를 지나치게 미화해서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나이팅게일의 진짜 업적도 폄하되는 것. 다른 의미의 빠가 까를 만든다에 가깝다. 또 무시되는 업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비종교적인 배경에서 학문적 차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게 한 것. 그전까지 간호는 가톨릭과 연관되어 종교개혁 때 배척되었다.

그 외에도 위인전 때문에 잘못 알려진 사실도 많다. 마치 나이팅게일이 20대 즈음의 묘령의 나이에 크림 전쟁에 간호사로 나간 것처럼 묘사된 경우가 많다. 특히 해당 인물을 집중 조명하지 않고, 잠시 짚고 넘어가는 식으로만 다루는 역사 만화에서 그러한 점이 더 심하며, 이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20대, 심한 경우 10대에 종군 간호사로 활동한 줄 아는 사람까지 있다. 하지만 크림 전쟁이 일어난 것은 1853년, 거기다 그가 간호사들을 이끌고 간 것은 1854년이다. 이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미 30대 중반이며 전문적으로 간호교육을 한 게 1851년 31세로 당시 기준으로 결코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24] 여러가지로 인류의 선을 대변하는 인물이지만, 이 사람도 자세히 파고 들면 온갖 구린 소문이 돌아다닌다. 나이팅게일에 대한 구린 소문의 근원은 그가 당대로서는 드물게 독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초상화를 보다시피 미모로도 유명했기에 구혼을 몇차례나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래서 레즈비언이 아닌가 하는 먼 훗날의 호사가들의 말이 있긴 했지만 나이팅게일의 여러 개혁이 탄력을 받았던 것은 그녀의 활약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낭만성과 결합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히 독선적인 점이 있었다. 크림 전쟁 그곳 의무대 지휘자는 당연히 의사였지만 나이팅게일 후견인이 육군의 수장 육군대신이라 그가 빽으로 자기 이론을 강요했고 후반기에 영국에서 또다른 간호부대가 파견되었는데 간호부대의 책임자가 자신과 동급이라는 이유로 마구 간섭하고 항의해서 결국 이 책임자는 자신의 부하 직원을 남기고 영국으로 소환된다. 후임자로 온 의사와 간호사들은 직책으로는 동급이지만 사실상 나이팅게일의 부하직원 취급을 받았었다.

하지만 오히려 독선적인 면모는 많은 군인들을 살리기도 했다.[25] 크림전쟁 당시에도 군에서 필요한 물자를 내주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군창고로 처들어가 들고오거나 그녀의 이론에 반대하거나, 자신의 의견이나 권고를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키배를 방불케 하는 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현대에도 2014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이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신천지 감염 사건처럼 의료인들의 권고 사항을 무시하다가 사태를 키우는 일이 잦다. 그래서 의사나 간호사들 중에서는 이런 독불장군이 많고, 전시의 야전 병원이나 전염병 유행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의료인들의 이런 면모가 상황의 악화를 막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밀림의 성자로 불리는 알베르트 슈바이처[26]수단돈 보스코로 불리는 이태석 신부 같은 네임드 의료 봉사자들도 너무 강압적이라고 환자들에게 항의를 받았을 정도지만,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진 바 있다. 나이팅게일이라고 다를 건 없는 법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그 업적이 축소되어 알려진 편이다. 어린이용 위인전에는 통계나 위생의 도입 등의 학술적인 업적보다 성품 묘사(성품은 오히려 독선적이고 무서운 여걸이었지 온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가 주가 되기 때문에 그녀의 정확한 업적에 대해서는 성인이 되어 처음 알게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도 많이 활약했지만 장애의 고난 극복과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만 알려진 헬렌 켈러와 비슷한 케이스.

5. 나이팅게일 선서

1893년 만들어져 간호사로서의 윤리와 간호원칙을 담은 내용을 간호학도들이 맹세하는 의식이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이다. 다만 나이팅게일 선서는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미국의 리스트라 그레터(Lystra Gretter)와 디트로이트의 패런드 간호학교의 위원회가 그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대한간호협회1988년 통일번역문안을 따른다.

선서식 때 간호학도들은 손에 촛불을 든 채 하얀 가운을 착용하는데, 촛불은 주변을 비추는 봉사와 희생 정신을, 흰색 가운은 이웃을 따스히 돌보는 간호정신을 상징한다.[27]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나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이 나이팅게일 선서 때문에 간호사의 행동 지적에 나이팅게일을 들먹이는 경우도 있는데, 나이팅게일은 간호사 요구에 반하는 비협조적인 태도를 별로 안 좋아했고, 필요한게 있는데 절차가 지지부진하면 직접 창고를 털어버릴 정도로 물리력을 행사하고, 고위층에 숨김없이 보고 해버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이팅게일은 정작 선서의 내용과는 정반대 성향의 인물이다. 즉,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을 빌려놓고 망신을 유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6. 고양이 사랑

나이팅게일은 고양이에 대한 무한 사랑을 펼쳤던 인물이기도 하다. 영국 매체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나이팅게일은 생전에 "고양이는 인간보다 더 많은 연민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양이 비스마크(Bismark)[28]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는데, 비스마크라는 이름은 음식을 마치 신사처럼 먹는다고 해서 나이팅게일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물론 비스마크가 식탁에서 사료를 먹었을리 만무하지만 이 간호사는 "(비스마크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며 치켜세웠다. 비스마크는 페르시안 수컷고양이로 가장 예민하면서도 애정어린 특유의 성향으로 나이팅게일을 사로잡았다.

1942년에 출판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삶(The Life of Florence Nightingale)》에는 그가 이 페르시안 고양이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을 "거의 호랑이와 야생동물 같다."고 표현한 것으로 나온다. 이 고양이 가족은 나이팅게일과 벌링턴 호텔에서 같이 생활했는데 호텔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고 한다.

1854년 영국과 러시아 간 크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당시 부상당한 영국 병사들의 참담한 상황은 뉴스로 전파되며 많은 사람들을 격노케 했다. 병사들이 입원해 있는 스쿠타리(Scutari)[29]내 군사병영이 악취와 환자들의 과잉 현상으로 최악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 정부는 나이팅게일을 비롯한 38명의 여성들을 튀르키예로 보내 현장 의료진들을 돕도록 했다. 그해 11월, 나이팅게일과 동료들은 튀르키예 땅을 밟았다. 특히 그곳에서 나이팅게일은 거의 쉴 시간 조차 없이 일했는데 밤에도 등을 들고 다니며 아픈 병사들을 체크했다. 등불을 든 여인라는 수식어는 그의 이런 헌신적인 태도에서 나왔다. 당시 밤에는 쥐들이 들끓었는데 빗자루를 들고다니며 이들을 죽여야하는 상황이었다. 쥐들은 병영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 심지어 환자의 머리위에서 여유로이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됐던건 바로 한 병사에게서 받은 작은 노란색 고양이였다. 이 고양이는 나이팅게일과 영국으로 돌아갈 때 배 안에서 생명을 마감했다.

나이팅게일은 90년동안의 삶에서 약 60마리의 고양이들을 돌본 것으로 추측된다. 한 번에 17마리의 고양이를 돌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알려진 고양이 이름만도 바츠(Barts)[30]부터 머프, 팁, 톰, 디즈레일리[31], 글래드스턴[32] 등 매우 다양하다. 퀴즈(Quiz)라는 이름의 고양이도 있었는데, 나이팅게일이 탄 열차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던 용감무쌍한 작은 페르시안 새끼 고양이였다. 퀴즈는 부상을 입었지만 생존했다. 1859년 런던에서 출간된 나이팅게일의 간호학 저서에는 "작은 반려동물은 종종 아프거나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을때 최고의 친구가 된다."고 평가돼 있다. 여기서 위안과 동지애를 제공하는 작은 반려동물은 당연히 고양이를 뜻한다. 당시 고양이는 나이팅게일이 혼자 식사를 할때, 혼자서 잠자리에 들때 항상 주위에서 그와 함께 한 존재였다. 나이팅게일의 이야기를 담은 여러 책에는 항상 고양이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가 일을 할 때 고양이가 그의 목에 붙어있었다거나 혹은 그의 사촌이 사망했을 때 한 고양이는 나이팅게일의 목에 팔을 두르며 위로했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1910년 8월 13일 나이팅게일은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고양이들과도 이별했다. 고양이들에 대한 유서는 따로 남기지 않았다.

7.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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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육성
"When I am no longer, even a memory, just a name, I hope my voice may perpetuate the great work of my life. God bless my dear old comrades of Balaclava and bring them safe to shore. Florence Nightingale."
내가 더 이상 없어 (나에 대한) 기억까지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도, 나는 내 목소리가 내 삶의 크나큰 업적을 영구화시켜주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내 친애하는 발라클라바의 옛 동료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물가로 고이 인도하시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이 녹음한 육성의 내용

[1] 그녀의 생일이 국제 간호사의 날(International Nurses Day)로 지정되어 있다.[2] 킹스 칼리지의 설립자는 아니고 세계 최초의 간호학교인 現 킹스 칼리지 런던 간호학부(KCL NMPC)의 설립자이다.
King's People - Florence Nightingale
[3] 잉글랜드 국교회에서의 축일은 8월 13일.[4] 유럽, 영미권 및 아시아의 상류층 영애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간호사로 나선 것은 세계대전 당시의 일이다.[5] 병원이 위생적이고 깔끔하게 바뀌게 된 시기는 위생학이 발전하고, 세균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20세기 초부터이며, 그전까지 병원은 돈 없고 가난한 서민들이나 들어가는 곳이었고 부자들이나 귀족들은 주치의를 직접 두거나 왕진을 다니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6] 더 정확히는 자금을 받아[7] 쾌적함을 느끼는 환경에서 환자의 회복이 더 빠르다. 간호사는 환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8] 현(現) 킹스 칼리지 런던의 Florence Nightingale Faculty of Nursing, Midwifery & Palliative Care.[9] 나쁜 공기가 병을 만들어낸다.[10] 미생물이 병을 만들어낸다.[11] 공장주 및 기업주들은 미생물설-세균설을 지지했는데, 이유는 장기설이 정설이면 공장의 노동환경 개선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생물설이면 "네 몸에 나쁜 미생물이 생겨서 병에 걸린 걸 어떡하라고?"라고 하며 산재 처리 없이 쫓아낼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자기들 돈 나갈 일 만들기 싫었던 것이다.[12] 당장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도 병원성 미생물이 들어 있는 나쁜 공기에 의하여 전파된다.[13] 이게 병원이 아닌 행정적으로 이루어 진 게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 되시겠다.[14]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 가족관계, 몸상태 등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며, 이를 위한 최대 환자 수는 12명이라고 규정하였다.[15] 일정 각도마다 원 그래프의 면적 요소를 넣은 그래프로, 현대에도 원형 면적 도표(Polar area diagram)라 불리며 시간에 따른 반복적인 현상(사망자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16] 비슷한 경우로 헬렌 켈러가 있다. 88세까지 천수를 누렸지만 위인전에서는 그녀가 장애를 극복하고자 피땀을 흘렸던 10대 시절만을 비중 있게 다루고 20대부터는 그냥 장애인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는 내용 정도로만 간략히 기술하고 끝낸다. 물론 이는 헬렌 켈러의 황혼기인 1950~60년대에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 광풍 때문으로, 당시 사회 분위기상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 활동 경력과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 및 여성 인권 운동 등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헬렌 켈러 전기가 본격적으로 들어올 때의 한국도 당시 군부독재와 매카시즘 때문에 21세기까지도 장년기의 사회주의 운동 이력은 삭제하고 장애인 인권 운동가 정도로만 알려진다. 한국에서도 손기정이 비슷한 사례인데 대부분 1936 올림픽 시절만을 떠올리지만 이후로도 장수하다가 2002년 월드컵을 지난 90세에 사망했다.[17] 에셀 베드퍼드 펜위크(Ethel Bedford Fenwick)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1887년 혼인한 남편의 이름과 성씨를 따른 것이다. 혼전성은 맨슨(Manson)이다. 관련 기사.[18] NIV 번역본 히브리서 1장 14절의 표현을 인용한 어구이다.[19] '성녀 필로메나'는 살아 있는 묵주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인물로, "막 개종한 그리스의 왕의 딸로 태어나 어렸을 적 맹세한 순결 서약을 지키기 위해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청혼을 거절하고 그 대가로 고문을 받았으나 고문의 상처가 금세 치유되는 기적들을 보이고, 감옥에서 오히려 더 아름다워지자 로마인들이 회심하는 걸 두려워한 황제의 명으로 처형, 결국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성녀로부터 직접 들었다."나폴리의 수녀 마리아 루이사가 주장했다. 참고로 성녀 필로메나의 유해는 10살에서 13살 정도로 되는 어린 아이의 유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 황제들 중 한 명이다.) 기도를 잘 전구해준다.(=하느님에게 전달해준다.)는 것으로 유명하며 19세기 초반, 유해가 발견된 후 순교 사실 빼고는 사실상 밝혀진 것이 없는 인물(위의 이야기는 한 수녀의 "주장"이다.)이 순전히 "중재 기도가 강력하다(?)"는 사실만으로 시성된 인물이기도 하다.[20] "세계의 역사" 권 12, 쇼가쿠칸, 1986.[21] 이렇게 해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나이팅게일의 가문이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부호라 나이팅게일의 독선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인맥 활용의 좋은 예[22]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 태생 흑인으로 크림 전쟁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간호사로 갈 것을 결정했으나, 자국에서 군의로 활동하는 등 경력이 풍부했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영국과 크림 전쟁 현지의 나이팅게일 간호사단에서도 탈락했다. 그래도 최전방에서 응급 치료에 나서며 병사들에게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그들을 헌신적으로 간호했고 결국 현지 병사들의 제보에 의해서 튀르키예, 영국, 프랑스 3개국에서 훈장을 받았지만, 재정적 지원이 없어서 결국 사비로 의료소를 열어 치료 활동을 계속하다가 크림 전쟁이 끝난 뒤에는 빈민가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그래도 빈민가에서도 열심히 사람들을 돕고 치료해서 엄청난 존경을 받았으며, 그녀가 죽을 때 많은 빈민 이웃들이 슬퍼하고 도와줘 물질적 풍요나 명예를 그리 누리지 못했지만 쓸쓸하게 죽진 않았다. 워낙 삶 자체가 드라마틱했고 초상화도 최근 발견되면서, 근래에 와서야 그 업적과 인생사가 주목받고 있다. 그 영향으로 EBS 지식채널 e에도 등장했다.[23] 그 통계표 이름이 장미도표(나이팅게일 로즈 다이어그램). 장미 모양처럼 보기쉽게 정렬해서 이런이름이 붙었고, 이 업적으로 영국 통계학회의 첫 여성회원이 되었다.[24] 장수한 인물인데도 젊은 이미지가 강한 것에서 육손과 비슷하다. 육손도 젊은 청년 이미지가 강하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30대 후반이다.[25] 위에도 나왔듯이 당장 위생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은 야전병원의 부상자 사망률은 40%였고, 나이팅게일이 독선적으로 위생을 도입시킨 병동의 부상자 사망률은 2퍼센트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망률의 차이가 저랬다. 게다가 의학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20세기니 만큼, 당시의 치료라는 건 대부분 절단과 관련이 있었다. 그나마 야전병원에서 사망하지 않은 60%도 팔이나 다리가 하나씩 없었다는 소리다.[26] 슈바이처 본인이 직접 남긴 기록에는 "주의사항을 준수하지 않는 환자들에게 건장한 체격의 간호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완력으로 찍어누르니 고분고분해지더라."는 서술도 있다.[27] 학교에 따라 복장은 실습복, 촛불은 LED 촛불로 대체하기도 한다.[28]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 제국의 초대 수상[29] 현재 튀르키예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 지역[30] 영국 바살러뮤 병원에서 따온 이름[31] 벤저민 디즈레일리 영국 전 총리[32]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 영국 전 총리[33]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계몽사[34] 현대에서도 39세의 나이에 출산하는 건 노산이라 불리니 이때는 더더욱 아이를 보기 어려웠을 나이다.[35] 육성 녹음을 남긴 여성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사람이 그녀보다 고작 1년 앞서 태어난 빅토리아 여왕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녹음의 역사적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참고로 육성 녹음을 남긴 남성 중 가장 옛날에 태어난 사람은 헬무트 폰 몰트케로, 이쪽은 아예 19세기 이전에 태어난 사람 중 유일하게 육성 녹음을 남긴 사람이다.[36] 영국의 탐험가, 언론인. 데이비드 리빙스턴 수색대에 참여하며 리빙스턴을 찾아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Dr. Livingston, I presume)?"이란 말을 건넨 에피소드로 유명하나,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아프리카 침략의 선봉장 역할을 한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37] 의외로 백인의 의무 개념은 당대의 진보적인 인사들도 대거 찬성한 바 있다. 인종차별적인 관점이 아니라, 당시에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백인들이 세운 나라들이 더 문명 수준이 발달해있었고, 이들이 식민지배하던 나라나 민족들 대부분이 미접촉부족이거나 오랜 기간 기술 발전이 정체된 상황이라서, 기술 수준이나 시민의식이 크게 뒤떨어진 탓에, 현실적인 측면에서 열강들의 발전한 문명이 이들 원주민들에게 확산되어 그 혜택을 누리길 바라는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일례로 인종차별이나 현지인들에 대한 착취에 대해 결사반대하는 진보주의자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조차 이런 이유로 백인의 의무 개념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단지 허버트 스펜서 같은 당대의 반(反) 제국주의자들은 열강들이 그저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채우고자, 이 개념을 왜곡한 것이라고 봤을 뿐이다. 이 자체가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서 금기시된 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열강들의 옛 식민지들이 속속들이 독립한 것을 계기로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여론이 확산된 후의 일이다. 하기야 찰스 다윈이 여성을 우이로 보는 듯한 견해에 그 지원한 영국 지도층은 물론이고, 타국조차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그 진면목이 알려진 것이 20세기 중후반이 되어서 이었으니, 자연을 만만히 본 것은 나이팅게일도 그 한계에 있다는 평으로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