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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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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 손기정
孫基禎|Son Kichung[1]
파일:손기정옹.jpg
<colcolor=#fff> 출생 1912년 10월 9일[음력][족보상]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동
(現 평안북도 신의주시 민포동)
사망 2002년 11월 15일 (향년 90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본관 밀양 손씨 (密陽 孫氏)[4]
신체 약 173cm[5]
학력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상과 / 수료)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 / 졸업)
가족 증조 할아버지 손종일
할아버지 손재기
큰아버지 손태후
아버지 손인석(1875[6]~1935)
어머니 김복녀(?~1941[7])
형 손기만(1900 ~ ?), 손기용
배우자 강복신(1916~1944, 사별)
장인 강용석
딸 손문영(1940년생)
아들 손정인(1943년생)
배우자 김원봉(1922~1972, 사별)
장인 김태규
처남 김원룡, 김원권
직업 육상 선수 (마라톤 / 은퇴)
육상 감독은퇴
종교 개신교천주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 사회 공헌자 묘역-10호

1. 개요2. 생애
2.1. 초년 시절2.2. 1936 베를린 올림픽
2.2.1. 히틀러와의 만남
2.3. 1937년~1945년2.4. 지도자·체육 행정가로서의 활약2.5. 사망
3. 수상 기록
3.1. 수훈
4. 대중 매체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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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한국인 육상 선수. 한국인 운동선수 최초로 올림픽을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다.

2. 생애

2.1. 초년 시절

1912년 10월 9일,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동(現 신의주시 민포동)[8]에서 아버지 손인석(孫仁錫)과 어머니 김복녀(金福女)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9]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위로 맏형 손기만(孫基萬)과 둘째 형 손기용(孫基用)이 있었다.

어린 시절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랬듯이 매우 가난했는데, 그래서 손기정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옥수수참외 장사를 하기도 하고 우동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손기정은 이 당시에 호떡을 매우 좋아했으나, 당시 호떡이 꽤 비싸서(5전) 많이 사 먹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집과 학교가 2km 거리에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 거리를 매일 달려 다녔고, 심지어 노는 시간에도 압록강변을 달려 다녔을 정도로 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 막연하게 운동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손기정의 모친 김복녀 여사는 어린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고, 아들이 달리지 못하도록 잘 벗겨지는 여아용 고무신을 신겨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어서 달렸고,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서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고 한다.

이런 손기정의 재능을 눈여겨본 당시 담임교사였던 이일성이 손기정에게 육상 선수가 될 것을 권유했고, 약죽보통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신의주에서 열린 육상대회 장거리 종목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보통학교 졸업 후 생계가 막막해져서 육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1932년 이일성 선생이 그를 일본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가 없게 되자, 6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어느 회사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학업과 육상을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 회사의 사장은 당시 신의주부에서 동익상회를 하던 공정규로, 안과의사 겸 국어학자 공병우 박사의 부친이었다. 손기정은 이곳에서 일을 하며 쉬는 날에는 압록강변을 달리며 연습했다.

1932년, 경성부에서 열린 제 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했는데 서울의 복잡한 지리를 몰라서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었고 아쉽게 2위를 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인생이 바뀌었는데,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10]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중장거리팀은 한반도 내에서만 유명했지만, 기록만 보면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더욱 마라톤 훈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1935년,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이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공식 세계신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당시 비서구권에서 열린 대회는 대회 운영이나 코스 길이를 신뢰할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비공인이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사례이다.

그리고 이듬해 열린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며 단번에 장거리 육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 당시 13개의 대회에 출전하여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메이지 신궁대회 마라톤 종목은 손기정을 시작으로 이후 3개 대회 연속으로 한국인들이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35년 손기정-1937년 유장춘-1939년 오동우가 그 주인공들이다.

2.2. 1936 베를린 올림픽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당시 나치 독일의 기록 영상[11] 당시 일본으로 송출한 단파 라디오 방송 중계 녹음본[12]
파일:손기정-1936.jpg
1936 베를린 올림픽 출전 당시 모습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13]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다. 일단 올림픽 선수 출전 인원은 3명이였기에 모두를 탈락시킬 수는 없었다지만, 일본 국내 최종 선발전의 1등 기록이 2시간 35분이라는 평균보다 저조한 성적 때문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들어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3위 후보 스즈키 히로시게에 더해 4위를 한 후보 시와쿠 타마오를 예비 후보로 선발시켜 현지에 보낸 이후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를 열었다. 당시 멀리뛰기 대표였던 어느 일본 선수가 일본 육상팀이 조선인 둘 중 하나를 떨어트리려고 하고 있다라는 풍문을 둘에게 전해 주는 등 어느 정도의 수작이 개입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꼼수를 부리고도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가는 반칙까지 저질렀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노하며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고 달렸다고 한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다.[14] 여담으로 지름길로 왔으면서도 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에게 남승룡은 뺨따귀까지 날리며 격분했다고. 시원시원하고 활발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했을 정도면 화가 얼마나 났을지 짐작할 수가 있다. 어쨋건 2차 예선에서 현지 적응에 실패하여 컨디션 난조를 보인 스즈키[15]가 기권하며 1936년 일본 대표팀 마라톤 출전선수 손기정, 남승룡, 시와쿠 타마오 3인으로 결정되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 둘이서 별 말 없이 실력으로 찍어내려 주니 그런 의견은 쏙 들어갔다.
파일:손기정출발사진.jpg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출발 사진. 맨 왼쪽에서 달리는 382번 선수가 손기정이다.
이후 8월 9일 열린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2'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16][17]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18] 사실, 손기정의 금메달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남승룡도 막판에 스퍼트를 내면서 무려 30명을 추월하여 3위로 골인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대표팀으로 함께 출전한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시와쿠는 현지 트레이닝 도중 생긴 물집으로 인해 완주에 실패하였다.
파일:손기정골인직후모습.jpg
<colbgcolor=#fff,#1c1d1f> 골인 직후 모습
파일:손기정금메달.jpg
손기정이 받은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등록문화재 제489호)[19]
파일:손기정편지.jpg
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당시 한글 표기로는 '슬푸다')라는 석 자가 쓰여 있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파일:손기정_1936.jpg
시상식 사진을 보면 1위와 3위로 각각 단상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손기정은 묘목[20][21]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남승룡은 어떻게 해서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려 일장기를 가리고자 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할 날에 오히려 슬픔에 사무친 나라 잃은 두 청년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콧날이 시큰해질만한 사진이다. 은메달을 수상한 뒤의 영국 선수[22]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이다. 동메달을 차지했던 남승룡은 훗날, "기정이가 우승해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파일:손기정일장기말소.jpg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실어서 동아일보가 정간당한 일장기 말소사건도 유명하다.
이런 판국이니 조선총독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와 감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이 탓에 올림픽 영웅에 걸맞은 환영 인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기정이 정말로 찬밥 대우를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손기정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암묵적으로 큰 인기와 존경을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식의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본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 아낙들도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찬양하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시의 전문은 심훈 문서에 있다.

그러나 손기정은 스포츠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된 사건 때문에 떳떳이 활동할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아무 죄 없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본에서 우승 소감을 녹음한 내용이 레코드로 남아 있는데, 들어보면 손기정의 고향인 신의주 억양이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내용은 손기정의 자발적인 발언이 아닌 일본에 의해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에 불과했기에, 손기정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
손기정: 저는 손기정입니다. 24년 간의 숙망을 달성하려고 우리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8월 9일 오후 3시에 스타트에 나섰습니다.

이때 나는 신궁대회 때 스타트와 같은 가벼운 기분이었습니다. 이 정도이면 반드시 우승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쟈바라가 먼저 뛰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달렸습니다. 나는 침착한 태도로 달리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달리고 있는 외국인들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 하파가 곧 내 앞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32km를 앞두고 하파와 함께 전 회의 우승자인 아루젠친[24]의 쟈바라를 따라버리었습니다. 그리고 하파와 함께 나는 한동안 똑같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파를 따라버리기에는 무한히 어려웠습니다. 내 전신에 아직도 힘이 가득하였으므로 능히 우승할 자신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제 즉 문제의 언덕에 다다르니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여 주는 것이 보이었습니다. 좌등 코취 역시 응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큰 기를 흔들면서 '인제는 6km가 남았다' 고 큰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일층 더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2번째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도 역시 이곳에 나를 응원하여 주는 우리나라 일장기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응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제는 1km 반이 남았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려주었습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서 죽을 힘을 다 하여 더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기었습니다. 기록의 시간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하파가 나보다 2분 4초 지나치어 들어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남 군이 원기있게 달려들어왔습니다. 이때의 반가움은 내 입으로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후 6시 15분 나는 하파와 남 군과 함께 표창대에 올랐습니다. 장엄한 우리나라 국가가 엄숙하게 내 귀를 울려줄 뿐이었습니다. 이때의 기쁨은 내 일생을 통하야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승리는 결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 크게 해라.[25]

이 승리야말로 내 개인의 달린 힘보담도 우리나라 동포 여러분들의 열렬한 응원의 결정(結晶)인줄 생각하는 바입니다.
금메달 획득 소감. 일본 당국이 써 준 대본을 그대로 읽은 것에 불과했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기테이(SON, Kitei)'[26]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명백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송환되어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27]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다. 혹시라도 은퇴 전에 독립해서 독립국 선수로 나오는 경우도, 독립 전후의 국적을 다르게 기록할 뿐이다.[28][29] 민족, 출신지, 정체성, 올림픽 이후의 활동 다 필요 없고 오직 대회 당시 소속 하나만 보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공식 인정할 경우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다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각국은 외국 대표 선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나라와 관련이 있는 선수는 자기 나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럴 경우 국적 분류가 완전히 흔들리기 때문이다.[30][31] 한 번 기록되면 평생 정도가 아니라 영원토록 남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 IOC에서는 공식적으로 'Kitei Son, Japan'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 약력에는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한국 이름 손기정이 명시되어 있으며, 창씨개명을 강요받아 일본 이름으로 출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시상식에서의 침묵, 후일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 해방 후 첫 올림픽인 1948 런던 올림픽의 선수단 기수와 조국의 첫 올림픽인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성화 봉송 주자를 맡은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 2011년 12월 9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손기정의 '대한민국' 국적은 인정했지만, 역사 왜곡(Historical Distortion)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력에 있는 국적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한편 공식적이진 않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주 컬버시티에 있는 역대 마라톤 우승자 기념비에 새겨진 손기정의 이름은 1986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국적이 수정되었다. 당사자였던 손기정 또한 기념식에 참석하여 조금이나마 한을 풀 수 있었다.

2.2.1. 히틀러와의 만남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은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그는 이 순간을 "160cm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32]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고 회고했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손기정은 한민족 인물 중에서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대면한 유일한 인물이다.

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33]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34] 약한 것은 죄악이라는 사고방식과 '강한 인간(위버멘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 히틀러 특유의 사상을 고려하면 올림픽에서도 가장 근본있는 하이라이트 종목인 마라톤에서 전세계의 유명한 육상 선수들을 누르고 우승한 손기정에게 느꼈을 호감은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대회의 100m 종목에서 우승한 미국의 흑인 선수 제시 오언스에게도 히틀러가 열렬히 손을 흔들어주었다고 한다.[35] 하지만 유대계 운동선수들에게는 절대로 축하나 인사를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출전 소속만 일본으로 되어 있을 뿐 손기정이 한국인(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ä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
일본의 우승자 손기정이 옵니다, 한국(조선) 대학생 손기정은 전세계의 경쟁자들을 아시아의 능력과 에너지로 눌렀습니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동맹인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맹국이란 것만 알고 있으면 나오는 오류로, 올림픽 당시에는 독일에겐 일본은 적성국이었다. 당시 독일은 중화민국에 주재무관 파견과 88mm 대공포 등 무기를 공급하며 일본에게 빅엿을 선사해주고 있었다.[36] 1차 대전의 일본 제국은 승전국 포지션으로 이것저것 뜯어갔기 때문에[37] 공산주의와 일본을 견제한다고 중국 국민혁명군을 정예화시켜놓은 게 독일이다. 특히 장개석 산하 직할의 국민혁명군은 독일제 총기와 심지어 작업모까지도 독일 특유의 회색 군복과 단추 두 개 작업모를 그대로 썼다. 이 군사적 지원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에 질질 끌리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니 말 다한 셈이다. 일본이 독일의 동맹이 된 건 베를린 올림픽으로부터 3개월 뒤인 1936년 11월 25일, 방공 협정이 조인된 이후부터였다.

2.3. 1937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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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시절
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해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했다.[38]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 육상부를 대표해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성전문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 대회 중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39]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7개 팀 중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했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다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 우승을 달성했다.

이렇듯 손기정이 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했다. 당시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전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한국어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학교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보전에는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이 보전에 다니는 것을 꺼렸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관헌은 손기정을 주야로 감시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손기정은 1937년 2학기에 반강제로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편입했다.

그런데 도쿄에서도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 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다.[40]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 관헌이 공중 앞에서 손기정이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결국 손기정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41]에서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2.4. 지도자·체육 행정가로서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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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42]를 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손기정
해방 이후 10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손기정은 기수를 맡게 되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서 슬픈 우승을 해야했던 손기정은 개막식에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겨워 마냥 눈물을 흘렸다.

손기정은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감독으로서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훈련시켰다. 1948년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1948 런던 올림픽부터 1964 도쿄 올림픽까지 마라톤 대표팀 감독을 맡아 지휘했고 KOREA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여한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당당히 태극기를 들고 입장했다. 이후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맡았으며 1966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했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1988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맡았다.

1983년에는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발간하고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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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 당시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
손기정의 인생 후반부에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장면은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뛴 것을 들수 있다.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봉송 주자가 아닌 성화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손기정이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극비에 부쳐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다.[43] 결국, 손기정이 경기장으로 성화를 들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고 이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스타덤에 오른 육상선수 임춘애가 넘겨받은 뒤 최종적으로 1명의 체육인과 2명의 일반인이[44] 성화를 점화했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의 회고에 따르면 손기정은 본인이 당연하게 최종 성화 점화자로 선택될 거라 생각했는데 대회 직전에 이게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지며 격노했다고 한다.[45] 그의 증언에 따르면 성화봉송 때 자신이 있었고 멋있게 달리기 위해 1년이나 훈련했다고 한다.[46] 하지만 대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손기정은 결국 자신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시 영상을 보면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 문양1988 서울 올림픽 엠블럼을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유튜브에서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47]

공교롭게도 황영조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과 손기정이 우승한 날은 8월 9일로 똑같다.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시상이 끝난 직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손기정이 황영조를 만나 격려하는 장면도 유명하다. 이때 황영조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손기정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은메달이 일본, 동메달이 독일 선수라 폐막식 때 태극기 양 옆으로 일장기와 독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는데, 이걸 보고 손기정은 "56년 전 그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3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다"고 감격하기도 했다. 당시 뉴스

손기정의 영광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에 있었다. 당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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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조의 골인 순간에 잡힌 손기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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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촬영된 사진
1996년 가을 강형구(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한 손기정이 강 화백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 화백은 캔버스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젊은 손기정의 얼굴을 담았다.

의외로 축구계와도 접점이 있다. 1950년대에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의 상무이사로 재직했었는데, 대구방직이 1951년 1952 헬싱키 올림픽 선수 선발을 겸해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한국 축구의 최강팀이었던 육군 특무대를 이기는 파란을 일으키자 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선방직의 선수들을 잡아갔다가 조선방직 단장이 바로 손기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석방했다는 얘기가 있다.

2.5. 사망

1997년부터 다리의 동맥경화증 때문에 잘 걷지 못하여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북대표팀 공동입장,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에 이어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지켜보았지만[48],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폐렴으로 인한 숙환으로 타계했다. 사망하기 이틀 전 폐렴 증세로 입원해 바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일본에 사는 아들이 도착하고 얼마 뒤 바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49]

사후에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으며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됐다. 모교인 양정중학교, 양정고등학교[50]의 옛 터가 있는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서울역 뒷쪽)에는 손기정 기념공원을 조성했다.[51]

손기정공원에는 손기정기념재단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79년 5월 손기정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의사에 따라 기념품 1,5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고, 육영재단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의 어린이회관에 '손기정 전시관' 을 지어 2005년도 기념품을 보관 및 전시하고 있다.

2005년, 한 독일인이 손기정에게 헌정하는 앨범을 만들었다.

3.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36 베를린 마라톤

3.1. 수훈

4. 대중 매체

[navertv(42954960)]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6부 - 올림픽 ·격동의 제전中[56][57][58]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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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맨 좌측이 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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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하단 우측이 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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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맨 우측이 손기정.
* 항상 마라톤을 하면서 얼굴이 반쪽이 된 사진만 찍혀서 그렇지 알고 보면 미남이다. 인터넷에서 중년시절 사진을 찾아보면 꽤나 잘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의 보성전문학교 시절 사진을 봐도 상당한 미남인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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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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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이 기증한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1936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의 부상으로 그리스의 한 신문사가 손기정에게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를 주려 했으나 당시 IOC 규정이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할 수 없는 걸로 바뀌는 바람에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조차 식민지 청년이 더 유명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래서 독일 박물관에 보관하다가 그리스 언론사의 주선을 받아 인수를 시도한 지 10년이 지난 1986년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기념해서 손기정 선수 본인이 인수했다. 이후 손기정 옹은 집에서 이 투구를 보관하다가 1994년 대한민국에 기증했다. 이 투구는 현재 대한민국 보물 9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자세한 것은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문서 참고.

6. 관련 문서



[1] 영상[음력] 8월 29일[족보상] 1912년 5월 29일[4] 진주사공파 46세손 기○(基○) 항렬이다.(족보)[5] 아돌프 히틀러와 만난 소감을 말할 때는 본인의 신장을 160cm라고 언급했다. 아마도 당시 서양 사람들과의 체격 차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많이 줄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또 1937년 세브란스 신체 검사에서 165cm였다는 논문도 있는데 앞서 160cm 발언처럼 왠지 몰라도 신장을 작게 발표하는 노력을 한 것 같다. 실제로는 80대 고령의 나이에 줄었는데도 170cm의 황영조와 대등했기에 선수 시절의 신장은 이보다 더 컸을 것이다. 김구와 같이 선 사진에서도 거의 차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젊은 시절 키는 178 ~ 180 정도로 추정된다.[6] 아래 기사에선 1872년생으로 나온다.[7] 사인은 심장마비.[8] 19대조 승지 손후(垕)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철산군으로 귀양을 간 뒤 그곳에 정착했다.[9] 밀양손씨대동보 권4 718쪽에 아버지 손인석의 부인으로는 밀양 박씨만이 등재되어 있고 어머니 김복녀는 보이지 않는다.[10] 양정고등학교(서울) 21회 졸업생이다.[11] 1분 59초경 손기정선수가 보임. 5분 53초 경부터 손기정이 경기장에 1등으로 진입하고, 관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나온다. 6분 53초 경에 남승룡이 입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편 씁쓸하게도, 해설위원은 '일본의 기테이 손', 그리고 '또 다른 일본인 선수, 남'이라고 외친다.[12] 위 독일 방송의 영상에 소리를 덧씌웠다.(한국어 자막 있음)[13] 당시 일본은 곧 벌어지는 중국과의 전쟁에서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있었다. 즉 한반도도 일본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도 모두 일본인이라는 사상인데 그 사상대로면 '순수 일본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상의 모순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14] 한편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2차 선발전에서 남승룡이 3위를 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는 후술하는 타마오의 지름길 주파를 남승룡이 목격하여서 분노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오히려 현지 테스트 도중 일본내 최종 선발전에서 3위를 했던 후보 스즈키가 중도 기권해버림으로서 일본의 입장에선 제 발등을 찍어버린 격이 되어버렸다.[15] 이후 스즈키는 10000m 종목으로 대체 출전하였으나 기록을 내지 못하였고, 이후 군에 소집되어 2차 세계대전 종전기인 1945년 필리핀에서 전사하였다.[16] 기존기록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사발라 선수가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세운 2시간 31분 36초.[17] 세계신기록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올림픽 기록이 맞다. 사실 손기정은 당시 세계 기록 (2시간 26분 42초)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마라톤은 신기록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고 최고기록으로 표기한다. 마라톤은 기온과 습도, 바람 등의 여건이 대회마다 다르고, 급경사코스와 직선코스가 다르며, 거리에서도 오차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다른 육상 종목 기록이 갖고 있는 엄밀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라톤에서는 ‘신기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최고 기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코스 거리, 출발지와 결승점 간 표고차, 출발지와 결승점 간 직선거리 등을 규정함으로써 나름대로 기록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18] 참고로 은메달은, 어니 하퍼(Ernie Harper)라는 영국인 선수가 획득했다.[19] 현재와 같이 메달에 목걸이를 달아서 목에 걸 수 있게 만든 것은 1960 로마 올림픽 때 시작되었고, 당시에는 큼직한 동전 형태로 상자에 넣어 주었다. 아래 시상식 사진에서 선수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메달상자이다.[20] 대회 종료 후 한국으로 이송되었으며, 모교인 양정중학교, 양정고등학교의 교정에 심어졌다. 현재는 양정중고가 목동으로 이전했지만, 묘목이 심어진 장소는 손기정 공원으로 조성되어 남아있다. 1982년 서울시기념물로 지정될 때 밝혀지길, 이 묘목은 월계수가 아니고 대왕참나무이다. 현재는 거목으로 자란 상태이며 서울시기념물 5호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로 보호받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 나무 옆에 1983년 경 설치된 비석에는 한문으로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에서 승리하여 당시 독일 총통인 히틀러로부터 손기정 선수가 받은 묘목임'#이라고 적혀 있다. 최근에 새로 설치된 다국어 설명 문구에는 히틀러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21] 다만 원래 상으로 받은 묘목이 대왕참나무가 아니라, 유럽참나무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대왕참나무는 북미산이기 때문.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손기정이 오랫동안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면서 바뀌었을 수도 있고, 귀국 후 겨울 동안 월계수를 보관했던 양정고 김교신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이 월계수가 죽게 생기는 바람에 한번 분을 엎고 잘랐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유럽참나무가 대왕참나무로 바뀐 것은 미스터리한 일. 어쨌거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유럽참나무는 국내에서는 기후조건이 되지 않아 오래 살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22] 어니 하퍼(Ernie Harper)라는 선수로, 당시 34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시간 31분 23초라는 기록을 내면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여담으로 하퍼는 이 경기 도중 손기정과 잠시 얽혔던 일화도 있다. 본래 이 마라톤 경기의 우승 후보는 이전 대회 마라톤 우승자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사발라(Juan Carlos Zabala)였는데, 마라톤 경기 도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사발라를 보고 다급해진 손기정이 무리하게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 때 뒤에서 같이 달리던 하퍼가 손기정에게 "천천히 가요, 천천히!(Slowly! Slowly!)"라고 외쳤다고 한다.(혹은 "저 사람은 어차피 금방 지칠 거니까 무리하지 마라"며 조언해 줬다고도 하는데, 이후의 보스턴 마라톤 출전기에서는 손기정 일행이 영어를 못 해 곤란을 겪었다는 것을 보면 하퍼가 설명을 해 줬다고 해도 손기정이 다 알아듣기는 어려웠을 듯. 끼워맞춰 보자면 손기정이 하퍼의 말에서 일단 'slow'를 알아듣고 속도를 늦췄다가, 나중에 사발라가 지쳐 기권한 것을 보고 그 속뜻을 깨달았다고 하면 말이 된다.) 그리고 이 조언을 받아들인 손기정은 1위, 하퍼는 2위를 차지했고, 자발라는 얼마 못 가 체력이 다해 곧 기권했다. 하퍼의 충고가 없었다면 손기정도 무리해서 사발라를 추월하려다 지쳐서 뒤쳐졌을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하퍼 자신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으니, 손기정에게도 나름대로 은인일 뿐만 아니라 스포츠맨십이 승부를 초월한 훌륭한 귀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더더욱 감동적인 스포츠맨십.[23] 이 사진을 가지고 일제가 손기정을 밧줄에 묶어 연행하듯 귀국시켰다는 낭설이 인터넷 일각에 퍼져 있으며사례, 나무위키 이 문서에도 리그베다 위키 때부터 수년간 그렇게 기술된 적이 있다. 오히려 나무위키로 낭설이 더 퍼졌을 가능성도 높은데, 이 사진의 양팔의 줄은 단지 양정고보 교복소매에 양정의 상징인 백선이 있는 것일 뿐, 밧줄로 묶은 것이 아니다. 이 문서 기타에 나온 최승희와 찍은 사진에서도 같은 양정의 교복을 입어 옷 자체가 팔에 줄이 들어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24] アルゼンチン{亞爾然丁} ; 아르헨티나.[25] 이 말을 누가 한 건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 부분은 실제로는 옆에서 누군가가 한 협박(영화 1947 보스톤에선 이쪽으로 연출했다)이라기보단, 손기정 선수가 미리 작성된 대본을 읽으면서 읽어야 할 문장 뒤에 딸린 원래는 읽어서는 안 될 '크게 읽으라'는 지시문을 실수로 그대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손기정 선수의 육성과 굉장히 유사하기 때문. 실수로 읽은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이 말하고 있는 우승 소감이 진심이 아닌 대본이라는 것을 은근슬쩍 전달하기 위한 손기정의 고의였다는 주장도 있다.[26] 이름을 일본어로 음독한 것.[27] 가이드가 붙는 베를린 올림피아 슈타디온 투어를 하면 박 의원이 너무 정교하게 바꾼 나머지 한참 나중에서야 일본 사람이 지적해서 알아냈다는 얘기까지도 들을 수 있다. 가이드가 혹 감정이 상할까 봐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없는지 확인까지 하고서 해 준다.[28] 외국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기록에서 손기정의 국적을 한국으로 나타낸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 작성/편집자의 자의이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것은 아니다.[29]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식민지 출신으로 우승한 사례가 셋인데, 손기정 외에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의 부게라 엘 와피(Boughera El Ouafi, 1898~1959,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와 알랭 미뭉(Alain Mimoun, 1921~2013, 1956 멜버른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이 있다. 그러나 와피는 알제리 독립 이전에 사망한데다 사망 원인이 알제리 독립주의자에 의한 피살이었으며, 알랭 미뭉은 이슬람교와 아랍식 본명까지 버리고 독립 이후에는 아예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해 완전히 프랑스인으로 살았다.[30]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이후 1948 런던 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선수도 몇 있다. 이들 모두 두 번 다 메달을 따지 못해서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31] 같은 이유로 안현수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획득한 금메달이 그가 러시아로 귀화했다고 해서 러시아가 딴 메달로 바뀌지 않는다.[32] 히틀러의 신장은 175cm 이고, 손기정의 신장은 170cm 정도로 추정되므로 실제로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 서양 사람들과의 체격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자신의 신장을 줄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손기정은 80대 고령의 나이에도 170cm의 황영조와 키가 비슷했다. 다만 이후 본인이 기고한 에 의하면 서양인 치고는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고 서술했다.[33]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이 꽤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리펜슈탈이 이 동양인 선수에게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1956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34] 손기정이 시상식 내내 우울한 듯한 태도를 보인건 일본 국적으로 출전해, 일장기가 휘날리고 기미가요가 불리는 단상에서 일장기를 단 채로 수상했기 때문이다.[35] 이와 관련해 히틀러가 흑인인 그와의 악수를 거부했다는 루머가 퍼져있지만 실제로는 대회의 정치화를 우려해 너무 선수들이랑 접촉하지 말라는 IOC의 경고로 악수를 못 했을 뿐이다.[36] 참고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실제 역사가 어찌 되었건 이 시기의 독일을 매우 친일적이라고 여기는 착각이 만연해 있다. 이걸 비튼 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인데, 데샤우에 일본 엔지니어들이 유학을 가지만 독일인들은 일본인들을 매우 경계한다.[37] 독일의 소유였던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 반도 조차지, 그리고 남양군도를 뜯어간 것이 일본 제국이다.[38] 3년제 보성전문학교 상과의 한 학년 정원은 100명 가량이었는데, 농구, 럭비, 육상, 축구 등 종목에서 선수를 뽑았더니, 과장된 표현을 섞어 전후 좌우로 한 학생 건너 운동 선수가 배치되었다고 한다. 남자프로농구 삼성 조승연(趙勝延) 단장의 부친 조득준(趙得俊)은 손기정과 함께 그 해에 상과에 입학했는데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개 대회 연속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를 평정하는 보전 농구부의 주력 센터였다.[39] 서울역에서 수원역 간의 거리는 약 41.5km로 마라톤 풀코스 거리인 42.195km에 얼추 맞다.[40] 하코네도쿄에서 서쪽으로 20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명승지인데 그 사이를 각 대학팀이 왕복하며 겨루는 역전경주는 일본의 한해를 여는 풍물시(風物詩)였다.[41]SC제일은행의 전신이다.[42] 자세히 보면 태극과 4괘의 비율이 맞지 않는데, 물자 부족 등으로 일장기를 뜯어 개조한 태극기임을 알 수 있다.[43] 비슷한 경우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때에도 있었다. 그때도 국민들은 당연히 김연아가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44] 마라톤 선수였던 건국대학교 학생 김원탁, 가거도의 중학교 분교 교사 정선만, 예술 꿈나무 손미정이 성화 점화자로 선택됐다. 가난을 딛고 성공에 이른 임춘애나 평범한 시민으로 칭할 만한 3인의 점화자를 올림픽 성화 점화의 주인공으로 낙점한 것은 당시 노태우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였던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극대화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할 수 있다.[45] 당시 손기정은 70대 후반이었다. 즉, 팔순을 앞둔 시점임에도 의자를 던질 정도로 심하게 격노했다는 것.[46] 개막식 2일전 밤, 손기정은 야광봉을 들고 성화봉송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신문사 기자에게 들켰다.[47] 성화가 꺼질 기세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2시간 5분 47초까지 해당된다. 영어 소개에서도 분명히 손기정, 1936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되어있다.[48]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성화봉송 주자로 손기정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이미 2002년 시점에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49] 임종 하루 전 이봉주가 병문안을 다녀갔다.[50] 1918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 만리동에 있었다. 1988년, 서울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했다.[51] 베를린 올림픽 때 받은 금메달과 상장은 육영재단이 가지고 있었는데 유족들이 장례식 때 잠시 빌려 달라고 했지만 육영재단이 거부했다.[52]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진태가 속한 낙동강 방어선 소대장 역을 맡기도 했다.[53] 물론 해당 편만 본 사람들이라면 손기정이나 남승룡 선수에 대한 묘사가 아쉽거나 일본이 역사를 왜곡한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드라마 자체가 일본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선수이자 그 유명한 하코네 역전 마라톤을 창시한 카나쿠리 시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다 보니 일본 중심의 내용일 수밖에 없다.[54] 2000년 밀레니엄 기획으로 만들어졌던 '영상의 세기'를 리메이크한 기획.[55] 다만 다큐가 일본 공영방송에서 제작한 것이라 일본과 아시아의 올림픽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위의 NHK 대하 드라마 처럼 어느정도 감안하고 봐야하지만, 그나마 내레이션을 한 성우가 손기정의 심정을 제대로 연기해주었으며, 일제의 만행(올림픽 종료 후 바로 손기정을 마라톤에서 손 떼게 한 일)을 제대로 소개했다. 베를린 스타디움에 기록되어 있는 손기정의 국적이 아직 일본으로 기록되어 있는 씁쓸함도 분명히 전달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56] 2020년 6월 20일 방송[57] 쿠베르탱과 근대 올림픽의 탄생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58]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평화의 제전 올림픽의 격동을 시간 순서대로 다룬 다큐멘터리[59] 요즘은 젊은 나이지만 당시는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은 만큼 오래 산 것이었다. 이 말을 실제로 들었던 사람으로 대표적으로 박성빈이 있다.[60] 1938년에 신문에서 이 둘의 로맨스가 보도되기도 했다.[61] 전주 김씨 김태규(金泰圭)의 딸이다. 전주 김씨는 남한보다는 북한에 훨씬 많은 성씨이다. 당장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의 본관부터 전주 김씨이다.[62] 족보명은 손형준(孫亨俊)이다.[63] 공식 세계신기록은 1936년 2시간 26분 42초, 비공식 세계신기록은 1935년 2시간 25분 14초이다.[64] 이 사진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당시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명월관에 여러 유명인사들이 모였고 최승희도 초대되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진행되던 도중 누군가가 일본에서 공연을 하는 최승희를 친일이라 비난했고 최승희가 조용히 자리를 뜨려하자 손기정이 화를 내면서 '그럼 일장기를 달고 뛴 나도 친일 행위를 한 것이냐'라고 변호해 주었다. 그런데 최승희를 친일이라 비난한 그 사람은 사람 보는 안목이 있었는지 훗날 최승희는 일본군에 거액의 국방 헌금을 헌납하고 친일 공연에 출연하는 등 진짜로 친일파로 변절했다. 또한 자기 밑의 무용수들을 시녀처럼 부려먹고 폭언을 일삼는 등 갑질이 심하고 인성이 매우 나빴다. 정작 최승희를 친일이 아니라 감싸준 손기정이야말로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고, 인품이 훌륭하여 전국민에게 존경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65] 다만 걱정되는 것이 다른 배역들은 이미 다 정해진 상황이나 손기정과 남승룡은 누가 맡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그러면서 드라마의 공식 사이트도 일본 내에서만 볼 수 있게 막아놓은 상황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름만 거론되거나 등장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66] 전반적인 뉘앙스상 조선인임에도 일본 국적으로 출전하여서 일본 국가를 수상대에서 들어야 하는 저 선수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할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67] 2020 도쿄올림픽까지 일본의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는 식민지 시절 손기정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없다. 여자부는 시드니 올림픽의 다카하시 나오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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