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2957><colcolor=#ffffff> 출생 | 1920년 4월 23일[1][2] ([age(1920-04-23)]세) |
평안북도 운산군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평양 김씨 (平壤 金氏) |
직업 | 수필가, 철학자 |
학력 | 창덕소학교 (졸업) 평양 숭실중학교 → 평양제3공립중학교 (졸업) 조치대학 (철학 / 학사) |
소속 |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명예교수 |
자녀 | 슬하 2남 4녀 |
종교 | 개신교 (장로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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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최고령 수필가 및 철학자이자 백세인, 그리고 연세대학교의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시카고 대학교 및 하버드 대학교 연구 교환 교수를 역임했고 오스틴 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2. 생애
1920년 4월 23일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어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4]아버지가 운산금광에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해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 이어 이 지역 보통학교였던 신망학교에 진학했으나, 신망학교는 4학년까지밖에 없어 1931~33년에 창덕학교에서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평양의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만주(용정)에서 전학 온 윤동주와 함께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출옥 후 인근에 은거하던 도산 안창호에게 설교를 듣는 등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5]
이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숭실중학교가 강제 폐교되고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자퇴를 했고 이때 역시 자퇴한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간다. 그러나 1년 뒤에 복학하여 5학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소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가, 일본의 명문사립대 중 하나인 조치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1944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조치대학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고향에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후 북한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자, 당시로서 매우 드문 대졸자로 참여를 권유받아 평안남도 대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소학교(창덕학교) 선배인 김일성과도 만났다고 한다. 이 창덕학교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6]에 있던 기독교계 학교였는데,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 목사가 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었고 교장을 지낸 바도 있다. 1912년생인 김일성은 외가와 인연이 깊은 이곳 칠골의 창덕학교를 1923~25년에 다녔다.[7] 이들은 연배 차이가 있어 학창 시절에는 만나지 못했다가, 김일성이 1945년 해방 후에 귀국하자 친분이 있던 목사들이 열어준 환영회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8]고 한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동네 청년 '성주'가 김일성이 되어 지도자감이 되자 크게 놀랐다고 한다. 2021년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하였다.
이후 점점 인민위원회가 다른 권력에 대한 숙청 지향적 행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위원직을 사직하고 고향 송산리에 중학교를 설립해 농촌 교육에 나섰다. 하지만 반공 성향의 개신교 지식인이었던 만큼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었고, 체포가 임박해오자 아내와 첫 아들을 데리고 1947년 8월 20일에 황해도를 통해 월남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1947년 10월부터 중앙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6.25 전쟁 정전 후에는 해외유학을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으나, 당시는 전후 혼란기로 해외유학을 가기가 쉽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뜻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1954년에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백낙준의 권유로 연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이후 1985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한다.[9]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age(1920-04-23)]세를 넘긴 20[age(2000-01-01)]년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3. 베스트셀러 작가
학문적 업적을 떠나 꾸준히 다작을 하고, 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저술가로 더욱 유명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책을 펴낸 시발탄은 1960년에 출간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이었다. 여러 잡지에 발표한 글을 모은 것인데, 당시 유명 잡지사 중 하나이던 삼중당(三中堂)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였던 2만부가 팔려 화제를 모았다.이어 1961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 연구교수로 가기 전에 넘긴 원고로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수상집이 나왔는데, 이 작품도 간행 1년만에 8만부(현재까지 누계 60만부)가 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그 이전에는 1938년 박계주의 《순애보》가 1년만에 4만부가 팔린 것이 베스트셀러 기록이었는데, 약 20년만에 이 기록을 깬 것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연구교수에서 돌아온 이후 김형석 교수는 출판업계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엄청난 러브콜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30년 이상 매년 1권 꼴로 꾸준히 책을 냈다.
그가 집필한 수필은 기독교적 실존주의를 배경으로 현대의 인간 조건을 추구하여 부드럽고 시적인 문장으로 엮어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고독이라는 병》(1960), 삼중당
- 《영원과 사랑의 대화》(1961), 삼중당
- 《그대여 이날을 헛되이 보내려나》(1985), 세종출판공사
-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1988), 자유문학사
- 《그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1990), 자유문학사
- 《그래도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운것》(1990), 자유문학사
-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1991), 철학과현실사
- 《인생, 소나무 숲이 있는 고향》(1991), 철학과현실사
- 《망치들고 철학하는 사람들》(1995), 범우사
- 《모든 자녀들에게는 꿈이 있다》(1998), 철학과현실사
- 《철학의 세계》(2002), 철학과현실사
- 《나의 인생 나의 신앙》(2012), CLC(기독교문서선교회)
-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나》(2016), 프런티어
- 《어떻게 믿을 것인가》(2016), 이와우
- 《백년을 살아보니》(2016), 댄스토리(Denstory)
- 《행복 예습》(2018), 댄스토리(Denstory)
4. 장수
1920년 4월 23일생으로 현재 [age(1920-04-23)]세이지만 연령에 비해 매우 건강하여 강연을 비롯한 여러 활동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100세의 연령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책을 낼 때에도 100년이라는 숫자를 쓰기도 하고(백년을 살아보니[10] 등) 100세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조수단 없이 선명한 목소리와 발음으로 강의를 했던 것을 보면 건강 상태가 놀라울 정도이다. 동갑인 백선엽과 한 살 아래인 신격호가 2020년에 사망했지만 굉장히 장수했다고 느껴지는데, 정말 건강한 셈이다.[11] 규칙적인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 그리고 절제와 노력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2024년 현재도 동아일보에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으며, 스스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외부 활동을 소화할 정도이다. 2021년 1월 14일에는 KBS 아침마당 생방송에 출연하여 담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왔는데, 휠체어는 물론 지팡이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걸어나와 혼자 앉아서 웃으며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정정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다른 현대사 속 인물들과 비교해도 놀라운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말~2010년대에 사망해, 현재는 사망한지 꽤 오래 지난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김수환 추기경, 이희호 여사도 모두 장수한 편이나 그들보다도 연상이며 5년 전인 2020년에 세상을 떠난 신격호 보다도 1살 많으며, 4년 전인 2021년에 세상을 떠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보다도 11~12살이나 많고, 3년 전인 2022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 중 장수한 사람과 비교했을 때 6월 8일에 세상을 떠난 송해와 12월 31일에 세상을 떠난 베네딕토 16세보다 7살,[12] 9월 8일에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11월 30일에 세상을 떠난 장쩌민보다 6살 더 많다. 이들 모두 100세에 가까운 95~96세까지 살은 장수인이다.
현역 최고령 연예인 이순재보다도 14살이나 위이다. 이회창, 조춘 보다는 15살 위, 신구 보다는 16살 위이다.
또한 윤봉길 의사보다 12살 연하이고 시인 윤동주,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교하면 3살 연하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령자인 이나 카나바로 루카스 할머니와도 12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22살에 요절한 최장신 로버트 워들로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두한보다 고작 2살 어리다. 심지어 100세에도 생존중인 전직 일본 총리인 무라야마 도미이치보다는 4살 더 많다. 심지어 3살 연하인 헨리 키신저, 4살 연하인 지미 카터도 90대부터 건강하지 않다가 향년 100세인 각각 2023년 11월 29일, 2024년 12월 29일 타계한 것과 비교하면 김형석의 정정함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심지어 세는나이로는 106세이다.
5. 기타
- 슬하에 2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몇몇 자녀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생존 중인 맏아들은 한림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성진(1946년생, [age(1946-01-01)]세)이다.# 둘째 아들과 넷째(막내) 딸도 교수[13]라고 한다. 2021년 12월 방송을 보면 자녀들도 모두 일흔이 넘었지만 아버지를 닮았는지 다들 매우 동안에 목소리도 매우 젊다.[14]
- 2021년 12월 방송에서는 일상생활을 공개했다. 매일 규칙적으로 아침 6시에 일어나 생야채, 삶은 계란, 우유 등의 간소한 아침 식단을 수십 년째 유지중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지팡이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간단한 산보도 즐기는 등 놀라울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다.
- 현재는 100세가 넘은 나이에 지팡이조차도 사용하지 않고 활동할 정도로 건강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건강이 너무 나빠서 부모님이 20살 전에 죽을 것 같다고 예상할 정도로 허약했다.[15] 그래서 어린 나이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게 크리스천으로서의 첫출발이 되었다. 그 후 고령의 나이에도 기독교 도서들을 집필하였고, 유튜브에 기독교 관련 영상들이 굉장히 많으며 교회에 나와서 기독교 이론 강의를 한 영상들도 있다. 이렇게 평생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왔으면서도, 2020년에는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내면서 기독교의 폐쇄성을 지적하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은 오만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교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등 건전한 내부 비판의식 또한 잃지 않고 있다.
- 나이가 나이이다보니 시인 윤동주를 "윤동주 형"이라고 하면서 "그 형이 자신보다 공부는 못했지만 꿈은 더 컸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16], 독립운동가 이범석 이야기를 그 시절이라고 하기도 했으며, 해방이 되기 7년 전에 운명한 도산 안창호의 설교를 고등학생 나이에 들었다고 하는 등 2020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제법 신기한 이야기들이다. 이쯤 되면 살아있는 20세기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이다.[17]
- 당시 101세인 2021년 이제 만나러 갑니다 474화에 출연하여 해방 직후 북한에서 겪은 일과 월남기에 관해 회고하였는데[18], 고향이 그리워 꿈에서라도 가 보면 고향 주민들은 모두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쫒겨나갔고 자신도 숨어다니느라 집에 가질 못 하며, 꿈에서 38선을 넘기 위해 애쓰다가도 이건 꿈일 것이라며 깨려고 하는 것이 일이라고 설명하였다. 출연한 북한이탈주민 패널들도 이를 듣고 자신들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덤. 여기서는 김형석이 "탈북"했다고 나왔지만 김형석은 6.25 전쟁 이전에 월남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탈북한 것이 아니다.
- 2021년 3월,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 직에서 사퇴한 후 김형석 교수를 만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기중 씨(현재 연세대 명예교수)가 김형석 교수와 연세대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던 것에서 연결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만남에서 김 교수는 윤 대통령에게 정치에 입문할 경우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조언했고, 관련 내용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 2021년 7월, 서울 소공동 더 플라자 호텔에서 1시간 30분 가량 강연하였다. 강연 내용은 삶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나누고 싶은 교훈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장수의 습관 등이다. "인생 황금기는 60~75세입니다" 102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강연
- 문재인 취임사 내용에 대해 언급하며 대통령을 비판했다. 101세 철학자 "文, 취임사와 정반대....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
- 윤석열의 제20대 대선 당선 이후 분석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국민, 왜 尹 뽑았나"···'102세 철학자' 김형석 딱 두가지 꼽았다
- 100세 시대의 인생의 단계에 관해 30세까지는 '나를 키워가는 단계', 65세쯤까지는 '직장과 더불어 일하는 단계', 90세까지는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단계'라고 평했다.#
-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에 관해 계엄령을 '민주주의 국가가 선택할 수 없는 방법'이라고 비판하는 한편으로 이재명, 문재인에 대해서도 '원인제공자'로 규정하며 윤석열을 옹호했다.#이재명 대표가 과거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을 극복하고, 정권 창출을 위한 정치를 하는 대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잘 이끌어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가 가는 길이 국민이 원하는 것도, 국가가 가야 할 방향도 아니고, 오로지 윤석열 정부를 무능하게 만들어 정권을 쟁취해야겠다는 목표밖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더욱 나쁜 것은 이재명이라는 사람의 과거를 덮기 위해 행정부와 사법부에 압력을 가한 점입니다. 이대로 가게 되면 대한민국의 정치 방향은 이재명 개인을 위한 것이 됩니다.원인 제공은 민주당이 했죠. 그러나 의사가 환자를 고치는 것에 비유하자면 먼저 약을 주고 나서 안 되면 주사를 놓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약도 주사도 없이 다짜고짜 메스를 들고 수술부터 한 셈이니 국민들이 놀랄 수밖에요. 이건 민주주의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그 노선을 따르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지했던 것인데, 이제 보니 자유민주주의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지 몰랐고, ‘이 정부 가지고는 잘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죠.문재인 전 대통령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운동권 출신들과 정권을 함께 운용하면서, 북한의 노선과 대한민국의 노선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습니다. 김정은과 잘 의논하면 더불어 살고 통일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 같아요. 착각이었습니다. 북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한민국과 동질(同質)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체(政體)가 완전히 다른데 이를 무시하는 대북 정책을 펼치니 결국 국민을 분열시켰죠.
[1] 음력 1920년 3월 5일생[2] 일부 지면에서 3월 5일, 7월 6일 등으로 소개했는데 김 작가의 책을 다수 펴내는 김영사에서 만 100세 기념 생일파티를 4월 23일에 열어 축하했다.[3] 출석 교회나 직분 등은 밝혀진 바가 없으나 교회에서 기독교 관련 초청 강연 등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도 있다.[4]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현하였을 때는 고향을 대동군으로 언급하였는데, 일단 본인은 고향을 대동군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5] 안창호는 오래지 않아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투옥되었으며, 고문 등으로 건강을 크게 해쳐 1938년에 사망한다.[6] 현재 북한에서는 평양시 만경대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이곳은 김일성의 외가인 신천 강씨 집안 집성촌이 위치한 곳이였다.[7] 이후 아버지 김형직이 체포되면서 다시 만주로 피신한다.[8] 내용에서 보면 '김일성 장군은 약 50대에 일본육사를 나왔다고 알고 있었다라고 하는데, 의병장 김일성의 설화에 실제로 살아있었다면 50대에 일본육사 출신이고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쓴 김경천 장군의 일화까지 겹친 정교한 김일성 가짜설이 당시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 한국의 평균 학력이 이렇게 높아진지 얼마 되지 않은만큼 195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석사, 박사학위가 없어도 교수를 지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10] 그 당시에는 아직 96세이고, 세는나이로도 97세이지만, 100년에 96% 정도의 시간이므로 거의 근접하긴 했다.[11] 신격호도 말년엔 몇년간 치매와 각종 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다가 떠났다. 90대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활동을 했지만 90대 후반의 신격호는 사실상 도움 없이는 생활 자체가 매우 힘겨운 정도였다.[12] 송해도 90대에 들어서서는 병원에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떠났지만, 신격호와는 다르게 지병 같은 걸 앓지 않았고, 게다가 휠체어 물론 지팡이조차 써본 적 없이 마지막까지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여서 떠나기 며칠 전까지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떠났다.[13] 성장 시기를 생각하면 여성으로서 교수까지 공부를 시킨 것이 놀랍다.[14] 하지만 아무래도 아버지와 딸 모두가 노인이다보니 딸을 부인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15] 공교롭게도 카를 야스퍼스(향년 86세)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향년 102세)도 일찍 병치레를 한 것이 자신들의 장수의 비결인 것 같다고 한 바 있다고 한다.[16] 윤동주는 나이가 3살 더 많은 1917년생이었지만 평양 숭실중학교에 1933년 같은 해에 입학하였고, 3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요즘과는 달리 동급생이어도 나이 차이가 서너살 이상 가량으로 많이 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5공 인사인 쓰리허의 경우 허삼수가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허화평과 육사 17기 동기이고 허문도의 경우는 4살이나 어린데도 학창시절 동기로서 말을 트고 지냈다.[17] 10대를 앞둔 시점에 광주학생항일운동, 10대에 들어선 10세까지 문화 통치, 11세부터 민족 말살 통치를 겪었고 25세에 8.15 광복, 28세에 당시 정부 수립을 겪었다. (김형석 교수는 1947년 8월, 정부 수립 이전에 월남을 했다.) 그리고 30대 초반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40대 초반에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겪었고 50대 후반까지 박정희 시절을 겪었다가 환갑(60세)에 5.18 민주화운동을 겪고, 67세에 6월 항쟁으로 인한 민주화, 68세에 1988 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77세에 IMF, 80세에 1차 남북정상회담, 82세에 한·일 월드컵, 87세에 2차 남북정상회담, 91~93세에 스마트폰 대중화, 97세에 박근혜 탄핵, 98세에 평창 올림픽, 100세~102세에 코로나19를 겪은 것이다.[18] 증언에 따르면, 고향에서 교육 사업에 종사하던 중 갈수록 학교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심해지자 학교 이사장이 자신은 월남할 작정이라고 밝히면서 이대로 더 있다가는 위험해지니 월남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월남을 결심한 뒤에는 육로로 해주까지 이동하여 선박으로 월남하였다고 한다. 이때 큰딸은 부친의 권유로 고향집에 맡기고 월남하였는데, 다른 기사에서는 6.25 때 국군이 북진하자 다시 북으로 올라가 큰딸과 어머니는 모셔왔지만 아버지를 모셔오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