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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23:04:50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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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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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브뤼기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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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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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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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스테파노 정진석 니콜라오 염수정 안드레아 유흥식 라자로
PRO VOBIS ET PRO MULTIS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OMNIBUS OMNIA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Amen. Veni, Domine Jesu!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LUX MUNDI
(나는 세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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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B0039><colcolor=#fff> {{{#ffffff 제11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하느님의 종 김수환 스테파노
金壽煥
Servant of God Stephen Kim Sou-hwan
Servus Dei Stephanus Kim Sou-hwan}}}
사제급 추기경
파일:attachment/김수환/01.jpg
출생 1922년 7월 2일(음력 윤 5월 8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
(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1]
사망 2009년 2월 16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
[[바티칸|]][[틀:국기|]][[틀:국기|]] (복수국적)
재임기간 초대 마산교구장
1966년 5월 31일 ~ 1968년 5월 28일
제11대 서울대교구장
1968년 5월 29일 ~ 1998년 4월 3일
제2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1970년 10월 ~ 1975년 2월
제8대 평양교구장 서리
1975년 6월 10일 ~ 1998년 4월 3일
제4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1981년 5월 ~ 1987년 11월
추기경[2]
1969년 4월 28일 ~ 2009년 2월 16일 (39년 305일)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한국천주교주교회의 아이콘.svg | 파일:천주교 서울대교구 심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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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B0039><colcolor=#fff> 장례 미사 2009년 2월 20일
안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용인공원묘원
학력 군위공립보통학교 (졸업)
동성상업학교 (졸업)
조치대학 (철학 / 중퇴)
성신대학 (신학 / 학사)
뮌스터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 석사)
서울대학교 (철학 / 명예박사)
본관 광산 김씨[3]
별명 인자한 콧님, 소금쟁이, 혜화동 할아버지, 옹기[4]
파일:attachment/cardinalstephenk_coatofarms.jpg
PRO VOBIS ET PRO MULTIS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
}}}}}}}}}

1. 개요2. 약력3. 문장4. 생애5. 훈장 수여 목록6. 어록7. 기타
7.1.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집 피해7.2. 정치적 참여에 대한 여러 평가
8. 저서9. 대중매체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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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1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좌 착좌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PRO VOBIS ET PRO MULTIS

사목표어
초대 마산교구장, 제11대 서울대교구장 겸 제8대 평양교구장 서리로 봉직했던 한국 가톨릭 성직자이다.

20세기 대한민국 가톨릭 교회 역사를 대표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1969년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에 서임된 뒤 40년 동안 추기경직을 맡았다.

5.16 군사정변 직후,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군부 독재 시절부터 21세기까지 꾸준하게 정치/사회적 현안에 목소리를 냈으며, 민주화 운동과 빈민 구제에 앞장서는 등 가톨릭 교회의 사회 참여 선봉에 섰다.

김수환 추기경이 은퇴 후 혜화동에 위치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주교관에 거주했기에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는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불렸다. 이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PC통신과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글을 남길 때 김 추기경이 실제로 사용한 닉네임이기도 했다.

서울대교구가 2024년 6월 18일 교황청 시성부로부터 김수환 추기경 시복 추진에 대해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승인받았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김수환 추기경을 공식적으로 ‘하느님의 종’(일명 가경자. 시복 심사 대상자)으로 칭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본격적인 시복 추진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2. 약력

3. 문장

파일:attachment/cardinalstephenk_coatofarms.jpg 파일:김수환 추기경 마산교구장 시절 문장.png
<rowcolor=#fff> 추기경 문장 마산교구장 시절 문장
[ 문장 해설 ]
방패 왼쪽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우리 교회를, 오른쪽은 삼각산과 서울을 상징하며, 별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主保, 수호성인)로 모심을 나타낸다.

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모자 아래의 술 5단은 추기경임을 나타낸다

4.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수환/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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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훈장 수여 목록

6. 어록

박정희 정부~전두환 정부 시절 민주화 인사와 시민들을 보호하며 남긴 명언들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있다. 가톨릭 내에서도 상당히 정의 의식이 강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인물이어서, 당시 민주주의 세력이 독재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는 민주주의가 쟁취된 후에도 지속되어 다양한 사회 비판적 목소리를 내었다.

6.1. 박정희 정부

박정희 당신은 압니까? 정의와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 사회 안정과 질서는 없습니다.
정부와 여당에게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1971년 예수 성탄 대축일 강론 중.
1971년 말은 10월 유신 징조가 보이던 시기이다. 이날 미사는 KBS를 통해 생방송되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청와대 관저에서 TV를 보던 중 이 내용을 듣고는 분노하여 득달같이 KBS로 전화를 걸어 방송 중지를 즉각 하달한다.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입니다.
장준하의 영결 미사.
인간 박정희가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버지 이 죄 많은 박정희를 용서해주십시오.
박정희의 장례 미사.
고인께서 군인과 대통령으로서 보여주신 애국심은 열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고인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실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 사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집과 탐욕, 증오와 폭력을 우리 가슴 속에서 씻어 내고 용서와 화해,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국상을 끝낸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박정희의 추모 미사.
김수환 추기경이 박정희 정부를 몇 차례 비난한 바와 달리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의 사이가 험악할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 김 추기경을 필두로 천주교 전체가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했기에 박정희로선 천주교가 상당한 눈엣가시로 보였겠지만, 정작 박정희와 천주교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전쟁통이었던 탓에 결혼식장이 마땅치 않았다는 배경도 있지만 일단 본인과 육영수가 결혼한 곳도 대구 계산성당이고 딸 박근혜를 천주교 계열 미션스쿨(성심여중-성심여고-서강대)에 내리 보냈다는 것이 그 증거. 심지어 박근혜가 중학생 때 학교에서 세례성사를 받던 날에는 육영수를 직접 영세식이 열린 용산 원효로성당에 보내기도 했다. 훗날 김수환이 회고록에서 "종이에 4대강을 그려가면서 몇십 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 계획을 설명해주는 박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 독재 체제로 갈 것임을 예상했다.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무척 우울했다. (중략)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장기 집권의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진정한 애국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또한 박정희가 죽은 뒤 명동성당에서 고 박정희 추도 미사를 봉헌했다.[5]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도 "국모다운 면이 많은 훌륭한 영부인이었으며,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박정희의 통치가 한결 누그러졌을 것"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박정희가 육영수의 사망 후 사람이 바뀌어 폭주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어쨌든 김 추기경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이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와 국민은 물론 박정희 개인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며,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비판했다.

6.2. 전두환 정부

마치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쿠데타 직후인 1980년 초에 인사차 찾아온 전두환에게 한 말.
국민에 대해 힘으로 군림해 오던 정부와 오직 물리적 힘에 의한 외형적 질서 유지에만 익숙해 왔던 위정자들은 학생들이나 근로자들이 일으킨 새 질서 추구의 도전의 물결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일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이 젊은이들의 학원 소요나 노동 쟁의 와중에서도 사회의 근본 질서를 지킨다는 그 애국 애족심을 읽을 줄 몰랐고 그들의 순수한 영혼이 내포하고 있는 건설적인 힘과 새 질서 창조의 가능성을 보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단지 국가 사회 질서 문란의 위험 분자들로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대화보다는 결국 그들이 아는 길인 물리적 힘으로 누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광주 사태와 같은 엄청난 비극을 낳게 했습니다.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학원이 폐쇄됐으며 언론이 봉쇄되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는 많은 이가 이미 질서 문란의 죄목으로 검거되고 있고 그 밖에 많은 이들이 지명 수배 중에 있으며 특히 학생들과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불순 분자처럼 검문 검색당하고 쫓기고 있습니다. 외형상으로는 질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힘에 의한 침묵과 죽음의 질서입니다. 이 땅에는 지금 젊은이들이 설 땅이 없습니다. (중략) 정부는 거듭 민주 발전을 이룩하겠다고 말하지만 이제 이것을 믿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또 사실상 물리적 힘으로만 유지되는 이런 침묵과 죽음의 질서를 바탕으로 민주 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공권력이란 본시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며 이를 탄압하고 말살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공권력이 인권 탄압에 쓰여지면 이것은 공권력이 아니요, 오히려 폭력입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에 의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진압이 도에 넘침으로써 군경을 포함하여 학생과 시민 등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데 대해 정부는 깊이 사과하고 그 같은 엄청난 유혈 사태를 일으킨 책임자를 정부는 엄단해야 합니다.
1980년 봄 시국에 관한 담화문 "광주 유혈 사태에 대해 정부는 사과하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현대 한국 교회사상 가장 큰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1980년 7월 22일 담화문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며"#
사제는 때때로 희생과 박해와 같은 시련을 겪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의 길을 가야 한다. 최 신부는 양심대로 살아가려다 법의 문책을 받게 됐고 다른 다수의 사제도 같은 위험에 놓여 있다.(중략)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과 아울러 뼈아픈 광주사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1982년 4월 8일 성유축성미사 강론에서 최기식 신부 구속에 대해.#
사제는 우리 사회에서 억압받는 자와 소외된 자의 벗이 되어야 한다.
1986년 5월 광주가톨릭대 성당 강연.#
광주사태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민중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하기 바란다. 이 길만이 우리 겨레로 하여금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부측이 지금이라도 사죄하는 마음으로 민주화를 향한 모든 조치를 다한다면 현재의 정치적 불안이 현저히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5.18 민주화운동 7주년(1987년 5월 18일) 추모 미사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중략) 제1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추모 미사. 실제 육성.
경찰들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6.10 민주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을 성당에 투입하겠다고 협박하던 정부 관계자에게 한 말.
독재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을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도 엮은 신의 한 수였다. 가톨릭의 추기경은 바티칸 시국의 시민이기도 하므로, 어지간한 막장국가가 아니고서야 고위사제인 추기경을 체포한다는 것은 세계적인, 특히 서양권의 비난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꽤나 큰 모험이었다. 즉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자신의 바티칸 시민권을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좋은 목적으로 잘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만 보면 비장한 분위기일 듯 싶지만, 김수환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주일에 성당에 나오시면 늘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담담한 어조였다고 한다.
두 분이 모두 양식있는 정치인들인 만큼 반드시 단일화를 이루어 낼 것으로 확신한다.
1987년 13대 대선 당시.

6.3. 노태우 정부

이제 광주 문제는 여야가 모두 힘을 합쳐 잘못된 것의 진실을 밝히고 그때의 책임자들은 떳떳이 책임을 져야지요. 그들이 국민의 심판,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의 인간적 구원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나라의 구원에도 기여하는 것입니다. (중략) 문제는 정부와 여당의 근본적 자세입니다. 5공 청산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중략) 그 분 역시 군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틀이 있어서 그 틀을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을 갖는 것은 그가 아직 이야기를 듣는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988년 12월 동아일보 송년 인터뷰.
김 추기경은 민주선거로 당선된 노태우에 대해서는 적대하기보다는 설득하려 했다. 당선자 시절 찾아온 노태우에게 양심수 석방, 사면과 5.18 해결을 위한 광주 방문을 요청하기도 했다.
평화방송은 복음 선교를 위한 종교방송으로, 현 경영진은 이 목적과 방법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중략) 불법파업 사원들 중 잘못을 인정하고 함께 일하려는 사람은 선처하겠다.
1991년 2월 20일, 평화방송 파업 사태 당시에 낸 성명서 중에서.

6.4.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 직후 찾아오셨을 때 나는 축하인사를 하면서 "그러나 나는 다른 후보를 찍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김대중 씨를 찍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지역감정 문제가 크게 완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93년 한국일보 인터뷰
그들이 세상에 한과 원망을 가진채 죽는 것보다는, 자신의 일을 뉘우치고 참된 인간의 모습을 찾는다면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다.
1994년 서울구치소에서 집전한 미사 강론 中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1995년한국통신노조 파업사건 당시
바로 윗칸에서 언급한 6월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조차 하지 못한 명동성당의 공권력 투입이라는 무지막지한 일을, 김영삼이 성당 안에서 보호 중인 한국통신 노조원들을 공권력을 투입하여 강제 연행하자 남긴 말. 실제로 문민정부는 초기의 금융실명제하나회 숙청 같은 개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것과는 반대로, 중반부터는 서서히 이런 실책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크게 깎아먹었다. 그리고 임기 마지막해인 1997년에는 노동법 파동, 한보-김현철 사태, 그리고 IMF 외환위기로 완전히 파멸했다.
모든 국민에게 이 나라에도 정의와 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정권 수사 당시
이번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좀 더 정직하지 못했고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진실로 이번만은 신자인 우리 자신들로부터 반성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믿는 이들도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혼탁한 물결 속에서, 믿지않는 이들과 차별이 없다 할 만큼 휩쓸려 떠내려 가고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진정한 이웃사랑으로 아름다운 사회 / 세상을 만들기에 다같이 노력해 가야 할 것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추도 미사 강론 中
우리는 현재의 위기를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이 난국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정녕 다시 나야 합니다. 이기주의적인 우리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국민 모두가 뜻을 같이 하고 힘을 합치면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이웃과 나라를 함께 생각할 줄 아는 가치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정부를 비롯하여 노사가 진실히 힘을 모으고 국민 모두가 운명공동체로서 힘을 모아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통일을 위해 자기 것을 내놓을 만큼 희생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성탄 미사 강론 中
예수님은 몸도 버리셨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1998년 금모으기 운동 당시 인터뷰. 김 추기경은 서임 당시 받았던 순금 십자가를 기증했다.

6.5. 국민의 정부

저는 참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저도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습니다.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1998년 6월 22일, 서울대교구장 은퇴 미사 강론 中
서울의 봄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 있었는데, 그 봄을 깨버린 것이 그분들이(신군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1999년 10월, 회고록 출판 인터뷰에서.
동성고등학교면 나하고 동문은 동문이다. 그러니 나를 선배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역시 나는 혜화동 할아버지야. 안녕...
1999년, 서울대교구 홈페이지에 올라온 한 고등학생의 게시글에 보낸 답장.
가톨릭계는 새해를 대희년으로 삼아 의미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대희년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널리 퍼뜨리는 것입니다. 대희년의 의미는 바로 인종과 민족을 초월해 모든것을 하느님께 돌리고 인간성과 사랑을 통해 생명의 길로 나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새천년 기념 특집 대담 인터뷰 中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
2000년 5월 24일,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며
이번 회담은 제3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국이 자발적으로 성공시켰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특히 정상이 감격적으로 포옹하는 모습에선 강한 전율을 느꼈어요.
2000 남북정상회담 개최 이후 새천년민주당 지도부와의 면담 中
공자와 그리스도가 강조한 인과 사랑의 정신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자.
2001년 4월, <도올의 논어이야기> 출연 당시 클로징 멘트.
당시 사형집행 과정에서 사형대가 부러져 사형수가 아래로 떨어졌어요. 사형대가 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던 사형수가 나에게 ‘잠시 후 하늘나라에 가서 주교님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하더군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2001년 10월 26일, 서울구치소에서 집전한 재소자 미사 후 인터뷰 中. 1966년 마산교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한 사형수의 사형집행을 참관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김 대통령께서 그동안 수고도 많이 했고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판도 많아 괴로운 시간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아무쪼록 마지막 한해는 사심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꼭 유종의 미를 거두셔서 임기 후에는 5년 동안의 잘못된 것도 덮어둘 만큼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중략) 어쨌거나 김 대통령이 이제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초연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2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김대중 정부를 평가하며.
우리 같은 세대들은 노무현 후보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2002년 대선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를 비판하며.
게페르트 신부님은 당신과 연세가 비슷한 분들이 다 돌아가신 뒤 노쇠의 고통을 오래 겪자 가끔 ‘하느님이 나를 잊으신 것 같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하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백수(白壽)까지 하길 바라면서도 신부님이 겪을 고통의 나날을 생각해 하느님이 그날을 짧게 해 주실 수는 없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테오도르 게페르트의 장례 미사 강론 中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성탄의 축복을 함께 나누며 가족들을 떠나 생활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맞아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는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사랑하셨다. 구세주의 강생을 기리는 성탄이 우리의 모든 기대와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주시는 날이 되기를 빈다.
2002년 성탄 미사 강론 中
여중생 치사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촛불시위가 지금도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죽었으나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시민들의 분노는 당연할 것입니다. 미국인도 자신들이 늘 자부하듯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은 자국민들만의 것이 아니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실천할 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이것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할 때 우리 민족과 같은 인권 존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우리나라에 와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위해 성탄미사를 드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해서 가슴이 아팠어요. 고용주가 이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강제로 노동을 시켰기 때문이지요.
2002년 송년인터뷰
그 시간 하느님은 분명히 희생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누구보다 깊이 재난 한가운데 계시면서 지옥같은 죽음의 고통을 함께 하시고, 그들과 함께 죽으셨으며,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참사 추모 미사 강론 中

6.6. 참여정부

선장인 대통령께서 이를 잘 헤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취임 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으나 100일 정도 지나면 나아지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언제쯤 좀 나아질지 의문입니다. 노 대통령은 말 바꾸기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문을 제대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신문도 읽어야 합니다.
2003년 6월 동아일보 인터뷰.
햇볕정책으로 남북한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우리 모두 이 시점에서 심각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자세와 체제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북한은 이를 계기로 민족공조를 앞세우며, 남한에 친북, 반북의 분열, 즉 '남남'분열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입니다. 세계화는 우리 시대의 불가항력적 물결입니다. 우리는 이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를 거스른다는 것은 다시금 우리 자신이 나라를 조선조 말에 쇄국주의에 빠뜨렸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쇄국적 의미의 민족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북핵문제를 두고 이른바 민족공조를 지나치게 앞세우는 데도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소수라고 믿으나 배타적 민족주의에서인지, 일부 젊은이들이 극단적으로 반미, 친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저의 마음을 아주 어둡게 만듭니다. 특히 몇 일전 한총련 일부 학생들이 미군 사격훈련장 기습 진입한 것은 크게 잘못한 일입니다. 정부도 이들에게 유화책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분명한 선을 그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2003년 8월 인터뷰.
나는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솔직히 우리나라가 어디로 갈 건지 걱정된다. 요즘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관권 선거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설령 열린우리당이 표를 많이 얻지 못하더라도 공명 선거를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행정적인 수단을 동원한다는 의심을 받는다면 (선거 후에도) 갈등이 계속 남을 것이다. 요즘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생각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나라의 전체적 흐름이 반미 친북 쪽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럽다. 군 장성에게서 사병들 가운데도 반미 친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계층이 현 정부를 적극 지지하고는 있지만 나라를 이렇게만 끌어가면 미래가 어떻게 되겠느냐. 화해, 협력에는 동의하지만 (북한이) 국민을 굶겨죽이는데도 저들에게 끌려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예방을 받고.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의 죄가 굉장히 컸구나. 하느님의 아들인데..
2004년 3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관람한 뒤 인터뷰.
남북간 교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체제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우리 사회에 퍼진 친북반미 풍조는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북한 주체사상을 확대 전파하는 등 국가안보를 대단히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보안법 폐지를 서두르지 말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보안법은 장기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아직은 필요하다.
2004년 9월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며.
우리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너무나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이는 북한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이겠지만 현재 북한은 체제가 더 경화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요구할 것은 더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2004년 9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며.
노무현 정권은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하나? 현재 정말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살고 있는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2005년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대북유화정책과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를 비판하며
200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당시 이해찬 총리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신 것 같은데, 우리 정부와 노 대통령이 마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지적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죽음을 당하는 북한의 인권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던 정권 담당자들이 강 교수의 인권만 앞장서 보호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지극히 혼란스럽다.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진 사람을 원수로 보고 현행법에 저촉되는 말을 한 사람을 검찰이 다스리려 해도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나서 검찰을 견제하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까닭을 납득하기 어렵다.
2005년 강정구 교수 불구속을 비판하며
개정 사학법이 단순히 사학비리를 없애는 데 있다기보다,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며
국민들이 믿을 곳은 한나라당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잘 해 달라. (한나라당에) 대통령 후보 여러 명 있으니 걱정된다. 누가 되느냐가 아니라 정권교체가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6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 만나
그 후에도 "소수의 비리를 다수의 문제로 비화시켜선 안 된다",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같은 사학법 개정에 강력 반발하는 발언을 여러 번 하였다. 참여정부 당시 사학법 개정은 소위 4대 개혁 입법(과거사 청산, 언론 개혁, 국보법 폐지, 사학법 개정) 중에서도 가장 조직적인 반대를 받았던 사안이었다. 국가보안법이나 과거사법의 경우 정치계 중심의 반대였고, 언론법의 경우 몇몇 거대 보수언론의 반대가 주를 이뤘지만, 사학법 개정은 이권이 걸린 문제라 전국의 거의 모든 사립학교재단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가톨릭뿐 아니라, 당시 사립학교법에 관해서는 종법사가 직접 밀어준 원불교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종교의 주류 교단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 반대 측은 "전교조 등 좌파 세력들이 사학을 점거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찬성 측은 "이권 때문에 반대하면서 허울 좋은 명분을 찾는 사학 단체 관련자들은 위선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7. 기타

파일:김수환 추기경 - 열린음악회.jpg
1995년 9월 14일, 열린음악회에 출연한 김수환 추기경. 오른쪽은 당시 열린음악회를 진행했던 장은영 아나운서.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어른이 그리운 시대
큰 어른이 가셨다
영하의 추위 속에
고요한 긴 줄
어둠 속에서
앞은 보이지 않고
걸어도 걸어도 뒤로 밀리는 걸음
이대로 다시 뛸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삶
멈춤
침묵
돌아봄
정화
울고 싶고 기대고 싶어도
의지할 언덕 하나 없어
삶의 무거움이 가슴에 응어리진 사람들
누구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아
거룩한 바보를 찾아나선 사람들
돈이 하늘인 세상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자리에
시위하듯 서있는 사람들
하늘이 거룩한 바보들을 택해
사람의 역사를 이끌어가듯
말없이 느린 행렬로
난 바보야 난 바보야
가슴 치며 가슴 치며
새벽 강물로 흘러가는 사람들

7.1.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집 피해

파일:external/s1.postimg.org/image.jpg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다. 김 추기경의 동성상업학교 5년 선배. 김 추기경만 군복을 입은 건, 신학생과 신부까지도 강제징집하는 일제의 만행을 천주교 소식통을 통해 알리려고, 귀국하기 전 지급받은 군복을 일부러 입고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친일몰이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는데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강제적으로 징집된 학병 경력이 있다는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그러나 학병으로 강제징집되었지만 최종 계급이 일병이었으며 간부후보생조차도 지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육군은 학병 출신들에게 6개월간의 기초군사훈련과 대부실습(일선부대에서 일정기간 복무) 뒤 구대장 면담을 거쳐 간부후보생에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데, 중간과정에 탈락해도 을종간부후보생으로 하사관에 임관된다. 일병이라면 애초에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조선인 학병의 대부분이 엘리트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간부후보생을 지원한 것과는 대조되는 사례다.

사실 예전에 자서전에도 기술했던 사항이 21세기에 다시 불거진 것인데 그 당시 친일인명사전을 제작 중이던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애당초 수록 대상자에 미달되었음에도 이례적으로 해명 자료를 내면서 "김수환 추기경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준이 조선인 일본군은 위관급 이상이 대상이며 자발적 친일여부를 함께 고려한다. 같은 위관급 장교더라도 자발적 입대라 보기 어려운 학병 출신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예시로 같은 가미카제 특공대로 전사했더라도 학병 특별조종견습사관출신 탁경현 소위는 이에 해당되지 않으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출신의 최정근 중위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등재되어있다. 그러므로 일등병에 학병출신인 김수환 추기경은 애초부터 등재 대상이 아니다. 일본 육군 역시 김수환 추기경같은 예체능계와 미션스쿨 계열 학병들을 초급장교 자원으로 비선호하여 간부후보생에서 탈락시켜 일부러 하사관으로 임관시킨 사례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야포부대 소위로 복무했던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집필한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 제국의 육군'에서는 필자와 동기지만 음대 출신이라 간부후보생과정에서 탈락하여 전혀 군조(부사관)라는 계급과[8] 어울리지 않는 동기생이나 종교적 이유로 전투병과의 간부후보생이 되지 않기 위해 의무병으로 지원하여 병으로 복무하던 선배 이야기도 나온다.

게다가 김수환 추기경은 적극적인 친일행동을 하거나 일제로부터 무슨 직위 같은 것을 받은 것도 아니다. 결국 그도 여느 강제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처럼 원하지도 않았는데 살벌한 전쟁터로 내몰려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운한 경험을 한 것이다. # 단순히 불운한 경험에 치부될 정도가 아니라 다치바나 요시오라는 식인귀 일당이 있던 치지시마란 섬에서 일본군 잔악한 전쟁범죄를 목격한 끔찍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편, 대위로 전역한 군종장교 출신 신부들이 “주교관도 군대 계급순으로 앉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농담을 시작하면 김수환 추기경은 "그럼 나는 맨 꼴찌에 앉아야 되겠네?" 라고 웃음으로 되받아치곤 했다. #

7.2. 정치적 참여에 대한 여러 평가

70년대~80년대까지 민주주의와 인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서울의 봄 후, 대통령 직선제를 거쳐 김영삼 문민정부까지 출범하자 민주주의 체제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으로 판단한 듯 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문민정부 때부터 참여정부 출범 전까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한국 천주교의 최고 지도자이자, 국가적 어른으로서 정치 중립 입장은 말년의 참여정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지되었다.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전두환 신군부 독재정권까지 동북아 유일의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아무리 군사정권이라고 해도 바티칸, 나아가 전세계 가톨릭과 대적하기엔 정통성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가톨릭과 척을 지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전근대의 가톨릭 국가들에선 교황청과의 직접적인 대립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으며, 근대국가이자 개신교 주류 국가 나치 독일의 수반 아돌프 히틀러도 함부로 교황청에 진입할 수 없어 교황청을 포위하는데 그쳐야 했다. 물론 이건 동맹인 이탈리아가 가톨릭 국가라는 점을 고려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가톨릭과 척을 질 수 없다는 게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 수십 년간 김수환 추기경은 군사정권의 폭력사태에 굳건히 맞섰다.

8. 저서

9.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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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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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7위 8위 9위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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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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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
1995
곽윤직
법학자
1996
장기려
의사
1996
윤덕선
의사, 교육인
1996
정범모
교육인
1998
고흥문
국회의원
1998
주영하
교육인
2000
이건희
기업인
2002
김재준
종교인
2002
문창모
의학자
2002
백낙환
의학자, 교육인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2006
정재헌
법조인
2007
권영우
교육인
2007
장훈
체육인
2008
박관용
국회의장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2009
김정수
정치인
2010
이영덕
국무총리
2010
조용기
종교인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2012
김평우
법조인
2012
정몽구
기업인
2013
남덕우
국무총리
2015
권광중
법조인
2016
이근
의사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2018
김종필
국무총리
2018
노회찬
정치인
2018
박재갑
의사
2018
이석태
법조인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2018
정세균
국회의장
2019
윤한덕
의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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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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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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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노동운동가
2020
문희상
국회의장
2021
최종태
기업인
2022
박병석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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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
2023
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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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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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교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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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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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의 각 해마다 시사저널이 각 분야의 전문가 1000명에 칸타퍼블릭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했으며,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이 가능하였다. 해당 틀에는 1위만 기재함.
<rowcolor=white> 2010 2011 2012 2013 2014
김수환 염수정
<rowcolor=white> 2015 2016 2017 2018 2019
김수환 염수정 김수환 미조사
같이 보기: 한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종합) / 여권 정치인 / 야권 정치인 / 법조인 / 경제인 / 언론인 / 문화예술인 / 연예인 / 스포츠 스타 / 종교인 / 국제 인물 / NGO 지도자 / 잠재력 있는 정치인 / 대통령에 영향력 있는 인물 / 언론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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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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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독립운동가
1969
이인
법조인·독립운동가
1969
닐 암스트롱 · 마이클 콜린스 · 버즈 올드린
우주비행사
1969
제헌국회의원
154명
1969
조동식
교육인
1970
김수환
추기경
1970
백낙준
교육인
1970
이상백
-
1971
유일한
기업인
1976
박일경
교육인
1980
권승렬
독립운동가, 법조인
1982
권영대
교육인
1982
김상만
언론인
1985
이숙종
교육인
1987
이병철
기업인
1988
권이혁
교육인, 의사
1989
이방자
교육인, 영친왕비
1991
강영훈
국무총리
1991
김병관
언론인
1994
김호길
교육인
1995
곽윤직
법학자
1996
장기려
의사
1996
윤덕선
의사, 교육인
1996
정범모
교육인
1998
고흥문
국회의원
1998
주영하
교육인
2000
이건희
기업인
2002
김재준
종교인
2002
문창모
의학자
2002
백낙환
의학자, 교육인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2006
정재헌
법조인
2007
권영우
교육인
2007
장훈
체육인
2008
박관용
국회의장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2009
김정수
정치인
2010
이영덕
국무총리
2010
조용기
종교인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2012
김평우
법조인
2012
정몽구
기업인
2013
남덕우
국무총리
2015
권광중
법조인
2016
이근
의사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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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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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정치인
2018
박재갑
의사
2018
이석태
법조인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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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2018
정세균
국회의장
2019
윤한덕
의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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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2020
이이화
사학자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2020
문희상
국회의장
2021
최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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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박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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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송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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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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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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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 유년기의 추억',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2]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본당 명의사제[3] 양간공후 판군기감사공파 37세손 ○수(○洙) 항렬이지만,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족보(1)족보(2))[4] 추기경의 아호(雅號)[5]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5. 유신 종말과 서울의 봄,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6]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2. 1970년대 민주화운동,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7] 백남용,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 머리말.[8] 일본군 부사관들은 특유의 가혹행위로 인하여 귀신군조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내무반의 폭군으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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