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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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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장준하
張俊河 | Chang Chun-ha
파일:장준하 과거.jpg
광복군 시절
파일:장준하-2.jpg
사상계 사장 시절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918년[1] 8월 27일[2]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
(現 평안북도 신의주시 연하동)
사망 1975년 8월 17일 (향년 56세)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약사봉
(現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
본관 안동 장씨 (安東 張氏)
부모 아버지 장석인[3], 어머니 김경문[4]
형제자매 여동생 장영하[5]
남동생 장명하[6]
남동생 장익하[7]
남동생 장창하[8]
배우자 김희숙[9]
자녀 장남 장호권[10]
차남 장호성[11]
장녀 장호경[12]
차녀 장호연[13]
삼남 장호준[14]
학력 선천 교동소학교 (수료)
삭주 대관보통학교 (졸업)
숭실고등보통학교 중학교 (졸업)
서울광성고등학교 졸업)
토요대학 (예과[15] / 중퇴)
일본신학교[16] (중퇴)
한신대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종교 개신교(기장)가톨릭(세례명: 루도비코)[17]
신체 175cm[18], 75kg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7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금관문화훈장 추서
별칭 재야 대통령
군사 경력
임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44년 1월 ~ 1944년 7월
중화민국 국민정부 국민혁명군
1944년 8월 ~ 1945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1945년 2월 ~ 1945년 11월 23일
최종 계급 이등병 (일본 제국 육군)
준위 (중화민국 국민정부 국민혁명군)
대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참전 중일전쟁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입대2.3. 일본군 탈영과 광복군 합류2.4. 광복 이후2.5. 5.16 군사정변 ~ 제3공화국 시기2.6. 의문스러운 사망
2.6.1. 타살 의혹
3. 저서4. 여담5. 선거 이력6. 소속 정당7. 대중매체에서8. 관련 단체9. 연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민주운동가, 정치인언론인.

아래의 내용은 김삼웅장준하 평전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다.

2. 생애

2.1. 초기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장석인(張錫仁)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북 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부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니고, 부친이 선천의 신성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하게 되어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신앙에 따라 목사가 되기 위해[19]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자, 도일하여 토요대학 예과를 거쳐 장로회 계통인 일본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일본신학교에 유학가기 위한 돈이 모자라 정주군 신안소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한 적도 있다. 신성중학교 재학 시절 일제에 저항하라는 교장[20]이 일본 순사들한테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21] 잡혀가자 격분하여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 배울 수 없다"며 '일본어 교과서 찢기 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장준하의 친구가 목사 문익환이었다.[22]
파일:FB_IMG_1474745932989.jpg
1941년, 동경 유학 시절 왼쪽부터 김용묵[23], 김익준[24], 장준하

2.2. 입대

그 후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명목상 자원 입대했다.[25] 당시 학도병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 말만 자원 입대일 뿐 강제 징집이 됐기에 억울하게 전쟁터로 끌려간 것이었다. 장준하는 지원하면서 이미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학도병 출신끼리 모여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면서 활발히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어 중국 장쑤성 쉬저우에 주둔하고 있는 츠카다 부대[26]에 징집되었다.

중국 전선으로 파병나가기 전 아직 평양 조선군부대에 있을 때 엄지손가락이 부어오른 적이 있었는데 일본군 군의관이 "마취제가 없는데 참을 수 있겠나?"라고 하자 괜찮다고 하였고, 군의관이 메스로 생살을 베는데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군의관이 돌팔이라서 엉뚱한 곳으로 세 군데 이상을 째었다고 한다.[27] 또 일설에 따르면 이렇게 치료받은 후에 츠카다 부대에 징집되어 파병나가기 전, 일본군 사령관이 그런 몸으로 중국까지 가서 제대로 싸울 수 있겠냐고 묻자 이를 악물고 '이런 몸으로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는 군인이 있음을 적국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이 '실로 훌륭한 천황폐하의 병사로다!'라며 감탄했다고도 한다.
파일:광복군 장준하.jpg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28]

2.3. 일본군 탈영과 광복군 합류

1944년 김준엽, 박승헌 등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탈출해 장장 7개월간 2,500km 중국 대륙 6,000리를 걸어서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진포선(津浦線, 톈진 ~ 난징 푸커우구를 잇는 철도선이다) 철도[29]에서는 일본군의 검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중국 농부와 상인으로 위장하고 며칠간 연습한 후 무사 통과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군 중앙군 준위를 거쳐[30] 한국광복군을 찾아갔다.

1945년 53명의 동지들과 걸어서 파촉령의 험준한 겨울 산을 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김구 주석을 만났는데 그를 받아준 사람은 한국광복군의 장군인 백파 김학규.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거의 끝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혹자들은 "장준하가 독립운동가로서 한 일은 OSS에서 서류를 번역한게 전부"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포기하거나 일제에 빌붙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31] 한국광복군에서 최종 계급은 대위였다고 하며 파벌 싸움으로 인해 임시정부가 약해지자 이범석의 권유에 따라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얼마 못가 원자폭탄에 의한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자주적 해방은 물거품이 된다.

2.4. 광복 이후

8.15 광복 3일 뒤인 1945년 8월 18일,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미군과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으나 일본군과의 대치 끝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만약 이 때 귀국에 성공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외독립운동 세력 중 가장 빨리 귀국한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활동했으며[32] 처음에는 김구의 비서로 활동[33]하면서 이 인맥으로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비서를 역임하다가 이범석의 족청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반공주의자 이범석의 노선조차도 '좌파적 색채가 난다'면서 바로 때려치웠다고 한다.[34]

이후 한신대에 편입해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제1공화국에서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의 추천으로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장준하와 사상계 직원들이 같이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제2공화국에서는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제2대 국토건설단 단장 등을 지냈다.

2.5. 5.16 군사정변 ~ 제3공화국 시기

1961년 당시 대한민국 육군 소장이였던 박정희5.16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가 약속했던 조속한 민정 이양을 할 의도가 없음을 알게 된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1962년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박정희의 독재 행위를 막기 위해 윤보선야당 통합 후보로 만드는 활동을 벌이며 비판적인 언론 활동을 했는데 이때 낸 잡지는 독립군 시절 중국에서 동지들과 잡지를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 만든 것이다.

이후 사상계를 계속 펴내며 박정희 반대 운동을 했지만 정치계에서는 유진산의 행보로 인해 야당이 박살나고 언론계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온갖 방해로 인해 사상계를 펴낼 수 없게 되자 결국 정치인이 되기로 한다.

이때 국회의원 선거 활동을 위해 유세를 하면서 박정희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것과 박정희 정권 시절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박정희가 밀수 왕초"라며 박정희가 사카린 밀수 사건의 배후임을 주장한 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발언으로 남아 있으며 1967년부터는 제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6. 의문스러운 사망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 등산을 갔다가 의문사하였고[35]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실족사로 발표했다. 아직까지 고인의 사망에 관한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2.6.1. 타살 의혹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2013 장준하 두개골 부검 검색 결과

당시 정권이 장준하를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정권이 고인이 계획했던 '유신개헌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고인을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신개헌운동'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미 고인이 된 법정김대중이 증언했다.

KBS 인물현대사.E27.장준하 2부-거사와 죽음의 진실(57:26) 동영상

1993년 3월 결성된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는 장준하의 사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타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조사하여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망 원인이 추락사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진상 규명 불능으로 최종 발표했다. 그러나 2004년 보도된 주간동아 기사를 보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이러한 최종 결론에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었다는 의문을 제기했는데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실험을 주도한 홍익대학교 교수의 말이 나온다. 고인의 유족들은 수사 방식이나 성과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38], 일부러 관을 꺼내 유골을 검시해야 한다는 점에 부담을 느끼기도 하여 그 동안은 모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들(1993, 2002, 2004)에 응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앞선 조사들은 유골의 검시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등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조사들이었다.

2012년 8월 15일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경기도 파주시에 조성될 장준하 공원으로 묘지를 이장하는 김에[39] 드디어 사망 후 처음으로 유골을 검시하였는데 그 결과 머리뼈에 직경 6cm짜리 동글동글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만으로는 타살 여부를 밝히기 힘드나 다른 신체 부위에서 추락시 발견되는 골절이 1군데도 발견되지 않아 타살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를 토대로 유족인 장남 장호권[40]은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였으며 정부가 진상 조사에 나서지 않을 경우 직접 과학적 분석을 의뢰할 것임을 밝혔다. 검시의 자세한 내용과 유족의 주장은 여기를 참조할 것. 나는 꼼수다 봉주 19회에 장남인 장호권 씨와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고상만 씨가 출연해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사실들을 말하기도 했다.

2012년 9월 1일 그것이 알고싶다 팀에서 지난 1993년 방송분에 법의학적 과학적 해석을 추가한 내용을 방송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13년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정밀감식 후 이정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정빈 교수는 유골 감식 결과 '타살 후 추락'으로 결론을 내렸다. 머리를 가격당해 즉사한 후 추락해 엉덩이뼈를 손상당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결론은 이정빈 교수의 개인적인 조사 결과라는 것. 대한법의학회에서는 이러한 이정빈 교수의 조사 결과에 대해 타살 후 추락이 아닌 실족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직접 반박까지 하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장준하/53997890.jpg

2012년 의사 출신인 정의화국회의장은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정 전 국회의장은 보수 진영 소속 중진 국회의원인 데다가 머리뼈 외상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이라 더욱 임팩트가 컸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자신만큼 많이 머리뼈 외상 환자를 치료한 의사가 없다고 자부하며 장준하의 머리뼈를 본 순간 타살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이후 2014년에 다시금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주장을 확고히 하였다.

3. 저서

<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도서출판 돌베개>
학병들의 저서 중에서는 김준엽 고려대 총장의 <장정>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 2015년에 순한글에 문장을 손본 전면개정판이 나와 구하기도 쉽다.[44]

일본군 탈출후 임시정부를 찾아 6천리 장정을 떠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애국자인지 여실히 드러나는데, 가족들의 탄압을 각오하고 본인의 죽음의 공포를 수없이 겪으며 오직 독립운동, 오직 임시정부를 만나기 위해 그 엄청난 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조국이 준 유일한 무기인 '젊음'이 있다며 50여명의 동지들과 악으로 깡으로 행군한다.(이중 학병은 김준엽 등 33명) 장준하는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에도 붙었으며[45], 가만히 있으면 살고 도망가면 죽는 와중에 탈출을 감행하였다. 게다가 장준하와 함께 임시정부로 탈출한 학병만 33명이다.[46]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충칭의 임시정부에서 흩날리는 태극기는 애국가 가사조차 제대로 못 외우는 청년들에게 엄청난 감격을 준다. 하지만 그들은 단 며칠만에 임시정부내 지독한 파벌 싸움에 환멸을 느꼈다. 나중에는 유동열이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하자 2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가 작살내고 돌아올 정도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수많은 한인들 앞에서 임정을 찾아 온 것을 후회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비행기를 몰고 이곳에다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싶다며 연설하는 장면이 압권.[47]

저서 곳곳에서 김구, 지청천, 이범석에게 엄청난 존경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을 보면 이 당시 장준하는 극단적인 극우파이며 자신을 김구 계열로 포장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강준만의 현대사에서도 해방 극초기까지 김구는 극단적인 극우파로 평가하고 있으니, 김구 직계가 되려면 장준하 역시 극우로 갈 수 밖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장준하는 정작 해방정국 당시에는 김구보다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노선을 더 지지하는 성향을 보이는 등 김구의 정치 행보를 썩 긍정적으로 보진 않았었다. 훗날 장준하가 김구 직계를 자처하게 된 건 1970년대 이후 기존 반공 시선에서 많이 벗어났을 때다.

제목인 돌베개는 일본군에서 탈출을 결행하겠다는 뜻으로 편지에 사용하겠다며 아내와 약속한 단어이다. 아내에게 성경구절이 들어간 편지를 받게 되면 그 편지가 마지막인 줄 알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는 만주의 일본 군사학교에서 탈출해 충칭의 임시정부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이 돌베개는 성경구절 중 창세기 28장 11절인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에서 따온 구절이며, 임시정부를 찾아 6천리 장정을 하며 고생할 때 돌베개를 베고 잔다며 자주 등장한다. 파촉으로 넘어 갈 때는 깊은 산에 눈이 쌓여 눈베게를 베고 잔다며 자조하는 식이다. 여담으로 장준하는 개신교 신자였고, 아내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죽기 얼마 직전 본인이 개종하고 혼인성사를 했다.

파주에 있는 그의 무덤에 가면 돌베개에서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4. 여담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4[65]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
57,119 (59.62%) 당선 (1위) 초선[66]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2[67]

파일:민주통일당.svg
25,270 (9.33%) 낙선 (3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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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총선 (서울 제4지역구) 9대 총선 (서울 제2선거구) }}}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한국독립당(1940년)|
한국독립당
]]
1945 - 1946 정계 입문

파일:한독당1946.png
1946 합당[68]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6 - 1947 탈당

[[조선민족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
1947 - 1949 입당


파일:대한청년단 글자.png
1949 합당[69]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9 - 1963 탈당


[[국민의당(1963년)|
파일:국민의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
1963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3 - 1966 탈당


[[민중당(1965년)|
파일:민중당(1965년) 흰색 로고타입.svg
]]
1966 - 1967 입당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67 - 1969 합당[70]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69 자진 정당 해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69 - 1970 정당 재등록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0 - 1971 탈당[71]


[[국민당(1971년)|
파일:k1t.png
]]
1971 - 1972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2 - 1973 정당 해산


파일:민주통일당.svg
1973 - 197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5 탈당, 별세

7. 대중매체에서

8. 관련 단체

9. 연표


※ 출처 :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출판사)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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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국회의원 재직당시 들고다녔던 국회의원 신분증에는 1915년생으로 기재되어있어 1918년생인지 1915년생인지 혼동이 오가기도 하였는데 장준하의 의문사를 오랫동안 추적해오던 고상만씨에 의하면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에게 직접 질문해본 결과 1915년생이라 기재되어있는건 오류고 실제로는 1918년생이 맞다고 한다.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을당시 일본군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도 다이쇼 7년, 즉 1918년생으로 기재되어있다.[2] 다만 일본군 학병으로 징집되었을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는 7월 20일생으로 기재되어있다. 하지만 7월 20일을 음력으로 계산하면 장준하의 정식 생일인 8월 27일과 거의 비슷한 8월 26일이 되기 때문에 육군전시명부에 기재된 생일은 음력생일일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당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은 양력만 정식 달력으로 인정하고 있던데다가 장준하 일가도 오랫동안 기독교 영향으로 서구식 양력에 익숙해있던 집안이었기 때문에 7월 20일 또한 양력 생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국회의원 재직당시 들고다녔던 국회의원 신분증에는 8월 27일생으로 기재되어있고,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의 증언에 의하면 항상 8월 27일로 생일을 지냈다고 한다. 사실 이 당시에는 장준하처럼 신분증과 서류마다 생일이 제각각인 경우가 허다했다. 당장 동지 김준엽만 하더라도 1920년생으로 알려져있지만 일본군 육군전시명부에는 1923년생으로 기재되어있기도 하고.[3] 張錫仁, 1896년 8월 23일 ~ 1966년 6월 6일 (향년 69세). 생전 직업은 목사였다.[4] 金京文, 1894년 12월 22일 ~ 1950년 6월 28일 (향년 55세)[5] 張英河, 1922년 ~ 1998년 (향년 76세)[6] 張明河, 1925년 ~ 2009년 (향년 84세)[7] 張益河, 1929년 ~ 1951년? (향년 22세?, 6.25전쟁 당시 UN군 통역장교로 복무중에 실종)[8] 張昌河, 1937년 ~ (87세)[9] 1926년 ~ 2018년 7월 2일 (향년 92세) #[10] 張豪權, 1949년 5월 14일 ~ ([age(1949-05-14)]세)[11] 張豪誠, 1952년 ~ (72세)[12] 張豪瓊, 1955년 ~ (69세)[13] 張豪姸, 1957년 ~ (67세)[14] 張豪峻, 1958년 ~ (66세)[15] 이전 문서에서는 철학과를 전공하다 중퇴했다고 기재되어있지만 이 당시에서는 대학에서 특정 학과를 전공하려면 중학교 졸업 이후 무조건 예과를 무조건 2~3년 수료해야했다. 따라서 선천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철학과를 전공하는 건 성립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장준하가 다녔다는 토요대학의 경우 예과 2년제였고, 예과를 거치고나서 세부전공을 선택하는 시스템이었다.[16] 현 도쿄신학대학의 전신. 1943년에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원래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이었지만 이러한 개편과정으로 인해 현재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는 신학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과와 루터신학전문학교, 성공회신학원 등등 일본 간토 지방의 여러 신학교들과 통합되어 일본동부신학교(日本東部神學校)로 개편되기도 했다.[17] 배우자 김희숙 여사가 가톨릭 신자였고, 평생 소원이 남편이 세례를 받고 가톨릭 방식으로 혼인성사를 받는 것이어서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직전 세례를 받고 혼인 성사를 받았다. 진실된 의미에서의 개종인지는 오직 장준하와 김희숙 여사가 알 일이다.[18] 출처 일제강점기 동년배 한국인 남성 평균 키에 비교하면 장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준하 선생의 회고록 돌베개에 따르면, 일본군 같은 부대에서 함께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학병출신 중에서 가장 작은 키였다고 한다.[19] 생전의 백범은 장준하를 부를 때 장 목사라고 불렀다.[20] 훗날 서울대 총장을 역임하게 되는 장이욱이다.[21] 더 정확히 말하면 안창호가 순국하게 되는 계기가 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22] 항간에 떠도는 잘못된 사실 중 하나가 장준하, 윤동주, 문익환 이 셋이 친구였다는 사실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장준하와 문익환, 문익환과 윤동주는 서로 알고지내던 친구가 맞지만 장준하와 윤동주는 서로 접점이 없다는 점에서 생전에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장준하와 윤동주는 학창시절 숭실중에 다녔던 적이 있긴 하지만 장준하는 1년 다니고 바로 선천군의 신성중으로 전학을 갔다. 이러한 사실이 와전되면서 심지어 장준하가 명동촌출신이라는 왜곡된 사실이 나돌기도 하는데 장준하는 일단 간도에 한번도 거주한 적 없고 오로지 평안북도 의주군삭주군, 정주군 그리고 평양시(다만 이 당시에는 명칭이 평양부(平壌府)였다.)에만 거주했었다. 즉, 도쿄도(다만 장준하가 한참 유학생활을 했을 땐 도쿄시(東京市)였다. 지금의 도쿄도로 명칭이 바뀐건 1943년 7월부터다.)로 유학가기 전까지 한반도 밖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셈.[23] G식백과 김성회조부이다.[24] 아이러니하게도 1967년 제7대 국회에서 민주공화당소속 국회의원이 되어 신민당 소속이었던 장준하와 정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이후에도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되는 등 장준하와 여러모로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25] 이때의 일화가 대단한데 일본 유학 중 자신의 제자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하여 제자인 김희숙과 결혼하였다. 당시 유부녀는 징집되지 않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 그 대신 학도병으로 끌려갔는데 말이 자원 입대일 뿐 한 가정에 강제 징집이든 위안부든 선택을 해야 했다. 다만 김희숙 여사는 한 인터뷰에서 정작 본인은 장준하와의 결혼은 생각해본 적 없고, 정신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수녀가 된다거나, 학교 은사님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음악공부를 하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반대하고 장준하 또한 김희숙 여사에게 그냥 본인과 결혼하고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는거야말로 하나님께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설득하는 바람에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 둘은 나이차도 무려 8살 차인데다가 종교가 서로 달라서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당시 북한지방 가톨릭교는 지금과 달리 굉장히 보수적이라서 장준하같은 개신교 신자와 결혼하면 배교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을 정도라 실제로 김희숙 여사의 모친이 결혼때문에 성당 출석을 금지까지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준하는 김희숙 여사네 집의 하숙생이기도 했는데 집안의 어른인 김희숙 여사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직접 결혼하고싶다고 먼저 의견을 피력한 바람에 정작 김희숙 여사 본인과는 상의를 안해서 섭섭했다고.[26] 훗날 발굴된 일본군 육군전시명부에 따르면 장준하는 중지나파견군 제13군 제65사단 치중대에 소속되어있던 치중병이라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같은 치중대 소속 조선인 학병들이 계속해서 탈출을 하자 결국 장준하를 비롯한 나머지 학병들을 규율이 굉장히 엄격한 츠카다 부대로 옮겨버렸다고 자서전 <돌베개>에 나온다. 참고로 츠카다 부대의 정식 명칭은 중지나파견군 제13군 제65사단 독립보병 제58대대로, 같은 광복군 동지인 김준엽이 원래 이곳 소속의 보병이었다. 장준하는 장도영과 함께 뒤늦게 츠카다 부대로 합류한다. 이 부대에서만 조선인 학병 24명이 탈출한다.[27] 이때 장준하는 화살촉이 깊숙이 박혀 생살을 째야 하는데 비명 한 번 안 지르고 여유롭게 바둑을 둔 삼국지 관우를 떠올렸다고 한다. 실제로도 작은 상처의 고름을 빼거나 몇 바늘 꿰맬 때는 마취를 안 하는 경우도 꽤 있다. 마취 주사 놓는 거나 그냥 하는 거나 아픈 건 비슷하기 때문.[28]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29] 이 당시 일본군은 중국의 핵심 철도 노선을 장악하는 대륙타통작전을 한참 시행 중에 있었기 때문에 진포선, 경한선을 비롯한 수 많은 중국의 주요 철도 노선은 일본군 수중에 들어와있었다. 사실 장준하를 비롯한 중국으로 파병나간 조선인 학병들도 원래 이 대륙타통작전에 투입될 목적으로 평양에서 중국으로 차출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만큼 주변에 일본군의 경비가 삼엄했으며 운이 나쁘면 자칫하다가 조선인 탈출병이라는 사실이 딱 걸리기 좋은 환경이었기때문에 철도를 건널 때마다 공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30] 장준하의 회고록 <돌베개>에 따르면 중국중앙군관학교 한광반 졸업 후 중국군 준위계급을 달았다고 나오지만, 절친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소위계급을 달았다고 나와 다소 좀 오락가락한다. 같은 일본 유학생 학도병 출신이자 한국광복군 출신인 김우전 애국지사 또한 이 당시 중국군 소위계급을 달았다고 증언했다. 이 중국군 소위계급을 달은 덕분에 리쭝런 부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31] 당시에 전쟁이 8월에 일본의 패배로 끝날 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어질지 누가 이길지 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독립운동을 하러 갔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일단 일본군 탈출 자체가 목숨을 건 일이고,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독립군을 찾아 간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일이다. 전쟁이 일찍 끝나서 눈에 띄는 활동까지는 못한 것이 본인 의사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대본영에 의한 언론 통제로 마지막까지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더 많던 상황에 독립운동을 할 생각을 하는 건 쉽지 않다.[32] 장준하가 반공주의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중국군 유격대 시절의 경험과 연관이 있다. 원래 일본군 진영으로부터 탈출 이후 츠카다 부대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공산당계열 팔로군이 있단 소식을 듣고 팔로군에 투항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탈출 이후 여기저기 길을 못찾고 헤메다니다가 장제스계열의 국부군 유격대에 의해 포획되어서 국민당군 유격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 하지만 오랫동안 의탁하고있던 국민당군 유격대의 사령관이 공산당 계열의 신사군의 기습에 의해 전사해버리자 절친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신사군은 이 국민당군 사령관의 중학생 아들까지 잡아다가 처형시켰다고 한다. 팀킬을 하는 공산당에 학을 떼면서 본격적으로 반공 성향을 가지게 된다. 본인의 회고록인 <돌베개>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팔로군은 맞서 싸워야 할 일본군을 상대로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허구한 날 같은 중국인인 국민당을 상대로 팀킬이나 하는 족속들이라고 비판을 했다. 결과만 보았을 때 원래 가졌던 의도와 달리 팔로군에 가담하지 않고 도중에 타의적으로 국민당군 유격대에 포획된 건 신의 한수가 되어 평생동지가 되는 김준엽과 만나고 충칭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반공주의 성향때문에 자신의 정적이었던 박정희를 깔 때 박정희가 남로당에 몸담았던 사실을 들춰내어 박정희는 친일파에 그치지 않고 매우 불순한 사상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고도 까기도 했다. 이러한 반공 성향덕분에 허구한 날 재야인사들이 북괴간첩으로 누명이 씌워질 당시 그나마 이 누명으로부터 자유로웠긴 했다. 하지만 장준하의 경호비서를 담당했던 박세정씨는 먼 친척중에 빨치산이 있단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박세정씨의 증언에 의하면 사실 박정희는 장준하에게도 북괴간첩으로 누명을 씌우려고 시도는 했다고 한다.[33] 김구 밑에서 일했지만 1944년~1945년 충칭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매우 실망하여 '다시 일본군 항공대로 들어가 임시정부를 폭격하고 싶었다'고 한다. 게다가 해방 이후 경교장에서 김구의 비서로 활동할 때도 김구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 김구가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위해 방북한 것에 대해서도 평생을 좌익과 투쟁해온 사람이 왜 이제와서 김일성을 만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모르겠단 식으로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며 오히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노선을 더 지지했을 정도. 훗날 장준하가 이승만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적이기 시작했던 때는 1953년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와 마찬가지인 사상계를 창간한 이후이고 이때만 하더라도 이승만에 대해서 크게 반감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능력이 김구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지 기존의 반공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김구의 남북회담과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정작 해방정국 당시에 장준하는 여운형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이용만 당하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다고 다소 평가절하하는 면모를 드러내었다.)에 대해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했고, 모든 통일은 다 좋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민족주의자의 길>이라는 수필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 당시 박정희의 7.4 남북 공동 성명에 지지의사를 보내기도 했다. 다만 아내였던 김희숙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김구의 남북협상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과 별개로 참여해서 동행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고는 한다. 하지만 김구로부터 그냥 남한에 남아있으라고 거절당해서 무산되었다고.[34] 그러나 이 대목만으로 장준하 선생이 이범석 장군과 반목했던 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광복군 시절 장준하는 임시정부를 폭파시키겠다고 할만큼 임시정부의 내분에 실망하여 회의적인 사람이었지만 이범석의 연설에 감동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반란을 멈추고 그를 따랐고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밑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이범석 장군을 존경하였다. 하지만 족청 탈퇴 이후에는 다소 마주치기 어색한 사이로 전락한 것도 맞는 듯 하다. 이 당시 족청에 몸담았던 단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장준하와 이범석은 좌익출신 청년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해서 갈등이 심했고 장준하가 거의 쿠데타를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이범석도 동지 김좌진의 죽음때문에 반공의식이 매우 투철한 인물이었으나 이와 별개로 본인의 세력을 불리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족청 단원들을 모집했었다. 이 당시 갈 곳없던 좌익계열 청년들은 일종의 도피처삼아 족청에 많이 가담했었다고. 근데 여전히 빨간물을 제대로 빼지 않고 가입했던 탓에 종종 경찰에 연행되는 단원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둘이 다시 화합을 하게 된 건 70년대 들어 박정희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야당 4자회담을 했을 때다. 이 당시 장준하와 같이 족청의 단원이었던 서영훈의 회고에 의하면 장준하는 단원들의 필체만 보고 좌익인지 아닌지 분간하려고 했을 정도로 엄청난 극우반공주의자였다고 한다.[35] 백기완을 비롯한 후배들과 가기로 했지만 너무 무더울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보고 취소했다가 자신이 회원으로 있던 산악회장 김용덕, 마침 자신을 만나기 위해 충청남도에서 올라온 김용환 두 사람과 함께 새 약속을 잡았다. 약사봉 입구에서 점심을 먼저 먹기 위해 준비하는 중 장준하는 먼저 좀 올라가 보겠다면서 혼자 출발했는데 얼마 뒤 김용환이 따라갔다가 절벽 아래 숨져 있는 장준하를 발견하고 달려와 알렸다.[36] 지금 생각하면 납득이 안 갈지도 모르는데, 당시 보온병 하면 당연히 단열재가 유리였다.유리로 된 병이 다른 재질로 된 더 큰 병 안에 입구만 결합된 상태로 공중에 떠있는 형태 해외에서도 쓰이며 사용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분리하는 과정에서 박살나는것은 예삿일이고 높이 30cm 정도에서도 땅에 떨어지면 단열재인 유리가 깨지고, 그러면 그 보온병 버려야 했다.[37] 어깨를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 듯한 흔적으로 보인다.[38] 당시 유족들은 국군기무사령부 등을 전부 조사할 수 있도록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전권을 가지고 수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조사들은 전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조사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39] 원래 이장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홍수에 의해 묘가 파손되어 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파주시가 유해를 모시겠다 하여 장준하 공원이 조성되기로 한 것이다.[40] 아버지 사후 정체 불명 4인조의 피습을 받아 턱 골절상을 입은 후 야반도주하다시피 외국으로 나갔다고 한다.[41] 보통 사람이 추락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자기 보호본능 때문에 팔등이 땅에 먼저 닿는 식이라, 이런 부위에 골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장준하의 시신에선 이런 골절이 발견되지 않았다.[42] 장준하 사망 다음날에 박정희가 "보안사령관을 독대했다"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43] 김용환은 추가적인 인터뷰와 수기를 월간조선에서 한 적은 있다. 다만 이 때는 가명으로 처리되었다. 다만, 그것이 알고 싶다 1993년 방송 마지막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발언은 방송국에서 임의 편집했다는 판결이 나왔다.[44] '학병 문학'이라 하여 끌려간 학병들의 책들이 꽤 되는데 돌배게가 가장 구하기 쉽다. 그외에는 김준엽의 <장정>, 손종영의 <학병> 정도. 김준엽의 책은 정세 설명이 잘 되어 있고, 손종영의 책은 갑종 간부후보생으로 교육 중 해방이 되고, 그후 일본군 소위 임관을 하는 과정이 잘 나와 있다.[45] 일제 갑종간부후보생은 2년 과정으로 모든 조선인 학병은 1944년 1월 20일에 이등병으로 입대 했으며, 입대 후 3개월 뒤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을 보게 된다. 여기서 합격하면 3개월간 자체 교육 후 11개월간 예비사관학교를 갔다오고 다시 6개월간 원대에서 대부교육을 받는데(육사 졸업생도 6개월간 원대의 대부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기간에 해방이 되어 갑종 간부후보생 신분으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후 1945년 9월에 군대 해산하며 1계급씩 올려주었는데 이때야 소위 계급장을 다는 것이 보통이다. 즉 장준하가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상태에서 탈영했으면 이등병이 맞다. 고등학생이 대학교 합격 이후 자퇴하면 대졸자가 아니라 고졸 또는 고퇴가 되는 것과 같은 원리.[46] 갑종 간부후보생이 되면 병적전시명부에 그 사실이 기록되는데 장준하는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을 치렀다거나 합격했다는 기록이 없다. 장준하처럼 중국전선에서 탈출한 학병 신상초의 경우 탈출 전에 간부후보생 시험에 응해서 을종간부후보생이 되었다고 병적전시명부에 기록되어있고, 유수명부에는 보병 일등병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47] 이 사건은 임시정부 내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무려 임시정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원로 요인들 앞에서 임시정부를 폭파시키고 싶다는 말을 했으니. 그 중 신익희 선생은 장준하의 발언에 대해 직접 따지긴 했지만 나름 임시정부에서 조용히 넘어갔다. 당시는 현재보다 유교문화가 훨씬 강했던 시대임을 감안할 때 20대의 젊은이가 60대 이상의 노인 앞에서, 그것도 이제 막 임시정부에 합류한 신출내기 독립운동가가 지긋한 원로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으니 그냥 넘어간 것이 꽤 이례적이기도 하다.그럼에도 장준하와 김준엽등의 학도병 출신들이 임시정부에 항의하는 것에 어떠한 터치도 없었던 것은 임시정부 원로들 또한 임시정부의 내분 등의 문제를 부끄러워했고, 장준하 등 학도병 출신들이 당시로선 굉장한 엘리트 대우를 받던 대학생이여서 그러했을 것이다.[48] 팟캐스트 방송 그것은 알기 싫다 1회의 방송에서는 성경의 특정 구절이라는 얘기도 있으며 장준하 선생은 자서전 <돌베개>에서 편지 말미에 "성경 구절이 있으면 내가 탈출한 줄 알라"고 입대 전에 아내에게 얘기해두었다고 한다. 성경을 살펴보면, 창세기야곱이 형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아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하던 중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의 사닥다리를 보고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49] 김준엽의 책에서는 형들에게 자신의 편지에 '草草'라고 쓰여 있으면 탈출에 성공한지 알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草草는 당시 일본인들이 편지 말미에 '여기까지 줄인다' 정도의 뜻으로 자주쓰는 단어이다.[50] 돌베개라는 말은 사실 이광수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광수의 작품 중에 "돌베개"가 있기는 하지만 친일 문학가인 점을 볼 때 근거없는 얘기로 보인다. 아래에서 장준하 선생이 육당 최남선을 평가한 이야기가 와전된 건 아닐런지. 다만 이와 별개로 장준하가 사상계 사장으로 있을 당시 최남선과 더불어 이광수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맞았는지 1957년 최남선이 죽었을 때, 이 둘을 추모하는 <육당, 춘원의 밤>이라는 문학행사를 열기도 했다.[51] 이 부분에 관한 배경을 짚으면 한국광복군 내에서도 내분이 심했던 것에 비롯되었다. 한국광복군은 크게 제1지대(김원봉), 제2지대(지청천), 제3지대(김학규) 이렇게 나뉘었는데 제1지대와 제2지대가 서로 갈등이 잦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장준하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출신이다. 제1지대 출신 부대원과 제2지대 출신 부대원이 김원봉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 극명하게 엇갈림을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서 복무한 김승곤(이후 광복회 회장 지냄)은 김원봉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제2지대에서 복무했던 장준하는 <돌베개>에서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다.[52] 장준하의 아내 김희숙 씨는 국회의원 명함에 인감만 찍혀있으면 어느정도 생활비가 충당될 수 있단 말을 듣고 남편의 명함을 찾다가 장준하로부터 명함 없으니까 찾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다고 한다.[53] 장학금을 타기에는 성적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장준하 일가의 사정을 듣고 당시 연세대 명예 총장이자 장준하와 친분이 있던 백낙준이 장호권씨를 장학생으로 임명해서 입학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장준하가 절대 안된다고 사절을 해버렸다고. 이후 1년 재수해서 고려대학교에 응시를 하지만 떨어진 바람에 친구 김준엽이 손써서 입학시켜줄 수 있다고 했지만 이마저도 장준하는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장호권씨의 최종학력은 고졸로 남게 되었다.[54] 참고로 장준하가 결혼식 주례를 서 준 부부로는 한국사 강사 최태성의 부모님도 있다.#[55] 아무래도 1950~70년대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현재와 비교해서 아버지들이 가정에 살뜰한 분위기가 덜했고, 장준하 선생 성격상 대의와 주변 이웃에 더 신경을 쓰는 부분이 있었지만 가족에 아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일례로, 장준하는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큰 딸한테 형편상 피아노를 사줄 수 없어 미안하게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고, 주변 친지들의 끈질긴 설득과 지원으로 큰 딸 장호경씨는 아들들과 달리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56] 그 배일주의가 어느정도 였냐면 아들 장호권 씨가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아침에 당시 사카모토 큐의 히트곡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를 듣기 위해 레코드판을 켰는데 장준하 선생이 이걸 듣게 되었다. 장준하는 "아침 댓바람부터 일본말 듣게하느냐"고 소리치며 장호권의 방으로 들어와서는 레코드판을 들고 나가 그걸 집마당에 던지면서 크게 혼을 냈다고 한다. 출처 뿐만 아니라 장호권 씨는 외할머니와 함께 일본 만담으로 농담따먹기를 하다가 이를 본 장준하가 심지어 자신의 장모한테까지 집 안에서 일본어 쓰지 말라고 혼을 내버리는 바람에 장호권 씨와 장모 노선삼 여사 둘 다 깨갱했을 정도였다고.[57] 사실 평전이라고 좋게 봐준거고 유일까지는 아니다. 단적으로 역시 친일 문학가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도 장준하가 있던 사상계에서 처음 제정했고 장면 정권 시기 참여에 대해서도 장면은 억지로 넘어가준다고 해도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김영선은 일제강점기 군수까지 지낸 대표적인 친일파이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 친일파 출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한 것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준하의 전매특허와 마찬가지인 사상계의 전신인 잡지 <사상>을 창간할 당시 장준하를 뒤에서 후원해준 이도 친일파이자 이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이었다. 장준하는 이후로도 사상계를 창간할 때에도 백낙준의 지원을 받았고, 백낙준과 같이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등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장준하와 비슷한 성향을 보였던 김준엽은 자신들이 만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었다면 이광수, 최남선 등에게 보인 태도 때문에 자신들도 친일파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고 했을 정도이다. 여담으로 절친이었던 김준엽의 경우 최남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선을 보이진 않았지만 본인이 몸담고 있었던 고려대학교의 설립자 인촌 김성수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사실 해방 이후 교편을 잡을 때 고려대학교뿐만 아니라 연세대학교서울대학교에서도 교수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때문에 고려대를 선택한 거라고 본인의 회고록 <장정>에서 밝혔다. 인촌 김성수의 경우 비록 친일을 했단 오점은 있으나 별개로 독립운동가들의 지원도 한 인물이기때문에 이 점은 높게 평가받아야한다고 김준엽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58] 오늘날 관점에서는 모순이 아니냐고 비판받을 수 있으나, 저 당시 우리나라는 지금 같은 수출 강국이 아니라 해외 원조로 살아가는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제품의 광고를 싣는다는 것은 일본의 자본을 받아 잡지를 펴내는 셈이 되니, 진정성을 흠 잡는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다. 즉, 중국의 일대일로처럼 일본 자본이 우리나라를 길들이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내 친일파들의 경우, 그래도 흑화하기 전에는 우리말 문학 활동을 활성화했다는 공이 있었고, 이들이 가진 자본은 그래도 국내 자본이므로, 적어도 일본 자본에 의존했다는 시비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자본가 개인의 도덕성만을 따진다면 국내 친일파보다는 야마하 창업주가 훨씬 깨끗하니, 오늘날에 장준하 정신을 내세워 이런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59] 다만 박정희는 이때부터 사상계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탓에 이 파티에 박정희는 참석하지 않고 쿠데타 세력 중에서는 장도영이 참석했다. 나중에 장준하가 주한미국대사관과 함께 주최한 파티에 참석한 게 빌미가 되어 장도영은 얼마 안 가 숙청당해버리고, 장준하 또한 장도영과 한통속으로 엮이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60] 이 당시 장준하와 함께 같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국방위에 속해있던 사람으로는 오성장군 김홍일이 있다.[61] 독립투사 정준하라고 잘못말해버린 바람에 오히려 정준하가 짜증을 내면서 “장준하 어르신이시지… 왜 어르신 성을 바꾸고 그래”라고 말한다. 옆에 있던 노홍철은 교과서에 칼질하고 다니지 않았냐며 거든다. 그러자 결국 박명수는 어쨌든 장준하처럼 그만큼 의리가 있다고 말하려고 한 거라고 해명을 하지만 성질을 부린 탓에 정준하 눈 밖에 제대로 나버린다.[62] 장준하와 같은 종파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이자 사회활동가였다.[63] 그 '정치적인 목적'이란, 대통령 당선 등 입신양명 하려는 야망을 돌려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오랜 동료 중 한 명이었던 서영훈의 회고에 의하면 장준하는 종종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가 하면,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선물로 준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는 책을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자주 읽었다고 한다.[64] 김원봉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김원봉이 미인계를 써서 광복군들을 매수하려고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는데,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아직 연애경험이 없었던 김준엽은 김두봉의 딸과 눈이 마주쳐 나름 호감을 갖고 몇 번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가 친구인 장준하로부터 저건 분명 김원봉 세력이 우리한테 미인계를 쓰는 거니까 조심하라고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정작 당사자인 김준엽은 김두봉의 딸이 자기한테 미인계를 쓴 거 같지는 않다고 판단한 듯 하지만 그 후 김준엽은 김구의 최측근이자 장제스 밑에서도 일해 본 민필호의 딸 민영주와 결혼하였다. 다만 장준하가 김원봉을 싫어했던 사실과 별개로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 씨가 이끄는 장준하기념사업회는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해 높게 평가하면서 종종 김원봉 기념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자서전 <돌배게>에 따르면 충칭에 도착하기 전 잠시 후베이성 라오허커우 시에 있던 김원봉이 이끌던 광복군 제1지대에서 신세를 지는 과정에서 1지대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처음 도착했을 땐 같은 한국인으로서 환영받으면서 조만간 충칭으로 향하는 비행기까지 마련해주겠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어느샌가부터 말을 싹 바꾸고 임정에 가지 말고 우리 밑에서 일하라는 식으로 종용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간질 공작까지 당해 같이 인솔했던 학병 동료들과도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충칭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확고했던 장준하와 김준엽은 광복군 제1지대와의 협상은 포기하고 직접 리쭝런이 사령관으로 있던 중국 국민혁명군 제5전구 사령부에 찾아가서 여정에 필요한 여비들과 동복을 얻어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험준한 파촉령을 2주동안 넘으면서 충칭으로 향했다.[65] 동대문구 을[66] 옥중 출마[67] 동대문구[68] 신한민족당, 국민당과 신설 합당[69] 대한청년단에 흡수 합당[70] 신한당과 신설 합당[71] 당내 노선 차이[72] 극중에서 허화평으로 1인 2역을 하기도 했다. 1993년 KBS 다큐멘터리극장에서도 장준하역을 맡았다. 이후 야인시대에서 홍명희를 맡은 배우이다.[73] 아버지 장석인이 신성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도중에 신성중학교로 전학을 갔다.[74] 일본신학교 입학 전에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잠시 몸을 담았다.[75] 한신대학교에서 주는 상이다. 한신대학교는 문익환 목사가 교수로 재직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 학교이고, 장준하 본인 또한 강제 징집 때문에 마치지 못한 신학 공부를 한신대에서 수학하며 끝낸 바 있다. 한신대는 학생부터 교직원까지 전반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기에 문익환, 장준하와 그들의 친구였던 시인 윤동주까지 합쳐 셋을 모두 자신들 학교의 '정신적' 지주이자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