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안봉순
성명 | 안봉순(安鳳淳) |
본관 | 순흥 안씨 |
생몰 | 1894년 3월 24일 ~ 1919년 4월 15일 |
출생지 | 경기도 화성유수부 공향면 제암동 (현재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
사망지 |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안봉순은 경기도 화성유수부 공향면 제암동(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출신이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해 안상용, 안진순, 강태성, 안명순, 안무순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그는 이날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워 장터를 행진했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발포해 3명이 부상당하자, 군중은 분노해 투석으로 대항해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당했다. 그러자 수원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증파되어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했다. 이후 제암리 일대는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4월 15일 정오,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제암리 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이고 제암리와 인근 마을의 주민 약 20여 명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게 했다. 아리타는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둬놓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부하들에게 불을 지르고 교회에서 탈출하려던 이들을 향해 집중 사격하게 했다. 이로 인해 교회에 모여 있던 주민 전원이 사망했는데, 그 중엔 안봉순도 있었다. 아리타 중위는 이어 제암리 마을의 가옥들에 불을 질렀고 이웃 마을인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신자 6명을 나무에 묶어 총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안봉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2년 9월 대대적인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한 뒤 발굴된 유해를 23위의 묘로 안장했고, 1983년 7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2. 순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안봉순
성명 | 안봉순(安奉舜) |
이명 | 안봉순(安鳳淳) |
생몰 | 1894년 3월 1일 ~ 1967년 2월 25일 |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
본관 | 순흥 안씨 |
사망지 | 전라남도 고흥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안봉순은 1894년 3월 1일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0년 5월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해 초모 활동, 대적선전공작, 정보수집 활동 등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는 한편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특과 총대학원대 한청반에 편입되어 군사훈련을 받았고, 이후 한국광복군 제5지대를 거쳐 제2지대로 재편입되어 이범석 지대장 휘하에서 활약했다.
1942년 10월 시안에서 충칭으로 소환되어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으며, 1943년 6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원에 임명되었고, 동년 10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피선되어 각종 안건을 심의, 의결했다. 그리고 1944년 6월 이후엔 임시정부 내무부 직원으로 선임되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7년 2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안봉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