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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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
1925년 음력 6월 2일[1] ~ 1991년 1월 15일 (향년 65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사학자. 서예가 겸 수필가이기도 하다. 본관은 영양(潁陽)[2], 호는 후석(後石).2. 생애
1925년 6월 2일 충청북도 제천군(현 제천시) 청풍면 읍리에서 아버지 천영석(千永錫, 1896. 6. 13 ~ 1955. 2. 17)[3]과 어머니 여흥 민씨 민수홍(1894. 9. 24 ~ 1963. 9. 10)[4]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천인봉(千仁鳳, 1879. 12. 22 ~ 1944. 9. 5)[5]은 부호로서 1939년 제천 지역에 흉년이 들자 많은 돈을 내어 빈민을 구제했다. 이로 인해 1941년 제천군 청풍면 읍리에 '천인봉자선기념비(千仁鳳慈善紀念碑)[6]'가 세워지기도 했다.그는 이미 5살 때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서 천재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동아일보에서도 청풍보통학교 3학년 재학 당시 그를 취재하러 왔다고 한다.동아일보 1934년 2월 17일자 기사 '글씨 잘 쓰는 천관우(9세), 5세부터 독서 가능해'
청주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문과)에 제21회로 입학했다. 1943년 고등교육기관 법문계 재학생의 징병유예 폐지와 학병이 실시되었으나 손가락 장애 덕분에 해방시까지 징병을 피할 수 있었다. 광복 후 예과를 수료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로 진학했다. 1949년에는 '반계 유형원(柳馨遠) 연구'라는 제목의 학부 졸업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은 최초로 실학의 개념과 발전과정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후대 실학 연구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7] 지도교수였던 이병도가 '군계일학'이라 평가하고, 역사학보에 2차례에 걸쳐 게재될 정도였으니 엄청난 학술적 가치를 지녔던 논문이었던 것. 다시 말하지만, '학부 졸업 논문'이다. 불과 20대 중반의 학부 졸업생이 한국사 연구의 전환점이 되는 엄청난 학문적 성과를 이룩해낸 것이다.
1951년 대한통신사[8]에 입사하면서 처음으로 언론인으로 출사했다. 이때문인지 이병도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들은 모두 언론계에 빼앗겼다"고 말하기도 했다.[9] 1952년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연수하면서 쓴 '그랜드캐년'이라는 기행문이 1968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됐고, 2년 뒤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이 됐다. 1957년 한국신문편집인 협회의 창립 발기인이 되어 한국신문윤리강령을 기초했다. 1963년 동아일보로 이직해 1965년 주필이 된다. 1964년 정부가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하자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휘 등과 이를 저지한다. 그러나 결국 1968년 신동아에서 낸 '차관' 관련 기사가 문제가 돼서 동아일보에서 해임됐다. 이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최석채는 "신문은 편집인의 손에서 떠났다"는 말로 천관우의 해직을 개탄했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창립하여 김재준 목사, 이병린과 함께 공동대표로 추대되었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대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유신 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사회 활동이 더 이상 어렵게 되자 자택에 칩거하면서 역사 연구에 매달렸다. 이 시기 <고조선사 삼한사연구>, <가야사연구>, <인물로 본 한국 고대사> 등을 저술했다.[10] 특히 <가야사연구>는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를, 주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꾸어 봄으로써 식민사학이 제공한 한국사의 구도를 깰 수 있는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가야 7국 및 마한 정벌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바꾸어 해석한다는 것인데, 원래는 이병도가 시사한 것을 천관우가 저서 <가야사 연구>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적으로 완성시킨 것. 다만 너무 나간 나머지 임나일본부를 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백제의 군사령부로 해석하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이럴 경우 임나일본부 주요 인사들이 왜인이라는 점이나 그 인사권을 왜가 쥐고 있었다는 점, 백제 군사령부라면서 임나와 짜고 끝끝내 본국 백제의 말을 듣지 않고 버티는 현상이 설명이 안 된다는 지적이 따른다. 하지만 이 주어의 전환이란 발상 자체는 해석이 대단히 까다로워서 '복어'로 비유하던 일본서기의 해석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김현구나 노중국, 이도학, 이희진 등의 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다.
하지만 1981년 5월 14일 발족한 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 회장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치하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 국정 자문위원 등의 공직을 맡으면서 민주화 진영은 물론 언론인들로부터도 변절자로 몰렸다.[11] 그것도 꽤나 거물로, 유신시기까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5공시대에 변절한 대표적인 인물 윤천지강 중 천이 그의 차지였다. 천관우 본인은 훗날 5공에 협력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아마 당시 그의 생활이 몹시 좋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역사학회의 학회 월례비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정론직필을 찾아서 - 제천 출신 언론인 천관우(충북일보)
1991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221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12]
3. 여담
고집이 매우 세 별명이 천고집, 만고집이었다고 한다.학자, 기자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게 키 180cm에 몸무게 100kg이 넘는 거구였다. 지금도 대단한 거구인데 당시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거인이었을 듯.
[1] 양력 7월 22일.[2] 군수공파(郡守公派) 16세 우(宇) 항렬.[3] 영양천씨대동보 군수공편 1권 508쪽에는 천명선(千命善)으로 등재되어 있다.[4] 민영식(閔榮植)의 딸이다.[5] 족보에 기록된 이명은 천규하(千圭夏)이다.[6] 현재는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졌다.[7] 천관우는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던 안재홍과 만나면서 실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안재홍은 천관우의 형 천중우(千中宇, 1913. 1. 5 ~ 1978. 11. 1)와 동서 사이였다.[8] 1952년 4월 20일 양우정 당시 국회의원에 인수되어 '동양통신(東洋通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전두환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처로 1980년 12월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흡수되었다.[9] 한 명은 천관우고 한 명은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김인호다.[10] 같은 언론인 출신 역사학자이자 절친 송건호가 근현대사 연구에 이름을 남긴 것과 대조되는 부분.[11] 아이러니한 것은 5공 정권을 도운 천관우를 "변절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언론인 송건호(한겨레신문 창립자)는 천관우의 권유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12]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