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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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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연
(1960~1965)
제2대
신용호
(1967~1975)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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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1991
/1992~1994)
제4대
이도선
(1994~1997)
제5대
신창재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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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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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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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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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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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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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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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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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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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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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2022
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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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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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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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
성악가
2023
이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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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74><colcolor=#ffffff> 교보생명그룹 창업자 · 제2대 회장
신용호
愼鏞虎[1]
.]|Shin Yong-ho
파일:교보 신용호.jpg
출생 1917년 8월 11일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2]
사망 2003년 9월 19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거창 신씨 (居昌 愼氏)[3]
대산(大山)
직업 기업인
부모 아버지 신예범, 어머니 류매순
형제자매 신일선, 신용율, 신용원, 신용복
남동생 신용희
배우자 유순이
자녀 장녀 신영애
차녀 신경애
장남 신창재
차남 신문재
1. 개요2. 생애3. 가족4. 경력

[clearfix]

1. 개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대한민국기업인. 교보생명그룹 창립자.

2. 생애

1917년 8월 11일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에서 부친 신예범(愼禮範, 1884. 8. 7 ~ 1962. 9. 8)과 모친 문화 류씨 류매순(柳梅順, 1883. 2. 8 ~ 1962. 5. 9)[4] 슬하 6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계속 감옥에 있는지라 어머니가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7살 때는 폐병에 걸려 죽는다는 선고도 받았으나 10살 때 다행히 즈음 병이 호전됐지만 학교엔 가진 못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데다 여자형제가 없는 집안에 형들이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가 살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학가를 꿈꿨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사업의 길을 걸었다. 약관[5]이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 이어 중국으로 건너가 양곡 수송 사업을 벌였지만 광복과 함께 10년 간 닦은 노하우를 버리고 맨손으로 귀국했다. 귀국후 첫번째 사업으로 전라북도 군산시에 ‘민주문화사’란 출판사를 세웠으나 외상 책값이 회수되지 않아 바로 해체됐다.

수차례 사업실패한 뒤 중국에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한국에는 돈이 없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강한 교육열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한국 어머니, 아버지들의 교육열은 무형원자재인 것이다. 결국 생·로·병·사 중 유일하게 보험이 빠져 있는 ‘생’ 부문에 교육보험을 끼워넣어 상품화하기로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먹고 살기도 바쁜데 1940년대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보험은 오로지 수탈 방식이었다. 더욱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미치지 못해 보험에 들 여유가 없었다.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정부가 보험업을 재개시켰으나 전쟁 직후인지 기존 생명보험 회사들은 대부분 휴식기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20대 이상 성인남성의 열의 여덟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6] 그때 그의 재기가 번뜩였다. 무작정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서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가입하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권유한 것이다.

창업 초기에는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지 못했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재의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먼저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창립했다. 교육보험업계의 시작이었다. 교육열을 자원으로 만든 상품이었고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도 거의 전무해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무원을 끊임없이 설득한 결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상호변경 승인을 얻어 ‘대한교육보험’을 만들었다.

종로 1번지에 위치한 교보생명 본사 건물을 시작으로 각지에 세워진 교보빌딩마다 지하서점을 조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처음 서점을 들여놓으려 했을 때 회사의 고위 간부들은 그다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만일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당시 허가 관청인 재무부도 크게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과 독서가 중요하다는 자신의 신념으로 빌딩 지하 1층마다 서점을 만드는 방안을 밀어붙였고, 이 서점들은 한국 최대의 오프라인 서점이자 도서 유통 회사인 교보문고로 발전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대 들어 늘어난 경제성장과 함께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때가 되면서 보험만으로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변해가는 고객 요구에 따라서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의 비중이 늘어났다. 교육보험만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결국 '교보생명’으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당시 급격하게 성장한 삼성생명에 밀려 교보생명은 결국 1위를 내주고 말았다.

77세가 되던 해 회사 정기건강 검진에서 간 기능에 이상한 징후가 발견됐다. 병명은 담도암. 수술후 그는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2개월이나 어두운 곳에서 지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후 재활물리치료를 받으면서 반년 만에 골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근력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1990년대 후반까지 업무를 보고받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러나 8년 뒤 완치된 암이 다시 간으로 전이되었다.

결국 2003년 9월 19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였다.

3. 가족

형제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을 했는데, 6형제 중 교보생명 창업을 도운 막내 동생인 신용희 전 회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애국운동에 몸을 실었다. 물론 기업을 창업하고 크게 키워 정도경영을 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일조하여 애국하는 것이니, 6형제 모두 애국자인 셈.

맏형인 신일선은 1932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소작권 이전 반대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바 있고, 이 행적으로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광복 후에는 청년 노동운동을 했다. 그의 장남인 신동재(愼東宰, 1931. 4. 26 ~ 2006. 12. 30)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2000년까지 교보생명의 부동산관리 회사인 교보리얼코의 회장을 지내왔다.

둘째형인 신용율(愼鏞律, 1908. 3. 19 ~ 1953. 5. 13)도 형과 같이 항일운동에 몸을 담았으며, 그의 차남인 신평재(愼平宰, 1936. 12. 7 ~ )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現교보교육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한일은행 상무로 일하다가 1991년부터 창업주의 제의로 교보생명 사장 등을 맡고 있다.

셋째형 신용원(愼鏞源, 1911. 8. 11 ~ 1995. 4. 9)은 일본에 있는 도쿄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항일음악가로 활동하던 중 납북당했다. 넷째형 신용복(愼鏞福, 1913. 6. 2 ~ 1950. 7. 30)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생명 지사장을 맡았다.

막내동생인 신용희(愼鏞羲, 1921. 2. 19 ~ 2012. 5. 2) 전 회장은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은행에서 일해왔으며, 한국전쟁 이후 신용호 창립자를 도와 같이 일했다. 교보생명 창립 후에는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외아들인 신인재(愼麟宰, 1966. 11. 8 ~ ) 보드웰 인베스트먼트 사장과 함께 교보생명 지분을 13.25% 갖고 있다. 신인재 사장은 고 신용호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받은 장남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 뜻을 거부하며 자신의 길을 갔다고. 현재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무선인터넷솔루션 회사인 필링크의 대표이사 직함도 얻게 되었다.

4. 경력



[1] 초명은 愼[2]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 검찰총장을 지낸 신승남과 독립유공자 신원범도 옆 동네인 노노동마을 출신이다.[3] 통례공파 32세 용(鏞) 항렬.[4] 류경규(柳璟圭)의 딸이다.[5] 만으로 20세가 되는 해를 뜻한다.[6]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래왔다. 당시에는 담배를 안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