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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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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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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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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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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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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문 감독상
제11회
(1975년)
제12회
(1976년)
제13회
(1977년)
변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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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왕십리)
임권택
(낙동강은 흐르는가)
제12회
(1976년)
제13회
(1977년)
제14회
(1978년)
임권택
(왕십리)
임권택
(낙동강은 흐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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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1982년)
제19회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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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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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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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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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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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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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권택
(서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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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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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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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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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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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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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1986년)
제26회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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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임권택
(티켓)
임권택
(연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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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1992년)
제31회
(1993년)
제32회
(1994년)
김호선
(사의 찬미)
임권택
(서편제)
장선우
(화엄경)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금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2년
이름 임권택
분야 영화
금관문화훈장(1등급)
파일:문화보관.jpg
연도 1989년
이름 임권택
분야 영화
보관문화훈장(3등급)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맹호장 정장.pn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6년
이름 임권택
분야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체육훈장 맹호장(2등급)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임권택
林權澤 | Im Kwon-taek
파일:임권택.png
출생 1934년 12월 8일 ([age(1934-12-08)]세)[2]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 단광리
(現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본적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삼태리[3]
본관 나주 임씨 (羅州 林氏)[4]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가족 아버지 임종영(1913 ~ 1966)[5]
어머니 전주 이씨(1912 ~ ?)
배우자 채령(1951년생, 1979년 결혼)[6]
장남 임동준(1980년생)[7]
차남 임동재(1981년생)[8]
학력 월평국민학교[9] (졸업)
장성중학교 (졸업)
광주숭일고등학교 (중퇴)
직업 영화감독, 각본가
데뷔 1962년 영화두만강아 잘 있거라
활동 1962년 - 2015년
종교 천주교 (세례명: 바오로)[10]
훈장 금관문화훈장 (2002년 수훈)
보관문화훈장 (1989년 수훈)
체육훈장 맹호장 (2016년 수훈)

1. 개요2. 생애3. 작품 특징
3.1. 흑역사
4. 필모그래피5. 수상6. 논란 및 사건 사고
6.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망작 연출6.2.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 배우에게 노출신 강요
6.2.1. 당시 미성년자 이상아(길소뜸)6.2.2. 당시 미성년자 이효정(춘향전)6.2.3. 안소영6.2.4. 김호정6.2.5. 여담
7.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임권택은 압도적인 재능의 소유자다. 난 한국 영화라고 하면 임권택을 먼저 떠올린다.[11]
하스미 시게히코
임권택의 영화는 그 자신이자 한국 영화다. 그의 영화는 한국 바깥에서 성립하지 않는 동시에, 한국 영화의 그 누구와도 닮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12]
정성일
대한민국영화감독, 각본가, 제작자.

서편제〉로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춘향뎐〉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에 진출하며, 〈취화선〉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본상(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 영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2. 생애

1934년[13]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現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의 소지주 가정에서 아버지 임종영(林鍾英)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만수(李萬秀)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소지주였으며 부친 임종영은 교사로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삼촌의 영향으로 8.15 광복 이후 좌익 활동에 입문하여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하여 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고, 고모부와 고종사촌들도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삼촌은 토벌대에 잡혀 8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후 6.25 전쟁 때 총살 당했고 부친은 건강이 나빠져 하산 후 자수했다.

임권택 자신과 남동생은 남면의 할아버지 집으로 맡겨져 광주숭일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위와 같은 일들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빨치산 가족'이라는 낙인을 이기지 못한 탓에 18세 때 가출한 후 부산으로 가서 부두 및 시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군화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휴전 후 군화 중개사들이 '신생영화사'를 차렸고 1955년 임권택은 신생영화사 측의 제안에 따라 상경하여 〈장화홍련전〉(감독 정창화)의 스탭으로 들어가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소품부, 연출부를 거쳐 1960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을 시초로 조감독에 올랐고, 해당 영화를 만든 한흥영화사 사장 최관두가 임권택이 조감독으로서 만든 〈햇빛 쏟아지는 벌판〉 등의 예고편을 보면서 임권택에게 연출 제안을 했고, 그 길로 1962년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 데뷔했다.

초기에는 멜로, 액션, 무협, 스릴러, 코미디 등 여러 장르를 섭렵하다 1973년 〈잡초〉를 시초로 진지한 장르를 처음 구사했고, 1997년, 제8회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예술, 문화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단체인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MPAS)의 감독 지부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3. 작품 특징

길소뜸〉을 보면, 남자 주인공(신성일)이 옛 연인(김지미)을 만나고 와서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 있다. 그 옆에서 남자 주인공의 눈먼 아내가 묻는다.

"당신, 그 여자 만났죠?" / "아, 참, 그 사람..."

임 감독은 장면을 끊지 않고 길게 끄는 롱테이크로 이를 찍었는데, 이에 관해 정성일 비평가는 뒤통수를 후려맞는 듯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ㅡ "제가 책에서 읽은 롱테이크 미학은 인물들 표정을 길게 잡아 교감을 보여주고 어쩌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아내는 화면에 안 잡히고 남자는 아내에게 등만 보여요. 제가 임 감독님께 물었어요. '이걸 롱테이크로 찍은 이유는 뭡니까?' 그러니 감독님이 그랬어요. '한국 사람의 염치죠. 부끄러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 그래서 그렇게 찍었어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웠어요. 내가 아는 지식이란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나는 영화만 봤지, 영화가 삶을 찍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예요."
정성일과 《한겨레》 인터뷰 中 [14]
고백하자면, 나는 임권택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이상할 정도로 불편했다. 서구 영화로 훈련받은 나에게 임권택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그런데도 그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 온전한 한 편의 영화로서 스스로 성립한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중략) 임권택은 나와 마찬가지로 서구 영화에서 시작하였지만, 그는 어느 순간 서구 영화의 모든 규칙과 문법들이 한국을 담아내는 데 불편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의 예술은 거기서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진화했고, 영화를 서구 영화에 기대서 문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점점 외면한 만큼, 한국이라는 내면의 체계를 향해 점점 문을 열어간 사람이다. 임권택은 자꾸만 질문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의 개입을 통해서 임권택 영화가 만들어내는, 혹은 기대어 있는 더 커다란 체계를 본다. 그렇게 임권택은 서구적 모더니티에 매료된 김기영·신상옥·유현목·이만희가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쇼트(shot)와 씬(scene)을 이어가는 매듭으로서의 한국인의 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그 안에서 생각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의 이미지가 지리적이고, 자기의 영토를 지니고 있으며, 그 영토의 역사 안에 있는 것은 단지 등장인물만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를 이끄는 쇼트와 씬 안으로도 예(禮)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정성일, 임권택과의 대담집 서문 中 [15]
전술하듯 1962년에 데뷔한 이후 초기 10여년 동안 멜로, 뮤지컬, 무협, 액션, 코미디, 스릴러 등 잡다한 장르를 총망라하며 미국, 홍콩 영화들을 모사/초월하고자 했으며, 1970년대까지는 주로 반공, 반일 영화가 많았다. 생계와 흥행을 위해 잡다한 저예산 반공·반일 영화를 양산하던 가운데, 1970년대 초에 우연히 해외 영화제에 참가하려 난생 처음 외국을 나갔다가, 한국어가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 풍경에 충격을 받고, 자신이 주목해야 할 것은 외국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1979년 〈족보〉를 전후하여 임권택 감독은 변질된 유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역사적 전통, 한국 현대사의 여러 비극에서 비롯된 한(恨) 등의 주제를 탐구해 나갔다. 1986년 영화법 개정으로 규제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강수연이 출연한 〈씨받이〉라는 영화를 만들며 한국을 대표하는 문예영화·예술영화 감독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19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만들면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라는 든든한 파트너를 만나서는 경력의 최전성기에 접어들었다.

작품마다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며 다채롭게 경력을 채운지라, 경력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특색이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1980년대 이후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롱테이크(ex.〈서편제〉의 3분 롱테이크)플래시백(과거로 회상) 등의 기법 등을 자주 사용하며, 이미지와 소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특징을 보인다. 한편, 최근 한국영화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성애를 묘사한다는 특징도 보이는데, 이는 1980년대 3S 정책을 통과한 많은 영화감독의 공통점인지라 임권택만의 특징으로 꼽기는 어렵다.

몇몇 작품들은 소설가 이청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데, 이 두 사람은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또한 철학자 김용옥과도 친분이 깊어, 몇몇 영화의 각본 구성을 김용옥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정성일 평론가 오디오파일#

3.1. 흑역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이 벌어먹고자 1960년대에 마구잡이로 찍어 만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물론 당시는 반공 영화가 국책사업이었다.)2007년도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Q:초반에 만드신 50여편에 대해선 여전히 부정적이세요?(질문자)
A:당연히. 그때도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고통스러워요.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그 50여편 중에 내가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는 한편도 없어요.(임권택)

워낙 다작을 해서인지 한 인터뷰에서 웃지 못할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Q: 정말 많은 영화를 만드셨는데, 본인 작품을 다 기억하시는가?
A: 전에 부인이 거실에서 흘러간 영화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같이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재미없는 걸 만든 거야? 했는데 엔딩 크레딧 보니 내 작품이더라.
물론 이 발언은 반쯤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게다가 그는 영향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 영화는 안 본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재미없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서 크레딧까지 확인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1960년대 작품을 자신의 필모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데뷔 초기인 1960~1970년대에는 양산형 반공물, 반일물만 10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1년에 몇 편씩 만들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지금보다 한참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해외 영화 수입을 막기 위해, 영화법을 재정해 영화배급사를 20개로 한정하고 이 회사들이 국산영화 4편을 만들어야 해외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었다.[16] 당시 기술력, 기획력,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업계는 국산영화는 대충 저예산으로 만들고 수입영화를 흥행시켜 국산영화 제작비까지 회수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런 환경상 1950년대 임화수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반공, 반일 전쟁영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17] 그런 양산형 국산영화를 찍어내던 게 바로 임권택 감독. 임권택은 정식으로 영화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전혀 없고, 영화 스탭부터 시작해서 조연출을 거쳐 감독이 된 이후 다작으로 영화를 워낙 많이 만들다 보니 지금의 연출 능력이 생겼다고 술회한 바 있다. 많이 만들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어보면서 스스로 배운 셈이다.

이러한 영화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선 임권택 가족의 내력도 간과할 수 없는데,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서중석 저)>와 2014년 정성일 칼럼 등을 종합해 보면 전술하듯 임권택의 선친이 좌익 활동을 했던 적이 있어서 연좌제 대상에 올랐던 적 있었던 터라 임권택은 "나도 반공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으로 봤으면 한다"라는 자기방어적 차원에서 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렇기에 하길종 등처럼 유신 체제의 영화 통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도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 보면 감독이 감독이니만큼 특출난 부분도 많기 때문에 현대 들어서 연구자들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다만 본인은 이런 재평가 자체도 꽤나 껄끄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4. 필모그래피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81818><tablebgcolor=#181818>
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전 제작),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90deg, #181818, #181818, #181818, #18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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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아 잘 있거라 (1962) 전쟁과 노인 (1962) 망부석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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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안 팔려 (1963) 신문고 (1963) 욕망의 결산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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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매 선생 (1964) 십년세도 (1964) 영화마마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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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지각생 (1964) 단장록 (1964) 전장 여교사 (1965)
파일:비속에지다.png 파일:왕과상노.png 파일:닐니리.png
비속에 지다 (1965) 왕과 상노 (1965) 닐니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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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창을 울린 옥이 (1966) 나는 왕이다 (1966) 망향천리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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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1967) 풍운의 검객 (1967) 요화 장희빈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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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같은 사나이 (1968) 돌아온 왼손잡이 (1968) 몽녀 (1968)
파일:십오야의복수.png 파일:황야의독수리.png 파일:비나리는고모령.png
십오야의 복수 (1969) 황야의 독수리 (1969) 비나리는 고모령 (1969)
파일:사나이삼대.png 파일:상해탈출.png 파일:신세좀지자구요.png
사나이 삼대 (1969) 상해탈출 (1969) 신세 좀 지자구요 (1969)
파일:뇌검번개칼.png 파일:월하의검.png 파일:애꾸눈박.png
뇌검 번개칼 (1969) 월하의 검 (1969) 애꾸눈 박 (1970)
파일:이슬맞은백일홍.png 파일:비나리는선창가.png 파일:그여자를쫓아라.png
이슬맞은 백일홍 (1970) 비나리는 선창가 (1970) 그 여자를 쫓아라 (1970)
파일:속눈섭이긴여자.png 파일:밤차로온사나이.png 파일:비검.png
속눈섭이 긴 여자 (1970) 밤차로 온 사나이 (1970) 비검 (1970)
파일:원한의거리에눈이나린다.png 파일:나를더이상괴롭히지마라.png 파일:둘째어머니.png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1971) 나를 더이상 괴롭히지 마라 (1971) 둘째 어머니 (1971)
파일:요검.png 파일:30년만의대결.png 파일:원한의두꼽추.png
요검 (1971) 30년만의 대결 (1971) 원한의 두 꼽추 (1971)
파일:명동삼국지.png 파일:돌아온자와떠나야할자.png 파일:명동잔혹사.png
명동삼국지 (1971)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1972) 명동잔혹사 (1972)
파일:삼국대협.png 파일:장안명기오백화.png 파일:잡초(임권택).png
삼국대협 (1972) 장안명기 오백화 (1973) 잡초 (1973)
파일:증언.png 파일:대추격.png 파일:연화(임권택).png
증언 (1973) 대추격 (1973) 연화 (1974)
파일:울지않으리.png 파일:연화(임권택).png 파일:아내들의행진.png
울지 않으리 (1974) 연화(속) (1974) 아내들의 행진 (1974)
파일:어제오늘그리고내일.png 파일:왜그랬던가!.png 파일:낙동강은흐르는가.png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975) 왜 그랬던가! (1975) 낙동강은 흐르는가 (1976)
파일:아내(임권택).png 파일:왕십리(임권택).png 파일:맨발의눈길.png
아내 (1976) 왕십리 (1976) 맨발의 눈길 (1976)
파일:옥례기.png 파일:임진왜란과계월향.png 파일:저파도위에엄마얼굴이.png
옥례기 (1977) 임진왜란과 계월향 (1977)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1978)
파일:가깝고도먼길.png 파일:상록수.png 파일:족보(임권택).png
가깝고도 먼 길 (1978) 상록수 (1978) 족보 (1978)
파일:신궁.png 파일:내일또내일.png 파일:깃발없는기수.png
신궁 (1979) 내일 또 내일 (1979) 깃발 없는 기수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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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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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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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코 (1980) 복부인 (1980) 만다라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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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 (1981) 아벤고 공수군단 (1982) 안개마을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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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자식들 (1982) 나비품에서 울었다 (1983) 불의 딸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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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4) 길소뜸 (1985) 티켓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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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받이 (1986) 연산일기 (1987) 아다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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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 아제 바라아제 (1989) 장군의 아들 (1990) 장군의 아들 2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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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1991) 장군의 아들 3 (1992) 서편제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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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994) 축제 (1996) (노는계집 창) (1997)
파일:춘향뎐.png 파일:취화선(임권택).png 파일:하류인생.png
춘향뎐 (2000) 취화선 (2002) 하류인생 (2004)
파일:천년학.png 파일:달빛길어올리기.png 파일:화장(임권택).png
천년학 (2007) 달빛 길어올리기 (2011) 화장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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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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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개된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부다.

5. 수상

<rowcolor=#fff> 연도 영화제/시상식 부문 작품
1976 제1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왕십리
1977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낙동강은 흐르는가
1978 제17회 대종상 감독상 족보
1981 제20회 대종상 감독상 만다라
1983 제1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안개마을
1986 제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길소뜸
제25회 대종상 감독상 티켓
1987 제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제32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씨받이
제26회 대종상 감독상 연산일기
1991 제2회 춘사국제영화제 감독상 개벽
제12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1993 제1회 상하이국제영화제 감독상 서편제
제1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제4회 춘사국제영화제 감독상
제14회 청룡영화상 대상
제31회 대종상 감독상
1996 제17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축제
1997 제3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2000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춘향뎐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
제45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002 제23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취화선
제55회 칸 영화제 감독상
2005 제5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곰상
2007 제10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감독들이 뽑은 최고의 감독상 천년학
2015 제9회 아시안 필름 어워즈 공로상
2016 제21회 춘사국제영화제 공로상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영화인상
2021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국내 3대 영화상인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대종상영화제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총 13회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는 대한민국 영화감독 중 최다 기록으로, 2위 기록인 6회 수상과는 무려 더블스코어 이상의 차이. 또한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걸쳐 감독상을 수상한 유일한 감독이다.

1993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동양인 감독으로서 2번째로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첫번째로 수상받은 이가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였으며, 1990년 한국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 구로사와와 인터뷰를 할때도 한국인 감독으로 잘 알고 영화를 꾸준히 본다고 한 게 임권택이었다.[27]

2002년 7월 문화예술분야 최고등급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5년 2월 12일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경쟁부문 수상작에게 주는 황금곰상은 도금한 것이지만, 이 명예 황금곰상은 100%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임권택이 황금곰상을 들고 있는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크기도 상당히 크다. 베를린 영화제 측에서 상을 주면서 만약 팔거라면 우리한테 되팔라고 농담을 했었다고.. 현재 이 황금곰상은 부산의 임권택영화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아다다는 1988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21년 10월 6일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6. 논란 및 사건 사고

6.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망작 연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총감독을 맡았으나 그간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망작을 연출하고 말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본인은 예산(200억 원)이 부족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들여다 보면 돈이 부족하진 않았을 것 같은 퀄리티였다.

6.2.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 배우에게 노출신 강요

미성년자를 포함해 출연자 강제 노출신 촬영 전적 때문에 21세기 들어 문제시된 케이스가 여럿 존재한다.

6.2.1. 당시 미성년자 이상아(길소뜸)

가장 공론화된 케이스는 1986년 영화 길소뜸으로, 촬영 당시 13~14세 즉 중학교 2학년였던 이상아에게 강제로 전라노출신(뒷모습)을 촬영하게 한 사실이 세바퀴를 통해 밝혀졌다. 처음에는 그런 걸 촬영할 리가 있겠느냐며 이상아 배우와 배우의 어머니를 속이며 촬영에 들어갔으나 이후 촬영이 진행되어 이상아의 보호자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 남성 스태프들이 그녀를 둘러싸며 전라노출신을 찍는다고 놀렸고, 이에 사실을 알게 된 이상아가 이를 거부하자 "전라 베드신 안 찍으면 찍은 장면 다 물어내야 된다"라고 협박하여 미성년자 베드신누드 노출씬을 찍었다. 관련기사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세간은 물론 네티즌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6.2.2. 당시 미성년자 이효정(춘향전)

길소뜸 케이스는 영화계 여성 출연자 부당대우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생긴 이후에 폭로되어서 논란이 컸지만 2000년 영화 춘향뎐은 조금 애매한 입지에 있다. 당사자가 당시 일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다가 일찍 은퇴해버렸고 이미 제작 당시 논란을 예술성으로 잠재워버리고 완성한 탓에 일사부재리적 느낌으로 다시 죄를 묻는 움직임이 적었기 때문이다. 다만 논란 자체는 존재했고 당시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 이효정은 영화 촬영 당시 16세 미성년자였는데 영화 상에서 베드신과 노출신 분량이 있어서 해당 씬을 촬영 당시 많이 힘들어 했다고 밝힌 바가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영화라기 보다는 길소뜸 케이스의 보조 증거로 많이 활용되는 정도다.

6.2.3. 안소영

1986년 영화 티켓길소뜸이나 춘향뎐처럼 예술 영화로 포장되던 작품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호스티스 영화에 해당해 메스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배우의 후일담 때문에 논란의 케이스로 기록되었다. 주연 중 하나로 출연했던 배우 안소영애마부인 등 에로영화 출연 이후 힘든 시기를 겪다 임권택이 자신을 예뻐해주자 자신을 배우로 생각해주는 사람을 만나 좋았다고 회고 했다. 그러나 티켓에서 역시 임권택이 베드씬을 위해 벗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임권택 앞에서 엉엉 울었다며 "어떻게 감독님마저 날 벗기려고 하냐"고 해 배우 김지미가 해당 씬을 대신하며 베드씬을 면했다고 한다.

6.2.4. 김호정

상술한 사례들은 모두 20세기 구시대 케이스로서 '어르신 왜 그러셨어요' 정도로라도 넘어갈 수 있었다면, 21세기 들어 2014년에 촬영한 마지막 영화 화장에서 마저 사전미협의 노출 강요 논란이 있었다. 배우 김호정의 성기 노출 장면이 사전 합의 없이 현장 결정으로 촬영되었던 것이 드러나며 다시금 논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호정 본인은 당황했지만 요청에 따라 담담히 촬영했다며 회고했으나, 이미 임권택이 사전고지 없이 노출씬을 촬영하는 행태가 알려진 이후였기 때문에 논란이 이어지게 되었다.[28]

6.2.5. 여담

이런 논란의 여파로 인해 본인이 연출을 은퇴한 후에도 녹차의 중력 같은 다큐멘터리가 나올 정도로 기본적으로는 영화계의 존경받는 감독으로 남아있지만 상술 논란의 영향으로 공개적으로 존경을 표하기는 어렵게 됐고, 대중들 사이의 유명세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완벽한 예술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고용 감독으로서 엄청난 다작을 하다가 개중에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는 영화들이 나왔던 것인데, 21세기에 들어 예술 영화를 찍는 영화계 큰 어른이라는 이미지만 받아들였던 대중에게는 논란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중의 반응이 이렇다보니 영화인은 물론 영화 애호가들도 아제 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취화선 등 영화에 대한 언급이 아니고서는 개인으로서의 임권택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다소 꺼리고 있다. 당연하지만 알고리즘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구글에도 관련 검색어로 논란 사실이 쉽게 뜬다.

7. 참고 자료



[1] 제14회 시상식부터 대상 신설[2] 호적상으로는 1936년 5월 2일생([age(1936-05-02)]세)이다.[3] 나주 임씨 집성촌이다.[4] 장수공파 30세손 ○택(○澤), ○순(○淳) 항렬.(족보)[5] 林鍾英, 1913.2.8. ~ 1966.4.12.()[6] 1951년생 배우. 임권택과는 1973년 혼인 신고를 한 후 1979년에 결혼식을 올렸다.[7] 영화 프로듀서다.[8] 예명은 권현상이며 배우로 활동 중이다.[9] 現 월평초등학교[10] 2012년세례를 받았다.[11] 중앙일보 인터뷰 中[12]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 임권택·정성일 대담, 현실문화연구, 2003, p.16 / 가독성을 고려해 윤문됨.[13] 네이버 프로필은 호적상 생년인 1936년생으로 기재되었다.[14] 인터뷰 원문[15]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 임권택·정성일 대담, 현실문화연구, 2003, p.16~17 / 가독성을 고려해 윤문됨.[16] 출처 -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의 2004년 인터뷰.[17] 이때의 전쟁영화는 말그대로 진짜 전쟁통인 것처럼 찍었다. 특수기술 따위가 있을리 없어 전쟁 영화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 대부분은 진짜 실탄과 폭탄을 썼고, 그로 인해 사람이 다치는 것은 예사일이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독고영재의 사례#.[18] 후에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서도 패러디(...)되었다.[19] 다만 근본적으로 반공 영화이기 때문에 인민군나쁘고, 국민방위군 사건 같은 건 일절 나오지 않는다.[20] 당시 한국에서 개봉했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록했던 영화는 1979년 작인 성룡 주연의 홍콩 무협영화 취권이었다. 당시 서울 98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참고로 1990년 엄청난 대박이던 영화인 서울 92만 관객이 본 사랑과 영혼 같은 영화와 견줘도 얼마나 대박인지 알 수 있을 듯. 다만 사랑과 영혼은 전국 350만 관객이 보면서 전국 관객 2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서편제가 좀 더 낮다.[21] 그래서 임권택도 제작비를 그리 많이 들지 않게 찍었다고 한다.[22] 하지만 상영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고, 접속은 롱런하고 호평이 많았던 반면, 이 영화는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반응이 좋지 않았다.[23] 당시에 이효정은 16세로 미성년자였는데, 길소뜸과 달리 짧지만 이건 직접 노출하고 나름 베드신도 소화했다.[24] 펀치 드렁크 러브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공동수상했다.[25] 김용옥은 위에 언급한 개벽과 장군의 아들의 각본에도 참여했는데, 여기에 얽힌 비화도 꽤 있다.[26] 서편제에서는 오정해의 한 관련 이야기에 치중해서 김규철의 고민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기서는 완전히 현시창.[27] 구로사와는 임권택 영화에서 베스트 3을 꼽으면서 만다라, 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을 언급했다.[28] 노출 장면 촬영과 관련해 강제 논란이 이는 이유 자체가 배우는 현장에서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입지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 논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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