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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3:41:39

알랭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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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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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77위78위79위80위
미셸 세로
미셸 드러커
라이무
81위82위83위84위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86위87위88위89위90위
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91위92위93위94위95위
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97위98위99위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역대 세자르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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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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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알랭 들롱
Alain Delon
파일:05ABE687-8674-453A-A35F-2CBC716CEE0C.jpg
<colbgcolor=#3B3C41> 본명 알랭 파비앙 모리스 마르셀 들롱
Alain Fabien Maurice Marcel Delon
출생 1935년 11월 8일 ([age(1935-11-08)]세)
프랑스 오드센 주 소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
[[스위스|]][[틀:국기|]][[틀:국기|]][1]
신체 178cm, 75kg
직업 배우
활동 1957년2017년
부모 아버지 파비앙 들롱(1904년 – 1977년)
어머니 에디트 아놀드(1911년 – 1995년)
배우자
/파트너
로미 슈나이더(1958년 – 1963년)
나탈리 들롱(1964년 결혼 – 1969년 이혼)
미레유 다르크(1968년 – 1983년)
로잘리 판 브레멘(1987년 – 2001년)
자녀 아들 안토니 들롱(1964년생)
딸 아누슈카 들롱(1990년생)
아들 알랭파비앙 들롱(1994년생)
데뷔 1957년 영화 'Quand la femme s'en mele'
서명
파일:알랭 들롱 서명.svg

1. 개요2. 생애3. 필모그래피
3.1. 영화
4. 사생활
4.1. 사건사고4.2. 안락사 이슈
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2019 Cannes Alain.jpg
2019 칸 영화제 스페셜 포스터
영화계의 영원한 표범[2]
프랑스배우.

장폴 벨몽도, 카트린 드뇌브, 잔느 모로, 장루이 트랭티냥과 함께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배우들 중 하나로 프랑스 밖에서도 인지도는 상당하며 이탈리아 영화사에도 영향력 있는 배우로 알려진다.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정작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서는 대중적으로 흥했다고 불릴 수 있는 작품이 없었다. 영어를 배워 미국영화에 출연 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 미국 진출에 실패로 미국 내 인지도는 떨어진다.[3]

2. 생애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오드센 주 소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재혼한 어머니와 살았으나 계부와 잦은 갈등을 빚었다. 유복하지 못했던 유년기 때문인지 가톨릭 학교를 다녔지만 행실 불량으로 여러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개중에는 신학에 대한 들롱의 적성을 알아본 교사들이 들롱에게 사제직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들롱은 14살에 학교를 떠나 짧은 기간 동안 계부의 정육점에서 일했다.
파일:Alain DELON en Indochine.jpg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파병 당시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복무 중인 사진. 가장 중앙에 앉은 젊은 군인이 알랭 들롱이다. 17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통신학교 기간병으로 근무 중 절도죄로 불명예 전역과 군 복무 연장의 선택에 놓이자 복무 연장을 택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인 1953~54년에는 베트남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1년간 파병되었다. 파병 기간 중 부대 지프를 훔쳐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여 영외로 여행을 떠났다가 운전 미숙으로 차량을 강물에 빠뜨린 혐의로 체포되어 11개월간 군 교도소 수감 후 해군 상병(Matelot de 1re classe)을 끝으로 해군에서 불명예 전역했다. 들롱은 군에서 수감 기간 포함 총 4년간 복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의 낙하산 부대원 역할을 연기한 적이 있어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 낙하산병이나 해군 특공대 출신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져 있기도 했지만, 실은 위에 나오듯 해군 육전부대인 Fusiliers marins 출신.[4]

불명예 제대 후 세계 각지를 떠돌다 1956년 프랑스로 돌아온 들롱은 돈을 벌기 위해 파리에서 웨이터, 짐꾼, 비서, 점원 등 갖은 잡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5] 이때 여배우 브리지트 오버와 친분을 쌓았고 이후 오버와 함께 칸 영화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미국의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1902~1965)에게 발탁되었다.

스크린 테스트 후 셀즈닉은 들롱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고 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온 들롱은 프랑스의 이브 알레그레 감독을 만나 고국에서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고 셀즈닉과의 계약을 파기한 후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1957년 <여자가 다가올 때>로 데뷔했다.[6] 이후 <사랑은 오직 한 길>,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 등의 로맨스 영화를 통해 인기를 얻고, 공전의 히트작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수없이 리메이크된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위험한 남자 "톰 리플리" 역을 맡아 다부진 몸과 매혹적인 눈빛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알랭 들롱의 이름값 때문에 소개돼서 히트친 영화도 있을 정도였다.[7]

다만 연기력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입이 떡 벌어질만한 거장 감독들의 작품들로 꽉 채워진 필모그래피인데도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적은 없다. 동시대 알랭 들롱과 함께 활동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스타들이 상을 휩쓸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수상 실적은 저조하고 본국인 프랑스의 대표적 시상식인 세자르에서도 전성기가 지난 뒤 중년의 나이에 남우주연상을 1회 수상한 것이 전부. 외모와 인기 때문에 연기력이 저평가되었다고 재평가하는 의견이 있다.
파일:tumblr_odwl3mzHTz1r23joco1_400.gif
영화 《태양은 가득히》 중

서늘하면서 퇴폐적인 특유의 매력으로 이후에는 주로 느와르에 출연했으며 독보적인 외모로 "프렌치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푹 눌러쓴 중절모, 깃을 세운 트렌치 코트를 입고 범죄자를 주로 연기했으며 이런 모습은 <한밤의 암살자>, <시실리안>, <암흑가의 두 사람>, <암흑가의 세 사람>, <볼사리노>, <고독한 추적> 등에서 볼 수 있다. 워낙 범죄자나 악역을 많이 맡다 보니 죽는 역할도 꽤 많다. 위 느와르 영화만으로 사망전대 멤버.

아마 어렸을 적 질풍노도의 시기 때문인지 들롱은 하류인생을 주로 연기했는데 실제로 젊은 시절 많은 굴곡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에 "알랭 들롱은 미남이다. 그러나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다. 그런 만큼 밑바닥 인생을 연기하면 매력이 살아난다"라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열심히 영어를 배워가며 시도한 미국 진출이 실패한 이후 프랑스로 복귀했으며, 프랑스 영화계와 다른 할리우드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1991년에 영화 <카사노바>에서 나이가 든 자코모 카사노바 역을 맡았는데 당시 최고 개런티급인 7백만 프랑을 받았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은 한물간 배우에게 무지막지한 개런티를 들인다며 제작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흥행 역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이후 1998년 <절반의 기회>를 끝으로 "프랑스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한 들롱은 영화 출연보다는 영화 제작과 복싱 프로모터로 더 활약했다.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현재는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당시 로망드 TV에 출연하여 귀화 및 이민 동기를 밝혔는데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재산 보호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와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8년에 <아스테릭스 : 미션 올림픽 게임>에서 백발이 성성한 시저 역으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었다.

2017년 5월 9일(현지시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공로상 격인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용납 가능한 범주를 넘은 막장 사생활로 인해 수상 반대 여론이 거세다. 온라인에서 수상을 철회하라는 청원에 2만 5천명 이상이 서명했으나 2017년 5월 19일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시상자는 그의 딸 아누슈카 들롱. 알랭 들롱은 "인생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요즘이라 사후에 받을 상을 지금 받는 것 같다"며 드물게 눈물을 보였다.

2019년 8월, 뇌졸중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고 현재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2021년 초 딸 아누슈카 들롱이 알린 바에 의하면 건강히 지낸다는 듯. 은퇴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8]

3. 필모그래피

3.1. 영화

<rowcolor=#ffffff> 개봉연도 제목 배역 이름 비고
1957 여자가 다가올 때 주연
1958 사랑은 오직 한 길 프란츠 로브하이너 주연
살며시 안아주세요 루루 주연
1960 태양은 가득히 톰 리플리 주연
로코와 그의 형제들 로코 파론디 주연
1961 더 조이 오브 리빙 울리세 체코나토 주연
1962 프랑스식 십계 필립 알랑 주연
태양은 외로워 피에로 주연
1963 레오파드 탄크레디 팔코네리 주연
지하실의 멜로디 프란시스 주연
1964 위기탈출 마르크 주연
노란 롤스로이스 스테파노 주연
검은 튤립 기욤 / 줄리앙 주연
1965 원스 어 씨프 에디 주연
1966 강 건너 텍사스 돈 안드레아 발다사르 주연
로스트 코맨드 필리페 에스클라비에 주연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쟈크 샤반-델마스 주연
1967 악마 같은 당신들 피에르 라그랑쥬 / 조르주 캉포 주연
한밤의 암살자 제프 코스텔로 주연
대모험 마뉘 주연
1968 아듀 라미 디노 바령 주연
죽음의 영혼 윌리엄 윌슨 주연
그대 품에 다시 한 번 다니엘 주연
1969 시실리안 로저 싸르테 주연
수영장 장폴 주연
1970 애정의 미로 시몬 주연
볼사리노 로시 시프레디 주연
암흑가의 세 사람 코리 주연
1971 미망인 장 라비뉴 주연
레드 선 갓치 ‘고쉬’ 킨크 주연
1972 트로츠키 암살 프랭크 잭슨 주연
인디안 썸머 다니엘 도미니치 주연
형사 에두아르 콜망 주연
1973 빅 건 토니 아르젠타 주연
스콜피오 로리에르 주연
암흑가의 두 사람 지노 주연
1974 볼사리노 2 로니 시프레디 주연
1975 르 지땅 위고 세나르 주연
형사 이야기 슈카스 주연
조로 엘 조로 주연
1976 부메랑 쟈크 주연
미스터 클라인 로베르 클라인 주연
1977 비밀 수첩 주연
1979 에어포트 79 주연
야전병원 장 마리 데스프리 주연
1980 테헤란 43 파치 주연
세 번째 희생자 미셸 제르포 주연
1981 형사 이야기 초우카스 주연
1982 암살자 마틴 테리어 주연
1983 최후의 방어선 쟈크 주연
1984 스완의 사랑 바론 드 샬루스 주연
우리들의 이야기 로베르 아브랑슈 주연
1985 핫 블러드 다니엘 프라트 주연
1986 페세지 장 디아즈 주연
1988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유진 그렝델 주연
1990 댄싱 머신 알란 볼프 주연
누벨 바그 루이 / 로저 레녹스 / 리차드 레녹스 주연
1992 카사노바 카사노바 주연
1997 낮과 밤 알렉상드르 주연
1998 하프 어 찬스 줄리앙 비냘 주연
2000 배우들 본인 주연
2002 루키노 비스콘티 백작의 시간들 본인 출연
2009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게임 시저 주연
2012 해피 뉴 이어, 엄마! 본인 출연

4. 사생활

얼굴에 걸맞는 바람둥이로 많은 염문을 남겼다. 대표적인 연인은 교제 당시 '유럽의 약혼자들'로 불렸던 독일의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 1958년 들롱은 영화 <사랑은 오직 한 길>에서 호흡을 맞춘 독일 영화계의 스타 로미 슈나이더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지만, 5년 여의 연애 끝에 후술할 니코와 아이의 등장으로 1963년 결별했다. 알랭 들롱의 말로는 이것이 그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다고. 둘은 결별 이후로도 함께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로미가 사망하기 전까지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고, 로미의 사후에도 알랭은 로미 관련 행사에는 늘 기꺼이 참석하며 그녀의 생전을 언급하며 칭찬하거나 그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유명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객원 멤버였던 니코와 외도해 1962년 태어난 실질적인 장남 크리스티앙 아론이 있다.그러나 알랭 들롱은 친자 인정 소송에도 불구, 현재까지도 아론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얼굴이 상당히 닮아 있어 확인 소송에서 친자가 아니라고 인정받았다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 게다가 여태 만났던 많은 여자들 중 니코에게만 유독 혐오 증세를 보였는데, 아마도 그 당시 자신의 첫사랑이자 연인이었던 로미와 헤어지게 된 계기이자 당시 여자친구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 피운 것도 모자라 임신시킨 것에 대해 많은 비난을 받아서라고 추측. 심지어 들롱의 부모마저 그 아이를 친손자로 인정해 마약 중독이던 니코 대신 아리를 돌봐주기 까지했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아리는 사진가로 일하다가 2023년 5월 헤로인 중독으로 타계했다. 향년 60세.

1964년부터 1969년까지의 짧지만 유일한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부인 나탈리 들롱[9]과의 사이에 공식적인 첫 아들 안토니 들롱이 있다. 할리우드에서 일하지만 부모의 명성에 비해 인지도나 인기는 그저 그런 정도. 대신 안토니 들롱의 딸인 앨리슨 르 보르게스가 알랭 들롱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다.[10]

가장 오래 사귀었으며 알랭 들롱이 가장 사랑했다고 말한 여인은 나탈리와의 이혼 후 약 15년 간 관계를 지속한 끝에 1982년 결별한 미레유 다르크. 결별 원인으로는 미레유의 지병 때문에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미레유와도 결별 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2017년 그녀가 사망하자 알랭 들롱은 굉장히 상심했다.

배우로 데뷔하기 전인 1950년대에는 "Paroles Paroles"를 함께 불렀던 가수 달리다와도 사귀었었다고 밝혔으며, 브리지트 바르도와도 염문이 있었지만 알랭 들롱이 직접 그녀와는 단지 절친한 사이일 뿐이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루머를 부정했다.

1987년부터는 네덜란드의 모델 로잘리 판 브레멘과 2001년까지 약 15년 가량 동거하며 1990년에는 딸 아누슈카 들롱을, 1994년에는 막내인 아들 알랭 파비앙 들롱을 얻었다.

2021년에는 히로미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과 파트너 관계라고 밝혔다. # #2 2023년에는 그의 자녀들이 그녀를 고소했다. 전화 통화와 이메일 및 우편물 감시와 개 학대 등으로 아버지를 괴롭혔다는 것이 이유다. # #2

4.1. 사건사고

1960년대 경호원 살인 사건(마르코빅 사건)의 용의자로 불려다니면서도 미디어와 공화국 대통령을 상대로 편지를 보내 자신이 무죄임을 항변한 바 있다. 사건 당시 영화를 찍고 있었다던 들롱의 증언, 결정적인 증거 부족과 함께 사건에 연계된 권력층 때문에 들롱은 7년 간의 공판 끝에 무죄로 판명이 났으나 살해당한 경호원이 남긴 편지[11]와 구속 직전까지 고려했던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들롱은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종결 후에도 마피아의 압력으로 경찰이 수사를 중단했다는 등의 무수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파트너였던 30살 연하의 로잘리 판 브레멘을 폭행해 갈비뼈와 코뼈를 부러트린 일이 공개되어 크게 비난받았다.[12] 또한 다른 아들 앙토니 들롱을 어릴 때 개 우리에 가두기도 했었다고 한다.[13]

한국 방문[14] 시기 프랑스 언론은 그에 대해 '아시아 방문하러 간다는데 거기서는 어떤 싸가지로 욕 먹나 봅시다.', '알랭 들롱의 행실은 유럽 밖에서도 돋보였습니다. 자기가 황제인 줄 알았다네요.'라고 보도하는 등 호의적이지 못했다. 옛날엔 미모와 출연한 영화의 흥행으로 엄청난 인기와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지금은 브리짓 바르도와 같이 프랑스에서 인성 파탄난 미친 노친네 취급을 받는다.그래도 배우로서의 업적을 가진 알랭 들롱의 취급이 더 나은 편. [15]

당시 통역을 맡은 이다도시의 책에 따르면 알랭 들롱의 줘터진 인성 때문에 관계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다도시에게 같은 나라 사람이니 좀 진정시켜봐라고 하기에 냅다 '나 한국 사람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귀화했으니 맞는 말이다.그래도 혼자 발광하다가 이다도시에게 사랑 때문에 한국에 왔냐면서 분을 풀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1992년 동아일보에서는 들롱을 '세련된 용모와 매너를 겸비한 배우'라고 보도한 바 있다. 지나가던 유럽인이 웃겠다..

정치적으로는 극우 성향으로 장 마리 르펜지지자 겸 친구이다. 그는 "르펜 대표와 그의 아버지가 그동안 홀로 싸워왔는데 이제 처음으로 그들이 혼자가 아니다. 그들은 프랑스인과 함께 있다"고 말하며 부녀를 지지하였다. 황당한 점은, 알랭 들롱은 비시 프랑스 정권의 홀로코스트 동조 만행을 고발하는 영화인 미스터 클라인(고독한 추적)을 주연 배우 겸 제작자로 찍은 바 있는데, 르펜이 속한 국민전선은 비시 프랑스를 우상화한다는 점이다.[16][17] 이외에도 들롱은 성향과 반대되는 영화를 몇 편 찍은 경력이 있다. '암흑가의 두 사람'이 대표적.

2024년 2월 말, 자택에서 무허가 총기 72자루와 탄약 3,000발이 경찰에게 압수되며 여전히 죽지 않은 한 성깔을 과시했다(...).# #2

4.2. 안락사 이슈

2022년 3월 10일 장남 안토니 들롱은 부친(알랭 들롱)이 안락사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안토니가 공개한 내용은 지금 즉시 진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2019년 뇌졸중 투병 당시 부자가 나눈 대화로, 더 심각해졌을 경우 안락사를 시행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2021년에 진행된 TV5 Monde 인터뷰에서도 안락사에 찬성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밝혔기에 경우에 따라 자신의 사망을 안락사로 진행될 가능성은 있다고 여겨진다. 단, 국내 언론에서 앞뒤 맥락을 자르고 다소 호들갑스럽게 보도한 경향이 있다. 본국인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서는 특별히 화제도 아니었고 프랑스에서는 차라리 아들 안토니 들롱이 화제였다.[18] 물론 실제로 안락사가 진행된다면 큰 이슈가 될 일이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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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9년 시민권 취득.[2] #[3] 그래서 미국 영화 매체에서는 굳이 쟁쟁한 할리우드 고전 배우들을 제치고 알랭 들롱을 전설적인 배우라고 거론하진 않는다. 물론 유럽 영화계에선 전설로 인정받기에 사생활 논란과 사람들의 반대에도 칸 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4] 프랑스 해군의 Fusiliers marins는 해군 육상 전투부대로 미국의 해병대에 해당하는 조직.[5] 한 때 갱단에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알랭 들롱은 사실 외모에 대한 찬사 외에도 인상이 그리 밝지 않아 어딘가 범죄형의 분위기를 띈다는 평도 함께 받기도 한다.[6] 정작 들롱은 미국에서 경력은 잘 안 풀렸다. 진출 후에도 레드 선 같은 이색작에도 출연했지만 미국에서 자체적인 인기는 끌지 못했다.[7]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가 있다. 한국에서 흥행은 했고 주제가도 유행했지만, 내용 자체는 히트치기에는 좀 난해한 영화였다. 순전히 알랭 들롱이 나온다는 이유로 보러 갔던 관객들이 많았던 편.[8] 실제로 뇌졸중 투병 전에 쥘리에트 비노슈가 출연하는 은퇴 영화가 계획되었으나 무산된 적이 있다.[9] 결혼 전 성은 바르텔미. 결혼 전후로 여러 명의 여인과 관계가 있었지만 결혼한 사람은 나탈리 한 명이다.[10] 이 딸은 안토니 들롱의 질풍노도 시절 생긴 사생아이며, 할머니 나탈리 들롱의 젊은 시절 판박이라는 이야기도 듣는다.[11]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알랭 들롱과 나의 부하 프랑수아 마르칸토니(당시 갱단의 일원)에게 물어달라."[12] 이 사실을 폭로한 아들 알랭파비앙 들롱은 사실 어머니 로잘리도 잔인하고 폭력적이기에 당시 '당해도 싸다'는 심정이었다고 설명했다.[13] 폭력적인 성향 때문에 자녀들과 사이가 멀어졌던 적이 있으나 관계를 회복했는지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사진을 자녀들이 sns에 올리기도 했다. 특히 딸 아누슈카와는 사이가 매우 좋아 그녀의 sns의 알랭의 젊은 시절 사진들이나 부녀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가득하다.[14] 199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코냑과 화장품 홍보차 한국을 방문하였고 팬 사인회를 가졌다.[15] 바르도는 영화 배우로서 커리어가 상당히 짧고 은퇴 이후 극성 정치 지지와 막장인성으로 당대보다 훨씬 저평가 당한다. 다만 비틀즈멤버 중 한명도 팬이었을만큼 영미권 인지도는 알랭 들롱보다 높다.[16] '미스터 클라인'은 1942년 7월 16-17일 나치의 지시 하에 프랑스 경찰이 13,152명의 유대인들(4,000명 이상의 아동 포함)을 일제검거해 물도 음식도 화장실도 없이 사이클 경기장인 벨디브(Vélodrome d'Hiver, 약칭 Vel' d'Hiv)에 우거넣다시피 임시 수용해 드레퓌스 사건과 함께 프랑스의 반유대주의 감정을 여실히 보여준 '벨디브 사건'을 다루었는데, 르펜은 이에 대해서도 망언을 하였다.[17] 사실 이건 들롱보다 감독 조셉 로지의 성향이 그렇다. 로지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연극을 사사하고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관련해 쫓겨난 매카시즘 피해자로 유럽에서 활동해야 했다. 때문에 굉장히 반골 정신이 강하고, 영국이나 프랑스 치부를 들춰내는 영화를 여럿 만들기도 했다.[18] 자신의 자서전을 발표하면서 공개했기 때문.[19] 태생은 이집트, 혈통은 이탈리아계다. 다수의 히트작들을 남겼으나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1987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운의 샹송가수.[20] 심지어 심한 여성 편력의 막장 사생활, 미남 아들이 영화배우가 된 것도 같다.[21] 동시대 활동한 최무룡리처드 버튼, 남궁원그레고리 펙을 닮았다는 평.[22] 그런데 호모포비아 중 유독 게이는 싫어하면서 레즈비언에겐 별 감정 없거나 관대한 성향을 가진 호모피비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