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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9:20:56

루이 파스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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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콜뤼슈
6위7위8위9위10위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16위17위18위19위20위
장 가방
21위22위23위24위25위
26위27위28위29위30위
엠마뉘엘 수녀
장 물랭
31위32위33위34위35위
볼테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크리스찬 카브롤
쥘 페리
41위42위43위44위45위
미셸 사르두
46위47위48위49위50위
하룬 타지프
에리크 타바를리
51위52위53위54위55위
다비드 두이예
장 자크 골드만
56위57위58위59위60위
달리다
레옹 지트론
니콜라스 윌로
61위62위63위64위65위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프랑시스 카브렐
66위67위68위69위70위
71위72위73위74위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77위78위79위80위
미셸 세로
미셸 드러커
라이무
81위82위83위84위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86위87위88위89위90위
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91위92위93위94위95위
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97위98위99위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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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
파일:557px-Louis_Pasteur,_foto_av_Paul_Nadar,_Crisco_edit.jpg
출생 1822년 12월 27일
프랑스 왕국 부르고뉴프랑슈콩테 주 쥐라주 돌
사망 1895년 9월 28일 (향년 72세)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근교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1814-1830).svg 부르봉 왕정복고1822~1830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7월 왕정1830~1848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2공화국1848~1852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2제국1852~1870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3공화국1870~1895)
직업 생화학자
분야 화학, 미생물학, 생화학, 세균학
학력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대학교
수상 럼퍼드 메달 (1856)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1869)
코플리 메달 (1874)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1881)
알버트 메달 (1882)
국립과학원 외국인 준회원 (1883)
에든버러 대학, 치료학 부분 카메론 상 (1889)
레이우엔훅 메달 (1895)
메지디 훈장 (?)
배우자 마리 로랑 (1849년 결혼)
자녀 5명(아들 1명,딸 4명)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Louis Pasteur Signature.png

1. 개요2. 생애3. 업적4. 기타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출신의 화학자이자 생물학자. 세균의 존재를 입증해 위생 관념을 진일보시키는 데 기여했다.

2. 생애

아버지는 무두장이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살았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이 대단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의 추천을 받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향수병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다. 이후 22살에 재입학하여 교원 시험에 합격하였고, 그대로 중학교 물리교사가 되려고 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들의 만류로 대학에 남아 학위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27살에 화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아내와는 만난 지 4개월만에 결혼했다. 이후 계속해 화학을 연구하여 결정의 모양, 분자구조, 편광 효과가 서로 관련됨을 증명하여 명성을 얻었고 생물만이 광학적 비대칭 화합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정립해 분자비대칭연구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열쇠가 된다.

그가 릴 대학교 자연과학대학장을 지내고 있을 때 인근의 한 양조업자가 술이 변질되는 문제로 파스퇴르를 찾아오며 생물학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당시에는 효모알코올로 바꾸는 촉매라는 것까지는 알려졌지만, 그 원리는 화학반응으로 잘못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화학자인 파스퇴르에게 술이 간혹 시큼하게 변해 버리는 원인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파스퇴르는 술통에서 채취한 표본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그 모양이 예사 경우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변질된 술통에서 발견된 다른 모양의 것, 그것은 바로 세균이었다. 그리고 그 세균을 편광기로 분석하여 생물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당시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미생물이나 구더기 같은 생물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 이래 그런 미생물 또한 자연발생한다고 생각했으나, 파스퇴르는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생물속생설을 입증하였다. 다만 완벽한 입증은 아니었으며, 이후 제자인 틴달과 사위인 샹 베를랑이 각각 간헐살균법과 오토클레이브를 개발함으로써 비로소 보완되었다. 그는 '이 연구로서 자연발생이라는 교리는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이로서 이런 다양한 미생물을 가르키는 균(ger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파스퇴르는 연구 끝에 저온살균법을 개발했으며, 오늘날 , 우유 등에 사용되고 있다.[1] 파스퇴르의 이름을 따 '파스퇴르 공법'(pasteurization)이라고 하며, 저온 살균 공법이 아니라 그냥 살균된 것도 '파스퇴르화'(pasteurized)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멸균을 의미하는 sterilization이 아닌, 병을 일으키거나, 식품의 변질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미생물을 적당히 제거하는 것을 pasteurization이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온 살균된 식품들의 경우 ultra-pasteurized라고 표기된 경우가 많다.

맥주의 발효 과정에서 효모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고, 양조의 화학적 과정을 밝혀낸 논문을 발표하며 프랑스 맥주 양조 기술이 잠시나마 독일을 앞서게 되는 성과를 낳았다. 다만 정작 파스퇴르 자신은 맥주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2]

그런데 이 발견 이후 난데없이 뇌출혈로 쓰러져, 죽을 때까지 몸의 왼쪽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좌반신 불구가 된다. 하지만 그에 좌절하지 않고 연구 활동을 계속한다. 이 때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탄저균 배양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원인균을 배양했다면 그 병을 이길 수 있는 약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이 천지였다.

1880년에는 닭 콜레라에 대해 연구하던 중 조수가 실험체인 닭에게 콜레라균을 주입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휴가를 다녀온 후에야 콜레라균을 접종했다. 그런데 닭들은 시름시름 앓는 듯 하더니 곧 건강해졌고, 이를 알게 된 파스퇴르는 여러 단계의 실험을 통해 휴가철 동안 방치된 콜레라균이 약해진 채로 접종되어 닭들이 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1881년 5월 5일 공개적으로 양들에게 탄저균 백신의 접종이 실시되었고 크게 성공하였다. 다만 아직 실험 단계여서 그런지 백신의 평균적인 품질이 보장되지 않아서, 오염되거나 순도가 떨어지는 백신이 접종되어 되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있어 논란이 되었다.[3] [4]

1885년에는 광견병 관련 연구로 또 다시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드높였다. 조제프 메스테르(Joseph Meister, 1876~1940)라는 9살 소년이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려서 어머니가 파스퇴르를 찾아왔는데, 당시 그는 광견병 백신을 연구하여 동물실험에 성공한 단계였으나 아직 사람에게는 시험하지 못한 상태였다. 광견병은 의학이 발달한 현재도 즉각 백신을 투여받지 않고 증상이 발현된다면 치사율이 100%인 극히 위험한 병인데, 당연히 당시에는 그냥 죽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소년에게 백신을 접종했다. 그리고 조제프는 운 좋게도 광견병을 이겨내고 면역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6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를 토대로 광견병 백신 또한 절찬리에 생산되었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1888년 11월 14일에는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세웠다.

1895년 만 72세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파스퇴르 연구소 지하에 있다고 한다. 석관묘로 조성되어 있으며 석관 안에 파스퇴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사진

3. 업적

생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뽑을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알프레드 노벨노벨상을 제정했을 때 가장 먼저 상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파스퇴르를 지목했을 정도였다.[5] 프랑스 국민들이 존경하는 과학자다.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고 '생물속생설'을 확립함으로써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했으며, 파스퇴르를 통해서 비로소 생물학이 엄밀한 의미의 현대적인 과학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6] 동시기를 살며 경쟁심을 가졌던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 또 백신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4. 기타



[1] 특히 우유는 신선하게 마실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이 파스퇴르 말고도 한 명 더 있는데, 그게 누구냐면 바로 미국의 악명높은 마피아였던 알 카포네. 알 카포네가 활동했던 당시 미국의 우유 가공 수준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우유병()이라는 병이 존재했을 정도였다. 독초를 먹은 젖소에서 짜낸 우유를 마시고 죽는 병()이다.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의 어머니도 이 병으로 사망했을 정도다. 게다가 유통기한 같은 개념도 당연히 없어서 시중에 상한 우유가 제멋대로 돌아다녔는데도 행동 양식이 마피아나 밀주업자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던 낙농업자들은 의회에 로비를 해서 상한 우유가 건강에 좋다는 얼토당토않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데 이후 알 카포네가 금주법 이후 우유 산업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썩어빠진 낙농업자들을 조직력을 동원해 갈아엎고 로비도 겸해서 유통기한을 지키는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우유 산업을 발전시켰다. 물론 알 카포네가 낙농업 사업을 한 것은 돈벌이를 위해서였다. 알 카포네의 주력 사업은 밀주 밀수가 가장 유명하지만, 본인도 말했듯이 술과 달리 우유는 남녀노소 누구나 마실 수 있는데다 가정 단위로 매일 소비하고, 유제품과 여타 가공식품에도 재료로 들어가니 마진이 제법 컸다. 결정적인 이유로 우유 유통망을 이용해 밀주 사업도 동시에 확장시킬 수 있었고, 따라서 돈세탁 또한 더욱 용이해졌기 때문에 우유 산업에도 관려한 것이다. 의도의 불순함과는 별개로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사람들은 깨끗한 우유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2] 단,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앙투앙 베샹(Antoine Béchamp)이라는 경쟁 과학자가 1857년과 1864년 프랑스 학술원을 통해 균에 의한 발효 현상을 입증했는데, 오히려 파스퇴르는 1872년까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역사학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3] 또한 이 역시도 장 조셉 앙리 투생(Jean Joseph Henri Toussaint)이 1880년 백신 개발에 성공했음을 과학원에 먼저 발표한 것이 먼저였고, 1998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 탄저 백신을 개발한 것은 투생이 먼저라고 인정하게 된다.[4] 파스퇴르는 이 당시 자신만의 기술로 백신을 만들 수 있다고 투생을 비판했으나, 막상 공개 실험에서는 투생이 먼저 발표한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5] 하지만 노벨상 제정 6년 전(또한 노벨이 죽기 1년 전)에 이미 파스퇴르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노벨이 매우 안타까워했다. 보통 파스퇴르와 더불어 찰스 다윈이 거론되는데, 다윈은 과학적 연구보다는 이론에서 보여 준 통찰력과 논리력으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파스퇴르와는 그 포인트가 다소 다르다.[6] 1895년에 사망했는데, 노벨상 제정 후 초기 10여 년간의 수상 업적들을 파스퇴르와 비교해 보면 파스퇴르 개인의 업적 쪽이 더 화려해 보인다.[7] En 1868, il devient docteur honoris causa de l’université de Bonn qui lui accorde également un diplôme de médecin, diplômes qu’il renverra lors de la guerre franco-prussienne de 1870[8] 출처: Une biographie de savant - La Vie de Pasteur, Revue des Deux Mondes, 4e période, tome 162, 1900 (p. 457-468.[9] 의역하자면 과학자가 어떤 개발을 하면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누리는 게 그 과학자의 조국이라는 것이다[10] 당시 의학계는 세균(germ)이라는 용어 자체가 논란이 되어 쓰이지 않는 수준이었다.[11] 조지프 리스터는 소르본에서 성대하게 열린 파스퇴르의 70세 생일파티에 참석하여 자신의 연구가 파스퇴르 덕분이며 그가 모든 의사와 환자들의 존경과 감사를 받는 인물이라는 내용의 헌사를 낭독했고 반신불수 상태의 파스퇴르는 일어나서 그를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