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31 13:38:37

몰리에르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콜뤼슈
6위7위8위9위10위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16위17위18위19위20위
장 가방
21위22위23위24위25위
26위27위28위29위30위
엠마뉘엘 수녀
장 물랭
31위32위33위34위35위
볼테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크리스찬 카브롤
쥘 페리
41위42위43위44위45위
미셸 사르두
46위47위48위49위50위
하룬 타지프
에리크 타바를리
51위52위53위54위55위
다비드 두이예
장 자크 골드만
56위57위58위59위60위
달리다
레옹 지트론
니콜라스 윌로
61위62위63위64위65위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프랑시스 카브렐
66위67위68위69위70위
71위72위73위74위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77위78위79위80위
미셸 세로
미셸 드러커
라이무
81위82위83위84위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86위87위88위89위90위
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91위92위93위94위95위
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97위98위99위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color=#fff>
몰리에르
Molière
파일:Pierre_Mignard_-_Portrait_de_Jean-Baptiste_Poquelin_dit_Molière_(1622-1673)_-_Google_Art_Project_(cropped).jpg
본명 장바티스트 포클랭
(Jean-Baptiste Poquelin)
세례일 1622년 1월 15일
파리
사망 1673년 2월 17일 (향년 51세)
파리
국적
[[프랑스 왕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배우, 극작가, 시인
학력 오를레앙 대학교
활동 시기 1645년~1673년
부모 장 포클랭 (아버지)
마리 크레세 (어머니)
배우자 아르망드 베자르 (1662년 결혼)
자녀 루이 (1664년~1664년)
마리 마들렌 (1665년~1723년)
피에르 (1672년~1672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언어별 명칭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aa4d17,#aa4d17><colcolor=#fff,#fff> 한국어 몰리에르
일본어 モリエール
중국어 莫里哀
태국어 มอลีแยร์
아랍어 موليير
힌디어 मॅलिएर
히브리어 מולייר
그리스어 Μολιέρος
러시아어 Мольер
에스페란토 Molière }}}}}}}}}

1. 개요2. 생애
2.1. 유소년 시절2.2. 연극계 데뷔2.3. 파리 귀환2.4. 전성기2.5. 죽음과 사후2.6. 업적과 평가
3. 대표 작품4. 기타

[clearfix]

1. 개요

프랑스배우, 극작가, 시인.

프랑스어를 '몰리에르의 언어'라고 표현할 만큼[1] 불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극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2][3]

2. 생애

2.1. 유소년 시절

몰리에르는 1622년 파리에서 장 포클랭과 마리 크레세의 첫째로 태어났고, 같은 해 1월 15일 세례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의 영애였고, 덕분에 그는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몰리에르가 10살 때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파리의 부촌 중 하나인 생오노레 거리로 이사해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명문 학교인 클레르몽 예수회 콜레주[4]에 들어가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연극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몰리에르의 아버지는 1631년 루이 13세의 왕궁에서 '왕실의 시중 드는 사람 및 카펫과 덮개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공무원 직책을 구했고, 자신의 아들을 귀족층으로서 영위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다. 몰리에르는 내심 연극계에 종사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5]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계획에 순응했다.

2.2. 연극계 데뷔

그러나 몰리에르가 21살이던 1643년 6월, 그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연극에 몸을 담기로 결정했다. 그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손을 잡고 630리브르라는 돈을 투자해 '일뤼스트르 테아트르(Illustre Théâtre)'라는 극단을 설립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당시 배우들의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던 사회 풍조로 후원자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대출을 받으면서 공연을 올렸다. 하지만 매 공연마다 인기를 끌어모으지 못해 결국 2년 뒤 1645년에 극단이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2,000리브르라는 거액의 채무를 지게 된 몰리에르는 이를 갚지 못해 1645년 옥살이를 했다. 죗값을 치른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동료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다시 손을 잡고 새로운 극단과 함께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본명이 아닌 '몰리에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속한 샤를 뒤프랭의 극단은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가 후원하고 있었으며 덕분에 몰리에르는 재정적인 부담 없이 자신이 쓴 연극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중 <경망스러운 사람(L'Étourdi ou les Contretemps)>, <사랑에 빠진 의사(Le Docteur amoureux)>와 같은 작품은 성공을 거두었다.

2.3. 파리 귀환

지방에서 명성을 얻은 몰리에르는 1658년 파리루브르 궁에서 루이 14세 국왕이 보는 앞에 상연했다. 그는 피에르 코르네유가 쓴 연극 <니코메드(Nicomède)>와 자신이 쓴 연극 <사랑에 빠진 의사>를 선보였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몰리에르는 왕으로부터 '무슈의 극단'[6]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이때부터 그는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몰리에르는 왕의 형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의 지원으로 이탈리아의 유명 배우인 티베리오 피오릴로[7]의 극단과 협업해 프티부르봉이라는 대형 극장에 무대를 올렸다. 몰리에르는 그곳에서 <우스꽝스러운 프레시외즈들(Les Précieuses ridicules)>를 1658년 11월 18일에 발표해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러운 프레시외즈들>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대중의 관심을 얻었다는 고무적인 성과를 일구었다. 몰리에르는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자 피오릴로에게 이탈리아의 희극 장르인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연기 기술과 집필 방식을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스가나렐레 혹은 상상의 서방질(Sganarelle ou Le Cocu imaginaire)>를 발표했다.

2.4. 전성기

1660년 프티부르봉이 루브르 궁의 확장 공사로 철거되자, 몰리에르의 극단은 팔레 루아얄의 극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리고 몰리에르는 1661년 2월 4일 <나바라의 가르시아 경 혹은 질투하는 왕자(Dom Garcie de Navarre ou Le Prince jaloux)>를 발표했고, 같은 해에 <남편들의 학교(L'École des maris)>, <귀찮은 사람(Les Fâcheux)>를 발표해 연달아 성공했다.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까지 얻게 된 그였지만, 사회 풍자성이 짙고 음담패설도 서슴없이 등장하는 그의 과감하고 도전적인 연극은 장바티스트 콜베르와 같은 일부 귀족들과 극작가들의 눈초리를 샀다.

1662년 2월 20일, 몰리에르는 동료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의 딸인 아르망드 베자르와 결혼을 했다. 같은 해, 그는 당시 귀족 집안의 딸이 겪어야 할 제한적인 교육 시스템과 자신의 결혼 생활을 바탕으로 쓴 <아내들의 학교(L'École des femmes)>를 발표했다. 기존의 희곡 방식을 파괴한 이 파격적인 작품으로 인해 '희극 전쟁(Guerre comique)'이라는 사회 현상이 나타났을 정도로 몰리에르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격렬한 난투가 벌어졌다. 이 소식은 프랑스 왕가에게까지 전해졌고 왕가에서 몰리에르의 손을 들어주자 난투극은 결국 일단락되었다. 이렇듯 수많은 찬사와 수많은 비판이 오고 갔을 정도로 논란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왕가를 등에 업어 기세등등해진 몰리에르는 사회 정치 풍자성이 묻어나는 자신의 희곡 스타일을 밀고 갔다. 1664년 그는 <타르튀프(Tartuffe)>를 베르사유에서 상연했다. 색욕과 재물욕으로 찬 귀족 지배층들의 위선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이 작품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몰리에르의 위상을 염려했던 루이 14세는 그를 옹호하며 그에게 <타르튀프>의 상연을 유예하고 다른 연극으로 대체하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몰리에르는 빠른 속도로 <후안 경 혹은 석상의 축제(Dom Juan ou Le Festin de pierre)>를 집필해 공개했으나, 기독교인인 척하는 무신론자 이야기라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인해 역시 이 작품의 상연도 유예되었다. 그러나 몰리에르의 이러한 작품들이 마음에 들었던 루이 14세는 다시 그를 옹호했고, 결국 국왕 자신이 몰리에르의 후원자가 되었다.

왕이 후원한 덕분에 몰리에르는 왕실과 연계된 다양한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중 궁정 음악가 장바티스트 륄리와 돈독하게 지냈다. 1665년 9월 22일, 몰리에르는 루이 14세의 요청으로 륄리의 음악을 바탕으로 한 <사랑은 의사(L'Amour médecin)>이라는 작품을 베르사유 궁전에서 공연했다. 왕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쓰인 작품인지라 큰 논란을 일으켰던 그동안의 작품들과는 달리 부드럽고 온화한 성향이 비교적 짙었으며, 덕분에 큰 비판 없이 전반적인 호평을 얻았다.

몰리에르는 이후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며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으나 자신의 명성만큼은 견고히 유지할 수 있었다. 1666년 몰리에르는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를 발표했고, 1667년에는 논란의 <타르튀프>를 수정한 작품인 <파뉠프(Panulphe)>를 발표했다. <파뉠프>의 내용은 <타르튀프>에 비해 많이 유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잠시 시찰을 위해 다른 지방으로 간 사이 몰리에르를 아니꼽게 보던 당시 프랑스의 법관 기욤 드 라무아뇽과 파리의 대주교에 의해 공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4세는 몰리에르의 연극을 지원했고, 결국 몰리에르는 사실상 왕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의 작품을 막을 수 없는 막대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2.5. 죽음과 사후

몰리에르는 1665년 즈음부터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았고, 결국 폐결핵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작품을 써 내려갔고 공연을 했다. 그는 생제르맹앙레 성에서의 축제를 위해 <시칠리아 사람(Le Sicilien)>을 썼고, 1668년 1월 13일에는 <암피트리온(Amphitryon)>을 발표했다. 같은 해에는 <조르주 당댕 혹은 어리둥절한 남편(George Dandin ou le mari confondu)>와 <수전노(L'Avare)>를 발표했다. 1670년 10월 14일에는 다시 한 번 더 장바티스트 륄리와 협업을 해 <서민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을 발표했다. 귀족의 삶을 따라하려는 부르주아를 풍자하는 내용이 담긴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672년 몰리에르의 연극 인생의 대부분을 동반한 마들렌 베자르가 세상을 떠났다. 마들렌의 사망으로 큰 상실감을 느낀 몰리에르의 건강은 악화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펭의 간계(Les Fourberies de Scapin)>를 발표해 또 다시 큰 성공을 얻었다.

1673년 2월 10일, 몰리에르는 궁정 음악가인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와 협업해서 제작한 <상상병 환자(Le Malade imaginaire)>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몰리에르는 <상상병 환자>의 네 번째 공연을 하던 도중 기침과 각혈을 한 후 쓰러졌지만, 이내 다시 일어나 공연을 마저 이어 나갔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그는 또 다시 쓰러져 집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아내 이름을 부르면서 남긴 유언은
"아르망드를 불러와....난 이렇게 간다고...말해줘."

당시 배우는 천대받는 직업이었기에 프랑스 왕국의 법률상으로 배우가 죽으면 제대로된 장례식을 할 수도 없었고 묘지에 묻힐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몰리에르의 아내 아르망드 베자르는 루이 14세에게 장례식을 요청했고, 왕이 이를 허가하자 몰리에르의 시신은 장례식을 거친 후 세례받지 못한 영유아들이 묻힌 묘지에 매장되었다. 아르망드는 1677년에 외스타슈 프랑수아 게랭(Eustache François Guérin, 1636~1728)과 재혼했다. 1년뒤에 아들을 얻었지만 이 아들은 30살로 요절했다. 1700년 10월 30일에 아르망드는 55살로 세상을 떠났다.

1817년, 몰리에르의 시신은 파리에서 가장 넓은 공동묘지인 페르 라셰즈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가 이장된 자리는 프랑스의 유명 시인이자 동화 작가인 장 드 라 퐁텐의 묘지 근처다.

몰리에르의 극단은 그의 사후 현재 프랑스의 국립극단인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가 되었다.

2.6. 업적과 평가

프랑스에서 한참이나 과소평가 받던 장르인 희극이 몰리에르의 등장으로 비극과 대등하게 되었다.

희극이란 장르를 혼자서 비극과 동등하게 만들어 놓은 인물인 만큼 프랑스 혹은 서양 희극을 완성한 인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최고의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몰리에르를 (문맥상 볼때 극작가들 중에서) 셰익스피어에 유일하게 필적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개인적으로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가 그의 작품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3. 대표 작품

4. 기타



[1] 프랑스는 이러한 '~(사람)의 ~'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비슷하게, 프랑스인은 조국을 다르게 표현할 때 '볼테르의 나라'라고 하기도 한다.[2] 프랑스 공영 방송에서 역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호 빅토르 위고와 더불어, 각각 위대한 인물 6위와 8위에 랭크되었다.[3] 영국에서도 영국 최대의 공영 방송사 BBC에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인물들을 선정하였는데, 그중 10위권 안의 대문호는 셰익스피어 한명 뿐이다. 이는 몰리에르나 위고의 위상을 반증해준다.[4] 콜레주(Collège)는 당시 프랑스의 고등학교다.[5] 법관 시험에 통과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합격한 것으로 추정된다.[6] 무슈(Monsieur)는 당시 프랑스 왕실에서 왕의 형에게 붙이는 칭호였다.[7] '스카라무슈(Scaramouche)'라는 캐릭터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8] 17세기 프랑스 3대 극작가는 몰리에르 , 장 라신피에르 코르네유인데 이 세명 다 프랑스 지폐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9]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 단테, 괴테는 햄릿, 돈키호테, 신곡, 파우스트 등 제목이라도 잘 알려진 대표작이 있고, 같은 프랑스 출신인 빅토르 위고, 뒤마도 레미제라블, 삼총사 등이 있지만, 몰리에르의 희곡은 이들에 비해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진 것이 없다시피 하다.[10] 각각 207권, 273권.[11] Notre-Dame de Paris(파리의 노트르담)과 Les Misérables(레 미제라블)이 표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