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in-height: calc(1.5em + 10px); padding-top: 5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80%, #ECECEC);"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제2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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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명 | 프랑수아 모리스 아드리앵 마리 미테랑 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 ||
출생 | 1916년 10월 26일 | ||
푸아투샤랑트 자냑 (現 누벨아키텐 샤랑트 자냑) | |||
사망 | 1996년 1월 8일 (향년 79세) | ||
일드프랑스 파리 | |||
재임기간 | 제21대 대통령[1] | ||
1981년 5월 21일 ~ 1995년 5월 17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fff><colcolor=#23235A> 신체 | 170cm[2] | |
학력 | 생폴 앙굴렘 고등학교[3] (졸업) (-1934년) 파리 대학교 (법학 / B.A.) (1934-1937년) 파리 정치대학 (법학[4] / DESS[5]) (1937년) | ||
의원 선수 | 8 | ||
의원 대수 | 제4공화국: 1, 2, 3 제5공화국: 2, 3, 4, 5, 6 | ||
부모 | 아버지 질베르 펠릭스 조제프 미테랑 (1873 ~ 1946) 어머니: 마리 가브리엘 이본 로랭 (1880 ~ 1936) | ||
형제자매 | 누나 앙투아네트 미테랑 (1909 ~ 1999) 누나 마리조제프 미테랑 (1912 ~ 1997) 누나 콜레트 미테랑 (1914 ~ 2004) 형 로베르 미테랑 (1915 ~ 2002) 남동생 자크 미테랑 (1918 ~ 2009) 여동생 주느비에브 미테랑 (1919 ~ 2006) 남동생 필리프 미테랑 (1921 ~ 1992) | ||
배우자 | 다니엘 미테랑 (1924 ~ 2011, 1944년 결혼) | ||
자녀 | 장남 파스칼 미테랑 (1945) 차남 장크리스토프 미테랑 (1946 ~ ) 삼남 질베르 미테랑 (1949 ~ ) 딸 마자린 팽조 (1974 ~ ) | ||
종교 | 가톨릭 → 무종교(불가지론) | }}}}}}}}}}}} |
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 제21대 대통령.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상 사회당이 배출한 최초의 대통령이자 역대 프랑스 대통령 중 최장기간 재임한 대통령이기도 하다.[6] 또한 프랑스 대통령 중 최초로 동거정부 하에서 사실상의 실권을 총리에게 내 준 대통령이기도 하다.[7]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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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평가
프랑스 좌파와 사회당을 상징하는 인물들 중 첫 손에 꼽히는 인사로, 프랑스 정치사 특히 제5공화국 이후의 현대 정치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떤 의미로든 매우 크다. 미테랑은 1958년 10월 제5공화국 성립 이후 20여년간 좌파가 정권을 잡지 못했던 상황을 타개하고, 선거를 통해 실권이 있는 대통령제에선 '수평적 정권교체'를 두번째로[8] 실현해냈다.3.1. 긍정
지금도 프랑스 사회당을 비롯한 프랑스 진보 세력의 정치적 대부 격으로[9] 많은 프랑스인들이 기리는 대통령이다. 특히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프랑스에서 최초로 그것도 장기집권한 좌파 지도자였고,[10] 이후 프랑스 좌파와 우파가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진행하는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 되었다.내치 부분에서도 임기 초 노동시간 단축(주 40시간→주 39시간)[11], 최저임금 인상 등 진보적 아젠다를 국가 의제로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외에도 반시위법 및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등 인권 문제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또한 이전 보수 정권에서는 관심이 없었던 프랑스의 노인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여 특임 장관을 임명하고 특별위원회를 꾸려 노인 요양 등 맞춤 정책을 입안하는데 노력했다.
수십 억 유로를 들여 미테랑 도서관을 만들고 영화 산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문화 사업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그랑 프로제(Grand Projects)라는 초대형 건축 프로젝트를 사회 각계에서의 반발을 무릅쓰고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로 지어진 루브르 피라미드, 라데팡스 신개선문, 라빌레트공원 등 현대 파리를 상징하는 여러 랜드마크들은 미테랑의 뚝심 하나로 지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외교적으로 미테랑과 마찬가지로 장기 집권한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와 손잡고 유럽 통합에 힘써 유럽연합 출범에 기여하고, 유럽 전반에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 정착에 노력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3.2. 부정
집권 직후 그가 펼치고자 했던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들이 임기 중반부터 재정 문제로 실현되지 못하고, 되레 그 이후론 신자유주의적 긴축정책을 시행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면서 지지자들에겐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실제 아탈리에 의하면 미테랑은 초기에 단행했던 개혁들에 대해 상당히 만족감을 보였으나, 이후 추가적인 개혁을 원치 않아보였다고 한다.때문에 88년도에 좌파가 다시 승리하며 실권을 되찾았을 때도 경제 등 내치 분야는 총리에게 거의 전적으로 일임한 채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권 후반부부터는 냉전 종식 관련해서 동유럽 자본주의화와 독일통일, 소련 붕괴 등 워낙에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격변기여서 아예 내정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었다.
또한 프랑스가 구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사프리크 정책을 계속 유지해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프랑스는 독립시킨 뒤에도 아프리카 구 식민지 국가들에게 단순한 영향력 정도를 넘어서 국정 전반까지 좌우할 정도였는데 이러한 기조는 샤를 드골 이래 역대 모든 프랑스 정부에서 기조가 바뀌지 않고 미테랑 역시 이러한 정책을 충실히 계승했으며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지도자들에게는 단순한 제재를 넘어서 암살 및 쿠데타도 불사하였다. 특히 1987년 10월 15일에 반제국주의를 내세우고 개혁적인 성향으로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이었던 토마 상카라가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의 쿠데타로 인해서 살해당할 때, 프랑스는 미국의 CIA와 함께 인근 아프리카의 친불 독재자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무사 트라오레, 냐싱베 에야데마, 오마르 봉고 등과 함께 배후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으며,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미테랑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2020년대 들어 아프리카의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가봉등의 국가들에서 오랜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탈피하려는 반불 군사독재정권들이 들어서는 원인들 중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사후에는 르완다 학살[12]에서 정부군의 학살에 무기를 지원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비판받기도 했다. 다만 이건 미테랑에게만 책임을 묻기에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강하다. 르완다 내전이 발생한 1994년 당시 프랑스는 여당이었던 사회당이 하원선거에서 대참패를 겪으며 우파들이 대거 당선되어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중심으로 2차 동거정부가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만 책임을 묻기는 애매하다.[13] 물론 미테랑의 실권 여부를 떠나서, 본인이 프랑스 대통령으로써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건 국가원수로써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으며, 특히 국방, 외교 분야는 외치에 관한 것으로 명백히 대통령 소관이므로 더욱 무거운 책임을 져야만 한다.
1985년 7월 10일, 프랑스의 남태평양 핵실험에 반대하는 시위를 펼치면서 뉴질랜드 오클랜드 항에 정박해 있던 민간환경운동 단체 그린피스 선박 "레인보우 워리어(Rainbow Warrior)" 격침 명령을 내린 것으로도 비판을 받는다. 좌파 정권의 수장이란 사람이 핵실험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우파 정권에서도 함부로 안 할 군사작전을, 그것도 우방국인 뉴질랜드에서 저질렀다는 것. 심지어 이 사건으로 사망자도 1명 발생했다. 이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 시절까지 프랑스 대통령들은 좌우 가리지 않고 핵무기를 자국의 강대국 지위를 보장하는 기반으로 절대시했기 때문이다.
4. 기타
1980년대 유럽을 함께 이끌었던 영국의 마거릿 대처(왼쪽) 총리, 서독의 헬무트 콜(가운데) 총리와 함께. 이들 가운데 미테랑 대통령이 1996년 가장 먼저 타계했고, 대처 수상은 2013년, 콜 수상은 2017년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탈냉전이란 역사적 전환기 시절 유럽을 대표했던 세 지도자는 모두 역사의 일부로만 남게 되었다.
-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한 프랑스 대통령이다. 1993년 9월에 방한했는데 이때 유명 여배우 소피 마르소와 함께 오는 바람에 소피 마르소를 보려고 엄청난 군중이 밀집했는데, 미테랑은 자기를 보러 한국인들이 온 줄 알고 통역사한테 자기가 한국에서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 몰랐다고 말하며 대단히 흡족해했다고 한다. 그래도 병인양요 당시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영구대여 방식으로 반환했으며, 이를 반대하던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과 대판 싸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미테랑이 반환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문화재 반환의 물꼬를 터주었다. 여담으로 이때 TGV를 사는 조건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는다는 빅딜을 제시했다니 어쩌니 하는 루머가 있으나 사실무근이다. 당시 대통령 성격상 그런 빅딜을 제시했다간 "싸가지 없다"는 등의 비난을 했을지도 모른다. [14]
- 그의 보좌관이었으며 세계적인 석학으로 불린 자크 아탈리가 미테랑 사후 10주년을 기념해 쓴 '미테랑 평전'이 있다. 한국어 번역이 급하게 한거라 좀 어색하다는 평도 있으나 읽는데 그리 문제는 없다. EU의 탄생 과정이나 독일 통일에 대한 자세한 에피소드들도 많으니 유럽, 국제 문제에 관해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볼만 하다.
* 1960년대부터 안 팽조와 만나면서 두 집 살림을 시작했고, 마자린이라는 혼외딸도 두었다. 이 스캔들은 1994년에 <파리 마치>지를 통해 폭로되면서 드러나게 된다. 영미권 같았으면 엄청난 공격거리가 되었겠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좌우 가릴 것 없이 대통령 정무와 관계도 없는 사생활 문제를 끄집어내서 선정적 보도나 하고 있다고 <파리 마치>를 실컷 까댔고, 당시 프랑스 여론도 <파리 마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테랑 이전에 지스카르 데스탱도 여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접촉사고가 난적이 있었는데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보도되지 않는 일도 있었으며, 미테랑의 후임인 자크 시라크도 마찬가지로 불륜을 저질렀는데 보도가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뇌물을 받아챙긴다거나 누구를 폭행했거나, 공금을 횡령하는 등의 공적으로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가벼운 수준의 성 일탈 행위의 경우에는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사생활 보호법에 따른 벌금액이 상당하기도 하고, 프랑스 성문화가 개방적인 면도 있고 국민정서상 정치인의 사생활이 관심대상이 아니라서 굳이 사생활을 기사로 써도 별 가치가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한 몫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언론의 기조는 사르코지 초기 때까지 이어져왔다가 2010년대 들어서 확 달라졌다. 물론 이러한 보도는 메이저 언론사가 아닌 단순 가십지가 한 것이고 이 스캔들이 커진 이유는 그가 바람을 피우면서 탄 오토바이가 프랑스에서 만든 오토바이가 아닌 이탈리아제 오토바이라는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해인 1982년, 우파는 그와 좌파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좌파는 이에 대해 크게 반격하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미테랑은 정치소설을 쓴 유머 작가 앙드레 베르코프에게 "우파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에 대해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해인 83년 베르코프는 ‘카통’ 이라는 가명으로 우파를 비판하는 책 《탈환》을 출간했고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 카통이 누군지에 대해 한참 화제가 되었다. 미테랑의 측근인 자크 아탈리는 이것을 “가면무도회” 라고 표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카통은 목소리를 변조해서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16]
- 후임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1988년 대선후보 토론방송을 할 당시에 시라크가 미테랑에게 지금 우리는 대통령과 총리가 아니오. 당신과 나는 대등한 후보로 이 자리에 나왔소.라고 선빵을 날리자, 미테랑이 당신 말이 맞소, 총리!(Vous avez tout à fait raison M. le Premier Ministre)라며 단숨에 반격했다. 이 대화로 선거의 승부가 정해졌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있을 정도다.[17]
- 1994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맞아 독일군 부대를 열병식에 초청해서 파리 시내를 행진하게 한 적이 있다.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50년 만에 독일군이 그것도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에 파리 시내에서 행진한 역사적인 사건. 이 일은 프랑스와 독일이 완전한 협력 관계를 맺었음을 상징하게 되었다.[18]
- 1984년 스위스 국빈방문 당시 스위스 발레 주 부르생피에르(Bourg-Saint-Pierre)란 마을에서 미테랑 대통령에게 1800년 당시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전쟁 중에 마을 물자를 징발한 것에 대한 보상을 청구한 적이 있는데 이 금액을 갚아줬다. 하지만 전부 갚아준 것은 아니고 원래는 184년 동안의 이자를 포함해 약 200억 원 정도를 보상해야 하지만 원금에 해당되는 6억 원(45,334 스위스 프랑) 정도만 갚았다. 링크된 게시글의 정보는 잘못된 정보.
- 한국에서 90년대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가 높을 당시 YS는 잘맞춰 라는 게임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내용은 YS가 일명 YS파를 쏘며 세계 각국 지도자와 대결을 펼치는 게임이었다. 여기엔 빌 클린턴, 마가렛 대처, 덩샤오핑과 함께 미테랑 대통령도 나왔다.[19]
- 프랑스는 미테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국에서 발행하는 2유로 동전에 그의 초상을 넣었다.
- 미테랑 집권 시기에 단행한 은행 국유화로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은 300억 프랑 이상의 손실을 보았는데 당시 1프랑은 요즘 기준으로 200원 정도의 가치였고 아무리 못해도 6조 이상의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 2017년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아델만에서 언급된다. 남주인공 빅터의 가족 모임에서 빅터의 아버지는 미테랑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5.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불의 십자단| 불의 십자단 ]] | 1936 | 입당 |
| 1936 | 탈당 |
| 1936 - 1945 | 정계 입문 입당 |
| 1945 | 탈당 |
[[민주사회주의 레지스탕스 연합| UDSR ]] | 1945 - 1964 | 창당 |
| 1964 - 1971 | 재편 |
| 1971 - 1996 | 합당 정계 은퇴 사망 |
6.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23235A,#FFF><rowbgcolor=#FFF><tablebgcolor=#fff,#1f2023>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1차 득표수 (득표율) || 2차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2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니에브르 3구 | 10,385 (32.72%) | 21,705 (67.38%) | 당선 (1위) | 초선 | |
1965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 8,656,346 (31.72%) | 10,619,735 (44.80%) | 낙선 (2위) | |
1967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니에브르 3구 | 20,394 (56.27%) | - | 당선 (1위) | 재선 | |
1968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15,791 (43.94%) | 20,207 (53.83%) | 당선 (1위) | 3선 | ||
1974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 11,044,373 (43.25%) | 12,971,604 (49.19%) | 낙선 (2위) | [20] |
1978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니에브르 3구 | 17,544 (44.70%) | 24,158 (60.21%) | 당선 (1위) | 4선 | |
1981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7,505,960 (25.85%) | 15,708,262 (51.76%) | 당선 (1위) | 초선[21] | |
1988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10,367,220 (34.10%) | 16,704,279 (54.02%) | 당선 (1위) | 재선 |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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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1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페레 도르치 | 길롐 데 몽카다 | 라몬 트레바일랴 | |||||||||||||
<rowcolor=#23235A>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페레 데 나르보나 | 니콜로 카포치 | 우크 데스바크 | 길롐 아르나우 데 파타우 | ||||||||||||
<rowcolor=#23235A>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페드로 마르티네스 데 루나 | 베렝게르 데릴 이 데 팔랴르스 | ||||||||||||||
<rowcolor=#23235A>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아르나우 로제르 데 팔랴르스 | 자우메 데 카르도나 이 간디아 | 로데리크 데 보르자 이 에스크리바 | 페레 폴크 데 카르도나 | ||||||||||||
<rowcolor=#23235A>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주안 데스페스 | 페드로 호르단 데 우리에스 | ||||||||||||||
<rowcolor=#23235A>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후안 페레스 가르시아 데 올리반 | 페레 데 카스텔례트 | 주안 디메스 료리스 | 미켈 제로니 모렐 | ||||||||||||
<rowcolor=#23235A>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우크 암브로스 데 몽카다 | 안드레우 카펠랴 | ||||||||||||||
<rowcolor=#23235A>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안토니오 페레스 | 파우 두란 | 후안 마누엘 데 에스피노사 | 멜시오르 데 팔라우 이 보스카 | ||||||||||||
<rowcolor=#23235A>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페레 데 코폰스 이 데 테이시도르 | 주안 밥티스타 데스바크 이 마르토렐 | ||||||||||||||
<rowcolor=#23235A>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시메온 긴다 아페스테기 | 조르디 쿠라도 이 토레블랑카 | 세바스티안 엔파란 아스쿠에 | 프란세스크 주제프 카탈란 데 오콘 | ||||||||||||
<rowcolor=#23235A>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데 하티바 이 콘트레라스 | 호아킨 데 산티얀 이 발디비에소 | ||||||||||||||
<rowcolor=#23235A>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데 라 두에냐 이 시스네로스 | 베르나르도 프란세스 카바예로 이 마테트 | 보니파시오 로페스 이 풀리도 | 시모 데 과르디올라 이 오르토네다 | ||||||||||||
<rowcolor=#23235A> 제49대 | 제50대 | 제51대 | 제52대 | ||||||||||||
주제프 카이샬 이 에스트라데 | 살바도르 카자냐스 이 파제스 | ||||||||||||||
<rowcolor=#23235A>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제56대 | ||||||||||||
주안 주제프 라과르다 이 페놀례라 | 주제프 푸자르짐주교구장 서리 | 주안 밥티스타 벤료크 이 비보 | 자우메 빌라드리크 이 가스파르교구장 서리 | ||||||||||||
<rowcolor=#23235A> 제57대 | 제58대 | 제59대 | 제60대 | ||||||||||||
주스티 기타르 이 빌라르데보 | 리카르트 포르네자 이 푸치데마자교구장 서리 | ||||||||||||||
<rowcolor=#23235A> 제61대 | 제62대 | 제63대 | |||||||||||||
주안 마르티 이 알라니스 | 조안엔리크 비베스 이 시실리아 | 주제프류이스 세라노 이 펜티나트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33%; min-height:2em" {{{#!folding [ 프랑스 측 ] {{{#!wiki style="margin:-5px 0 -10px; letter-spacing:-0.05em" | | |||||||||||
<rowcolor=#23235A> 제1대 | 제2대 | 제3대 | |||||||||||||
로제베르나르 3세 | 가스통 1세 | 가스통 2세 | |||||||||||||
<rowcolor=#23235A> 제4대 | 제5대 | 제6대 | |||||||||||||
가스통 3세 | 마티외 | 이자벨 | |||||||||||||
<rowcolor=#23235A> 제7대 | 제8대 | 제9대 | |||||||||||||
장 1세 | 가스통 4세 | 프랑수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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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
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 | 카탈리나 1세 | 헨리케 2세 | |||||||||||||
<rowcolor=#23235A>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호아나 3세 | 헨리케 3세 | 루이스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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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루이 13세 | 루이 14세 | 루이 15세 | 루이 16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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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18대 | |||||||||||||||
나폴레옹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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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19대 | 제20대 | ||||||||||||||
루이 18세 | 샤를 10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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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21대 | |||||||||||||||
루이필리프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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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22대 | |||||||||||||||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나폴레옹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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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제26대 | ||||||||||||
쥘 그레비 | 사디 카르노 | ||||||||||||||
<rowcolor=#23235A>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펠릭스 포르 | 에밀 루베 | 아르망 팔리에르 | |||||||||||||
<rowcolor=#23235A>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
폴 데샤넬 | 알렉상드르 밀랑 | 가스통 두메르그 | |||||||||||||
<rowcolor=#23235A> 제35대 | 제36대 | ||||||||||||||
폴 두메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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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비공식 | 비공식 | ||||||||||||||
필리프 페탱 | 샤를 드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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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3235A>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뱅상 오리올 | 샤를 드골 | 조르주 퐁피두 | |||||||||||||
<rowcolor=#23235A>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자크 시라크 | 니콜라 사르코지 | ||||||||||||||
<rowcolor=#23235A> 제45대 | 제46대 | ||||||||||||||
프랑수아 올랑드 | 에마뉘엘 마크롱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The Greatest Frenchman | ||||||||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콜뤼슈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장 가방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엠마뉘엘 수녀 | 장 물랭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볼테르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크리스찬 카브롤 | 쥘 페리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미셸 사르두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하룬 타지프 | 에리크 타바를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다비드 두이예 | 장 자크 골드만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달리다 | 레옹 지트론 | 니콜라스 윌로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 프랑시스 카브렐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르노 | 베르나르 쿠슈네르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미셸 세로 | 미셸 드러커 | 라이무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레이먼드 풀리도르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질베르 베코 | 조제 보베 | 장 페라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뤽 베송 | 티노 로시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세르지 레기아니 | 프랑수아즈 돌토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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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알랭 사바리 | 제2대 프랑수아 미테랑 | 제3대 리오넬 조스팽 | 제4대 피에르 모루아 |
제5대 로랑 파비위스 | 제6대 미셸 로카르 | 제7대 앙리 에마뉘엘리 | 제8대 리오넬 조스팽 | |
제9대 프랑수아 올랑드 | 제10대 마르틴 오브리 | 제11대 아를렘 데세르 | 제12대 장 크리스토프 캄바델리 | |
제13대 올리비에 포르 | ||||
◀ SFIO 총서기 | }}}}}}}}}}}} |
무궁화대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49년 | 8월 15일 | 이승만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0년 | 8월 13일 | 윤보선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3년 | 12월 5일 | 12월 17일 | 박정희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7년 | 6월 23일 | 육영수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79년 | 12월 7일 | 최규하 | 대통령 | 대한민국 |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 ||
홍기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0년 | 8월 29일 | 전두환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이순자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노태우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김옥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김영삼 | 대통령 | 대한민국 | ||
손명순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김대중 | 대통령 | 대한민국 | ||
이희호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노무현 | 대통령 | 대한민국 | |||
권양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이명박 | 대통령 | 대한민국 | |||
김윤옥 | 영부인 | 대한민국 | |||||
2월 19일 | 박근혜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문재인 | 대통령 | 대한민국 | |||
김정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하인리히 뤼프케 | 대통령 | 서독 | 외국인 최초 수훈 |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빌헬미네 뤼브케 | 영부인 | 서독 | 외국인 최초 수훈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이스마일 나시루딘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틍쿠 인탄 자하라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푸미폰 아둔야뎃 | 국왕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시리낏 끼띠야콘 | 왕비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5일 | 장제스 | 총통 | 중화민국 | ||
1968년 | 5월 10일 | 5월 18일 | 하일레 셀라시에 | 황제 | 에티오피아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반티에우 | 총통 | 남베트남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티마이아인 | 제1부인 | 남베트남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하마니 디오리 | 대통령 | 니제르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아이샤 디오리 | 영부인 | 니제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 대통령 | 엘살바도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 영부인 | 엘살바도르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오마르 봉고 | 대통령 | 가봉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조세핀 봉고 | 영부인 | 가봉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대통령 | 세네갈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 영부인 | 세네갈 | ||
1980년 | 5월 11일 |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 국왕 | 사우디아라비아 | |||
1980년 | 5월 14일 |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1981년 | 6월 25일 | 수하르토 | 대통령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5일 | 시티 하티나 | 영부인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틍쿠 아프잔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1년 | 7월 6일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81년 | 7월 6일 | 이멜다 마르코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81년 | 10월 13일 | 로드리고 카라소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1년 | 10월 13일 |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 영부인 | 코스타리카 | |||
1982년 | 5월 10일 | 사무엘 도 | 대통령 | 라이베리아 | |||
1982년 | 6월 7일 | 모부투 세세 세코 | 대통령 | 자이르 | |||
1982년 | 6월 7일 | 보비 라다와 | 영부인 | 자이르 | |||
1982년 | 8월 25일 | 압두 디우프 | 대통령 | 세네갈 | |||
1982년 | 12월 21일 | 케난 에브렌 | 대통령 | 튀르키예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 대통령 | 수단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 영부인 | 수단 | ||
1983년 | 9월 10일 | 후세인 1세 | 국왕 | 요르단 | |||
1983년 | 9월 10일 | 누르 | 왕비 | 요르단 | |||
1984년 | 4월 9일 | 하사날 볼키아 | 국왕 | 브루나이 | |||
1984년 | 4월 21일 |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 국왕 | 카타르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다우다 자와라 | 대통령 | 감비아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치렐 자와라 | 영부인 | 감비아 | ||
1985년 | 5월 17일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대통령 | 파키스탄 | |||
1985년 | 5월 20일 |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6년 | 9월 4일 | 4월 10일 | 엘리자베스 2세 | 국왕 | 영국 | ||
1986년 | 9월 4일 | 4월 16일 | 보두앵 | 국왕 | 벨기에 | ||
1987년 | 4월 7일 | 아메드 압달라 | 대통령 | 코모로 | |||
1988년 | 11월 3일 | 이스칸다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8년 | 11월 3일 | 자나리아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20일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대통령 | 서독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프랑수아 미테랑 | 대통령 | 프랑스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다니엘 미테랑 | 영부인 | 프랑스 | ||
1990년 | 6월 21일 |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 대통령 | 파라과이 | |||
1990년 | 11월 5일 | 괸츠 아르파드 | 대통령 | 헝가리 | |||
1991년 | 9월 13일 | 아즐란 샤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13일 | 투안쿠 바이눈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25일 |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 대통령 | 멕시코 | |||
1992년 | 8월 13일 |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피델 라모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94년 | 11월 7일 | 11월 21일 |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 대통령 | 칠레 | ||
1994년 | 12월 5일 | 12월 9일 | 레흐 바웬사 | 대통령 | 폴란드 | ||
1995년 | 2월 7일 | 2월 16일 | 이슬람 카리모프 | 대통령 | 우즈베키스탄 | ||
1995년 | 2월 21일 | 3월 6일 | 로만 헤어초크 | 대통령 | 독일 | ||
1995년 | 3월 28일 | 4월 3일 | 젤류 젤레프 | 대통령 | 불가리아 | ||
1995년 | 6월 26일 | 7월 7일 | 넬슨 만델라 | 대통령 | 남아프리카 공화국 | ||
1995년 | 9월 26일 | 9월 29일 | 카를로스 메넴 | 대통령 | 아르헨티나 | ||
1996년 | 7월 23일 | 9월 4일 | 알바로 아르수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6년 | 7월 23일 | 페르난두 카르도주 | 대통령 | 브라질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 국왕 | 스페인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 왕비 | 스페인 | ||
1996년 | 11월 26일 |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6년 | 12월 10일 | 12월 15일 | 레오니드 쿠치마 | 대통령 | 우크라이나 | ||
2000년 | 2월 22일 | 3월 3일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대통령 | 이탈리아 | ||
2000년 | 2월 22일 | 3월 6일 | 자크 시라크 | 대통령 | 프랑스 | ||
2006년 | 3월 12일 |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 대통령 | 알제리 | |||
2007년 | 3월 26일 |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2007년 | 3월 28일 |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 국왕 | 카타르 | |||
2009년 | 5월 13일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대통령 | 카자흐스탄 | |||
2009년 | 11월 12일 | 알란 가르시아 | 대통령 | 페루 | |||
2012년 | 5월 30일 | 칼 16세 구스타프 | 국왕 | 스웨덴 | |||
2012년 | 11월 21일 |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 | |||
2018년 | 10월 8일 | 에마뉘엘 마크롱 | 대통령 | 프랑스 | |||
2019년 | 하랄 5세 | 국왕 | 노르웨이 | ||||
2021년 | 6월 14일 |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 대통령 | 오스트리아 | |||
2021년 | 6월 16일 | 펠리페 6세 | 국왕 | 스페인 | |||
2021년 | 6월 16일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왕비 | 스페인 | |||
2021년 | 8월 25일 | 이반 두케 | 대통령 | 콜롬비아 | |||
2021년 | 9월 21일 | 보루트 파호르 | 대통령 | 슬로베니아 | |||
2023년 | 7월 13일 | 안제이 두다 | 대통령 | 폴란드 | |||
2023년 | 11월 21일 | 찰스 3세 | 국왕 | 영국 | |||
2024년 | 11월 16일 | 디나 볼루아르테 | 대통령 | 페루 | }}}}}}}}} |
[1] 안도라 공동 영주 겸임.[2] 젊은 시절의 신장은 173cm이라고 한다.[3] Saint Paul Angouleme.[4] 공법.[5] 전문고등연구학위. DEA처럼 석사와 박사 사이라고 보면된다.[6] 2008년 개헌 전까지 프랑스 대통령은 임기 7년에 중임이 가능했는데, 유일하게 미테랑만 14년 간 재임에 성공했다. 재선에 성공했던 샤를 드골은 중도 사임했고 자크 시라크는 중간에 임기를 5년으로 단축해 12년간 재임했다.[7] 그의 임기 중 1986-88년, 1993-95년 두차례에 걸쳐 동거정부가 형성되었다.[8] 첫번째는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다만 이때는 드골주의 우파 정권에서 비드골주의 중도우파 정권으로의 교체였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권교체라고 할 수 없었다.[9] 물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진보적 인물들은 미테랑 외에도 제법 있지만, 전업 정치인 중에선 미테랑이 대부라 할만하다.[10] 의외라면 의외지만 유럽에서 사민주의 열풍이 불던 당시에도 프랑스는 좌파적 이미지가 강한데 비해 의외로 실제 좌파 집권기는 길지 않았다. 제5공화국 이전으로 돌아가도 리버럴 정당을 제외하면 사회주의 세력은 19세기엔 반란을 일으켜 잠시 위세를 떨치다가 털렸고, 20세기 초중반은 겨우 집권 좀 해보나 했는데, 2차대전으로 나치의 점령을 받으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제4공화국 연정 시절 정도를 빼면 연속된 집권기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사회당(프랑스) 항목도 참조.[11] 당초 대선 공약은 주 35시간까지 줄이는 것이었지만 우파 진영의 반발에 일부 타협해 주 39시간으로 단축했다.[12] 홀로코스트, 킬링필드에 비견되는 20세기 최악의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13] 실제 훗날 르완다 정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에두아르와 다른 프랑스 공직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한다.[14] TGV 개통은 본국인 프랑스에서도 미테랑의 임기 첫 해에 이뤄졌다.[15] 혼외 딸 마자린(가운데). 뒤쪽에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마자린의 어머니(미테랑의 내연녀) 안 팽조. 맨 왼쪽의 여인은 미테랑의 영부인 다니엘 여사.[16] 당시에는 엘리제궁 비서관이었고 이때 한 때 여자친구였던 세골렌 루아얄도 만났다(결혼을 안해서 여자친구라 부르는거지 둘이서 아이를 넷이나 가졌고 2007 프랑스 대선때까지 계속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거의 정실부인이었다).[17]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재치를 정치인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미테랑 본인도 과거 지스카르데스탱과의 토론에서 'Vous n'avez pas le monopole du cœur.' (사람의 마음을 독점할 수는 없소.') 라는 재치있는 한 방을 먹기도 했다.[18] 이를 놓고 미테랑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전 대통령이 비난을 퍼부었지만, 정작 그의 재임 시절에도 독일군(당시 서독군)을 파리 행진에 초청했던 사실이 발굴되어 역관광당했다.[19] 참고로 좀 진지하게 얘기하자면 YS야 항상 아침조깅을 뛸 정도로 건강한 상태였지만, 이때 미테랑은 전립선 암 후유증으로 방한 할 당시에 몸이 엄청 쇠약해진 상태라 저렇게 그림처럼 상태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20] 1차 투표 1위, 2차 투표 2위[21] 1차 투표 2위, 2차 투표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