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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0년 4월 5일 | |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 주 루트비히스하펜 | ||
사망 | 2017년 6월 17일 (향년 87세) | |
독일연방공화국 라인란트팔츠 주 루트비히스하펜 | ||
재임기간 | 제6대 총리 | |
1982년 10월 1일 ~ 1998년 10월 27일(16년 26일) | ||
학력 |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법학과 / 중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역사학 , 정치학 / 학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 박사) | |
종교 | 가톨릭 | |
신장 | 193cm[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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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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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독 제6대 총리이자 통일 독일 초대 총리.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로 가장 오래 재임한 독일 총리이기도 하다.[2] 탁월한 국제정치감각을 바탕으로 냉전의 종식과 함께 다가온 동서독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단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총리였으며 이른바 '통일 재상(Kanzler der Einheit)'이라고도 불렸다.
2. 생애
2.1. 초기
1930년 4월 5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스하펜(Ludwigshafen)[3]에서 경찰관의 삼남으로 태어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집안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 이후에도 가톨릭 중앙당[4]의 열렬한 지지자로 남아있었다. 그의 형 중 한 명은 2차 대전 당시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서부전선에서 미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헬무트 콜 본인 역시도 징집되어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다행히도 전쟁이 끝나면서 어떠한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로 군 경력을 마감하게 됐다.2.2. 정치 입문
1946년 기민당의 설립 시기부터 청년 당원으로 열렬히 활동했던[5][6] 콜은 연방하원과 같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경험을 쌓은 전임 총리들과는 달리, 고향인 라인란트팔츠의 주정부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쌓기 시작한다. 특히나 1969년에는 39세의 나이로 라인란트팔츠의 주지사로 당선되는데, 이는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내에서 역대 최연소 주지사 당선 기록이다.1973년 기민당 대표 자리에도 오른 콜은 야심만만하게 1976년의 총선에서 당시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실제 선거에서도 전체 정원에서 49%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원내 제 1당 자리를 되찾았지만 독일 사회민주당과 자민당이 연정을 연장하는데 합의하면서 총리에 오르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이 직후 콜에게는 정치 인생상 최초의 고난이 닥친다. 바로 당 내 라이벌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에게 총리 후보 자리를 뺏기고 만 것.[7]
2.3. 총리로의 길
하지만 고난이 기회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0년의 총선에서 슈미트에게 도전했던 슈트라우스는 1976년 콜이 얻었던 의석수에서 무려 20석을 잃는 대패를 당하면서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다.[8] 이제 기민당 내에서 라이벌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2년이 되자 부자증세와 노동시장에 대한 정책을 놓고 연정파트너였던 사민당과 자민당이 격하게 충돌했던 것이다.정치 인생 내내 기회를 잡아채는 타이밍 감각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콜은 자민당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자민당 역시 기민당과의 새 연정 정부 구성 협상에 진지하게 임한다. 자민당의 후원을 손에 얻은 기민당은 1982년 10월 1일의 불신임 선거에서 여유롭게 헬무트 슈미트 내각을 붕괴시키고 사흘 뒤 새 기민-자민당 연정 내각의 총리로 콜을 선출한다. 기민당은 1969년 이후 13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불신임을 통해 상대방을 낙마시키고 자기가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은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내에서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게다가 자세히 말하자면, 자민당은 불과 한 달 전의 신임선거에서는 슈미트에게 지지를 던졌다가 한 달만에 태도를 돌변한 것. 이로 인해서 독일 내에서는 이러한 집권 과정이 합법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엄청난 논란이 있었다. 사민당 일부에서는 헌법 재판소에 이러한 행위가 위헌이라고 제소까지 하기도 했다.[9]
2.4. 서독의 총리로서 (1982~1990)
콘라트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를 자처했던 만큼[10] 그는 당연히 아데나워의 유럽우선주의 외교노선을 선호했고, 이는 그가 미국과 영국보다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위주의 외교정책을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임 헬무트 슈미트가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 평생에 걸쳐 우정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콜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동반자 관계였다. 특히나 1984년 베르됭에서 베르됭 전투의 전몰자들을 기리면서 미테랑과 콜이 오랫동안 손을 맞잡고 있던 모습은 단순히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만이 아니라 유럽 연합의 초석을 닦은 장면으로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아데나워의 외교노선만을 따랐던 것은 아니어서 1987년에는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정상회담을 갖으며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역시 계승하려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다만 이 시기 콜은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는데 바로 늦게 태어난 자의 은혜(Gnade der späten Geburt)가 그것이다. 대충 설명하자면 자신과 자신보다 어린 세대(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반유대주의와 나치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시대가 끝날 무렵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기 덕분이라는 요지의 이 발언이었다.
당연히 제3제국 시기 적극적인 반나치활동을 펼쳤던 사람들에게 미친듯이 까였고 여기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방독 당시 무장친위대가 매장된 묘지에 참배한 사실까지 겹치면서 서독 내부에서 총리가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불을 뿜었었다.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개인들의 판단이지만, 콜에게는 일종의 흑역사인 셈.
어쨌든 콜은 무난무난하게 1983년의 선거와 1987년의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3선 총리가 됐지만 5년 뒤 빌 클린턴의 선거문구가 보여주었듯이 대중들은 화려한 외교적 행보보다는 자신들의 지갑에 더 관심이 있는 법이었고, 대중적으로나 당내에서나 콜의 인기는 점점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자매정당인 기사련과 연정 파트너 자민당도 콜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89년에는 당 내의 반대파들이 콜 대신에 새로운 인물을 총리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지만 하늘은 콜의 편이었던지 거대한 역사적인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독일의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었다.
2.5. 통일 독일의 첫 총리 (1990~1998)
- 자세한 내용은 독일 재통일 항목 참조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12] 통일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왔고 그 영향으로 5월에 치러진 동독 지방선거에서는 기민련이 부진했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동서독 1:1 마르크 교환정책을 펼치면서[13] 동독 지역주민들의 재산을 보전시킴과 동시에 [14] 외교적으로도 강대한 독일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영국과 프랑스 등[15]은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과 폴란드를 구 영토에 대한 영유권 완전 포기선언으로 설득에 성공하면서 통일에 장애물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간다. 마침내 10월 3일에 동독과 서독은 다시 하나의 국가가 된다. 그리고 2개월 뒤 통일후 첫 총선에서 기민당은 과반수를 훌쩍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1비율의 동독 화폐 교환은 동독 노동자의 상대적 임금을 인위적으로 인상시키면서 동독의 경쟁력을 하락시켰고 서독의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면서 동독 주민에대한 사회보장비 지출을 대폭 늘리게 되어 이후에 독일 경제에 커다란 재정부담을 주어 과도한 국가부채로 이어지게 된다.
동서독 통일에 따라 독일 총리관저인 연방총리청를 신축하게 되었는데, 헬무트 콜은 당시 독일 국내의 반발을 물리치고 유리궁전 양식으로 지었다. 하지만 막상 본인은 새로운 연방총리청에 입주해보지 못했고, 본인의 후임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2.6. 통일 후유증으로 인한 인기 하락과 정계 은퇴
그러나 급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 만큼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서 콜 총리는 빠른 속도로 동독과 서독 양 측에서 인기를 잃어나가기 시작했다.동구권이 체제 전환 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16]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대적인 금리인상과 긴축정책으로 경기 침체와 실업자 증가, 복지정책이 후퇴하는 상황이 겹치고[17] 구매력이 이전보다 더욱 더 떨어지면서 동독 물건이 잘 팔려나가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게다가 소련마저도 붕괴되는 바람에 동독 물건을 팔 만한 수출시장 자체가 꽉 막히다시피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동독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서독이나 타 서유럽 국가에서 잘 팔리지도 않았고, 거기다 동서간 인건비 격차도 줄어나가는 바람에 동독이 가지고 있던 값싼 인건비라는 장점도 급속히 상실되면서 버티기 힘들어졌다. 결국 경쟁력을 상실한 동독 지역 기업들은 줄이어 파산하고 민영화와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동독 지역 실업률은 30%대에 이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마침 통일 직후 공공요금 현실화라는 명목아래 공공요금이 서독 수준으로 폭증하는 사태가 겹치던 참이었다.
동독인들은 동독인대로 통일이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환상이 처절하게 깨지며 분노했고, 서독인들은 서독인대로 통일에 대한 혜택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채 세금만 올라가면서 불만에 가득찬 상황이 되며 동서간의 심리적 거리는 통일 전보다도 훨씬 벌어졌고 헬무트 콜의 지지율도 급속히 하향세를 타게 된다.[18] 그럼에도 1994년 총선에서 간신히 4선에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사민당이 연방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콜의 정치적 운신에는 엄청난 제약이 걸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5선에 도전한 1998년 총선에서 결국 콜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에게 참패, 1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끝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통일과정에서 기민당이 막대한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조달했다는 스캔들이 터진 것도 이 시기 헬무트 콜의 추락을 부채질했다. 이 시기 당대표가 된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을 '나의 소녀(mein Mädchen)'라 부를 정도로 총애했던 자신의 정치적 후견인인 콜을 아주 냉정하게 당에서 사실상 쫓아낸다.[19]
2.7. 이후의 삶
2002년 공식적으로 정계를 은퇴한 콜은 뇌졸중으로 투병했다. 2015년 11월 10일 전임자인 헬무트 슈미트가 타계하면서 생존한 전임 독일 총리로는 최고령자가 되기도 했으며, 2017년 6월 16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7월 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의회 의사당에서 유럽연합장(葬)으로 거행되었다.# 이후 라인강을 따라 그의 고향인 독일 라인란트팔츠의 슈파이어로 옮겨져 장례 미사를 치렀고,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의 이름을 딴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3. 기타
- 투머치토커 기질이 있던 걸로 당대 유럽각국 정상사이에서 유명했는데, 특히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가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어찌나 콜에게서 많은 전화를 받았던지, 훗날 메이저는 "꼭 중요한 일이 없더라도 콜에게서 전화가 자주 온다는걸 총리직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여러모로 가정사가 불행하다. 상술했듯이 그의 형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소년병으로 참전하여 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20] 하넬로레는 12세 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한다.[21] 이후로 평생 러시아어와 러시아인에 대한 노이로제 및 창문 밖으로 내던져지며 입은 척추골절로 인한 만성적인 요통에 시달렸다고.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삶을 싫어했던 그녀는 항생제 복용 후유증으로 심한 햇빛 알레르기를 앓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다만 부인의 자살에 대해서 그 아들 발터 콜은 훗날 "어머니의 자살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것은 1998년 정치비자금 추문 당시 어머니의 절친이었던 앙겔라 메르켈의 정치적 배신 때문"(콜을 사실상 당에서 추방)이라고 얘기했다. 콜 前독일 총리 아들 "어머니 자살은 메르켈 배신 탓 커"
- 자신의 두 아들과도 의절했다. 2008년 콜은 40세 이상 차이나는 마이케 리히터와 재혼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혼 사실을 전보로 통보받았으며 결혼식에 초청조차 받지 못했다. 2011년 장남인 발터 콜은 "살아가느냐 아니면 살아지느냐(Leben oder gelebt werden)"라는 자서전을 출판하면서 자신과 부친의 갈등에 대해 밝히는 한편, 아버지 헬무트를 '단 한번도 가정의 의무를 위해 공무를 포기한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기록했다.[22] 임종의 순간에도 화해하지 못했는데, 발터는 아버지의 별세 후 부친의 자택을 찾았지만 계모인 리히터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 콜의 가족은 슈파이어 성당에서 이뤄진 장례미사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23]
- 형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이와 관련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학위논문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발터 페터 푹스 교수의 지도로 쓴, "1945년 이후 팔츠에서의 정치적 전개와 정당의 재성립(Die politische Entwicklung in der Pfalz und das Wiedererstehen der Parteien nach 1945)".
- 상술한 박사 학위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자가 콜 씨(Herr Kohl)라고 부르자 발끈하면서 "콜 박사(Herr Doktor Kohl)라고 부르세요. 당신에게 나는 콜 씨가 아니요.(Für Sie bin ich nicht Herr Kohl). 나는 당신과 친밀한 사이가 아니잖소."라고 발끈하는 장면은 그가 총리직에서 물러난지 한참이 흐른 지금도 독일에서 자주 회자되곤 한다.[24]
문제의 호칭으로 인한 콜의 급발진 장면
- 193cm의 신장에 120kg의 몸무게로 상당한 거구이다. 공식적인 몸무게가 120kg이고 아마 실제로는 더 나갈 것으로 추정된다. 총리 재임시절부터 본인이 "나의 몸무게는 국가기밀이다."라고 셀프디스를 시전하기도 했다. 떡대 하면 어디 가서 꿀릴지 않을 옐친과의 투샷을 봐도 옐친이 작아보일 정도(...).
- 거구의 덩치와는 별개로 상당히 어눌한 말투여서, 독일 내에서의 이미지는 좀 모자란 할아버지이다.[25] 그래서서 그의 멍청함을 디스하는 유머들이 꽤 유행하여 유머집까지 나왔는데, 한국에는 '콜 수상의 웃음'(유재식 편역, 우석출판사, 1985)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면 이렇다.콜이 부인과 함께 정원을 치우다 수류탄 3개를 주웠다. 이걸 경찰에 갖고 가던 중 부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하나가 터지면 어떡하죠?" 잠시 생각하던 콜은 "2개만 주웠다고 하지 뭐"라고 천연덕스레 말했다.아프리카의 어느 흑인 국가를 방문한 콜이 학생을 보고 뭘 배우고 있느냐고 물었다. "프랑스어, 독일어, 대수를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학생은 대답했다. "그럼 대수어(語)로는 수상을 뭐라고 하지?"하고 콜은 묻는 것이었다.콜이 박사 과정을 위한 대학원 입학 시험을 치를 때의 일화이다. 교수가 그에게 물었다."프랑스 혁명 이후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감행, 프랑스의 종신통령이자 나중에는 황제가 된 인물은?" 콜은 묵묵부답이었고, 답답해진 교수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러자 갑자기 콜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시험실 밖으로 나갔다. 놀란 교수가 콜에게 왜 나가냐고 묻자 콜의 대답은 "제 뒤에서 대기하는 학생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었나요 교수님?"[26]콜이 아내 한네로네와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갔는데 매표소에서 앞 줄에 선 사람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티켓을 주세요"라고 했다. 그 사람이 가고난 뒤 헬무트의 차례가 오자 그가 말했다. "헬무트와 한네로네의 티켓을 주시오."
- 각국 정상들이 만나 오찬이나 만찬을 가질 때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게 대부분인데 반해 이 사람은 자신의 토속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지역의 특산 요리로 유명한 식당 다이데스하이머 호프(Deidesheimer Hof)에서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문제는 이 식당이 간 요리, 내장을 사용한 소시지 요리 등의 호불호가 갈리는 요리가 많았기에 그의 초대를 받았던 각국 정상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마거릿 대처는 기겁을 했으며, 정치적 파트너나 다름없던 프랑수아 미테랑이나 빌 클린턴도 그렇게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유일하게 기뻐하며 즐겁게 식사했던 사람은 보리스 옐친[27]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1994년 5월, 옐친은 식당에서 내놓은 슈트루델을 먹고 대단히 흡족해하며 주방장 만프레트 슈바르츠를 불러서 레시피를 물어보기까지 했다. 옐친은 이 슈트루델을 보리스 옐친 슈트루델(strudel à la Boris Yeltsin)로 명명하는 행정명령을 내려야겠다는 농담을 했고 콜은 옆에서 껄껄 웃더니 자기도 사인하지 않으면 그 명령은 무효라고 받아쳤다. #
[1] 역대 독일 총리 중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함께 최장신이다.[2]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북독일 연방 의장/독일제국 황제에 의해 임명된 총리였고 따라서 의회나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전무했지만 콜은 4년마다 꼬박꼬박 선거를 치렀음에도 16년을 재임했다.[3] 오늘날에는 행정 구역상 라인란트-팔츠에 편입되어 있다.[4] 2차 대전 이전 기민당의 전신격 정당.[5] 당의 설립시기부터 헌신했던데다가, 고향과 종교 등 여러 면에서 통하는 면이 있던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가 콜을 무척이나 예뻐했으며 대놓고 정치적 후원자를 자처할 정도였다. 콜도 스스로를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 정도로 여겼었다.[6] 당시 콜의 연령은 16세. 아데나워는 이 당시 칠순 할아버지였던 고로, 자신과 여러 면에서 잘 통했던 손자뻘인 콜이 안 예뻐보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7] 슈트라우스는 정확히는 기민련의 바이에른 지역 자매정당 기사련의 당수였고, 그 자격으로 바이에른 주총리를 지내고 있었다. 콜은 기민련의 대표였고, 이 당시에도 기민련 대표직은 그대로 유지했으나 기사련 대표 슈트라우스를 기민련-기사련 연합의 총리후보로 추천키로 결정된 탓에 콜은 기민련의 대표지만, 자당이 선거에서 이겨도 총리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8] 어디까지나 '중앙', 즉 총리직에 다한 야망을 버린 것이다. 이후로도 자신이 맡고 있었던 바이에른 주지사 자리는 유지한다.[9] 독일 헌재는 이 집권과정에 위헌요소가 없다고 판결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이 추후에도 반복되어 정치적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앞으로는 제약을 두게 했다.[10] 나이로는 아데나워의 손자뻘이다.[11] 동독주민들에게는 1933년 나치집권 이후 거의 60년 만에 경험해보는 자유선거였다.[12] 대표적인 예로는 낙태 문제를 들수있다.[13] 사실 당초 시뮬레이션에서는 3:1로 교환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콜이 자신의 인기문제와 동독지역의 경제 공동화 문제같은 정치적 사안까지 고려하면서 밀어붙인다. 애초당초 1:1 화폐통합이 1990년 의회 선거에서 내걸었던 공약이었던지라 콜 총리 입장에서 미루면 미룰수록 손해보는 장사라 밀어붙었던 것.[14] 사실 타 동구권 국가들 주민들의 예금이 체제전환 후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대다수가 휴지조각이 되었다는점을 고려하면 어느정도 현명한 조치라고 볼수도 있다. 당장 러시아만 해도 체제전환 과정에서 예금이 쓰레기가 되는 참사가 발생하여 구매력이 폭락하고, 평생직장또한 옛말이 되었으며 치안마저 개판이 되어버리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동독은 1:1 교환으로 예금이 쓰레기가 되는 참사는 면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동독지역의 산업경쟁력이 서독에 비해 월등히 밀린게 문제였지... 다만 이 조치는 비슷한 시기에 개혁개방을 한 동유럽 국가에 대해 동독 지역의 산업 경쟁력을 잃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동독 지역 발전에 장애가 된다.[15] 프랑수아 미테랑과 마거릿 대처 모두 처음에는 독일 통일에 엄청난 거부감을 보였다. 2차 대전을 젊었을 때 경험한 당사자들이니 무리도 아니다.[16] 동구권 국가 대부분에서 국가가 주도하던 제품 생산이 아직 충분히 민영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억눌려왔던 시민들의 소비 욕구가 폭발하면서 파멸적인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17] 당장 러시아만 해도 소련 붕괴직후인 1992년 물가상승률이 2000%에 달하는 상황이었고, 당시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정이 나아진 건 1990년대 중반-2000년대의 일이었다.[18] 이를 두고 콜의 전임자였던 헬무트 슈미트는 언론기고문에다가 "이 친구는 총리로 재임하고 10년만에야 경제의 중요성을 비로소 깨달았다."라고 개탄했다.[19] 사실 mein Mädchen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총애라긴 뭐한 게, 현대에 이 표현은 총리가 장관(메르켈은 당시 장관이었다)에게 쓸만한 표현은 절대 아니다. 당장 한국에서 대통령이 여성 장관을 ‘우리 딸’이라고 지칭하면 반응이 어떻겠는가 요새도 이따금 Mädchen이나 Fräulein이라는 표현을 잘못 썼다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한 남성들에 대한 독일 현지 언론보도가 나오곤 한다.[20] 물론 이 시절은 아직 콜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이다.[21] 어머니와 함께 강간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22] 작은아들 페터 역시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2011년 5월의 일화를 털어놓았는데, 당시 페터는 딸을 데리고 독일 남서부 오게르샤임의 아버지 집을 찾았다. 리히터가 화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콜 전 총리가 있는 거실을 가리켰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콜 전 총리는 손녀의 손을 잡고 매우 기뻐했지만 약 10분이 지나자 아들에게 “가는 게 좋겠다”고 속삭였다. 그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또 곤란해질 것”이라고 했다.[23] 훗날 콜의 여러가지 주요 문서, 메모, 편지, 서류 등 물품의 소유권에 대해서 가족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유언대로 리히터에게 단독 상속받게 하는 대신 전 부인의 아들인 발터 콜과 페터 콜, 그리고 손자들에게 100만 유로(약 13억 3,000만 원)를 주고 상속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24] 독일어권에서는 박사학위 소지자에게 Doktor라는 호칭을 붙여주는게 사회적으로 관례이긴 하다. 콜의 정치적 후계자이자 역시 물리학 박사 소지자인 메르켈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Frau Merkel이 아니라 Frau Doktor Merkel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25] 이름은 같았던 전임자가 지성인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과는 대조된다.[26] 1990년대 중반까지 쓰였던 국내의 모 고교영어 교과서에도 비슷한 바리에이션이 있다. 여기서는 대답이 '조지 워싱턴'이었다.[27] 옐친은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했고, 소시지는 술 안주로 좋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