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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2년 1월 24일 | ||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
사망 | 1786년 8월 17일 (향년 74세) | ||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 |||
재위기간 | 프로이센 국왕 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
1740년 5월 31일 ~ 1786년 8월 1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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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어머니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 ||
형제자매 |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빌헬미네, 프리드리히 빌헬름, 샤를로테, 프레데리케 루이제, 필리피네 샤를로테, 루트비히, 조피 도로테아, 루이제 울리케, 아우구스트 빌헬름[1], 안나 아말리아,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 ||
배우자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베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공녀 (1733년 결혼) | ||
자녀 | 없음 | ||
종교 | 무종교 (불가지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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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치자는 국가의 첫 번째 종복(premier domestique)[2]이다. 그가 대우를 잘 받아야 자신이 맡은 직무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통치자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효율적으로 일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유언장에 프리드리히 본인이 직접 저술한 대목. 한국에서는 흔히 "짐은 국가에서 첫번째 심부름꾼이다."라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이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독일인으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이라 불리곤 한다. 라틴어 표기는 Fredericus Rex[3], 영어 표기는 Frederick the Great.유언장에 프리드리히 본인이 직접 저술한 대목. 한국에서는 흔히 "짐은 국가에서 첫번째 심부름꾼이다."라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이다. 계몽 군주라는 단어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치에 있어서는 반(反) 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여 군림하는 군주가 아닌 봉사하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으며,[4] 국가와 신민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봉사라는 의지를 실현하여 합리적인 국가 운영을 통해 프로이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이러한 국력 안정을 바탕으로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육성한 강력한 군대를 활용해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였고 또한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프리드리히가 즉위할 당시 독일의 변방 국가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유럽 대표 강대국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현재까지도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고 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프리드리히 대왕/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된 프로이센 왕국을 강대국의 반열에 올린 인물로, 독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 중 한 명이자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 지도자들에게 가장 추앙받은 군주이다.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42위를 차지했다. # 이는 역대 독일 군주 중 가장 높다.[5]3.1. 비판
프리드리히는 독일에서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 위인이고 계몽 군주 시대에 한 획을 그은 지도자이지만 세상 어느 나라나 완전한 명군도 완전한 암군도 없듯이 그 역시도 행적에서 비판점이 있다.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비판점은 독선적인 국정 운영과 7년 전쟁에서의 처신에 집중되어있다. 일단, 프리드리히의 통치는 당대의 군주치고도 상당히 독선적이었다. 이는 당대 프로이센이 워낙에 중앙집권적인 군국주의 국가였던 데다가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부터 전제적인 정치 구조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독단성은 말년에 더욱 심각해졌다. 이는 그가 7년 전쟁 이후 유럽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군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7년 전쟁에서의 그의 업적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평가가 은근히 많다.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승리는 프리드리히의 통치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갑작스러운 운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 프로이센군이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강군이었고, 프리드리히 자신도 세계 최고의 지휘관이었음은 사실이다. 이는 7년 전쟁 초반에 프로이센군이 보여준 압도적인 전과(戰果)와 교환비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이 결코 오스트리아-러시아-프랑스 연합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반 승세에도 불구하고 물량이 후달린 프로이센은 전쟁 중기부터 계속해서 밀리기 시작했다. 이내 러시아의 차르가 바뀌기 전까지 프로이센은 사실상 멸망 직전에 몰려있었다. 프로이센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황제가 바뀐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가 전선에서 이탈한 이후였다. 이는 순전히 프리드리히의 처신과는 무관한 역사적인 운이었다.[6][7] 인구 2~300만의 국가 프로이센이 그보다 10배에 가까운 거대 체급의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던 저력 운운하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을 초래한 것이 프리드리히 2세의 대외정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프리드리히의 전쟁 군주로서의 능력은 과대평가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7년 전쟁에서의 막판 역전은 프리드리히의 능력이 아닌 운이 결정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평가는 내리기 어렵겠으나 프리드리히의 7년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이나 제2차 세계 대전 프리퀄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이다. 그렇다면 프리드리히의 외교 능력에 대한 재평가 또한 불가피하다. 7년 전쟁의 중요한 계기가 프리드리히의 대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에 복수하고자 7년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왜냐하면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빼앗고 그녀에게 굴욕을 주었기 때문이다.
3.2. 반론과 종합
프리드리히 2세가 아무리 외교를 잘한들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의 삼부인 동맹을 막을 수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럽의 군주들은 서로간의 힘의 균형의 변화에 매우 민감했고, 한 나라의 힘이 갑자기 강해지면 기존의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완전히 바꾸면서까지 새롭게 강해지는 나라를 억제했다. 내치와 군재 모두 특출났던 프리드리히 대왕이 빠르게 성과를 내면서 주변국들을 상대로 승전을 거듭하고 급부상하기 시작한 이상 주변국들이 프로이센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고, 적대적 동맹이 형성되는걸 막기는 매우 어렵다. 비스마르크처럼 불세출의 외교감각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달성하기 매우 힘든 과제이기에 그걸 실패했다고 해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적 감각이 없는 인물이었다고까지 평가절하할 일은 아니다.또한 그를 히틀러 따위에 비유하면서 그저 호전적인 전쟁광으로 치부하는 의견은 매우 지나친 것이다. 계몽군주로써 그는 종교-사상적 자유와 토론을 보장했기에 많은 인재들이 프로이센에 모여들어서 그의 치세 동안 문화도 발전됐고, 종교적 분쟁도 줄어들었으며, 정치 체제의 효율성 또한 개선되었다. 군사적 해결에만 집착하면서 나라를 망국에 몰아넣거나, 국가의 다른 요소들은 군대를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군국주의자가 아니었다.
7년 전쟁은 손해를 무릅쓰더라도 빼앗긴 슐레지엔을 찾으려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난만큼, 슐레지엔을 차지해 국력을 향상시켜던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또한 로이텐 전투 뿐만 아니라 다른 전투들에서도 흔하게 보여준 프로이센군의 진형 전환과 프리드리히 2세의 용병술은 다른 전략가와 국가들은 흉내낼지라도 완전히 재현하는 것이 힘든 수준이었다.
결국 인구 2~300만의 국가 프로이센이 그보다 10배에 가까운 거대 체급의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던 그 저력이 유럽 국가들에게 큰 감명과 충격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프로이센식 군주제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다민족국가들이 해체되고, 민족국가들로 분할되며 민주주의가 형식상으로나마 정착되기 전까지는 국가 정치 체제의 전범(典範)으로 남았다.
역사적 인물들의 업적을 단순한 운의 산물로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큰 업적을 빠르게 달성한 군주들은 대부분 중요한 순간에 행운의 덕을 크게 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운을 빼고 평가해야 한다는 기준이면 다른 수많은 군주들이 평가절하 당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7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프로이센의 부흥을 이끈 대왕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아래 합리적 가정을 배격하는 결과론적인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미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될 당시 프로이센을 상대하던 다른 국가들도 국력이 바닥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도 표트르 3세의 결정을 번복하며 재참전한 것이 아니라 한동안 유럽 전선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럽의 군주들은 프로이센의 군주처럼 군복을 입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이 관례는 20세기 1차 세계대전이 끝나서야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적 승리의 결정적 발판은 그의 능력과는 별개로 옐리자베타 여제의 적절한 시기의 사망과 이어진 표트르 3세와의 기적 같은 정전 협정이었다. 위의 반론은 모두 그의 전술적, 통치 능력에 대한 변호일 뿐 그가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의 능력을 떠나, 엘리자베타 여제의 사망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또는 표트르 3세가 점령한 땅을 배상금 등의 대가 없이 반환하는 비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더라면[8], 프로이센의 운명과 프리드리히 2세의 평가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기적적인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프로이센은 결국 굴욕적인 패전을 겪고 프리드리히 2세의 치세 동안 확장했던 영토도 대부분 다시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9] 프리드리히 2세는 위대한 전술가로는 변함없이 남았겠지만, 동시에 프로이센을 파멸로 이끈 전쟁광이란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프리드리히 본인조차 기적 직전까지도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인데 당연히 운적인 요소가 크지 않았겠는가.
위의 옹호부분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순점이 많은 게 우선 표트르 3세의 제위기간과 그 이후를 비교해보면 상황이 매우 다른데 우선 표트르의 삽질로 러시아가 점거한 콜베르크[10] 등 주요 전략 거점은 피한방울 안흘리고 프로이센이 이미 다시 점거한 상황이다. 전쟁이 게임도 아니고 한번 해체한 동원체제를 다시 돌려야하는데 그 기간과 비용이 짧은 게 아니다. 결국 완전히 달라진 상황때문에 러시아가 재참전을 하지 않은점을 프리드리히의 업적으로 돌리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거기에 유럽국가들이 따른건 프리드리히의 군국주의적 문화와 프로이센의 동원시스템이지 프리드리히의 삽질로 평가받는 외교나 국가전략은 아무도 심지어 같은 프로이센과 그 후계국가들도 따라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비슷한 상황으로 평가받는 1,2차대전 독일조차도 프리드리히만큼 전방위적으로 적을 만드는 짓은 하지 않았고 그런데도 프리드리히의 기적이 없어서 패망한다.
프리드리히 2세의 과대평가 주장이 강력해지는 이유는 위의 시나리오가 오히려 일반적인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합리적인 가정을 배격하는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자세도 바람직하지 않다.
4. 기타
- 한국에서는 몇몇 학습만화의 오류[11] 때문에,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그저 음악과 문학만 사랑했던 유약해빠진 샌님이었다가 왕위에 오르자 갑작스레 전쟁광으로 돌변했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프리드리히가 어렸을 적부터 문예를 사랑했으며 풍부한 교양과 감수성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청소년 시절부터 꾸준히 야전 훈련과 군사학 수업을 받았기에 군사적 식견 또한 풍부했고 전쟁과 무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 그가 왕위를 계승하고 곧 전쟁을 일으킨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프리드리히는 부드러운 교양인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외골수에 독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만사에 타인을 불신하는 등 냉소적인 태도가 강했다. 계몽군주치고는 아래 폴란드 혐오 관련 단락에서도 나오듯 인종차별주의 정서를 극복하지 못한 모습도 보였다.[12] 험난한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성격이 이렇게 삐뚤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13] 특히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혹은 타인이 자신의 견해에 토를 다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신하들과의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후술하겠지만 세금을 거두기 위해 커피 밀매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커피 냄새 탐지원까지 창설했을 때에는, 측근들조차 아연실색하여 만류했으나 프리드리히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였다. 말년에는 나이도 많았을 뿐더러 7년 전쟁을 거치는 동안 단순한 일국의 군주를 초월해서 이미 온 유럽의 위대한 전쟁영웅이 되어있었기에, 아무도 프리드리히를 말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고질적인 쇠고집은 더욱 심해졌다.
- 집안이 전부 군인인 호엔촐레른 가문[14]답게 프리드리히의 남동생들 또한 지휘관으로서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프로이센의 장군이었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의[15] 재능이 특출났다. 프리드리히 대왕 최악의 패배인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도 유일하게 전황을 똑바로 파악하고 있던 지휘관으로[16], 전투 결과 프로이센군이 완전히 와해되자[17] 그것을 수습하기까지 했다. 이 전투 이후 프리드리히는 동생을 완전히 신뢰했다. 7년 전쟁 유럽 전선의 마지막 전투인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게 한 지휘관 또한 바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였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까지만 해도 프로이센군 대부분이 자국민이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대에는 외국인 병사의 비율이 반을 넘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국민들을 믿지 않거나 외국인 병사들을 특별히 선호한 것이 아니라, 세금과 인구 문제로 인한 판단이었다. 프리드리히가 물려받은 프로이센의 인구가 200만명을 좀 넘을 정도였는데, 군대는 8만명이였다.[18]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19만명으로 늘렸는데, 군대를 순수하게 자국민들로 채우면 안 그래도 부족한 민간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세금을 낼 사람도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자국민들은 민간인으로 둠으로써 세원을 확보하고, 그 돈으로 외국인을 고용해 병사로 쓰는 쪽을 선호했다. 물론 200만 명에서 8만 명도 한계까지 징집한 수준인데 여기서 더 쥐어짠다고, 19만 고용할 돈이 나올리는 없고 영국의 자금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영국의 지원이 끊기자 프로이센군도 같이 쪼그라들었다.[19]
-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인을 굉장히 혐오했다. 폴란드의 귀족공화정을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정부"라고 혹평했고,[20]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면서 폴란드인들을 이로쿼이나 유인원에 빗대기도 했다. 폴란드 분할로 서프로이센을 얻은 후에는 폴란드 농민과 귀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거나 내쫓고, 그 땅에 독일인들을 정착시켜 독일의 일부로 동화하는 정책을 꾸준히 수행했다. 프리드리히 이후의 국왕들 역시 구폴란드 지역의 독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 프로이센 왕국 해체 직전인 1918년에는 서프로이센의 독일인 비율은 40%, 독일어를 제1언어로 구사하는 인구의 비율은 70%까지 증가한다. 다만 이게 폴란드인의 반발을 초래해서 포젠 지역은 폴란드 내에서도 민족주의가 유달리 강성한 지역이 되었고, 결국 1918년 대폴란드 봉기와 그에 따른 독일인의 피난으로 인해 폴란드 서부에서 독일인 세력이 반쯤 무력화된다.
- 이탈리아반도의 정세를 보고 사르데냐 왕국만이 유일한 국가라는 평가를 남겼다. 그가 죽고 100년도 되지 않아 사르데냐 왕국의 주도로 이탈리아 통일이 이루어졌음을 감안하면 국제정세를 읽는 감각이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21]
- 1786년 남긴 정치적 유언에서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슐레지엔만 국가의 실질적 본체로 구성되면 충분하며 동프로이센은 적대행위가 시작되자마자 버려야한다."고 언급했다.[22] 프로이센 왕국이 프로이센 공국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후계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며, 동프로이센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호엔촐레른 가문이 동프로이센에 별 신경을 안 썼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23][24]
- 개를 좋아해서 애완견을 많이 키웠는데, 특히 개를 두고 "사람의 가장 좋은 친구"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인물로도 알려졌고 그 중에서 그레이하운드를 제일 좋아했다. 인간은 개만도 못하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고 죽을 때도 유언으로 자신이 지역은 상수시 궁전 뜰의 충견들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백부이자 선왕인 프리드리히 2세를[25] 차마 서민처럼 땅 속에 묻는다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서, 백부의 유언과는 달리 그의 시신을 포츠담 가르니존 교회에 석관묘 형태로 안장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폭격으로 유해가 파괴될 것을 우려해 아돌프 히틀러가 튀링겐 주 베른테로데의 소금 광산으로 석관을 옮기라고 지시했고[26]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27일, 미군이 유해를 찾아내 유언대로 이장하려 했으나 상수시 궁전이 있는 포츠담이 소련 관할이 된 관계로 1946년 마르부르크 성에 임시로 이장되었다가 1953년 서독 정부가 본관인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호엔촐레른 성으로 다시 이장했고 30년 넘게 호렌촐레른 성에 안치되어 있었다가 1990년 독일이 통일이 되고 1년 후인 1991년, 사망한 지 205년만에 유언대로 독일 정부에서 포츠담으로 유해를 이장하여 상수시 궁전 정원에 안장되었다.
-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이 그랬지만 프리드리히의 일상어는 독일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정무 언어로 프랑스어를 썼고, 프리드리히가 남긴 모든 글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한 신하와 독일어 vs 프랑스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 적도 있을 정도다.
- 물론 평생지기 볼테르와의 대화와 서간 왕래도 전부 프랑스어로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 편지라는 것들 중에 뭔가 비범한 것들도 섞여 있다. 볼테르가 포츠담에 기거하던 시절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람을 시켜 보낸 편지에는 웬 그림 문자가 섞인 분수[27] 하나가 적혀 있었고, 여기에 대한 볼테르의 답장은 더 간단해서 "Ga!"라고만 덜렁 적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프리드리히 대왕과 볼테르는 프랑스어를 이용한 말장난을 주고 받은 것.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낸 메모의 분수 숫자를 프랑스어로 읽어 보면 "Deux mains sous pe à cent sous scie"[28]가 되는데, 이것은 발음이 같은 프랑스어 문장인 "Demain souper à Sanssouci", 직역하면 "내일 상수시 궁전에서 저녁식사"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즉 프리드리히 2세가 볼테르를 저녁 만찬에 초대한 것. 또한 볼테르가 보낸 "Ga!"[29]는 프랑스어로 G와 J가 같은 발음이므로 독일어 Ja, 즉 Yes!라고 답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의미의 답변이 들어 있다. Ga를 "Gé grand, A petit"(대문자 G, 소문자 a)라고 풀어서 읽으면, "J’ai grand appétit"와 발음이 비슷해진다. 이 "제 그랑드[30] 아뻬띠"라는 말의 뜻은 "아주 배가 고픕니다!". 즉, "시장하옵니다 폐하!"라고 답변을 보낸 것. 그리고 실제로 볼테르는 다음 날 상수시 궁전에 등장함으로써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 전해지는 일화로, 궁의 정원에서 재배 중이었던 벚나무의 체리를 참새들이 먹어치우자, 화가 나서 자기 벚나무에 참새가 1마리도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참새가 오지 않아 오히려 벚나무에 벌레가 꼬이고 병들어 버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참새를 내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너무 명확하기에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 위에서 잠깐 지나가듯 언급되었지만 음악에 대해 관심과 조예가 대단히 깊었다. 1749년에는 그 유명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으로 초청했고, 프리드리히 본인이 바로크 시대의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아힘 크반츠에게 플루트를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프리드리히 곁에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측근으로 있었다.[31] 아무튼 본인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주위에 이처럼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았던 덕에 프리드리히는 인류 역사상 그리 흔치 않은 "군주 겸 작곡가"가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음악을 직접 들어보자. 듣기 쾨니히그레츠 행진곡에 영향을 주었던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 역시 프리드리히가 작곡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300여 곡이나 되는 자작곡이 있고 연주도 자주 한 탓에 천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플루트 연주자로서의 능력은 잘 해봐야 2류 정도였다는 게 당시의 평가이자 함정. 더군다나 바로크 음악의 시대가 끝나가던 시절에 대략 반 세기 전에나 유행하던 스타일을 고집했던지라, 프리드리히의 음악 취향은 좋게 말하면 고풍스러웠고 돌려 말하면 "옛 음악에만 꽂힌" 고전 덕후나 마찬가지였다.
- 강선의 개념을 고안한 인물인 벤자민 로빈스의 저서 <새로운 포의 원리>가 발간되자, 직접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번역을 맡겨 탐독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진성 중의 진성이자 성공한 밀덕 그 자체였다.
- 커피를 좋아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프리드리히가 마시던 커피는 샴페인으로 끓여서 겨자로 맛을 낸 것이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마셔서 담당 의사에게 마시는 양을 줄이란 말을 들었지만, 줄여서 오전에 7~8잔, 오후에 한 주전자였다.[출처]
- 이 시기에 커피와 관련된 웃픈 직업이 있었는데 커피 냄새 탐지원이었다. 커피가 프로이센으로 들어온 후 널리 보급되었는데, 문제는 커피에 붙은 세금이 장난 아니게 높았던지라[33]밀수가 성행했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으로 파탄난 재정을 메꿀 겸 밀수를 단호히 금지하는 한편 허락 받지 않고 커피 볶는 것마저 금지시켰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볶은 커피가 있는지 알아오라며 커피 냄새 탐지원이라는 희한한 직업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남의 부엌을 멋대로 뒤질 수 있었을뿐더러 불법적으로 볶은 커피를 찾아내면 추가 수당을 얻어냈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일했다. 당연히 서민들의 원성을 살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죽음과 동시에 이 희한한 직업 또한 사라졌다.[34]
- 중국의 문화를 동경해서 말년의 거처로 지은 상수시 궁전의 정원에는 중국식으로 설계한 다방(茶房)이 있는데, 건물 주변에 중국식 복장을 입은 동상을 세워 놓고 천장에도 중국 화풍을 흉내낸 그림을 그려놓았다고. 다만 중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좋아한 것은 아니고, 당시 유럽에서 중국의 도자기[35]가 유행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 이것은 비단 프리드리히만의 경향이 아니어서, 이 무렵에 지어진 왕궁을 보면 중국산 도자기를 한가득 진열해 둔 방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 감자 이야기도 그렇고 또 군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탓에, 평소 식사도 대충 감자로 때웠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 매일 거창한 만찬을 즐기는 것은 물론이었고, 말년에 병으로 골골거릴 때도 푸짐한 고기 요리와 술, 과자를 즐겼다.
- 앞서 서술했듯이 아버지의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며 자랐으며, 이런 경험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평생 동안 그늘을 드리웠다. 나이가 50줄의 노년이 되어서도 왕태자 시절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강제로 체포되는 악몽을 꾸거나, 꿈속에서 결국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안도하는 꿈을 꾸었다는 등의 기록이 프리드리히 2세의 개인비서들을 통해 남아있다. 그런지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폐쇄적이고 인간 불신도 있었으며, 심지어 개의 충성심을 극찬하며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매우 고독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말년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이 세상을 뜨자, 기르던 그레이하운드들만을 심적으로 가까이 했다고 하며 자신이 죽으면 애견들 곁에 묻어달라는 부탁도 남겼다.
- 한 대위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폐하와 같은 훌륭한 전략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요?"하고 묻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사를 열심히 연구하라는 충고를 남겼다. 하지만 그 대위가 "그런 이론보다 수많은 실전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재차 질문하자 대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대에는 60회 이상 전쟁을 치른 노새가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노새다." 즉, 외형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전쟁사를 통해서 전략의 핵심과 묘리를 찾으라는 것이다. 강병을 육성하는데는 어설픈 실천보다 체계적이고 철저한 이론 공부의 중요성을 설파하는데 종종 인용되는 사례이다."A mule, though he should have made ten campaigns under prince Eugene, would not have improved in his tactics.""어떤 노새가 오이겐 공 밑에서 열 번의 전투에 참가했다 한들, 전술 능력을 함양하지는 못했을 걸세."
다만 이 경구가 등장한 최초의 판본에 따르자면 대왕이 프랑스군의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 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다른 판본들에서는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어록이라고도 한다. 어느 판본이든지 간에 이론에 대한 학습과 논리적 사유 없이 경험만 아무리 쌓은들, 발전은 없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 증조부 대 때부터 시작해 프리드리히 대왕 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정책은 분명 단기적으로는 유럽의 변방 소국에 불과하던 프로이센을 열강의 반열에 올려준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으나, 장기적으로는 근현대 독일의 군국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36] 당시 유럽 어느 나라가 안그랬겠냐마는 프리드리히 대왕 때 절정에 이른 군국주의 정책의 결과 프로이센군의 규모는 급격하게 커졌고[37], 이는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가져와 구타, 가혹행위, 병영부조리가 군 내부에 만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이센군의 악습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샤른호스트의 군제개혁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오히려 샤른호스트 이후의 프로이센군과 그의 후신인 독일 제국군은 병영부조리나 가혹한 형벌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적었다.[38] 일본이 개항한 게 아무리 빨리 잡아도 1854년인데 이미 50년 전에 없어진 프로이센군의 악습을 벤치마킹 했다고 볼수는 없다.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가혹행위가 유명하지만 전열보병 시기의 전장에서는 적의 총알이 날라오면 그대로 맞으면서 진형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유럽의 모든 군대에서는 비인간적인 형벌이 난무했다.
-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영화《몰락》[39]에서는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며 고뇌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죽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이 표트르 3세의 활약을 재현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을 표현한 장면. 실제로 괴벨스도 히틀러에게 루즈벨트의 부고를 전할때 '여제가 죽었다'며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죽음과 동일시하기도 했다고 하며,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도 반공주의를 내걸고 소련에 맞서 연합국들과 강화하려 했으나 서방의 떨떠름한 반응과 소련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망상을 한 게 히틀러 하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40] 사실 트루먼도 갑자기 전쟁을 그만둘 사람은 아니었지만, 당시 미국인들의 대부분이 전쟁수행 의지가 왕성했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나치의 만행들이 밝혀진 상황에서 서방 진영은 당연히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보다, 나치 독일을 더욱 위험하게 여겼고 히틀러의 생각은 망상으로 끝났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은 실제로 퓌러붕커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은 함량을 낮춘 악성 은화를 주조했는데, 그 하청을 맡긴 게 유대인이었다. 당연히 독일인들은 (자기 왕에게 그럴 순 없으니) 횡령한 돈으로 흥청거리는 유대인을 향한 혐오가 짙어졌다.
- 전해지는 바로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외국인 용병들은 독일어를 잘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프리드리히가 하는 질문은 "나이가 몇인가?", "우리 군대에서 몇 년간 근무했나?", "근무 조건과 급식 중 무엇이 더 만족스러운가?"로 거의 정해져 있어서 그냥 대답을 정해 두고 프리드리히가 물어보면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리드리히가 어느 용병[41]을 만났는데, 하필 그 날은 프리드리히 2세가 질문 순서를 바꿔서 내서 굉장히 대답이 이상하게 나왔다고 한다. 그 질답을 서술해보면 "우리 군대에서 몇 년간 근무했는가?", "25년(25세) 입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2살(2년)입니다." 이런 괴상한 대답이 나오자 어이가 없어진 프리드리히 2세는 "대체 그대와 나 중 누가 바보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것을 알아들을 리 없는 용병의 대답은 "둘 다입니다."[42][43]
- 후대에 7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프리드리히 대왕 척탄병 행진곡》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 야사로 일명 방앗간 재판이 있다. 상수시 궁전을 세울 당시 인근에 풍차 방앗간이 있었는데, 이게 거슬린 프리드리히는 방앗간 주인에게 철거하라고 강요했다. 그러자 방앗간 주인은 "조상 때부터 자자손손 물려받은 방앗간을 함부로 없앨 순 없다. 차라리 재판소에 고소를 하겠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철거를 철회하고 그대로 뒀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이야기는 1787년에 장 찰스 라보(Jean-Charles Laveaux)가 프랑스어로 출간한 책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삶(Vie de Frederic II, Roi de Prusse)》에서 창작한 이야기이다.
4.1. 감자 대왕(Der Kartoffelkönig)
아래 두 링크를 참고하면 좋다.
프로이센에 감자를 보급한 인물인데 당시 프로이센에서 감자를 키우기는 했지만 사람이 먹는 게 아니고 돼지 먹이로 쓰는 작물이었고, 탄수화물 공급은 전적으로 밀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밀값이 요동치기라도 하면 식량 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처음으로 감자를 주목하게 된 건 1747년에 있던 포메른 기근이었다. 당연히 기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식습관, 관념등을 모두 흔들어 버리는 조치인지라 실레시아 일대에 먼저 감자에 대한 홍보 및 섭취 독려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753년 3월 24일, 감자 칙령(Kartoffelbefehl)의 첫번째 조치였다. 그러나 감자를 어떻게 키우고, 수확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농부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한 프리드리히는 1757년 4월 5일에 감자와 관련된 가이드를 농부들에게 제공하라는 두번째 감자 칙령을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파생된 전설이 바로 아래 후술할 에피소드이다.
1774년 전국에 대흉작이 발생하자 이 문제를 해결할 구황작물, 식량 증대, 전투식량 확보 등의 목적으로 전국에 감자를 심으라고 명했는데, 사방에서 "맛 없어서 개도 안 먹는 걸 인간더러 먹으라니 너무하지 않사옵니까."라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2세는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자신의 수라상에 매일 감자로 만든 요리들을 적어도 한 가지 이상 필수로 올리라고 명령했다. 이로서 감자를 개도 안 먹는다고 하면 그 감자를 매일 먹는 왕은 개만도 못하다고 말하는 셈이 되었기 때문에 개도 안 먹는 걸 먹으라고 하냐는 불평은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자 보급이 영 지지부진하자, 프리드리히는 꾀를 내어 "지금부터 감자는 왕실 수라와 귀족의 요리에만 올릴 수 있다."고 칙령을 내리고 감자밭에 보초까지 세웠다. 이렇게 되자 사람 마음이 하지 말라는 건 더 하고 싶어진다고, 감자를 돼지 사료라 경시하던 일반 농민들조차 "감자라는 게 사실 엄청 맛있는 게 아닐까?", "국왕 폐하께서 드시는 감자는 여기 감자보다 훨씬 깨끗한 감자일 거야." 하는 생각에 몰래 대대적으로 재배하여 먹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이 감자를 가져가게 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밤에는 보초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의 직할지에 대규모로 감자를 기르고 여러 마을들의 공터에도 감자밭을 꾸며놓으면서, 그 유명한 '거인 연대'라고도 불리는 척탄근위대로 하여금 감자밭을 지키게 하였다.[44] 물론 감자 보급이 목적이었으므로, 밤에는 감자를 가져가기 쉽도록 일부러 초병을 철수시켜서 밭을 방치했다. 당연히 농민들은 경비가 허술한 밤을 틈타 감자를 서리해 갔고, 결국 프리드리히의 계획대로 감자가 프로이센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이처럼 국왕이 직접 나선 덕에 감자 보급이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1778년~1779년에 걸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맞붙은 바이에른 계승 전쟁 때는 두 나라의 병사들이 모두 하라는 전투는 안 하고 전투 식량 확보를 위한 감자 약탈을 더 열심히 해댄 탓에 감자 전쟁이라는 별명이 생기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약탈 대상이 된 바이에른 지방의 농부들은 엄청나게 죽어 나갔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 보급의 공로로 감자 대왕이라는 애칭과 엄청난 존경을 얻었고, 현대에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덤을 방문할 때 감자를 두고 오는 독일인들이 많다. 감자가 놓여 있는 왕의 무덤 모습. 감자의 꽃말이 복종임을 고려해보면 이는 "당신을 여전히 우리의 주군으로 인정하겠습니다." 하는 의미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다.
4.2. 성적 지향
성소수자였음이 거의 확실시되는 인물이다.애인들이었던 한스 헤르만 폰 카테, 미하엘 가브리엘 프레더스도르프 등 남성 연인들과 장기간에 걸쳐 관계를 맺었고 볼테르처럼 프리드리히와 장기간 교유한 인사들이 그가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고 기록했기에 성소수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하엘 가브리엘 프레더스도르프는 평민의 아들이자 프리드리히 대왕보다 4살 연상으로, 둘이 어느 시기에 처음으로 조우했는지는 기록마다 조금 분분하다. 어릴 때 발레를 배우다 만났다던가 또는 프리드리히가 폰 카테와 도망을 치려는 시도를 하던 중에 동료 군인으로서 처음 조우했었다는 설들이 있다. 둘은 당대 예술 기조와 역사학에 대해 공통된 학구심이 있었고 그 때문에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프리드리히는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프레더스도르프에게 영지를 수여했고, 프레데어스도르프는 개인 집사, 왕립 극장 총감독을 거쳐 후일 왕정 회계사가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평민 출신으로는 내각에 처음으로 등용된 것이라 풍문이 많았다고 한다.[45]
프리드리히가 상수시 궁전을 지었을 때 둘의 침실은 아예 같이 붙어있는 설계로 지어졌다. 그러나 평민 출신인 프레데어스도르프는 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반대에도 국왕에게 재정적 후원을 했던 부유한 은행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프레데어스도르프는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8년에 사망했다. [46]
다만, 그를 동성애자로만 볼 수는 없다. 청년기에 성매매 여성들과 관계를 맺다 성병에 걸렸다는 기록들도 존재하며, 프리드리히의 행적에 대해 서술한 역사 서적에서는 성병 때문에 생식기를 약간 절단했던 일에 좌절해 여성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남성에게만 집착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프리드리히의 생식기 절단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정상인 남성의 것과 비교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라고 평했지만, 수술을 당한 프리드리히에게는 그것이 큰 콤플렉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이자 왕비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는 평생 서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세자 시절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내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왕위를 상속받자마자 아내인 엘리자베트와 아예 다른 건물에서 살기 시작했을 정도로 사이가 소원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86년 8월 17일에 임종했는데, 엘리자베트와 프리드리히 대왕이 마지막으로 서로 얼굴을 본 날이 그 해의 1월이었을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유일하게 가까이 했던 여성은 그의 누이인 빌헬미네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자식은 없으며, 죽은 뒤의 왕위는 조카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계승했다.
고대 그리스 테베의 신성부대, 알렉산드로스 대왕[47], 하드리아누스 황제, 폰 슈토이벤 남작과 함께 동성애가 국력이나 군사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에 대한 반례로 거론되기도 한다.
근세 유럽 군주 중 최초로 아웃팅 당한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화가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Marriage A-la-Mode: 4. The Toilette》작품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상징하는 플룻 연주가가 등장하는데, 대놓고 제우스와 가니메데와 오버랩되게 그려놓았다. 그런데 프레드리히 2세는 스스로 딱히 풍문이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령 상수시에서는 남성 시종과 남성 귀족 청년들만 데려다놓고 살았고,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 등 동성애 관계의 유명한 고대 그리스 신화 영웅들을 주제로 한 정자를 세워놓았다.
4.3. 대왕의 추종자들
- 표트르 3세
러시아 제국의 황제인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추종자들중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또한 프로이센의 능력을 높이 사는 한편 다른 유럽의 열강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동맹국과 동맹을 파기하였고 이로인해 패망직전까지 갔던 프로이센 왕국은 진짜 기적같이 살아났다. 반면 러시아 제국이 다이긴 전쟁을 수포로 돌리고, 전쟁으로 얻을수 있는 국익도 잃었으니 내부적으로 분노가 터져나왔다.[48] 결국 표트르는 자신의 아내가 일으킨 쿠데타로 폐위되어 쫓겨난 뒤 비참하게 죽는다. 지금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더불어 암군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49]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제군, 모자를 벗게. 이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린 여기 있지 못했을 걸세."
프랑스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로이센을 점령하고 포츠담 성당에 있던 프리드리히의 묘소를 참배할 때 프리드리히의 석관 앞에서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추며 휘하의 원수들에게 저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한 후 제일 먼저 가져간 물건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계와 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전리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나폴레옹의 모자와 칼은 베를린 독일 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참고로 나폴레옹이 가져간 칼은 파리의 앵발리드에서 전시하였고, 시계는 나폴레옹 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될 때까지도 가져갔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검과 혁대는 1814년 프랑스 본토 전역에서 파리가 연합국에 점령당하자 노획당하지 않기 위해 세리뤼에 원수의 명령으로 연합국의 1417개의 군단기와 함께 소각당하고 만다.
- 아돌프 히틀러왕이 획득하고, 수상이 틀을 잡고, 원수가 방어한 것을, 병사가 구원하고 통합한다.
Was der König eroberte, der Fürst formte, der Feldmarschall verteidigte, rettete und einigte der Soldat.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 역시 프리드리히 대왕을 존경했으며, 집권하자마자 프리드리히 대왕을 독일의 영웅계보라고 띄워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반에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죽자 자신에게도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제2의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일어나주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히틀러 입장에서는 불행히도 루스벨트의 후임 미국 대통령이 된 해리 S. 트루먼은 표트르 3세와는 달리 나치 독일에 매우 강경한 인물이었다. 결국 헛된 희망을 꿈꾸기만 하던 히틀러는 1945년 4월 연합군의 협공 속에 수도 베를린 퓌러붕커에서 자결하고 그의 나치 독일도 완전히 패망하여 몰락했으며, 사후에도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기록된 프리드리히 대왕과는 정반대로 독일을 넘어 전 인류의 흑역사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범죄자로 기록되었다.[50]
5. 갤러리
콜린 전투 직후의 프리드리히 대왕.
요한 게오르크 치제니스(Johann Georg Ziesenis)의 그림.
6. 대중매체
- 명성에 걸맞게 근세 유럽을 다루는 Europa Universalis IV에는 행정, 외교, 군사 모든 능력치가 6점 만점인 소위 6/6/6 군주로 나온다.[51]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문명 1, 문명 4 등의 게임에서 독일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 등장인물 알프레드 프레데릭의 모델이다.
-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 중인《합스부르크의 데릴사위로 살아남기》에서는 주인공이 빙의한 대상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여기서는 라이벌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맺어졌으며 프로이센의 왕이 아니라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되었다.
- 위와 마찬가지로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하다가 문피아로 넘어가 유료화된 소설《감자세자와 뒤주대왕》에서는 조선의 사도세자와 상호간에 빙의해버렸다. 조선을 프로이센 맛으로 갈아엎고는 건륭제와 요서대첩을 벌이며 만반도를 이룩해 칭송받는 중.
[1] 후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아버지.[2] 하술되어있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상어는 프랑스어였으며, 독일 문화를 경멸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그에게 프로이센은 nation(민족 집단)이 아니라 state(정치적 실체)로 의미를 가졌던 셈.[3] 동명의 독일 군가도 있다.[4]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추구하는 군주의 모습은 도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필요에 따라 군주는 악행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 잔혹하면서도 현실적인 면들을 군주가 지녀야 할 능력으로 군주론에 집필했다. 반면 반마키아벨리론에서는 "정치의 소임이 도덕(= 신민의 안녕과 이익에 봉사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5] 다음으로 순위가 높은 군주는 94위를 차지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다. 군주는 아니지만 전후 정부수반인 독일 총리까지 포함하면 콘라트 아데나워가 1위이다.[6] 단, 순전히 운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은 당시의 러시아와 프랑스로서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는 관점도 있다. 그러므로 속단은 옳지 못하다. 자세한 내용은 7년 전쟁 문서 참고.[7] 러시아가 전선에서 철수하는 것은 외교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으며, 표트르 3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러시아 제국의 군주가 되었더라도 프로이센과의 정전 협정을 체결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하지만, 표트르 3세와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항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러시아 제국의 정전 협정은 단순한 정전을 넘어, 승전국으로서의 모든 이권을 포기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표트르 3세는 점령한 프로이센 영토를 배상금 없이 반환하며, 철수하는 러시아군 중에서 2만명을 남겨 프로이센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프로이센에게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물론,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2세의 영웅담에 감동받은 것은 프리드리히 2세의 실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표트르 3세의 처신과 능력과는 별개로 운이 매우 좋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의 좋은 근거가 된다.[8] 설혹 프리드리히가 표트르 3세를 즉위시키는 공작을 했다면 모를까, 그런 기록은 없다.[9] 당시 유럽 왕조 국가들은 어지간하면 상대 왕조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왕위계승권 전쟁이 아닌 다음에야 패전해도 영토를 약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이 전부였다.[10] 여기가 중요했는데 러시아가 유일하게 얻은 부동항으로 보급의 핵심지역이었다[11] 특히 8~90년대에 범람했던 각종 만화 세계사 시리즈. 이 오류의 원조는 일본 슈에이샤에서 발간된 16권짜리《세계의 역사》에 이렇게 묘사된 것을 너도나도 베껴서이다.[12] 물론 당시는 문화상대주의의 발달이 현대에 비하면 미약했던 시기이긴 했지만, 이미 바야돌리드 논쟁이 끝난지 한참 지난 시점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야만인 취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굳이 뽑자면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적 원주민 진영을 저주하는 정도. 더군다나 아마 이로쿼이에 대해 무지해서 그랬겠지만, 그가 멸시한 이로쿼이 연맹은 동맹국이었던 영국의 편에서 싸웠다. 훗날 벌어진 원주민과 유럽인들과의 갈등도 진짜로 원주민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거나 열등인종 취급해서 벌어졌다기보다는 구대륙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단순히 영토를 둘러싼 갈등에 가까웠다.[13]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빈정대는 것을 좋아했다는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타고난 면도 있었다.[14]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대왕 때문에 군인 집안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 가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장에서 활약한 인물이 거의 없다. 그나마 전장에서 활약했어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요아힘 2세 헥토어처럼 군사적인 재능이 젬병인 경우가 더 많았다. 무력이 출중했던 왕실은 오히려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가문이다.[15]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6남.[16] 대왕이 러시아 제국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공격을 중지하라고 건의했으나 대왕은 공격을 강행했고 하인리히의 예상대로 예비대인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배후를 공략했다.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다시 공격을 가했으나 공격은 러시아군의 완강한 수비로 막힌 상태에서 아까의 예비대를 포함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반격을 가했고, 결국 프로이센군의 좌익이 붕괴되면서 설명 생략. 프리드리히가 동생의 건의대로 공격을 중지했으면 이겼을 것이다.[17] 5만 명에 달하던 프리드리히의 병력이 전투 이후 3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본인도 절망하여 "난 이제 끝났다."면서 베를린으로 편지를 보냈을 정도. 물론 3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죽은 게 아니라 대부분이 도망치면서 흩어져서 그렇다.[18] 일반적으로 평시 군대 규모는 전 인구의 1% 내외가 적합하다. 즉 2만 명이 적정선이나 현실은 이에 4배였던 셈.[19] 프리드리히 2세가 인구를 늘리기 위해 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낙태마저 금지했다는 썰이 있는데 사실무근이다.[20] 빠른 결단과 상명하복을 중시하는 군사국가의 특성상 프리드리히 2세가 가까이에 있는 정반대 체제의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취급을 한 것인데, 정작 그 자신도 제 독단으로 7년 전쟁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제국과 제2차 세계 대전의 나치 독일 프리퀄 찍으며 나라를 망하게 할 뻔했다.[21] 물론 사르데냐 왕국은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 시절부터 이탈리아반도에서 유일하게 외세와 맞설 수 있는 경쟁력을 가진 국가라는 평가를 받기는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토스카나 대공국이 여전했는데 베네치아 공화국과 토스카나 대공국이 이름만 남은 망조가 든 나라이고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이 인구만 많은 속빈 강정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국제 정세에 대한 그의 감각을 엿볼 수 있다.[22] 《강철왕국 프로이센》p.340[23] 실제로 빌헬름 1세는 포츠담으로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고, 북독일 연방의 깃발에 빨간색과 하얀색이 들어가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색이 들어갔다고 아주 만족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고향이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기원인 작센안할트의 알트마르크(Altmark) 지역을 가리켜 프로이센의 요람(„Wiege Preußens“)이라고 말했고, 빌헬름 2세는 국고를 쏟아부어 베를린 티어가르텐(Tiergarten)에 조상들의 동상을 만드는 뻘짓을 감행했는데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기 이전 아스카니아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 변경백들의 동상까지 만들었으면서도 정작 프로이센 공국의 알브레히트 공작과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작의 동상은 만들지 않았다.[24]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손이 세운 독일 제국은 동프로이센을 버리지 못 한 것이 원인 중 하나가 되어 패망하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독일이 프랑스,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 입안한 슐리펜 계획에 따르면 프랑스를 제압하는 것이 먼저이기에 러시아가 예상보다 강할 시 동프로이센 지역은 "일단 내준다."가 골자였다. 동프로이센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를 제압하는 게 더 먼저니까 러시아가 생각보다 강하다면 굳이 먼저 러시아와 싸워 이길 생각하지 말라는건데 문제는 이걸 안 지켰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부전선에 투입된 병사를 융커들의 반발로 인해 동부전선에 세웠다가 정작 동부전선에서는 이미 승리를 거뒀는데 서부전선이 위험해져서 동원된 병사를 다시 서부전선으로 내보내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결과가 되어버렸고 단기 결전을 목표로 둔 본 계획과는 달리 장기적인 참호전이 되어버렸다. 만약 동부 전선으로 다시 동원된 병사를 마지막 마른 강 전투에 투입시켰다면 서부 전선의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25] 프리드리히 대왕이 슬하에 자식 없이 승하하면서(앞서 서술했다시피 왕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평생 서먹했다.), 이후 왕위는 프리드리히의 형제였던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이었다.[26] 참고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해와 같이 탄넨베르크 기념묘지에 안장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아내의 유해, 샤를로텐부르크 궁에 안장된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의 유해 또한 소금 광산으로 피신했다.[27] 위키백과 설명 링크[28] 직역하면 "100 분의 톱에 양손 분의 p."[29] 또는 Ja!라고 보냈다고도 한다.[30] 뒤에 나오는 단어가 모음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grand의 d를 묵음 처리하지 않는다.[31] 대중들에게 유명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차남. 실내악 단원으로 있다가 훗날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로 가 악장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예산 감축에 따라 자신의 급료가 궁정 광대보다 낮아지자 미련없이 떠났다.[출처] 《먹거리의 역사 (하)》, 저자: 마귈론 투생-사마[33] 고가의 수입품이었던 만큼 사치품 수입은 무역흑자를 유지하려는 중상주의적 이상에 어긋난다는 여론과 악마의 음료라는 종교계의 반발 그리고 주로 서민층에서 커피의 대용 작물로 쓰이던 치커리의 경작지에 다른 작물을 심는다면 더 효율적이라는 시각, 당대 국민음료였던 맥주와 와인의 소비, 판매가 저하된다는 여론 등 복합적이었다.[34] 사실 커피 냄새 탐지원의 창설 목적은 단순히 세금을 더 거두는데 그치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실업자 신세가 된 퇴역병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35] 특히 인물 초상화가 그려진 청화백자.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일부러 주문제작했고, 도자기 열풍이 불다 보니 도자기에 그려진 초상화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36]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의 유산이 나치즘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편견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프로이센 항목 참조.[37] 특히 선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에는 전 프로이센 인구의 4분의 1이 군인일 정도였다.[38] 선진적이라는 인식이 있는 영국군마저 채찍형이 1881년까지 있었고 러시아 제국군의 사병 대우는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멸망 할때까지도 매우 개판이었다.[39] 히틀러가 부하들에게 연필 집어던지고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장면이 유명한 그 영화다. 패러디도 많이 되어서 유명한 장면.[40] 트루먼은 동방의 한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단 3일만에 파병 결정을 할 정도로 과감한 인물이었다.[41] 당시 이 용병은 굉장히 젋은 용병이었다고 한다.[42] 원래는 나이 25세, 군대 복무 2년째, 근무 조건과 급식 둘 다 만족이라는 뜻이었다.[43] 판본에 따라 시간대가 보불전쟁 이후로, 프리드리히가 빌헬름 1세로, 용병이 알자스-로렌 출신의 프랑스계 병사로 바뀐 경우도 있다.[44] 현대로 따지면 DEVGRU, 델타 포스 같은 최정예 특수부대가 고작 신품종 정부양곡 창고나 지키는 셈이다. 물론 사전에 '이 나라에서 오직 대통령 단 한분만 드실 수 있는 초 특수 품종!'이라는 식으로 밑밥을 팍팍 깔아두긴 했지만.[45] 물론 그냥 빽만 믿고 등용된 것은 아니고, 프리드리히가 왕세자이던 시절부터 후원을 받아 회계/재무 실습과 실무를 해왔기에 사무를 할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특히 프레데어스도르프가 주로 하던 일은 왕실이나 군사 자금 등을 적국 모르게 은닉하고 송달하고 운용하는 등의 업무였다. 당대 신생 강대국으로서 굉장한 고강도 업무였다.[46] 프리드리히의 정원사는 프레더스도르프의 침실을 '왕의 애인의 침실'이라고 수기에 남기기도 하였다. 물론 프리드리히는 별 신경 안 썼다.[47] 고대에는 유력자가 원하는 상대와 관계를 갖는 것은 그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며 이는 현대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성애의 개념과는 범주가 다른 것이므로 여기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거론하는 것은 조금 다른 경우가 될 수 있다. 당장 알렉산드로스의 부왕인 필리포스 2세만 해도 여러 부인을 둔 호색한으로 유명했으나 동시에 남성 애인들과의 염문설에 연루된 인물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남자와의 관계를 가져도 뛰어난 지휘관인 것을 생각하면 해당 인물들의 성애가 동성을 향하던 이성을 향하던 그게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라는 것이 요지이다.[48] 사실 이게 큰 문제였다. 이미 러시아는 얻을걸 얻었고 프로이센은 위기에 처한지라 협상에 있어서 유리한 상황이라 전쟁에서 발을 빼도 그간 얻은 이득을 보전하는 조건이라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푹빠져 얻은 이익도 토해내니 더 열받을 수 밖에...[49] 그나마 니콜라이 2세는 무능했지만 선량한 암군이라는 동정적인 평가가 공존하는데, 표트르 3세는 그런 평가도 없고 많은 작품들에서 표트르 3세를 저능아라고 일축할 정도다.[50] 애초에 두 사람은 격이 다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전쟁에서 파멸할 뻔한걸 빼고는 전반적으로 우수해 나름대로 정치철학 합리성과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지향했고 검소하고 부지런했으며 관료제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모든 면에서 그와 반대로 정치철학은 되도않는 게르만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음모론 등에 근거한 나치즘이었고 그나마도 그걸 담은 저서인 나의 투쟁은 본인 자신도 인정한 저질 작품이었고 통치 내내 합리성과 자유는 없었으며 게을렀고 지도자 원리에 따라 관료제의 비효율성만 극대화하였다.[51] 악바르 대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등이 6/6/6이고 세종대왕조차 6/5/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