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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57년 7월 11일 | ||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칼리닌그라드주 칼리닌그라드) | |||
사망 | 1713년 2월 25일 (향년 55세) | ||
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
재위기간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
1688년 4월 29일 ~ 1713년 2월 25일 | |||
프로이센 공작 | |||
1688년 4월 29일 ~ 1701년 1월 18일 | |||
프로이센 국왕 | |||
1701년 1월 18일 ~ 1713년 2월 2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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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어머니 오라녀나사우의 루이제 헨리에테 | ||
배우자 | 헤센카셀의 엘리자베트 헨리에테 (1679년 결혼 / 1683년 사망) | ||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1684년 결혼 / 1705년 사망)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조피 루이제 (1708년 결혼) | |||
자녀 | 루이제 도로테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
종교 | 기독교 (칼뱅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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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 왕조의 초대 국왕.2. 생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와 오라녀나사우의 루이제 헨리에테의 아들로 1688년 부친의 뒤를 이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로 즉위했다. 그가 살았던 절대 왕정 시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나 영국 국왕이 될 예정이었던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처럼 군주의 지위와 명성이 중요한 시기였다. 1696년부터 칭왕을 계획한 끝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원군을 제공하는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 산하 독일 왕국에 속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 기반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이었다가 부친이 독립시킨 프로이센 공국의 이름을 빌려 1701년 프로이센 국왕을 칭했고[1] 프리드리히 1세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아직 왕령 프로이센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외왕내제와 비슷한 형식으로 "König von Preußen"(프로이센의 왕) 대신 "König in Preußen"(프로이센에서의 왕)를 칭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프로이센 왕호는 그의 영지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국제 무대에서 여전히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국왕이 아닌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였다.[2] 애초에 프로이센 국왕을 칭했어도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전까지는 대외적으로 브란덴부르크로 불렸다.전쟁과 행정에는 별 관심이 없어 총신들에게 국정을 맡겨 국정 농단을 불러일으켰으며 낭비벽이 심했으나[3] 예술과 학문을 좋아하여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헌책을 받아들여 1700년 베를린에 과학아카데미를 창설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아들, 손자를 잘 뒀다.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부국강병을 적극 추진하였고, 손자 프리드리히 2세는 부국강병정책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프로이센은 북부 독일의 절대강자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다만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가정폭력범이고 아버지의 낭비벽을 매우 혐오해서 사후 부왕의 사치품을 죄다 팔아치우고 국방비에 부어버렸다. 물론 프리드리히 1세의 호화스러운 소비는 처음으로 왕을 자칭한 군주였으로 다소 위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3. 가족관계
3.1. 아내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헤센카셀의 엘리자베트 헨리에테(Elisabeth Henriette of Hessen-Kassel) | ||||
1녀 | 헤센카셀의 공세자비 루이제 도로테아 (Luise Dorothea, Hereditary Princess of Hesse-Kassel) | 1680년 9월 29일 | 1705년 12월 23일 | 프레드리크 1세[5] |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Sohie Charlotte of Hannover) | ||||
1남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왕자 (Prince Friedrich August) | 1685년 | 1686년 | |
2남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Friedrich Wilhelm I) | 1688년 8월 14일 | 1740년 5월 31일 |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슬하 7남 7녀[6] |
[1] 브란덴부르크 국왕을 칭하려면 아예 독립국이 되어야했는데, 브란덴부르크가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였기 때문에 독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란덴부르크 국왕을 칭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겸하는 독일왕과 동격이 되는 봉건제 상의 문제도 있었다.[2] 손자인 프리드리히 2세에 이르러 7년 전쟁에서 사실상 승전을 챙기고 폴란드 분할을 통해 왕령 프로이센을 차지하고 나서야 "König von Preußen"으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국왕은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하는 날까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지위도 역시 유지하며 황제선거에 계속 참여하였다.[3] 그 유명한 호박방도 원래는 프리드리히 1세가 아내를 위해 지은 것이다.[4] 영국 국왕 겸 하노버 선제후 조지 1세의 여동생.[5] 원래는 헤센카셀 방백이었으나 루이제 도로테아의 사후 스웨덴 여왕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재혼해 국서가 되었고 이후 아내에게 양위받아 스웨덴 국왕 프레드리크 1세로 즉위했다.[6] 프리드리히 2세, 스웨덴의 왕비 로비사 울리카, 하인리히 왕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