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1:23:08

쾨니히스베르크


1. 칼리닌그라드동프로이센 시절 명칭
1.1. 역사1.2. 흔적
2. 독일 구(舊) 브란덴부르크주의 도시3. 독일 바이에른주의 도시4. 독일경순양함

1. 칼리닌그라드동프로이센 시절 명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K%C3%B6nigsberg_Castle.jpg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쾨니히스베르크, 쾨니히스베르크 성
파일:Konigsberg_Nordbannhof-colorized.jpg
쾨니히스베르크 북역 앞 모습
파일:attachment/b0013361_4ce5ed0e0174e.jpg파일:attachment/b0013361_4ce5ebe5bb38a.png
쾨니히스베르크 시 문장 칼리닌그라드 시 문장
독일어: Königsberg in Preußen / Königsberg i. Pr.[1]


1942년 당시 쾨니히스베르크를 소개하는 영상

단치히[2]에서 동쪽, 발트 3국 리투아니아의 서남쪽에 위치한 러시아의 월경지 칼리닌그라드시의 과거 독일령 시절 지명.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수도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프로이센의 고도(古都)이자 동프로이센의 주도(州都)로 이름 높은 도시였다. 1939년 기준 인구는 37만 2천 명으로, 구 독일 제국 동방 영토의 도시들 가운데 인구가 두 번째로 많았다.[3]

1.1. 역사

1255년, 본래 발트인들의 영역이던 이 지역에 독일계 튜튼 기사단이 진출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본래 '왕의 산'이라는 뜻으로 튜튼 기사단에게 성의 건설 자금을 지원해 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오타카르 2세[4]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즉, 초기의 쾨니히스베르크는 북방 십자군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던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기반으로 발달한 군사 도시였다.

본디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는 마리엔부르크였으나 1454년 폴란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수도 마리엔부르크를 폴란드에 내주며 쾨니히스베르크가 기사단국의 새 수도로 선정되었다. 이후 1525년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에 의해 세속화되어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환된 후에도 이곳에 수도를 두었다.

1618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던 프로이센 공국이 요한 지기스문트[5]가 통치하던 직계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통합되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수도는 브란덴부르크의 수도 베를린으로 정해졌고, 쾨니히스베르크는 160여 년간 이어오던 프로이센 수도의 지위를 상실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인되었을 때도 수도는 여전히 베를린이었다.[6]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수도 베를린을 함락당했을 때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쾨니히스베르크로 임시 천도하여 이곳에서 프랑스군에 항전하기도 했으며 1945년까지 프로이센의 국가기록원(Preußisches Staatsarchiv Königsberg)이 있었을 정도로 독일 제국 시대에는 베를린, 포츠담, 호엔촐레른과 더불어 위상은 높은 편이었다. 다만, 도시의 상징성과는 별개로 19세기 당시 루르 공업 지대로 대표되는 독일 서부 지역이 고도의 산업화를 달성한 반면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부의 구 프로이센 지역은 낙후된 농업 경제에 머물렀기 때문에 도시의 위상이 18세기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했다.

발트해와 폴란드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요충지이자 독일 제국의 발원지 중 하나라는 상징성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예비 병력들의 발이 묶였다.프리드리히 대왕의 말을 들었어야지 [7]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서프로이센, 포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갈리치아와 더불어 러시아 제국의 합병 목표였으며[8]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에도 차라리 다른 곳을 내줄지언정 동프로이센을 포기하지는 않았고, 단치히 회랑을 내주면서 독일 본토와 분리되었지만 이 지역은 계속 독일령으로 남았다.[9]


1928년의 동프로이센 지역.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 모습.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폴란드단치히나치 독일에 점령당하면서 다시 독일 본토와의 육상 통로가 연결되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1945년 독소전쟁에서 동프로이센 공세를 통해 소련이 독일을 밀어내고 도시를 점령하며 700년 가까이 이어지던 독일 시대는 종식되었다.[10]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은 둘로 나뉘어 남부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나머지 지역은 소련(당시 소련에 합병된 동프로이센의 대부분이 러시아 SFSR)에게 귀속되었고, 독일계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말기에 서쪽으로 피난가거나, 전투에서 죽거나, 남은 사람들도 전후 영토 회복의 빌미를 없애기 위해 오데르-나이세 선 이서의 독일 영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소련으로 할양된 이후에도 잠시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라는 이름으로 쾨니히스베르크의 러시아어식 표기를 유지하다가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로 개칭되었다. 현재까지 소련-러시아의 몇 없는 부동항이자 대조국전쟁[11]의 최대 전리품으로서 중요성이 높았다.

그러나 1991년 9월 발트 3국의 독립[12]으로 인해 러시아 본토와의 육상 통로가 단절되면서 러시아월경지 영토가 되었다. 소련 시절에야 러시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가 전부 같은 나라였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은 행정적 경계일 뿐이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 이러한 행정상의 경계가 그대로 국경으로 이어지니 상당히 불편한 모양새가 되었다.[13] 현재 러시아에서 칼리닌그라드로 가려면 국내선 항공을 이용하면 상관없지만 육로로 러시아 본토와 칼리닌그라드를 오가려면 무조건 2개국 이상의 국경을 거쳐야 한다.

세계적인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일평생 고향이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100마일 바깥으로는 여행조차 가지 않았고 평생을 이 도시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 바람에 생가, 무덤 등 칸트 관련 각종 유적은 현재 러시아에 위치한다. 현재도 칼리닌그라드 곳곳에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위인 칸트의 이름을 딴 지명이 남아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nigsberg_bridges.png

수학계의 난제였던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2차 대전 중 소련군이 7개의 다리 중 2개의 다리를 파괴했고 현재는 5개의 다리가 남아있다.[14]

1.2. 흔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Kingsgate.jpg
쾨니히스토르(Königstor 왕문)

참고로 쾨니히스베르크 시절의 고건축물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의 시가전 및 영국, 소련군의 폭격으로 상당수 파괴되었는데, 랜드마크였던 쾨니히스베르크 성 역시 이때 복구조차 불가능할 만큼 치명적으로 무너졌으며 남은 잔해마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시로 프로이센 군국주의 잔해를 없앤다는 명목 아래 1968년 철거되었다.[15] 그 자리에 칼리닌그라드판 류경호텔인 '소비에트 하우스'라는 문어 머리같이 생긴 해괴한 미완성 건물이 들어섰다.[16] 다만 구 쾨니히스베르크 역(Königsberg (Pr) Hauptbahnhof (Bahnhof Königsberg (Pr) Hbf) / Калининград-Пассажирский)이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Der Königsberger Dom), 십자가교회(Die Kreuzkirche (Königsberg)), 증권거래소(Die Neue Börse (Kaliningrad)), 쾨니히스토어(왕문), 칸트 동상(Kantdenkmal) 등 프로이센 시절의 주요 건물들도 여전히 군데군데 잘 남아있고 특히 쾨니히스토르에는 프로이센 상징인 검은 독수리 문양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또한 독일인들이 이 시절 유적의 유지, 보수 및 고향 방문 등의 목적으로 적잖게 칼리닌그라드에 방문하며, BMW 공장이나 영사관을 설치하는 등 이 지역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이지만, 그럼에도 독일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동프로이센 지역을 대표하던 대학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역시 소련의 점령 이후 폐교됐다가 칼리닌그라드 대학교로 재개교했고 2005년 대학의 유명 동문인 칸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 임마누엘 칸트 발틱 연방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런 유적지는 현재 관광자원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솅겐조약 지역과 러시아가 모두 무비자이므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유럽 여행 중에 들리기는 어렵지 않다.[17] 관광 관련은 칼리닌그라드 문서 참조.

독일령 시절 이 도시를 연고지로 삼던 유명 축구 구단으로 VfB 쾨니히스베르크가 있었으나, 이곳이 소련에 넘어가면서 이 구단도 해체되었다. 현재 칼리닌그라드를 연고지로 삼는 축구 구단으로 1954년 창단된 FC 발티카 칼리닌그라드가 있으나, 당연히 VfB 쾨니히스베르크와의 연관이 없다. 슈트라스부르크를 연고지로 삼던 FC 노이도르프는 이름만 바꿔서 프랑스 구단으로 존속 중이지만, VfB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계 주민들 자체가 대부분 추방되었으므로[18] 구단을 해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지역을 대표했던 음식으로는 미트볼 요리인 쾨니히스베르거 클롭세#레시피(영문)가 있는데, 현재는 독일 본토로 추방된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독일 전역에 퍼져있다. 갈아놓은 고기(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섞는다.)와 계란과 향료에 유럽 멸치를 섞어서 반죽하고 소금물에 삶아 크림 소스를 뿌려 내오는 식. 삶은 감자도 곁들여진다. 러시아계 이주민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오늘날의 칼리닌그라드에서도 칼리닌그라드 분리주의자들과 극소수 잔류하고 있는 독일계 주민들이 러시아 본토와 다른 칼리닌그라드만의 독자성(독일풍)을 강조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쾨니히스베르거 클롭세를 먹는 이들이 존재한다.

현 공식 지명은 칼리닌그라드이지만 여전히 과거 러시아어 지명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의 약칭 쿄닉·쿄니크(Кёниг)로도 통용되며 지금도 이 지역의 여행사들이 이 약칭을 많이 이용한다.

2. 독일 구(舊) 브란덴부르크주의 도시

Königsberg in der Neumark

1945년까지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동북부에 있었던 도시. 여기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독일 영토였으나, 이후 폴란드의 도시 호이나(Chojna)로 바뀌었다.

3. 독일 바이에른주의 도시

Königsberg in Bayern

1640년 작센 공작령에 편입된 이래 그 공작령의 일파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코부르크 지역에 속한 도시였다. 하지만 이 지도에서도 보듯 소속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었지만, 코부르크 지역에서 떨어져 바이에른 땅 안에 박혀있는 월경지였다.

그러다 1920년에 코부르크 지역이 통째로 바이에른주에 넘어가면서 그에 속한 쾨니히스베르크도 함께 바이에른의 도시가 되고 월경지도 해소되었다. 이름도 Königsberg in Franken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덤. 인구는 2022년 말 현재 3,624명이다.

하여튼 이름이 예전 독일령이었던 동프로이센 지역의 주도이면서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잃은 현재 러시아령인 칼리닌그라드 시의 옛 시명인 쾨니히스베르크와 이름이 같아서인지 예전 동프로이센에서 살다가 독일 본토로 피난해온 독일계 실향민과 그 후손들 가운데 일부가 이 도시에 정착하기도 했다.

4. 독일경순양함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함선은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1905년형) /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1915년형) 참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함선은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참조.

4.1. 벽람항로캐릭터

쾨니히스베르크(벽람항로) 참조.

4.2. 전함소녀캐릭터

쾨니히스베르크(전함소녀) 참조.

[1] 독일어에서 명사 및 고유명사의 머릿글자(이니셜)는 모두 대문자로 표기한다. 따라서 königsberg로 표기해서는 안된다.[2]폴란드그단스크.[3] 참고로 가장 큰 도시는 슐레지엔의 주도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로 전전 인구가 63만 명이었고 독일 내에서도 10위 내에 드는 대도시였다.[4] 신성 로마 제국대공위 시대합스부르크 가문루돌프 1세독일왕위를 놓고 대립하다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패해 살해당하였다.[5]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손녀사위이기도 했다. 프로이센 공국을 노렸던 선조 요아힘 2세 헥토어 선제후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장녀 안나와 결혼했고,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끝내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았다.[6] '프로이센'이란 이름을 쓰게 된 것은 프로이센이 유럽의 완전 변두리여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왕 칭호를 얻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이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정해진 것은 애초에 호엔촐레른 가문 직계의 중심지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국왕을 칭하기 위해 이름만 빌려준 것이나 다름없는 입지였다. 프로이센 국왕들 중에서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른 국왕은 프리드리히 1세빌헬름 1세 뿐이었고 다른 국왕들은 생략했다. 7년 전쟁 중이었던 1757년부터 1763년 사이에는 러시아 제국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동프로이센은 전쟁 나면 내다 버리고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이나 제대로 지키라는 유언까지 남겼다.[7] 동프로이센 출신 융커들이 많아 독일 제국군이 이곳에 묶여있었다는 서술이 많은데 실제 독일 제국의 융커는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출신이 대다수였다. 동프로이센 출신 융커들은 250년 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에게 전부 진압당해 독일 제국 시기에는 오히려 씨가 말랐다.[8] 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 대한 야욕은 굉장히 오래되었는데 이곳이 러시아 본토에서도 무척 가까웠을 뿐 아니라 라이벌 프로이센-독일에 있어 상징성 높은 고도로서 승전 시 전리품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7년 전쟁 당시에도 잠시동안 병합한 적이 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이곳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고 기어코 제2차 세계 대전 승전을 계기로 완전히 합병하여 숙원을 달성했다.[9] 대신 항구 지역인 메멜란트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에 할양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약 500년간 프로이센의 일부였으며 차별 대우도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 대부분이 자신을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생각했으며 동족들의 국가에 통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10] 1945년 4월 9일 쾨니히스베르크가 함락당했고 4월 25일 소련이 동프로이센 전 지역을 완전히 차지했는데 이 무렵이면 이미 소련군이 훨씬 서쪽까지 진격해서 베를린 공방전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독일 동부를 점령하며 베를린 목전까지 소련군이 진격한 시점에 정작 소련 본토와 훨씬 가까웠던 쾨니히스베르크가 아직 소련군에 넘어가지 않았을 만큼 이 도시는 독일에 있어 의미가 정말 남달랐으며 독일 국방군도 이곳 만큼은 끝까지 사수하려 하였다. 상술했듯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동프로이센 대신 본토와 가까운 서프로이센을 포기한 이유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때문이었으며 결국 서프로이센의 상실로 인한 영토 단절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 소련-러시아에서는 독소전쟁을 이렇게 부른다. 한편 어원의 오리지널인 조국전쟁은 나폴레옹 시기 프랑스-러시아 전쟁을 의미한다.[12] 소련 해체 3개월 전에 발트 3국의 독립을 소련이 승인하며 칼리닌그라드는 월경지가 되었다. 사실 소련이 해체되지 않았어도 발트 3국이 독립한 이상 칼리닌그라드는 월경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전간기 동프로이센이 월경지가 되었던 독일과 비슷한 모양새이다.[13] 비슷하게 소련 시절엔 문제되지 않았지만 나라 안 행정경계가 국경으로 변하면서 월경지 문제로 큰 불편이 생긴 사례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국경이 있다.[14] 넷상에서는 우스개소리로 이때의 스탈린을 두고 '기적의 수학자'라 부른다. 모든 다리를 한번씩 다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다.[15] 성 내부는 크게 불탔지만 외벽은 비교적 튼튼했던 탓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칼리닌그라드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도시의 주요 문화재인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서기장의 의지를 거역할 순 없었고 결국 철거는 강행되었다.[16] 애초에 쾨니히스베르크 성 자리가 원래 늪이라 큰 규모의 건물을 세우기에는 지반이 약했던 탓도 있고, 쾨니히스베르크 성 지하의 터널이 무너지는 바람에 지반이 급격히 약해져서 건물의 규모를 축소했다가 결국 공사를 중지했다. 현지 주민들은 이를 두고 '프로이센인의 복수'라고 불렀다. 현재는 겉에 페인트칠을 하고 창문을 붙여서 멀쩡한 건물처럼 보이게 해 놨지만 내부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으나 2023년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로 현재 철거가 진행중이다. 여담으로 쾨니히스베르크 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고 성의 재건도 논의되고 있다.[17] 다만 여권검사는 무지하게 빡세다.[18] 2020년 기준으로 독일계 인구가 아직 2천여명 남아있긴 하지만, 40만에 가까운 칼리닌그라드 전체 인구의 0.4%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과거 독일인들의 후손들과 독일계 소련인들을 합친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