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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2:35:10

근친혼


민법 제809조(근친혼 등의 금지)
① 8촌 이내의 혈족(친양자의 입양 전의 혈족을 포함한다)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② 6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의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③ 6촌 이내의 양부모계(養父母系)의 혈족이었던 자와 4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
제815조(혼인의 무효) 혼인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의 경우에는 무효로 한다. <개정 2005.3.31>
1. 당사자간에 혼인의 합의가 없는 때
2. 혼인이 제809조 제1항의 규정을 위반한 때
3. 당사자간에 직계인척관계(直系姻戚關係)가 있거나 있었던 때
4. 당사자간에 양부모계의 직계혈족관계가 있었던 때
\헌법불합치, 2018헌바115, 2022. 10. 27. 민법(2005. 3. 31. 법률 제7427호로 개정된 것) 제815조 제2호는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위 법률조항은 2024. 12. 31.을 시한으로 개정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

제816조(혼인취소의 사유) 혼인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의 경우에는 법원에 그 취소를 청구할 수 있다. <개정 1990.1.13, 2005.3.31>
1. 혼인이 제807조 내지 제809조(제815조의 규정에 의하여 혼인의 무효사유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외한다. 이하 제817조 및 제820조에서 같다) 또는 제810조의 규정에 위반한 때
2. 혼인 당시 당사자 일방에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악질 기타 중대한 사유있음을 알지 못한 때
3. 사기 또는 강박으로 인하여 혼인의 의사표시를 한 때

[1]

1. 개요2. 역사3. 생물학적 분석4. 분류
4.1. 부모-자식 근친혼4.2. 형제-자매 근친혼4.3. 3촌 간 근친혼4.4. 4촌 간 근친혼4.5. 5촌 이상 간의 근친혼
4.5.1. 5촌 이상 간의 근친혼 실효성 논란4.5.2. 혼인이 가능한 혈연 범위
4.5.2.1. 평행사촌과 교차사촌
5. 지역
5.1. 유럽
5.1.1. 유럽의 왕가5.1.2. 아슈케나지 유대인
5.2. 트리스탄 다 쿠냐 제도5.3. 아프리카
5.3.1. 이집트5.3.2. 아프리카의 타조족
5.4. 아시아
5.4.1. 중동5.4.2. 중국5.4.3. 일본5.4.4. 대만5.4.5. 한국
5.5. 북극권5.6. 아메리카
6. 법적금지 논란7. 기타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 consanguineous marriage

사촌을 포함하는 근연자끼리의 결혼을 말한다. 종종 확장된 의미로 겹사돈의 경우도 근친혼에 같이 포함시키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

2. 역사

선사시대 인류는 비록 수가 적고 집단의 규모가 작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근친혼을 피하고자 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지속적인 근친혼과 근친번식자손에게 장애를 남길 확률이 높다는 것을 경험적, 관습적으로 알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생 인류 중 일부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흡수한 것만 보아도 현생 인류가 수가 적다고 해서 근친혼만 하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류가 문명사회가 되면서 많은 왕족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외척의 찬탈 방지나 정략결혼 등 정치적 이유로 인한 근친혼이 성행했지만, 그 탓에 이들 후손 중 많은 수가 유전병에 시달리거나 요절하였다. 이외에도 신체 특징이 유전적으로 남는 경우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주걱턱으로 대표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다. 결국 근친혼이 반복된 혈통은 오래지 않아 혈통이 끊기고, 그나마 좀 유전적 다양성을 갖춘 사람이 왕위를 잇거나 이마저도 없으면 시골이나 외국에 사는 남남 수준의 먼 친척을 간신히 찾아 왕으로 세우는 일도 있었다.

3. 생물학적 분석

생물학적으로 근친혼으로 자손을 생산하는 행위는 유전자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유전병의 발현 확률을 극적으로 높이기 때문에 종의 번식과 생존이라는 의미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예를 들면 50명당 1명 꼴로 보인자이고 열성 유전되는 유전병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해당 유전병의 발병 확률은 대략 1만 명당 1명꼴이 된다.[2] 하지만 자신과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매와 근친혼을 하여 자손을 만들 경우, 한쪽이 해당 유전병의 보인자일 경우 다른 한쪽도 해당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1/2이기 때문에, 유전병이 발현할 확률이 400분의 1로 올라간다.[3] 유전적으로 관련성이 없는 입양간 근친혼이 대체로 관용적인 반면 혈연간 근친혼이 엄격히 금지되는 가장 큰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 수가 많기에 한두 명의 근친혼이 유전자 다양성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멸종 위기 동물의 경우 개체 수가 줄고 서식지가 좁아지는 데다 그나마 남은 서식지도 도로나 시설물 등의 건설로 이동이 단절되면서 근친혼이 늘어나고 그 결과 유전병으로 종의 생존까지 위협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생태통로 같은 인공 시설물들은 로드킬 예방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들의 유전자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이다. 유전자 다양성과 관련하여 식물은 일부 종을 제외하면 암꽃과 수꽃이 피는 위치나 시기를 달리하거나 자가수분에 해당될 경우 해당 꽃은 아예 열매를 맺지 않게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가수분을 기피하며, 자가분열로 번식하는 박테리아 또한 접합이라는 과정으로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유전자를 주고받아 유전자 다양성을 보존한다.

4. 분류

4.1. 부모-자식 근친혼

부녀(父女) 혹은 모자(母子)간의 근친혼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절대적인 금기로 여겨져왔다.

오이디푸스그리스 신화 / 비극에서 묘사된 바에서 보듯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금기사항이었다.

다만 예외가 있는데 고대 로마에는 페르시아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은 부녀, 모자 간의 상간이 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위에 나온 오이디푸스 비극을 페르시아에서 공연하던 로마인 극단이 비웃음과 야유를 받았고 이들은 오이디푸스가 자해를 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근친혼을 딱히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카마쓰는 1909년 효고현 출신으로, 이 당시는 아직 요바이 풍습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적당한 상대가 없으면 생부와 생모가 그 상대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공동체는 요바이 전에 성교육이 이루어졌다. 덧붙여서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아기가 누구의 아들인지 잘 모르는 예가 흔히 볼 수 있었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양육했다.
일본어 위키백과 요바이 항목
1950년대까지 일본 시골 지방에서는 어머니가 죽거나 불구가 되면 봉건적인 가족 전통에 따라 딸이 아버지와 결혼한 사례가 있다. 심지어 아버지가 가장 역할을 못하게 되면 아들이 그 역할과 아내를 물려받았다. 특이하게도 전통적인 공동체에서는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지만 전통 가족에서 이러한 것은 정상적이고 권장될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아래는 출처 원문.
One indication of what is likely to be found is a 1959 study by Kubo showing that there were still rural areas in Japan where fathers married their daughters when the mother had died or was incapacitated, "in accordance with feudal family traditions.(154) Kubo concluded that incest was considered "praiseworthy conduct" in many traditional rural families. In the 36 incest cases he studied in Hiroshima, he found that there was often community moral disapproval of the families who lived in open incestuous marriages, but that the participants themselves did not think of it as immoral. In fact, when the father was unavailable to head the family, his son often took over his role and had sex with his sister in order "to end confusion in the order of the home." Other members of the family accepted this incest as normal.
이게 뭔 싸구려 야설이냐 하겠지만, 102회 인용된 심리역사학회지(The Journal of Psychohistory) 1991년 가을에 실린 논문 내용이다. 정확한 출처는 DeMause Lloyd, "THE UNIVERSALITY OF INCEST," The Journal of Psychohistory. 1991 Fall;19(2) 논문 전문. 이 논문에서 인용한 논문은 일본 연구자 논문으로, 1959년 히로시마 지방의 36가지 사례를 보고한 Shunichi Kubo, "Researches on Incest in Japan," Hiroshima Journal of Medical Science 8(1959): 99-159. 논문이다.

일본 전통 민속학 연구에 따르면 과거 전통 성인식 겸 성교육의 일환으로 남자아이는 褌祝(훈도시이와이), 여자아이는 요바이(夜這い)를 치렀는데 민속학자 아카마츠 케이스케(赤松啓介)의 저서 '요바이의 민속학'(夜這いの民俗学, 1994년, ISBN 4480088644)에 따르면 자식의 온전한 첫 경험 상대가 없는 경우에는 부모가 대신해 자식의 상대를 맡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소년끼리 서로의 어머니의 '맛'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딸이 어머니의 잠자리 상대를 끌어들이는 사례 등이 요바이의 민속학 pp. 3-4에 보고되어 있다.

미국의 역사심리학자 로이드 더모즈(Lloyd deMause)의 상기된 논문(THE UNIVERSALITY OF INCEST)에 의하면 일본에서 모자근친상간의 경우 일본 전체 근친상간 중 29%에 달하며[4]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다고 하며, 일본 도쿄에 근친상간 상담소를 개관하였더니 상담전화가 폭주했다고 한다. 다만 일본 통계청에서는 이에 대해 전면부인했다고 한다. 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흔히 일어나는 모자근친상간은 사춘기 아들이 자위행위를 하다 들켰을 때라고 하며, 이때 엄마들은 주로 위로와 충고를 하며 모자근친상간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른 경우로는 성교육을 위해서 이루어진다고도 한다. 이는 자신의 상담소에 들어온 상담전화를 통계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위와 같은 사례들의 영향인지 일본어에는 부모자식간의 결혼을 親子婚라고 쓰고 おやこたわけ(오야코타와케)라고 훈독하는 단어가 있는데 부모자식간의 결혼이란 뜻과 함께 부모자식간의 성행위를 지칭하는 뜻도 있다. 출처 제39회". 일본국어대사전 제2판 홈페이지. 쇼가쿠칸(2002년 3월 25일) 참고 물론 경멸하는 단어지만 따로 지칭하는 '용어'가 존재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볼 때, 일본의 근친상간 역시 일부 지역이나 집단, 소위 닫힌 사회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근친상간이 일반적이었으면 유전병 환자가 딱 드러날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거나 하는[5] 등의 현상이 나타나고, 아무리 유전병의 개념을 모르던 시절이라도 표면상 관찰로 그 사실이 판명났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주제로 민속학 자료가 등장하는 것은 일본열도가 도쿠가와 막부 이전까지는 중앙집권화가 거의 되어있지 않아 농촌의 경우 공권력이랄 것이 희박했기 때문으로 봐야 옳다. 물론 근친 간 '성범죄', 주로 아버지나 남자형제에 의한 여성가족 강간은 어디나, 현재에도 상당히 흔히 발견된다. 상간은 양쪽 동의가 암묵적으로 유추되는 상황에 붙일 수 있는 단어이고 저런 경우는 명백히 한쪽의 위력에 의한 처단받아야 할 범죄.

이렇게 근친간 성행위에 대해서는 그냥 사회적 매장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 점은 모든 문화권에서 전혀 변화가 없다. 그러니 정식 결혼, 사실혼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더더욱 희박하다.

창세기에는 부녀상간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인식을 지닌 의 딸들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들의 거주 지역이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이었고, 소돔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걸핏하면 치고받는 민족의 선조가 된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근친상간은 더도 덜도 아니고 심판받아 마땅한 범죄다. 특히 레위기민수기에는 "아버지의 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남편의 부재로 자신의 아들을 남편 대신으로 취급하면서 아들과 근친상간을 하는 어머니의 경우도 보고된다. 어머니에게 근친상간을 당한 피해자의 고백에 따르면, 그 행위로 심리적 혐오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신체적으로 쾌락을 얻음으로써 혐오와 쾌락이라는 상반되는 두 감정이 동시에 발생했다고 한다.

어쨌든 21세기인 현대에도 극히 드물게나마 모자상간이나 부녀상간 사례가 보고되어서 주변을 경악시키기도 한다.40-Year-Old Mother Who Sleeps With Her Son Is Now Pregnant For Him "I MARRIED MY SON - THE SEX IS MIND-BLOWING" Father-daughter-sexual-relationship-appear-Steve-Wilkos-Show 하지만 여기서 나오듯이 절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적어도 주변에서 보이는 콩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는 막장 가정 대부분에서는 구타는 많아도 성적인 문제는 없고, 있어도 강간이다.

비록 혈연지간은 아니지만, 부모자식 관계와 비슷한 시부-며느리, 장모-사위 관계 사이에서의 상간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절대적인 금기로 여겨진다. 혈연관계가 아닌 양부모와 양자식 관계에서도 당연히 금기이지만, 실제 혈연지간은 아니라 죄책감이 덜하기 때문인지 금기를 어기고 근친상간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이 경우도 말로는 대부분 비참하다. 당나라의 현종양귀비는 원래 시아버지-며느리 관계였었고, 희대의 폭군으로 알려진 고려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의 후처인 경화공주ㆍ수비 권씨(壽妃權氏)와 장인의 후처인 황씨를 강간했고, 그 결과 그 유명한 권문세족들이 그를 직접 추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성경에서 유다는 며느리에게, 롯은 딸들에게 얼핏 역강간인가 싶은 근친관계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 셋 중 둘을 잃은 유다가 당시의 당연한 관습이었던 형사취수를 이행하지 않고 며느리를 쫓아내자 그 며느리가 신분도 잃고 갈 곳이 없어 신전의 창녀로 변장해 유다에게 접근하자 좋다고 응한 것이다. 전혀 역강간이라고 할 상황은 아니다.

롯도 사정이 있는 경우. 딸들이 아버지에게 마음을 품었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 전에 살던 도시 소돔 전체가 하느님의 벌로 작살나고 롯의 아내도 죽어버려 낯선 곳에 자기들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이대로면 영영 가족의 대가 끊길 각이 보이기 때문에 딸들이 작정하고 술을 먹여 늙은 아버지를 인사불성으로 만들어버렸다. 첫째 날에는 큰딸이, 둘째 날에는 작은딸이 검열삭제를 행했다고. 두 딸이 모두 임신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큰딸이 낳은 아들은 모압, 작은딸이 낳은 아들은 벤암미라고 지었다고. 이들이 낳은 아들인 모압과 벤암미가 훗날 각각 모압암몬의 조상이라고 한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원래 아브라함은 소돔 편에 서서 "잘못도 없는 사람까지 멸하면 안 된다"고 결사반대했다. 의인 정족수를 50명으로 정해놓고 살려달라고 간청했으나, 점점 줄어 들고, 최소 단위였던 10명까지 정족수를 줄이고 나서야 기도하는 것을 포기했다. 소돔 성에서 도망치라는 말을 들은 롯은 두 딸과 정혼관계에 있는 사위들에게 이 예언을 전했으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이러자, 천사가 롯에게 "여기가 곧 멸종될 거니까 사위들을 버리고 아내와 두 딸들을 성밖으로 이끌고 도망가라"고 했으나 롯은 망설였고, 보다 못한 천사들은 그를 강제로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산으로 도망가라고 했으나, 롯은 하느님에게 "거기까지 가다간 재앙을 만나 죽을 거 같으니, 소알 성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고, 롯과 두 딸들이 소알 성으로 들어가자마자, 소돔과 고모라는 싸그리 멸종당했고,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6] 거기에 포함된 소알 성까지 날렸으나, 아브라함의 간청 때문에 롯의 가족들은 살려냈다. 사실 산으로 도망가라고 했던 것부터 롯과 롯의 가족들은 살려주려고 했던 큰그림이었던 셈. 롯은 뒤늦게 이해하고, 산 속으로 기어들어가 굴에서 살았다. 그 뒤로는 위에 설명된 대로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적으로 이혼과 재혼이 빈번해지면서 재혼가정에서 양부모가 양자식을 성폭행하는 사례가 늘어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아예 양부모와 양자식이 결혼을 하는 경우도 지극히 이례적인 사례가 존재하기는 한다. 대표적으로는 우디 앨런과 결혼한 전처 미아 패로우의 한국계 입양딸인 순이 프레빈의 사례가 있다. 2010년에는 영국에서 양아버지와 결혼한 여자의 막장 드라마 같은 사연이 해외토픽으로 한국에도 소개되어 네티즌에게 충공깽을 선사한 바 있다. 기사 다만 이런 경우는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근친 성관계의 유형으로 가장 흔한 것은 국가와 민족과 시대를 막론하고 아버지-딸의 관계가 가장 흔하다. 하지만 최근 학계의 연구 결과들은 아버지-딸의 관계보다는 남매관계가 더 흔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리고 이들 경우는 보고되는 예가 거의 전부 근친 성폭력, 즉 근친'상간'이 아닌 그냥 폭력과 위계에 의한 친족 성범죄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간은 얼마나 존재하는지 정확한 통계는 내기가 힘들다. 국내 조사에서는 1672명의 청소년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남매 간 관계가 23건으로 부녀간 관계(18건)보다 약간 많게 나온 적이 있다.

미국의 Keith Pullman이란 사람이 운영하는 Full Marriage Equality라는 사이트에는 운영자가 인터뷰한 다양한 '자발적' 근친상간 사례들이 나와있다. 사례 외에도 '자발적' 근친상간 관계에 대한 설명이나 조언도 나와있는 것은 덤. 모자상간 사례가 소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 운영자인 Keith Pullman은 '자발적' 근친상간 관계를 Consanguinamorous라고 명명했다.

4.2. 형제-자매 근친혼

이것도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금기로 여겨지나[7],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결혼이 꽤 있었다.

일본 고사기에 친오빠와의 근친상간으로 인해 오빠가 유배당하자 유배지에까지 따라가 동반자살한 소토오리히메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부모 양쪽이 다 같은 남매의 근친상간은 터부로 인식되었음은 알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고대 이집트이다. 이집트 왕실에선 으레 남매가 결혼하여 함께 통치하는 걸 당연시 여겼으며, 비교적 후기의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조의 클레오파트라 때까지도 역시 남동생과 결혼하고 그 언니도 또다른 남자형제와 다 서로 결혼한 사이였다. 특정 목적성의 혈통 유지라는 명분 하에 왕족이나 사제 계급에 한해 그런 결혼을 하고 권한 문화권이 일부 존재는 한다.

파일:터키 카리아 족보.gif
카리아 지역 헤카톰노스 왕조의 가계도. 5남매 중 4명이 서로 결혼하였고, 홀로 남겨진 막내만이 외부 여성과 결혼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현재 터키 서남부에 있던 카리아의 헤카톰노스 왕조가 있다. 창거자 헤카톰노스는 다섯 남매를 남기고 죽었는데, 그중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통혼하였다. 그중에는 마우솔로스 영묘로 유명한 마우솔로스아르테미시아 2세도 있었다. 약 3세기가 흐른 후 터키 중부에 있던 갈라티아에서는 마지막 군주 아민타스의 사후 그의 아들 아르테미도로스가 동부 부족장, 딸 테크토사게스가 서부 부족장이 되었는데 역시 남매끼리 결혼하여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렇듯 고대 헬레니즘 시기에 남매 간의 결혼은 종종 있던 일이었다.

부모 양쪽이 모두 같은 친남매 간의 결혼에 비해 부모 중 한쪽만 같은 이복(異腹) 또는 이부(異父) 남매 간의 결혼은 거부감을 덜 느꼈는지, 친남매 간의 결혼보다는 역사상에서 대단히 많이 발견되는 편이다. 신라 왕실에선 무수한 근친혼이 존재하는데 이부 동복, 즉 아빠가 다르고 엄마는 같은 남매까지도 그 어머니에 의해(!) 결혼한 사례가 있으며 엄마가 다른 이복남매라면 당연히 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고려 왕실의 경우에도 아버지만 같고 어머니가 다른 이복 남매 간의 결혼은 내내 있었다. 예를 들면 광종과 그의 정실 대목왕후는 이복남매 간으로, 왕건의 딸들은 이렇게 모두 이복오빠나 남동생과 결혼했으며 이를 위해선지 고려에서 왕족 여성은 아버지 쪽이 아닌 어머니나 할머니의 성씨와 본관을 따랐다. 이 고려 왕조의 족내혼은 너무나 당연하던 전통으로서 이를 통한 호족, 권문세족의 단합이 너무 공고해 왕조 중기에 이르면 왕이 직접 족내혼을 말리고 외부 가문과 통혼할 것을 권하는 문서를 공표할 정도였다.

일본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대~중세 일본 황실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어 위키백과에 등재된 사례만도 17개에 달한다. 개중에는 여러 명의 이복 누이들을 동시에 아내로 맞이한 케이스도 있다.

흔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에도 존재하기는 한다. 스웨덴은 이복(異腹) 또는 이부(異父) 남매의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지만 법원의 허가를 필요로 한다. 법원의 허가는 형식적인 요건으로, 혹시 친남매일지도 모르니 확인해보는 정도라고 한다. 성씨가 같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복&이부 남매인지 친남매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고 그리고 유전병이 없는 경우에 혼인허가가 난다고 한다.

많은 창조신화에서는 형제 간 근친혼이 자주 발견된다. 성경에서도 발견되는데,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도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이복(異腹) 남매라고 한다. 일본 신화이자나기이자나미 역시 남매인 동시에 부부이다.

부모의 재혼이나 입양으로 가족이 된 의붓남매의 경우엔 혈연은 없기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결혼이 가능하다. 다만 주변의 시선이 결코 좋지는 않다.

4.3. 3촌 간 근친혼

숙부나 이모/고모가 조카와 결혼하는 것으로 역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금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중세 및 근세 유럽의 왕실에서는 귀천상혼과 왕위계승 문제 등과 겹쳐서 의외로 이런 결혼이 흔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교황의 특면이 있어야 가능했으며 왕가에 한정된 특수 사례로 볼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3촌 간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신약에서도 딱히 면제하는 규정은 없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일단은 금지라고 보면 된다. 많은 왕족들이 교회의 허락으로 왕권을 위해 근친혼 한 후 정작 자식을 못 낳거나 정치적으로 배우자를 내칠 때가 되면 또 근친혼을 이혼 명분으로 삼았다. 그 외에 아시아에서는 고대 중국이나 신라, 고려 시대에 주로 왕실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유신은 자신의 여동생과 김춘추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딸과 결혼했다. 진성여왕도 숙부와 결혼했고.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복남매지간이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히틀러의 부모는 각각 삼촌과 조카 관계인 셈이다. 그런데 이건 좀 자세히 파고 든 거고, 일반적으로 둘의 관계는 5촌이 되는 걸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를 가지고 근친혼을 반대하는 근거로 삼으며 부풀리는 쪽도 있다고. 히틀러 또한 본인 이복누나의 딸, 즉 외조카인 겔리 라우발과의 스캔들이 알려져 있다. 훗날 겔리 라우발은 권총자살한다. 다만 당시의 유럽에서는 사촌 간 결혼이 가능했다는 점은[8] 감안할 필요가 있다.

파일:attachment/카를로스 2세/_1.jpg

그림의 1st Cousins는 사촌, 2nd Cousins는 육촌을 의미한다. inbred level은 근친도 정도로 높을수록 유전병 등의 발현 확률이 높다.

3촌 간 근친혼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왕가가 가장 유명한데, 펠리페 1세 이후 단절까지 2번 일어났다.[9]

4.4. 4촌 간 근친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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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촌간 혼인까지가 대부분의 현대 국가에서 금지되는 것과 달리 4촌간 혼인부터는 사회적인 멸시와 별개로 법적으로는 허용되는 국가가 더 많다.

4.5. 5촌 이상 간의 근친혼

미국 일부 주에서는 5촌 간 결혼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네바다, 켄터키, 오하이오, 워싱턴 등) 미국 유명인 중 5촌과 혼인한 사람으로는 비치 보이스데니스 윌슨이 있다. 상대는 5촌 조카인 숀 마리 러브였으며,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사촌형이자 밴드 동료인 마이크 러브의 딸이었다.

유럽에서는 친척들과 결혼하는 일이 흔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유대와 로마 전통에 따라 4촌이 근친혼의 경계였으나, 기독교가 지배하게 된 유럽 중세에서는 게르만 문화의 영향으로 세월이 지날수록 근친혼 관련 금기가 엄격해져 가톨릭 교회법상 공통조상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대수가 6대 이하(당사자 간의 촌수로는 12촌 이하)는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고 결혼했다 하더라도 무효사유였다. 그러나 귀천상혼 사이의 자식은 후계자로 삼을 수 없다는 문제 때문에 귀족들은 귀족끼리 결혼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런 상태로 세월이 오래 지나다 보니 근친혼이 아니면 결혼 상대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잦았다. 더구나 왕이나 귀족 간의 결혼은 곧 정치적 동맹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제약까지 고려하면 근친혼을 피해가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교회에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어 관면을 내려 근친혼을 허가해주었고 그게 현대까지 내려와 한 다리 건너면 다 친척일 정도로 근친혼이 성행했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이보단 덜했지만 역시 항상 예외는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이 중 전처인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가 1살 위의 6촌 누나였다[10].

중국에선 주나라 예법에 따라 동성(同姓)일 경우는 '아무리 백대(百代)가 지나더라도 혼인하지 않는다(雖百世而昏姻不通)'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이 대원칙이다. 한국에선 유교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조선 시대에는 동성동본 금혼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조선 이후로는 동성동본이면 8촌 이외 생판 남이라도 혼인이 금지되어 있었다. 한 집안에서 갈라져 나온 집안의 경우 동성동본이 아니더라도 족보상 같은 조상을 모시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결혼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동성동본이 아니더라도 김해 김씨김해 허씨처럼 같은 시조에서 갈려져 나온 경우에는 관례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김해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허씨나 김해 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김씨 집안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외국의 근친혼에 대한 논문들에서는 사촌 결혼이 허용된 일본과 동성동본 금혼법이 존재했던 한국이 인류문화상의 대척점으로 자주 비교되어 언급된다. 허나 대한민국에서 동성동본간 혼인을 금지하던 조항은 1997년에 위헌 판정을 맞고 날아갔으며, 2000년 민법 개정 이후에는 성씨에 관계없이 8촌 이내의 관계에서만 혼인이 금지되어있다.

조선시대에는 외가 쪽, 모계 쪽 친척과의 혼인은 훨씬 덜 금기시되는 편이어서 명성황후 민씨고종의 외가 쪽 친척이었고,[11][12] 연산군임영대군(세종의 4남)의 외손녀(7촌)를 중전으로 맞았으며[13] 여흥 민씨태종의 비인 원경왕후인현왕후 등 자주 간택된 왕비의 명가였다. 조선시대 내내 여흥민씨와 파평윤씨, 안동김씨 등 다수의 왕비를 연속으로 배출한 소수의 왕비가문들이 있었고 왕가인 이씨와 그 가문 출신 왕비 사이의 소생들이 또 그 왕비 가문의 소생들과 통혼했다고 보면 유전적으로 따졌을 땐 근친혼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공주, 옹주가 하가해 낳은 후손들이 왕가와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 또한 혈족으로 따지자면 근친이다. 일반 사대부 쪽에서도 만약에 처가 죽으면 처제를 후처로 삼는 등은 꽤 흔한 일이었다. 단, 자매가 둘 다 살아있는데 한쪽은 처로, 한쪽은 으로 취하는 것은 금지였다. 물론 왕실에서는 자매를 동시에 첩으로, 혹은 언니를 처로 동생을 첩으로 들이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것도 조선시대에 유교 관념이 강화돼서 이 정도나 되었지 외가나 처가에 대한 제한은 친가에 비해 거의 늘 약했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 시대에 딸을 시집 보낼 때 언니를 시집 보내면서 여동생을 잉첩[14]으로 데려가는 일이 거의 보편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근친혼 금지 범위는 친가는 지금보다 매우 엄격하지만 외가나 처가의 경우는 오히려 지금보다 관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유전자, 혈연으로 따져보자면 근친혼 자체는 딱히 엄격한 금지가 아니라, 동성동본 이라는 문화적 관념만 쓸데없이 광범위하게 적용하며 엄격했던 수준.

4.5.1. 5촌 이상 간의 근친혼 실효성 논란

현재 대한민국 민법상으로는 부계 모계 양쪽 다 8촌 이내의 혈족과의 결혼을 근친혼으로 보아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잘 사귀던 커플이 결혼을 약속하고 양가 부모와 상견례를 하러 갔는데 알고 봤더니 서로 6촌 혹은 8촌에 해당되어서 결혼이 취소되어 버렸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간혹 나오기도 한다.[15]

현대인의 상당수에게 6촌이나 8촌 정도는 얼굴도 모르는 남이나 다름없어서[16] 이런 법이 왜 있나 싶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엔(20세기 중후반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집성촌을 이루어 일가친척이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 보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예컨대 8촌은 고조부가 같은데 제사는 양반가라면 4대조까지 모시므로 8촌은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볼 수 있는 친척인 것이다. 게다가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으니 온 가족이 멀리 이사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촌향도 현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굳이 친족들과 떨어져 다른 동네로 이사가는 수고를 일부러 할 필요가 없었다. 즉 제정될 당시에는 나름 시대적 관념에 맞춰서 만든 법이었는데 현대의 가족문화에 너무 대격변이 일어나다보니 시대에 뒤떨어진 법처럼 보이는 것.

과거에는 부계는 8촌, 모계는 4촌까지만 '친족'으로 정했었는데, 1990년 남녀 평등과 유전자적 형평에 입각하여 부·모계 공히 8촌으로 확장하였다. 또한 배우자의 혈족, 같이 인척 관계도 근친으로 보았다. 이로 인해 결혼이 금지되는 친족의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당신은 당신의 외할머니의 이종사촌의 외손자(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이걸 엄격하게 적용해서 근친혼 금지를 적용하려면 결혼할 때마다 팔고조도를 떼야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덕분에 대한민국의 근친혼 금지 범위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이다. 심지어 전근대적인 성차별이나 보수성으로 악명 높은 이슬람권조차도 한국보다 혼인 범위에서는 훨씬 개방적이다. 이슬람에서는 사촌이라면 일찌감치 당연한 약혼자 후보로 고려할 정도의 문화권도 많기 때문. 참고로 북한 가족법(제10조)은 "8촌까지의 혈족, 4촌까지의 인척 사이이거나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는 결혼할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근친혼은 8촌 이내의 혈족(민법 제809조 ①항)의 경우 2024년까지는 무효이며, 이후는 개정 법률에 따르게 된다. 6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6촌 이내 혈족, 배우자의 4촌 이내의 혈족의 배우자인 인척이거나 인척이었던 자 사이의 경우에는 혼인취소사유가 된다(민법 제809조 ②항). 또, 6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혈족이었던 자와, 4촌 이내의 양부모계의 인척이었던 자 사이의 경우 또한 혼인취소사유가 된다(민법 제809조 ③항).

쉽게 말해 친남매나 사촌 등 혈족끼리 결혼은 무효 사유(2024년 12월 31일까지 적용. 이후는 개정법 적용), 형부와 처제 사이의 결혼, 내가 어느 집에 양자가 되어 들어갔는데 양부모의 자녀 또는 조카와 결혼한 경우 등 혈족이 아닌 다른 모든 경우의 근친혼은 '취소사유'에 해당한다. 2025년부터 적용될 개정안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나, 헌법재판소는 판결문에서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간의 혼인과 같이 가족제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는 무효로 하고, 그 밖의 경우는 취소로 규정"하는 것을 예시로 들고 있는 만큼, 근친의 범위에 따라 무효와 취소를 다르게 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무효와 취소의 차이점은, 무효는 성립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효력이 없는데 반해, 취소는 일단 성립은 한다. 하지만 나중에 누군가가 취소를 요구하면 그때서야 취소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니까 원래 이런 혼인신고는 접수되면 안되지만, 어떤 이유로든 일단 접수되었다면 유효하고, 나중에 취소할 수 있는 사유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당사자 간에 혼인 중 포태(胞胎)[17]한 경우에는 그 취소를 청구하지 못한다(820조). 그리고 참고로 법원에서의 '취소'의 경우 나중에 취소가 되더라도 법이 처음에 성립하여 취소가 되기 전까지 기간 사이에선 법의 적용이 유효했던 것으로 본다. 반면 무효는 성립부터 과정, 결과까지 모두 효력이 없는 것이 취소와는 구별된다. 때문에 근친혼으로 결혼이 '취소'된 경우에는 어쨌든 결혼했던 것 자체는 인정이 되므로 배우자의 유족 연금도 받을 수 있다.

한편, 배우자의 혈족 / 혈족의 배우자 / 배우자의 혈족의 배우자는 혼인취소사유가 되지만, 혈족의 배우자의 혈족은 1990년 민법개정 때 삭제해버렸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 자기 형수(혈족의 배우자의)의 언니(혈족)와 결혼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고[18] 아버지(혈족)가 데려온 새엄마(배우자)의 딸(혈족)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I am my own grandpa!

덕분에 이걸 이용한 수많은 막장드라마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복남매의 사랑을 다룬 수많은 막장드라마들이 범람하기 훨씬 전인 1990년대, 임성한 작가가 '보고 또 보고'라는 드라마에서 겹사돈을 소재로 다룬 바 있다.

참고로 근친혼 금지의 경우 법적으로 이혼한 관계이더라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아내와 이혼하고 그녀의 언니(처형)나 여동생(처제)과, 남편과 이혼하고 그의 형이나 남동생(시숙)과 재혼할 수 없다. 또한 입양관계의 경우 법적으론 남남이더라도 근친혼 금지의 경우에는 입양 전 혈족관계였던 사람과 결혼할 수도 없다.

가끔 친척간의 근친혼을 주제로 한국에서는 "부모가 이혼한 상태라면 법적으로 이혼한 부모 쪽 8촌 이내의 친인척과 결혼이 가능할까? 가능(혹은 불가능)하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라든가 "부모의 재혼한 상대방측의 법적으로 사촌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등의 아리송한 떡밥을 던지기도 한다. 참고로 말하지만 전자는 확실하게 안 된다고 못 박아두고 있다. 이 역시 이혼을 하든 말든 부모인 건 변동이 없으니 혈족인 건 변함이 없다는 한국의 문화적 관습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여튼 법적으로 가능한 근친혼(?)이라고 해도 아직 의식 때문에 힘들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법적 친족의 범위는 엄청나게 늘어난 것에 비해 핵가족화가 가속화되어 실제 인지하고 있는 '근친'의 범위는 극히 좁아졌기 때문에 현행법상의 친족에 대한 정의는 앞으로 법적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 21세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외할머니의 이종사촌의 손주'[19]의 경우처럼 전혀 모르는 관계로 만났는데 어이없게 근친상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더욱이 배우자의 혈족, 혈족의 배우자 이런 식으로 거치면 관련자가 밝혀주지 않는 한은 도저히 근친지간이라고는 알아 볼 수도 없는 생판 남이 되기도 한다. 이혼 및 재혼도 흔해진 마당에, 배우자의 혈족의 배우자같은 건 정말 억울한 것이 나와 피 한방울 안 섞인 유전자상으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인 건 당연하고 얼굴도 볼 일 없었다. 내 전 배우자의 사촌의 전 배우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게 과연 무슨 근거로 정당한가?

한편으로, 시대가 흐름에 따라 친족간 '공통 조상'을 공문서로 찾을 수 있는 경우는 점차 확대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외할머니의 이종사촌의 손주'라는 관계를 공문서로 입증하려면 '공통 조상'에 해당하는 '외할머니의 외할아버지'를 호주로 하는 제적등본(및 그 하위 대의 제적등본가족관계증명서)을 발급받아야 할 것인데, 해당 문서에 나와 있듯이, 제적 등본으로는 1909년 이후의 기록만이 적히는 탓에, 그 이전에 이미 사망한 사람 등의 경우는[20] 공문서가 아닌 족보까지 동원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족보도 조선 후기부터 경제적 계층이동으로 많은 이들이 남의 것을 사거나 편입되어 신분세탁을 했고, 그와 동시에 딸은 아예 제대로 올리지 않는 일도 많아졌고, 애초부터 족보가 계속 없었던 집안이거나[21],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 등 근현대의 어지러운 국난 속에서 족보가 소실된 경우도 드물지 않으니 정확한 입증은 더더욱 어렵다.

그런데, 미래로 가면 이런 공통 조상의 대도 점차 내려오면서, 족보가 아닌, 제적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공통조상이 2008년 이후 사망한 경우)만으로 입증이 가능한 날이 오게 된다. 그렇다면 담당 공무원의 '실수'로 인한 근친혼도 점차 사례가 줄게 되고, '알지도 못했던' 먼 친척을 혼인신고 과정에서 알게 될 사례는 점차 늘 것이다.

그리고 2019년, 현행 8촌 이내 금혼 조항이 너무 넓다면서 위헌이라 주장하는 헌법소원심판이 헌법재판소에 올라갔다. 기사 그리고 2020년에 위헌 여부에 대한 시비를 가리게 되었다. 기사2 그렇지만 2022년 10월 헌법재판소는 이미 결혼한 경우를 ‘혼인 무효’로 보는 것만 만장일치로 헌법불합치로 보았을 뿐, 8촌 금혼 자체는 합헌으로 결정했다. # 어쨌거나 대한민국 법무부는 헌법소원 이후 근친혼 범위를 새로 정하기 위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고 그 결과 '혈족은 8촌에서 4촌'으로 '인척은 6촌에서 직계'로 대폭 줄이는 방안을 2024년부터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사촌간 혼인은 여전히 불가하나 5촌부터는 혼인이 가능해진다.#

연구 용역을 위탁받은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현소혜 교수는 "5촌 이상 혈족의 경우 가족으로서 유대감을 유지하는 경우가 현저히 감소했다"며 근친혼 금지 범위를 점차 좁혀보는 방안을 제시한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과학적으로는 친자 검사 등, 유전적 근친관계를 제법 밝혀낼 수 있게 되어 근친혼 터부의 진짜 근본이자 실제적인 위험, 즉 후손의 유전병 가능성 등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어릴 때 헤어진 남매라든가 모르고 자란 사촌, 같은 경우에 혼전에 서로의 유전자 검사를 한다면 어느 정도의 혈연이 있는지 정도는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균관과 성균관 유도회총본부, 전국 유림이 "결국 동성동본 금혼을 폐지하더니, 이제는 혈족과 인척간에도 혼인을 허용한다는 법률 개정을 추진한다니 실로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국민 10명 중 7명 "8촌 이내의 혼인은 금지해야"
하지만 과거의 호적 폐지와 달리, 아직까지는 8촌 이내 혼인 금지 찬성률이 압도적이다. 위의 대법원 판결 이후 2024년 법 개정을 위한 법무부 설문조사 결과 8촌 이내 금지 현행 유지 75%, 6촌이내 15%, 4촌 허용 5%로 위의 논란이 아직은 별 영향력이 없는 찻잔속의 태풍임을 보여주었다.

4.5.2. 혼인이 가능한 혈연 범위

한국에서는 근친으로 취급돼서 혼인 금지 대상이지만, 사촌간의 결혼이 가능한 국가가 더 많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촌간 결혼은 대개 순수혈통 보존의 측면 때문에 발생한다. 보통 "일본은 사촌끼리 결혼도 가능하대!"라고 하지만 일본도 흔하진 않고 근대화 이후 갈수록 줄어드는 편이다. 대개 근친혼 금지 규정에서 사촌까지는 마지노선으로 두는 나라가 많다. 심지어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사촌과의 결혼이 너무 당연시되는 나머지 사촌이 곧 약혼자급으로 취급되는 풍습이 있는 나라도 많다고 한다.(실제로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 한국에서 사는 이란 여성이 나온 적 있는데 그 부모님이 잠깐 방송에 나온적 있다. 이때 이 여성이 우리 부모님은 사촌 사이다.라고 말한적 있다.) 단 이슬람권에서의 근친혼은 자손들에게 재산을 공정하게 분배하다보면 결국 많던 재산이 나눠질 것인데 그것을 자손들의 혈통을 합침으로써 가문의 재산을 조금이라도 보존하려는 실리적인 목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미국에서도 사촌 간의 결혼이 합법인 주가 꽤 있다. 캘리포니아라든지, 뉴욕이라든지, 플로리다라든지, 조지아라든지.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며, 사회 통념상으로도 사촌간의 결혼이 용인되는 지역은 이슬람권 정도이고 사촌간 결혼이 가능한 지역과 결혼 금지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문화적으로 다른 견해들이 있다.[22]

위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유럽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가 사촌까지의 근친혼이 합법인데, 근대 이전부터 왕족들이 하도 근친혼을 많이 하는 바람에 벌어진 상황이다.[23]

사실 남매와 달리 사촌 정도의 근친에게 이성 근친끼리 너무 친하다 보니 서로에게 이상한 장난을 치기도 하거나 이성적 호감을 느끼다가 섹스하는 경우는 매우 흔한 편이며 주로 남녀 청소년들이 그에 대해 상담글을 올리는 일도 아주 많다. 예전처럼 대가족 제도가 아니어서 웨스터마크 효과도 미약하고 같이 살지는 않아서 서로간에 환상이 깨지지 않기 때문인 듯. 보통은 그냥 한때의 치기 정도로 묻어버리지만, 진지하게 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일본 등 사촌간 결혼이 합법인 외국에서는 진지한 관계로 가볼 여지가 있기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만 근친혼에 대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서는 사랑을 느끼더라도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사랑을 이룰 방법이 전혀 없기에 포기하고 삭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근친혼을 위해 이민을 택하는 사례는 드물지만 매년 꾸준히 존재한다. 워낙에 금기시되고 음성화되는 부분이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동성애의 경우를 보더라도 수년 전만 해도 '불결하고 타락한 외국의 괴상한 문화' 정도로 여겨지던 것이 불과 수년만에 요즘은 지상파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고 공개적으로 동성애를 비난하면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로 변화가 온 만큼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미래에는 공론화되고 인식이 크게 바뀔 것이다. 사촌간의 사례는 아니지만 독일에는 자녀를 여럿 가진 사실혼 관계의 친남매가 근친혼 합법화를 주장하며 이를 공론화한 사례가 있다. 유사 사례가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것.

다만 현대 사회에 들어서 과거의 가족-친척 단위의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별화되는 상황에서 6촌 정도만 해도 실상 남과 크게 다를 바 없어졌고,[24] '친척'의 의미는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동성동본 결혼 금지'같이 같이 사문화된 법 폐지라든가, 법률에서 혈족의 개념이 지금까지 조금씩 수정 되어온 것 등을 비롯해 근친혼에 대한 터부는 조금씩 그 경계선이 후퇴되는 추세에 있다. 근친혼 금지의 범위를 현행 양가 8촌에서 양가 사촌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과거보다는 지지를 많이 받고 있기도 하고, 여기서 더 나가아 아예 사촌부터 혼인을 허용하자는 움직임도 소수나마 부상하고 있다. 물론 위 항목의 여론조사에서 보듯 아직까지는 8촌 이내 금지 지지가 압도적이다.
4.5.2.1. 평행사촌과 교차사촌
인류학에서 부모와 성별이 같은 형제자매인 삼촌이나 이모의 자식은 평행사촌(parallel cousin)이라고 한다. 부모와 성별이 다른 형제자매인 고모외삼촌의 자식은 교차사촌(cross cousin)이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 평행사촌인 친사촌이종사촌과의 혼인은 금지하지만, 교차사촌인 고종사촌외종사촌과의 혼인은 허용하는 문화권도 있다.

5. 지역

5.1. 유럽

5.1.1. 유럽의 왕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촌 간의 근친혼은 당연히 가능했고, 심하면 3촌 간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천상혼을 배제하던 역사로 근친혼이 많았던 유럽 왕가의 계보를 보면, 유독 유전병으로 인한 병치레를 한 기록들이 많거나 정신이상자가 속출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합스부르크 가문주걱턱[25]이 있다.[26]

고대 아일랜드에서도 지배층의 근친혼이 성행했다고 한다. 심지어 해가 떠오르게 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친누이와 검열삭제를 한 왕에 관한 전설도 있다고. "고대 아일랜드 상류층 근친상간"..지배층 권력 강화 수단

또한 우생학으로 악명높은 고대 스파르타도 순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근친혼이 성행했다. 문제는 이들이 추구했던 것과 다르게 정반대로 기형아들을 낳는 결과를 가져와 스파르타가 몰락한 원인들 중 하나로 지목될 정도다. 이러한 근친혼의 폐해도 고대 스파르타 말기에 스파르타의 저출산이 심각해진 이유들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나폴레옹도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대에는 막장 of 막장 집안이던 나폴레옹의 가족 중에 유일하게 나폴레옹과 여동생의 관계가 돈독했다는 것에서 착안해 반 나폴레옹 진영에서 흑색선전을 했다는 게 중론.

5.1.2. 아슈케나지 유대인

근친혼의 폐해로 고생하는 대표적 사람들이 유럽의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근친혼 문제는 극히 최근까지도 각 지역의 유태인들이 사실상 고립되어 이교도들과 피를 섞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심화되었는데,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 하면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경우 결혼 시 무조건 유전자 검사를 받고 유전상담을 받을 것을 권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참고로 테이-삭스(Tay-Sachs)병, 고셔(Gaucher)병, 심상성천포창(Pemphigus vulgaris) 등의 질환은 대표적으로 연구가 많이 된 유전병인데, 돈 많은 유태인의 유전병이라서 많이 연구되었다는 속설이 있다.

아슈케나지 유태인에 속하는 사람 중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이작 아시모프, 음악가인 조지 거쉰, 이스라엘 전 수상인 골다 메이어,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아르헨티나의 축구 감독인 호세 페케르만 등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예를 들어보자면 그의 후처인 엘사 아인슈타인은 이종사촌누나이자 6촌 누나였으니 선대부터 겹사돈을 맺어온 사이였던 셈이다.

5.2. 트리스탄 다 쿠냐 제도

남대서양의 절해고도인 트리스탄다쿠냐 제도는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남쪽으로 2000km 넘게 떨어져 있으며 엄청나게 고립된 환경 탓에 상주 인원이 300여 명에 불과하고, 성씨도 7개밖에 없어서 결국 자기네들끼리 근친혼을 하게 되었다. 원래 이 제도는 무인도로 이루어진 제도인데, 심각하게 고립된 이 제도에 사람들이 거주하다보니 외부 사람과의 왕래가 거의 불가능해지고, 이로 인해 오랫동안 주로 근친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늘상 근친혼만 한건 아니고, 1961년 화산 폭발로 주민이 영국 본토로 일시 소개되었다가 2년 후 복귀했을 때 일부 도민이 외지인과 결혼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의 과반수가 눈과 호흡기 계통의 건강이 상당히 안 좋은데, 주로 녹내장과 천식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문에 안과 의사, 내과 의사, 치과 의사들이 교대로 이 섬에 와서 일정 기간씩 번갈아 근무한다.

5.3. 아프리카

5.3.1. 이집트

고대 이집트모계 사회였기 때문에 파라오친누이나 이복누이와 결혼해서 계승권을 인정받는 관행이 있었다. 특히 왕후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후궁의 아들을 정비의 딸과 결혼시켜 후궁의 아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파라오의 저주로 잘 알려진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두 여자 아기들의 미라가 발견이 되었고 이들과 투탕카멘을 포함한 이집트 왕가의 DNA를 조사한 결과, 이 아기들은 투탕카멘과 그의 배다른 누나이자 왕비였던 안케센나멘[27]의 자녀들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투탕카멘의 아버지는 아톤 신을 받들기 위한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아크나톤[28]인데 투탕카멘의 어머니는 아크나톤의 친여동생으로[29] 이들은 모두 아멘호테프 3세의 자녀들이었다. 이 아멘호테프 3세는 네 명의 딸들 중 한 명은 자기 아들과 결혼시켜 며느리로 삼고, 남은 두 딸은 자기 아내로 삼았다.

신화에서도 오시리스이시스는 남매이지만 동시에 부부라서 고대 이집트에서 남매간 근친혼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근친혼의 사례는 많았으며 이는 그리스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도 이어졌다. 클레오파트라만 해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공동 즉위하면서 남동생과 결혼했다.[30] 다만 이후 이뤄진 두 번의 결혼은 당연히 정상적인 결혼. 이후 기원후 3세기까지 민간에까지 퍼져 이어졌다고 한다. 최근에 당시 기록된 이집트인의 호적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친남매끼리의 결혼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허나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이런 풍습은 사그라든다.

하지만 이는 이집트만의 풍습으로써 다른 지역에서는 이집트인을 변태+미개인이라고 까는데 쏠쏠하게 써먹었다. 오죽하면 히타이트는 다른 문서도 아닌 국서에서 여동생과 관계를 맺는 너희는 야만족이고 그런 일 없는 우리는 문명인이다 하는 식으로 쓴 적도 있다. 하다못해 원시 사회에서조차 근친상간은 금기시됐고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을 어머니가 양육하는 게 보편화된 것도 근친상간을 막기 위한 목적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이들도 근친혼을 했던 만큼 파라오들은 유전병으로 몸이 약했다. 그랬기에 세티 1세가 친정을 나서 이집트에 다시금 정복군주가 나타났단 것 외에도 전장에서 직접 칼을 휘둘렀단 것도 큰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5.3.2. 아프리카의 타조족

짐바브웨의 바도마족은 마을 구성원 전체가 발가락이 두 개밖에 없기로 유명하다. 그냥 두 개인 것도 아니고 넓게 벌어져서 발이 옆쪽으로 매우 커지게 되는 기형이다. 그래서 마치 타조와 같이 보인다고 해서 타조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발가락이 두 개인 사람의 유전자가 계속 퍼져나가서 이렇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

참고로 이들은 이 비정상적인 형태의 발 때문에 신발과 양말을 신지 못해서 항상 맨발로 다니거나 자체 자급자족한다고 한다.

5.4. 아시아

5.4.1. 중동

사촌 간 결혼이 가능한 나라가 금지한 나라보다 훨씬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굳이 명문화 된 법으로 금지하지 않았을뿐 문화적으로는 금기시하는 사실상 금기인 나라들인데 중동아랍 문화권에서는 실제로도 사촌 간의 결혼이 흔한 편이다. 중동인지 애매하지만, 이슬람 문화권인 파키스탄, 인도 일부 지방에서는 4촌 결혼이 전체 혼인의 40% 이상이다. 사담 후세인의 부모도 사촌간이라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법적으로만 그런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사촌간 결혼이 용인되므로 아랍에서 사촌혼을 근친상간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촌 이상의 결혼이 용인될 뿐 타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부모자식이나 남매들끼리간의 근친상간이 용인되는 건 결코 아니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건 매한가지이다. 사촌간의 결혼은 가능할 수 있으나 같은 유모를 가진 남녀간은 결혼(완벽히 남남인 남녀라도!)이 불가하다. 아무래도 유목민족의 성향이 들어간 듯하다.

다만 형사취수와 부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근친혼, 그리고 단순한 근친상간을 동일선상에 놓고 똑같이 취급하는 것도 굉장히 곤란한 일이다. 예로 성서의 아브라함이사악, 야곱도 부족, 그리고 신앙적인 정체성을 위해 타 부족이 아닌 자기 친척들과 결혼했다. 다신교 풍습이 일상화된 이방인과 결혼해 그 문화까지 들이고 신앙이 변질되거나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야곱의 형인 에사오도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이방인을 아내로 맞아들여 신앙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장자권을 야곱에게 빼앗기는 사실상의 이유가 되었다. 또한 이방인과 결혼하여 신앙이 변질되고 사라지는 사례는 솔로몬을 위시하여 구약성경에 사례가 매우 많다. 아니 구약성경의 주된 기사가 이 사건 사고 사례집일 정도다.

오난보다 좀 더 먼저 있었던 사건이지만, 전설의 막장랜드 소돔고모라에서 천사에게 선발되어 탈출한 착한 사람의 대표인 의 딸들이 아버지인 롯과 관계하여 혈통을 이어나가는 일이 있다. (남자가 아버지밖에 없다는 이유로.) 정확히 말하자면 애인들이 죄다 죽은 롯의 두 딸이 자기 아비 롯을 술먹여서 재워놓고 번갈아서 올라탄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3P...일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언니가 먼저 하고 그 다음날 동생이 한 것이므로 3P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안 좋은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니까 좋은 식으로 본 게 아니기도 하거니와, 구약시대에 남매간 혹은 친척간 근친으로 자식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혼외 정사, 그것도 부모자식간의 근친상간으로 자손을 낳는 것은 굉장히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상기하자. 야곱의 맏아들인 르우벤도 계모와 근친상간을 하다 장자권을 빼앗겼다. 문제는 근친, 특히 계모와의 검열삭제 문제는 대부분 아버지의 유산을 취하는 목적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소유를 자신이 취함으로서 아버지를 잇는 그런 논리라고 보면 된다. 아무리 근친혼이 이뤄지던 족장 시대였다 한들 부모자식간의 근친상간은 그때에도 이미 비난받는 일이었던 것도 생각해야 한다.

어쨌거나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이 이뤄진 다음인 레위기 대에선 공식적으로 근친상간 금지가 명문화된다. 레위기 18장은 금지된 성관계를 다루는데 그 대부분이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규정이며, 20장에서는 몇 가지 예외를 빼면 죄다 죽이라고 나와 있다.(심지어 모녀를 동시에 근친하였을 시에는 셋 다 태워 죽이라고 되어있다.) 6절 내용인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의 근친을 가까이하여 벌거벗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부터 알 수 있다. 정확히는 친모, 계모, 계부나 계모가 데려온 딸(피가 섞이지 않은 자매), 손녀, 외손녀, 친부와 계모간의 딸, 고모, 이모, 백모, 숙모, 며느리, 형제의 아내(형수, 제수)[31] 모녀, 자매[32]이 금지조항에 올라있다. 부모의 권위를 훼손하는 성관계나 직계 가족과의 성관계를 금지한 것이 특징이다. 요는 대를 거스르는 개족보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태반은 창세기 대에서도 금지되던 걸 재차 못박은 정도지만 이때부터는 근친상간 자체가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실질적으로는 남매간의 근친상간이나 근친혼을 막는 것 정도가 관건이었을 듯하다. 지금 시점으로는 특이하게도 사촌이나 조카딸과의 관계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 삼촌간 혼인은 고모·이모와의 혼인 금지에 걸릴 수 있으나(조카딸에게는 고모·이모에 해당하는 존재가 삼촌이니까) 사촌은 정말로 금지되지 않는다. 실제로 율법 제정 후에도 이스라엘에서 사촌간 혼인은 허용되었으며, 가톨릭은 이 규정이 '근친상간 금지'임을 들어 사촌도 근친으로 보고 근친혼의 범주에 넣었으나 종교개혁 후 많은 개신교 종파에선(일부는 가톨릭 견해를 따름) '성경에 따르면 사촌은 근친이 아님, 가톨릭이 멋대로 확대해석한 것'으로 여기고 금하지 않는다. 레위기 18장의 금지규정이 근친관계 그 자체를 규정하느냐 아니냐의 차이.

다만 이스라엘 시대에 근친상간 사건도 있는데 유명한 것은 다말의 검열삭제 사건이 있다. 다윗의 장자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버린 사건인데 이 사건은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여동생을 강간한 자기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 도망가고 나중에 돌아와서 다윗을 몰아낼 쿠데타를 일으키는 일이다. 압살롬에게 죽기 전까지 암논은 다윗에게 전혀 벌을 받지 않았다! 분명 다윗이 심히 노하였다는 부분은 있지만. 때문에 앙심을 품은 압살롬이 실제 처벌을 시행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야심가 아들이 아버지의 지위를 탐낸 것으로 보는 것이 주류이지만 이복형 암논 살해에 묻어있는 누이로 인한 복수의 의미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암논은 압살롬보다 윗형제로서 왕위에 더 가까운 위치이기도 했다. 참고로 압살롬은 사건 이후 다말을 위로하고 동생을 거두어 자기 집에서 보호하였다. 그가 암논을 미워하는 이유도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라고 분명하게 표시된다. 또한 압살롬은 자신의 딸 이름을 누이의 이름을 따서 다말이라고 지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다말암논의 생각을 알아챈 이후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시집)가겠습니까? 당신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제 간청하건대, 왕(아버지)에게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저를 오빠에게 주시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실 거에요."라고 분명하게 이 상황과 자신의 입장과 이후의 상황까지 설명하면서 지혜롭게 대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억지로 동침했다! 다말 본인이 어떻게든지 당장의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암논은 일부러 흉계를 꾸며서 다말과 동침하려고 마음먹은 상태여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못미...

압살롬은 후일 르우벤처럼 아버지의 후궁들과 성관계까지 뜨는데 문제는 이걸 "옥상에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했다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소유물을 취했다는 걸 공표하기 위해서이다.[33] 다윗 왕이 부정(父情)으로 인해 아들과 맞서는 것을 피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이 사건이 전해진 이후로는 세력간의 골이 완전히 척을 지며, 다윗 왕의 신하들은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압살롬에 대한 적대감을, 그와 부딪치기를 피하는 다윗 왕의 앞에서 드러낸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다윗의 후궁이였던 아비삭을 다윗의 다른 아들 아도니야가 자기에게 달라고 이복동생 솔로몬에게 이야기한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아도니야가 아버지의 소유물인 아비삭을 취하려고 했던 것은 아버지의 공식 계승자인 솔로몬을 제치고 아버지의 것이었던 왕위를 이어받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그 이면을 알고 아도니야에게 아비삭 대신 사형 집행장을 주었다. 흠좀무. 사실 아도니야는 그 전에도 왕이 되려고 세력을 모으다 솔로몬의 모후인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에게 태클을 먹고 데꿀멍한 적이 있었다.

신약성서에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많은 형제가 율법에 따라 죽은 형을 대신해 한 여자를 취했는데 천국에서 그 여자는 누구와 살아야 합니까'라는 떡밥성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천국에서 살 때는 결혼이 없는데?' 였다. 이 대답이 진짜 성(性)조차 없느냐 아니냐는 논쟁거리긴 하지만, 어쨌든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당시 유대인들은 대대로 형사취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한국에도 고구려에 형사취수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랍이라 하기 좀 그렇긴 하지만 현재 터키 서남부에 있던 카리아에서 마우솔로스 영묘로 유명한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계 제후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 2세는 남매끼리 결혼하였다. 터키 중부에 있던 갈라티아에서는 마지막 군주 아민타스의 사후 그의 아들 아르테미도로스가 동부 부족장, 딸 테크토사게스가 서부 부족장이 되었는데 역시 남매끼리 결혼하여 권력을 강화하였다.

5.4.2. 중국

중국에서는 고대 주나라 때 종법이 확립된 이후로 동일성씨 결혼까지도 금지되었다. 이는 한나라 이후로 유교가 국교로 자리잡으면서 강화된다. 이는 근대까지 계속되어서 명나라 때 조선에 파견온 사신이 조선의 양반들이 본이 다른 동일성씨 결혼을 하는 것까지 오랑캐 풍습이라고 꾸짖었다고 한다.[34][35]

하지만 중국에서는 성씨가 다른 이종사촌 혹 교차사촌(고종사촌/외사촌)과 결혼은 가능했다. 중국에서 금지된 근친혼은 아버지의 형제의 자식에 해당하는 사촌 뿐이었으며, 1981년 법 개정 때에 이르서야 사촌간 결혼이 금지되었다.

현대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친족만 아니면 동성결혼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장 폭군들이나 상대적으로 근친상간에 관대한 이민족 출신 왕조는 동일 성씨에 해당하는 친족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도 종종 무시했다. 청나라가경제 이후 황제들이 단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순치제와 그의 황후들, 강희제와 효의인황후는 외사촌 관계였다. 청나라 초기에는 조카가 고모 따라 시집가는 관습이 흔했기 때문이다. 황자들의 정처인 적복진들도 대부분 그 어머니가 방계 황족인 경우가 아주 흔했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에는 근친상간이 널리 퍼져 있었던듯 하다. 제환공의 형인 제양공은 누이동생 문강과 결혼 전부터 관계를 맺어왔다. 이후 노나라 환공에게 문강이 시집간 이후에도 계속 관계를 맺다가 이것이 발각되자 노환공을 암살했다. 이 때부터 제환공이 임금에 오를 때까지 제나라는 피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그 외 육조시대 유송 왕조도 근친상간으로 유명하다. 자기 고모나 사촌동생, 심지어 누나와 성관계를 맺은 경우가 있다. 그런데 유송 왕조는 족보가 워낙 복잡하다 보니 불륜관계가 아닌 정식 혼인관계 대상들도 친척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36] 금나라의 해릉양왕도 여기 못지않다. 숙모나 처제에서부터 심지어 조카까지 겁탈했다.

삼국시대의 하안자기와 어머니가 같은 여동생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버지야 달랐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가 섞인 남매간에 근친이라니 사실이라면 막장도 이런 개막장이 없을 것이지만, 배송지가 이 이야기를 부정한 것도 있고, 증거가 거의 없는데다 조조의 양아들 급으로 총애를 받다가 사위까지 되었고 학문적인 성취도 대단했거니와 정치적으로도 세상을 쥐고 휘두르는 권세를 누릴 때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하다 인생 말년에 숙청당한 케이스인데도 반대파가 근친혼으로 별 다른 말을 남긴 적이 없다보니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편.

그 외 근대 중국 군벌이었던 마부팡(馬步芳)은 "나를 낳은 자와 내가 낳은 자를 빼면 검열삭제를 못할 자가 없다"는 막장선언을 하기도 했다. 사촌과 결혼하는 정도였다면 마부팡이 속한 회족은 현대로 올수록 한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문화적으로 꺼리게 된 거지 법적으로는 합법이었다는 말이라도 하겠지만 발언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5.4.3. 일본

일본 황실 계보도를 자세히 따져보면 근친혼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건국설화부터 근친이 나온다![37] 일본 신화에서 일본을 낳은 이자나미이자나기의 쌍둥이 친누이이자 아내이다.

신화서인 고사기에는 19대 인교 천황의 아들 키나시노카루노미코(木梨之軽王)와 그의 친여동생 카루노오이라츠메(軽大郞女)가 근친상간을 저지르다가 발각 후 동반 자살하는 내용이 주고받은 와카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상당한 스캔들인 이 사건이 ‘소토오리히메(衣通姬) 전설'로 칭해지며 슬픈 사랑 이야기 중 하나로 구전되어 왔다. 고대 일본에서 이복 남매간의 혼인은 허용되었으나 친남매 간의 성관계는 엄격한 금기였다.

고대 일본어에서 오빠라는 단어인 兄(せ)와 여동생이라는 단어 妹(いも)는 각각 남편아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관련 연구[38]에서는 당시 이복(異腹) 또는 이부(異父) 남매간의 혼인이 매우 흔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다이카 개신으로 유명한 덴지 천황은 친여동생과 금단의 관계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인간은 그것도 모자라 남동생(후일의 덴무 천황)의 애인을 빼앗았고, 이것이 훗날 임신의 난이 벌어지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7세기까지 모든 황후가 황족이었고, 헤이안 시대에는 후지와라 씨가 황후를 독점했다. 황실 신붓감은 황족 내지는 귀족만 될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황후나 장래 황후가 될 황태자비는 황족 내지는 고셋케 가문 출신만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1959년 평민[39]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오기 전까지 쭉 이어졌다. 이후 아키히토미치코 황후의 2남 1녀 모두 평민과 결혼하면서, 일본 황실에서도 비로소 평민과의 결혼이 일반화되었다.

민간에서도 주로 정략결혼 때문에 근친혼이 빈번했다. 대표적으로 시마즈 요시히사, 쵸소카베 모리치카 등이 근친혼을 했으며,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근친혼은 아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40]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테 삼걸 중 한 명인 다테 시게자네는 금기시된다는 숙질과의 결혼으로 태어났으며 본인도 외사촌과 결혼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일본은 현대에도 4촌 간의 결혼이 법적으로 가능하다.(일본 민법 제734조, 3촌 이내의 혈연자는 혼인할 수 있지 아니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가능 하다 수준이지, 사회적으로는 터부시된다. 현대에는 근친혼도 거의 상상 속의 일이라서 그런지, 간 총리가 사촌누나와 혼인한 것이 특이한 일로 여겨지는 상황이다.

다만 에도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근친혼을 금기시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특히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은 조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근친혼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더더욱 강했다.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 중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받은 일부는 근친혼을 금기시하게 되었다. 물론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근친혼이 금기시된 것[41]은 상술한 것처럼 현대의 일이다.

또한, 일본은 의붓남매간 결혼이 가능하기 때문에[42] 이 역시 법적으로 본다면 근친혼이 된다. 이를 이용해서 과거에는 장인이 예비 사위를 양자로 입적시킨 뒤 딸과 결혼시키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43] 다만 이 경우는 생물학적으로는 완전히 남남인 관계이기 때문에 문제될 부분은 없다. 그러나 계모와 의붓아들, 계부와 의붓딸 간에 결혼이 불가능한 건 한국과 일본 모두 동일하다.

고마쓰 사쿄의 걸작 SF소설 일본침몰 최후반부에서 작중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즈 제도 하치조지마의 전승이 등장한다. 일명 단나바 전설이라는 것인데, 단나바라는 여인이 임신 중에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간 사이에 화산이 폭발하여 섬 사람이 본인만 빼고 다 죽어버렸다. 이후 단나바는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장성하자 섬을 되살리기 위해 아들과 관계하여 딸을 낳고, 그 아들과 딸이 관계하고...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단나바의 후손이 하치조 섬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문학적으로는 일본이 멸망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일본인들이 어떻게든 부활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장치이다. 다만 고마쓰 작가가 죽을 때까지 일본침몰 2부를 탈고하지 못하면서 이 이후 이야기는 구상으로만 남았는데, 고마쓰는 SF작가답게 작중에서 살아남은 일본 민족을 목성 인근으로 이주시키려 했다고 한다.

전 AV배우 나나우미 나나가 한 잡지 인터뷰에서 자신의 첫경험이 아버지라고 말했다는 잡지 사진이 뿌려진 적이 있는데 명백한 조작이다. 본인이 해당 잡지의 원본을 제시했기 때문에 일본 웹에서는 식은 떡밥이지만, 한국에선 이미 은퇴한지 오래된 배우라 해명글까지 번역되어 한국 웹에 전파되지는 않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다만 동아시아 주요 3국(한국, 중국, 일본) 중에서 유일하게 근친혼이 허용되는 나라다 보니 가끔씩 4촌지간인데 좋아한다든가 하는 경우 한국이나 중국으로 수출되면 현지화하여 변화하고[44] 혹은 이 두 나라에서는 근친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설정하는 경우도 있다.[45]

5.4.4. 대만

대만 민법은 6촌 이내 혈족 간 혼인을 금지한다. 한국 다음으로 금혼 범위가 넓은 국가.

5.4.5. 한국

한국사에서는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왕족 사이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했다. 덕분에 그 때는 오히려 족외혼이 더 특이하게 보였는데 특히 신라가 두드러졌다.

애초에 신라 골품제의 최상위 골품인 성골이 '순수한 왕족 혈통'이기 때문에 성골끼리의 근친혼으로 명맥이 유지되었고, 선덕여왕진덕여왕은 성골 남성들이 일절 사라진 상황에서 여성이기는 하지만 성골 신분이었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49] 결국 성골 혈통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맥이 끊겼고, 그 다음 대인 태종 무열왕(김춘추)부터는 진골 혈통이 왕위에 올랐다. 참고로, 골품제가 하도 폐쇄적이라서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과 결혼한 건 무척 드문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서동요와 관계된 이 러브스토리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 또한 높게 보고 있다.

고려 또한 신라 왕실의 이러한 족내혼 풍습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왕건은 그 자신이 전국 각 지방 호족들과 결혼 동맹을 너무 많이 맺은 나머지 부인들을 워낙 많이 맞이한 만큼 왕족이 넘쳐나게 되자 더 이상 왕족의 수가 늘어나지 않도록 왕자와 공주 간의 근친혼을 적극 장려했다고 한다. 이에는 어느 정도 왕자녀들의 외가 호족세력과 관계를 지속해 균형을 유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아들(25명)에 비해 딸(9명)이 적어 딸과 결혼시킬 아들이 부족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그 결과 경순왕과 결혼한 제3비 소생 낙랑공주와 제25비 소생의 딸을 빼면 모두 이복남매랑 결혼했다. 제3비 소생 흥방궁주는 제6비 소생 원장태자랑, 제4비 소생 대목왕후는 제3비 소생 광종이랑 결혼했고, 제6비 소생의 세 딸들(문혜왕후, 선의왕후, 작호가 미상인 딸)은 각각 제3비 소생 문원대왕, 제4비 소생 대종, 제26비 소생 의성부원대군과 결혼했고, 제12비 소생의 작호 미상의 딸은 제3비 소생인 태자 태랑 결혼했다. 유일하게 남편이 미상인 제8비 소생 순안왕대비는 제6비 소생 안종의 정실로 추측되는 편. 그 이후에도 목종의 부모인 경종헌애왕후사촌간이라든지, 현종의 부모는 삼촌-질녀 관계였다든지 하는 일이 이어졌다.[50]

특히 이중 하이라이트(?)는 7대 왕 목종인데, 가계도가 다음과 같다. 즉, 족외혼 시에는 증조부가 4명이 있어야 하지만 근친혼으로 인해 목종의 증조부는 태조 단 1명이며, 따라서 모든 조부모들이 전부 형제자매 관계이고, 특히 친할머니 대목왕후 황보씨와 외할아버지 대종은 친남매 간이다. 말 그대로 왕건의 아들딸들끼리 결혼했고 그 아들딸끼리 결혼해서 낳은게 목종.[51]

다만 형식상으로는 근친혼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공주들은 왕씨가 아니라 외가의 성씨를 따르게 했다. 헌애왕후가 왕건의 친손녀지만 왕씨가 아닌 친할머니의 황보씨인 이유.[52] 고려 전기 기준으로는 족외혼을 한 2대 혜종3대 정종이 오히려 특이한 케이스에 해당하는 것이다.[53] 현종 역시 성종의 딸들인 원정왕후, 원화왕후가 성종의 딸들로 현종의 5촌임과 동시에 사촌들이며,[54] 원용왕후 역시 성종의 동생인 경장태자의 딸이기에 5촌이자 4촌으로 볼수 있다. 현종은 이 결혼으로 아마 성종과의 연줄을 계속 유지함과 동시에 태조 왕건의 핏줄과 계속 연결함으로 왕권을 강화할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종의 자식들 중 김은부의 세 딸에게서 나온 자식들인 덕종 그리고 문종이 각각 사촌 자매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여전히 근친혼은 유지되었다.[55]

여기에는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여성이 아버지의 몫을 받는 게 끝이었던 조선시대와 달리 외손이 외할아버지의 성씨와 가문을 이어받는 것도 인정되었던 고려 사회에서 공주를 외간남자(?)와 결혼시키는 경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왕씨 성을 달고 나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김치양이 천추태후와 재혼한 후 자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즉 김씨 부계를 왕좌에 올리려 모의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56] 이러한 일을 방지하고자 고려 역사 5백년 동안 공주가 왕족이 아닌 남성과 결혼한 경우는 두 건밖에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태조 왕건과 신명순성왕후 유씨 사이의 딸이었던 낙랑공주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에게 시집간 사례가 최초이나, 제도가 정비된 이후에는 희종의 딸인 덕창궁주가 최충헌의 서자 최성과 혼인한 것이 최초였다. 이랬기 때문에 무신정권 시기에 명종의 딸을 본처도 아닌 첩으로 들이려던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결국 가문을 통째로 몰락하는 원흉으로 작용했다.

그나마 시간이 흘러 고려 중기부턴 점차 왕권이 강해지고 유학적 가족개념이 뿌리를 내리면서 그나마 촌수가 먼 친척들끼리 혼인했고, 원나라 간섭기에 쿠빌라이 칸이 당시 고려의 왕세자이자 자기 외손자 충선왕이 종친의 딸(3비 정비)과 혼인한 걸 알고 화를 냈기 때문에 충선왕이 복위한 후에 동성금혼령을 선포하고 종친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을 선정해서 제도를 바꾼다. 그러나 공민왕이 종친의 딸인 3비 익비를 들일 때 성을 바꾼 거나, 방계 왕족들 사이에서 종친들 간에 혼인(족내혼)한 사례가 있는 걸 봐선 철저히 지켜진 것도 아니었고,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계속 보르지긴 가문 원나라 공주와 혼인했으니 혼인 대상이 고려 국내 종친의 딸이 아닐 뿐, 근친혼을 하는 거 자체는 변함없었다. 공양왕의 어머니가 충렬왕의 증손녀 삼한국대부인 왕씨고 그의 맏사위가 익천군 왕집이니 고려는 멸망하는 순간까지 근친혼이 남아있었다.

이후 고려 후기부터 퍼지기 시작한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시대에는 족내혼이 금지되었으나, 문제는 이게 이상한 곳까지 불똥이 튀어서, 본관은 다른데 성(姓)이 같은 동성이본까지 금혼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조선/역대 왕비 중에서 본관을 막론하고 이(李)씨 여자는 후궁으로나 들어왔지 왕비로 들어온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성이 달라도 성씨의 유래에서 혈연관계가 존재하면 사실상 동성동본이나 다름 없이 간주했다. 유림에서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여 성(姓)이 다르더라도 본관이 같으면 서로 통혼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해 김씨/허씨, 안동 권씨/김씨/장씨. 대개는 시조끼리의 혈연관계나 친밀감을 고려한 경우다. 그 외에도 대개 4대조까지의 외가 성씨와 본관까지 따져가면서 철저하게 근친혼을 막고자 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명맥을 잇고 있다(이성동본 금혼). 다만 동성이본 금지 원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사실 조선도 근친혼에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동성동본의 경우는 엄격히 제한되었지만 모계혈통의 경우는 매우 가깝지 않은 이상은 허용이 되었다. 즉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을 들이밀면 조선 역시 실질적인 근친혼은 꽤 많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서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는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외손녀였는데, 역으로 계산을 하면 연산군폐비 신씨칠촌 관계의 친척이다. 현재 대한민국 민법 기준으로는 혼인무효가 되는 관계이다. 인척관계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세종의 고모인 경선공주소헌왕후에게는 숙모가 된다. 이복형제 간인 연산군중종은 고모와 조카지간인 폐비 신씨단경왕후와 각각 혼인해서 신수근은 연산군의 매부 겸 중종의 장인이 되었다. 고종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여흥 민씨 명성황후와 결혼하였는데,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도 여흥 민씨,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어머니도 여흥 민씨다.[57] 이를 두고 조선 말기 왕들의 낮은 출산율과 왕손들의 요절 원인이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달래 전설이란 근친과 관련된 유명한 전설이 존재한다. 문서 참조.

당연하지만 유전자 연구결과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본관이나 성이 같다고 근친문제가 될 정도로 유전자가 닮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런 연구결과가 동성동본 금혼의 반박자료로 나오기도 했다. 차라리 모계까지 다 거슬러서 금지했으면 모를까 모계로는 별 생각 없이 혼맥을 중첩시키면서 부계만 따지던 동성동본 금혼법은 유전학적으로 일고의 가치가 없는 악법이었다.

거기다 조선 말~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족보 위조, 매매 등의 방법으로 수많은 물타기가 이루어진데다 6.25 이후 기존의 폐쇄적인 생활공동체가 대부분 해체되어 본관이 거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현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유전적으로 별 관련도 없는데 단순히 성이나 본관이 같다고 통혼을 금지한 것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광범위한 근친혼 금지 제도였기 때문에, 문화인류학적으로 한국의 근친혼 금지 제도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계 성은 저렇게 까다롭게 통혼을 금했던 나라가 성만 다르면 당대 사회 기준으로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까지[58] 통혼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국의 동성동본 혼인 기피 현상은 근친혼 터부시와는 아무 관계없는 현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법이 폐지되기 전에는 이를 비관한 동반자살 사건이 수없이 일어났고, 혼인신고가 안 되기에 태어난 자식들이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불행한 일들이 빈번히 벌어졌다.

동성동본 금혼법이 폐지되기 전에도 여러차례 사실혼 관계에 있는 동성동본 부부의 혼인 신고를 받아 구제해준 적이 있다는 것을 봐도, 물러날 수 없는 이유인 우생학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이른바 유림이라 불리는 유교적 사상을 가진 당대 기성세대의 표를 의식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동성동본 금혼제가 폐지되었지만 이를 근친혼 금지로 바꾸면서 동성동본 금혼 폐지에 반대하던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던 '사촌과 결혼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부계와 모계를 가리지 않고 8촌까지 금지하게 되었는데, 이게 부계 기준으로는 풀어진 것이지만 모계 기준으로는 조선시대보다 더 빡빡한 규제다.

2007년 민법 개정 당시 호주제 폐지에 대한 비판에서도 마찬가지다. 호주제를 폐지할 당시 '근친혼하게 된다'는 식의 비판이 있었지만, 근친혼 금지제도는 가족관계 중심이므로 호적과는 전혀 관계없고, 성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외가처럼 성이 다른 친족관계도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에는 8촌 이내 관계라도 혼인하고 부부로서 인정받는 것이 가능하다.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서로 가족이나 친척인지조차 모르고 살다가 결혼한 경우,[59] 또는 혼인신고 처리 시 담당 직원의 실수 혹은 전산상 오류 등으로 8촌 이내 근친 관계인데도 어떻게 혼인 신고가 돼버린 경우이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경우 법적으로는 혼인 무효 사유가 맞긴 하지만, 부부에게 혼인 무효 의사가 없을 경우 이미 만들어진 가정을 강제로 갈라놓지는 않고 있다.

대한민국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의 원인 또한 근친상간이라고 알려졌으나 2023년 재심 결정이 난 사건으로 경찰의 강압수사 의혹이 있으니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와 성관계를 가져왔던 딸이 성장 후 딸과 아버지 양측에 대한 어머니의 견제가 심해지자 공모해 어머니를 살해하는 비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친상간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었으며, 살인에 대한 증거도 초기에 검찰이 자신만만하게 들고 나왔던 주장에서 여러 군데 허점이 드러났고[60] 변호인단에서 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공판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관련 의혹을 시사 프로그램에서 방영하기도 했다. 결국 재판에서 남편과 딸이 모의하여 살해를 결정한 것이 유죄로 인정되어[61] 2012년 3월 대법원에서 아버지는 무기징역. 딸은 징역 20년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던 2022년 10월 헌법재판소가 8촌 이내의 결혼 금지 자체는 합헌이나, 8촌 이내의 혼인 무효는 헌법불합치라는 결정을 하여 # 향후 법률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생겼다. 관련 조항을 국회에서 개정하지 않으면 2024년 12월 31일 이후로는 금지이되 무효는 아닌 상태가 되어, 8촌 이내인 두 사람이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할 수는 없지만 외국에서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 상태로 귀국하면 무효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대한민국 법무부에서 '4촌 이내 혼인 금지'로 근친혼의 범위 축소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

하지만 당장 근친혼 기준을 5촌부터 결혼 허용한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사회적 인식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 제외하면, 사촌간 혼인을 허락하는 나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좋은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데 5촌은 사실상 조카가 삼촌-이모랑 결혼을 하는 것이며 과연 상견례나 결혼식에서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아무리 요즘 사회가 친척간의 교류가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명절에는 만나기 때문에 자식들이 이성적으로 본다면 부모들은 사돈을 맺는 게 굉장히 어색할 수 있다.

실제로, 위의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2024년 법 개정을 위한 법무부 설문조사 결과 8촌 이내 금지 현행 유지 75%, 6촌이내 15%, 4촌 허용 5%로 아직까지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8촌 이내 혼인이 불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한국은 애초에 낙태나 동성결혼도 반대가 더 높을 정도로 보수적이고 이런 관성적인 관념이 있다보니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말이다.

5.5. 북극권

5.6. 아메리카

6. 법적금지 논란

사실 사회적 인식과 별개로 법적으로만 볼 때 상호 합의에 의한 근친상간 그 자체는 형법상 불법이 아닌 나라가 대부분이며, 근친혼민법상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연애 및 결혼의 선택의 자유 및 쌍방의 의사 존중'이라는 원칙을 적용해 볼 때, 근친혼을 금지하는 근거 상당수가 설득력을 잃는다. 결국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윤리개인의 자유 및 행복 추구권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하는 것이 옳은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윤리 다음으로 큰 이유이자 그나마 과학적, 논리적으로 생각되는 근거는 유전병 확률 증가에 대한 우려인데, 이마저도 유전병 환자들과 노산의 경우 어떠한 규제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정말로 근친혼을 유전병 때문에 금지하는 것이라면, 유전병이 명확하게 드러난 환자들의 출산, 기형아의 위험성이 근친혼보다 더 높은 노산 또한 마땅히 규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62] 그러나 이런 이유를 들어 유전병 환자의 재생산이나 노산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으며, 특히 전자의 경우 우생학과도 연관되어 증오 발언 취급을 받거나 네오나치로 몰리기도 한다.

결국, 전술했듯이 근친혼이 금지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근친혼은 오로지 전통적 윤리에 의해 금지된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며, 전통적 윤리과 개인의 자유 및 행복 추구권 중 무엇을 우선시하는게 옳으냐는 물음을 우리에게 남길 따름이다.

7. 기타

8. 관련 문서



[1] 단, 위의 내용은 근친 간의 혼인에만 국한된 내용으로, 근친상간 자체를 처벌하거나 금지할 법적 근거는 한국 법령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2] 부모가 둘 다 보인자일 확률 x 두 부모에게서 해당 유전자를 받을 확율 = (50x50x2x2)분의 1.[3] 부모 한쪽이 유전병 보인자일 확률(1/50) x 남매가 해당 유전자를 물려받을 확율(1/2 x 1/2) x 자식이 이 유전자를 받을 확률(1/4) =1/800에서 다른쪽 부모의 경우도 감안하면 1/400.[4] 전체 인구 중 29%가 한다는 게 아니라 근친상간을 한 사람 중 29%라는 말이니 오해 금지.[5] 유전 질병인자를 보유한 부모의 2세대와 보다 덜한 남녀 간 관계에 따른 유전병의 발현은 말 그대로 아주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거의 100%고 후자는 없거나 있어도 대부분 미미한 수준으로 거의 우연에 가깝다.[6] 이 소금 기둥이 물에 녹으면서 사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7] 제나라의 문강이나 진나라의 하희 등과 같이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 까이는 케이스들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8] 이는 현재의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도 해당되는 사항이다.[9] 펠리페 2세와 그의 조카 오스트리아의 안나, 펠리페 4세와 그의 조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심지어 마리아나는 부모부터가 사촌 지간이었고 본인도 외삼촌인 펠리페 4세와 결혼해서, 마르가리타 테레사카를로스 2세를 낳았으며 마르가리타 테레사도 외삼촌 겸 고종사촌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다. 결국 이렇게 근친혼을 자행해온 결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왕가는 마리아나의 아들인 카를로스 2세 때 단절되고 만다.[10] 항목에서 보듯 상당히 사이는 좋았다.[11] 이쪽은 무려 4대가 엮인다. 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순종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여흥 민씨와 결혼을 하였다. 유명한 명성황후 민씨도 여흥민씨.[12]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처가,외가,사돈까지 모두 여흥 민씨였다.[13] 연산군이 어릴 때 한 혼인으로 이걸 결정한 건 성종과 다른 왕실 어른들이었다. 사관들도 별 말 안 했고, 오히려 실록엔 "외가는 7촌부터 혼인이 가능하다는 예법이 있다."는 식으로 신하들이 아뢰는 걸로 나온다. 외가 7촌부터 혼인 가능은 뒤에 대한민국 민법에 계승(여자/외가 쪽 혈족은 6촌 이내 혼인 금지)되었다가, 1997년 위헌 판정을 받은 뒤 개정되었다.[14] 본처가 아이를 못 낳을 시 배를 빌리는 보험용. 잉첩이 아들을 낳으면 본처 소생으로 인정한다.[15] "친척인데 모를 수 있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핵가족화된 요즘 시대에 친척간 교유가 많지 않은 가정이 수두룩 해졌다. 또한 양가 혈족을 다 평등하게 따지니 해당되는 인원은 조선시대보다 많아졌는데 부계직속이 아니면 서로 성씨가 같지 않으므로 처음 만나서는 모를 수 있다. 부계만 따져도 잘 모를 수 있는 것이 김해김씨, 전주이씨같이 전국적으로 인구가 드글드글한 성씨라면 같은 성씨여도 친척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사촌까지는 그래도 왕래를 하지만 사촌의 자식들, 즉 육촌끼리 서로 얼굴 보는 경우는 몇 대 넘게 제사 때마다 모이는 등 전통을 정말 중시하는 가족이 아니고서야 드물다. 게다가 과거 우리나라 특성상 남녀유별했고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시집 간 집안의 집안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외사촌, 이종사촌의 자녀들간에는 더욱 모를 확률이 높아진다. 육촌도 이럴진데 8촌이면 한 단계씩 더 올라가서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서로 사촌관계여야 한다. 즉, 고조할아버지/할머니 대에서 갈라져 나온 집안인 것이다. 이 정도면 핵가족화된 요새 같아선 가족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다.[16] 혈족 간 관계가 소원하거나 매우 나빠서 왕래가 끊겨버린 집안은 어릴 때 본 4촌 정도가 한계, 6촌만 되어도 누군지 전혀 모르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17] 태아가 생김. 임신의 초기 단계를 넘어선 단계.[18] 이런 관계가 되는 것이 바로 겹사돈이다. 게다가 민법 개정 전에도 겹사돈으로 무효가 된 예는 거의 없다.[19] 8촌[20] 현재 결혼 문제로 인해 이러한 입증이 필요한 사람들은 보통 20~30대인데, 이들의 조부모는 대부분 80대 중후반 정도의 연령대를 가지고 있다. 그 조부모의 조부모 세대라면 1909년 이전에 이미 사망해서 제적 등본에 자료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21] 조상이 정통성 있는 귀족이나 양반 계층이 아니었고, 족보를 사지도 않았던 경우.[22]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나오는 조던 벨포드와 사업 파트너 도니와 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동업하며 조금씩 친해진 조던이 도니에게 "소문을 들었는데...헛소문이겠지만 네가 사촌하고 결혼했다는 거야 ㅎㅎ"라고 하는데 맞다고 하자 뜨악한 반응을 보인다. 즉, 법적으로 가능은 하지만 진짜 사촌하고 결혼하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는 정도.[23] 다만 왕실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며, 1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사촌혼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령 19세기 영국에서는 전체 혼인의 5%가 사촌혼이었다.[24] 유전적으로 보면 6촌부터는 사실상 남이다. 물론 실제로는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영향을 끼치겠지만, 촌수가 하나 늘어날 때마다 서로간에 공유하는 유전자의 비율이 절반씩 줄어든다는 단순 계산법으로 생각해보면 6촌 사이인 두 사람은 1.562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이 수치가 2% 아래로 내려가면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6촌부터는 정말로 유전적으로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된다.[25]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주걱턱이었다고 한다.[26] 이 방면에서 가장 잘 알려져있는 혈우병은 단순 유전병일 뿐이지 근친혼의 산물은 아니다. 추정되기론 유럽의 할머니가 돌연변이였던 것으로 보인다.[27] 네페르티티의 딸로 아크나톤의 여동생의 아들이었던 투탕카멘과는 이복남매 사이였다. 투탕카멘과 그녀의 자식들은 같은 무덤에 매장되었지만 안케센나멘의 최후나 시신과 무덤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28] 아멘호테프 4세로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와 동명이인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위해서 '아멘 신이 기뻐한다'는 의미의 아멘호테프에서 '아텐 신의 종'이라는 아크나톤으로 개명했다.[29] 즉 아크나톤은 자신의 친여동생과 결혼한 것이다.[30]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남편 겸 남동생을 숙청한 것이다.[31] 처벌규정은 따로 없는 대신 자식이 없으리라는 저주를 받는다.[32] 자매 중 어느 일방과 결혼한 경우에, 그 아내가 생존한 동안에는 다른 자매를 취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모녀를 동시에 근친한 것과는 달리 처벌규정은 없다.). 특이하게도 자매가 질투하게 하지 말라는 이유가 따로 붙어 있다. 유대인들은 이 규정을 확대하여 일부일처제의 근거로 해석한다.[33] 사실 이전에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불륜하고 남편을 죽인 것에 대한 신벌이라는 예언이 이미 있었다. 충실한 부하이자 남편인 우리야를 죽인 댓가로 칼부림이 다윗의 집안에서 떠나지 않을 것(장남은 삼남에게 끔살, 삼남은 요압에게 끔살, 사남은 솔로몬 때 반역을 꾸미다 사망하게 된다.)과 다윗은 남몰래 밧세바를 불륜했지만 본인은 대놓고 불륜을 당할 것이라고...[34] 이덕형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덕형은 본인도 이씨고 본인의 아내도 이씨였다.(이덕형은 이산해의 사위이다.) 그래서 이항복이 "이덕형은 본디 김씨였는데 재주가 뛰어나 왕이 특별히 이씨 성을 하사했다."고 구라를 쳤고 그러자 사신이 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능력있는 분을 몰라봤다며 사과했다고. 이는 사실 성 외에 본관이란 개념이 있는 조선과 그런 게 없는 중국의 차이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이덕형의 아내도 이씨긴 했지만 본관은 이덕형과 달랐다.[35] 중국도 고대까지는 본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씨다. 이 시기에는 성과 씨가 구분되어서 성은 집안, 씨는 출신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성과 씨의 개념이 통합되면서 성씨가 되어버렸고, 그 이후 중국은 본관의 개념이 사라졌다.[36] 사실 유송 거의 전체가 막장이 아닌 황제가 별로 없어서 황족을 주살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유준이 비교적 정상적인(어디까지나 유송 황제들 중에서) 황제일 정도였다.[37] 근데 사실 건국설화 혹은 신화에서 근친이 나오는건 너무나 많다. 당장에 그리스 로마 신화만 해도 근친물 결정판 수준이고 이집트 신화에도 근친은 자주 나오며 그나마 북유럽 신화가 뇨르드의 자식들이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며 또 그 자식들이 근친상간을 벌였다는게 근친과 관련된 전부이다. 물론 일본 제외한 동아시아에서도 없는...줄 알겠지만 가끔 나오기도 한다. 그나마 이쪽은 설화 단계에서 아주 가끔씩 있는 정도지만[64][38] 中村彌三次 (1922年10月20日). “祉會法學二付テ” (PDF). 早稲田法学 ( 早稲田大学) 1 (1): 1-73. ISSN 0389-0546 . NAID 120000793863 2011年9月11日 閲覧[39] 말이 평민이지 친가는 대재벌가이며 외가는 옛 귀족 가문. 그런데도 평민 출신이라며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다.[40]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버지의 계모의 딸이 이에야스의 생모였다.[41] 법적으로 사촌 남매나 의붓남매 간의 결혼이 가능한 것과 별개로 근친혼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전근대 일본에 비해 많이 악화된 것[42] 한국에서도 의붓남매간 결혼이 가능한 경우가 있는데, 부모의 재혼으로 인해 남매가 된 의붓남매는 재혼한 부부가 상대방의 자녀를 입양하지 않은 이상 '혈족의 배우자의 혈족'으로 간주되어 혼인이 가능하다. 즉, 법률적으로는 겹사돈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다만 입양에 의한 의붓남매는 한국에서는 친남매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혼인이 불가능하다.[43] 사위로 삼기 위해 입양한 아들을 서양자(婿養子)라고 한다. 과거에는 무조건 아내가 남편의 성씨를 따라야 했기에 아들 없이 딸만 있는 사람이 사위에게 자신의 가업 등을 성씨와 함께 물려주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 다만 현재는 부부의 합의에 따라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따를 수도 있도록 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굳이 서양자를 들이지 않고도 장인이 사위에게 성씨를 물려줄 수 있게 되어 서양자 제도는 사양길에 들어서 있다. 다만 여전히 관습적으로 남편이 아내의 성씨를 따르고 장인의 가업을 물려받은 경우는 설령 사위가 장인의 양자로 들어가지 않았다 해도 서양자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44] 카논의 미나세 나유키가 그러한데 일본에서는 주인공인 아이자와 유이치와 4촌지간인데 짝사랑하는 중이다. 근데 한국에서는 8촌까지 결혼이 불가능해서 둘 사이에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처리했다. 당연히 유이치의 이모인 아키코도 그냥 유이치의 엄마와 친구관계로 바뀌었다.[45] 카드캡터 사쿠라의 리 메이링과 리 샤오랑의 관계가 그런데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고 메이링 쪽이 샤오랑 쪽을 좋아하는데 둘 다 중국인이다(...) 정확히는 홍콩 출신[65]이지만.[46] 신목왕후의 아버지 김흠운태종 무열왕의 사위라는 기록이 있다.[47] 앞의 정교부인과 자매지간이다.[48] 앞의 영화부인과 자매지간이다.[49] 조금 다른 부분이지만 신라 하대 임금들이 죄다 단명한 것을 근친혼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신라 하대에는 50대는 커녕 40대에 사망한 왕도 간간이 보이는 정도로 평균수명이 짧아졌다. 경문왕과 그의 세자녀 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 이들 남매의 조카 효공왕 모두 요절했는데(경문왕이 겨우 30을 넘겼고 진성여왕은 30을 넘겼을 수도 못넘겼을수도 있으며 다른 3명은 확실히 20대에 사망했다.) 핏줄로 이어진 5명의 왕이 모두 단명했기에 유전병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다.[50] 다만 현종은 유부남과 미망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둘은 정식 부부가 아니었고 단지 내연 관계였다.[51] 정작 이렇게 무서운 황통을 타고 난 목종은 동성애자라 자녀를 보지 못했다.[52] 그 외 왕녀들은 대부분 어머니의 성씨를 썼다.[53] 이는 혜종이 장남이자 정윤이고, 정종이 강력한 호족 세력들 중 장자라 이 둘의 족내혼을 호족들이 견제했기 때문이다.[54] 다만 원정왕후와 원화왕후는 상술한 목종의 예시처럼 부모가 다 왕건의 손자녀인 것은 아니였다.[55] 덕종과 그녀의 3비 효사왕후, 문종과 그녀의 1비 인평왕후는 남 각각 부계쪽으로는 이복 남매지간, 모계쪽으로는 이종 사촌관계이다.[56]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고려 작제건(추존 의조)의 부인으로 용왕의 딸이라는 전승이 있었던 저민의(추존 원창왕후)가 작제건과의 불화로 혼인 관계가 파탄났을 때 막내딸을 데리고 가 버렸다는 전승을 언급하면서 "용왕의 딸이 낳은 아이는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작제건과의 아들 외에 다른 왕종이 세상에 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왕씨는 용손이라 몸에 용의 비늘이 있다는 전승을 들어 공주 가운데서 타성바지로 하가시키는 경우는 몸에 비늘이 없는 경우였지, 몸에 비늘이 있으면 타성바지로 하가시키지 않고 그대로 후궁으로 삼았다고도 전하고 있다.[57] 여흥부대부인과 명성황후는 12촌 자매간이다. 따라서 고종과 명성황후도 13촌 조카-이모 관계. 여흥부대부인의 친남동생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양오빠로 입양되기도 했다.[58] 조선 시대에 외가 6촌, 7촌과의 결혼은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59] 예를 들자면 친남매 사이인 두 사람이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 시절에 친부모가 사망하거나 혹은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 서로 다른 가정에 입양되거나 각기 다른 고아원에 보내져 성장한 후에 우연히 만나 혼인하게 된 경우. 막장드라마에서나 나올 일 같지만 해외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60] 예를 들어 범인인 아버지가 청산가리를 탈 막걸리를 샀다는 가게에서 취급하는 막걸리와 범행에 사용된 막걸리의 크기가 다르다거나, 검찰이 범행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딸이 글도 제대로 못 쓸 정도로 지능이 떨어져 검찰이 제시한 치밀한 범죄방식을 사용하기 힘들다든지.[61] 왜 근친상간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근친혼은 민법상의 혼인취소사유일 뿐, 형법상의 범죄가 아니다.[62] 게다가 훗날 의학이 더 발전하여 미리 태아의 유전병 인자를 제거할 수 있게 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아예 우린 자식 안 낳고 둘이서만 산다/입양하겠다고 나올 경우 유전병이라는 반대의 근거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63] 영어권 기사의 헤드라인은 adopted man으로 시작하는데, 서술어로 discover나 find out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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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대체로 새로운 아담과 이브 수준이 되었을 당시 그 때 살아남은 이들이 남매지간일때 일어난다. 물론 당연히 근친혼을 금기시하기에 둘 다 "이래도 되는걸까" 라고 하다가 어떠한 방식으로 허락을 얻어 하는 것이 클리셰[65] 연재 시작 기준으로 홍콩은 영국령 홍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