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慶華公主(?~1344)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제3비.
원나라의 공주로 이름은 ‘바얀후트'(伯顔忽都, 백안홀도)이며, 사후 원나라에서 ‘숙공휘령공주'(肅恭徽寧公主)라는 시호를 주었다.
2. 친정
고려로 시집온 다른 원나라 황족 출신 왕비들과 달리 가계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은데, ‘공주’라는 호칭은 황금씨족 여성 황족에게 주는 호칭이었으므로, 경화공주 역시 몽골 황실의 일원으로 추정된다.[1]3. 결혼
경화공주는 충숙왕이 복국장공주와 조국장공주에 이어 세 번째로 맞아들인 원나라 출신 왕비이다. 복국장공주는 충숙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자녀를 두지 못하다가 일찍 죽었고, 조국장공주는 아들 용산원자를 낳자마자 죽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기에, 충숙왕은 원나라 공주를 또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충숙왕은 3명의 몽골인 왕비들에게서 후사를 두지 못한 채[2]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려인 덕비 홍씨에게서 태어난 장남 왕정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4. 의붓아들 충혜왕의 만행
충혜왕은 대단한 폭군에다가 패륜적이고 음란하기 짝이 없었던 인물로, 아버지의 아내이자 자신에게는 적모이자 계모가 되는 경화공주를 강간하기까지 했다. 1339년 8월 8일, 충혜왕이 먼저 경화공주를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고, 그 답례로 경화공주도 충혜왕을 초대하여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끝난 후 충혜왕은 침실로 향하는 경화공주를 쫓아갔다. 이후 아랫사람들을 시켜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붙들게 한 후 그녀를 강제로 범했다.이런 충혜왕의 만행 때문에 울분에 찬 경화공주는 친정인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타고 갈 말을 사려고 했지만, 충혜왕은 이를 알아채고 마시(馬市)를 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경화공주는 친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 고려를 방문한 원나라 사신 두린(頭麟)에게 겨우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할 수 있었고, 분노한 두린이 충혜왕을 체포하여 압송함으로써 원나라 황실에까지 충혜왕의 만행이 알려지게 되었다(1339. 11). 다음해 충혜왕은 풀려나 복위하게 되었지만 훗날 충혜왕은 고용보와 기철을 위시한 부원배들의 청원으로 고려 왕위에서 쫓겨나(1343. 11. 22) 원나라 남쪽 변방인 게양현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1343. 12. 21).[3]
5. 사망
충혜왕은 귀양길 도중인 1344년에 객사했고[4], 몇 달 후에 한많은 삶을 산 경화공주도 사망했다.6. 대중매체
[1] 반면 충숙왕의 생모인 의비(懿妃) 예수진(也速眞, 야속진)은 호칭이 ‘공주’가 아닌 ‘비’인 점을 볼 때, 몽골인이기는 하지만 황족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 조국장공주에게서 낳은 용산원자는 일찍 죽었다.[3] 부원배들은 어디까지나 왕과 그 배후인 원의 위세에 기대어 천년만년 살아가면서 해먹는 것이 목적이지 이런 개막장 폭군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은 그들도 원치 않았다.[4] 사서에선 귤을 잘못 먹고 체해서 죽었다는 설과 독을 마시고 죽었다는 설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어떤 설이 진실이든 간에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것은 확실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