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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6:38:18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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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 국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왕녀 : 태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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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6대 국왕
충선왕 | 忠宣王
파일:IMG_6315.jpg
티베트 샤카사원 탱화에서 묘사된 충선왕[1]
출생 1275년 10월 27일[2]
(음력 충렬왕 원년 9월 30일)
고려 개경 개성부[3] 사판궁
(現 경기도 개성시)
즉위 1298년 3월 9일[A]
(음력 충렬왕 20년 1월 19일)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강안전
(現 경기도 개성시)
사망 1325년 7월 1일[B] (향년 49세)
(음력 충숙왕 12년 5월 13일)
대도 연저[6][7]
(現 중국 베이징)
능묘 덕릉(德陵)
재위기간 고려 왕세자
1277년 2월 23일[8] ~ 1298년 3월 9일[A]
(음력 충렬왕 3년 1월 12일 ~ 충렬왕 20년 1월 19일)
고려 제26대 국왕
1298년 3월 9일[A] ~ 1298년 10월 1일[11]
(음력 충선왕 즉위년 2월 1일 ~ 충선왕 즉위년 8월 18일)
고려 제26대 국왕 (복위)
1308년 9월 21일[12][13] ~ 1313년 4월 27일[C]
(음력 충선왕 복위년 8월 28일 ~ 충선왕 5년 3월 24일)
초대 심왕
1307년 또는 1308년 6월 17일[15] ~ 1316년 4월 9일[16]
(음력 충렬왕 33년 또는 충렬왕 34년 5월 20일 ~ 충숙왕 3년 3월 9일)
고려 태상왕
1313년 4월 27일[C] ~ 1325년 7월 1일[B]
(음력 충숙왕 즉위년 3월 24일 ~ 충숙왕 12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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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고려: 원(謜) → 장(璋)
: 이지르부카(益知禮普花)
부모 부왕 충렬왕
모후 제국대장공주
형제자매 4남 2녀 중 3남
배우자 계국대장공주, 의비[19], 정비, 조비, 순화원비, 순비
자녀 3남 1녀
종교 불교
중앙(仲昻)
시호 고려: 헌효대왕(憲孝大王)
: 충선왕(忠宣王)
작호 심양왕(瀋陽王)
심왕(瀋王)
}}}}}}}}}
1. 소개2. 생애
2.1. 즉위하기 전2.2. 즉위와 폐위2.3. 원 제위계승 분쟁에 참여2.4. 복위2.5. 양위
3. 평가4. 가계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소개


고려의 제26대 군주이자 초대 심왕.

묘호는 없으며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원'(謜)이었으며, 군주가 된 후에 '장'(璋)으로 고쳤다. 외숙모인 원나라의 코코친(闊闊真, 쿠케친)[20] 황태자비로부터 '이지르부카'(益智禮普化)[21]라는 몽골이름을 받았다. 자는 '중앙'(仲昻).

제25대 충렬왕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의 장남이었으며,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이자 태조 칭기즈 칸의 4대손이었다. 즉, 제26대 충선왕을 시작으로 제33대 창왕에 이르기까지의 고려 국왕들은 고려인몽골인 사이에서 태어났거나 그 후손인 한•몽 혼혈이었다.[22]

충선왕은 또한 원나라의 초대 심왕이었다. 고려 국왕과 심왕이라는 두 왕작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에 고려심왕(高麗瀋王)이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이다. 즉, 명목상 한반도요동의 동시 통치자였다.

고려의 군주인데도 원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 고려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훨씬 길었고,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에는 겨우 1년 정도만 고려에 있었다. 특히 어머니가 원나라 황녀라 외가인 원나라의 언어문화에 익숙한 상태로 자랐을 것이고, 16세부터는 거의 세계적인 초강대국인 원나라의 중심부에서 살았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애착이 깊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로 귀국해 통치하라고 압력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원나라의 수도 대도에 남으려 했고,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물려준 후에는 아예 대도에서 눌러 살다 죽었기에 직설적으로 적자면 그냥 몽골인이었다. 그에게는 고려 국왕보다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라는 사실이 훨씬 중요했다.[23]

2. 생애

2.1. 즉위하기 전

고려 제25대 충렬왕제국대장공주아들로 태어났다. 득남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충렬왕이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와 제2비인 정화궁주[24] 왕씨의 자리를 동급의 서열로 두었다가 제국대장공주가 노발대발해서 결국 연회가 파토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2세 때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외가인 원나라로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외숙모였던 코코친 황태자비가 충선왕을 귀여워하며 '이지르부카'라는 몽골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1277년 세자로 책봉되고, 이듬해(1278) 원나라에 갔다. 세조 쿠빌라이 칸은 늦둥이 막내딸에게서 태어난 어린 외손자를 상당히 귀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25] 처음 외손자가 찾아왔을 때는 고려에 대한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가지며 물었고, 세자 왕원의 학문적 소양을 시험했다. 이때 "세자는 머리가 좋고 학문도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왕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좋은 왕은 아니었다.

이렇듯 충선왕은 어릴 적에 총명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주변인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기대를 받았는데, 이러한 기질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해진 베옷을 입은 사람이 땔나무를 지고 궁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사람을 보내 사연을 물었는데, 사실 땔나무 진 사람은 '장작서'의 기인이었고, 형편이 가난하여 베옷을 입은 것뿐이었다. 그것을 들은 세자 왕원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나는 좋은 의복을 입고 있는데 백성의 형편은 저러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궁노가 동리 아이들의 을 빼앗아다가 세자 왕원에게 바치길래 세자가 정색하고 네가 이 연을 어디서 얻어왔느냐?"라고 묻자 궁노는 우물쭈물하여 동리 아이들에게 빼앗이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세자는 궁노를 책망하며,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이런 사연을 통해 보면 어릴 적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었다.

다른 사례로는 1283년, 9세의 꼬마였던 세자 왕원은 아버지 충렬왕충청도 방면으로 사냥을 나가자 갑자기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는데 놀란 유모가 까닭을 묻자 "현재 백성의 생활이 곤궁한데다 농사철이 닥쳐왔는데 아버지는 어찌하여 멀리 사냥을 떠나려하시는가?"라고 하니 측근 신하가 충렬왕에게 그대로 전한 바가 있었다. 9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치고는 제법 성숙한 생각과 발언이라 이 또한 왕원의 총명함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 일화는 앞의 두 일화와는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왕원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는 원세조 쿠빌라이칸의 딸인 관계로 자신보다 23살위의 남편이자 한 나라의 왕인 충렬왕을 마치 아랫사람처럼 대했다. 충렬왕이 너무 사냥을 즐기느라 나랏일을 소흘히 한다고 생각하며 항상 못마땅해 하던 중, 1282년, 충렬왕이 불을 놓아 사냥을 하다가 백성들의 곡식을 태워버리는 사고가 일아나자, 제국대장공주가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사냥만 일삼으니 나랏일이 어찌 되겠느냐?”며 충렬왕을 꾸짖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세자 왕원이 사냥을 나가는 충렬왕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는 이 일화가 1283년의 일인 것을 보면, 어린 세자 왕원이 속상했던 이유는 "아버지는 작년에 엄마한테 야단 맞고서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후일 충선왕이 아버지인 충렬왕과 사이가 안 좋았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제국대장공주가 세자 왕원에게 어릴 때부터 아버지 충렬왕에 대해 놀기만 좋아하고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는 한심한 군주라는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26]

1291년 쿠빌라이에게서 특진(特進)·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세자(高麗國王世子) 벼슬과 금인(金印)을 받으며 교서를 받는데 여기서 쿠빌라이가 철저하게 충선왕을 자신의 외손이라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위치는 원 황실에 의해 확고하게 공인받았다 봐도 과언이 아니겠다.

1296년 계국대장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를 제1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원나라에서 혼인할 대상을 정한 것이었다. 계국대장공주는 훗날 충선왕이 즉위를 도와주는 제3대 원 무종과 제4대 원 인종의 사촌이었으며, 제5대 원 영종이 시해당한 남파의 변으로 황제가 되는 제6대 원 진종의 누나였다. 또한 그녀는 왕원의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오빠 칭김 황태자의 손녀였기 때문에 외가 기준으로 5촌 당조카와 결혼한 셈이 되었다.

이는 세조 쿠빌라이 칸 사후 황태후가 된 쿠케친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훗날 원나라 황제가 되는 원 진종의 아버지인 진왕(晉王)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시킨 것이었다. 진왕 카말라는 칭김 황태자와 황태자비 쿠케친의 장남으로 태조 칭기즈 칸의 황릉이 있는 고비 사막 북쪽 몽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쿠케친의 3남이자 카말라의 동생이었던 테무르가 원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쿠케친은 세자 왕원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제위 계승에서 밀려난 진왕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를 고려 왕위가 보장되어 있었던 고려 세자와 인척 관계를 가지도록 배려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원나라 인척이기도 한 세자 왕원을 원나라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진왕 카말라의 딸과 혼인시키는 것으로 서로 좋은 배경이 되라는 뜻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세자 왕원과 계국대장공주의 결혼은 파탄나다 못해 방해만 되었다.

왕원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 이전에 왕영의 딸[27], 홍규[28]의 딸, 조인규[29]을 이미 아내로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충숙왕(제27대)의 생모인 의비 예수진과 혼인한 시기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시기보다 이전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일찍이 세자 왕원과 결혼한 고려인 세 명은 몽골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국대장공주와 의비보다 서열이 뒤로 밀렸다.

원나라의 반란군인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외조부인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1297년 원나라에 갔다가 고려로 돌아오면서 책들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세자 왕원이 고려로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왕원은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유를 당시 부왕 충렬왕후궁으로 총애를 받으면서 안하무인으로 날뛰던 무비의 소행이라 생각하여 무비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실제로 아버지 충렬왕은 왕비인 제국대장공주와의 관계가 나빠서 무비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게다가 흉년이 와서 백성은 굶고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큰 돈을 들여 사냥과 연회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는 여러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엄격하고 사리에 밝은 성격인만큼 남편인 충렬왕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기다 제국대장공주는 강한 자존심과 사랑받지 못한 불행 때문인지 투기가 매우 강해서 다른 후궁들과 그 자녀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자신이 시집오기 이전 충렬왕의 정실이었던 정화궁주 왕씨에게 강한 질투심을 드러냈다. 충렬왕은 그런 제국대장공주의 눈을 피해 무비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더욱 자주 사냥을 나갔다. 부자 간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양위 의사를 밝히자 1298년에 세자 왕원이 23세의 나이로 제26대 고려 국왕으로 즉위했다.

2.2. 즉위와 폐위

즉위 직후, 혈기 넘치는 젊은 국왕인 충선왕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한 폐단을 철폐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측근 세력을 키웠는데 이로 인해 총애를 받은 인물이 박전지, 오한경, 이진, 권부4학사였다. 이후 관제를 개혁했으며, 무엇보다 권세를 누리던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주목할만한 정책을 의욕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충선왕이 이자겸의 난, 무신정변으로 인하여 크게 약화된 고려의 왕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혁정책을 펼친 것이었다. 무엇보다 충선왕은 공민왕처럼 원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가 여전히 잘 나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본인의 정체성이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그럴 이유 자체가 없었다.[30] 쉽게 말하면 "나는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니까 니들은 내 말에 따라라!"라고 말했고, 고려 대신들은 "우리가 굳이?"라고 하여 서로 의견 충돌이 발생했으며 고려 대신들 중 친원파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밀어내려는 충선왕에게 반발하며 가만있지 않았다.

그 결과 권문세가의 이 막강해져서 충선왕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정책이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특히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가 심해 공주가 그 내용을 원나라 황실에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충선왕이 세자 시절에 맞아들인 고려 여인 조씨를 총애하자 계국대장공주가 조비를 질투해서 벌인 일로 이른바 조비 무고 사건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권문세가의 모략으로 인해 결국 충선왕은 즉위 8개월만에 원나라에 의해 폐위당하고 소환되었다. 이후에도 충선왕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등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여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父子)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충선왕을 아주 폐위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계국대장공주 재가 소동이 있었다.

2.3. 원 제위계승 분쟁에 참여

충선왕은 폐위되고 원나라로 온 이후 원 성종 테무르 칸의 형으로 요절한 다르마발라의 두 아들인 카이산아유르바르와다에게 접근했다. 당시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는 둘 다 소년이었고, 부친인 다르마발라가 일찍 죽은 탓에 제위 계승이 불확실했지만 당시 원나라의 중진들은 대부분 카이두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을 나간 상태라서 본국에 남아있던 이들 외에 딱히 접근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충선왕은 이들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은 학식이 뛰어난 종친이었고,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서 항렬도 높았으며, 이들 또한 아비 잃은 어린 종친으로서 불안정한 처지였던 만큼 공감대가 형성되어 금방 가까워지게 되었다. 몇 년 안 되어 먼저 장성한 카이산이 원정으로 오랫동안 본국을 떠났기 때문에 충선왕은 아유르바르와다와 더 가까워졌다. 충선왕은 학문적 소양만은 원나라 황실의 종친들 중에서도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아유르바르와다의 스승 역할을 맡으며 한 집에 머물며 보살폈다. 이들의 어머니 다기[31]는 카이산보다는 오랫동안 함께한 아유르바르와다에게 더 마음이 쏠려 있었다.

1307년 테무르 칸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붕어하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현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황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되었다.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외척인 곤기라트[32] 부족을 중심으로 결속된 궁정 귀족들이었다. 테무르 칸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 출신이 아니라 튀르크계 위구르족의 바야우트씨(伯岳吾氏) 출신이었기 때문에 테무르 칸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밀었다. 당시 고려에서 충렬왕 세력이 테무르 칸의 황후 브르간과 안서왕 아난다에게 줄을 댔기 때문에 충선왕은 아난다의 즉위를 반드시 막아야 했으며, 이때 충렬왕까지 대도로 와서 이 일에 개입할 정도였다.[33]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 황후와 안서왕 아난다를 살해하고 아유르바르와다를 먼저 불러들였지만[34] 몽골 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카이산이 대도로 향하자 결국 카이산이 황제에 즉위하는 것으로 상호 합의를 보게 되었다. 훗날 태정제(泰定帝)로 즉위하는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 이순테무르도 후계 순위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한 시점에서 카이산이 대칸이 되어도 상관없었던 충선왕이 원나라의 중신들을 설득해 카이산의 입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공로로 카이산 칸 시절 그는 황태제가 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스승인 태사로 임명되었다.

2.4. 복위

충선왕은 대칸 계승 경쟁에서 이기게 된 이후 곧바로 권력을 회복하게 된다. 1307년 기습 인사발령을 통해 자신을 모략한 왕유소 일당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며, 그를 통해 사실상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1307년부터는 전왕 즉 충선왕이 인사를 비롯한 모든 국정을 담당하고 있고, 충렬왕은 그냥 놀고만 있을 뿐이다. 또한 1308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는데 이 때 이미 그는 정동행중서성좌승상에 임명되어 있었다. 아버지인 충렬왕이 1307년에 정동행중서성우승상을 받은 것을 보면 고려 국왕 칭호만 받지 않았을 뿐 사실상 고려국왕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같은 해 아버지 충렬왕이 승하하자 고려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고려의 국왕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려 국왕으로 복위한지 2년 후인 1310년 심양왕은 '심왕'(瀋王)으로 격상되었다.[35]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지나치게 원나라의 권력 중심과 가까워졌고, 몽골인이 아님에도 심왕위를 받는 등의 출세 때문에 타 종친들의 견제가 심해져서 고려의 신하들조차 "충선왕의 입지는 무종인종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나라 정계에서 조심하셔야 된다"고 간언할 정도였다. 이는 고려에는 관심이 없고, 몽골에만 집중하는 왕을 한심하게 여겨서 한 간언으로 보인다.

다시 고려 국왕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처음 즉위했을 때처럼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그다지 적극적으로 정치를 펼치지는 않았고[36] 자형(姉兄)이 되는 제안대군 왕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며, 자신은 원나라로 가서 이른바 전지 정치라는 일종의 기형적인 원격 통치를 단행했다. 이 와중에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있었는데, 바로 각염법을 시행해서 권문세가와 사원소금 전매 독점을 금지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으면서 재정을 강화한 것이다. 또한 신진사대부가 이 사람을 통해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37]

충선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보다못한 신하들이 왕에게 고려로 귀국할 것을 요구했으나, 충선왕은 번번히 거절했다. 국왕이 해외에서 머물며 통치함이 부당하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리자 훗날 왕위를 차남 강릉대군 왕도에게 넘겨주면서까지(1313) 귀국을 싫어한 것이다.

1310년 원 무종에 의해 '심양왕'에서 '심왕'(瀋王)으로 높여지게 되었다. 원래 전통적으로 2자왕보다 1자왕이 더 격이 높은데, 형식적으로 만주 최대의 실력자들인 칭기즈 칸의 동생 가문들인 동방 3왕가와 동격이 된 것이었다. 거기다 충선왕은 후대 심왕들이 명목상일 뿐 실권이 없었던 것과 달리 세조의 외손자라는 출신과 대칸위 옹립의 공적 때문에 진짜 실권이 있었던 동군연합의 군주였다. 동군연합이 해체된 이후에는 고려 왕실을 이이제이하는 역할만 남게 되었지만, 적어도 충선왕 시절에는 그랬다.

2.5. 양위

존호 <colbgcolor=#fff,#191919> 태위왕(太尉王) / 대위왕(大尉王)
고려에서의 지위 상왕(上王)
별칭 노심왕(老瀋王)
관저 연경궁(延慶宮)
상왕 재위기간 1313 ~ 1325. 05

충선왕에게 귀국을 간청하던 신하들은 결국 포기하고, 세자 왕감을 고려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했는데 충선왕의 심복들이 즉시 이를 대도에 알렸고, 이로 인해 충선왕은 1310년 5월, 세자 왕감과 그를 추대하고자 했던 김의중을 살해해버렸다.

이리하여 새 왕을 추대하는 것마저 어려워지자 신하들은 재차 충선왕에게 귀국을 종용했고, 압력에 못 이겨 그제서야 결국 원 인종의 치세였던 1313년, 재위 5년 만에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 국왕을 양위했다. 결국 이럴 거면서 세자는 왜 죽였단 말인가...

이후 충선왕은 대도에 머물면서 원 인종의 지원으로 원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는 1314년에 '만권당'(萬卷堂)[38]을 설립해 고려와 원나라 양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술을 교류하고, 고전 연구에 힘썼다. 이때 초빙된 학자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있다. 이 와중에 원 인종에게 과거제를 제의하여 원나라의 과거제 실행을 돕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점차 원나라 내에서도 권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316년에는 부왕 충렬왕과 제2비 정화궁주 왕씨의 아들로 충선왕의 이복형인 강양공의 차남 연안군 왕고에게 심왕 작위를 양위했다. 또한 우승상이 물러나 그 자리가 비워졌을 때, 원 인종이 우승상의 자리를 제안했는데, 충선왕은 자신이 그 자리를 맡기에는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그때 원 인종은 "그대가 권력과 거리를 두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권력에서 아주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을 충선왕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처지 속에서 아버지 충렬왕처럼 사냥이나 연회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만권당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불사에 참가하거나 원나라 영역내의 여기저기에 순방을 다녀오곤 했다. 2차례의 즉위와 폐위, 복위를 겪고 아버지 및 아내 계국대장공주와도 권력다툼을 벌인 그이기에 권력의 무상함만을 절실히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원 인종의 반대세력들은 충선왕에게 적대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 무종과 원 인종의 총애로 눈에 띄는 지위까지 올라간 시점에서 이미 그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이 원나라의 종친이라도, 혈통주의가 대단한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고려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충선왕은 완전한 몽골인이 결코 될 수 없었다.

1320년 원 인종이 붕어하고, 그의 아들 영종이 즉위했다. 충선왕은 환관 임백안과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까지 유배[39]를 갔다가 이제현의 간절한 상소가 먹혀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인 원 진종 태정제가 풀어줘 3년 후에 돌아왔다. 하지만 태정제는 누나와 충선왕의 사이가 나빴던 것을 감안하여 충선왕을 중용하지는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 충선왕은 원나라 정계에 영원히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소일만 하다가 1325년 5월에 승하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1세. 후대의 조선 왕조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고, 고려는 평균 42세였으니 당시 기준에선 무난하게 살다 간 축이었다.

정식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으로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를 불러주기 싫어하는 쪽은 '헌효왕' 혹은 '헌왕'이라고 부른다.

3. 평가

충선왕은 성품이 현인을 좋아하고 악인을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고 들은 일은 끝까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늘 선비들을 데려다가 역사상 국가들의 흥망과 군신의 잘잘못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토론했다. 특히 송나라 시대의 옛 일들에 큰 흥미를 가진 나머지, 자신의 막료를 시켜 《동도사략》(東都事略)을 읽게 하면서 왕단(王旦), 이항(李沆), 부필(富弼),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등 명신들의 전기에 이르면 반드시 손을 들어 이마에 댐으로써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정위(丁謂), 채경(蔡京),장돈(章惇) 등 간신의 전기를 들을 때면 반드시 이를 갈면서 통분해 하곤 했다.
고려사》 <충선왕 세가> -총서-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충선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조정에 입시해 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 같은 명유들과 교유했으며 간혹 그 나라 정치에 관여해 썩 훌륭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후 상국의 관직 제도와 겹치는 것을 피해 관직 명칭을 바꾼 것은 제후로서의 법도에 충실한 조치였으며, 전부(田賦)를 올바르게 고치고 염법(鹽法)을 제정한 것은 정치의 요체를 안 행동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는 온 백성들이 우러르며 모든 정무가 집중되는 자리라 단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왕은 황제의 분부로 복위한 뒤 부녀자들과 내시들의 꾐에 빠져 다섯 해나 연경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필요한 물자를 대느라 고통을 겪었고 시종하는 신하들은 오랜 객지 생활에 지친 나머지 귀국할 생각만 하면서 마침내 서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원나라도 또한 그에게 염증을 느껴 두 차례나 귀국을 종용해오자, 왕은 회피할 구실이 없어 아들 왕도(王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또 조카 왕고(王暠)를 세자(世子)로 삼았다. 때문에 부자와 형제 사이에 온갖 시기 질투가 일어나 결국 그 화(禍)가 여러 대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았다. 장래에 대한 계획이 이처럼 불성실했으니 그가 토번(吐蕃)에 유배간 것도 기실 우연이 아닌 것이다.”[40]
충선왕(忠宣王)과(후략) 음탕하고 추잡한 행동은 인륜(人倫)의 도덕을 모독하고 어지럽혔으니, 결국 충선왕은 토번(吐蕃)에 유배되고(후략) 모두가 스스로 취한 것이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동국통감》 <고려 공양왕 4년, 임신년(壬申年), 1392년> -총평-

충선왕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감안해야 할 점은 그에 대한 대중의 비판 대다수가 전근대 역사학, 유교식 전통 역사학과 타국과의 관계사를 논하면서 타국 입장에 무지하고 사료 반영도 부족했던 20세기 사학의 잣대를 바탕으로 행해지는 것도 상당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원 복속기 고려 임금들은 몽골 케식에서 배우고 성장한 몽골계 군주로 여기고 이해해야 그 행보를 이해할 수 있다.

충선왕은 지금으로 치면 한국계 외국인으로 고려인이 아니라 몽골인, 더 나아가 원나라 황금씨족의 피를 모계를 통해 이어받은 황족으로 성장했다. 고려 군주로 생각하고 한국인 입장에서 보려고 하면 그들의 행보를 똑바로 이해할 수 없다.

심왕 직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원의 정치분쟁에 개입해 공을 세워 얻어낸 특혜이자 동방 3왕가, 홍씨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주어진 정치적 안배로 어째서 두 개의 왕위를 홍복원 가문의 반론에 사후 고려왕과 따로 계승된 것인데 이걸 마치 원의 의사따윈 상관없이 충선왕이 마음대로 후계자 지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향이 심하다. 입성책동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결과론에 가깝다. 입성책동이 원 정계에서도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은 것과 별개로 원이 주도하는 질서에 적응한 신하들이 원을 이용해 국왕을 견제하는 경향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원의 지배를 완벽하게 내재화한 신하들과 고려왕과 몽골의 부마, 정동행성 승상에 걸쳐있는 고려왕의 위상에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생겨난 일이지 단순히 심왕 자리 때문이 아니다.

세자 왕감을 고려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움직임이 있어 측근들이 이를 포착하자 죽여버린 건 단순하 패륜이 아니라 원 복속기 정치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다. 고려왕이 원과 통혼하는 유일한 집안이란 관계성을 내세워 무신정권기 땅에 떨어진 왕권을 어느 정도 복구했는데 몽골과 통혼할 수 있는 건 왕만이 아니었다.

세자 역시 원 황실과 통혼하며 원의 지배가 장기화되면 신하들 중에서도 원 황실과 통혼한 이들이 등장한다. 세자는 고려에 가 있는 왕과 달리 케식에서 원 황제를 보좌하기에 황제와의 관계가 고려 왕보다 더 가까웠다. 고려 내에 왕의 지지기반이 없고 원 황실과의 친소 유무로 왕위가 결정되는 시기에 이는 곧 왕과 세자를 정적 관계로 만든다. 충선왕은 왕감을 살해한 뒤에는 충숙왕과도 정적이 되어 그의 즉위 이후에도 인사권과 재정을 쥐고 실질적인 왕 노릇을 했다.

고려내에 왕의 지지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왕과 세자의 정쟁, 양측 측근세력의 다툼은 원 복속기 정치지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로 단순히 패륜으로 넘겨 버리면 제대로 된 이해라고 할 수 없다.

충선왕이 즉위 직후 추진한 재정, 관제 개혁은 원의 제도를 본 딴 것으로 반원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 90년대 초반 이익주의 연구로 이미 증명되었으며 이강한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공민왕의 개혁이 충선왕의 그것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원의 제도를 본 딴 충선왕의 개혁을 다시 공민왕이 이어받았다는 것은 흔히 알려진 공민왕의 반원개혁 담론이 오류임을 밝히는 근거 중 하나이다.[41]

원제국의 간접 지배를 받았던 고려의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로 오늘날에는 고려 국왕이자 원나라의 부마('쿠르겐'), 정동행성의 승상인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의 위치를 파악하고, 몽골과 고려의 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고 있다.

21세기 한국 사학계는 대중의 관심사와 달리 원 간섭기때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었냐 아니었냐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다. 그런 2분법적 개념에서 벗어나 다각적으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학계의 동향이며[42] 충선왕은 그런 복잡다단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충선왕은 몽골 황족 이지르부카가 아닌 고려의 왕 충선왕으로선 좋게 평가해 줄 여지가 적은 것은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인데 부자 간의 권력 암투야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 때문에 별별 해프닝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니 넘어갈 여지가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지도자로서 심각한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에 애정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선 출생 및 성장 과정을 감안해 그럭저럭 이해할 만하나 원 제국의 황족으로써 어찌되었든 자기가 맡은 분봉국을 제대로 통치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대도에서 편지로 원격 통치를 시행한다는 상식 밖의 행태를 보인 건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통신 매체가 상상 이상으로 발달한 현대 역시 영상회의 등 통신매체를 통한 교류는 커뮤니케이션 등 한계가 많아 여전히 대면 회의를 중시하는데 이를 감안하면 당시에 이런 식으로 통치 행위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지 제대로 된 통치 체제였다고 볼 수 없다. 결국 충선왕은 자기 자신의 권위와 안위만 생각하고 정작 고려의 지도자로서의 책임은 회피한 이기적이고 냉혹한 인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43]

4. 가계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여성 편력이 화려하고 그 때문에 폐위까지 당했으며, 한편으로는 남자 애인도 거느렸던 양성애자 왕인데다 부자 갈등, 개혁 군주의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사극의 소재거리로는 충분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이건 충선왕을 다룰려면 원 간섭기 자체를 언급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시기 자체가 일제강점기와 큰 차이가 없는 외세의 점령기라는 흑역사라서 국민정서에 맞지 않아 시청률을 보장하기가 힘든 탓이 크다.
또한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 시기 자체를 어물쩍 넘어가 버리기 때문에 자연스레 인지도도 높지가 않고, 치세 후반기로 갈수록 암군의 면목이 짙어지기 때문에 매력있는 스토리 짜기가 힘들다. 로맨스 퓨전 사극은 몰라도 정통 사극으로는 앞으로도 나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특히나 24년 초 방영되었던 정통사극인 고려거란전쟁이 후반부 대본작가의 역량부족으로 인한 처참한 스토리라인으로 망가진 것을 감안하면 복어나 마찬가지인 충선왕을 다룰 작가는 한국 방송계엔 없다고 단정지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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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권 「폐행2(嬖幸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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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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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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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우왕) (신창(창왕)) }}}}}}}}}}}}



[1] 주지스님 옆에 있는 제후 복장을 한 인물을 충선왕으로 추정하고 있다.[2] 율리우스력 10월 20일[3] 충선왕은 '경'(京)에서 태어난 마지막 군주였다. 아버지 충렬왕 재위 34년째에 '경'(京)은 천자국 제도라는 이유로 '개경 개성부'는 '개성부(開城府) 개성현(開城縣)'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A] 율리우스력 3월 2일[B] 율리우스력 6월 23일[6] 연저의 '연'(燕)은 단순히 대도의 별칭으로 보인다. 즉 연저는 고유명칭이 아니라 '대도에 있는 자택'이란 뜻으로 보인다.[7] 고려 군주 중 제28대 충혜왕과 함께 외국에서 죽은 군주 중 한 명이다. 이는 지금 기준으로 황금씨족의 일원이었던 당시 충선왕은 원나라를 자신의 조국으로 봤을 수 있다.[8] 율리우스력 2월 16일[A] [A] [11] 율리우스력 9월 24일[12] 율리우스력 9월 13일[13] 충렬왕이 승하하는 건 7월 기사일이지만, 준비 과정을 거치느라 1개월 늦게 왕위에 올랐다.[C] 율리우스력 4월 20일[15] 율리우스력 6월 9일[16] 율리우스력 4월 1일[C] [B] [19] 2비로 몽골인이었지만 보르지긴씨 황족 출신은 아니었던 듯 하다. 세자 광릉군(廣陵君) 왕감(王鑑)과 제27대 충숙왕의 모후였다. 이름은 예수진(也速眞).[20] 쿠빌라이 칸의 아들인 칭김 황태자의 황태자비. 훗날 '휘인유성황후 옹기라트씨'(徽仁裕聖皇后 弘吉剌氏)로 추존되었다.[21] 젊은 힘센 황소라는 뜻.[22] 창왕 다음 왕이자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34대 공양왕원 간섭기 전의 군주인 제20대 신종의 후손이었기에 한•몽 혼혈이 아니었다.[23] 고려 태조 왕건을 칭송하였다는 등 몇몇 발언을 두고 고려인 정체성도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사람은 행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고려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편지로 원격통치하는 어린아이도 납득 안가는 상식밖의 행동을 하지 말고 양위하든가 일년에 반년은 고려에서 통치하는 등 최대한 배려했었어야 옳다.[24] 본래 제1비였으나 제국대장공주가 시집오면서 2비로 밀려났다.[25] 당시 쿠빌라이 칸이 어린 충선왕에게 "역사상 누가 가장 현명한 황제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충선왕은 "한 고조당 태종입니다"라고 답했다. 또 쿠빌라이 칸은 "나, 한 고조, 당 태종 셋 중 누가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생각하느냐"고도 물었는데, 충선왕은 "저는 아직 너무 어려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26] 제국대장공주가 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사냥만 다냔다고 충렬왕을 꾸짓은 일 말고도, 음악을 좋아하는 충렬왕이 틈만 나면 내관과 악사들에게 연주를 시키자 제국대장공주가 사람을 보내 “거문고와 퉁소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며 중단시켰다는 기록도 있다.[27] 정화궁주 왕씨의 조카[28] 홍규는 1270년 제24대 원종의 밀명을 받아 송송례와 함께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를 살해하고(경오정변), 무신정권 100년의 역사을 종결시킨 인물이었다.[29] 몽골어 통역으로 재상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훗날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의 증조부가 된다.[30] 스스로도 '나는 위대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다'라고 자칭할 정도였다.[31] 곤기라트부 출신, '옹기라트'부라고도 함.[32] 옹기라트 혹은 콩기라트[33]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부마였기 때문에 종친 내에서 서열이 높았고, 친왕의 딸과 혼인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던 충선왕보다도 더 높았다.[34]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던 충선왕 또한 계승 경쟁에서 발언권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충선왕은 자신과 함께한 아유르바르와다를 밀었는데 기록은 없지만 당시 충선왕은 이 복잡한 정국 속에서 대도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었던 아유르바르와다와 중신들 사이를 연결한 것으로 추정된다.[35] 작위의 예법상 글자가 2개인 '2자왕'보다 글자가 1개인 '1자왕'의 격이 훨씬 높았다.[36] 이때 홍중희의 제1차 입성책동 문제가 터진 것도 한 가지 이유이다. 다만 충선왕을 망친 다른 요인으로는 숙창원비 김씨를 꼽는다. 이 여자는 본래 충선왕이 부왕 충렬왕을 위로하고자 바친 후궁이었는데 충렬왕 사후 충선왕이 취하는 패륜을 범한 것이다! 충선왕이 이 요부에게 빠지는 바람에 무능력한 오빠 김문연은 종2품 첨의평리에까지 올랐고, 원나라 황제로부터 벼슬까지 받았다. 또 그녀의 요청에 따라 중경과 서경에서 행하던 팔관회도 정지시킨다. 이 꼴을 보다못한 대신 우탁이 왕의 측근들더러 "가까운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이와 같은 추악한 일을 저지르게 했으니 그 죄를 아는가?" 라며 일갈하는데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충선왕은 얼마 후 원나라로 떠나고 죽을 때까지 숙창원비를 찾지 않았다. 사실 이건 수계혼이라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의 첩(물론 자신의 생모는 제외.)들을 물려받는, 원나라 등 유목 민족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관습의 흔적이었지만 고려인들에게는 당연히 패륜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37] 이기남(1971년), <충선왕의 개혁과 사림원의 설치>, 《역사학보》, 52호[38] 직역하면 '10,000권의 책을 모은 곳'이란 뜻이 된다. 물론 '만'(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정확히 10,000권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책을 모았다는 수사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39] 오늘날의 티베트로 유배를 갔다고 해서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제후국 군주까지는 아니어도 꽤 대접을 잘 받았다. 충선왕 본인도 티베트 지역의 토착 문화와 라마 불교에 흥미를 느껴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유배의 목적이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앙 정계에서 추방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 같다.[40]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41] 학계에선 90년대 후반부터 공민왕의 정치를 민족담론에 근거한 반원개혁이라 볼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김순자, <麗末鮮初 對元․對明關係 硏究> ,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9 / 김경록,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 역사와 현실64, 한국역사연구회, 2007 / 이강한, <공민왕 5년(1356) 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제65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9 / 이명미, <13~14세기 고려.몽골 관계 연구>, 혜안, 2016 등[42] 대표적인 학자로 김호동, 이강한, 이개석, 이명미 등이 있다.[43] 고려 충선왕의 정치개혁과 元의 영향[44] 홍규의 딸. 홍규(1242년 ~ 1316년)는 젊은 권신 임유무를 죽이고,(경오정변) 100년이나 이어진 무신정권을 종결지은 무신으로, 제26대 충선왕의 할아버지인 제24대 원종과 아버지인 제25대 충렬왕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왕권을 되찾아 준 그야말로 공신 중에 공신이었다. 그러나 장녀가 공녀로 차출될 위기를 겪자, 그녀를 비구니로 분장시켜서 공녀 차출을 피하려다 걸리는 바람에 둘 다 모진 고문을 겪게 되었고, 결국 장녀는 공녀로 차출되면서 원나라의 귀족인 아쿠타이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충선왕은 홍규의 3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는데 바로 순화원비 홍씨이다. 훗날 제27대 충숙왕이 홍규의 5녀이자 순화원비 홍씨의 친동생과 혼인하는데, 이 사람이 고려 말의 파란만장할 삶을 살았던 공원왕후 홍씨였다.[45] 고려 왕조에 충선왕처럼 동성 연애를 한 기록이 남은 임금이 제7대 목종과 제31대 공민왕인데 세 명의 케이스가 조금씩 다르다. 목종은 여자에게 무심하고, 후사도 안 보며 잘생긴 남자들을 데려다 동성애에 빠졌던 반면 충선왕은 후사도 보고 후궁도 여럿두며 여성편력이 상당했고 원충 외에는 동성 애인을 둔 기록이 없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일편단심이었고, 이 점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으나 노국대장공주 사후 맛이 가서 여러 음행을 벌인 케이스이다. 케이스가 케이스인 탓에 사실상 왜곡되었거나 부풀려진 기록으로 보고 있다.[46] 이외에도 수많은 탱화들이 자물쇠에 잠겨 보관 중이다.[47] 이걸 보면 본인의 정체성이 몽골인이기는 해도 고려계라는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고려계와 고려인의 정체성은 엄연히 다르다.[48] 이러한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차라리 이때 《고려실록》이 중국으로 완전히 반출됐으면 현전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49] 4학사 중 한 명인 이진의 아들이자 권부의 제자였으며 사위였다.[50] 《고려사》 충선왕 총서 왕이 어려서부터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다[51] 로맨스 소설인데도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던 원작과는 달리 드라마는 각색이 많이 되어 역사에도 원작에도 충실하지 못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