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관련 틀 | |||||||||||||||||||||||||||||||||||||||||||||||||||||||||||||||||||||||||||||||||||||||||||||||||||||||||||||||||||||||||||||||||||||||||||||||||||||||||||||||||||||||||||||||||||||||||||||||||||||||||||||||||||||||||||||||||||||||||||||||||||||||||||||||||||||||||||||||||||||||||||||||||||||||||||||||||||||||||||||||||||||||||||||||||||||||||||||||
|
고려국 해도도원수 경렬공(景烈公) 정지 鄭地 | |
시호 | 경렬공(景烈公) |
주요 직위 |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문하평리(門下評理)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
본관 | 하동 정씨[1] |
초명 | 준제(准提) |
이름 | 지(地) |
아버지 | 정리(鄭履)[2] |
자녀 | 아들 정경(韓儉)[3] |
손주 | 손자 정종(韓種) |
생몰연도 | 1347 ~ 1391 |
주요 참전 |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제2차 요동정벌 |
『고려사』 권113, 열전26 정지 |
[clearfix]
1. 개요
고려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초명은 준제(准提). 시호는 경렬(景烈). 외침에 시달렸던 고려 말기 동시대에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최영, 이성계 같은 쟁쟁한 무장들보다 인지도가 낮지만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왜구 토벌에서 맹활약한 명장이다. <고려사>에 수록된 그의 열전에 따르면 나주 출신이었고 외모는 장대했으며 성품이 관후[4]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명은 정준제라고 한다.
2. 생애
2.1. 공민왕 시기
1347년 전라도 나주에서 정3품 판군시시사 정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겼으며 책 속에 담긴 의미를 잘 파악하는 것은 물론 이를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도 잘 했다고 한다. 항상 책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니 훗날 무신으로서 활동하는걸 생각해보면 이성계도 그러하였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의외라고 볼 수도 있는 부분. 조준, 윤소종과 같은 문신들이 그와 친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걸로 봐서는 그 수준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훗날의 일이지만 중종 때 왜구와 관련해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는 그를 선비인 무장 혹은 병법을 익힌 문신을 의미하는 유장(儒將)이라고 언급할 정도였으니 이후 그의 무신으로서의 활동까지 생각해보면 지용겸비를 넘어선 문무겸비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후 1366년 과거에 급제한다.다만 그렇게 학문을 좋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숙위를 담당하는 속고치 소속의 중랑장이 되는데 이 때가 공민왕 때로 왜구의 침입이 심각했던 시기였던지라 공민왕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검교중랑장인 이희라는 인물이 수전 훈련을 해야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이를 본 공민왕은 기뻐하기보다는 "초야에 묻힌 이희도 이러한데 백관이나 위사[5] 중에서는 이러한 인재가 없느냐"며 탄식하자 위사였던 유원정이라는 이가 정지를 추천했고 때마침 정지가 왕을 호위하고 있는 중이었던지라 왕이 그에게 직접 물어보자 자신의 주머니에서 왜구에 대한 전략이 적힌 글을 꺼내어 바쳤다. 이를 본 공민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희를 양광도 안무사로 임명한 것과 더불어 그를 전라도 안무사 겸 왜인추포만호로 임명하였으며 정지 휘하의 군사 85명에게 첨설직[6]을 준 것도 모자라서 그와 이희에게 따로이 천호공명첩 20개와 백호공명첩 200개를 각각 주는 등 파격에 가까운 혜택을 제공한다.
“내륙에 사는 백성은 배를 부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니 왜구를 막기 어렵습니다. 바닷섬에서 나고 자랐거나 해전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만 등록시켜 저희들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게 하면 5년 내에 바닷길을 깨끗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순문사 같은 관직은 군량을 허비하고 민생을 소란하게 할 뿐이니 바라옵건대 그것을 없애소서.” - <고려사 정지 열전>
이후 그러한 공민왕의 모습에 감동받은 듯 정지와 이희가 2~3번에 걸쳐 모두 수 십 조에 달하는 전략을 올렸는데 이에 대해 요약하면 위와 같았다고 한다. 사실 당시 순찰사로 있었던 최영이 여섯 도를 순시한 후에 전함 2천 척을 건조해 각 도의 군사들로 하여금 왜구를 잡게 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진행하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집을 부수고 달아나는 자가 10에 5~6이나 되었을 정도로 심각했던 상황이 벌어졌던지라 정지 등이 이러한 건의를 올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공민왕이 최영과의 상의 끝에 이를 받아들여서 시행하자 그제서야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한다.
2.2. 우왕 시기
공민왕의 눈에 들어 1366년에 등용되었고 1374년 정5품이었던 시절 선배이자 명장이었던 최영이 추진한 계획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패기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진가는1374년 공민왕 사후 뒤를 이어 즉위한 우왕 때부터 드러나게 된다. 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보자면 대략 이러하다.- 예의판서로 재직 중이었던 우왕 3년(1377) 여름에 왜구가 순천, 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등지를 침략하자, 정4품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적을 격파해 18명의 목을 베고 3명을 사로잡았고, 겨울에도 왜구를 공격하여 40여 명의 목을 베고 두 명을 사로잡았다.
- 우왕 4년(1378), 왜구가 영광군, 광주광역시, 동복(同福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 등지를 침략해 오자, 정지가 도순문사 지용기 및 조전원수 이림, 한방언 등과 함께 옥과현(玉果縣 :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까지 추격했는데, 적이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가자 아군이 포위한 후 불을 지르고 마구 공격하니 적은 대부분 불에 타 죽었으며 말 100여 필을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정지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에, 승첩을 보고하자 정지 및 지용기에게 각각 은 50냥을 하사하였다. 왜구가 다시 담양현(潭陽縣 : 지금의 담양군)을 침략했으나 정지와 지용기가 격파해 열일곱 명의 목을 베었다. 곧이어 정지는 정3품 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다.
- 우왕 8년(1382)에는 정 2품 해도원수가 되었는데, 왜선 50척이 진포(鎭浦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로 들어오자 정지가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내었고, 군산도(群山島 :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까지 추격하여 배 네 척을 포획하였다.
- 우왕 9년(1383)에는함선을 개조하고 지휘소를 지은뒤 5월에는 정지가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중에 왜구가 큰 배 120척을 거느리고 경상도를 침략해왔는데, 이 때 출전하여 선봉에 있던 30척과 전투를 벌였고, 격파하여 적선 20척을 불태우니, 이것이 바로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 대첩, 최무선의 진포 대첩과 더불어 유명한 전투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는 관음포 전투이다. 이후 정지는 이 때의 전공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2품 해도도원수 겸 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로 임명된다.
- 우왕 14년(1388)에는 안주도도원수로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 휘하에 소속되어 제2차 요동정벌에 참가했는데, 그 즈음 이성계가 출전하기 전에 사불가론을 주장하며 예측했던 대로 왜구가 세 도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황이 그리되자 위의 전공들로 인해 왜구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던 정지가 위화도 회군 직후 양광전라경상도도지휘사로 임명되어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과 진원서, 전주목사 김용균, 양광도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는데, 이 때 적을 대파하여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둔다. 당시 사람들이 “이번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삼도의 백성은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라며 안도했다고 할 정도.
이렇듯 동시대의 선배 명장인 최영, 이성계 못지 않은 전공을 세웠는데, 우왕 13년(1387)에는 대마도 정벌을 자청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이끼도[一岐島](지금의 나가사키현[長岐縣] 이끼도[壹岐島])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충렬왕 7년) 일본 정벌 당시 몽고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려사 정지 열전>
다만 선배들처럼 백전백승은 아니었던 듯하다. 몇 번의 패전을 경험하기도 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왕 5년(1379)에 순천(順天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조양(兆陽 :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군), 진원(珍原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등지를 침략한 왜구와 전투를 벌였을 때 패한 것이 그 중 하나다.[7] 또 하나는 바로 사근내역 전투로서 당시 그 전투에 참가했던 9원수 중 1명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황산대첩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 전투도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다. 물론 이 때의 패전 이후 이성계, 변안열 등이 새로이 급파되었을 정도니 그 상황이 심각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그와 같은 9원수 중 1명인 배극렴이 황산대첩 이전에 이성계와 합류했던 것으로 봐서는 정지 역시도 그들과 더불어 황산대첩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어찌되었든 숱한 전공을 남기는데 전쟁 활동 이외에도 예의판서, 문하평리, 지문하부사 등 중앙의 관직에도 임명되어 최영, 이성계, 변안열과 같은 다른 선배 무장들처럼 중앙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권문세족 등으로 인해 조정 상황이 막장이었던 탓인지 정치에도 관심을 가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고려사> 조준 열전에 따르면 조준이 그와 더불어 훗날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우는 윤소종, 이성계와 같은 동북면 출신에 사돈 관계인 조인옥, 공민왕에게 정지를 추천한 유원정 등과 벗이 되었고 그들과 함께 왕씨를 중흥하자는 맹세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지 또한 조준의 벗으로써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던 것으로 봐서는 그 역시도 이성계처럼 신진 사대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 역시도 한때는 학문을 익혔던 인물이었고 늘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였다. 물론 그들이 목표로 삼은 폐가입진은 좀 뒤에 나오는 것인지라 저 당시의 일에 대한 진위 여부가 좀 애매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저들의 관계가 상당히 깊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위화도 회군 직후 윤소종을 이성계한테 천거한 이가 정지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기록에다 이후 위화도 회군 공신 중 1명으로 선정되는 것을 통해 본다면 그 역시도 위화도 회군에 동조한 인물임을 알 수 있고 그가 추천한 윤소종의 이후 활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역시도 개혁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2.3. 창왕과 공양왕 시기
이후 창왕 때에 문하평리로써 이성계, 심덕부, 배극렴 등과 함께 우왕을 위해 황려부(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에서 연 잔치에 참석하기도 하고, 공양왕 원년에는 양광전라경상도절제체찰사 겸 총초토영전선성사에 임명되어 활동한다.그런데 창왕 말에 최영의 인척인 김저, 정득후가 우왕의 지시를 받아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우왕의 추천을 받아 도움을 받기로 한 곽충보의 배신으로 실패하여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김저는 체포되어 순군옥에 수감돼서 심문을 받은 순간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김저가 자신과 공모한 이로 변안열, 우현보 등을 거론하는데 그 명단에 정지의 이름까지 나온 것이다. 이것이 참 특이한 상황인데 다른 이들 같은 경우에는 이성계 혹은 그를 따르는 이들과 여러 이유로 갈등했던 정적들이니 그렇다쳐도, 정지는 상술했다시피 이성계의 최측근인 조준, 윤소종과도 막역한 사이였으며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하고 이성계에게 윤소종을 추천하는 등의 활동을 보여줄 정도로 혁명파와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창왕을 옹립한지 1년만에 이성계를 제거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는 음모에 가담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당시에도 정지의 경우와 김저가 이러한 진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옥사를 한 것을 들며 이 사건에 대해 의혹을 품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8]
어쨌든 폐위된 왕이 다시금 왕위를 되찾고자 벌인 사건에 이름이 언급된지라 결국 유배형에 처해져서 외지로 가게 되는데, 같은 사건으로 유배를 간 변안열이 처형당할 당시 “우왕을 맞아오려고 했던 사람이 어찌 나뿐이랴?”라고 발언을 하고 죽음으로써 그의 부장이었던 이을진이 의심을 받아 국문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가 여러 사람의 이름을 대는데 또다시 그의 이름이 나와 공양왕 2년, 관련자로서 계림(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그곳에 파견된 좌헌납 함부림에게 국문을 당하게 된다. 이후 횡천현(지금의 강원도 횡성군)으로 옮겨지는데, 대간에 의해 더 먼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예부에서 신 등에게 이르되, "그대 나라 사람으로서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彝)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란 사람이 와서 황제에게 호소해 말하되, '고려의 이 시중(이성계)이 왕요(王瑤: 공양왕)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는데, 요는 종실이 아니고 곧 이 시중의 인친입니다. 요는 이성계와 더불어 모의하여 병마를 움직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함으로, 재상 이색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니, 곧 이색, 조민수, 이임, 변안열, 권중화, 장하, 이숭인, 권근, 이종학, 이귀생을 잡아서 살해하려 하고, 우현보, 우인열, 정지, 김종연, 윤유린, 홍인계, 진을서, 경보, 이인민 등은 잡아서 먼 곳으로 귀양보냈는데, 그 내쫓긴 재상 등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에게 고했습니다. 부디 친왕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와서 정토하게 해주십시오.'한다."하면서 윤이와 이초가 기록한 이색, 조민수 등의 성명을 내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양왕 1년(1390년) 5월, 사절단으로서 명나라에 갔던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이 개경에 돌아와 위와 같이 말함으로서 이른바 윤이·이초의 옥사가 벌어지는데, 이에 고려 조정은 우현보, 권중화, 경보, 장하, 홍인계, 윤유린, 최공철 등을 순군욱에 내려 가두고 이색, 이임, 우인열, 이인민, 이숭인, 권근, 이종학, 이귀생 등에 이어 정지도 청주의 감옥에 갇혀 국문을 받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유린, 최공철, 홍인계가 옥사하여 시신을 저자에 효수하기에 이르고, 이제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것처럼 보이던 정지에게 기적이 일어났는데 감옥에 갇힌 정지 등을 국문하려 할 때에 갑자기 천둥을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져 냇물이 범람하고 청주성을 덮쳐 성 안의 물의 깊이가 한 장 남짓 되어 관사와 민가가 거의 다 떠내려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에 공양왕은 하늘의 뜻이니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성계 일당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지가 청주에서 국문을 받으며 후술한 말만을 남기고 자복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이 시중(이성계)이 대의를 바탕으로 회군할 때, 내가 이곽(伊霍)[9]의 고사를 들어 시중에게 풍간[10]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그런 내가 어찌 윤이와 이초 같은 자들과 일당이 되겠는가? 하늘에 맹세하고 하는 말이다."
이 때, 그 말의 지닌 의미가 마음 속 깊은데서 우러난지라 능히 사람을 감동시켰다고 하고, 옥관도 더 이상 진술을 받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정지는 물러 나와 사람들에게 이리 말하였다고 한다.
"사람이 나서 한 번은 죽는 법이니 목숨이 무어 그리 아깝겠느냐? 다만 왕씨가 다시 왕위에 올랐는데도 억울하게 죽는 것이 비통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튿날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국문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상술되었듯 마침 물난리가 나서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후 회군의 공을 인정받아 이등공신이 되고 녹권과 토지 50결을 하사받았으며, 변안열과 같은 일당이라 하여 죄를 받은 것은 모함이라고 인정받아 사면되었고, 광주에서 거처하다가 공양왕 3년인 1391년 10월에 나라로부터 판개성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10월15일 병사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 태조 2년인 1394년 7월에 태조 이성계는 정지를 다시금 위화도 회군 2등 공신에 책록해 신원을 회복시켜 줬고, 같은 해 9월에는 전라도 도관찰사 조박이 "처음으로 전함을 만들어서 왜구를 막아내 백성들을 구한 정지의 집을 정표하자."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태종 3년인 1403년 5월에는 태종이 전과 같이 처음으로 병선을 만든 공으로 그의 외아들인 정경을 서용[11]하라고 명함으로서 그 공로를 기렸다고 한다.
2.3.1. 실각에 대한 추측
이쯤 되면 누구라도 의문이 생길 것이다. 어째서 조준, 윤소종 등과 같은 조선 건국의 주역들과 친분이 있었고, 특히 회군 직후 윤소종이 이성계에게 곽광전을 바치게끔 도와주기까지 했던 그가 왜 반대파로 몰려 실각을 당하고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왜 그리 되었는지 기록이 없는 만큼 그저 추측만 할 수 밖에 없는데, 굳이 요약해보자면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하나는 제2의 이성계를 경계한 이들에 의한 경우다. 우선 그의 삶을 한줄로 요약해보자면 '적지 않은 전공을 세운 지방 출신의 문무겸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 당시 또 한 명이 있었다는 것을 여말선초사를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바로 태조 이성계이다. 다들 알고 있듯이 그 역시도 정지와 비슷한 이력의 소유자였는데, 그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역성혁명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같은 이력을 가진, 특히나 이성계보다 젊은 인물이 있다? 물론 역성혁명의 핵심인물인 조준, 윤소종 등이 그의 절친이고, 정지 역시도 개혁에 적극적인 듯한 모습을 보인 만큼 문제라고 보긴 힘드나, 명망이 있다고 해도 문신인 절친들과는 달리 그는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어떤 이들 입장에서는 왠지 걸리는 부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인재인 점을 고려하여 제거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군부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을 축소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를 실각시킨 뒤 어느 정도 적당한 시기에 복직을 시키려 했으나, 위에도 나왔듯 고된 유배생활 때문인지 사면되고 판개성부사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요절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나 싶다.
또 하나는 그는 그저 온건개혁파였을 뿐이고, 정몽주처럼 공양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성계와 절친들의 진심을 알았을 경우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청주에서 국문을 받던 당시 그가 과거 이윤과 곽광의 예를 들어 이성계에게 간언을 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정지의 도움을 받아 이성계에게 곽광전을 바친 윤소종의 차후 행적을 생각해본다면 정지 역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기에 윤소종을 이성계에게 추천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윤과 곽광 모두 황제를 물러나게 했을 뿐 그 이상의 선은 넘지 않았던 만큼, 정지 역시도 정몽주처럼 국왕만을 바꾸는 정도의 개혁만을 원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럴 경우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절친들의 마음을 알았다면 정몽주처럼 반발했을 것이고, 역성혁명 세력에게 있어선 이미 명망이 높은 정몽주도 정몽주지만, 이성계만큼은 아니나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문무를 두루 갖춘 그에게도 큰 위기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그를 반대파로 몰아 유배를 보내고, 그 사이 고려 군부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찌되었든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기록이 적은 만큼 이런 식으로 추측 밖에 할 수 없는데, 그가 청주에서 남긴 말 등을 생각해보면 그의 실각은 좀 묘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겠다.
3. 여담
고려말 정지 장군의 경번갑 유물 | 복원된 정지 장군의 경번갑 |
- 관련 유물로 보물로 지정된 정지장군 갑옷이 있다. 종류는 경번갑인데 원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어 고려시대 갑옷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고, 오늘날 정도전과 같은 한국 사극에서 복원된 경번갑은 대부분 정지의 이 갑옷과 세종실록에 실린 경번갑 그림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갑옷을 소재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1~12월까지 보존처리 중이라고 한다.
- 그런데 조선시대 왜란기의 의병장인 김덕령이 의병활동을 시작했을 때 정지의 묘가 있던 고향에서 그의 후손이 보존하고 있던 정지의 갑옷을 입었다는 얘기가 국조인물고를 통해 전해진다.
2백년 전의 갑옷을 사용할 수 있었을 정도의 보존기술은 대체....다만 앞뒤 내용을 보면 거의 전설과 같은 느낌인지라 진실인지는 명확치가 않다.
- 또한 조선 초의 무신인 마천목이란 인물이 정지를 따랐던 인물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마천목이란 인물이 위치상 자신의 전 상관이 추락한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전과 정지와는 달리 나름 성공한 삶을 살았던 조준의 인생을 바꾼 무인정사나 2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여 공신이 된 인물이라는 게 상당히 묘한 부분. 다만 실록에 따르면 정지의 아들이자 조선전기 무신인 정경(1370~1421)과는 썩 좋은 관계가 아니어서 갈등이 적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선 우연일 가능성도 있을 듯 하다.
4. 대중매체에서
- 정도전 25회에서 언급된다.
- 대풍수 28회에서 등장한다.
5. 같이보기
[1] 경렬공파의 파조다.[2] 나주에서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냈다. 홍건적의 두번째 대침공 당시 명장 안우의 휘하로 출전, 박주(博州)에서 장신보(張臣輔)·이원계(李元桂)·홍선(洪瑄)·정선(鄭詵) 등과 함께 홍건적들을 섬멸하는데 참여하였다.[3] 하나뿐인 외아들로,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 생몰연도 1370 ~ 1421.)[4] 너그럽고 후하다[5] 대궐이나 능, 관아, 군영을 지키는 장교를 말한다.[6] 고려 말기에 군공을 포상하기 위해 설치된 실직없는 관직.[7] 다만 최영 열전에 따르면 당시 그의 소식을 들은 최영이 때마침 자신을 찾아온 경복흥 등에게 “재상들이 어찌 나라를 근심하지 않소? 왜구들이 이처럼 제멋대로 날뛰니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스럽다한들 그 많은 적들을 어떻게 당해내겠소?”라고 꾸짖었고 이를 들은 이들이 무안해하였다고 하는 걸로 봐서는 그의 잘못도 어느 정도 존재했겠지만 당시 상황이 상당히 안 좋았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쳐서 생긴 일인 것으로 추정된다.[8]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김저 사건의 미심쩍음에 주목하고, 이 사건을 아예 정도전, 남은, 이방원이 다같이 쿵짝을 맞춘 이성계 일파의 선날승으로 묘사한다.[9] 상나라의 재상인 이윤과 전한의 재상인 곽광을 말한다.[10] 완곡한 표현으로 잘못을 고치도록 간함을 이르는 말이다.[11] 죄를 지어 파면된 이를 다시 관직에 등용함을 의미한다.[12] 고려 숙종 때의 무관 왕국모(王國髦)도 시호가 경열공이긴 한데, 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은 이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