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의종의 제1왕후 장경왕후 | 莊敬王后 | |||
출생 | 연대 미상 | ||
강릉공 왕온의 사저 | |||
사망 | 1157년 이후 | ||
고려 개경 개성부 흥덕궁 (現 경기도 개성시) | |||
능묘 | 희릉(禧陵) | ||
재위기간 | 고려 태자비 | ||
1143년 (윤)4월 18일 ~ 1146년 2월 28일 | |||
고려 제1왕후 | |||
1143년 2월 28일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부계 개성 왕씨 모계 명주 김씨 | |
부친 | 부친 강릉공 왕온 모친 명주 김씨로 추정[1] | ||
형제자매 | |||
배우자 | 의종 | ||
자녀 | |||
작호 | 태자비(太子妃) 흥덕궁주 왕비(興德宮主 王妃) | ||
관저 | 흥덕궁(興德宮) | ||
시호 | 혜자장경왕후(惠資莊敬王后) | ||
별호 | 경순왕후(景順王后[5]/敬順王后[6]) |
[clearfix]
1. 개요
의종의 제1비. 시호는 의종 장효대왕과 莊 자 돌림이다.2. 생애
남편 의종과는 태자 시절 혼인해 왕후가 되었다. 의종과 장경왕후의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식을 넷이나 두었으며 태자가 태손을 낳아 할머니까지 되었으니 태자비 → 왕후 → 태후 → 태왕태후 순으로 정석적인 탄탄대로를 탈 수도 있었으나, 남편의 실정으로 몰락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 해 세 자매(의종비 장경왕후, 명종비 광정태후, 신종비 선정태후) 중 유일하게 태후의 시호를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의종이 폐위될 당시 의종과 태자 부부, 태손에 대한 기록은 있어도 왕후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7]고려사 지 국상조에서 경순왕후(景順王后[8]/敬順王后[9])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시동생인 명종이 사망하자, 국왕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하지만 최충헌의 반대로 국왕이 아닌 '경순왕후'의 예에 맞춰서 장례를 지냈다.[10]
3. 가족관계
장경왕후의 증조부는 문종 왕휘, 조부는 조선국양헌왕 왕도, 아버지는 강릉공 왕온 이다. 어머니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안경공(安敬公) 김고(金沽, ?~1123)와 인주 이씨의 딸 명주 김씨이다. 외할머니인 인주 이씨의 가계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친할머니인 인주 이씨와 가까운 인척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여동생으로는 광정태후, 선정태후가 있다. 의종, 명종, 신종 삼형제가 강릉공 왕온의 딸인 장경왕후, 광정태후, 선정태후 세 자매와 혼인한 것이다. 강릉공 왕온의 둘째 딸도 인종의 차남 대령후 왕경와 혼인했고 아들인 공화후 왕영은 인종의 딸 승경궁주와 혼인했다. 고려 왕실 특유의 근친혼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의종과의 슬하에 아들로 효령태자 왕기, 딸로 경덕궁주, 안정궁주, 화순궁주를 두었다.
[1] 평장사(平章事) 안경공(安敬公) 김고(金沽, ?~1123, 명주 김씨(溟州 金氏))와 경원군부인(慶源郡夫人) 경원 이씨(慶源 李氏)의 딸로 추정[2] 인종의 차남 대령후 왕경의 부인[3] 인종의 3남 명종의 왕후[4] 인종의 5남 신종의 왕후[5] 고려사 기준[6] 시책문(諡冊文) 기준. 남동생 공화후 왕영의 묘지명에서도 한 글자가 결락된 채 등장한다.[7]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아들인 효령태자가 1149년 4월에 태어났으므로 적어도 그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8] 고려사 기준[9] 책문 기준. 남동생 왕영묘지명에서도 한 글자가 결락된 채 등장한다.[10] 최충헌은 중방 세력의 잔재였던 이전 무신 집권자들이 세운 명종을 싫어했다. 이에 결국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자신의 꼭두각시 천자로 만들어 세웠다. 이 과정에서 명종의 정통성을 낮추기 위해 장례를 왕이 아닌 왕비의 격으로 낮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