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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3:52:54

충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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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태조 혜종 [ruby(정종, ruby=定宗)] 광종
<rowcolor=#670000>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경종 성종 목종 현종
<rowcolor=#670000>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덕종 [ruby(정종, ruby=靖宗)] 문종 순종
<rowcolor=#670000>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선종 헌종 숙종 예종
<rowcolor=#670000>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인종 의종 명종 신종
<rowcolor=#670000>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희종 강종 고종 원종
<rowcolor=#670000>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rowcolor=#670000>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rowcolor=#670000> 제33대 제34대
창왕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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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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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70000>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정윤 황태자 · 왕태자 ·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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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400> 태조 (정윤) 광종 (정윤) 경종 (정윤) 성종 (정윤)
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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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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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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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
현종 문종 선종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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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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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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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거
(충렬왕)
충숙왕 공양왕
왕정
(충혜왕)
왕석
(정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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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왕자
[[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6700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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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670000; font-size: .7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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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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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공|{{{#!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670000; font-size: .7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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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왕후 · 왕태후 · 왕태자
왕자 : 국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왕녀 : 태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calc(1.5em + 6px); word-break: 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세가(世家)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670000,#fedc89>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rowcolor=#670000,#fedc89>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성무부인 소생 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혜종 정종 광종
의화왕후 임씨 · 후광주원부인 왕씨 · 청주원부인 김씨 · 궁인 애이주 문공왕후 박씨 · 문성왕후 박씨 · 청주남원부인 김씨 대목왕후 황보씨 · 경화궁부인 임씨
흥화궁군 · 태자 왕제 · 경화궁부인 · 정헌공주 · 명혜부인 경춘원군 · (문성왕후 소생 공주) 효화태자 · 천추전부인 · 보화궁부인 · 문덕왕후
경종 성종 목종
헌숙왕후 김씨 · 헌의왕후 유씨 · 헌애왕태후 황보씨 · 헌정왕후 황보씨 · 대명궁부인 유씨 문덕왕후 유씨 · 문화왕후 김씨 · 연창궁부인 최씨 선정왕후 유씨 · 궁인 김씨
- 원정왕후 · 원화왕후 - }}}
현종
원정왕후 김씨 · 원화왕후 최씨 · 원성태후 김씨 · 원혜태후 김씨 · 원용왕후 유씨 · 원목왕후 서씨 · 원평왕후 김씨 · 원순숙비 김씨 · 원질귀비 왕씨 · 귀비 유씨 · 궁인 한씨 · 궁인 이씨 · 궁인 박씨
평양공 왕기 · 검교태사 왕충 · 효정공주 · 천수전주 · 인평왕후 · 경숙공주 · 효사왕후 · 효경공주 · 경성왕후 · 아지
덕종 정종
경성왕후 김씨 · 경목현비 왕씨 · 효사왕후 김씨 · 이씨 · 유씨 용신왕후 한씨 · 용의왕후 한씨 · 용목왕후 이씨 · 용절덕비 김씨 · 연창궁주 노씨
상회공주 · (유씨 소생 공주) 애상군 왕방 · 낙랑후 왕경 · 개성후 왕개 · 도애공주
문종
인평왕후 김씨 · 인예순덕태후 이씨 · 인경현비 이씨 · 인절현비 이씨 · 인목덕비 김씨
대각국사 왕후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 왕탱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 왕경 · 조선공 왕도 · 부여후 왕수 · 진한후 왕유 · 적경궁주 · 보령궁주
순종 선종
정의왕후 왕씨 · 선희왕후 김씨 · 장경궁주 이씨 정신현비 이씨 · 사숙태후 이씨 · 원신궁주 이씨
- 한산후 왕윤 · 경화왕후 · (사숙태후 소생 공주) · 수안택주
숙종 예종
명의태후 유씨 경화왕후 이씨 · 문경태후 이씨 · 문정왕후 왕씨 · 숙비 최씨
상당후 왕필 · 원명국사 징엄 · 대방공 왕보 · 대원공 왕효 · 제안후 왕서 · 통의후 왕교 · 대령궁주 · 흥수궁주 · 안수궁주 · 복령궁주 승덕공주 · 흥경공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인종 의종 명종
폐비 이씨 · 폐비 이씨 · 공예태후 임씨 · 선평왕후 김씨 장경왕후 김씨 · 장선왕후 최씨 광정태후 김씨
대령후 왕경 · 원경국사 충희 · 승경궁주 · 덕녕궁주 · 창락궁주 · 영화궁주 효령태자 왕기 · 경덕궁주 · 안정궁주 · 화순궁주 왕선사 · 왕홍기 · 왕홍추 · 왕홍규 · 왕홍균 · 왕홍각 · 왕홍이 · 연희궁주 · 수안궁주 }}}
신종 희종
선정태후 김씨 성평왕후 임씨
양양공 왕서 · 효회공주 · 경녕궁주 창원공 왕지 · 시령후 왕위 · 경원공 왕조 · 대선사 경지 · 충명국사 각응 · 안혜태후 · 영창공주 · 덕창궁주 · 가순궁주 · 정희궁주
{{{#!wiki style="margin: -16px -11px" 강종 고종 원종
사평왕후 이씨 · 원덕태후 유씨 안혜태후 유씨 순경태후 김씨 · 경창궁주 유씨
수령궁주 안경공 왕창 · 수흥궁주 시양후 왕이 · 순안공 왕종 · 경안궁주 · 함녕궁주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제국대장공주 · 정신부주 · 숙창원비 김씨 계국대장공주 · 의비 · 정비 · 순화원비 홍씨 · 조비 · 순비 허씨 복국장공주 · 조국장공주 · 경화공주 · 명덕태후 홍씨 · 수비 권씨
강양공 왕자 · 소군 왕서 · 정녕원비 · 명순원비 세자 왕감 · 덕흥군 용산원자
충혜왕 공민왕 공양왕
덕녕공주 · 희비 윤씨 · 화비 홍씨 · 은천옹주 임씨 휘의노국대장공주 · 혜비 이씨 · 익비 한씨 · 정비 안씨 · 신비 염씨 순비 노씨
석기 · 장녕공주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제28대 국왕
충혜왕 | 忠惠王
파일:pan004710.jpg
영릉 전경
출생 1315년(충숙왕 2년) 2월 22일
즉위 1330년 2월 18일
사망 1344년 1월 30일 (향년 28세)
악양현
(現 중국 후난성 웨양시)
능묘 영릉(永陵)
재위기간 고려 왕세자
1328년 2월 이전 ~ 1330년 2월 18일
고려 제28대 국왕
1330년 2월 18일 ~ 1332년 3월 21일 (2년)
고려 제28대 국왕 (복위)
1339년 5월 3일 ~ 1344년 1월 7일[1]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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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정(禎)
부모 부왕 충숙왕
모후 공원왕후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배우자 덕녕공주, 희비
자녀 3남 1녀
종교 불교
몽골식 이름 부다시리(寶塔失里)
시호 고려: 헌효대왕(獻孝大王)
: 충혜왕(忠惠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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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호3. 생애4. 평가5. 가계도6. 대중매체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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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8대 군주.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휘는 '정'(禎). 몽골식 휘는 '부다시리'(寶塔失里). 제27대 충숙왕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제31대 공민왕의 친형이다.

2. 시호

충혜왕(忠惠王)이라는 시호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다. 충(忠)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고려 왕들에게 원에 대한 충성을 보이라며 공통적으로 준 글자이며, 뒤의 혜(惠)는 왕의 행실상 좋은 시호를 줄 수는 없으니 마지못해 '은혜 혜(惠)' 자를 썼다고 한다. 사실 충혜왕뿐만 아니라 한중사에서 시호에 '은혜 혜(惠)' 자가 들어간 군주는 심각하게 무능했거나 아니면 아예 사이코패스였거나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2], 충혜왕은 후술되어있듯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이 저지른 막장 짓을 보면 금나라의 해릉양왕이나 수나라의 양제 등 시호에 양(煬)이 들어간 군주들의 모습이 보일 지경이다.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獻孝大王)인데 뒤의 효(孝) 자는 효성스러웠다고 형식상 올리는 시호이며, 앞의 헌(獻) 자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나 고려 제14대 헌종과 같이 연약한 군주들에게 올린 시호였다. 자주적인 시호를 올린 고려 국왕은 공민왕인데 비록 자신의 형이지만 그의 악행이 커버가 안 돼서 이런 시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충혜왕 따위와 고려 헌종, 후한 헌제를 비교하는 것은 후자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지만.

3. 생애

세자 시절, 절 지붕 위의 새를 잡기 위해 불교 사찰방화를 한 뒤 도망가거나[3]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고, 을 즐기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아들의 만행을 듣게 된 부왕인 충숙왕으로부터
"예끼 이놈!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
라고 욕을 들을 정도였으나 기가 차서 훈계하는 아버지 앞에서조차 매우 삐딱하게 굴며, 말로만 고친다 거짓말하고 실제로 고치지 않았다.

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다가 마침 원나라로 가던 부왕과 황주에서 마주쳤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몽골인들의 유목민식 인사인 '호례'(胡禮)[4]를 행하는 아들에게
"네 아비[5]어미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째서 내게 호례를 행하느냐? 그리고 옷은 또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
라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퍼런 호통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한다.

1330년 7월 무자일, 낭장 김천우가 원나라에서 돌아와
"원 조정에서 전 정동행성 좌우사 낭중 장백상의 건의에 근거해 고려에 장차 행성을 설치할 것이라고 한다."
고 보고했다. 이에 충혜왕은 즉각 원나라 태사 우승상 킵차크 엘테무르(연첩목아)에게 서한을 보내
"장백상의 간교한 말을 믿지 말고, 황제의 의사를 잘 인도하여 고려가 스스로 풍속을 지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유업을 편안히 계승하게 해달라"
고 청원했다. 이에 엘테무르가 원 문종(제8대) 투그테무르 칸에게 상주해 고려에 행(중서)성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중지했다고 하는데 이는 충혜왕이 즉위한 이후, 최초로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재위 원년(1331) 정월 임진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2월 갑인일 왕이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무오일 공주의 생일을 맞아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을숙일 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3월 임인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4월 신유일 왕이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계미일 왕이 폐행(嬖幸)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해
물놀이와 격구(擊毬)를 구경했다.
신축일 왕이 폐행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물놀이를 구경했다.
6월 기미일 왕이 광덕사(廣德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
7월 병자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8월 병인일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10월 계해일 왕이 도성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병인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재위 2년(1332) 정월 병술일 밤에 왕이 폐인(嬖人) 양선(梁宣), 송명리(宋明理)
등을 데리고 평복 차림으로 몰래 거리를 쏘다녔다.[6]
2월 정미일 왕이 서해도(西海道)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재위 원년 당시 사냥 기록이다. 놀랍게도 이것이 《고려사》 충혜왕 원년 기록과 2년째 기록의 전부이다.[7]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서 그냥 하나 쥐어잡고 아무 산이나 가서 짐승 쏴잡는 수준을 생각하며, 그 정도 취미 생활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평민이나 지배 계층이라도 어지간한 집안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국왕이 사냥을 나가면 경호를 담당할 많은 호위병, 국왕과 신하들 및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여러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 도구 및 기타 비품을 운반할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경계를 설 경비병, 국왕의 사냥을 성공적으로 도와줄 전문 사냥꾼, 사냥감을 찾거나 몰아야 하는 몰이꾼 등 최소 수백 명의 수행원이 필요하다. 그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숙식하려면 당연히 급료, 물품 등의 경비가 장난아니게 든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사냥 풍속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냥이란 건 사실상 당시의 워크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고, 나가 놀기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 왕 노릇한 것이라곤 1331년 4월 경인일에 쌍성, 여진, 요양, 심양 등으로 흘러 들어간 경인 5도의 고려 백성들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서 원나라에 보낸 것이었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정사에는 관심도 없고, 여색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겼다.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
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5월 병인일(1339. 5. 8),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1339. 5. 12),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정을 통했다.
5월(1339. 5. 13)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월 갑오일(1339. 8. 8), 경화공주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복위 2년 3월 초하루(1341. 3. 1),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을 보내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때려 죽였다.
복위 2년 11월(1341. 11. 16)에는 날마다 사냥을 다니다 겨울이 되어 여의치 않자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가서 그의 처 이씨를 강간했다.
복위 2년 11월(1341. 11. 25) 전에 때려죽인 바 있는 박이라적의 첩과 상간했다.
복위 4년 3월(1343. 3. 13) 재상 배전의 집에서 그의 처와 그 처의 아우 김오의 처를 번갈아 간음하기도 했다[8]

특히 충혜왕은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전부"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는데,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할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들을 겁탈했다. 충혜왕이 겁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2명으로 수비 권씨(壽妃權氏)와 당시 충숙왕의 정비(正妃)격인 위치에 있었던 경화공주[9]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할 때 모양이 진짜 막장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1339년 8월 8일, 경화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경화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10] 등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지를 묶고 범했다. 이후 경화공주가 원통하여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는데, 이때 충혜왕이 연안군 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여 경화공주가 말을 구하지 못하게 했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충혜왕에게 겁탈당한 경화공주의 밀고로 1339년 8월 24일 조적 등 심왕 왕고의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충혜왕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조적의 난) 그 뒤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유폐시켰다.

개막장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나라에서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경화공주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난 후에야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수치를 두린에게 말하게 되었고, 1339년 11월 12일,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나라로 압송했다. 충혜왕은 자신의 책봉을 허락한다는 희소식을 알리기 위해 찾아온 원나라 사신들에게 붙잡혀 원나라로 압송당하는 꼴을 당한 것이다. 끌려간 충혜왕은 투옥되었지만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한 후 1340년 3월, 대부(大夫) 메르키트 토크토아(脫脫, 탈탈)가 원 혜종에게 상주한 덕분에 석방되었다. 충혜왕의 입지가 원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것 외의 기록들은 링크를 참고하자.#

이처럼 흉악무도한 충혜왕에게도 무서운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했는데, 원나라 사신 실덕이라는 자였다. 충혜왕이 한창 새 궁궐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시기에 몸소 담장에 올라가서 공사를 감독했고,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두어 들였는데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기한을 늦추는 자가 있으면 몇 곱의 베를 벌로 받았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시달렸고, 소인배들이 이 때를 틈타 치부에 열을 올렸으며, 충직한 인사들은 배척당해 한 번만 바른 말을 하면 살육을 당하기에 두려워하여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판국에 1343년 7월 원나라에서 오던 사신 실덕은 길거리에 나부끼던 방문에
"나무을 기한 전에 바치지 않는 자는 를 징수하거나 으로 귀양을 보낸다."
고 씌어진 것을 보고 대노하였다. 충혜왕이 농사가 한창인 시절에 백성들을 동원해 부역을 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꼴을 보고, 실덕은 곧 귀국해 원 혜종에게 보고하려 했다. 이에 충혜왕은 채하중을 친히 보내 혜종에게 보고하지 말 것을 간청했는데, 일국의 왕이 타국의 일개 사신에게 비굴하게 간청해 선처를 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중 최고를 달리던 기철이 원 혜종에게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1] 이 둘이 한국사에서 1, 2위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막장 인성을 가진 폭군은 간신이 아무리 아부한다해도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숙청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충혜왕은 의외로 눈치는 빨랐는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출두를 거부했다. 그러자 화가 난 원나라 사신단의 도치(타적), 베시게(별실가), 나이주(내주) 등이 고용보로 하여금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행성 내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한 것이라 보자마자 사신들은 충혜왕에게 발길질을 했고, 환관 고용보는 이를 본체만체했으며, 사신단의 호위병들은 압송이라는 이유로 주위에 칼부림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12] 이 날이 1343년 11월 22일(음력) 갑신(甲申)일, 1343년 12월 9일(양력)이었다(정동행성 사변). 이에 따라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왕권이 정지되었다. 시종을 드는 사람이 없고, 그를 증오한 원나라 사신들이 시종을 드는 사람을 줄 생각이 없었기에 충혜왕은 직접 짐을 들고 압송되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관리에게[13]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
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도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14] 관리가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
고 일러바치자 도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게 신하의 도리냐?"
라며 쇠자로 초주검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원나라 혜종(순제)은 압송된 충혜왕에게
"그대의 죄는 너무나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
는 식으로 말해서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온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것인데다 당시 몽골인들이 땅에 피를 흘리는 처형 방식을 극도로 금기시한 것을 감안한다면 충혜왕의 행동들에 대해 원나라 황제와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15]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제26대)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두 번째 고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유배된 것이었고, 나중에라도 이용 가치가 있어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충혜왕은 막장이라서 유배된 것이었기 때문에 빨리 죽어 줄수록 고려와 원나라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게양현(揭陽縣)[16]으로 귀양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17]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다. 항간에는 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도 있고, 독을 탄 술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갑자기 사망한 걸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게 확실해 보이는데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고려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時還。
왕은 수레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온갖 고초를 겪다가 게양에 못 이르러 악양현에서 훙서하였다(죽었다). 어떤 사람은 짐독(鴆毒)에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되살아나는 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이전에 궁중과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아야마고지나 이제 가고 나면 언제 오나."라고 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악양망고지난(악양에서 죽는 신세) 오늘 가면 언제 돌아오나."로 뜻을 풀이했다.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1344년)

그나마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영릉'(永陵)에 안장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충혜왕에게 겁탈당했던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서 저승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제29대)과 충정왕(제30대)으로 즉위했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며,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모로 진정한 막장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 사람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18]를 챙겼으며 를 도축[19]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 -총서-

4. 평가

사실 도덕적 측면에선 막장성이 그 유명한 연산군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사이코패스 왕이었지만, 21세기 들어선 정치 운영과 정책적 측면에선 또 일부 개혁적 요소도 있었다는 식의 약간의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에 역대 '충(忠)' 자 돌림 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20]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21]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22]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23]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24]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충혜왕의 이런 성향은 어찌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제25대)이나 아버지 충숙왕(제27대) 같이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에도 원나라의 압박이나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 왕들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이나 여색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한 풍속에 빠져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켜 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왕인 우왕(제32대)도 어렸을 때부터 권신 이인임 등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지는데 그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과한 행적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25]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5. 가계도

6. 대중매체

7. 기타

흐리누거 괴어시든 어누거 좃니져러
젼ᄎᆞ젼ᄎᆞ로 벋니믜 젼ᄎᆞ로
셜면ᄌᆞᆺ 가ᄉᆡ론 ᄃᆞᆺ 범그려셔 노니져

(정신이) 흐려지게 누그러져 사랑하신다면 얼었다가 누그러지듯이 쫓아다니세
까닭 까닭으로 벗님의 까닭으로서
풀솜의 가시인 듯 뒤섞여서 노세
<금합자보> - 평조북전
누은들 ᄌᆞᆷ이 오며 기ᄃᆞ린들 님이 오랴
이제 누워신들 어늬 ᄌᆞᆷ이 ᄒᆞ마 오랴
ᄎᆞᆯ하로 안즌 곳에셔 긴밤이나 새오쟈

누운들 잠이 오며 기다린들 님이 오랴
이제 누우신들 어느 잠이 금방 오랴
차라리 앉은 곳에서 긴 밤이나 새우자
<해동가요 박씨본>
空房을 겻고릴동 聖德을 너표릴동
乃終始終을 모ᄅᆞᄋᆞᆸ건마ᄅᆞᄂᆞ
當시론 괴실ᄉᆡ 좃ᄌᆞᆸ노이다

빈방을 겨루려 하는 둥 성덕을 넓히려 하는 둥
나중과 첫과 끝을 모르옵건마는
당신은 사랑하시므로 쫓으옵나이다
<금합자보> - 우조북전
ᄋᆞ자 내 黃毛試筆 墨을 뭇쳐 窓밧긔 디거고
이제 도라가면 어들 법 잇것마ᄂᆞᆫ
아므나 어더 가뎌셔 그려보면 알리라

아차, 내 족제비털 붓을 묻히고 밖에 떨어졌구나
이제 돌아가면 얻을 수 있겠지만
아무나 얻어 가져서 그려보면 알리라
<청구영언 진본>
아소 님하 遠代平生애 여힐ᄉᆞᆯ 모ᄅᆞᄋᆞᆸ새
아 임이여 평생토록 여읠 줄 모르옵사이다
<만전춘>[29]

[1]고려사》에서는 충혜왕이 사망한 날까지 재위한 것으로 분류한 뒤 '유년칭원법'을 적용하여 충혜왕 후5년 기록까지 있지만 충혜왕 후5년에는 충혜왕이 2월에 죽었다는 기록과 사관의 평이 기록되어 있다. 1343년 음력 11월에 재판을 받기 위해 원나라로 끌려갔으며, 1343년 12월 계축일에 중국 남쪽 변방 게양현으로의 유배 판결을 받고 이듬해 초 사망했다. 여기서는 죄를 지어서 유배가 확정된 시점까지를 재위 기간으로 분류한다.[2] 원래는 시법상 '은혜 혜(惠)'는 좋은 시호에 속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국시대 진나라의 명군인 혜문왕과 조나라의 혜문왕. 그러나 뒤로 갈수록 남용되면서 의미가 나빠지고 퇴색되었다.[3] 당시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다. 국가에서 잘못한 절이나 승려를 처벌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런 거랑은 얘기가 다르니 논외. 숭유억불을 행하던 조선에서조차도 절의 기물을 파손하거나 스님들에게 막말한 정도였지 절 자체를 방화를 한 선비들은 막장행동으로 취급받고 손가락질 받았다. 게다가 왕실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중에는 왕릉을 관리하거나 명복을 빌어준다는 명목으로 왕실과 직접적으로 비호받는 절들도 있어 이런 절들은 유생들이 얼씬을 못했다. 문제는 조선 시절도 아닌 고려 시절에, 그것도 세자라는 인간이 저런 짓을 저지른 것(...).[4] 선 채로 두 손을 모으고, 인사말을 한 다음 모은 손을 유지한 채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어앉고, 팔꿈치를 들어올리며 허리를 낮춰 절하는 유목민식 인사법이다. 부족에 따라서는 이때 들어올린 양쪽 팔로 상대방의 무릎을 감싸안아 윗사람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이후 《국조오례의》에서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5] 충숙왕 본인을 가리킨다. 충숙왕은 역대 고려 국왕들 중 고려인의 피가 가장 적은 왕이었는데도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나름 본인이 고려인이라는 자각이 뚜렷했던 것 같다.[6] 夜 王率嬖人梁宣宋明理等 微行。쏘다녔다는 건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잠행하러 간 게 아니라 그냥 놀러 나간 거다.[7] 2년째 기록에는 왕이 끌려가서 잡혀간 후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왕으로써 한 역할은 저게 전부이다.[8] 그런데 한가지 웃기는 사실은 제멋대로 무수한 여자들을 강간, 간음했으면서도 본인 귀에 강간 사건이 보고되면 당사자를 무참히 죽여버리거나 귀양보냈다는 것이다. 만호 전찬이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자 형장을 쳐서 귀양을 보냈으며, 불량배 봉골 등 3명이 임금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주부 공보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처를 간음하자 행성에서 잡아 죽였다. 또한 복위 4년 10월, 강간범 3명을 잡아 돌로 눌러 죽였다. 하지만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백성들은 그리 동조하지 않았는지, 오죽하면 현도효라는 자가 독약으로 충혜왕을 시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사건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1341. 윤5. 18). 또 한 번은 신하 최원이 "진사 우물골이란 곳에 예쁜 처녀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충혜왕이 최원과 함께 그 집에 가서 처녀를 찾았더니, 주인집 노파가 "저의 집에는 본래부터 처녀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왕은 노파가 숨기는 줄 의심하였고, 동시에 최원이 자신을 속였는가도 의심하여 둘 다 죽였다.[9] 충숙왕은 복국장공주 사후 조국장공주와 혼인했는데 조국장공주도 요절했고, 이후 혼인한 사람이 경화공주다. 조국장공주, 경화공주와는 정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혼인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경화공주는 두 번째 계비에 해당한다.[10] 간신이었지만 나중에 임시로 고려의 국정을 맡은 원나라의 환관 고용보와의 친분으로 무사했다.[11] 이후 고용보는 조일신의 난 때 도망친 후 숨어 살다가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유는 충혜왕 폐위에 일조했기 때문이었다. 기철 역시 공민왕 입장에서 가장 커다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1356년에 일어난 병신정변때 피살당했으며, 자기 측근들과 행주 기씨 일가까지도 한꺼번에 거의 전부 죽임을 당했다.[12] 국왕을 호위하는 근위병들이 압송을 저지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13] 기록에는 지금의 평안남도 숙주(肅州)의 지방관을 맡고 있었던 안균(安鈞)으로 되어 있다.[14] 원 간섭기 시절 고려 국왕들은 태조 칭기즈 칸의 방계 혈족으로서 원나라의 황족에도 해당했다. 몽골인들에게 알탄 우룩, 즉 황금씨족이 가지는 권위와 의미를 생각하면 도치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15] 웃긴 사실은 당시 원나라의 황제였던 혜종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원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간 암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충혜왕과는 달리 감안할 부분이 있다면 어렸을 적부터 온갖 고생을 했다는 점이 있지만 실권을 잡은 이후에도 주색 잡기에만 열중했으니 옹호해줄 여지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성은 혜종이 충혜왕보다는 나은데 둘다 암군이었어도 폭군인 충혜왕보다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선은 지켰다.[16]중국 광둥성 제양시로, 원나라 황족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이었다.[17] 현 중국 후난성 웨양시[18] 참고로 이슬람교에서는 이자를 죄악으로 본다. 수쿠크 참조. 다만, 실물자산의 이자니만큼 꼭 이슬람교에서 죄악시하는 이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단지 수쿠크를 이자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19] 이슬람식 도축법은 할랄 푸드를 참고. 악행을 열거하는 내용 중에 왜 뜬금없이 소고기 얘기가 나오나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농경 사회에서 고기 먹자고 소를 도축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조선시대만 봐도 답이 나온다.[20]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21]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22]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 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을 강화할 때 임협 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23]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24] 물론 어느 정도 충혜왕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25] 유명한 시조인 <다정가>를 지은 그 인물. 이인임의 할아버지.[26] 흔히 명 태조 주원장이 공신 세력을 때려 잡았기 때문에 아랫 사람들에게 무자비했을 것이라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실상 자신에게 별 위협이 안 되는 사람들, 특히 적국 군주의 자제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는 북원 소종 아유시리다라 칸의 장남이었던 마이딜리발라(매적리팔라)를 살려놓은 걸로도 모자라 숭례후라는 작위에 봉해 집을 하사하는가 하면 끝내 소종에게 돌려보내는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27] <태조 왕건>에서 왕건의 아역 역, <무인시대>에서 고종 역.[28] 거기에 최중길의 부친 최이찬의 충신의 언급에 의하면 그 전에도 다른 신하들의 아내를 강간해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강간당한 여자들은 설윤의 부인 황씨와 박귀홍의 둘째 부인 윤씨가 있다고.[29] 만전춘의 끝부분인데, <북전>이 원형이라는 설도 있어 싣는다.